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린 자흐로미

종착지

2022.10.10

번쩍. 최후의 섬광이 눈 앞에서 빛나는 순간, 시린 자흐로미는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미 무너질대로 무너진 몸이었다. 화상입고 찢기운 몸이었다. 살갖이 타는 냄새와 함께 불타는 듯한 고통이 저를 감쌌고, 그 와중에 베인 상처는 자신을 잊지 말라는 듯 찌릿거리는 통증으로 저를 쑤셨다. 다가오는 붉은 섬광이 그 순간, 차라리 자비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마지막으로 유언이나 해볼까? 사랑이 나를 구했고, 너를 구하고, 세상을 구할거야.

나는 후회하지 않아. 

들이마시고, 내쉬고, 그대로― 그만. 더 이상 내뱉어지지 않는 호흡이 흰빛의 입김이 되어 허공을 날았다. 먼저 무너져내리는 것은 이번에도 무릎. 그는 기이한 평온에 감싸여 옆으로 쓰러졌다. 머리가 땅에 닿고, 그 다음으로 어깨가 땅에 닿았다. 서서히 꺼져가는 눈빛은 그 어느 것도 비추지 못했다. 찬란하게 별이 빛나는 하늘도, 금지된 숲의 땅 위로 쌓인 낙엽도, 저를 향해 다가오는 친구들도. 

참을 수 없는 졸음이 그를 덮쳤다. 죽음과 잠은 형제간이라 했던가. 결국 죽음이란 영원한 잠과도 같았으며, 잠이란 찰나의 죽음을 맛보는 행위였다. 그렇다면 아마 이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으리라. 그러므로. 

아, 의식이 서서히 멀어져간다.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은 하나의 거대한 파노라마. 그의 일생은 한 권의 책이 되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서문은, 역시 이렇게 시작해야겠지.

세계를 사랑하지 않는 한 어린아이가 있었다.
세계로부터 상처를 입은 어린아이였다.

다시 또 그 지겨운 이야기를 해야 할까? 폭음과 비명, 총성과 죽음. 쓰러지던 몸뚱아리. 모랫빛의 건물은 수많은 핏자국으로 장식되었고, 정원 가운데를 흐르던 작은 연못은 붉게 물들었었다. 그곳에 핀 꽃과 열린 열매에서는, 분명 피비린내를 맡을 수 있었으리라. 결국 그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했다. 최초의 폭력. 세계가 그에게 가르친 첫 번째 언어. 증오. 그것을 배운 한 어린아이의 이야기.

아무도 아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 낯선 땅의 그 누구도, 아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낯선 땅의 낯선 사람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했던, 

그래서 아이는 모두를 미워하기로 했다.
자신의 울타리 밖을 벗어난, 모든 것을 증오하기로.

단지 자신이 배운 것을 충실히 실천했던,

사람이 아닌, 재앙으로서 세계에 새겨지기로.

자라지 못한 어리석은 이의 이야기.


그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추위가, 졸음이 그를 향해 밀어닥쳤다. 통증은 더 이상 그를 괴롭게 하지 못했다. 너덜너덜해진 팔도, 절뚝이는 다리도 그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마지막 숨을 내뱉는 그의 눈에 비치던 것은….

그는 조용히 속삭였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아라비아의 모든 향유를 가져온다 해도, 이 손의 피는 결코 씻지 못하겠지.”


본래라면 그렇게 끝나버렸을 하나의 비극이었다. 세상을 파멸시키고 끝내 저 자신마저도 파멸시킨 재앙의 초라한 기록이었다. 그러나 때로 운명이란 변덕을 부리는 법이어서. 다 카포를 써갈기는 작곡가처럼, 제가 쓴 소설의 끝을 찢어버리는 작가처럼, 굴기도 하는 법이어서. 그래서 그는 한 번의 기회를 더 맞이했다.

이 역시도, 시작은 다르지 않았다.

세계를 사랑하지 않는 한 어린아이가 있었다. 
세계로부터 내쳐진 어린아이였다.

단지, 달랐던 것은. 사람들이었다.

그에게 손을 내민, 수많은 사람들.

그러나 이번에는 그 곁에 사람들이 있었다.
최초도 유일하지도 않은 또 한번의 삶 속에서.

세계로부터 어긋난 단층 사이, 그 안에 숨은 그에게, 그들은 외쳤다.

외치고, 또 외쳤다.

“제 삶을 당신에게 줄게요. 당신과 이 땅을 밟고 있을게요.
그래요, 우리 함께 살아가요.”

“그러니까 어때? 친구하자, 시린.”

“그냥 너라서 손을 내밀어 준 걸거야.
내가 지금 너한테 아무 이유 없이 손수건을 내밀어주는 것처럼.”

“나중에 사람 없는 조용한 곳에서 같이 티타임이라도 가질까?”

“너의 옆에 있는 그 어떤 이가 단 한 순간 너를 보지 못해 쓰러진다면,
그 때는 내가 너에게 손을 내밀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나.”

“시린도 나랑 같은 기숙사니까, 앞으로 더!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네가… 괜찮아졌으면 좋겠어. 그것 뿐이야. 응.”

다시.

“제가 당신을 다만 미워하면, 그 미움 전에 있었던 사랑은 어떻게 되나요?
그것은 그저, 아무 의미 없는 외침 중 하나가 될까요?”

“나는 소중해서 잃고 싶지 않고, 무슨 일이 생기면 걱정되고,
괜히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게 아끼는 거라고 생각해.”

“만약 네가 또다시 같은 길로 들어서려는 낌새가 보이면,
언제든 말해주고 또 막아주마.
지난 생보다는 나도 조금 발전을 하지 않았겠냐.”

또 다시.

“계속 그렇게 나아가요. 
네가 달라진 만큼 결말도 달라질테니.”

“응, 손 정도는 내밀어 봐. 
받아줄 것 같진 않지만, 누군가 내밀어 줬다는 것에 의미가 있겠지.”

“너는 내가 본 이들 중에서도 가장 강하고 멋진 이이니. 
그러니까- 나 또한 너에게 잘해주고 싶어진다는, 이야기다.”

“그냥, 당신이 감당하는 걸 옆에서 기다릴 수 있다는 뜻이었어요.
언제고 곁에 있겠다고 했잖아요.”

문을 두드리고, 벽을 부수었다. 손을 내밀고, 그를 끌어올렸다. 허무가 아닌 인간이 되어, 마침내 삶이란 것을 살아갈 수 있도록. 애도하되 증오하지 않고, 제 과거를 마주하되 침몰하지 않으며, 죄책을 품에 안고서 앞으로 나아가도록. 

마주본 거울 안에 더 이상 가족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안쪽이 고요한 것은 아니에요.
그보다 더 무수한 사람들이 당신의 곁을 지키고 있으니까요.

소망의 거울이 비추던 것은 단지 그의 소망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지각하는 현실이기도 했다. 건네어진 손을 잡고 그는 걸었다. 후회로부터 시작된 길을 걷고, 또 걸었다. 넘어지고, 비틀대고, 무너질 때마다 붙잡아주는 손이 있었다. 기댈 수 있는 등이 있었다. 발맞추어 걸어줄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니 사람이 사람을 끝내 구하는 이야기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지만, 그것은 그의 이야기에서 중반부의 불과했다. 가장 중요한 클라이막스는, 가장 핵심되는 이야기는 따로 존재했다. (여기서 그는 잠시 멈춤 버튼을 눌렀다. 제 곁에 있던 모든 이들의 얼굴을 기억하고자 한동안 그것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마치 거울 속 소망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재생.) 

적어도 나는 시도해보고 싶어. 손을 내미는 것 말야. 
때로 사람은 그런 것만으로도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배웠으니까.

그저 후회만으로 시작한 길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자리만을 차지하던, 뻥 뚫려버린 가슴 속에 수많은 감정들이 채워졌다. 사랑과 다정. 호의와 이해. 용서. 그것은 혼자서만 간직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밀어진 손길은 그저 받아만 둘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랑이란 본디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것. 선의란 본디 순환하고 또 순환하는 것. 이 지구 아래에서 빙글빙글 돌고 도는 것이 증오와 악뿐만은 아니어서, 세상은 살아남고 존속할 수 있었다.

그래서.

돌려주어야 해. 내가 받은 모든 것을.
그렇지 않다면 내게는 괜찮을 권리가 없는 거야.

증오라는 안경으로 세계를 바라보던 어린아이는 이제 사랑이라는 또다른 안경으로 세상을 보았다. 주어진 손을 붙잡은 아이는 또다시 다른 누군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마법 정부에 들어가 분쟁 지역에서 도망치고자 하는 마법사들을 위해 행정적인 지원안을 마련했다. 불사조 기사단에 들어가 차별받고 린치당하는 머글 태생과 혼혈을 보호했다. 한 때 사람을 죽였던 손으로 사람을 살렸다. 공포를 심었던 손으로 공포를 막았다. 여전히 모자라다고 생각했지만, 부족하다고 생각했지만, 제가 받은 것을 베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므로 후회없는 삶이었다. 회한없는 14년의 생이었다.

행복했던, 두 번째 삶이었다.


무한히 이어질 것만 같던 파노라마에도 끝은 존재했다. 그는 천천히 의식의 끝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보이는 것은 단지 새하얀 공간. 어딘지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이 순식간에 사방을 가득 채웠다. 마치 좁은 터널 끝을 끝내 빠져나온 것처럼.

“이곳은….”

“알아보겠니? 이곳이 어디인지.”

소리없는 걸음과 함께 작은 형체가 다가왔다. 양 갈래로 땋아내려진 머리 끝에는 새하얀 천이 살랑이며 흔들렸고, 순진해보이는 얼굴은 밝게 미소지었다. 그 이름에 걸맞는 웃음이었다. 

그러고보니 내가 이름을 이야기 해주었는지 모르겠네. 사피야Safiya야. 우리 언니 이름. 
사피야 자흐로미. 어렸을 때, 언니가 짓는 미소가 너무 맑고 순수해서 그렇게 이름지은 거래.
사피야가 순수하다는 뜻이거든.

그는 제 앞에 선 어린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그 날의 순간으로부터 그대로 멈춘 듯한 모습. 그러나 제 언니는 더 이상 아프지도, 괴롭지도, 슬프지도 않아 보였다. 옷은 이 공간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 새하얗게 빛났고, 그 때 입었을 상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단지 남은 것은 언제나와 같은, 저를 향해 환히 웃어보이는 얼굴.

“기다리고 있었어. 시린. 내 동생.”

“같이 걸을까?” 아이는 그렇게 말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빙글― 몸을 돌리자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원을 그렸다. 38년의 생과 11년의 생을 살아온 두 사람은 그렇게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 속에서.

“언니를 만난 걸 보니, 내가 정말로 죽었나 보네.”

“어쩌면, 어쩌면 아닐 수도 있고.” 

“이곳은 일종의 갈림길이야.” 아이는 설명했다. “마지막 모험을 떠나기 전, 선택을 하는 장소지.” 

“선택?”

“응, 선택. 모험을 포기하고 영원히 현실에 남을지, 아니면 네게 주어진 최후의 길을 걸을지 고르는 곳. 아까 내가 물었지, 시린? 이곳이 네게는 어떻게 보이냐고.”

그는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까부터 느껴왔던 익숙한 기시감. 그것은 아마도―

“킹스 크로스, 역처럼 보이는데.”

“킹스 크로스?”

“영국에 있는 역이야. 학교로 가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열차를 타야 해.”

“그렇구나. 네게는 그렇게 보이는구나.”

아이는 작게 웃었다. 맑고 청아한 웃음소리. 마치 기억 속에서 그대로 걸어나온 것과 같은.

“이곳이 하나의 갈림길이라면, 언니는 이곳에서 계속 기다려온 거야? 누구를?”

“당연히 너지. 내 동생. 그렇게 헤어졌는데, 어디 안심이 되어야지 말야. 가뜩이나 나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던 꼬꼬마였는데.”

“언니가 죽은 뒤로 내게는 18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그 시간 동안, 외롭지는 않았어?”

“여기서 시간이란 큰 의미가 없어. 멈추어진 세계니까.” 

시간이란 흐름. 이곳은 그 흐름이 멈추인 곳. 모든 시간이 흐르고 흘러 도달하는 종착지. 오로지 빛만이 존재하는 이 세계 안에서, 너를 기다리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고 아이는 말했다. 1초와 1년은 큰 차이가 없었으므로. 결국 끝을 맞이하는 것은 같았기 때문에. 

그렇게 그들은 걷고, 또 걸었다. 아이는 많은 것을 물었다. “네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궁금해. 후회는 없었니? 그 날의 일들이 너를 너무 괴롭게 하지는 않았니. 부모님은 어떻게 지내셔? 다들 괜찮은 거지?” 그는 많은 것을 대답했다. “부끄러운 삶을 살았고, 그 뒤에는 그것을 돌이키기 위해 살았어. 분명 후회많은 삶이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없는 것 같아. 괴로웠지만 함께할 사람을 만났어. 부모님은, 미안. 구하지 못했어. 부디 괜찮으셔야 할 텐데….”

그리고 들려오는 경적 소리. 어느새 눈 앞에는 빛으로 둘러싸인 열차 하나가 나타나 있었다. 그것은 연기를 뿜지도, 사람들로 미어터져 시끄러운 소리를 내지도 않았지만, 그는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곳이 킹스 크로스 역이라면, 너는 분명 그 열차겠지. 매 해 자신을 호그와트로 데려다 주던. 그리고 그의 두번째 삶의 시작을 알렸던 바로 그 차량. 아이는 그것을 보며 이야기했다.

“너도 도착했으니, 이번에는 떠나볼까 해. 시린, 너는 어떤 선택을 할거야?”

“열차를 타게 된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지?”

“나도 알지 못해. 그건, 아마도 이 세계 최후의 비밀일 테니까.”

아이는 뒤를 돌아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기억 속 모습과 하나도 변하지 않은 손. 언니는 언제나 이렇게 손을 내밀곤 했었다. 작고 새하얀 손바닥을 보인 채로, 늘 이렇게 말하고는 했었다. 

“뭐 해, 시린? 같이 가자!”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 시린.”

올려다보는 차분한 눈빛. 아이는 여전히 손을 내민 채로 물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너무도 일찍 그곳을 떠나버렸지. 그러니―”

“어땠어? 네가 살아온 세상은.”

그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아픈 곳이었지. 괴로움이 가득한 곳이었고. 증오 또한 가득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사랑 역시 있었다.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는 찰나의 순간. 이해 받을 수 없으리라 믿었던 것을 이해하고, 제가 겪은 고통이 아님에도 깊이 공감해주는, 그리고 때로는 같은 아픔을 가졌기에 손을 내밀 수 있다 말했던 사람들. 거대한 악에 비해 너무도 작게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그 자리에 분명 존재하는 선의. 그러므로, 그가 살아온 이 세상은.

“…아름다웠어.”

그는 최초이자 최후로 내밀어진 손을 잡고, 열차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경적 소리가 한 번 크게 울렸다. 두 사람을 실은 열차는 천천히 거대한 몸뚱아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두가 끝내 도달하되 그 전까지는 아무도 알지 못할 미지를 향해서.


세계를 사랑하는 한 어린아이가 있었다.
세계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은 어린아이였다.

비록 최초의 만남은 폭력과 배제, 죽음과 고통이었으되
그 사이에서 수많은 인연을 맺었다.

그러므로 아이는 더 이상 슬피 울지 않았고
더 이상 증오로 비명지르지 않았다.

악몽 속을 헤매이던 어린아이는 사랑하는 이 곁에서 끝을 맞이했으니
슬퍼할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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