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6. [크림 가득 아인슈패너 세 잔과 단호박 아인슈패너 한 잔]
비엔나 토종이 말아드립니다 비엔나 커피
"아유, 누구랑 그렇게 톡을 열심히 해? 여자친구?"
하이든이 슥 슈베르트의 어깨 너머로 폰을 들여다 보자 슈베르트가 새된 비명을 지르며 휴대폰을 떨어뜨린다. 이미 금이 갈 대로 간 불쌍한 휴대폰은 아직 작동한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저렇게 두꺼운 케이스를 끼고서도 화면에 거미줄처럼 금이 가게 하는 것도 재주였다.
"아빠였어요... 아빠요. 아 진짜 깜짝 놀랐잖아요, 점장님!"
"내가 미안하다. 딴짓하느라 정신이 없는 줄 알았지."
사실 딴짓해도 크게 문제없는 시간대긴 했다. 이미 저녁 러쉬도 한 차례 지나간 오후 여덟시였고 조기퇴근을 시켜줄까 고민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슈베르트는 휴대전화를 집어넣는다.
"저번에 취직했다고 하니까 엄청 기뻐하시면서 밥사준다 한 거 그거 약속 잡은 거였어요."
"그래그래 알았다."
웬일로 뭔가 간지나고 있어 보이는 공식 일정이 잡혔다는 베토벤도, 학생회 뭐 때문에 눈코뜰새없이 바쁜 멘델스존과 며칠이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카페인을 줄이기로 결심했다는 프로코피예프까지 오지 않자 카페는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리스트도 축제 공연 준비로 바쁘다면서 몇번 빠진다고 이야기했고 말이다. 이렇게 한적한 것도 오랜만이었다. 슈베르트는 잠시 하이든의 눈치를 보더니 슬쩍 원두를 포르타필터에 다시 담기 시작한다. 하이든이 잠깐 자기도 한잔 할까 고민하고 있던 찰나 문이 벌컥 열리고 풍경종이 딸랑딸랑 울린다.
"어서오세요!"
슈베르트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씨발...' 이라고 읊조렸다. 꼭 이렇게 한 잔 마시려고 하면 손님들이 온다.
들어온 세 명의 손님은 얼굴 벌건 꼬맹이들이었다. 한 명은 초등학생 정도밖에 안 되어 보였고 다른 둘은 고등학생쯤 되어 보였다. 달리기 내기라도 했나 싶었지만 가운데 있는 고등학생의 표정이 어둡고 계속 뒤를 돌아보고 있는 것으로 보아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아 내가 하지 말자고 했잖아!"
창백한 얼굴에 어딘가 우수 어린 표정을 한 학생이 말했다. 우수 어린 표정의 학생은 바이올린 가방과 책가방을 둘다 메고 있었고 얼굴에 반창고가 두세개 덕지덕지 붙어 있는 학생은-아니 사실 학생인지도 모르겠다, 책가방이 없었으니 말이다-바이올린 가방만 들고 있었다.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형제인 듯한 이 셋은 똑같이 불타는 듯한 갈색 눈동자에 똑같이 검은 머리를 하고서 자기들끼리 왁왁거리고 있었다. (검은머리에 갈색 눈, 이라고 이야기하면 멘델스존하고 똑같다는 뜻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는데 그건 아니다. 뭐랄까, 이 셋은 엄청나게 진한 인상이었다. 억양만 아니었더라도 남유럽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테다.)
"아인슈패너 세 잔이요! 빨리!!! 빨리 주세요!!!"
다짜고짜 이만원을 내미는 첫째 (아마도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 고집스런 손에 하이든은 버벅거리며 지폐를 받아들었다. 어린아이의 건강에 커피가 미칠 수 있는 영향을 이야기하려 입을 여는 찰나 다시 첫째가 말을 끊었다.
"거스름돈 필요없으니까 빨리!!! 빨리 그냥 빨리 내려주세요!!!"
첫째의 다급한 재촉에 슈베르트는 아까 본인이 마시려고 내리던 샷을 순식간에 아인슈패너로 둔갑시키고 있었다.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는 둘째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를 보자 하이든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포장이신가요? 핫으로 아이스로..."
"포장이요!!!! 핫!!!!"
아주 화려하고 열정적인 제스처였다. 하이든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아인슈패너를 내리러 간다.
"사장님, 그거 그냥 양 대충 안 맞추셔도 돼요!! 저울 필요없어요 그냥 빨리 커피!!!"
지금 이 상황을 소설로 썼으면 아마 느낌표가 스무 개 가까이 나왔을 것이다. 하이든은 얼떨떨해 하며 원두를 갈고, 필터에 원두를 담은 뒤 레벨링 작업을 하고 (성질 급한 형제들은 아무래도 됐으니까 그냥 빨리 내려달라고만 말했다. 그러면 맛이 없다고!) 투샷을 쫄쫄쫄 따랐다. 정말 급한지 20초도 채 되지 않았는데 빨리 그냥 샷 끊고 크림이나 올려달라는 첫째와 둘째의 아우성에 점점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슈베르트는 벌써 두번째 잔을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재촉 좀 그만 하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고등학생들은 사고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생물들이 아니다, 내가 이해해야 한다, 그렇게 하이든은 스스로를 진정시키며 샷 두개를 아까 받아 놓은 뜨거운 물과 섞었다. 순식간에 커피는 아메리카노가 된다. 슈베르트는 하이든의 진행도를 보고 빠르게 생크림을 붓고 설탕과 소금을 몇 알 넣은 뒤, 거품기를 꺼내 크림을 올릴 준비를 한다. 가면서 마시면 입천장이 다 까질 텐데,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저 급한 모습을 보면 그것까지 신경써 줄 여유는 없을 것 같았다. 마침내 하이든도 아메리카노 베이스를 준비하고 코코아 가루를 꺼낸다.
"망할... 아빠 오면 어떡할 거야?"
"아 몰라, 그럼 좆되고 말아야지."
"저번에 그랬다가 기절했잖아."
"앱새끼 이야기 하지 마."
등골이 서늘해졌다. 뭔가를 강하게 암시하고 있는 대화였다. (심지어 '앱새끼' 라는 말을 입에 올린 게 막내 초등학생이라는 점이 많은 것을 시사해줬다.) 슈베르트는 그런 대화에 집중하기에는 정신도 뭣도 없는지 카푸치노 스푼을 꺼내 꾸덕한 크림을 컵에 얹고 있었다. 그런 하얀 크림 위에 카카오 가루를 뿌려 주면 아인슈패너 완성이었다. 커피가 완성이 되자마자 세 명의 손님들은 컵홀더도 끼지 않은 뜨거운 컵을 손에 들고 '감사합니다! 를 외친 뒤 저녁 거리 속으로 사라져간다. 유리문 바깥으로 똑같이 컵을 높이 들어 크림과 커피가 입안으로 동시에 흘러들어오게 하며 뛰어가는 형제들의 모습이 마치 엄마오리와 아기오리들을 보는 듯했다.
하이든은 삐져나온 머리카락 몇 가닥을 뒤로 쓸어넘기고 슈베르트를 본다. 슈베르트도 하이든을 바라본다. 정적이 흘렀다.
"뭐였죠, 방금?"
슈베르트가 정적을 깨며 멍하니 말했다. 베를리오즈 이후로 이렇게 멍해진 적은 처음이었다. 아인슈패너 어떻게 먹는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잘 먹네, 라는 생각이 와중에 머리를 잠깐 스쳤다. 하이든은 눈을 깜박이다가 커피 한 잔을 더 내린다. 슈베르트가 만들어 놓았던 크림을 들어 거품기로 조금 더 거품을 만들자 거품이 걸쭉해진다.
"모르지. 그렇게 신경쓸 필요는 없지 않을까?"
"으음-거스름돈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팁이다 치고 그냥 가지지 그러니? 저번에 월세 빠듯하다며."
하이든이 월급을 쪼잔하게 주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넘치게 주는 것도 아니지만, 한달 월급이 충분히 먹고 살 정도는 됐을 것이다. 슈베르트는 정 그러시다면야 감사하게 받겠다며 거스름돈을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그 찔러넣는 품새가 어쩐지 가는 길에 잃어버리거나 가는 길에 술 사느라 다 탕진할 것처럼 보여서 썩 믿음직스럽지는 않았다.
하이든은 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편안하고 느긋한 마음으로 커피 위에 크림을 올린다. 걸쭉한 크림이 마치 소프트 아이스크림처럼 커피 위로 퍼진다. 하이든은 보울 안의 크림을 손가락으로 찍어서 핥는다. 바닐라 시럽이 약간 들어간 덕에 달짝지근한 크림이 묵직한 질감과 함께 입안에 퍼졌다. 다시 한 번 손을 씻은 뒤 하이든은 시나몬 파운더를 크림 위에 솔솔 올려 준다. 인스타그램에 올려도 손색 없을 비주얼이었다.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컵에 담긴 아인슈패너를 보며 하이든은 손바닥을 비빈다. 마지막으로 비엔나에 간 지도 꽤 됐지 아마? 하이든은 커피잔을 양손으로 감싼다.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으로 전해져왔다. 시나몬, 크림, 커피의 향이 섞여 올라오자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아아, 이제 진짜로 쉬어야겠는데."
하이든은 아인슈패너를 입에 가져다 댄다. 윗입술은 크림, 아랫입술은 커피에 닿으며 단맛과 쓴맛이 동시에 입 안으로 섞여 들어온다. 처음에는 두꺼운 크림층의 단맛이 확 퍼지다가, 천천히 천천히 베이스가 된 아메리카노의 맛이 섞여들어온다. 거기에 알싸한 시나몬이 달달함과 쓴맛 사이에서 제멋대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여기에 코코아 파우더를 올린다면 달짝지근한 맛이 나지만, 그건 너무 어린애 입맛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잠시 입술을 떼면 입가에 하얀 크림이 남는데 이 크림은 당연히 싹싹 혀로 핥아먹어야 한다.
적어도 그게 어릴 적 하이든이 배웠던 아인슈패너 먹는 방법이긴 했다.
옆을 보자 슈베르트도 신나게 아인슈패너를 먹고 있었다. 하이든처럼 먹었다가는 다 질질 흘리고 쏟아버리는 데다가 크림과 커피 맛을 따로따로 느끼기만 한다고 (잘못 마시는 탓이다) 말했던 슈베르트는 큰 잔에 커피와 크림을 동시에 넣고, 숟가락을 커피 깊숙이 찔러넣어 크림과 커피를 완전히 섞어버리고 있었다. 저것도 먹는 하나의 방법이지. 하이든은 느긋하게 아인슈패너를 한 모금 더 넘긴다.
그때 다시 한 번 문이 열리고 하이든은 화들짝 놀라 커피를 떨어뜨릴 뻔한다. 아마 아인슈패너가 아니라 아메리카노였더라면 그대로 넘쳤겠지만 다행히 크림의 무게가 커피를 약간 눌러주었기에 최악의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하이든은 조심스럽게 커피 잔을 내려놓고 포스기 앞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문 앞에 서 있는 것은 얼굴이 벌개진 사내였다. 마흔이 될까말까한 사내는-그러니까 베토벤과 모차르트랑 동년배 정도일까-가죽 벨트를 손에 들고 씩씩거리며 카페를 둘러보고 있었다.
"어서오세요."
하이든은 어르고 달래는 듯한 투로 '어세오세요' 를 말해 본다. 사내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하이든에게로 고개를 홱 돌린다.
"선생님, 혹시 웬 천둥벌거숭이 같은 남자애 셋 못 보셨습니까?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애 둘이랑 초등학생 애 하납니다. 분명 바이올린을 들고 있었을 텐데."
씨근씨근거리는 모습을 보니 아까 본 아이들 셋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자연스럽게 교사 생활을 오래 해 온 하이든의 마음은 아이들을 지켜주는 쪽으로 기울었다. 어차피 이 사람과 히이든이 학부모-교사거나 해서 위계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구라 좀 쳐도 아무 문제 없을 테다. 하이든은 고개를 저으면서 슈베르트에게 아인슈패너를 내리라는 신호를 카운터 아래에서 은밀하게 준다.
"글쎄요, 바이올린 가방까지 들고 있었으면 눈치를 못 챘을 리가 없는데. 애들 세 명이요? 어떻게 생겼습니까?"
"제 아들놈들입니다. 저랑 똑 닮아서 머리는 시커멓고 고등학생 둘은 저랑 키도 대충 비슷합니다. 머리는 구불구불하고요."
음, 확실해. 아까 왔던 학생들의 말과 종합해 봤을 때 이 벨트를 든 사람이 폭력 가장일 확률이 높아 보였다. 잠깐, 큰애 둘이 고등학생인데 이 사람은 마흔 언저리라고? 어지간히 결혼을 일찍 한 모양이군. 원치 않게 생긴 애들일지도 모르겠어- 하이든이 신경쓸 바는 아니었지만 가족의 사정이 점점 궁금해져갔다. 이렇게 꼬치꼬치 남의 사생활을 파고드는 건 좋지 않은 버릇인 줄 알면서도 이 '아버지' 와 아이들을 떼어놓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아이고, 못 알아볼 수가 없겠네요. 일단 앉으세요, 앉으세요. 아들들 때문에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은데."
하이든은 카운터에서 나와 제일 푹신한 의자 (등받이에는 고급 쿠션까지 받쳐줬다) 를 사내 쪽으로 끌고 온다.
"감사하지만 됐습니다. 아들녀석들 찾으러 가야죠."
"애들도 잘~ 압니다. 집 나가면 개고생인 거 겪어봐야 알죠. 애들 집에 들어오면 그때 호되게 혼내주시는 게 낫죠. 괜히 힘 빼지 마시고. 마침 오신 김에 저희 카페 신메뉴 테스트해주지 않으시겠어요? 저희가 개발하고 있던 게 있거든요."
남자는 천천히 진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이든은 후, 하고 참고 있던 숨을 뱉으며 슈베르트 쪽으로 몸을 돌린다.
"신메뉴 같은 거 개발한 적 없잖아요!"
슈베르트가 나지막하게 소리지른다. 하이든은 곁눈질로 벨트를 만지작거리는 남자를 바라보며 이야기한다.
"왜 그거 있잖아. 그거 꺼내. 페렌츠가 만들던 거."
슈베르트의 눈이 동그래진다. '정파' 바리스타 슈베르트의 눈에는 리스트가 하는 짓이 여간 '사파' 같아보이지 않았을 테다. 하이든이 뭐 끔찍한 걸 만지라는 소리라도 했다는 듯 슈베르트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그걸 꺼내라고요?"
하이든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남자에게로 몸을 돌린다.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입니다. 반갑습니다."
"요한 슈트라우스입니다. 저야말로."
하이든은 벌건 색에서 원래의 색으로 천천히 돌아오는 슈트라우스를 날카롭게 관찰하며 냉수를 한 잔 건네준다. 슈트라우스는 얼음을 꼴깍꼴깍 목으로 넘긴다.
"선생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애들 키우는 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기껏 비싼 돈 들여서 좋은 고등학교 보내줬더니 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바깥으로 쏘다니고나 있어요, 무슨 헛바람이 들어가지고 버스킹인가 뭔가 하는 거나 하러 다니고."
하이든은 (진심은 조금도 들어 있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인다. 자식은 없지만 아이 키우는 게 힘든 줄은 안다. 미친 중학생이 팔에 잇자국을 남긴 적도 있으니 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때리는 게 정당화된다는 건 아니다. 저 벨트를 어떻게 뺏고 싶은데 이걸 참 뺏을 수도 없고. 일단 하이든의 기억에 채찍질이나 매질은 결코 좋은 양육 방법이었던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베토벤이 아버지의 구타로 인해 고막이 약간 파열됐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던가? 조금만 더 세게 맞았으면 입시는 꿈도 못 꿀 정도가 됐을 테다.)
"아들들이 영 말썽꾸러기인가 보네요."
"말도 마시죠. 요제프랑 에두아르트는 착해요. 걔네들은 착실하게 공부하고 요제프는 대학까지 정해놨다 이겁니다. 근데 고등학생이 되어가지고 어? 고등학교 이학년씩이나 된 맏애가 공부를 안 한다니까요. 요한 그 자식은 좀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요한, 그러니까 큰애가 아마도... 급하게 아인슈패너를 시키고 간 학생이 아닐까 싶었다. 하이든은 고개를 천천히 안다는 듯 끄덕인다. 그럼 '아 내가 하지 말자니까' 라고 이야기한 애는 그 착실한 둘 중 하나일 테고. 그나저나 대체 무슨 복잡한 가정사가 있으려나.
"사장님이 고생이 많으시네요. 애들이 다 저 좋은 일이라고 해도 알아듣지를 못하죠?"
"그렇다니까요? 자식들, 다 컸으면 공부나 착실하게 할 것이지. 아유 내가 어? 걔네들 딴따라질 하라고 맨날 그 찐득찐득한 부스 청소하고 마이크 커버 버리고 있겠어요? 다~자기들 좋으라 하는 이야기인데."
"그러니까요. 버스킹 해서 돈이 벌렸으면 개나소나 연예인 됐겠어요. 번듯한 직장 가져서 가정 꾸리고 살아야지."
뭔가 이면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의심이 사라지지를 않았다. 아까 학생들의 대화에 따르면 '기절할 정도로' 팬 적도 있는 것 같은데, 정말 순수하게 잘 되라는 마음뿐이었으면 아이를 그렇게 팰 수가 있나? 하지만 일단 하이든은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는다. 슈베르트 쪽을 보자, 슈베르트는 아메리카노 베이스에다가 단호박 크림을 올리는 중이었다. 과연 리스트가 고안한 조합답게 기이한 조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슈베르트는 쑥 이파리로 크림을 장식한 뒤 슈트라우스의 앞에 트레이를 내려놓는다.
슈트라우스는 아인슈패너를 목구멍으로 꿀꺽꿀꺽 들이키고, 크림을 절반, 커피를 삼분의 일 정도 먹었을 때 잔을 내려놓는다.
"선생님처럼 저를 이해해 주시는 분은 처음입니다. 여편네도 말을 안 듣는다니까요? 아니 그 여편네는 결혼을 나랑 했지 우리 아들들이랑 했나, 왜 애들 편인지 모르겠어요."
이런 패드립은 또 처음 들어보네, 하이든은 하하 웃으며 뺨을 문지른다. 슈트라우스는 다시 아인슈패너를 들이키고 잔을 완전히 비운다.
"이거 맛 참 이상하네요. 달달한데 원래 아인슈패너보다도 크림이 걸쭉하고 약간 텁텁하고. 맛은 있네요."
"아, 그래요? 다행이군요. 당연히 아직 저희도 더 개량을 해야겠지만요."
슈트라우스는 냅킨으로 입가를 슥슥 닦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난다. 하이든은 빈 잔을 슈베르트에게 돌려준다.
"시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장님 아들들 보게 되면 알려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덕분에 공짜 음료도 마시고. 종종 찾아오겠습니다."
아, 참... 종종 찾아오라고 그렇게 한 건 아니었는데. 하이든은 대답 대신 사람좋게 허허 웃으며 문을 열어준다. 나가면서 슈트라우스는 벨트를 다시 바지에 차고 하이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애들 지금쯤이면 잘 튀었겠지?"
"튀어봐야 어딜 가요? 집에 가면 또 아빠한테 발견당할 텐데."
"모르지. 루트비히는 찜질방에서도 자 보고 노숙도 해 보고 다 해봤다 그랬는데."
슈베르트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수세미에 세제를 묻힌다.
"차암-집에 들어가는 게 싫어지는 아이들이 있다는 게 마음이 너무 아프네요."
이야기 시작 부분에서 잠깐 언급했겠지만 슈베르트는 가족들과 꽤 사이가 좋은 편이다. 저번에 형 누구더라, 그, 그, 페르디난트, 그래. 페르디난트도 찾아와서 대견하다면서 모자란 동생 잘 부탁한다면서 인사도 하고 가고 그러지 않았던가. 직접 보기까지는 모르는 법이다. 하이든도 가난하지만 제법 사이좋은 집 출신이었고... 아참, 미하일에게 또 연락 한 번 할 때가 됐는데.
"그러니까 말야..."
하이든도 한숨을 푹푹 내쉰다. 학교랑도 안 맞고 집에서도 편치 못한 아이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정말. 혹시라도 아까 그 학생들이 온다면 그때는 돈을 받지 말아야겠다 하는 생각이 잠깐 머리를 스친다. 아, 씁. 그래도 또 안 받을 수는 없지. 여기가 무료 급식소는 아니니까 말이다. 하이든도 먹고는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바깥을 쓱 보자 더 이상 슈트라우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이든은 혀를 끌끌 차며 세 명의 아이들이 어떻게든 저 집을 빨리 탈출할 수 있기를 기도해준다.
"나도 아이가 있었더라면 잘 키울 수 있었을 텐데..."
거리를 쓸쓸하게 내다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하이든은 들어가서 슈베르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오늘은 그냥 조기퇴근하자고 말한다. 하이든 카페는 그날 평소보다 한 시간을 일찍 닫았다.
하이든이 슈트라우스 집안에 대한 소식을 마저 듣게 된 것은 바버 헤어에서였다. 미용실 특유의 스몰토크 없는 바버 헤어는 평화로운 곳이었으나, 그 스몰토크를 대신해주는 로시니가 있었으니 별반 다를 바는 없으려나. 하이든은 오랜만에 너무 길어버린 머리카락을 자르고 다듬으려 자리에 앉았고, 바버는 가위를 가져와 싹둑싹둑 하이든의 머리카락을 잘라낸다.
"하 사장님, 그거 들었어요? 슈트라우스가 또 아들이 기절할 때까지 애를 팼다더라고요."
로시니는 짐짓 목소리를 낮추어 말한다. 하이든은 놀란 표정이 되지만 머리카락을 움직였다가는 엉망진창으로 잘릴 걸 알았기에 정면의 거울을 바라보면서 말한다.
"슈트라우스? 손님으로 딱 한 번 밖에 못 본 분인데요. 제가 잘 몰라서."
"아니 왜, 슈트라우스 있잖아. 까만머리에. 노래방 하는 사람. 여기서 걸어서 한 이십분 정도인가? 거기에 있는 노래방. 열정노래타운, 못 들어봤어요? 얼마 전에 본처 버리고 딴집살림하러 간다고 그래서 우리 상인연합회가 얼마나 어? 그랬는지 몰라. 그러고 보니 사장님은 상인연합회 들어올 생각 없어요? 우리 이번에 상인연합회 모임 할 때 사장님 가게에서 할까 생각중인데."
"하하, 생각해 보죠. 그나저나, 슈트라우스 씨는 애들은 어쩌고 본처를 버린대요?"
"그니까! 본처 사이에서 애가 셋인데 딴집살림하면서 낳은 애한테 첫애 이름을 붙여줬다 그러더라니까? 이야, 아내가 길길이 날뛰면서 어? 막 설득도 해 보고 협박도 해 보고 그랬는데 다른 집 살림을 하러 갔다잖아요!"
로시니는 마구 흥분해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맏애가 지금 몇 살 정도길래?"
"큰애는 이제 어른 다 됐지. 근데 본처랑 사이 막내는 아직 애기예요, 애기. 열 살도 안 됐을걸요? 어린애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겠어요."
"아이고... 애들은 뭔 죄래요. 뭘 했다고 애를 그렇게 패나 몰라. 아니 딴집살림을 하면서 애한테는 관심을 가지는 거예요?"
"말해 뭐해! 배알이 꼴리는 거겠죠."
하이든은 대체 노래방 사장이 왜 아티스트가 되려고 버스킹 하는 아들들에게 질투심을 느낀다고 생각하는지 알아낼 수 없었지만 로시니의 말을 들으며 잠자코 고개를 끄덕인다.
"요한, 그니까 아들래미 쪽이 나한테 우리 가게에서 공연하게 시켜주면 안 되냐고 그랬거든요? 근데 아이고, 애비가 하도 막 뭐라뭐라 그러는 바람에 해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거야. 내가 미안해서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니까요. 요한 걔가 사실 음악을 하고 싶은 거거든, 동생들은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음악 하는 게 뭐 그리 나쁘다고. 슈트라우스 씨도 노래방 하시면서 참 내로남불이시네."
"그러니까 그러니까! 참 슈트라우스도 불륜을 할 거면 은밀하게 하든가 누가 그렇게 본처한테 대놓고 쪽을 주냐니까요? 그짝 아내도 참 불쌍해, 남편 쓰러진 거 간호해 놓았더니 다른 여자한테 쪼르르 달려가고 말야."
은밀하게 쪽을 주는 건 괜찮다는 소리인가. 그보다 당신도 지금 처랑 불륜으로 만난 거라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지만... 하이든은 턱을 만지작거린다. 본인이라고 떳떳하진 않다만, 애초에 쌍방으로 불륜을 하고 있기도 했고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어서 결혼한 지 3년이 채 안 됐을 때 이혼을 해버렸으니 면죄부가 조금은 주어지지 않나 싶었다.
영 찜찜한 엔딩인 듯했지만, 다행히 요한 (아들) 은 종종 카페에 찾아왔고-그때마다 얼굴에 멍이 하나씩 더 늘어서 오긴 했지만-그때마다 아인슈패너의 질감을 칭찬하고 양쪽 엄지를 치켜올리며, 흔들리는 마차에서도 마실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아인슈패너의 원래 의도를 살리는 양 급하게 잔을 들고 뛰쳐나갔다. 그리고 요한은 다행히도 꽤나 밝은 아이 같아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요한에게 무상으로 음료를 제공해 줄 의사가 생겼다는 소리는 아니다. 계산은 철저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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