خواهر خوانده
2022.10.17
…특별한 상대예요.
(…) 상대가 싫어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고, 뒤에서 험담하지도 않고,
상대보다도 친한 사람은 만들지 않고, 기쁜 일도 슬픈 일도 고민거리도 모두 의논하고,
서로의 마음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되는, 평생의 벗이에요.
― 모리 카오루, 신부 이야기
어릴 적의 일이다. 아직 모든 것이 부서져내리기 전, 평화로웠던 찰나의 기억. 저택의 정원, 그 한 가운데 자리한 거대한 연못. 물이 흐르는 자리마다 수풀이 돋아났고, 형형색색의 꽃과 푸르른 나무가 그 주변을 장식했다. 매끈한 모랫빛의 타일을 밟고 나는 살금살금 걸었다. 한낮의 햇빛이 연못 위에서 사르르 흩어졌다. 불어오는 바람에 잎사귀들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정원 한켠에서 맑게 지저귀는 새들과, 졸졸 소리내어 수로를 따라 흐르던 물결.
셰타르의 현이 가볍게 떨릴 때면, 잔잔한 음악이 일렁이듯 퍼져나갔다. 청아한 여인의 목소리가 그 뒤를 따라 허공 속으로 날아올랐다. 악기를 연주하는 여인이 하나. 노래를 부르는 여인이 둘. 나는 그들이 부르는 음악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느릿한 걸음에서 달음박질로, 그들의 품 안에 폭 잠길 때까지.
“엄마! 비타 아주머니!”
서로를 향해 있던 시선은 그제서야 나를 보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낭랑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한 사람은 나를 제 무릎에 앉혔고, 다른 사람은 부드럽게 나를 얼렀다.
“우리 시린, 심심했니? 엄마랑 놀고 싶었어?”
“응.”
머리를 쓸어넘기는 부드러운 손길. 나를 향한 다정한 미소. 두 사람의 애정어린 시선을 나는 기억한다. 나의 어머니와, 내가 ‘비타 아주머니’라 부르던 여인. 언제나 서로를 바라보고, 함께 음악을 노래하던 두 사람. 어릴 적의 나는 궁금했던 것 같다. 그들은 가족이 아니었다. 내가 아는 ‘친구’와도 달랐다. 친구란 단지 같이 어울리고 떠들고 뛰노는 존재. 그러나 어린 내가 보기에도 둘의 사이는 그것으로 축약될 수 없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향해 물었다.
“엄마랑 비타 아주머니는, 무슨 사이야?”
그 때, 그들의 표정이 어떠했더라? 다시금 시선이 마주치고, 빙긋이 웃음짓고. 뻗어오는 손은 서로를 슬며시 붙잡았었지. 한 쪽에 내려놓은 셰타르, 멈추어진 노랫소리.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다감한 목소리였다.
“그게 궁금했구나, 우리 시린.”
“네 어머니와 나는 결연자매خواهر خوانده란다.”
이어지는 아주머니의 설명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결연 자매?”
“그래. 친구와도, 가족과도 다른 특별한 사이지. 친구는 언약을 맺지 않고, 가족은 선택할 수 없지만, 결연자매는 달라. 서로를 선택하고, 언약을 맺는 거야. 슬픈 일도, 기쁜 일도, 힘든 일도, 즐거운 일도 함께 나누기로. 우리 사이에 다른 그 누구도 두지 않기로. 그러면 그 사람들은 평생 동안 함께하는, 유일한 벗이 된단다.”
“시린은 아직 5살인걸, 비타. 너무 어렵게 이야기한 거 아니야?”
“뭐 어때? 지금 당장이 아니어도, 언젠가는 이해하게 될거야. 분명 시린에게도 결연자매가 생길 테니까. 그렇지, 시린?”
“나도 가질 수 있어요? 결연자매를?”
“여자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어. 시린. 가져야 마땅하고.”
아주머니는 나를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 말만큼은 어쩐지 또렷하게 남아 있다. 결연자매는 다가오는 심판의 날에 천국으로 가는 문을 여는 일이니까. 그러니 언젠가는 네게도 찾아오겠지. 평생 너와 함께해줄, 너의 자매가.
“아스트리드.”
창가를 가볍게 두드리는 빗방울. 타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타오르는 나뭇가지. 방 안을 따스하게 데운 공기 속에서 조용히 너를 불렀다. 빙그르르 회전하는 분홍빛의 머리카락. 환한 웃음을 머금은 물빛 눈동자. 상냥하고도 다정한 얼굴이 나를 바라보았다. 작은 입이 열리고, 들리는 것은 부드러운 목소리.
“네, 시린.”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하루였다. 아침에 너는 내게 마멀레이드를 바른 토스트를 입에 물렸고, 나는 너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땋아내렸다. 끝에 붉은 천을 매듭짓고 나면, 우리는 잠시 작별의 인사를 했다.
다녀올게.
다녀와요.
너는 너의 가게로, 나는 나의 일터로. 너는 꽃과 함께, 나는 서류 뭉치들과 함께. 그렇게 서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우리는 다시 집에서 만났다.
다녀왔어.
다녀왔어요.
함께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창가에 기대 맑은 날에는 달과 별을, 흐린 날에는 달무리를, 비가 오는 날에는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았다. 은은히 몸을 감싸는 따뜻한 공기, 그 사이로 전해져오곤 하던 서로의 체온.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 이것이 영원히 지속되지 못하리라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언제든 깨어질 수 있는 아슬아슬한 평화였다. 죽음을 먹는 자들은 서서히 세를 불려갔고, 불온한 기운이 사방을 감돌았다. 마왕은 돌아올 것이다. 사람들은 말했다. 그것이 어느 순간이 되었든, 그는 끝내 돌아올 것이라고.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전쟁을 하게 될까.
너와 나는, 다시 그 금지된 숲에 다다르게 될까.
나는 또다시, 너를….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종종 생각하고는 했다. 너와 나의 관계에 대해서. 단순히 친구라 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감정이 그 아래 깔려 있었고, 가족이라 부르기에는 서로를 선택해 맺어졌다는 것이 달랐다. 너는 나의 악업을 함께 짊어지고자 했고, 나는 너를 세상에 단단히 묶어두고 싶었다. 너는 나의 상처를, 나는 너의 침잠을 보았다. 상처를 핥는 두 마리의 짐승처럼 우리는 서로를 향해 이끌렸다. 홀로 설 수 없는 덩굴처럼 우리는 서로를 향해 가지를 뻗었다.
그래서, 우리의 관계는 무엇으로 정의해야 할까.
온 세상이 쇄파라면 제가 당신의 뭍이 될게요.
당신을 상처 입히지 않을 양달이 될게요.
이제는 내가 부탁할게.
너를 삭아 해지게 만들지 말아 줘.
내 앞에서 사라지지 말아 줘.
내가 닿을 수 없는 하늘로 멀리 떠나버리지 말아 줘.
시린, 제 삶을 당신에게 줄게요.
당신과 이 땅을 밟고 있을게요.
그래요. 우리 함께 살아가요.
그것이 단지 끝을 알기에 내뻗은 걸음이었을지라도,
내밀어진 손바닥이었을지라도.
거기에서, 나는 빛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신은 이 생애를 어떻게 견뎠나요.
너무 외롭지는 않았나요.
용서해줘. 아스트리드.
허무가 아닌 인간이 되어요, 시린.
그럼 애정을 줄게요.
맹세할게.
신의 이름도, 모르타자 알리의 이름도 아닌
오로지 나의 이름으로.
내가 저지른 짓을 잊지 않고,
내가 만들어낸 비극으로부터 눈을 돌리지 않고.
그것을, 내 남은 생 동안 짊어지고 살겠다고.
나는 너의 재앙이자 첫울음이었다. 너는 나를 향해 내밀어진 최초의 손길이었다. 내가 너의 상처를 만들었고, 너는 내게로 와 상흔이 되었다. 너를 처음 놓아버렸던 때를 기억한다. 다시 그것을 붙잡으면 놓을 수 없으리란 걸 깨달았던 순간도.
그늘을 향해 내리쬐인 한 줄기의 빛. 두려움 어린 눈으로 빠져나가려던 몸짓. 어느 악몽 서린 밤에 저를 꼭 붙들던 작은 손. 폭풍우가 치던 날 돌아왔던 텅 빈 부엉이. 수많은 눈물과, 그만큼의 웃음. 그 모든 찰나가 모여 내 안의 아스트리드 캐롤라이나 슐랭이라는 존재를 이루었다. 너는 흩날리는 솜사탕색 머리칼, 다감하게 웃던 물빛 눈동자였으며 둥글게 펼쳐지는 갈색 치마와 보드라운 분홍 스웨터이기도 했다. 두려움에 떨던 작은 토끼. 비로소 어린아이가 된 사자.
수많은 세월이 우리의 사이로 차곡차곡 쌓였다. 셀 수 없는 감정들이 너와 나를 붙들고 엮어냈다.
그러니 그런 너를 마음에 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단지 친구라는 관계로 너를 정의내리고 싶지 않았던 것은.
언젠가는 네게도 찾아오겠지. 평생 너와 함께해줄, 너의 자매가.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어쩌면 지금이 그 때가 아닐까. 네가 바로 그 사람이 아닐까. 언젠가 내가 바라왔던,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던 바로 그 존재가, 네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너는 나를 보았고, 나는 다시 너를 보았다. 너는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분하게 내려앉은 치마. 얌전히 모아진 다리, 너는 한 손은 무릎 위에 올려놓고 다른 손으로 내 손을 붙잡았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 스웨터의 폭신한 감촉과, 그 너머로 전해져오는 온기.
“내 고향에는, 한 가지 풍습이 존재해. 결연자매라는 문화야.”
나는 너에게 이야기했다. 오로지 여성들만이 맺을 수 있는 특별한 관계. 신의 이름 아래서,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영원한 친애를 약속한다. 상대가 싫어할 행동은 하지 않고, 상대보다도 친한 사람을 만들지 않고, 기쁜 일도 슬픈 일도 고민거리도 모두 의논하고, 서로의 마음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평생의 벗이 되기로.
그것은 유일한 관계이다. 신성한 관계이다. 결연자매를 맹세한 두 사람 사이에는 친구도, 연인도, 가족도 들어설 수 없다. 이 세상에서 오직 서로를 가장 소중히 여기고, 다른 관계를 맺더라도 그 우정에는 변함이 없어야 한다. 신의 이름과 마법을 통해 묶인 언약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을 따르므로.
“그러니, 아스트리드.”
한 손으로 너의 손을 받들고, 네 앞에 무릎을 꿇었다.
“비록 이 땅에는 유서깊은 이맘의 자손을 기리는 영묘도 없고, 예언자를 기리는 경축일조차 존재하지 않지만,”
알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나의 이기심일지도 몰랐다. 이 불안정한 세상 속에서, 언제든지 깨어질 평화 가운데서, 내 주변을 맴돌며 입맛을 다시는 죽음의 곁에서, 나는 생각했다. 만일 또 우리가 서로를 잃어버리게 된다면, 그 때 부르는 이름이 단지 친구는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그 단어는 우리의 감정을, 나의, 감정을 담기에 충분치 않은 것 같다고. 그렇기에.
“―나는 너와 결연자매의 언약을 맺고 싶어.”
너의 물빛 눈동자를 눈에 담았다. 거기 비치던 감정을 알아보았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바랐을 뿐이다. 부디 네가 나와 같은 결론에 이르러주었기를. 나의 마음이 지나친 욕심이 아니었기를.
너의 손을 꼭 쥐었다. 어쩌면 내 손이 조금 떨렸을지도 모르겠다. 심장이 거세게 쿵쾅였다. 호흡이 살짝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요동치는 눈빛으로 너의 입술을 보았고, 간절함을 담아 너와 시선을 마주했다.
아스트리드. 나의 친구. 나의 가족.
나에게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 준 사람.
내 뭍이자, 나의 양달.
내게 단 하나의 의무를 쥐어준 이.
나는 네게 영원을 약속하고 싶다.
“…그래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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