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오세요 프란츠 카페에

EP 7. [홍차 두 잔, 카페 라떼 한 잔, 밀크셰이크 한 잔, 에스프레소 한 잔, 그리고 라 바르바야타 한 잔]

카페가 커피 공방이 된 건에 관하여

이 정도 이야기했으니 잠깐 쉬어갈 때가 된 것 같다. 그리고 프란츠 카페도 쉬어갈 때가 됐다. 음, 정확히 말하자면 프란츠 카페가 쉬고 있다고는 할 수 없겠다. 쉬고 있는 것은 하이든뿐이었고 슈베르트랑 리스트는 바쁘게 커피를 내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무려 한 테이블에 앉은 7명의 상인연합회 손님을 대접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슈베르트의 얼굴에 스친 표정은 실로 볼만했다. 게다가 이 상인연합회 사장들만 가게에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더욱이 말이다. 작은 테이블 세 개를 붙여놓고 벽을 하나 통째로 차지하고 앉은 사람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았다.

호아키노 로시니, 헨델호프 사장.

주세페 베르디, 피오리 베르디 사장.

모리스 라벨, 상표사 사장.

에드워드 엘가, 형제악기사 직원.

에릭 사티, 하얀빨래방 사장.

알렉산드르 보로딘, 초원약국 약사.

그리고 이제 (연차로는) 막내,

요제프 하이든, 프란츠 카페 사장.

이곳 상인회에 소속된 상인들이었다. 사실 상인연합회라고는 하지만 상인같은 느낌은 별로 없는 사람들이었다. 상인들은 만나면 문학 이야기를 하고 작가들은 만나면 돈 이야기를 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었는데, 이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돈 이야기는 뒷전이었다. 일단 이 상인들 가운데서도 독보적으로 상인같지 않은 둘이 모리스 라벨과 에릭 사티였다.

모리스 라벨은 가게 맞은편의 상표사 사장으로, 가게 이름이 왜 '상표사' 냐고 물어봐도 '글쎄요...?' 라고 대답할 뿐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시계 말고 각종 보석류도 추급을 하고 있는 듯했는데, 가끔 지나가다가 가게 창으로 들여다보면 고개를 숙이고서 돌 같은 걸 열심히 깎아내고 있었다. 나이가 가늠이 되지 않는 이 백금발의 시계 수리공은 멍하고 생활패턴은 불규칙한 데다가 까탈스러운 사람이었다. 비유하자면 '난, 밥은 고기만 먹어. 술은 프랑스 고급 와인만 마셔. 변하는 건 무조건 싫어해.' 타입이랄까. 겨울철에 뱅쇼라도 내게 되면 '이건 무슨 싸구려 사만원짜리 와인이잖아요!' 하고 소리지르지나 않을까 무서웠다. 뱅쇼는 돈이 좀 생길 때까지는 겨울 한정 메뉴로 내서는 안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라벨은 카페에 자주 오지는 않았지만, 가끔 왔을 때면 꼭 접시와 코스터, 숟가락을 어떻게 놓아야 할지 한참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며 고민하다가 사진을 찍곤 했다. 방금 전에는 까페 오레를 시키겠다고 고집했지만 하이든이 핸드드립 커피는 지금 당장은 기구를 안 갖고 있어서 어렵다고 하자 마침내 까페 라떼로 타협해 줄 정도로 까탈스럽고 피곤한 손님이었다. 

에릭 사티는 길모퉁이의 하얀세탁소 사장이었는데, 정작 '하얀세탁소' 사장인 것 치고는 하얗게 입고 다니는 편은 아니었다. 차콜 그레이 목폴라티에 차콜 그레이 페도라에 차콜 그레이 바지에 차콜 그레이 코트를 입고 있어 사람이 거대한 회색 덩어리처럼 느껴졌다. 알이 두꺼운 동그라미 안경이 인상적이었다. 가끔 뭔가 재치있는 말을 하긴 하는데, 센스가 영 부족한 건지 하이든으로서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는 유머였다. 로시니조차도 대체 사티가 뭐하는 사람인지는 알 수가 없다며 어깨를 으쓱했기 때문에 하이든도 고개만 갸웃거리게 되는 사람이었다. 

"자자, 시작해 보시다. 먼저 우리 새 회원 프란츠 요제프 사장님을 다들 환영해 주시고."

어색한 침묵을 로시니가 깼다. 한때는 의자에서 일어나기도 힘들 정도의 비만이었지만 지금은 그래도 많이 나아졌다는 로시니는 유쾌하고 활발한 사람이었다. 본인은 '아닌데? 나 진짜 우울한데?' 라고 이야기했고 그게 사실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탈리아인인 이상 어느 정도의 활발함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종종 카페에 오면 절대 음료 한 잔으로 멈추는 법이 없는 로시니는 고마운 손님이었지만 전화로 꽥꽥 소리지르다시피 할 때는 약간 얼굴이 붉어졌다. 운영하는 곳이 호프집이다 보니 목소리가 커지는 것도 인지를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로시니 씨, 저는 오스트리아 출신이라고요. 이탈리아가 아니라. 어쨌든 로시니는 이곳 상인연합회의 리더였고 다른 사람들이 하이든을 향해 박수를 친다. 하이든은 가볍게 목례하며 감사를 전한다.

"하 사장님, 신입이신데 무슨 뭐, 막 장기자랑 같은 거 할 거 없어요? 노래나 춤이나? 신입이면 신고식을 해야지."

"제발 하지 맙시다."

피오리 베르디 사장 베르디였다. 하이든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시키면 못할 건 없지만, 그래도 한 40대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육십도 넘은 본인이 노래를 뽑아 봐야 '그뭔씹' 되지 않겠는가? (리스트가 가르쳐 준 신조어였는데, '그게 뭔데 씹덕아' 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씹덕' 은 어떤 한가지에 몰두하는 사람인데, 그 가운데서도 남들과는 다르게 정말 흔하지 않은 것에 집착하면 '씹덕' 이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고 한다.) 베르디는 이탈리아인이었지만 이탈리아인치고서는 차분하고 조용한 축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가끔 와서 에스프레소 한 잔을 들이키고 가는 그는 대-단히 과묵하고 비밀스러운 사람이라서, 베토벤이나 프로코피예프, 멘델스존, 베를리오즈, 슈트라우스 (아버지와 아들 모두) 심지어는 쇼스타코비치까지도 하이든과 스몰 토크를 하는 와중에도 절대 하이든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아, 한 번 있긴 했는데 '크레마가 잘못 추출된 것 같다' 라는 이유였던가. 하이든도 사실 정확히 아는 것은 없었지만, 떠벌거리는 로시니의 입에 따르면-로시니는 이 상권 모든 소문의 진원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베르디는 원래 잘 나가는 사업가였던 것 같지만, 사고로 아내와 아들을 잃고서 은퇴한 뒤에 아내와 함께 열기로 했던 꽃집을 이곳에서 혼자 열어 운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내랑은 이혼했고 자식은 없던 하이든은 부재의 괴로움은 알아도 상실의 괴로움은 알 수 없었기에 베르디에게 섣불리 말을 걸기 어려웠다. 피오리 베르디 가게 창 앞에는 작은 텃밭이 있었는데 방울토마토나 상추같이 간단한 작물을 기르고 있었다. 아내와 아들을 잃은 사건이 얼마나 된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저 초록빛 식물들이 그를 조금은 치유해 주고 있으려나 궁금해졌다. 어쨌든 베르디는 장기자랑 같은 것이라면 딱 질색팔색했고 덕분에 하이든도 아들뻘 사장들 앞에서 창피할 일 없어졌으니 다행인 일이었다.

하이든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것은 얼굴이 약간 퉁퉁하게 생긴 약사 보로딘이었다. 툭하면 잔병치레를 하는 리스트가 들고 온 가방에서 초원약국 약봉투가 삐죽 나와 있는 것을 본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보로딘의 눈길이 힐끔힐끔 라벨이 품 안에 안고 있는 고양이를 향했다. 아마 고양이 애호가인 모양이었다. (참고로 하이든의 카페는 얼마든지 동물 환영 존이었다. 알레르기가 있는 손님들이라면 미안한 일이었지만, 앵무새를 키우는 하이든으로서는 털이 얼마나 날리든간에 동물 출입을 제한하는 것은 절대 할 수 없었다.) 하이든은 아플 일이 별로 없었기에 약국은 오며가며 간판이랑 인사나 해 본 게 전부였지만 리스트의 말에 의하면 가끔 바지를 안 입고 출근하는 일은 있어도 좋은 약사라고 한다. 어떻게 바지를 안 입고 출근할 수 있는지는 미스터리였지만 역시나 물어보면 보로딘이 민망할 것 같았다.

그리고 이 가운데 가장 어린 사람이 형제악기사 '직원' (자그마치 사장이 아니라 '직원!') 인 에드워드 엘가였다. 엘가는 대학을 졸업이나 했나 싶을 정도로 젊어 보였는데, 어쩌면 대학에 아예 못 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제악기사' 는, 이번에는 로시니가 아니라 프로코피예프가 말해준 것에 따르면-프로코피예프는 피아노과 학생이었기에 본 적이 있나 본데-아마 엘가네 아빠와 삼촌이 같이 운영하고 엘가가 아르바이트생으로 있는 가게인 모양이었다. 왜 상인연합회에 아들이 나오고 있는지는 불명.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한테 (콧수염은 길렀지만) 상인연합회라니. 여기는 노땅들끼리 모여서 수다떠는 자리인데. 과연 엘가는 이 자리가 어색한지 손가락을 꼼질꼼질거리며 빨리 음료라도 나왔으면 좋겠다는 듯한 눈빛으로 카운터를 보고 있었다.

...가만, 음료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듯한 눈빛이라고? 생각해 보니 이 인간들 중 단 한 명도 여기 와서 주문을 한 기억이 없었다. 카운터 쪽을 흘깃 보자 리스트가 심심한지 폰을 손에 들고 스크롤하고 있었다. 리스트의 좋지 않은 버릇이었는데 할 일이 없을 때면 꼭 인스타그램 릴스나 유투브 숏츠나 틱톡 같은 것들을 보고 있었다. 물론 인스타그램을 개설해서 그걸 운영하고 가게를 홍보해 주고 있는 것도 리스트였고 홍보 작업도 잘 하고 있는 걸 알겠지만 무슨 제로투 이런 거나 보고 있으면 그때는 가끔 대나무 단소를 들고 가서 뒷머리를 한 대 톡 때려주고 싶었다. 하이든도 아무리 열려 있으려고 노력을 한다고 해도 결국 한때 중고등학생들 가르치던 사람인지라, 자꾸 폰은 폰 가방에 반납시키고 싶단 말이다. '하늘에서 아담이 네 꼴 보면 뭐라고 하겠니!' 라고 소리칠까도 생각해 봤지만, 아담 없이 저 정도로 잘 자란 거면 그냥 잘 자란 정도가 아니라 훌륭하게 자란 거지 싶어서 입은 닫고 있었다. 말이 잠깐 샜지만, 본론으로 돌아와서.

"저기 그런데. 아무리 제가 오늘 가게를 연합회 장소로 내드린다고는 하지만. 그, 음료는 시켜주셔야 합니다. 제 직원이 커피를 안 시키면 화를 많이 내거든요."

하이든은 분무기로 화초에 물을 뿌리고 있는 슈베르트 쪽을 본다. 고객이 들어와서 스무디를 시킬 때마다 '맛알못. 상대 안 함.' 이라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슈베르트였다. 하물며 음료를 시킨 손님에게 그 반응이 어떤지는 알 만했다. 카페는 소통의 장이고, 손님들이 앉아서 떠들면서 나름대로의 모임을 구축하고, 이런 건 정말 좋아했지만... 아니 그것도 카페 다니는 사람들 입장에서 음료를 시켜 주긴 해야 고마울 것 아닌가. 하이든의 말에 열두 개의 눈이 하이든을 향한다. (엘가는 고맙다는 눈빛을 보내주고 있었다)

"저는 홍차로 부탁드릴게요. 우유 넣어서."

엘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니 홍차라니, 정말 지독하게 영국인적인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하이든이 지금까지 카페를 운영하며 홍차는 딱 다섯 번 정도 주문받아 봤는데, 한 번이 지금이었고 두 번이 멘델스존, 그리고 나머지 두 번이 또 다른 영국인 손님이었다. 하이든도 영국을 꽤 좋아했는데-거기 여자랑 장거리 연애도 해 봤고 학교에 방학이 좀 길게 난다 싶으면 한번씩 다녀오기도 했다- 영국인들은 원 오기만 하면 홍차니 말이야.

"블랙퍼스트로?"

"네, 블랙퍼스트."

"전. 밀크셰이크. 부탁드립니다."

사티였다. 라벨이 아까 소개할 때 '하얀세탁소 사장답게 하얀 것밖에 안 먹는 분' 이라고 소개해주긴 했었는데, 진담인지 농담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보통이라면 그냥 농담을 좀 과장했겠거니 했을 텐데, 뭔가... 이 인물은... 정말 그렇게 먹는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하이든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문을 끼적끼적한다.

"늘 하던 대로요."

베르디였다. 하이든은 고개를 또 끄덕 한다. 베르디는 올 때마다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에스프레소 소비량으로는 아마 이 카페에서 베토벤과 투탑을 달릴 테다. 고향에서 마시던 맛 그대로라면서 가끔 멜로 눈깔을 보내는 베르디는 슈베르트가 가장 좋아하는 손님 가운데 하나였는데 쓸데없이 말을 걸고 다니지도 않고, 커피, 그것도 정통 에스프레소 맛 찾는 사람이 얼마나 귀한지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같은 이유로 슈베르트는 베토벤도 좋아했다.) 늘 하던 대로라고 하니까 도피오라는 것도 체크를 해둬야 했다.

"보로딘 씨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보로딘은 몹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라벨의 고양이를 계속 쓰다듬었다. 약사라서 건강에 가장 신경쓰는 메뉴가 무엇일지를 고르고 있나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어차피 카페에 들어온 이상 딱히 건강에 좋은 메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빙기 청소는 열심히 하고 있을 테니 식중독은 안 걸리겠지. 하이든은 눈을 천천히 깜박이며 보로딘의 말을 기다린다.

"여기 차 한 잔이 보통 몇 밀리리터 정도죠?"

"사백 밀리리터 정도 되겠네요."

"사백..."

보로딘은 다시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이 되었다가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고개를 들으며 활짝 웃었다.

"그러면 샷글라스로 마시면 예닐곱잔은 나오겠네요?"

"아무래도 그...렇...죠?"

하이든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소주를 마시는 것도 아니고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것도 아니고 굳이 샷글라스 이야기가 여기서 왜...?

"그러면 홍차로 부탁드리겠습니다! 혹시라도 그린필드 홍차가 있으시다면 더 좋고요... 그리고 잔을 샷글라스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대체 왜. 왜 그런 짓을 하는 건데. 설거지 하는 양을 줄여주겠다는 노력인 거냐고. 하이든은 그런 마음은 티를 안 내려고 하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근데 어차피 똑같이 사백 밀리리터잖아요."

라벨이 하이든의 의문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이 보로딘에게 따졌다.

"사백이라고 하더라도 다르죠. 에스프레소 투샷 여섯 잔이 많아 보여요, 아니면 아메리카노 한 잔이 많아 보여요?"

보로딘은 마치 그게 핵심이라는 듯이 검지를 들고 이야기했다. 하이든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과 아메리카노 한 잔을 어느 정도 양으로 판매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본다.

"아니 에스프레소 여섯 잔이 더 많겠죠."

사티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하이든은 고개를 갸웃한다. 에스프레소 한 잔이 투샷으로 내려서 제공되니 보통 60ml, 아메리카노 한 잔이 보통 360ml 정도였으니 사실 에스프레소 여섯 잔이랑 아메리카노 한 잔의 양은 똑같았다. 그 안에 카페인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생기겠지만 말이다.

"그게 핵심이예요! 에스프레소 여섯 잔과 아메리카노 한 잔의 음료 양은 똑같단 말이죠. 그런데 에스프레소 여섯 잔이 더 많게 느껴지잖아요. 그러니까 실제로는 차를 그렇게 많이 마시지 않지만, 심리적으로 많이 마시는 것처럼 느끼려고 작은 컵에 부탁드리는 거예요!"

보로딘은 그런 생각을 해낸 본인이 자랑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조삼모사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지만 보로딘이 저걸 원한다고 하니 손님에게 태클을 걸 수도 없었던 하이든은 그냥 포기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출근할 때 바지 입는 것도 빼먹는 사람에게 뭘 바라나 싶었다. 약사라고 하면 분명 머리가 나쁜 사람은 아닐 텐데, 역시 좀 이상했다.

"라벨 씨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카페 오레로 주세요."

하이든은 눈을 천천히 깜박인다. 뭔소리야. 카페 라떼를 달라는 건가.

"카페 오레 지금 안 돼요, 죄송합니다! 핸드드립 장비가 지금 없어요."

슈베르트가 귀신같이 라벨의 말을 알아듣고 머리 위로 x표시를 해보였다. 오레랑 라떼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모양이었다. (나중에 하이든이 알게 된 사실이지만, 카페 오레는 핸드드립 베이스로 내린 커피를 우유와 섞고 라떼는 에스프레소 머신 베이스의 커피를 우유와 섞는 커피였다.)

"뭐라고요? 그럼 지금 나한테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내린 커피를 먹으라는 거예요?"

"에스프레소 머신이 뭐 어때서?! 애초에 요즘 프랑스 카페도 가면 카페 오레라고 적어놓고 카페라떼를 팔더구만!"

베르디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런...에스프레소 머신이 처음에 독일에서 개발되어 이탈리아에서 널리 보급되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베르디가 카페에서 딱 한 번 소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는데, 베를리오즈가 리스트에게 '파인애플 피자' 를 시켜놓겠다고 한 날이었다. 그랬더니 어떻게 감히 파인애플 피자를, 이건 피자에 대한 모독이다, 이탈리아에 가서 피자를 먹어보고 그 소리를 하는 거냐, 어떻게 피자에 파인애플을 올릴 생각을 하냐, 야만인이냐, 아주 김치를 피자에 올려먹어라 같은 소리를 하며 베를리오즈에게 쌍욕을 했었다. 정작 논쟁 자체는 잘 해결되었고 베르디랑 베를리오즈는 훈훈하게 연락처까지 교환하면서 끝난 사건이긴 했지만 베르디에게는 이상하게 그 이탈리아 국민 자존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 왼쪽에 로시니는 아무 생각 없어 보였지만.

"흥, 라떼는 기름진 맛이 난다고요. 얼마나 느끼한데요."

라벨은 코웃음을 치며 보로딘의 무릎에서 편안히 누워 있던 샴고양이를 다시 자기 품으로 데리고 왔다. 주인의 품으로 돌아온 고양이는 기분좋게 가르릉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유 귀여워라.

"아직 맛있는 커피를 못 마셔보셔서 그럴걸요?! 그 지방맛 따위 신경 안 쓰이게 만들어 드리죠!"

갑자기 승부욕이 붙은 슈베르트가 외쳤다. 그리고 라벨이 뭘 말리기도 전에 커피를 내리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돈은 안 내도 상관없으니 내 바리스타로서의 자존심을 시키겠다, 내게 너를 내 카페라떼 맛에 굴복하게 만들어주겠노라 하는 의지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아이고 프란츠야...그런 쓸데없는 거에 신경을 쓸 시간에 제발 설거지하다가 잔 안 깨게 설거지에나 신경 좀 써라, 하고 싶었지만 이미 늦은 모양이었다. 그 사이 주문을 받아두었던 리스트가 멀쩡한 티컵 하나와 샷글라스 하나를 들고, 다른 한 쪽에는 홍차 주전자 두 개를 들고 엘가와 보로딘 앞에 내려놓았다. 티 필터 속의 찻잎이 은은한 향을 내뿜었다. 보로딘과 엘가는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까딱하고 차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곧 리스트가 깔끔하게 가장자리를 닦은 드미타세를 베르디 앞에 놓아준다.

"나머지 세 분은 카페라떼, 밀크셰이크, 그리고..."

하이든은 로시니에게로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헨델호프 체인점 가운데 가장 독자적 메뉴와 술을 많이 개발한 로시니가 주문을 안 한 데서 위화감을 느껴야 했다. 생각해 보면 누구보다 빠르고 급박하게 주문했을 법한 캐릭터였는데.

"아...그...하...아니다... 그건 없을 테니까... 하... 그냥 카푸치노 한 잔."

리스트가 홱, 매처럼 고개를 돌렸다. 수많은 괴식-아니, 음, 실험적인 신메뉴를 개발해온 리스트는 궁금증에 견딜 수 없다는 듯이 펜 뒤를 딸깍딸깍딸깍거렸다.

"'그거' 가 뭔데요, 사장님? '그거'?"

희번득이는 청회색 눈이 조금 무서웠다. 언젠가 슈베르트가 여기 모든 대학생들은 미쳐있다고 말해줬었는데 아무래도, 리스트도 예외 없이 포함이었나보다.

"하 그게... 아니다, 그건 어렵지."

"에이 사장님, 저희 슈베르트 형도 있고 그런데 당연히 되죠. 뭐든지 해드릴게요, 말만 해주세요."

"페렌츠야, 내가 허락한 적 없다."

하이든은 작게 말한다. 하이든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리스트는 하이든을 쿨하게 무시하고 계속 눈을 빛내며 로시니를 바라보았다. 결국 로시니는 리스트의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연다.

"그게...하... 라 바르바야타라는 건데, 나폴리 카페가 그걸 기가 막히게 했거든. 물이랑 초콜릿이랑 커피랑 휘핑 크림이 기가 막혔거든... 맨 위에는 휘핑 크림이 올라가는 거였어."

슈베르트 쪽을 보자 슈베르트도 구미가 당기는지 로시니의 말을 유심히 듣고 있었다.

"그거 저희가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또 하이든의 의견은 묵살. 이게 문제였다. 페렌츠나 프란츠나 흥분하면 멋대로 저질러 버린다. 하지만... 그래, 하이든이 커피 만드는 것도 아니고 책임질 것도 없으니 그냥 놔둬두기로 한다. 주문을 다 받은 리스트는 카운터 뒤로 들어가고 하이든도 일크셰이크를 만들기 위해 카운터로 간다. 우유, 바닐라시럽 조금, 연유 약간에 얼음을 갈아주자 순식간에 새하얀 밀크셰이크가 만들어진다. 하이든은 만족스러워 보이는 사티를 뒤로하고 카운터로 간다. 리스트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이 음료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고민중이었다.

"아인슈패너랑 비슷한 느낌인 걸까요?"

"그렇지 않을까? 크림이 위에 들어간다니까."

"물이랑 초콜릿 비율이 어떻게 되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폴리에 가본 적 있으세요?"

"없지, 교사 월급이 그리 넉넉치가 않아요."

하이든은 코코아 파우더와 크림을 리스트의 앞에 놓아준다

"잘 실험해보려무나. 로시니 씨가 만족할 때까지."

리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유와 코코아 파우더를 아구 섞는 모습을 보며 다시 상인연합회 테이블로 고개를 돌린 하이든은 혀를 쯧쯧 찬다.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팔짱을 끼고 고개를 치켜든 라벨과, 표정이 썩은 슈베르트, 그리고 눈치를 보며 자기 음료를 홀짝이고 있는 나머지 넷. (특히 한 모금 하려다가 결국 눈치를 보며 잔을 내려놓는 보로딘은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이건 용납할 수 없어요. 핸들링을 엉망으로 했잖아요. 이걸 어떻게 하트라고 부르겠어요?"

하이든은 곁으로 가 슬쩍 슈베르트의 라떼아트를 본다. 충분히 괜찮은 하트였다. 물론 슈베르트가 맛과 달리 라떼 아트는 좀 부족하긴 했지만, 약간 통통하다는 걸 빼면 충분히 괜찮은 하트인데? 슈베르트는 한숨을 푸욱 내쉬고 라벨의 손에서 라떼를 받아 돌아간다. 그리고 또 한 잔을 더 내려 하트를 만든다. 이번에는 끄트머리가 살짝 뾰족하게 빠져나왔다는 걸 빼면 완벽한 하트였다.

"하트에 꼬리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요. 다시 해주세요."

슈베르트가 나직이 모국어로 욕을 내뱉고 라떼를 다시 가져갔다. 하이든은 슈베르트의 '망친' 라떼 두 잔을 홀짝이며 끊임없이 '라 바르바야타' 를 시도하는 리스트를 바라본다. 한 쪽에서는 하트 모양 제대로 잡겠다고 실험을 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추억의 레시피를 재현하려는 실험을 하고 있는 걸 보자 웃음이 나왔다.

"그 '라 바르바야타' 는 레시피 안 나오니?"

"안 나와요, 별 이상한 카페를 다 가셨다니까."

리스트는 혀를 끌끌 차며 너무 묽어진 핫초코를 싱크대에 버린다. 아이고, 저게 다 얼마인데, 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슈베르트는 피처를 들고 독기가 오른 눈으로 다시 하트를 만들어 트레이에 올려놓는다. 하이든은 라벨의 앞에 그 하트가 그려진 잔을 놓아 주지만, 이번에는 하트의 색이 균질하지 않다는 이유로 잔이 되돌아왔다. 그렇게 하이든이 두 번을 더 왔다갔다했지만 라벨은 두 번을 다 돌려보냈다. 슈베르트의 팔에도 힘이 빠지고 리스트는 하도 초콜릿 맛을 많이 봐서 토할 것 같을 때쯤에서야 슈베르트가 '포기!'를 선언하고 리스트를 부른다.

"그냥 내가 퇴근시간이 다 되어서 알바한테 시켜서 모양이 망한 컨셉으로 가자. 어때?"

"그게 차라리 낫겠어요-프랑스인들은 하여간 못 써."

베를리오즈를 친구로 둔 리스트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았지만. 리스트는 슈베르트가 거품을 낸 피처를 손에 들고, 슈베르트의 지도에 따라 카푸치노 잔을 기울여 우유를 후욱...

...쏟는다.

"하이고."

아까까지는 그래도 잔이 되돌아왔으니까 원두가 아까워서 눈물이 난 하이든이 마셔 없앨 수라도 있었지, 쏟은 건 진짜 '낭비' 였다.

"..."

장렬하게 바닥에 쏟아져 전사한 커피를 보고서는 슈베르트도 한숨을 내쉰다.

"하긴...페렌츠는 이런 거 하기엔 좀 덜 섬세하긴 하지..."

슈베르트는 그나마 컵이 안 깨진 게 다행이라 중얼거리며 카푸치노 잔을 싱크대에 내려놓는다. 하이든은 바닥의 갈색 얼룩을 빡빡 닦아 본다.

"아녜요! 제가 해보겠습니다! 진짜로! 저 잘할 자신 있어요!"

하이든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슈베르트에게 리스트는 그냥 냅두고, '라 바르바야타' 나 만들어 보는 게 어떻겠냐고 말한다. 그 말이 일리가 있다 생각했던 슈베르트는 얼마 남지 않은 코코아 파우더와 그 두 배 정도 되는 설탕을 작은 냄비에 넣고 끓이다가, 물 20ml를 더 넣고 하이든에게 맛을 보게 시킨다. 부드럽고 크림같은 식감에 엄지를 치켜올리자 신이 났는지 슈베르트가 콧노래를 부르며 커피를 내려 온다.

"그리고 이제 아마 제가 보기에, 초콜릿을 먼저 넣고, 그 위에 샷을 올리고, 마지막에 휘핑 크림을 얹어주는 것 같거든요."

하이든은 고개를 끄덕이며 '라 바르바야타' 를 바라본다. 칼로리 폭탄이겠는걸 하는 생각이 들지만 로시니의 살집을 보면 오히려 이 음료에 로시니만큼 잘 어울리는 사람도 없겠다 싶었다. 슈베르트는 손짓으로 또 스팀우유를 한 번 더 쏟은 리스트를 불러온다.

"이야, 이거 블-아니 제가 아는 칵테일을 닮게 생겼네요."

리스트는 헛기침을 하며 '라 바르바야타'를 본다. 사실 커피 육십 밀리리터에 핫초코 백사십밀리리터, 그리고 휘핑크림 잔뜩이 올라가는 이 음료가 커피라고 불러 줄 수 있긴 한 건가 싶었지만, 카페라고 커피만 파는 것은 아니긴 했으니 또 상관없나 싶었다.

"마셔 봐봐."

슈베르트가 리스트에게 시키고 리스트는 '라 바르바야타' 를 홀짝여본다.

"와, 이거 진짜 달다. 이건 진짜 심각하다. 이건 살리에리 씨나 잘 드시겠는데요."

리스트는 입을 닦으며 말한다. 마시는 방법은 아인슈패너랑 비슷한 것 같았다.

"맛 자체는 괜찮아? 어떻니?"

"맛 자체는 있어요. 단 거 좋아하는 사람들은 환장해서 꼴딱 넘어가겠는데."

"그럼 로시니 씨한테는 이 레시피 그대로 한 잔 만들어서 드릴게요."

슈베르트는 파르페 잔을 꺼내 재현된 '라 바르바야타' 를 제조하기 시작한다. 리스트도 다시 피처를 잡고 심호흡한다.

"사장님, 저 이번에 진짜 성공해서 보여드립니다."

"그래그래."

라고는 했지만 하이든도 노인복지회관 라떼아트 수업을 들으며 하트 얼추 비슷무리한 것을 만들기까지 4주가 걸렸기에 별로 기대는 없었다.

"보세요, 카메라도 준비하시고요!"

리스트는 그렇게 말하고 피처를 기울인다. 기울인 피처에서 걸쭉한 우유가 카푸치노 잔 안의 에스프레소와 소용돌이치며 섞인다. 우유가 커피 천체의 색을 변하게 할 정도로 섞인 순간, 리스트가 바로 잔을 위로 올린 뒤 남은 우유를 한 번에 후욱, 부어 준다. 부풀어오른 커피가 넘치기 직전, 리스트가 피처를 거둔다. 그리고 잔 받침 위에 리스트가 올려놓은 라떼 위 우유가 남긴 흔적은-

완벽한 하트였다.

"오."

너무 놀라서 뭐라 말이 안 나왔다. 이 자식 사실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라떼아트계의 천재 이런 거였던 건가? 흠잡을 구석이 하나라도 있나 보지만 골든 링도 완벽했고, 하트는 풍성하지만 통통하지 않았고, 우유의 질감은 균일했다. 마침 '라 바르바야타' 를 서빙하고 돌아온 슈베르트도 리스트가 커피로 그린 하트를 본다.

"와."

잠시 할 말을 잃은 둘은 하트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그렇게 몇십 번을 내려도 안 됐던 하트가, 라떼아트 1일차 카페 알바생 손에서 탄생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말이다.

"어때요, 어때요. 잘했죠? 짱이죠?"

잘했긴 한데 뭔가 인정해주기 자존심 상했다. 그래도 잘한 건 잘한 것이니 하이든은 마지못해 고개를 천천히 끄덕여준다. 슈베르트도 아랫입술을 꾹 물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다. 그 고개끄덕임에 자신이 붙은 리스트는 가슴을 확 펴고 흘러내린 머리칼을 뒤로 쓸어넘기며 만족의 한숨을 내쉰다.

"하...진짜 찢었다... 어떡하면 좋냐. 못하는 게 없어."

"그냥 빨리 라벨 씨께 드리고 오죠."

"그러자꾸나."

슈베르트와 하이든은 자아도취에 빠져 있는 리스트를 뒤로 하고 완벽한 하트 잔을 라벨의 앞에 놓는다. 뭐라 또 트집을 잡으려던 라벨은 잔을 본 순간 입을 벌리고 말을 잃었다. 고양이도 넋을 잃은 듯이 잔을 빤히 바라봤다.

"무니야, 안 돼요. 저건 아빠 거야."

라벨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몇 차례 찍었다. 아까까지 슈베르트의 커피 다섯 잔을 뚱한 표정으로 트집잡아 돌려보냈다는 건 기억도 못 하는 듯이 신이 난 움직임이었다. '라 바르바야타'의 크림을 입가에 잔뜩 묻히며 먹고 있던 로시니도, 비어 있는 에스프레소 잔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던 베르디도, 반쯤 식어 버린 홍차를 마실 수 있게 된 엘가와 보로딘도, 밀크셰이크를 시켜 놓고서는 한 입도 안 마신 사티도 마침내 편안한 표정이 된다. 하이든도 과업을 하나...가 아니라 두 개 해결한 기분이 되어 기분 좋게 자리에 앉는다. 이게 카페인지 커피 공방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잠시 고개를 돌려 보자 리스트가 신이 제대로 났는지 슈베르트의 피드백을 받으면서 라떼를 더 내리고 있었다. 저 원두가 몇 달이 쌓이면 몇십, 몇백 만원이었지만 그래... 알바생이 기쁘다니 일단 지금은 놔두기로 하자.

"사장님은 안 드세요?"

다시 사근사근한 4차원으로 돌아온 라벨이 하이든에게 물었다. 하이든은 미소지으며 손사래를 친다.

"아까 커피를 벌써 많이 마셔서. 속이 좀 더부룩하네요."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라떼를 다섯 잔이나 마셔서 처리했다고. 너 때문에 배에 물이랑 우유가 꽉 차서 지들끼리 뒤섞이는 것 같아.

"아아-그렇구나. 아쉽네요-이거 진짜 맛있는데도."

"에스프레소 머신과 핸드드립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맛있는 커피의 문제랬잖습니까. 맞죠?"

베르디가 (이게 어깨가 으쓱해질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어깨를 으쓱하며 라벨에게 물었다. 라벨은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네요~"

정말 아까의 그 깍쟁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다니까. 샴고양이가 가르릉거리며 라벨의 무릎 위에서 몸을 뒤집었다. 잠시간의 평화를 가지던 중, 로시니가 갑자기 스푼으로 본인의 파르페 잔을 두 번 두들긴다. 맑은 소리가 실로폰 치듯이 울려퍼졌다.

"자자, 그래서. 이번 제 3회 상인연합회 회의 안건은 뭣이냐, 저 앞에 대학교 축제일날 우리 상인연합회 운영 계획입니다. 축제날에는 여기 유동인구가 엄청 는단 말이죠. 다들 알고 있겠지만."

"잠깐만! 저랑 라벨 씨 가게에는 손님이 거의 늘지 않는걸요!"

엘가가 손을 들고 말했다. 아무래도 그렇지, 악기 판매상과 시계 수리점의 고객이 늘 리가...

"제 가게도 축제날보다는 축제 다음날이 대목입니다만. 보로딘 씨도 그럴 테고."

사티가 말했다. 축제 다음날이 대목... 세탁소에 대목이 있을 일이 있나? 아, 오바이트한 옷을 세탁해야 한다는 건가. 거기에 숙취 문제로 약국 찾는 사람도 늘고.

"그러네요. 순 로시니 씨 위주 회의잖습니까!"

베르디도 말했다. 하긴, 베르디의 대목은 주로 발렌타인데이나 어버이날 같은 때겠지.

"아이, 그러지들 말고. 어쨌든 사람 흐름이 확 변하는 건 사실이잖아."

"뭐가 확 변하긴 변해! 난 그날 가게 문 닫고 집에 가겠어!"

베르디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곧... 이탈리아인 둘의 논쟁이 격화되기 시작했다. 사방팔방으로 제스처를 취하는 데다가 엄청난 속도로 쏟아져나오는 이탈리아어의 향연을 하이든은 따라갈 수가 없었다. 하... 회의를 할 필요가 없는 주제다 싶으면 그냥 회의 안 하고 수다를 떨면 되는 거잖아. 왜 여기서 논쟁을 벌이는 거야...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는 엘가와 보로딘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대체 왜 홍차에 우유를 넣어 먹는 거냐' '아니 홍차는 원래 우유를 넣어 먹는 거다, 러시아가 이상한 거다' '지금 동방 무시하는 거냐' '홍차 하면 원래 영국이다' '우리도 방사능 홍차 드립 있다' 같은 말들이 오고갔다. 그나마 조곤조곤한 논쟁이라서 다행이었다. 확실히 그래도 영국인과 러시아인은 이탈리아인보다는 점잖아 보였다. (아니면 아직 술이 들어가지 않은 상태의 영국인과 러시아인이기 때문일까?) 그리고 앉아 있는 사티와 라벨은, 프랑스인 답지않게 논쟁에 끼어드는 대신 양옆으로 벌어지는 논쟁을 즐거운 눈으로 구경하고 있었다.

어떻게 카페가 개판이 아닌 날이 없니. 하이든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대학생들 축제가 본인과 연관이 없다고 해도, 여기 대학생들이 오면 분명히 소주병이나 쓰레기나 토사물이 가득할 거 아니야... 그런 거 치우는 걸 논의할 수도 있는 거잖아... 고개를 돌려 슈베르트와 리스트를 보자 둘은 꺅꺅거리며 손을 맞잡고 아주 즐거워 날뛰고 있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 거니, 하는 인자한 눈빛으로 리스트를 바라보자 리스트가 커피잔을 검지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화악 웃었다.

하...너희들이 기쁘면 됐다고 하지만 오늘 너희가 쓴 원두가 손님 10명에게 갔어야 하는 원두 분량이라는 걸 이야기해 주고 싶어 미칠 것 같은 이 사장님의 마음을 헤아려줄 수는 없겠니.

프란츠 카페, 정상 영업중이긴 한데, 커피와 라떼아트에 진심인 직원 둘 덕분에 원두값 잔뜩 날리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