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오세요 프란츠 카페에

EP.3 [페퍼민트 티 한 잔과 프렌치 프레스 커피 한 잔]

알바 채용

카페는 그럭저럭 운영되고 있었지만, 이렇게 운영을 하고 있으니 하이든의 마음속에도 스멀스멀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렇게나 좋은 품질로! 이렇게나 싼 값으로 커피를 제공하는데 더 손님이 와야 하지 않겠는가! 기껏 대학생들을 위해서 열었는데 아직도 오는 대학생들이라고는 프로코피예프 친구뿐이라니 말야. 하이든은 뺨을 부풀리며 얼굴을 구겼다.

"프란츠야. 너는 우리 카페에 대학생들이 더 많이 찾아오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슈베르트는 에, 어... 라고 하면서 금붕어마냥 입을 뻐끔뻐끔 벌릴 뿐이었다. 됐다 말을 말자, 다시 고개를 돌리고서 적막한 골목길을 보지만 영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익명성을 추구하는 그 뭐냐... MZ 세대라면 당연히 스타벅스나 이디야 같은 대형 상점을 가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했다. 경쟁력이 필요했다. 대학 상권이라서 열었는데 대학생들을 손님으로 이끌어올 수 없으면 소용이 없다. 자기도 마음만은 MZ라면서 빽빽거리는 모차르트의 주장으로는 엔터테인먼트와 이벤트, 이미지 포장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들어올 때마다 머리를 부딪히는 거구의 남자는 굳이 손님이 많아져야 하냐는 의문을 표했고 베토벤은 원래 커피는 맛이라며 도움 안 되는 원론적인 답변만 늘어놓았다. 그리고 실제 MZ인 프로코피예프는 손가락을 딱 튕기더니,

"알바가 잘생기면 와요."

라는 충격과 공포의 답변을 내놓았다. 그러면서 이제 쇼스타코비치를 가리키고, '이 새끼가 학교에서 근장 한 적이 있었는데 근장하고 있으면 여자애들이 와서 괜히 커피 같은 거 더 놓고 가고 도서관에 발 들여본 적도 없을 것처럼 생긴 갸루들이 괜히 얼쩡거리더라' 라고 말했다. 그, 여성을 너무 수단화해서 말하는 거 아니야? 라고 물어보자 프로코피예프는 그것은 객관적인 통계적 수치에 불과한 거라고, 자신은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신세대라서 오류를 절대 범하지 않는다 말하기 시작했다.

하긴 알바가 필요하긴 하지... 하이든은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서빙을 하면서 포스기도 관리하고 청소도 하고 커피도 내리는 본인의 업무가 과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미안하지만, 슈베르트가 조금만 더 유능했더라면 과중하게 느껴졌을 업무는 아니었다.) 딱 한 명만 더 있으면 좋을 텐데... 게다가 슈베르트도 하루만 쉬는 이 스케줄에 몸이 말을 안 듣기 시작한 눈치였다. 슈베르트에게도 휴일이 조금은 필요하지 않겠는가? 예를 들어서, 갑자기 모친상을 당했는데, 그날 하이든도 갑자기 쓰러진다면? 과한 상상력이었지만 현실적인 고민 아닌가?

물론 여기서 더 인건비를 내야 한다고, 하는 생각을 하자 앓는소리가 절로 나왔지만 알바는 어쨌든 필요한 것이었고, 알바몬 같은 데에다가 올리면 대학생들에게 어느 정도 '이런 가게 존재해요!' 하는 홍보가 될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로시니의 가게에서 맛있는 라자냐를 먹으며, 하이든은 로시니 가게 알바생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알바몬에 알바 구인 게시글을 올리는 데 성공했다. 알바생은 '혹시 저는 안 될까요?' 하고 물었지만 녀석, 고등학생이었기에 혹시나 모를 분쟁에 휘말리기 싫었던 하이든은 나이 더 먹고 오라고 말했다. (그런데 잠깐만, 고등학생이 호프집에서 알바를 해도 되는 건가? 로시니가 알아서 처리했겠지.)

그런데 뭐랄까...알바생 지원자들이 다 좀.

일단 조회를 해봤더니 살인으로 전과기록이 있는 사람이 지원하지를 않나, 한명은 폐병으로 금방이라도 죽을 안색이어서 면접이고 뭐고 병원부터 보내줘야 하지를 않나 하이고 참 난제였다. 하이든은 "괜찮은 남자는 전부 기혼이거나 게이다" 라는 격언을 떠올린다. 마찬가지로 "괜찮은 알바생들은 이미 알바중이거나 알바할 필요가 없다" 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어쨌든 아직까지 손님이 그렇게 많지 않아 그럭저럭 운영되고 있던 카페에 손님 두 명이 들어선다. 멍하고 부스스한 인상의 붉은머리 손님이 하나, 그리고-마인 고트!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있는 모습만 보고 하이든은 순간 자신이 모르는 유명 아이돌인가 놀라 입을 벌렸다. 곁에 있던 슈베르트도 잔을 떨어뜨렸다. 덕분에 비싼 유리잔이 하나 더 사라졌다.

하이든은 인생에서 후광이 나는 사람은 처음 만나봤다. 재능 있는 사람도 많이 만나봤고 존경할 만한 사람도 만나 봤고 길거리캐스팅 당할 정도로 예쁜 여학생들도 제자로 둬 봤지만 이건 뭐 그 차원이 아니었다. 요즘 할리우드에서도 찾기 힘든 얼굴이었다. 요즘은 개성파 배우들의 시대라고, 극장에서도 찾기 힘들단 말이다! 이런 얼굴은! 고전 그리스 조각상들을 전부 이 사람을 모델로 해서 만들었대도 이상하지 않겠다 싶을 정도였다. 키는 프로코피예프보다 조금 작은 수준이었지만 전체적인 비율은 그것보다 훨씬 잘 균형이 잡혀 있었고 짙은 인상이 한번 길가에서 스치기만 해도 절대 잊지 못할 얼굴이라고 소리질렀다. 잠깐, 이 손님과 어디서 스친 적이 있던가? 만났다면 잊을 리가 없는 얼굴인데, 또 안 봤다고 하기에는 어딘가가 익숙한 얼굴이었다. 할리우드 고전미남 스타일이라서 그런가? 만약 하이든이 여자였더라면 이 문단이 세 개쯤 더 늘어났겠지만 하이든은 주문을 받아야 하는 직업인이었고, 그래서 침착하게 웃으며 손님에게 인사한다.

"어서오세요. 주문 도와드릴까요?"

그리스 조각상이 방긋 미소를 지으며 붉은머리 쪽을 돌아본다. (이런! 있다는 것도 까먹고 있는 손님이었다. 사실 이 손님도 잊기 쉬운 인상은 아니었는데...) 붉은머리 손님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메뉴판을 올려다본다.

"형 뭐 마실래?"

"나 커피는 벌써 두 잔쯤 마셔가지고. 나 페퍼민트 차."

목소리를 듣고서야 약간 후광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둘 다 목소리가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붉은 머리 손님의 목소리가 상당히 울림 있고 풍부한 저음인 반면 그리스 조각상 쪽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만약 붉은머리 손님의 목소리가 그리스 조각상의 목소리였다면 진짜 하이든도 경악했을 테다. 뭐, 그리스 조각상의 목소리가 나쁘다는 소리는 아니다. 다만 하이든이 합창대회도 여러번 지도해본 음악교사다 보니까 목소리에 좀 민감했을 뿐이다. 아주 멋들어진 베이스-바리톤이네,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잠시 멍을 때리는 순간 다음 질문이 들어온다. 

"코냑 팔아요?"

"네?"

잠깐 머리가 멈췄다. 아니 카페에서 왜 술을 찾니. 물론 낮에는 카페 밤에는 바로 운영하는 곳이 한둘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메뉴에 없는 술을 대체 왜 찾니. 스무 살은 넘어 보이는데 스무 살 넘었으면 코냑은 여기서 찾을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지 않니.

"아, 안 팔아요? 그럼 혹시 여기 커피는 어떻게 내려요? 핸드드립도 해주나요? 프렌치 프레스로 내린 것도 마실 수 있나요? 튀르크식 좋아하는데 튀르크식 커피 팔아요? 뱅쇼라도? 원두는 어떤 거 쓰나요? 이야 그나저나 가게 좋네요, 언제 개업하셨어요? 처음 봤는데. 원목 너무 멋들어졌다, 그렇지 않아? 근데 이런 가게가 있다고 이야기를 좀 해주시지. 여기 주인분이세요? 체인 아니죠? 그럼 사장님 되시겠네요, 성함이 프란츠? 어! 저도 독일식으로 읽으면 프란츠인데!"

쏟아지는 질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다행히 붉은머리 손님이 그리스 조각상의 등짝을 때리며 질문세례가 중단됐다. 찰싹 하는 소리가 옷 너머로도 상당히 아프게 들리는 게 손이 꽤 야무진 모양이었다. 잠시 로그아웃했던 정신이 돌아왔다. 하이든은 다시 미소를 지으며 (식은땀이 흘렀다) 되물었다.

"그럼 프렌치 프레스 커피 한 잔이랑 페퍼민트 커피 한 잔이면 되는 거죠?"

"...페퍼민트 티요."

붉은머리 손님은 하이든의 말실수를 정정하며 주머니에 찔러넣었던 손을 뺀다. 말실수라니! 교사 시절에도 거의 안 하던 말실수를 고작 이 정도로 해버리다니 부끄러웠다.

"넌 가게 사장님이 네 수다 들으려고 계신 줄 아냐? 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네 인생 NPC가 아녜요."

붉은머리 손님이 그리스 조각상의 뺨을 양쪽으로 길게 잡아늘렸다. 머리가 한 개 차이가 나지만 관계상으로는 붉은머리 쪽이 좀 더 주도권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으아아야아아아. 미아내 혀! 너머 흐브해서!"

"자리나 잡아."

붉은머리 손님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려다가 하이든의 엄중한 시선에 멈칫한다. 가게에서는 금연이라고, 새끼야. 하는 눈을 마주치자 (그리스 조각상이랑 다르게) 눈치 있는 붉은머리 손님이 담배를 다시 주머니에 슬그머니 집어넣는다.

"거시기, 계산 후불인가요?"

"나갈 때 결제하시면 됩니다."

붉은머리 손님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카운터 쪽으로 몸을 숙인다. 턱을 유리 위에 놓은 손님은 마찬가지로 카운터 위에 손바닥만한 노트를 하나 탁 놓는다.

"사장님, 혹시 '엘' 에다가 압운 맞는 단어 떠오르는 거 있으세요?"

이탈리아인일지도. 프랑스인일지도. 아니면 그냥 라틴어 오타쿠일지도. 하이든은 짧은 영어와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 지식을 열심히 굴려본다.

"...벨?"

'여자' 와 '종' 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다만서도 떠오르는 게 그것뿐이었다. 붉은머리 손님은 잠깐 멈칫, 하고 입을 천천히 벌린다. 그러더니 흐리멍덩한 청회색 눈이 갑자기 반짝이는 푸른빛으로 바뀐다.

"벨...벨! 그걸 생각을 못하다니! 이런 바보가 다 있나!!! 감사합니다!!!!!!!"

손님은 하이든의 손을 양손으로 꽉 잡고 세차게 악수를 하더니, 가게 밖으로 뛰쳐나가버린다. 정상인이라고 생각했던 쪽이 정상인이 아닌 건에 관하여 생각하던 하이든은, 문득 방금 그 손님이 페퍼민트 차를 시켰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니 손님! 음료는 가져가야지!"

하이든은 프렌치 프레스에 원두를 갈아 담고 있는 슈베르트를 지나쳐 페퍼민트 차를 담은 테이크아웃 컵을 들고 그리스 조각상 앞으로 다가간다.

"손님, 죄송하지만 이...페퍼민트 차 시킨 고객님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그 형이요? 엑토르 베를리오즈인데요. 루이 엑토르 베를리오즈. 베를리오즈가 성. 잠깐만, 형 어디갔어?"

그리스 조각상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베를리오즈' 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벌린다. 하는 폼이 한두번 있는 일이 아니었나보다. 하이든은 그리스 조각상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한 손으로는 컵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컵 뚜껑을 누르며 몸으로 문을 밀어 열었다.

"루이 엑토르 베를리오즈 님! 페퍼민트 티 나왔습니다! 페퍼민트 티는 챙겨가셔야죠!"

"사장님! 잠깐만! 그 형 자기 노트도 놓고 갔어요!" 

하이든의 뒤로 그리스 조각상도 뛰어온다. 그거고 뭐고 난 지금 이 사람한테 차를 전해줘야 한단 말이다. 돈을 지불한 이상 마실 자격이 있는 차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하이든은 골목길에서 나와 대로변 쪽으로 달려간다. 그 손님이 빨라 봐야 어디까지 갔겠는가? (젠장, 차가 제대로 안 섞였을 것 같지만 그건 뛰면서 어지간히 섞이겠지!) 하이든은 버스 정류장에 멍하니 서 있는 학생 한 명을 붙잡고 묻는다.

"학생, 혹시 방금 전에 어디로 뛰어가는 사람 못 봤어요? 키는 여기쯤에 벌건 곱슬머리인데..."

"아! 봤습니다. 사거리 쪽으로 뛰어가고 있었어요. 신호등에 걸리지 않았을까 싶네요."

"고맙습니다!"

하이든은 친절한 학생의 도움을 받아 손님이 사라진 방향 쪽으로 뛰어간다. 뒤에서 그리스 조각상도 달려온다.

"아니 사장님, 왜 이렇게 정정하세요? 깜짝, 놀라겠는걸요."

하이든은 대답할 기력 없이 내리막길을 뛰어간다. 아니나 다를까 사거리는 일대 대혼란이었다. 대체 내가 왜 여기 있는 건지도 모르고 어리둥절해 있는 베를리오즈와 그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자동차들. 경찰과 대학생들.

"그, 베를리오즈 씨라는 분은 무슨 몽유병이라도 있어요?"

그리스 조각상은 어깨를 으쓱한다.

"있긴 한데 방금 건 그건 아니었어요."

차라리 몽유병이었으면 이해라도 하지. 경찰관들이 적당히 교통질서를 수습하고 베를리오즈를 도로변에서 끌어낸다. 시무룩하게 화단에 걸터앉은 베를리오즈에게 하이든은 컵을 건넨다. 손을 보자 뜨거운 페퍼민트 차가 약간 쏟아져 살이 벌개져 있었다.

"손님, 주문하신 페퍼민트 티 나왔습니다."

"...아! 맞아요! 감사합니다."

정신을 빼놓고 다니기로 슈베르트랑 베를리오즈를 붙여놓으면 누가 이길까 궁금해졌다. 베를리오즈는 머쓱해하면서 컵을 받아들고, 그리스 조각상에게서 노트도 받아든다. 그리고 하이든의 손을 보더니 깜짝 놀란다.

"아니 화상입으셨잖아! 아이 씁, 얼음이 없는데. 사장님 제가 죄송합니다! 빨리 들어가서 찜질하세요!" 

느린 걸음으로 그리스 조각상과 베를리오즈를 양 옆에 두고 돌아가며 하이든은, 베를리오즈가 '하이' 할 때와 '로우' 할 때와 평상시 이렇게 세 가지 상태의 갭이 굉장히 큰 사람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조울증 검사를 해 봤는데 딱히 그런 건 아니었다고 한다. 그 감정 기복을 제쳐놓으면 거의 멀쩡한 인간이었고 사람구실을 한다... 라는 것이 그리스 조각상의 설명이었다.

"아참, 그러고 보니 정신없어서 인사를 못 했네요. 사명감 투철한 차를 저 바보 형한테 전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프란츠 리스트예요. 그러니까 독일식으로 읽으면 말이죠. 사장님 성함도 아까 이름표 보니까 '프란츠' 시던데. 정확하게 읽자면 '페렌츠' 긴 해요, 헝가리 쪽 출신이라서."

뭐라뭐라 리스트가 계속해서 말을 했지만, 하이든은 그 말을 듣고 있지는 않았다. 헝가리의 리스트? 리스트라... 리스트. 영어공부할 때 분명히 '리스트' 라는 단어를 듣고 웃은 기억이 있었는데, 뭐 때문이었더라. 리스트. 리스트라...

"리스트?"

"네, 리스트요."

"혹시... 키슈머르톤에서 지낸 적이 있나요?"

"응? 네? 아니요! 전 라이딩밖에 기억이 없는걸요."

하이든은 으음, 역시 기억이 잘못된 건가. 나이가 드니 기억력도 떨어지나 보네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분명 기억에 있는 것 같은 이름이었는데 본인의 착각이었나 보다. 옆에서 키슈머르톤을 검색해 본 베를리오즈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키슈머르톤이 아이젠슈타트라는데?"

"아아, 맞아요. 이름이 바뀐 지 좀 됐는데 내가 익숙하지가 않아서 그만."

베를리오즈는 자리에 멈춰서더니, 뭔가 중요한 사실이라도 발표하려는 듯이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놀라지 마세요, 점장님. 사실..."

드라마틱한 효과라도 바란다는 듯이 베를리오즈는 두 손을 천천히 벌렸다.

"얘네 아빠가 아이젠슈타트 출신이거든요."

하이든은 그제서야 뭔가를 떠올린다. 평소에 이렇게 놀람을 잘 표시하지 않는 하이든의 눈이 두 배로 커진다.

"아니 저희 아버지가 아이젠슈타트에서 오래 지내긴 했는데... 아이젠슈타트가 무인도도 아니고요."

리스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이든은 잠깐 입을 가리고 있다가 손을 뗀다.

"설마 너 아담 아들이니?"

그 말에 리스트의 눈도 확 커진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페렌츠' 리스트의 눈도 확 커진다. 아까 느꼈던 그 익숙함이 뭐였는지 알겠다! 미디어가 제시해주는 미의 기준이다 뭐다 이런 게 아니라 그냥 자기가 알았던 사람 아들이니까 당연히 닮았던 거지! 하이든은 저도 모르게 리스트의 손을 덥석 잡는다.

"이야, 반갑구나! 내가 너네 아빠한테 휘스트 가르쳐줬던 선생님이었는데. 기가 막히게 쳤지. 체스는 못 뒀지만. 내가 너네 아빠 중학교 시절 선생님이었어."

하이든은 그제서야 본인이 페렌츠 리스트랑은 잘 아는 사이가 아니라는 점을 깨닫고 손을 놓아준다. 괜히 머쓱해진 하이든은 헛기침을 한다.

"그냥... 만나서 반갑구나."

베를리오즈는 본인이 이 자리에서 빠져주는 게 맞을지 아니면 본인이 있어야 덜 어색할지를 가늠하는 듯했다. 하지만 어차피 여기서 사라져줘야 갈 데도 어차피 카페니까, 하는 계산을 마쳤는지 그냥 둘의 보조를 맞춰 걷고 있었다. 리스트는 쓰고 있던 야구모자를 잠깐 들어올려 머리카락을 정리한 뒤 다시 모자를 눌러 쓴다.

"저도 대학 와서 아버지 지인 분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그러게. 아담 젊은 시절이랑은 많이 안 닮은 것 같은데. 아담 녀석 와이프가 미인이었나 보구나? 결혼식에 안 불러줘서 얼마나 서운했는지 몰라. 아버지한테 안부인사라도 드려 주겠니? 녀석 요즘은 뭐하고 사는지 모르겠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너무 말을 친근하게 걸고 있나, 선을 넘는 건가 하는 걱정이 들어 심장이 약간 콩닥거렸지만, 생각해 보면 아까 리스트도 들어와서 친한척하며 이런저런 질문세례를 쏟아냈으니까 뭐 별반 다를 바는 없지 않나 싶었다.

리스트는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며 미소지었다.

"그냥 뭐... 저도 대학 온 뒤로 아버지 소식을 너무 못 들어서요. 최근에 뭐하고 계신지는 잘 모르겠네요."

"아이고 그래? 아쉽게 됐네. 언제 한 번 내가 밥이라도 사야 하는데."

리스트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다음 번에 아버지 뵙게 되면 전해드리겠다고 말한다. 아버지랑 사이가 안 좋은가 걱정이 살짝 들었지만 설마 그렇지야 않겠지. 하이든의 그런 걱정을 눈치챈 듯 리스트는 더 밝은 목소리로 화제를 돌린다.

"그나저나, 이거 되게 신기하네요. 제가 아버지한테서 배운 게 피아노랑 휘스트 딱 두 개였는데 그 중 휘스트를 아버지께 가르쳐주신 선생님 분을 뵙게 되다니. 제가 아버지랑 휘스트를 치면 맨날 졌거든요. 그때도 잘 치셨나요?"

"아니, 그때는 휘스트의 'ㅎ'도 몰랐을걸. 처음 입부했을 때는 엉망진창이었지. 아주 엉망진창이었는데 학년이 올라갈수록 점점 실력이 느는 거야. 그래서 처음에는 나도 봐주면서 치다가 나중에는 얄짤없이 쳤지. 체스는 그만 못했다만."

리스트랑 하이든이 그렇게 웃음꽃을 피우는 사이 베를리오즈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중간중간 리스트를 흘겨본다. 하지만 결국 둘의 대화에 별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본인의 페퍼민트 티를 마시는데 집중하고, 그렇게 셋은 다시 카페에 도착한다. 카페에 도착하자마자 베를리오즈는 하이든의 손을 냉찜질하고, 손을 잠깐 쉬게 해 줘야 한다는 핑계 하에 하이든은 슈베르트를 홀로 남겨놓고 테이블에 합석한다.

"정식으로 인사드릴게요. 전 여기 대학에 철학과 다니고 있고요, 이 형은 작사가 겸 블로거예요. 작사가 있잖아요. 작곡가 말고."

"작곡도 할 거야. 입닥쳐. 제 2의 베토벤을 꿈꾸고 있다고."

하이든은 웃음을 터뜨린다.

"그래 나도 작사가가 뭔지는 알아요. 근데... 그 베토벤 저기 앉아 있는데 가서 인사라도 하고 오지 그러니?"

베를리오즈와 리스트가 고개를 돌리며 카운터와 가까운 안쪽 테이블에서 컴퓨터로 midi 작업을 하고 있는 베토벤이 시야에 들어왔을 테다. 베를리오즈는 다행히도 이제 다 마셔서 빈 페퍼민트 컵을 떨어뜨렸고 리스트도 입을 떡 벌렸다. 둘은 서로에게 '저게 진짜야? 진품 베토벤?' 하고 속삭였고 (아니 사람에게 '진품' 이라는 표현을 써도 되는지는 모르겠다만, 일단 넘어가도록 하자.) '실화냐...' 하는 탄식으로 감탄을 마무리했다. 베를리오즈는 덜덜 떨리는 손에 얼굴을 파묻고 감히 인사를 할 수가 없어, 라고 중얼거리더니 결국 인사를 하러 떠났다. 잠시 턱을 괴고 가게를 쓱 둘러보던 리스트는 가게 맨 앞 유리문에 붙어 있는 '알바생 모집' 글귀를 유심히 바라본다.

"혹시 알바생 구하셨어요?"

"아니, 죄다 오는 놈들이 이상한 놈들뿐이라서. 내가 볼프강 정도만 되면 고용을 해보겠는데 그 정도가 안 되니까..."

"제가 용돈이 좀 필요해서 그런데... 지원은 어디로 하면 될까요?"

하이든의 눈이 커진다. 아담 이자식, 애한테 자립심을 길러준다 뭐다 해서 용돈도 풍족하게 안 주고 있나 본데 그러면 쓰나. 하긴, 저런 인싸 성격이면 사교 비용이 어지간히 들겠지.

"됐어, 그냥 나한테 이야기한 걸로 지원은 된 걸로 하자꾸나. 건보증 언제쯤 갖고올 수 있니?"

"지금도 집에 들렀다 올 수 있어요. 저 여기 근처에서 자취하거든요."

"아니 그렇게까지 급할 건 없고. 모레 한... 두 시쯤 괜찮니?"

리스트는 시간표를 쓱 훑어보고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감 넘치는 당당한 얼굴이었다. 사교성 좋고, 설마 아담 아들인데 인성이 아주 썩지는 않았을 테고. 마침내 괜찮은 후보를 하나 골라왔다 싶었다. 그리고... 정말 미안하지만 그 얼굴 좀만 써먹으면 손님이 두 배로 늘 것 같았다. 아마 입만 좀 더 닥치고 있으면 완벽한 알바생이 되어주지 않을까 싶었다.

"그럼 모레에 다시 올게요.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리스트는 가방을 주섬주섬 챙겨 일어난다. 하이든은 고개를 끄덕인다. 리스트는 카드를 내밀지만, 하이든은 '넣어둬 넣어둬' 라고 말하며 손사래를 친다.

"그냥 음료값으로 아빠한테 안부나 전해주렴. 내가 어떻게 아담 아들한테 음료값을 받아. 아참, 베를리오즈 씨 것도 내가 그냥 계산해주는 걸로 하고."

"감사합니다. 아버지께는...안부 전해드릴게요."

리스트는 모자를 까딱 기울여 인사를 전하고, 여전히 베토벤 덕질에 정신없는 베를리오즈를 뒤로하고 나간다. 몇십 분이 지나고 아주 행복해진 얼굴의 베를리오즈가 카드를 내밀자 리스트는 또다시 넣어둬, 넣어둬 라고 말한다. 베를리오즈는 '알바생 모집' 공고를 떼어 정리하는 슈베르트를 보고 눈을 가늘게 뜬다.

"리스트를 알바생으로 쓰실 생각인가요?"

"무슨 문제라도? 심각한 결격사유가 있는 친구인가요?"

하이든은 몸을 낮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는다. 베를리오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팔짱을 낀다.

"아니, 혹시 그러시다면. 아버지 이야기는 좀 조심하시는 게 낫겠다 싶어서요. 쟤네 아버지 한, 오 년 전인가, 돌아가셨거든요."

하이든은 그 자리에 얼어붙는다. 자신보다 스무 살이 어렸던 아담 리스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리스트에게 했던 말들이 너무 바보같이 느껴져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이든은 손으로 입을 막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어떤 말을 할 수도 없었고 해서도 안 될 것 같았다. 아담이.

죽었구나.

가는 데는 순서 없다는 말이 있다지만 정말로 이렇게 순서가 없을 줄은 몰랐다. 거기에 이 소식을 이렇게 예상하지 못한 자리에서, 아담과는 관련이 거의 없다시피한 인물의 입에서, 이렇게 무심한 목소리로 듣게 될 줄도 몰랐다. 하이든은 다시 한 번 입을 가린 채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말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아뇨. 좋은 일도 아니고. 차 맛있네요. 생잎이죠?"

베를리오즈는 빈 페퍼먼트 티 컵을 쟁반 위에 담아서 돌려준 뒤, 생잎인지 아닌지 답변을 듣지도 않고 아담의 소식을 전할 때와 똑같은 무심함으로 가게를 떠난다.

그날 오후 카페는 주인 사정으로 두 시간 문을 일찍 닫았다. 그리고 이틀 뒤 리스트가 정식으로 채용됐을 때 하이든은 아담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를 리스트라고 부르기는 싫었다. 그래서 하이든은 그를 '페렌츠' 라고 고집스레 불렀다. 아직은 '리스트' 라 부르면 아담이 아니라 페렌츠를 부르는 말이 될 것이라는 점이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카페는 요제프, 프란츠, 페렌츠 3인체제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 섬세한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프란츠, 프란츠, 프란츠였겠지만 말이다. 

뭐, 이런 우울한 이야기는 일단 접어두도록 하고. 지금 이들에게는 더 바쁜 일이 있지 않던가? 지금 당장 저 문으로 들어오고 있는 손님의 주문을 받아야 하지 않던가. 그럼 인사합시다. 다함께,

"프란츠 카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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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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