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린 자흐로미

공통성

2022.10.22

금지된 숲은 추웠다. 전 날 세차게 쏟아진 비로 땅은 여전히 젖어 있었고, 발 밑의 낙엽은 진흙처럼 철퍽 소리를 내며 뭉그러졌다. 흐린 구름 사이로 해가 새어나왔다. 그러나 사위는 여전히 어두침침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지금의 현실을, 어느 쪽이 승리하든 간에 우리는 구원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보여주듯이. 왜냐하면 전쟁이란 그것이 제아무리 옳은 명분이더라도, 근본적으로 사람이 사람을 향해 낼 수있는 가장 잔혹한 폭력이기 때문에. 영혼에 상처를 남기는 행위이기 때문에―.

“너는 그동안 어떻게 이걸 전부 버텨낼 수 있었던 거야? 시린.”

나는 조용히 너를 보았다. 나무가 드리운 그림자 안에 가려진 채로 너는 절망하고 있었다. 네 눈 아래에는 어두운 자국이 깊이 패였고, 내뱉는 말 속에는 비탄이 가득했다. 슬픔이 가득했다. 너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네 안을 거세게 타오르던 불꽃은 검어지고, 일그러지고, 부서져내렸다. 너의 신념은 무너졌다. 너의 믿음은 흩어졌다. 고통이 가득한 언어들. 이해할 수 없는 재난을 마주한 이가 보이는, 무력감. 절규. 울분. 애한.

외상 사건은 세상이 안전하고, 자기는 가치 있으며, 세계 질서에는 의미가 있다는,
피해자가 가지고 있었던 기본적인 가정들을 파괴한다.¹

펼쳐진 신문 속에서 너의 이름을 읽었던 순간을 기억한다. 내가 단단히 디디고 있었던 땅이 거칠게 흔들렸다. 순간 내 주변의 모든 것이 마치 환상이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나는 다시 그곳에 있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누군가 날카로운 소리로 비명을 질렀고 이어서 단발적인 총성이 들렸다. 저주받을 것들. 신께서 너희를 용서치 않으리―. 우리를 비웃고, 증오하던 그 목소리. 몸뚱어리가 쓰러졌다. 하나, 둘. 내 눈앞에서, 웃고 뛰놀던 정원에서, 모랫빛 아치 아래서, 매끄러운 대리석 위에서. 몸뚱어리가 쓰러졌다. 큰 것. 작은 것. 어린 것. 늙은 것. 남자였던 것과 여자였던 것. 피가 나의 눈 앞을 가렸다. 울음소리가 나의 귀를 막았다. 코를 찌르던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 축축하고도 끈적이던 붉은 액체….

오러국 불법 약물 추적 및 압수 부서 일원들이 머글세계에서의 임무 중 테러에 휘말려 5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생존자는 루크 칼릭스, 샐리 워넌, 레이널드 홉킨스로 모두 같은 오러국 부서 소속이며….

테러: 명사. 정치적인 목적을 위하여 조직적ㆍ집단적으로 행하는 폭력 행위. 또는 그것을 이용하여 정치적인 목적을 이루려는 사상이나 주의. 

테러: 명사. 1980년 7월과 1997년 12월에 일어난 일.

테러: 명사. 나의 언니를 죽이고, 너의 동료를 죽인 행위.

테러: 명사. 내가 겪었고, 네가 당했고, 동시에 행하였던 것.

17년의 세월. 이란과 영국이라는 지리적 거리를 뛰어넘어 우리는 서로를 마주했다. 너는 알고 있다. 나 역시 알고 있다. 네가 간 길은 내가 한 때 걸었던 길. 네가 택한 결심은 지난 내가 붙잡았던 결심. 너를 사로잡은 모든 감정을 나는 알았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나를 놓아주지 않는 감정이었다.

나는 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조심스럽게 너의 손을 펴고, 거기에 내 손을 얽어맸다. 단단히, 힘을 주어 너의 손을 붙잡았다. 네가 하늘로 날아오르지 않도록, 이 세계에서 사라져버리지 않도록, 죽은 채로 남지 않도록, 너를 움켜쥐었다.

“혼자서는 버틸 수 없어. 루크.”

공포는 언제든지 나를 사로잡을 수 있었다. 나는 두려움과 무력함의 포로였다. 기억들은 망각되기를 거부했다. 아주 작은 단서만으로도 그 날의 순간은 손쉽게 재현되었다. 나는 현실이 아닌 과거에 존재했고, 삶이 아닌 죽음에 존재했다. 

생존하는 것과 실존하는 것은 동일하지 않다. 살아남는 것과 살아가는 것은 동일하지 않다. 나는 생존했으되 실존하지 못하였고, 살아남았으되 살아가지 못했다.

“지난 생에서, 나는 오로지 증오로 스스로를 다잡았지.”

무력하게 남아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복수를 꿈꾸었다. 대상은 명확하지 않았고, 이루고자 하는 것도 추상적이기 그지 없었다. 불가능한 목표였다. 헛된 꿈이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 그러나 당시에 내게는 그것만이 유일했다. 

복수. 나를 이렇게 만든 자들에 대한, '우리'를 이렇게 만든 자들에 대한 복수. 끝간 데 없는, 머글들을 향한 증오. 그것으로 버텼다. 그것으로 살아왔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살아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이 기나긴 생을 살아낼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남을 해치고서야 제 한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괴물이었다. 남을 상처 입히고 죽이고 고문해야만 살아있을 수 있는 존재였다. 이 끝간 데 없는 증오를 쏟아부어야만, 너희들에게 들이부어야만 버틸 수 있는 재앙이었다.

“그리고 그 끝에서 나는 모든 것에 패배했어.”

나는 네게 나의 최후를 이야기했다. 황량한 정원과, 곳곳에 금이 간 기둥. 내려앉은 벽. 붉게 물들었던 연못은 메말랐고, 타일의 칠은 벗겨지고 바래 있었다. 하늘의 별은 보이지 않았다. 달 역시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나의 눈이 점차 흐려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밤하늘의 그 어떠한 것도 추악한 나따위를 비추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나는 알 수 없었다. 단지 보이는 것은 차갑고 축축한 손바닥. 붉고 검은 피로 물들어 있는….

그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추위가, 졸음이 그를 향해 밀어닥쳤다.
통증은 더 이상 그를 괴롭게 하지 못했다.
너덜너덜해진 팔도, 절뚝이는 다리도 그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마지막 숨을 내뱉는 그의 눈에 비치던 것은….

그는 조용히 속삭였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아라비아의 모든 향유를 가져온다 해도, 이 손의 피는 결코 씻지 못하겠지.”

그것이 나의 선택이 불러온 결과였다. 증오의 대가. 복수의 결말. 재앙의 마지막. 저주의 끝. 아무도 이해할 수 없으리라 여겼기에, 아무도 감당할 수 없으리라 여겼기에, 단지 홀로 증오를 불태웠다. 세상을 저주했고, 너희들을 저주했다. 그렇게 살아남았다. 그렇게 버텨왔다. 스스로를 무한히 갉아먹으며, 증오 외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로. 그래. 마치 한 자루의 검처럼 스스로를 벼려가며―.

루크. 나는 다시 한 번 너의 이름을 불렀다. 여전히 너의 손을 꼭 붙잡은 채였다.

“이해해? 나는, 버티지 못했어. 지난 생의 나는 분명 실패했지. 그것은 삶이 아니야. 단지 미루어진 죽음일 뿐.”

물론 너는 나와는 달랐다. 나는 증오로 스스로를 먹어가며 살아남았다. 그러나 너를 이끈 것은 증오가 아니었다. 너는 말했다. 그저 더욱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나는 안다. 그것은 사실이다. 너는 언제나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누군가를 위해 나서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또한 안다. 어떤 사랑은, 증오보다 더욱 큰 재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사람은 지키기 위해, 때로 보다 잔인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가족을, 집단을, 국가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사랑은 어느 순간 증오로 변질되어 버리는가….

그래서 사랑과 증오는 얼마나 다르지?

나는 시선으로 이야기했다. 나와 같은 길을 걷지 마. 사랑으로 누군가를 증오하고, 지키기 위해 누군가를 해치지 마. 그것은 결국 너 자신을 잃어버리게 할 거야. 그것으로는 버텨낼 수 없을 거야.

흔들리는 붉은 눈. 떨리는 너의 시선. 너는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리다 다물었다. 그러나 나는 읽어낼 수 있었다. 시선 속에 담긴 한 가지 물음. 

‘하지만 어떻게?’

“…하지만 네가 궁금했던 건, 아마 지난 생의 이야기는 아니었으리라 생각해. 그러니 대답할게. 내가 어떻게 버틸 수 있었는지.”

간단해. 나는 말했다. 너희가 있었기 때문이야.

내가 길을 헤메일 때, 너희는 나의 나침반이 되어주었다. 내가 망망한 바다 속에서 표류할 때, 너희는 나의 북극성이 되어주었다. 너희는 나를 받아주었다. 내게 다가와 주었다. 손을 내밀었고, 말을 걸었다. 나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나의 서투른 걸음을 기다려 주었다. 내가 다시 세상에 나아갈 수 있을 때까지. 너희를 사랑할 수 있게 될 때까지.

그렇기에 나아갈 수 있었다. 그렇기에 사랑할 수 있었다. 나는 나의 고통을 나누었다. 너희는 그 보답으로 애정을 돌려주었다. 세상과 나 사이를 가르던, 손상이 만들어낸 거대한 강. 너희들은 그 위로 다리를 놓았다. 외상을 치유하는 세 가지 단계. 나의 안전을 확보하고, 외상의 경험을 나누고, 다시 한 번 세상과 연결되는 것. 너희들이 없었다면 나는 그 중에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반복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홀로 외상과 대면할 수 없다.>²

“네가 기억했으면 해. 루크, 너는 혼자가 아니야. 홀로 모든 것을 책임지려고 하지 마. 네 고통은 유일하지 않아. 알잖아. 나도 그곳에 있어 보았어. 나도 네가 겪은 일을 알아. 네가 간 길에 나도 있었고, 네가 겪은 감정을 나도 겪었어.”

나는 너를 향해 손을 내민다.

어쩌면 때 이른 말일지도 모른다.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다르다. 이 말이 너의 마음에도 닿을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야기해야 했다. 너는 이 세상에 홀로 남겨져 있지 않다. 영원히 그 날에 머물러있지 않아도 된다. 언젠가는 그 기억을 떠나보낼 수 있다. 비록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많은 노력을 거쳐야겠지만, 너의 고통 역시 무한히 너를 사로잡지는 못할 것이다. 버티어낼 수 있을 것이다. 

믿을 수 없으리란 것을 안다. 와닿지 않으리라는 것도 않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이다.

“그러니 기대도 괜찮아. 모두를 지키려 하지 않아도 괜찮아. 도움을 구해도 괜찮아. 아니, 손을 뻗어. 도움을 구해. 너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나는 대답한다. ‘내가 여기에 있어.’

너는 말했다. 내가 가장 구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나의 손을 외면하고 내 추락을 바라고 내가 절망하는 모습 앞에서 기뻐할지도 모른다고. 나는 알고 있다. 네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고 있다. 이 세상은 분명 적대적이다. 폭력적이다. 증오와 원망과 악의가 가득하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말한다. 어쩌면 그렇기에, 이 세상에는 너를 이해할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네게 기꺼이 손을 뻗을 사람이 네 곁에 있다고. 내가, 있다고. 우리는 모두 증오의 피해자이며, 악에 상처입은 존재다. 너의 고통은 너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너는 홀로 남겨져있지 않다.

우리는 연결될 수 있다. 우리는 함께할 수 있다.

“언제나, 너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네가 이 손을 붙잡을 때까지.

이곳은 전장. 어느 순간 목숨이 꺼질지 알 수 없는 곳. 그럼에도 나는 감히 네게 말했다. 우리는 머지않아 서로에게 다시 지팡이를 겨누게 될 것이나, 그 이전에 나는 너와 대화를 하고 싶다. 

너는 언젠가의 나. 나는 또 다른 너. 이제 나는 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너와 내가 있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혼자가 될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의 고통은 특별하지도 영구하지도 않다.

나는 이 세계가 끔찍한 고통으로 가득 차 있음을 이해하고 있다. 
내 어린 시절 작은 불편은 이에 비하면 바다 위에 떨어진 하나의 빗방울과도 같다.³

그리고 나는 믿는다. 그것이 어느 때가 되었건, 너 역시도 나와 같은 깨달음에 도달하리라고. 너는 좋은 사람이니까. 근본적으로 선한 사람이니까. 죄책감이 너를 집어삼키고, 후회가 너를 평생 떠나지 않을지언정, 분명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괜찮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분명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모든 상처와 고통과 비극에도 우리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믿는 외상의 결말이다.

“알겠지? 루크.”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절대로 잊어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살아있는 한 매일 외상이 생각날 것이다. 매일 슬퍼할 것이다.
그러나 외상은 더 이상 인생의 중심이 되지 못한다.⁴

그녀는 혼자가 아님을 알게 된다.
다른 이들 또한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고통받아 온 것이다.
더 나아가, 미쳐 버린 것도 아님을 알게 된다.
외상 증후군은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인간이 보일 수 있는 일반적인 반응이다.
마침내 그녀는 이러한 상태로 영영 고통받을 운명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치유를 기대할 수 있다.
다른 이들이 치유되었던 것처럼.⁵


본문의 모든 각주 달린 문장의 출처는 주디스 허먼, 트라우마, 최현정 역, (사람의집,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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