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오세요 프란츠 카페에

EP.2 [아이스 초코라떼 한 잔과 도쿄 블랙 커피 한 잔]

내향성 손님을 대하는 방법

프란츠 듀오는 평화로운 카페 영업을 이어가는 중이다. 하이든은 슈베르트를 프란츠라 부르면 슈베르트 쪽은 구분을 위해 점장님이나 사장님이라 부르는 게 보통.

이 가게 첫 직원으로 채용된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는 올해 스물아홉, 존재론적 위기에 놓이기 딱 좋은 나이였다. 졸업하고 교원으로 일하다가 문득 교무실의 처참한 커피 맛을 더 이상 못 참겠다며 뛰쳐나와 바리스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거기에 어라, 이름을 검색해보면 꽤나 유명한 대회들에서 상까지 받은 녀석이었다. 그런데 왜 헬쓱한 얼굴로 하이든의 카페에 와서 맛도 없는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열 시간을 죽치고 있었냐 물어보니 글쎄,

"집에서 에어컨을 틀면 돈이 너무 많이 나가길래... 에어컨 바람 좀 쐬려고..."

그 상금은 어디다가 갖다바쳤냐 물어보니까 더 가관이었다. (소믈리에가 아니라 바리스타면서) 친구들이랑 아니, 술먹는데 썼다고. 술값이 백 단위로 나가더라고 그러는 것 아닌가. 어이가 없었다. 교사본능이 발동해 통장을 압수해 관리해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슈베르트는 성인이었고...하이든은 굳이 더 건들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커피만 맛있게 내리면 되는 것 아닌가? 슈베르트는 그 기대를 절대 배신하지 않았다. 허겁지겁 바리스타 2급만 간신히 딴 하이든과 달리 슈베르트는 바리스타 1급, 핸드드립, 라떼아트 자격증 정도는 우습다는 듯이 보유중이었다. 자 그럼, 이제 슈베르트가 왜 무직이냐. 그 질문에 답할 시간이 된 것 같은데... 사실 그것도 그리 어려운 건 아니었다. 하이든과 일하는 2주일동안 슈베르트는 주문을 다섯 번 잘못 받았으며 접시 한 개와 컵 두 잔을 깨뜨렸다. 두 명의 손님에게는 중복계산, 그리고 두 명의 손님에게는 계산을 빼먹고 한 번은 가게 티스푼을 가지고 갈 뻔했다. 아, 가게 출근을 까먹은 것 한 번과 퇴근할 때 문 잠그는 걸 빼먹은 것 한번이 화룡점정이었지!

진짜 커피 맛있게 만드는 걸 빼면 잘 하는 게 하나도 없는 녀석이었다. 문제는 커피를 기똥차게 잘 타서 저 단점이 전부 커버가 된다는 거다. 유사 커피소믈리에 베토벤은 어차피 이사할 때가 됐다면서 (원래 살던 집에 살던 것도 2개월밖에 안 됐지만) 하이든의 카페와 가까운 곳에 집을 구해버렸다. 이 커피가 아니면 안 된다나 뭐라나... 참고로 이 쪽도 가관이라서, 커피는 슈베르트가 내려준 것만 먹으며 커피를 시키지도 않고서 계산을 해달라고 하고 곡이 안 써진다며 발을 쾅쾅 굴러대다가 테이블 하나를 부숴먹었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배상은 다 받았다.)

3주일차로 접어든 오늘, 가게는 딱 하이든의 예상대로 굴러가는 중이었다. 테이블이 비는 일은 없었지만 다 차는 일도 없었다. 주문량은 충분히 둘이서 감당할 만했고 큰 컴플레인도 들어오지 않았다. 현재 가게의 최고 큰손들은 카페인 중독자 베토벤과 이웃집 식당 주인 로시니였다. '헨델호프' 체인점의 점주 로시니는, 체인점이라고 해도 스페셜리티가 필요하다면서 신메뉴를 개발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헨델호프는 저녁 다섯 시에나 느지막하게 여는 가게였는데, 덕분에 로시니는 오픈시간 전까지 하이든의 카페에서 브런치삼아 빵을 이삼만원어치 쌓아두고 먹었으니 하이든에게는 고마운 사람이었다. (가엾은 의자가 그 몸무게에 부서질까봐 조마조마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이 동네는 참...뭐가 뭔지 모르겠어. 술집, 꽃집, 카페, 서점...중구난방이야, 죄다. 대학 주변인데 뭐가 일 들어서."

3년을 살았지만 진짜 뭐가 뭔지 모르겠다. 뭔가 큰 상가도 없고 띄엄띄엄 가게 한두개씩 있는 주택가에 더 가깝다. 대학 주변인데 집값이 낮길래 옳다구나 하고 계약을 했지만 살면 살수록 대학가 특유의 시끄러운 분위기가 없다.

"그거...여기 대학 때문일걸요."

슈베르트는 베토벤의 커피를 리필해주고 카운터 뒤로 돌아온다.

"여기 대학이 뭐 어때서? 여기로 간 제자도 있어."

"여기, 미친놈들 소굴로 유명해요."

하이든은 항변을 해보려 하지만 그 순간 여기로 진학한 본인 제자도 꽤나 미친놈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갑자기 빠각 하는 소리에 더해 탕, 문이 벽에 부딪히는 소리, 거기다가 정신없이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하이든과 슈베르트의 대화를 끊었다. 따가운 역광이 손님의 실루엣을 길쭉한 나뭇가지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양 발을 어깨보다 넓게 벌리고 선 손님은 경례를 하며 껄껄 웃었다.

"센세! 제가 왔습니다!"

가만히 손님을 바라보고 있던 슈베르트가 하이든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것 보세요... 순 미친놈들뿐이라니까요."

삐걱거리는 관절인형처럼 걸어온 거구의 손님은 (역시나) 하이든의 제자인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 프로코피예프. 사춘기를 잘못 보낸 것처럼 근육은 안 붙고 길어지기만 한 팔다리를 보니 확실했다. 중학교 때는 그래도 하이든이랑 눈높이가 맞았는데 이제 머리가 한 개는 커졌다. 슈베르트와는 머리 한 개 반 차이였다! 형광 오렌지색 바람막이 안에 껴입은 형광초록색 티는 아무리 봐도 이해가 가지 않는 조합이었다. 대학교에도 교복이 있었다면 좋았을 뻔 했는데...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세료자! 이게 얼마만이니. 문짝 차는 폼이 아주 축구선수 해도 되겠더라."

"저도 압니다! 제가 좀 잘났죠."

사실 프로코피예프는 하이든이 제일 난감해하는 제자 가운데 하나였다. 분명 하이든을 존경하고 잘 따르긴 했는데... 그냥 하이든이 아직도 이해를 하지 못한 학생이었다. 금쪽이를 한두명 만나본 게 아니긴 했지만 얘는 좀 차원이 다른 또라이였다. 끄응 앓는소리를 내며 하이든은 포스기 앞에 섰다.

"그래...주문은?"

"초코라떼, 아이스로 한 잔이랑 도쿄 블랙 한 잔 부탁드립니다!"

"도쿄 블랙?"

하이든은 고개를 갸웃한다. '센세' 도 일본어였나. 애가 언제 이렇게 일본물을 많이 먹어 왔지?

"아아-얼마 전에 일본에 갔다왔는데 도쿄 블랙이 진짜 끝내줬거든요. 그거요. 그거. 알아들었어요?"

프로코피예프는 머리를 톡톡 치면서 '알아들었어요?' 라고 물었지만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뭐라는 거지. 본인의 제자들만으로 벌써 만나볼 수 있는 모든 진상의 유형은 다 만나본 느낌이었다. 하이든의 손이 포스기 위에서 머뭇머뭇한다.

"아! 콜드브루요?"

프로코피예프는 그거 그거! 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말귀가 어두운 줄로만 알았던 슈베르트는 신기하게 이럴 때만 기가 막히게 말을 잘 알아듣는다. 주문을 들은 슈베르트는 포스기 찍기를 하이든에게 맡겨 두고 콜드브루 원액을 꺼낸다.

"직접 내리는 게 아니네요?"

프로코피예프는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너 커피 마셔 본 적 없지, 하고 추궁하고 싶어졌다. 어라, 그러고 보니 방금 음료를 두 잔 시켰던 것 같은데. 하이든은 츳츳 혀를 차며 프로코피예프에게 이야기한다.

"그거야. 콜드브루는 제대로 하려 하면 원액을 여덟 시간은 기본으로 내려야 한다고. 당연히 여기서는 미리 만들어 둔 원액을 써야지."

"흐음. 그렇군요."

"그나저나, 혼자서 두 잔을 다 마실 셈이야? 앉은 자리에서 내리 음료를 두 잔 하고 가겠다면야 우리는 고맙지만."

프로코피예프는 고개를 이쪽으로 기울였다가 저쪽으로 기울였다가 한다. 그리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아뇨. 세 시 반에 여기서 보기로 했거든요. 짝을 이뤄서 해야 하는 과제가 나오는 바람에."

"으음. 그렇구나."

하이든은 자연스럽게 초코라떼를 내리러 간다. 초코 시럽과 초코파우더를 믹서기 바닥에 스푼으로 넣고, 스팀우유를 더하면 시럽과 파우더가 녹는다. 이제 얼음과 우유를 잔뜩 넣어주면, 금세 완성된다. 롱 스푼으로 위아래가 잘 섞이게 저어준 뒤에 프로코피예프의 취향대로 휘핑을 잔뜩 올리고, 초코드리즐까지 더해주면 아주 칼로리 폭탄 초코라떼가 된다. 나무 코스터 위에 도자기로 만든 잔을 올려놓으면 표면에 물방울이 조금씩 맺히고, 빨대를 꽂아주면 세팅 완료. 슈베르트 쪽은 준비된 지 오래였다.

"주문 나왔습니다!"

하이든이 외치면, 프로코피예프가 쟁반을 가져가면 된다. 사실 팔다리가 영 비율이 안 맞게 겅중거리는 모습이, 원숭이나 기린을 닮은 듯도 하여 불안한 건 어쩔 수가 없다. 가다가 떨어뜨릴까봐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놀러 왔던 모차르트가 쟁반을 까불거리며 들고 가다가 하이든이 아끼던 컵을 깨먹어서 마음이 심란한 참이었는데 말이다.

프로코피예프는 다리를 꼬고 앉아서 빨대로 초코라떼를 쪼옥쪼옥 빨아마시기 시작했다. 시계를 보자 두 시 삼십오분이었다. 슈베르트는 경악하는 표정을 지으며 하이든에게 속삭였다.

"지금 한 시간 뒤에 올 사람 커피를 미리 주문해 놓은 거예요? 이건 그 사람에게 맛없는 커피를 맛보게 해주겠다는, 그런 복수죠?!"

"제발 진정하려무나..."

하이든도 커피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베토벤이나 슈베르트나, 아니 이 정도로까지 커피에 집착하는 이유는 뭐냐 묻고 싶었다. 이유를 물어 봐도 '커피는 멋진 음료라서 집착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라는 말 이상의 답변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슈베르트가 옆에서 (스팀기마냥) 칙칙 열을 뿜고 있는 동안 하이든은 홀로 나가 행주로 테이블을 빡빡 닦는다. 프로코피예프는 꼬고 있던 다리를 풀더니 맞은 편 의자를 끌어당겨 흙발을 그대로 상대방이 앉을 의자 위에 올려놓는다. 프로코피예프와 팀플을 해 줄 친구를 사귀었다니 대단한걸, 하이든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두 시 사십오 분이 되자 맞은편 꽃집 가게 사장이 휴대폰을 보고 음료를 반환했다. 말수가 적고 이야기하는 편을 좋아하지 않는 손님 같아 하이든도 잘 알지는 못하는 사람이었다. 에스프레소를 시킬 때마다 '투샷' 이 아니라 '도피오' 라고 하는 걸 보면 이탈리아인이 아닐까 추측만 해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이 분 뒤, 카페 문이 열리고 처음 보는 손님이 들어온다. 카운터에 기대 있던 하이든은 허리를 쫙 피고 밝은 미소를 지으며 손님을 맞는다.

"어서 오세요!"

프로코피예프보다는 작지만 하이든의 눈에는 여전히 큰 청년은 불안한 듯한 표정으로 가게 여기저기를 둘러보더니, 하이든의 인사에 대답도 없이 프로코피예프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향한다. 프로코피예프는 그제서야 발을 치우고 쟁반에 남아 있는 콜드브루 커피를 상대에게 밀어 준다.

"아니 내 커피를 먼저 시키면 어쩌자는 거야,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

"불만이라도?"

...확실히 친구가 있다는 게 신기한 녀석이었다. 하이든은 또, 친구가 콜드브루 주문을 프로코피예프에게 대신 맡기기라도 한 줄 알았지. 일반인의 상식에서 보면 '어떻게 이런 일이!' 싶겠지만 프로코피예프의 담임을 맡아 본 적 있는 하이든의 눈에는 이제 그리 어색한 일로 보이지도 않았다.

"아냐...고맙게 마실게."

하이든은 믹서기를 분리해 안에 달라붙은 초코 가루를 씻어낸다. 프로코피예프와 친구를 하고 있따면 어지간한 대인배라는 것은 분명했지만 동시에 살갑게 맞아주는 직원에게 눈인사도 안 할 정도면 사교성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하이든은 믹서기의 물기를 닦고, 잠시 의자에 앉아 한숨을 후우 쉰다.

"무슨 걱정 있으세요?"

"아니 그냥. 손님들이 이렇게 사무적으로 대할 때면 섭하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슈베르트는 프로코피예프와 프로코피예프의 친구 쪽을 잠깐 바라본다. 프로코피예프의 친구는 비록 프로코피예프가 멋대로 시킨 커피였지만 콜드브루 커피를 아무 불만 없이 잘 마시고 있었다.

"제가 보기에 그건..."

그때 프로코피예프가 거나하게 트림을 하면서 손을 든다. (어째 학창시절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그때도 빨간 국물 음식 뭐 하나만 나오면 옷에 질질 흘려 셔츠가 벌건색이 다 되어버렸는데, 오늘도 초코 드리즐과 휘핑크림, 라떼로 옷이 범벅이 되어 있었다. 저 꼴을 다 보고 있는 맞은 편의 친구는 비위도 참 좋은 사람이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센세,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가 여기 콜드브루 끝내준다고 이야기해달라네요. 바리스타한테 고맙답니다."

"응? 어? 그 바리스타 내 뒤에 있는데."

슈베르트는 두 손을 모아 입을 가리고는 발을 동동 굴렀다. 슈베르트는 아무 말 없이 연신 고개를 숙이며 프로코피예프의 친구에게 고맙다는 뜻을 전했고 프로코피예프의 친구 쪽도 (그러니까,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랬나?) 연신 고개를 숙이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걸 한 다섯 번쯤 한 뒤에야 슈베르트가 먼저 돌아서는 것으로 감사인사가 마무리된다.

"..."

하이든은 잠깐 멍하니 프로코피예프의 테이블을 바라본다. 뭔가, 본인이 이해할 수 없는 상호작용이 오고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그냥 말을 하면 되는 걸 왜 다른 사람한테 전해 달라고 하고? 그리고 슈베르트는 또 왜 그냥 웃으면서 고맙다는 말을 못 하는데? (참고로, 베토벤이 '커피 지렸다, 찢었다' 같은 소리를 할 때는 그냥 평범하게 웃으면서 고맙다고 말했기 때문에 더 이해가 안 가는 것이었다.) 

"...그냥 수줍은 거였군."

안심이 되기도 하면서, 정말 극단적인 내향인들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생각하며 하이든은 개업 선물로 받은 화초에 물을 뿌렸다. 하긴 학교를 다닐 때도 조용한 애들이 제일 상대하기 어려웠다. 차라리 대놓고 말썽을 부리는 애들은 말을 하기라도 하지, 말썽을 부리지는 않지만 조용한 애들은 속마음을 도저히 알 수가 없어 그냥 '그래 잘 지내니? 학교생활은 어때?' 라고 물어보는 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전부였으니까. 카페에서는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니까, 손님들이 자기 이야기를 좀 더 많이 해줬으면 좋겠는데...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동시에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니까 좀 더 속마음을 터놓아 달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그렇죠."

슈베르트가 말한다.

"그치만 나쁜 일은 아니잖아요..."

하이든은 입술을 내밀고 어깨를 으쓱한다. 누군가의 성격을 두고 무작정 나쁘다 좋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손님을 상대할 수도 없을 정도로 수줍은 탓에 점장님을 24시간 내내 포스기 앞에 세워둬야 한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문제 아닐까? 이보세요 프란츠 군, 점장님은 할 일이 많답니다. 24시간 포스기만 담당해줄 사람을 고용하고 싶을 판이었다. 손님응대를 좀 더 잘 할 만한 직원도 두고 싶었다. 예순셋의 나이로 풀타임 근무하면서 서빙이고 포스기고 뭐고 손님과 조금이라도 닿는 일은 전부 본인이 하고 있으니 몸에 피로가 순식간에 누적되어갔다. 나름 건강관리를 하는데도 그랬다.

잠깐 빨간 머리 손님이 남겨두고 간 에스프레소 잔을 가지고 돌아오던 하이든은 '드미트리' 가 프로코피예프의 발을 꾹 밟는 모습을 보고 미소짓는다. 하긴 그래, 꼭 본인에게 마음을 터놓을 필요는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그냥 이 공간 안에서 마음을 터놓기만 하면, 카페를 열지 않는 것보다 여는 것이 나았다는 증명이 되어 주겠지.

한 시간 반 정도가 지나고, '드미트리' 가 자리를 떠난다. 가벼운 목례를 한 드미트리는 프로코피예프를 뒤로 남겨둔다. 하이든은 슬쩍 프로코피예프의 옆에 가서 앉는다.

"남자친구니?"

프로코피예프의 눈이 동그래진다. "?????" 라는 뜻을 담고 있는 눈이었다. 하이든은 멋쩍게 뒷목을 긁적인다.

"아니, 너 중학교 때 남자애들한테 끼부리고 다녔으니까. 막 체스부 선배 무릎 위에도 앉고."

하이든은 중학교 재직 시절, 음악 교사임에도 불구하고 밴드부가 아니라 체스부를 맡았는데 그렇게 당황스러운 광경은 처음이었다. 강당에서 입시설명회를 한다고 동아리실의 의자가 몇 개 부족한 상태였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자 프로코피예프가 선배 무릎 위에 앉아서 끼를 부리고 있는 것 아닌가. (하이든이 생애 처음 마주한, 뭐랄까, 성소수자성 짙은 장면이었다. 남녀가 연애하면 회초리로 잡으라던 학교가 이렇게 변하다니 싶어 눈이 마구 흔들렸던 기억이 있는데... 이제 그것도 벌써 오 년 전이다.)

"아니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는요. 저랑 안 맞거든요. 둘이 같이 엿같은 지도교수한테 잘못 걸려서 한배 탄 사이가 된 거지."

"으음. 그래도 좋은 친구 같던데. 잘 지내렴. 자꾸 그렇게 머리 단순한 식인종처럼 말하면 있던 친구도 떨어져나간다고."

"머리 단순한 식인종?! 아니 쇼스타코비치 녀석이랑 뇌트워킹이라도 하셨어요? 어떻게 똑같은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진짜 제 취향 아닙니다. 다리도 달달 떨고 거절도 할 줄 모르는 녀석이라고요. 거기에다가 재네 집에 놀러가면 쟤네 집에 꼬맹이들이 맨날 '세르게이 세르게이 트라트라트라하' 이러면서 놀리기까지 한다고요. 오늘은 안 싸웠지만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를 제가 울린 적도 있다니까요."

프로코피예프는 그렇게 자랑스럽게 팔짱을 꼈다. 늘 지적으로는 성숙한데 정신적으로는 좀...어린 놈이었다. 친구를 울린 게 자랑인지는 의문이었지만, 쇼스타코비치라는 친구가 아직 프로코피예프를 죽이지 않았으니 어떻게든 잘 해결을 봤겠지 싶다. 거기에 '세르게이 세르게이 트라트라트라하' 가 무슨 뜻인지 하이든으로서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약간, 그, 뭐냐. 해삐해삐해삐 그런 거나 아니면, 어쩔티비 저쩔티비 엘지티비 뭐 그런 건가? 하이든의 혼란스러운 표정을 뒤로하고, 프로코피예프는 잠깐 생각하는 듯하다가 덧붙인다.

"뭐, 그래도 나쁜 친구는 아니죠. 믿을 만하니까."

"그래그래, 다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하는 거야."

하이든의 흐뭇한 미소에 프로코피예프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굴린다. 아니 뭐, 꼭 연인으로 발전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처음에는 그렇게 어색한 친구 사이였다가도 나중에는 절친이 될 수도 있으니까 잘 지내두라는 이야기였지만.

"카페는 좋네요. 카공족 받아요?"

"받지. 손님 많을 때만 아니면 괜찮아."

"재밌군요. 그럼 가끔 와서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랑 과제 좀 하다 갑니다. 음료 잘 마셨습니다. 아참, 코페아 아라비카 멋있네요."

프로코피예프는 결제 후 가게를 떠난다. 큰 키에 가게 문이 작아 보였다. 하이든은 길다란 팔다리를 거미마냥 쭉쭉 뻗다가 사라지는 프로코피예프의 모습을 보며 중얼거린다.

"어릴 때 죽마를 타고 다니면 키가 커지나?"

"글쎄요. 딱히 그런지는... 헐! 아까 그 손님 스탬프 못 찍어드렸는데!"

슈베르트는 손에 들고 있던 스탬프 종이를 바라본다. 원래 10번 오면 서비스 음료 한 잔, 이런 이벤트를 하는데 그걸 안 준 모양이었다.

"냅둬. 그나저나... '코페아 아라비카' 가 뭔지 아니?"

슈베르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코페아 아라비카...코페아 아라비카..."

하이든은 뭔지 모를 '멋있는' 코페아 아라비카를 중얼거린다. 슈베르트가 뒤에서 작게 '점장님은 여기 대학생들처럼 미치면 안 되는데...' 하고 읊조렸다. 미친 대학생들과 하이든의 조우는 그렇게 시작됐다. 물론, 하이든은 앞으로 만날 미친 대학생이 한둘이 아니라는 점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그 중 하나는 직원으로 채용하게 될 것이라는 점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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