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 [달콤한 딸기 요거트 스무디 한 잔과 청포도 에이드 한 잔]
마른수건으로 접시를 박박 닦던 하이든이 고개를 들자, 진흙 잔뜩 묻은 신발을 바깥 매트에 벅벅 비비고 있는 베를리오즈가 보였다. 부스스한 벌건 머리에 연필만 꽂아주면 꼭 미친 과학자 같겠다 싶었다. 대충 신발 밑창을 확인한 베를리오즈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하이든에게 꾸벅 인사한다.
"어서오세요. 주문은?"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에휴, 오늘 밖에 진짜 덥네요. 가을 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햇빛이 쨍쨍하고 말이야."
베를리오즈는 깃을 펄럭펄럭거리며 헥헥거린다. 추위를 많이 타는 베를리오즈가 덥다고 할 정도의 날씨였으니 지구 온난화가 분명히 오고 있긴 한가보다. 베를리오즈는 에어컨이 제일 잘 들어오는 자리에 앉아 언제나 그렇듯이 공책을 꺼내든다. 아메리카노를 만드느라 정신이 없는 슈베르트와 오전 매출을 계산하느라 정신없는 하이든과 달리, 뒤에서 폰질을 하던 리스트가 고개를 든다.
"밖에 손님들인가요, 저거?"
슈베르트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겠지만 하이든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든다. 바깥에서 까만 뒤통수 두 개가 머뭇머뭇거리며 서로를 흔들어대는 모습이 보였다. 하이든은 슬쩍 문을 열고 손님 둘을 눈으로 훑는다. 머리가 더 짧은 쪽이 고개를 홱 돌리더니,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넘어질 뻔한다. 짧은 까만머리의 학생은 (가방이 금방이라도 전공책을 토할 것 같았다. 누가 봐도 대학생이었다.) 허리를 곧게 펴며 얼굴을 붉혔다.
"지금 카페, 영업하고 있나요?"
"아, 물론이죠! 어서 들어오세요."
하이든은 문을 열고 두 명의 손님을 환영한다. 남학생이 두 손을 모으며 따뜻한 주황빛 조명에 감탄을 표한다. 무엇보다 아직 개업한 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탓에 깨끗한 게 가장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옆에 서 있는 여학생은 벌써 눈으로 바쁘게 메뉴를 읽고 있었다. 여자 쪽은 학생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가방 안에 바이엘이랑 체르니 교본이 들어 있는 걸로 보아서 말이다. 피아노를 새로 배우고 있거나 피아노 학원 교사일까. 참, 이렇게 관찰하는 버릇도 버려야 하는데 하도 중학교 교사로 지내면서 가정폭력 잡아내느라 이런 데만 민감해졌으니 원.
"난 청포도 에이드 할래. 넌?"
"누님은-정말이지, 포도 말고 다른 건 안 드실 거예요?"
"내 소울푸드야."
남학생은 턱을 괴고 미간을 찌푸린다. 하이든은 슬쩍 카운터에 세워놓은 메뉴판을 청년 앞으로 밀어준다. 미간을 찌푸리는 폼이 꽤나 근시인 듯싶었다. 남학생은 감사해하며 메뉴판을 받아들고 하나하나 꼼꼼히 따져본다. 우유부단한 성격인가? 정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있었다.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남학생은 톡 터지는 해바라기처럼 방긋 웃으며 메뉴판을 하이든 쪽으로 다시 밀어준다.
"아아, 정말 모르겠어요! 전부 다 맛있어 보이는 걸요! 혹시 추천 메뉴가 있을까요? 달콤하고 새콤한 맛이 들어가는 음료면 뭐든지 좋은데 말이죠."
하이든은 메뉴판을 닫아 원래 자리에 놓으며 미소짓는다.
"물론입니다. 지금은 사과랑 포도가 제철이고요, 새콤달콤한 음료 중에서는 딸기 요거트 스무디가 꾸준히 잘 나가고 있어요."
남학생은 하이든의 이야기를 들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잠시 생각하는 듯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다가, 이내 밝은 목소리로 들어온 주문은 다음과 같았다.
"흐으으음, 포도는 벌써 누님께서 시키셨으니 선택지에서 빼는 게 좋겠네요. 그럼 딸기 요거트 스무디 하나 부탁드립니다!"
"네. 주문 확인해 드릴게요. 청포도 에이드 한 잔, 그리고 딸기 요거트 스무디 한 잔 맞으시죠. 6,800원 계산해 드리겠습니다."
누나 쪽이 카드를 내민다. 동시에 남학생도 카드를 내민다. 그러더니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장난기 어린 말싸움을 시작한다.
"내가 계산한다니까."
"아니죠, 밥을 얻어먹었으니까 음료는 내가 사야죠."
"아니지, 넌 대학생이잖아. 대학생이 무슨 돈이 있어."
"그러는 누님은 뭐 월에 천만원씩 벌어요? 내가 산다니까."
"너보다는 많이 벌어."
"장학금 받아서 돈 있어요."
급기야 서로의 카드를 빼앗으려는 쟁탈전 발생. 의 좋은 남매를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던 하이든에게로 두 명의 시선이 동시에 홱 돌아왔다.
"사장님, 제가 밥도 얻어먹었는데 음료는 제가 사는 게 맞겠죠?!"
"아뇨, 사장님. 얘 아직 취업도 못한 어린애라고요. 제가 사야겠죠?!"
갑자기 불똥이 튀어버린 상황에 하이든은 눈을 깜박깜박 한다. 좋은 쪽으로의 딜레마긴 했지만 중학교 때 '선생님, 이번에는 쟤가 청소할 차례 아녜요?' 논쟁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똑같이 커다란 갈색 눈 두 쌍이 똑같이 반짝이며 똑같이 하이든을 올려다봤다. (근데 이 둘, 쌍둥이가 아닌 거 확실해? 누나동생이라는데 쌍둥이래도 믿을 정도로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생겼다.) 하이든은 포스기에서 오백원짜리 동전을 꺼낸다.
"그림 면으로 하시겠어요, 숫자 면으로 하시겠어요? 나오는 쪽 분이 결제하는 걸로 하죠."
누나 쪽은 숫자를 고르고 동생 쪽은 그림을 고른다. 하이든은 동전을 하늘로 튕겼다가 잡아서 펼친다. 숫자였다. 누나 쪽은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으쓱한다.
"그래, 내가 낸다니까? 동생아. 이것도 다 하늘의 뜻이다. 이제 받아들이렴."
동생 쪽은 여전히 누나가 돈을 내는 것이 못마땅한지 입술을 비죽이며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하늘의 뜻' 이라는 말에 어깨가 살짝 내려앉는 것 같았다.
"알겠어요."
"다음 번에 또 오실 때는 동생 분께서 결제하시면 되겠네요."
하이든은 은글슬쩍 '다음 번에도 와서 사먹었으면 좋겠는데' 하는 기대를 내비치며 누나 쪽의 카드로 결제를 해 준다. 그 말에 동생 쪽이 눈썹을 잔뜩 찌푸리며 고개를 열렬히 끄덕인다. (둘의 얼굴에서 제일 다른 부분이 눈썹이었다. 보통 남자들이 짙은 눈썹을 가지고 싶어하는데, 이 쪽은 누나 쪽이 훨씬 눈썹이 짙었다.)
"그런 말 하시면 안 돼요. 펠릭스는요,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서 그런 이야기 들으면 몇 번이고 다시 절 끌고 올 거라고요."
"나쁠 건 없잖아요."
하이든은 누나 쪽에게 카드를 돌려주고 미소짓는다.
"다시 와주시면 저희야 감사하죠. 음료 준비되면 자리로 가져가 드리겠습니다."
남매 손님은 나란히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잡으러 간다. 하이든은 흐뭇-한 얼굴로 두 손님을 바라본다. 슈베르트는 아쉬운 얼굴로 입술을 비죽한다.
"커피 안 시키셨네요."
"그러게. 자, 페렌츠야. 빨리 포도에이드 만들어라."
리스트는 휴대폰으로 레시피북을 띄워 두고 청포도와 설탕시럽을 섞어 믹서기에 갈아넣는다. 마찬가지로 하이든도 딸기 요거트 스무디를 만들기 시작한다. 얼어서 사각사각한 맛이 나는 냉동 딸기를 잔뜩 넣어주고-어라, 냉동딸기가 약간 사라져 있었다. 어떤 자식이 집어먹은 거야?- 우유를 백오십밀리리터 계량해서 넣어 준 뒤, 요구르트 파우더를 두 스푼, 마지막으로 냉장고에 얼려 둔 조그만 얼음을 믹서기에 넣고 갈아 주면 순식간에 완성이다. 소리가 좀 시끄러워서 저 구석에서 귀를 막고 죽을상을 하고 있는 베토벤에게는 미안해지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두 대의 믹서기가 동시에 돌고, 거의 동시에 멈춘다. 숟가락으로 스무디를 긁어 잔에 부어 준 뒤, 굵은 빨대를 꽂아주고 반으로 자른 냉동딸기 두 조각으로 장식해서 마무리. 입 안에서 톡톡 터지는 맛이 그대로 나는 청포도 에이드와 아주 딸기 맛이 진한, 새콤달콤 딸기 요거트 스무디의 완성이었다. 연한 초록색과 부드러운 핑크색이 나란히 리스트가 든 쟁반 위에 놓이고, 코스터, 냅킨까지 준비한 리스트는 두 손님이 앉아 있는 창가 자리로 향한다.
리스트는 딸기 요거트 스무디와 청포도 에이드를 두 손님의 앞에 각각 놓아준다. '손님에게 잘 어울리는 귀여운 핑크색이네요' 같은 말을 할까 말까 고민했지만, 그런 말 한 마디 했다가는 동생 쪽에게 두들겨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머릿속을 스쳐 입을 닥친다. 그리고 현명한 선택이었다. "고마워요" 라고 말하면서도, 동생 쪽은 누나 앞에 놓인 딸기 요거트 스무디와 제 앞에 놓인 청포도 에이드의 자리를 바꿨으니 말이다. 아아, 주문을 좀 더 귀기울여 들을 걸 그랬어. 리스트는 벌개진 얼굴로 주방에 돌아온다. 슈베르트와 하이든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비웃지 마세요!"
"아니 뭐, 비웃는 건 아니야."
"그래그래, 누구나 그런 실수 할 수 있지!"
하이든에게 눈치를 받는 건 자주 있는 일이었으니 그리 타격감도 없었지만 슈베르트에게 눈치를 받는 건 정말 타격감이 컸다. 이번 주에도 접시 한 개를 깨 먹고 포스기에 남은 현금 액수가 안 맞는다고 난감해했으면서.
"누가. 남자가 저런. 귀염귀염 핑크핑크 음료를 시킬 거라고 생각해요."
리스트는 얼굴을 손에 파묻고 우으으으, 하며 부끄러움에 몸서리친다. 단골 되지 말아라. 볼 때마다 쪽팔려 죽을 것 같으니까. 성별 이분법적 고정관념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 이미지라는 게 있잖아.
"확실히 얼그레이가 더 잘 어울리는 인상이긴 하지만 말야, 그래도 딸기 요거트 스무디랑 아주 안 어울리는 인상은 아닌데?"
슈베르트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리스트를 놀린다. 확실히 온화하고 상냥한 인상이긴 했으니, 슈베르트의 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나름 완벽하게 알바하고 있던 기록이 깨진 느낌이었다.
"괜찮아. 앞으로도 그런 실수 많이 할 텐데 뭐 어떠니. 슈베르트는 주문도 잘못 받잖아."
하이든의 광역기. 이번에는 슈베르트와 리스트 둘이 같이 우으으으, 하고 몸서리친다. 하이든은 둘의 등을 가볍게 밀치며 자, 자, 프란츠는 손님 없는 동안 머신이나 한 번 청소하고 페렌츠는 믹서기 닦고 있어라 라 말한다. 칼날과 뚜껑을 전부 분리해 얼룩 한 점 없이 빡빡 믹서기를 닦고 원래 자리에 끼워놓은 뒤 리스트는 포스기 앞에 선다. 그 때, 심각한 얼굴의 베를리오즈가 카운터로 다가온다.
"저기."
뭔가 추가로 시킬 거라도 있냐 물어보려 했지만 그런 어조의 '저기' 가 아니었다. 이 인간이 추가 주문을 할 때의 어조는 '저-기!' 에 가까웠다. 베를리오즈가 대단히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리스트에게 더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한다. 가뜩이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조용히 하자 리스트의 귀에도 들릴락 말락 한 크기가 된다.
"말이지, 저 손님 둘 말야. 까만머리 둘. 커플같은 둘."
남매인데. 아무튼 말은 충분히 알아들었다. 남매치고는 좀 커플같긴 했다. 뺨을 꼬집고 애틋하게 쳐다보는 모양새는 웬만한 권태기 커플의 부러움을 살 만했다. 아니, 남매이면서 커플인 것도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긴 하지. 아, 아니면 커플이고 '누님' 은 그냥 호칭인 건가? 리스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베를리오즈에게 맞춰 몸을 낮춰준다.
"아까부터 계속 내 쪽을 힐끔거리거든? 장난 아니게 신경쓰이는데 대체 왜 그러는 건지 좀 알아봐주면 안되냐?"
시선에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인 베를리오즈였지만 그런 그조차도 거슬리게 할 정도의 따가운 시선이었나보다. 과연 남매 손님들은, 조심스럽지만 확실하게 계속 베를리오즈 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누나 쪽은 좀 더 노골적으로, 그리고 동생 쪽은 좀 더 비밀스럽게. 리스트는 냉동딸기를 하나 슬쩍 꺼내 오물거리며 묻는다.
"예리한 탐정님의 고견은 어떠신데?"
"희망사항-나한테 관심 있음 또는 나를 작사가 베를리오즈로 알아봄. 아니다, 생각해보니 저 둘이 커플이겠구나. 현실-나를 또라이라고 생각하고 있음."
하하, 여전히 시니컬한 현실주의자다운 발언이었다. 리스트는 뒷목을 긁적이며 알겠다고 말한다. 베를리오즈는 제 자리로 돌아가고, 한 번이라도 눈이 더 마주치면 그대로 당신들을 감옥에 잡아처넣겠다 라 말하듯 맹렬한 기세로 남매 손님들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카페 알바생치고는 거창하고 비범한 임무를 부여받은 리스트는 행주를 들고 아주 천천히 테이블을 닦는다. 피아노 동아리의 짬바를 살려 귀를 쫑긋 세우고 말이다.
"...알바생이 잘생기긴 했다."
"누님. 빌헬름한테 이를 거예요."
"아니 그냥 말도 못하니. 당연히 내 눈엔 너랑 빌헬름이 최고지만. 우리 펠릭스, 서운해진 건 아니지?"
호로로록 하고 스무디 빨아들이는 소리. 뭔가 성별을 바꿔놓아야 할 것 같은 대화였다. 그나저나 잘생긴 알바생이라면 나를 이야기하는 거겠지? 어깨가 은근 으쓱해졌다. 펠릭스 쪽은 눈을 굴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다가 펠릭스 쪽이 턱을 괴고, 이번에는 베를리오즈가 아닌 카운터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한다.
"장사는 잘 될까 모르겠네요, 여기. 꽤나 구석진 골목에 있어서 말이죠."
"사장님 예순은 되어 보이시던데. 아마 은퇴하고 나서 남아도는 퇴직금으로 꾸리신 가게 아닐까나?"
"아녜요! 요즘 퇴직금으로 큰맘먹고 가게 열었다가 폭삭 망하는 데도 많다 그랬어요. 여긴 안 그랬으면 좋겠네요. 사장님도 좋은 분 같으시고 생과일 딸기 요거트 스무디가 3,400원이라니... 아지트로 쓰고 싶을 정도네요. 손해보고 장사하시는 게 분명해요."
"그러니까. 여기 근처에 이런 데가 있는 줄은 몰랐어. 시계토끼 씨한테 감사해야겠네."
누나 쪽이 베를리오즈를 흘깃한다. 리스트는 다시 귀를 쫑긋 세운다. 시계토끼 씨가 아마 베를리오즈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미행해온 줄 알면 큰일날 텐데."
"아니야, 그럴 게 뭐 있어. 뭐라 하면 솔직하게 말하면 되는 거 아니야? 교차로 사건이 아주 인상적이어서 뒤따라와봤다고."
아아, 교차로 사건. 아마 리스트랑 베를리오즈가 프란츠 카페에 처음 온 날이었을 테다. 페퍼민트 티를 시켜놓고 뛰쳐나간 베를리오즈 때문에 하이든과 리스트가 뛰어가서 차를 전달하고 카페로 다시 끌고와야 했던 건. 아마 동생 쪽이 그 사건의 목격자 가운데 하나였던 모양이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내가 관심이라도 있어서 따라온 것 같잖아요! 미친 손님 뒤를 쫓아서 커피를 전달해 줄 정도로 책임감 있는 사장님의 모습에 감명을 받아서 어떤 카페인가 궁금했을 뿐이라고요."
동생 쪽은 외려 베를리오즈와는 정반대편을, 그러니까 창밖을 내다보며... 냅킨을 이로 잘근잘근 씹는다. 기이한 버릇이다. 손톱을 씹는 것도 아니고 냅킨을 씹다니. 프로이트가 봤다면 구순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법한 상이었다. 미친 손님으로 기억되고 있는 베를리오즈에게는 안 된 소식이었지만 하이든에게는 잘 된 소식이었다. 책임감 있는 카페사장으로서의 평판을 얻으셨군요!
"깜짝 놀랐잖아. 밥값 계산하고 있는데 갑자기 네가 '어?!' 하면서 뛰쳐나가길래. 너 원래 그런 애가 아닌데. 아니 여기가 그 정도로 궁금했어?"
"기운, 이라 말하기는 좀 뭐하고...뭐랄까, 예감이랄까요? 그냥 오랜만에 그 기분이 들었어요. 아까 누님 말마따나 토끼굴에 떨어지는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고요, 저 괴짜가 여기로 들어가는 걸 봤을 때."
"아유, 그러면서 문 밖에서 몇 분을 들어갈까 말까 혼자서 고민하고 있었어? 너 진짜로 나중에 맘에 드는 여자 생겼을 때도 그렇게 고민하고 있으면 큰일 나. 다 놓쳐."
"아니, 카페는 그렇게 사라지는 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누님도 알다시피! 원래 제가 이렇게 고민 많은 타입도 아니라고요, 다만, 조심스러울 뿐이지."
그게 그거 같은데. 리스트는 화분에 분무기로 물까지 뿌리며 늑장을 부렸지만 대화의 나머지 부분은 아주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내용뿐이라서 (그러고 보니까 누구누구는 어떻게 지내고 있대요? 뭐 어떻게 지내긴 어때, 입시 때문에 바쁘지. 최근에 어떤 영화를 봤는데... 아 그래요? 전 영화보다는 전시가 더 취향이었어서... 아버지가 요즘에 몸이 안 좋으시던데, 한 번 찾아뵙고 오지 그래? 그래야 하는데 도통 시간이 안 나니까 원...) 리스트는 본인의 임무를 다 수행했다고 판단하며 베를리오즈의 자리에 슬쩍 앉는다.
"뭐하고 있었어?"
"관찰."
사실 베를리오즈가 단골이 된 것은, 프란츠 슈베르트의 음료가 기가 막히며 페렌츠 리스트를 친구로 둔 탓도 있었지만 또 한 가지, 카페는 언제나 다양한 인간을 관찰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가끔씩 좀 불편할 정도로 빤히 사람들을 관찰하는 버릇이 있는 베를리오즈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새로운 손님들을 관찰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알아낸 건 좀 있어? 형이 먼저 이야기해봐."
"'진짜' 부잣집 출신이야. 둘 다. 아마 남매거나 어떻게든 연결된 가족인 거겠지."
리스트는 베를리오즈가 결론을 어떻게 내렸는지 알아보려 하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유명 메이커 브랜드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글쎄. 구찌나 프라다나 에르메스나 아무것도 없는데?"
"그래, 동시에 나이키나 유니클로나 M&M도 아니지. 왜냐, 여자 쪽 저거 맞춤정장이거든. 아주 끝내주는 고급 재단이야."
뭐, 나는 봐도 모르겠지만. 리스트는 어깨를 으쓱한다. 그런 고급 정장 같은 걸 맞출 형편이 아니었다. 방값 내고 먹을 거 좀 사오면 돈이 어디로 녹아내리는지 모르게 전부 사라져 버린다. 서른을 문턱에 둔 베를리오즈도 아직 맞춤정장 한 벌 없는 게 현실이었다. 베를리오즈는 펜을 살짝 옮겨 남자 쪽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말을 잇는다.
"남자 쪽은 모르긴 몰라도, 영국에 유학을 다녀온 적이 있는 것 같네. 자꾸 말을 하다가 영어를 섞어쓰잖아. 근데 의식적으로 섞어쓰고 있는 건 아니거든. 잘 들리지는 않지만 영국 악센트라는 건 알아. 유학 다녀올 정도면 여유가 꽤 많이 있는 집이겠지. 그러니까 마저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그런 도련님 아가씨가 가게에 저렴한 가격을 찾아서 왔을 리는 없어. 커피를 시키지도 않았으니까 커피가 맛있다는 소문을 들은 것도 아닐 테고."
리스트는 으, 하고 베를리오즈를 흘겨본다. 나른한 눈매가 날카롭게 반짝이고 있었다. 전혀 안 그렇게 생겼는데 가만 보면 무서운 사람이다.
"와, 스토커인 줄 알았어."
베를리오즈는 어깨를 으쓱한다. 리스트의 목소리에 담긴 약간의 징그러움을 눈치챘지만 개의치 않는 제스처였다. 잠깐 희끄무레한 청회색 눈이 두 손님을 스쳐 지나갔다가 돌아온다.
"오늘 처음 본 사람들이야."
"그래서 저 둘의 스토리가 뭔지는 알겠어? 왜 이 카페에 왔는지?"
"겠냐고. 내가 독심술사냐? 근데 나랑 뭔가 관련이 있겠지. 아까 뉴턴농수산에서부터 계속 따라오던데 왜 그런지 모르겠어."
리스트는 한 번 더 '으!'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최대한 베를리오즈 쪽으로부터 멀어지게 뒤로 뺀다. 알다가도 모르겠다, 저 인간은. 알고 지낸 것도 한 이삼년 됐는데 이해가 안 가는 구석이 너무 많다. 대단하긴 한데 좀 경악스럽다.
"아니 따라오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어?"
베를리오즈는 펜을 내려놓으면서 하품한다.
"노골적이었어. 미행해본 적 없는 게 티가 나던데."
아니 형, 보통 사람들은 미행을 해 본 적이 당연히 없어... 자료조사 해보겠다고 조폭 미행하고 소재가 필요하다면서 놀이공원 데이트를 하는 사람들 미행하고 이런 거 안 한다고. 자칫하면 범죄니까 말야... 하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베를리오즈에게 그런 말을 해봐야 씨알도 안 먹힌다는 것도 알았다. 리스트는 으으응, 하며 턱을 괸다.
"페퍼민트 사건을 목격한 사람이던데. '미친 손님' 을 쫓아와서까지 커피를 제공해주는 책임감 있는 주인이 운영하는 카페가 어디 있나 궁금했대. 그리고 남매 맞아."
"아아, 그런 거구나? 궁금증 해결됐어. 땡큐."
'페퍼민트 사건' 의 언급에도 조금의 쪽팔림도 보이지 않는 이게 베를리오즈다! 이 철면피가 베를리오즈다! 교차로에서 치일 뻔하고 한 100명 가까이 되는 사람의 인스타에 '?? 뭐임' 하는 글을 유발해 놓고서도 자기 곡에 돌파구를 찾았으니 전혀 상관없다는 저 애티튜드, 박수가 나올 정도였다.
잠깐 노트를 바라보던 베를리오즈가 고개를 홱 들고 묻는다.
"야, 새로운 곡 가사를 남매 간의 금지된 사랑에서 착안해 쓰면 욕먹냐? 저 둘이 그렇다는 게 아니고."
"형 진짜 미쳤어?"
지난 번에 절절한 사랑 가사를 써왔다가 '가사 내용을 읽어 보면 이건 스토킹이다, 이런 가사를 써도 되는 거냐' 라고 대차게 욕먹은 적이 있으면서 여전히 '사회, 도덕,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사랑이야기!' 를 외치는 베를리오즈였다. 이해는 가는데 때로는 좀 과하다. 베를리오즈는 고개를 끄덕이고 노트에 두 줄을 찍찍 긋는다. 리스트가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않자 베를리오즈가 휘휘 손을 저으며 입모양으로 '고마워 알겠으니까 이제 꺼져 줘' 라고 말하고, 리스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로 돌아간다. 하이든이 생글생글 웃으며 리스트의 손에서 행주를 가져간다.
"아이고, 테이블에 바니쉬라도 칠하고 오지 그랬어? 아주 윤이 반들반들 나네."
고급 꼽주기 기술 등장이었다. 리스트는 멋쩍게 하하... 하고 웃는다.
"아니... 손님들이. '책임감 있는 사장님' 이 운영하는 카페가 궁금해서 온 거라고 하길래. 저도 그만 못 참고- 좀 오래 이야기를 엿듣다가 왔네요."
"말하는 것만 보면 아주 국회의원감이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하이든은 확실히 기분이 좋아졌는지 휘파람을 불며 티스푼을 제자리에 넣어둔다. 아부해 봤자 소용없다? 아니 있다. 리스트는 설명을 추가로 덧붙인다.
"저번에 베를리오즈 형이 페퍼민트 티...교차로에서 그 때 봤나 보더라고요. 그래서 찾아와봤대요."
"아, 그러고 보니까 그때 그 학생이 저 남학생이었구나."
하이든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때 그 학생이자 딸기 요거트 스무디를 시킨 손님 펠릭스는 아쉽다는 듯 바닥까지 싹싹 비운 딸기 요거트 스무디 컵을 통째로 기울여 어떻게 조금이라도 남은 게 없나 보고 있었다. 부자 치고는 (베를리오즈의 관찰에 따르면) 상당히 알뜰하다고 해야 하나 거지근성이라고 해야 하나, 안 어울리는 태도였다. 하지만 그래봐야 알바 할 필요는 없는 녀석이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리스트의 몸에서 살짝 힘이 빠졌다. 곧 두 손님은 음료를 비우고, 알뜰하게 스탬프까지 챙겨간다. (잃어버릴 경우를 대비해 꼼꼼하게 이름이랑 연락처까지 적은 것에 따르면 둘의 이름은 각각 펠릭스 멘델스존과 파니 멘델스존이었다.) 하이든은 두 손님이 나가면서 아직 딸랑거리고 있는 풍경종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이렇게 멀쩡한 손님들은 오랜만이야."
"그래도 다음 번에는 커피를 시켜주셨으면 좋겠어요."
슈베르트가 토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카페에 왔는데 커피를 시키지 않는 것은 아직도 납득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리스트는 하이든의 말에 동의하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멀쩡하고 신사적 (아니면 숙녀적이라고 해야 할까?) 인 손님들이었다. 카공족 아님, 시끄럽게 떠들지 않음, 기물파손 안 함, 주문 깔끔함, 계산할 때 뻐팅기지 않음, 냅킨 쎄벼가지 않음, 음료 안 흘리고 먹음, 직원들에게 공손함. 그것만으로도 고마웠다.
모든 손님이 그랬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다. 몇 달 뒤 어떤 손님으로 인해 리스트를 꾸짖고 나오며 하이든이 한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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