시린 자흐로미

변화의 계기

2022.09.13

자흐로미 씨는 변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계기가 있으신가요?

너는 나를 바라본다.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멍한 눈빛을 하고. 그것은 충격이었을까, 흔들림이었을까, 매혹됨이었을까. 나는 다시 너를 본다. 텅 비어있는, 비탄에 잠겨있는 눈빛을 하고. 그것은 숨기려 했으되 숨기지 못한 마음이다. 감추려 했으되 감추지 못한 감정이다. 아, 가슴이 아려온다. 또다시 죄악감이 나를 집어삼키려 깊은 곳으로부터 올라온다, 나의 변화는, 나의 후회와 너무도 깊이 연결되어 있기에. 변화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다시금 나의 죄를 언급해야 했기에.

 

계기라, 글쎄.”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허공을 올려다본다. 시선의 끝에는 벽에 자리한 초상화들이 있고, 섬세하게 조각된 복도의 장식들이 있다. 그러나 내가 보는 것은 그들이 아니다. 초상화도, 장식도, 너도 아니다. 그저, 여전히 내 눈앞에 있는, 너무나도 생생하여 현실을 침범하는, 나의 과거. 단지 그것만을 응시하며.

 

“나는, 한 번 죽었어.”

모랫빛의 건물을 기억한다. 야속할 만큼 푸르렀던 하늘도. 내리쬐는 강렬한 태양빛 사이로 나는 비틀대며 걸었다. 차가운 사막의 밤을 나는 신음하며 버텼다. 끝의 끝에서, 무릎이 무너지고, 몸이 기울어지고, 그렇게, 털썩. 주저앉아버릴 때까지. 

“내 최후는 비참했지. 복수는 이루지 못했고, 돌팔매질을 당하는 떠돌이 개처럼 쫓겨다녔으니까.”

모두에게 배척받았고, 모두에게 내쫓겼다. 이란에도, 영국에도, 내가 있을 자리는 없었다. 마법 세계에도, 머글 세계에도 나는 속할 수 없었다. 나는 두 세계로부터 사형을 언도받았으며, 두 세계로부터 전부 도망쳐야 했다. 그들이 나를 죽이지 못하도록, 구차한 생을 이어갈 수 있도록. 

그러나 나는 이야기 속의 방랑자가 아니었다. 단지 세계를 건널 수 있는 장화 하나만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영원히 세계로부터 달아날 수는 없었다. 아무도 없이 홀로는 살아갈 수 없었다. 불가해한 재해가 되고자 했으나 그럼에도 나는 사람이어서. 너무나도, 사람이어서.

“그거 알아? 사람에게는 기댈 곳이 필요해. 그것이 신념이 되었건, 사람이 되었건, 장소가 되었건, 행위가 되었건, 물건이 되었건, 간에 말이야.”

나는 당신을 향해 씁쓸히 미소짓는다. 그것은 나 자신을 향한 조소.

“나에게는, 증오가 그런 것이었어.”

무너져내리는 일상 속에서 부여잡을 만한 것은 증오밖에 없었다. 매일매일이 장례이자 추도인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간절히 붙잡을 것이 있어야 했다. 삶의 의미. 삶의 목적. 그럼에도 제가 죽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 생을 놓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 설사 다른 이들을 해치는 것이 된다 하더라도―.

“나는 정당하다고 생각했어, 아테나. 그들이 먼저 나를 상처입혔고, 그들이 먼저 나를 저주했고, 그들이 먼저 전쟁을 시작했으니까. 나는 한번도 그들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어. 그들은, 언제나 내게 있어서 ‘집단’이었지. 그런데,”

나는 눈을 감는다. 자신을 향해 내밀어지던 손길. 망설이면서도 괜찮냐고 묻는 목소리.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건네지던 다정한 환대.

“봐 버린거야. 그 속의 사람들을.”

마왕의 부하들에게 쫓기게 된 뒤로, 내가 피신처로 삼았던 곳은 우습게도 머글 세계였다. 그래. 내가 그리도 저주하던 머글들에게, 나는 몸을 의탁했다. 그들은 일단 숫자가 많았고, 마법에 대해 무지했기에 스스로를 감추기에는 제격이었다. 그저 몇 명의 기억을 조작해서 내가 그들의 가족이라고, 친구라고 믿게 만들기만 하면 그 다음은 쉽게 풀렸다. 나는 그들의 호의를 이용했고, 그들의 환대에 빌어 목숨을 유지했다. 그렇게 그들 사이에 섞였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그 사람들은, 너무나도.

평범하더라. 그냥, 나와 같은 사람이더라. 악마일 줄 알았는데. 내 가족을 죽인 그 사람들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고 믿었는데.”

같은 비극을 겪은 사람들이었다.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나라가 찢어지고, 고향에서 쫓겨나고, 매맞고, 죽임당하고, 그렇게 밀려 밀려 영국까지 온. 고향을 증오하되 사랑하고, 때로는 그곳으로 돌아가기를 꿈꾸는 이들. 하지만 결코, 돌아갈 수 없음을 아는 이들. 왜냐하면, 그들의 고향은 이미 찢어지고 갈라지고 무너져내렸기에.

아, 나는 그것을 너무도 잘 알았다. 그것은 나의 이야기였다. 나의 비극이었으며, 나의 아픔이었다. 처음이었다. 그것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긴 것은. 처음이었다. 이해받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것을 이해받은 경험은. 하지만 그 이해는 거짓 속에 세워진 것이어서. 그들을 만난 것은, 이미 제 손에 수많은 피를 묻히고 난 뒤여서.

“그러고 나니까 보인 거야. 내가 누구의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나는 그 거울을 떠올린다. 증오로 가득한 얼굴을 한 나 자신. 광기로 불타오르는 얼굴을 가진 나 자신. 거기에서 나는 무엇을 보았던가. 내 가족을 해치고, 나의 언니를 죽이고 미소짓던 이들을 보지 않았던가. 이제 죽이는 것은 나였고, 죽임당하는 것은 저들이었다. 그들의 아픔은 나 자신의 것이었으되, 동시에 나는 그들을 향해 새로운 아픔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새로운 공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단지 이해받을리 없다는 절망과, 그렇다면 너희도 전부 나와 같은 곳에 떨어지라는 증오에 사로잡혀―.

“내가 복수라는 이름 아래에서, 무엇을 만들어내고 있었는지.”

아, 나는 나를 이 구렁텅이에 밀어넣은 이들과 얼마나 달랐던가. 다르지 않았다. 전혀. 

나는 시선을 내린다. 고개를 돌려 너를 본다. 담담한 목소리로, 지쳐버린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내 미움은 잘못되었어. 내 증오도 잘못되었지. 나는 단지 내 비극에 사로잡혀서 또 다른 비극들을 양산하고 있었던거야. 이미 내쫓기고 내몰린 사람들을, 또다시, 그렇게 만들고 있었던거야.”

생각했다. 나를 환대하는 이 사람들도, 나로 인해 죽음을 본 적이 있을지. 생각했다. 내가 증오하고 죽였던 이들 중에, 너희들의 이름도 있을지. 그렇다면 나는, 이미 비극을 겪은 너희에게 또 다른 비극을 선사했을지. 너희가 믿는 신이 다르다는 이유로,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로,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로 죽임당하고 매맞고 배척당할 때. 나는 너희에게 그 위로 머글이라는 이유를 덧씌워버린 것은 아닐까. 

차곡차곡, 계기가 쌓였다. 죄책이, 쌓였다. 

나는 허공을 본다.

도망치고 싶었어.”

그래. 그래서 나는 도망쳤다. 그 집으로부터 달아났던 것처럼, 그 거울로부터 달아났던 것처럼, 나를 친구라 부르던 이들로부터, 달아났던 것처럼. 다시 한번 나는 달렸다. 그들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져서, 나는 차라리 다시 고독으로 돌아가기를 택했다. 최후의 순간까지, 나는 그렇게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쳤다. 달아났다. 달렸다. 그리고 그 끝에서 내가 본 것은.

다시금 시선을 내린다.

“하지만 도망칠 수 없더라.”

아라비아의 모든 향유를 가져온다 해도, 이 손의 피는 결코 씻지 못하겠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맺어진 생이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끝났어야 할 이야기였다. 그러나 흐려지는 눈을 기어코 다시 떴을 때, 나는 11살의 몸으로 돌아가 있었다. 앳된 얼굴, 양갈래로 땋인 머리, 작아진 손. 마치 모든 것이 꿈이었던 것처럼, 환상이었던 것처럼. 기억은 선명했으되, 죄악도 선명했으되, 모든 결과는 사라져버렸다. 단지 과정만이 남아 나를 괴롭혔다.

“죽음으로도, 도망칠 수 없더라. 그래서.”

끝없이 후회했다. 괴로움에 몸을 떨었다. 밤마다 악몽을 꾸었다. 내가 죽인 사람들이 나의 목을 졸랐다. 내가 저지른 죄가, 나의 발을 붙잡았다. 헤어나올 수 없는 바다에 빠진 사람처럼 나는 허우적대었다. 무너져내렸다. 단지, 그럼에도.

“그래서, 이번에는 다른 선택을 하고 싶어.”

나는 조용히 대답한다. 그것은 내가 가진 유일한 희망이었다. 증오에 휩싸였고, 후회에 내던져졌다. 사람이 삶을 버티게 하는 모든 이유들은 이제 내 곁에서 사라졌다. 그렇다 해서 죽어버릴 수도 없었다. 나의 죄악이 그것을 허용치 않았다. 내가 감히 안식으로 도망치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꿈꾸었다. 끝의 끝에서 내가 부서져버리더라도― 부디. 다른 결말을 맞이할 수 있기를. 다른 이야기를 쓸 수 있기를.

나는 너를 돌아본다. 쓰디쓴 웃음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그것 뿐이야.”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