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오세요 프란츠 카페에

EP.5 [외상 파인애플 에이드... 몇 잔?]

진상은 진상으로 퇴치한다

11월 매출을 정산한 하이든은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개업한 지가 세네달이 되어가자 적자가 슬슬 흑자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보통 카페가 입소문이 나는 데 6개월 정도가 걸린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대로 잘 유지만 해도 꽤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각각의 손님들은 서로 다른 점을 칭찬했는데, 모차르트는 넉넉한 사장님의 인심을, (외상을 벌써 몇 번 달아놓았는지 모른다. 그건 하이든이 불쌍한 제자놈... 하고 받아줬지만) 베토벤은 압도적인 커피의 맛을, (하이든과 리스트는 본인이 어쩌다가 못 나와도 손님들이 맛없는 커피를 마시게 할 수는 없다는 슈베르트의 강력한 통제 하에 최근 피나게 커피 뽑는 연습중이었다. 테이핑을 했는데도 손목이 아플 정도였다) 프로코피예프는 음료의 양과 질, 그러니까 가성비를, 베를리오즈는 한적하고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그리고 편의점 슈퍼바이저도 이 정도는 아니겠다 싶을 정도로 꼼꼼한 멘델스존은 (몇 번 더 얼굴을 보고서야 알게 된 사실인데, 멘델스존은 늘 음료를 마시기 전에 컵이 깨끗한지, 테이블에 얼룩은 없는지, 제빙기에서 나온 얼음은 깨끗한 얼음인지 같은 것을 전부 체크했다. 무서운 손님이었다. 솔직히 제빙기가 조금만 더러워도, 도저가 조금만 막혀도 금방 알아차리는 슈베르트가 아니었더라면 하이든도 청소를 몇 번 까먹었을 테다. 슈베르트의 혀가 예민해서 다행이었다.) 청결함과 매니징을 칭찬했다. 솔직히 약간 우쭐해졌다! 싸가지 없는 프랑스인 두명이 앉아서 이 카페가 3개월 갈지, 6개월 가고 망할지 내기를 해서 자존심이 얼마나 상했던가! 이제 그 두 명의 프랑스인이 다시 돌아오면 '6개월? 난 죽을 때까지 카페 운영하련다!' 하고 이야기해주며 엉덩이를 걷어차 줄 테다.

여차하면 혼신을 다한 홍보로 손님을 끌어온 리스트와 이 카페 커피의 맛을 유지하는 슈베르트에게 보너스라도 줘야지, 하고 생각하며 하이든은 포스기에서 현금을 꺼내 정산을 시작한다. 포스기에 찍힌 현금 매출은 54800원, 카드 결제는 342,900원. 40만원이면 무난했다. 현금 잔고는 135,200원이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만원짜리가 아홉 장, 오천원짜리가 여섯 장, 천원짜리가 아홉 장에 백원짜리가 세 개. 오천구백원이라는 묘하게 애매한 액수가 빈 셈이었다. 하이든은 허어어,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한다.

"프란츠, 포스기 이거 왜 안맞니?"

"어, 그러게요? 점심 교대 때는 괜찮았는데."

"그래? 이상하네. 오천구백원 비는데."

"제가 다시 한 번 세 볼까요?"

하이든은 고개를 젓는다.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한 바 있다고 하지만 어쩐지, 슈베르트를 계산에 있어 믿어도 될지 조금 의심스럽다... 라고 한다면 슈베르트를 너무 낮게 평가하고 있는 걸까? 이상하게 서른도 안 된 슈베르트보다 예순 넘은 본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갈 것 같다라는 생각이 떨쳐지지 않았다.

"아냐, 아냐. 뭔가 내가 잘못 찍었겠지."

하이든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다시 한 번 현금을 세어 보지만, 현금이 맞지를 않았다. 그렇게 큰 액수는 아니었고 딱 음료 한 잔 사먹기 좋은 액수 정도긴 했는데, 그래도 이렇게 맞지 않으니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일부터는 시재점검 꼼꼼하게 해야겠네. 페렌츠한테도 이야기해둬야겠다."

슈베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시재점검을 대충대충 자율에 맡겨 뒀는데 이제 그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중간 포스기에 서는 사람도 바뀌고 하다보니 더 그런 것 같은데,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다가는 정말 지금처럼 마이너스가 찍히는 일도 빈번하겠다 싶었다.

다음날 하이든은 교대할 때마다 시재 점검을 하겠다고 새로운 룰을 공지한다. 페렌츠와 프란츠는 고개를 열렬하게 끄덕였고, 포스기에 낀 만원짜리를 찾지를 못해서 쩔쩔매던 슈베르트 때문에 겪은 곤경 한 차례를 제외하면 시재점검은 하이든이 예상한 것보다도 딱딱 맞았다. 그렇게 또 두 주 정도가 평화롭게 지나갔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네."

걸레질을 하던 하이든의 말에 슈베르트는 닦던 접시를 내려놓았다.

"뭐가요?"

슈베르트가 묻자 하이든은 어깨를 으쓱하며 냉장고 쪽을 가리킨다.

"뭔가 재료가 비는 느낌이랄까. 나는 오늘 파인애플 에이드를 판 기억이 없는데 파인애플이 줄어 있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엣, 정말요?!"

슈베르트는 반사적으로 냉장고 쪽을 돌아보고, 문을 열어 파인애플이 얼마나 남았나를 보지만 전날 남은 파인애플의 양을 기억하지 못하니 파인애플을 봐도 이게 썼는지 안 썼는지 기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커피는 1g이라도 허투루 사용되었다면 민감하게 반응할 슈베르트는... 역시나 커피가 아닌 다른 재료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생각이 없었다.

"착각일까나... 오늘은 시재점검도 잘 맞았는데."

"뭔가 최근 들어서 그런 느낌이 자주 드신다면 오늘은 기록을 해두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러게, 그래야겠네."

슈베르트가 퇴근한 뒤, 하이든은 잠시 뒤에 좀 더 오래 남아서 재료가 얼마나 남았고 잔액과 매출이 어땠는지를 하나하나 체크해둔다. 귀찮지 않은 작업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계속 마음에 걸릴 일이 생기는 것이 더 짜증났다.

그리고 과연 며칠이 지나지 않아 사건이 발생한다.

오후 아홉 시 오십 분이 되자 멘델스존이 주섬주섬 콘센트를 뽑고 가방을 챙기기 시작한다. 베토벤도 마지막 테이크아웃 에스프레소를 주문하고 일어난다.

하이든은 돋보기 안경을 고쳐쓰고 한 쪽에는 핸드폰 계산기를, 한 쪽에는 본인이 계산해본 결과를 적어둔 노트를 두고 신음한다. 포스기 영수증에 따르면 오늘 판매된 파인애플 에이드는 한 잔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전날에 남은 파인애플의 양과 오늘 남은 파인애플의 양을 보면 판매된 파인애플 에이드는 두 잔이라고밖에 볼 수가 없었다. 하이든은 테이블에 머리를 찧고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낸다. 평소에는 이런 짓까지는 잘 안 하는데 너무 열이 뻗쳤다.

"무슨 문제 있어, 영감?"

베토벤의 걱정어린 말에 하이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오늘도 파인애플 에이드 갯수가 안 맞아서요. 며칠 전부터 잔액이 이상하게 잘 안 맞더라고요."

"좀도둑놈이네."

베토벤이 슈베르트의 설명을 마저 듣지도 않고 결론을 내린다. 이번에는 솔직히 하이든도 동의하는 결론이었다.

"오늘 파인애플 에이드가 두 잔 나갔죠?"

멘델스존의 말에 하이든, 슈베르트, 베토벤이 일제히 멘델스존에게로 고개를 홱 돌린다. 멘델스존은 갑자기 자신에게 쏠린 시선에 머쓱해진 듯 뺨을 문지른다.

"두 잔?"

하이든은 포스기에 찍힌 내용을 본다. 포스기에 따르면 분명 한 잔만 나갔는데.

"두 잔?! 혹시 혹시, 어떤 손님이 가져갔는지 기억해요?"

흥분한 슈베르트의 질문에 멘델스존은 접시에 남은 치즈케이크 부스러기까지 알뜰하게 입에 털어넣은 뒤, 고개를 끄덕인다.

"하나는 그... 괴짜 작곡가였고요. 빨간머리."

"아, 그래. 맞아. 베를리오즈는 사갔지."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브라질에 가 있는 삼촌 이야기가 나왔던 것도 같다. 멘델스존이 얼음을 씹다가 다시 입을 연다.

"다른 하나는 베레모를 쓴 남자였어요. 굉장히 거만하고 턱이 두꺼운 손님. 나이는 잘 모르겠지만 개저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걸요? 가게 안에서 담배를 피려 하길래 제가 카페 안은 금연이니까 나가서 피고 들어오든지 하라고 했거든요."

그렇게 말하고서 멘델스존은 불편한 표정으로 턱을 긁는다. 아마 그 말을 그 손님에게 하고 나서 좋은 소리는 못 들은 모양이었다. 평소 욕도 '제기랄' 이상으로는 잘 안 하는 멘델스존이 '개저' 라는 표현을 쓸 정도였으면 상당한 진상이었던 모양이다.

"턱이 두꺼운 손님...?"

"베레모를 써...?"

하이든과 슈베르트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그런 손님 기억에 없는데...' 라고 중얼거린다. 아마 리스트가 계산하고 음료도 만들어서 내간 모양이었다. 그런 진상을 하이든도 슈베르트도 눈치채지 못했다니, 리스트가 무슨 수라도 썼나 싶을 정도였다.

"베를리오즈 씨가 오늘 외상을 했던가요?"

슈베르트는 입술을 가만 매만졌다. 금붕어보다 못한 기억력으로 베를리오즈가 외상을 걸었는지 안 걸었는지 기억을 할 리가 없다.

"베를리오즈는 외상 싫어해."

하이든이 고개를 저었다. 베를리오즈는 외상을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빚지느니 죽겠다! 라는 파라서 가게까지 왔다가 지갑이 없다는 걸 알고 좌절하며 발걸음을 돌린 적도 있었다. 리스트가 외상 해줄까? 라고 물었을 때도 아니야... 식후 커피 한 잔 못 마신다고 죽기야 하겠어... 라고 음료를 포기했으니까. 안 그래 보이지만 꽤 인성은 멀쩡한 인간이다. 

"그럼 베레모 새끼네!"

베토벤이 소리쳤다. (그렇게 결론을 빨리 내리는 건... 좀 버려야 하는 버릇이지 않을까?) 하이든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멘델스존의 기억력을 얼마나 믿어도 될지가 살짝 고민이었다.

"그 베레모 손님은 확실한 거지?"

"그럼요. 태그호이어 시계에 왼쪽 팔에 회색 줄이 두 개 있는 톰브라운 가디건, 계절에 안 맞는 디오르 향수, 나이키 컨버스더군요. 거기에 베레모를 쓰고 있었는데 온 몸에 명품을 떡칠해 놓은 모양새가 역해서 보기 싫어도 볼 수밖에 없었다고요. 여기 알바생 분이랑 잠깐 수다떨고 있는 것 같았는데 저도 그 이상은 모르겠어요."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30분 동안 그 손님만 빤히 관찰한 사람이나 설명할 수 있을 정도의 디테일에 하이든은 감탄한다. 거짓말을 한 것이었어도 이 정도로 정성들인 거짓말이면 그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박수쳐줘야 한다. (물론 하이든이 지금까지 봐온 바에 의하면, 멘델스존이 굳이 사람 하나 엿먹이자고 거짓말을 할 캐릭터는 아니었다.) 어차피 멘델스존의 증언 말고는 달리 믿을 것도 없었기에 하이든과 슈베르트는 미지의 베레모 손님을 찾기에 착수한다.

그러기를 또 며칠. 하이든과 슈베르트는 눈에 불을 켜고 그 베레모의 손님을 찾았지만, 그런 손님은 보이지 않았다. 하긴, 멘델스존이 이야기해 준 손님의 특징은 턱이 두껍다는 걸 제외하면 전부 옷에 관한 내용이었다. 다른 향수를 뿌리고 다른 옷을 입고 오면 또 못 알아볼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그 손님이 오지 않자 시재점검에 아무런 문제도 없었기에 하이든도 슬슬 '그래 며칠 내가 계산을 잘못 했나 보다' 하고 생각할 때쯤이었다.

하이든은 방금 손님이 떠난 자리를 닦고 정리하던 중이었다. 잠깐 고개를 돌리자 슈베르트가 호들갑스러운 표정으로 하이든의 뒤쪽 창문에 손짓을 하고 있었다. 입모양으로 하이든을 부르는 모습을 보고 하이든은 누가 들어오는지 문쪽을 바라본다. 까만 베레모, 거만한 턱과 자신만만한 걸음걸이, 훅 끼치는 역한 향수 냄새, 파텍필립 손목시계를 보고 슈베르트와 하이든은 아마 같은 생각을 했을 테다.

'베레모다'.

하이든은 빠르게 키 큰 손님 자리의 음료를 치우고 리스트의 어깨를 툭툭 친다.

"잠깐 가서 창고에 재고 좀 체크해주련? 크로와상 생지가 얼마 안 남은 것 같던데 다시 주문해야 하는지 모르겠네."

"지금요?"

리스트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하이든을 바라본다. 하이든은 꼬마들 오면 하나씩 주워먹으라며 살리에리가 갖다놓았던 박하사탕을 집어먹는 베레모 손님을 쓱 훑어보고, 더 이상 말싸움하지 말라는 뜻으로 리스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리스트는 손님과 하이든을 번갈아 보다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창고로 사라진다.

와라, 벼룩의 간을 빼먹는 양아치놈아.

"어서오세요. 주문하시겠어요?"

"뭐야. 프란츠 근무시간 아녔어?"

나이도 어린 게 어디서 찍찍 반말이야. 하이든은 미소를 지으며 응대한다.

"지금 잠시 다른 업무중입니다. 어떤 걸로 드릴까요?"

"파인애플 에이드 하나 주쇼."

"네, 4,200원입니다. 매장에서 드시고 가시나요, 포장이신가요?"

"매장."

"알겠습니다. 카드로 결제하시겠어요?"

"예예, 사천이백원쯤이야 껌값이지."

손님은 영 마뜩찮다는 듯 얼굴을 구기며 주섬주섬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온다. 하이든은 카드를 받아들고 (이상하다, 이렇게 결제를 하면 돈이 빌 이유가 없는데? 멘델스존의 실수였을까?) 리더기에 카드를 꽂는다. 리더기가 머뭇거리듯 잠시 말이 없다가 스크린에 말을 띄운다.

[한도가 초과되었습니다.]

"..."

"..."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손님이 다른 카드를 내민다. 하이든은 다시 카드를 긁어보는데.

[한도가 초과되었습니다.]

다른 카드.

[한도가 초과되었습니다.]

또 다른 카드.

[한도가 초과되었습니다.]

몇 번째인지 기억도 안 나는 카드.

[한도가 초과되었습니다.]

아니 뭐지, 이 새끼. 하이든은 핑크색 카드를 다시 손님에게 돌려준다.

"현금으로 결제하시겠어요?"

"아니 뭐... 지금 당장은 현금이 없는데."

"아하...어쩔 수 없네요."

"거 투자하는 셈 치고 4,200원 대신 결제해주시면 안되나?"

뭐라 개소리를 하는 거야. 무슨 투자인데. 파텍필립을 차고 다니는 주제에 4,200원이 없냐고. 뭐가 아쉬워서 나같이 평범한 벼룩의 간을 빼먹으려 해. 처음 보는 사람한테 뭘 투자해, 내가 뭘 보고. 뭘 믿고 투자를 해줘. 신분이 뭔지도 모른다고. 이름도 모르는데.

라는 말이 목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하이든은 최대한 예의바르게 응수한다.

"손님, 그건 죄송하지만 어려울 것 같습니다."

"투자하면 후회 안하는데. 아-내가 진짜 나중에 크게 될 사람인데."

어쩌라고.

"그럼 그냥 공짜로 음료 한 잔 주시죠?"

입을 열면 욕이 나올 것 같아서 하이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생긋생긋 웃기만 한다. 꺼져 씹새야, 하는 욕을 속으로 씹어삼키면서. 얼굴에 철판을 아주 용접해놓았나 감탄이 나왔다.

"음료 안 만들고 뭐하고 계셔들?"

"손님, 결제를 하지 않으셨으면 저희도 음료를 제공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아니 그러면 댁이 결제를 해주면 되는 거잖아."

손님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한다. 매장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씩 카운터로 쏠린다. 모차르트가 에어팟을 빼고서 개꿀잼 몰카인가? 라는 표정으로 손님을 바라봤고 베르디 씨는 에스프레소 잔을 입에만 댄 채 둘을 곁눈질했다. 아이스티 여덟 잔을 홀더에 들고 막 나가려던 빨간머리 학원교사분도 문 앞에서 멈춰서 싸움을 구경하려 들고 있었다.

"아니, 저는 오늘 손님을 처음 보는데 왜 제 돈을 써가면서 결제를 해 드려야 하냐고요."

"그럼 그냥 공짜로 달라는데 그거 그 파인애플이랑 사이다가 아깝다고 음료 하나를 못 만들어줘? 그거 다 하면 얼마 한다고. 아니 이럴 거면 내가 어? 그냥 편의점에서 사이다 사고 마트에서 파인애플 사서 만들어 먹지!"

"그럼 만들어 드시든가요!"

이 사람 상식을 초월하는 이야기뿐이다.

"나처럼 어? 나처럼 대단한 사람이 왔는데 음료 한 잔을 안 줘? 아니 맨날 공짜로 줬으면서!"

"내가 공짜로 준 적 없다고!"

"프란츠는 늘 공짜로 준다고!"

"그건 프란츠가 독단적으로 준 거라고!"

"내 알 바 아니라고! 공짜로 줬으니까 이번에도 공짜 해달라고!"

아오, 진짜 끌어낼까? 블랙리스트에 올려 버릴까? 하이든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손님. 자본주의 사회잖아요. 상품이나 서비스를 제공받으시려면, 그에 상응하는 물질적인 재화를 주시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정이 없어, 정이! 당신처럼 야박한 사람이 어떻게 어? 사람들이 모이는 이 장, 어떻게 카페를 운영해? 당신 내가 프란츠 봐서 참았는데, 블로그에다가 싹다 뿌릴 거야. 알아들었어? 내가 당신 밥줄 끊어버린다고."

"아 해보든가."

"뭐? '해보든가?' 손님한테 반말이야?"

젊은놈의 새끼가 말도 많다. 하이든이 중학교 교사의 훈육기술을 보여줘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순간 우레같은 고함이 울려퍼진다.

"야! 여기 너 혼자만 쓰냐!?"

베토벤이었다. 아까부터 한참 작업중이었는데 계속 옆에서 진상 고객이 시끄럽게 하자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다시 손님을 보자 하얀 셔츠에 에스프레소가 잔뜩 묻어 있었다. (아이고, 이건 좀 불쌍한걸.) 베토벤은 씩씩거리며 아직 커피가 뚝뚝 떨어지는 에스프레소 잔을 여전히 들고 있고 말이다. 커피따귀라니... 물따귀로 해주지 좀.

"아니 가만 듣고 있으니 시퍼렇게 젊은 놈이 어디다가 대고 육십 넘은 분께 지랄은 지랄이야! 마실 거 있으면 돈 내고 마시라는데 그게 그렇게 꼽냐? 니 사천 이백원 낼 돈이 없어? 거지냐? 거지면 가서 파리 길바닥에 신문지나 깔고 구걸이라도 하든가! 파텍필립을 팔든가! 어디 뻔뻔하게 공짜로 달라고 옘병을 떨어! 보자보자하니 못 봐주겠네 이 새끼가? 나가, 시끄러워서 작업을 못해처먹겠으니까 나가 이 새끼야!"

슈베르트가 진열대에서 자허토르테를 하나 쓱 꺼낸다.

"베토벤 씨 오늘 좀 멋있으시네요."

"내 쪽에서 지랄해주면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는 녀석이니까."

하이든도 내심 흐뭇하게 그렇게 말한다. 절대 기세가 꺾일 것 같지 않던 손님이 베토벤의 불호령에 갑자기 조용해진다. 베토벤이 소리를 치는 게 어지간히 무섭긴 한가보다. 하긴, 모종의 아우라가 있는 녀석이긴 해서 괜히 소리를 지르면 이상하게 더 쫄린다. 실제로 하는 이야기는 하이든이 했던 이야기랑 다를 게 없는데도 목청이 크니까 일단 이기지 않는가. 하이든도 솔직히, 가게 사장만 아니었어도 쌍욕 퍼붓고 말대 갖고와서 가게 밖으로 쫓아냈는데 (소금도 좀 뿌리고) 카페를 하고 있으면 사장의 평판이 가게 이미지를 결정짓는 경우도 많지 않던가. 뜨거운 커피를 그렇게 맞았으니 솔직히 이번에는 손님이 욕을 해도 납득이 가는 상황이었는데 되려 이번에는 전혀 화를 내지 않는다. 오히려, 갑자기 손님은, 바닥에 납작 엎드리더니.

"몰라뵀습니다!"

하고 별안간 절을 한다.

빨간머리 학원 선생님은 잠깐 커피 캐리어를 내려두고 이 재미있는 광경을 찍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다는 듯이 폰을 꺼내들고 있었다. (모차르트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감히 작곡계의 성인, 지존, 신, 우상, 구세주,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군계일학, 혁명가, 최고봉, 원수, 황제 베토벤 님을 못 알아보다니! 면목 없습니다! 하찮은 작곡학고 리하르트 바그너 감히 몰라뵈고 베토벤 님의 작업을 방해했습니다! 원하신다면 삼배구고두라도 하겠습니다!"

베토벤은 얼굴로 '뭐야 시발' 이라고 말하고 있었고 사실 하이든과 슈베르트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니 무슨 상황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백만군대를 진압한 것처럼 개연성 없이 진정되고 있었다. 아무리 존경한다고 해도 그렇지 방금 60도가 넘는 커피를 거의 정통으로 맞았는데도 개처럼 기고 있다. 이게 정상인가 싶다. 그렇게 둘이, 아니 베토벤까지 합해 셋이서 멍해 있던 그때 리스트가 창고에서 나온다.

"사장님, 생지 체크 다 해봤는데 지금 봉다리 한 서른 개 남아 있거든요? 브런치로 많이 나가는 거 아니면 새로 주문은-흐이이이이익 이게 뭐야."

리스트도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바그너와 당황한 표정으로 세 명의 직원을 번갈아보며 도움을 요청하는 베토벤을 보고 한걸음 뒤로 물러선다. 하이든은 대충 수고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한다.

"아니 바그너가 왜 저러고 있죠?"

리스트의 물음에 슈베르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해준다. 

"우리도 몰라..."

"저는 감히 베토벤 선생님의 계승자를 자청하며 학교의 하찮은 개밥버러지들을 찍어누르기 위해 이곳에 와서 과제를 하려 하던 바, 가난한 대학생으로서 무상 음료 한 잔을 제공해 달라고 했으나 이 야박한 카페 사장에게 거절당해 그만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정당한 분노를 분출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하오나 선생님께 불편을 끼쳐드렸다니! 목을 그어서라도 사죄하겠습니다!"

"...여기 사장님 내 스승님이신데."

베토벤의 말에 정적이 흐른다. 하이든은 내심 베토벤이 '내 스승님' 이라고 불러줬다는 게 기분이 좋아 코를 문질문질한다. 순식간에 베토벤의 스승을 모욕해버린 셈이 된 바그너는 머리를 더 깊게 박는다.

"아무렴 제가 전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깽판치지 않겠습니다!"

"와, 태세전환이 아주 전광석화네요."

슈베르트가 작게 읊조린다.

베토벤은 됐다... 라고 말하며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간다. 슈베르트는 진상에게 화내줘서 고맙다는 뜻으로 베토벤에게 서비스 에스프레소 한 잔과 아까 꺼내놓았던 자허토르테 한 조각을 건넸고 베토벤은 뭐 이런 걸 다... 하고 쑥스러워하면서도 서비스를 받는다. 베토벤이 다시 이어폰을 끼고 작업을 시작하자 바그너가 얼굴을 대충 소매로 쓱쓱 닦고 일어난다. 

"야, 프란츠 리스트! 그러니까 네가 주문을 받아줬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 아냐! 어? 네가 근무를 안 하고 있으니까 공짜로 음료를 못 먹잖아!"

이제 리스트가 화낼 차례겠군, 이라고 하이든은 생각하지만 하이든의 예상과 달리 리스트는 만화적 표현으로 하자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가운데로 모여 올라간 눈썹과 꼼지락거리는 손이 정말 미안하다는 듯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었다. 

"아, 아니. 리하르트. 진짜 미안해. 잠깐 사장님이 일을 시키셔 가지고."

"내 공짜 음료 내놓으라고! 맨날 공짜로 줬으면서 왜 이번에는 안 되는데!"

역시 개과천선이 아니라 그냥 베토벤 한정 발깔개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매번 리스트가 공짜로, 돈도 안 받고, 그 사실을 하이든에게 이야기하지도 않고 음료를 만들어 주고 있던 모양이었다. 하이든의 웃는 표정에 음영이 살살 드리운다. 결국 바그너가 리스트에게서 오천 원을 빌려가 계산한 뒤 제 자리로 돌아가자 (거스름돈 팔백원을 돌려주지도 않은 채였지만 리스트는 불평하지 않았다) 하이든은 리스트의 어깨에 손을 스윽 올리고 묻는다.

"우리 페렌츠, 손님들한테 막 공짜로 음료 주고 다니고 그랬어? 나한테 말도 없이?"

사실 질문이라기보다는 추궁이었다.

"아, 아니. 사장님께서 저한테는 가끔 쉬는 시간에 음료 한두잔 만들어 먹어도 된다고 하시길래... 내가 안 먹고 친구한테 만들어 주는 셈... 하자... 하고서..."

리스트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다. 하이든이 물론 음료를 만들어 마셔도 된다고 했다. 근데 그게 직원에게만 적용되는 거지 직원의 친구의 둘째 형의 선생님의 제자의 아는 오빠 여자친구 동네 반장님 아버지의 친구의 초등학교 동창의 옆집 아저씨 아파트 관리소장님한테까지 무료 음료를 나눔해줘도 된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하이든은 살살 끓어오르는 화를 애써 억누르며 말한다.

"아니 그러면 말을 했어야지. 내가 말을 했으면 그거 하나 못 하게 했겠니? 말은 해줬어야지. 시재점검이 며칠을 안 맞았는데. 에스프레소 한 잔 이런 거였으면 우리도 눈치 못 챘겠는데 파인애플은 큼직큼직하게 들어가니까 눈에 다 보이잖아. 시재점검 안 맞는다고 이야기를 해 줬을 때 친구 외상해줘서 그랬다고 이야기를 해주든가."

"다음부터는...꼭 말씀드리겠습니다."

리스트는 고개를 푹 숙인다. 아직 꼬맹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아담도 어릴 적에 얼마나 실수를 많이 했니... 라고 생각하자 마음이 살짝 말랑말랑해졌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음료를 그냥 무단으로 공짜로 주고 다녀 이런 진상 고객을 만든 건 용서할 수 없었다. (매출에 도움도 안 되는데, 진상이기만 하잖은가!)

"그래그래. 앞으로는 손님한테 무료로 음료 만들어드리면 월급에서 까는 걸로 한다?"

"네에..."

그렇게 해서 리스트가 한 달 동안 까인 돈은 무려 7만원을 넘었고, 전액 바그너 외상으로 인한 월급 삭감이었다. 너 바그너에게 약점이라도 잡혔니, 라고 묻고 싶어지는 액수였지만 하이든은 굳이 리스트의 사생활에 끼어들지는 않기로 했다. 그렇게 리스트의 희생을 통해 공짜 음료를 얻기 시작한 바그너는, 이전보다는 좀 덜한 진상이 되었다. 진상이 아니게 되었다는 소리는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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