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혁독자] 지상에서 영원으로 (1)
※ 현대 판타지 AU
볼륨을 높일 대로 높여 시끄럽고 난해한 소리가 귓가를 쿵쿵 울렸다. 난잡한 전자음과 주변 상황은 신경 쓰지 않고 그에 맞추어 몸을 흔드는 수많은 인형 속에서도 남자의 걸음은 흐트러짐 없이 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검은색과 검은색에 가까울 정도로 짙은 회색의 천장 위를 색색의 레이저가 훑으며 시야를 혼란케 했다.
옷보다는 천 쪼가리라는 말이 훨씬 더 어울릴 옷으로 대충 가린, 헐벗은 육체를 한껏 밀착하고 몸을 부비던 이들 중 하나가 그를 발견하고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서서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공간이 좁아지며 그에게 떠밀리게 된 새빨간 머리의 여자가 짜증 가득한 얼굴로 저를 민 자를 돌아보다가 검은 코트를 입은 사내를 발견하고는 같은 얼굴로 도망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천천히 몸을 뺐다. 도피를 위해서인지 아니면 싸움을 위해서인지 본인도 명확히 파악하지 못한 듯 창백한 얼굴에 확연하게 떠올라 있었던 짜증은 이내 혼란으로 변해갔다.
그런 상황이 몇 번이고 반복되면서 넓은 홀을 꽉 채웠던 인파가 반으로 갈라졌다. 거대한 위압감을 뿜으며 느릿하게 발을 옮기는 남자에게 길을 내어준 모습이 과거 모세가 일으켰다던 이적이 현시대에 재현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클럽 안에 있던 이들이 숨결 한 올이라도 흘릴까 긴장한 채 저를 주시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감정의 편린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그의 시선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내내 한곳만을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늘어트린 채로 있던 그의 손이 느릿하게 들렸다. 불규칙하게 움직이며 천장과 벽, 바닥을 비추던 레이저 조명이 어둠 드리워진 남자의 얼굴을 스치며 얼음으로 조각한 양 지독히도 싸늘하면서도 아름다운 외양을 드러냈다. 검은 반곱슬 머리카락 아래 짙고 시원스레 뻗은 눈썹과 그보다 더 아래의 길게 뻗은 눈은 끝없는 공동처럼 무감했다. 탄탄한 목줄기와 검은 코트로 감춰진 몸은 얼핏 봐도 극한까지 단련되어 빈틈도 군더더기도 없는 움직임을 보였다.
어디선가 감탄과 욕망, 공포가 한데 뒤섞인 탄식이 들려왔다. 그것을 신호탄으로 삼기라도 한 듯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남자의 손이 선뜩할 정도로 깔끔한 호를 그렸다. 홀에 있던 그 누구도 그가 무기를 꺼내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로 은밀한 움직임. 어느새 그의 손에 들려있던 검이 그려낸 궤적. 바늘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은 정적이 지나간 후, 근처 인파 속에 섞여 있던 한 남자의 목이 떨어지며 어둠 속에서 새빨갛게 빛나는 피 분수가 솟았다. 잘린 머리는 절단면에서 피를 점점이 흩뿌리며 공처럼 통통 튀어 오르다가 바닥을 굴렀다. 나동그라진 머리가 눈을 껌벅이는 것도, 머리와 분리된 몸체가 경련하는 것마저도 곧 잦아들었다. 생명의 징후가 완전히 소실된 시신에 소슬한 정적이 희부연 물안개처럼 재차 내려앉았다.
탈색과 염색을 거듭한 듯 거친 질감의 잿빛 머리칼을 한 채 상체를 반쯤 드러내고 있던 20대의 후반의 남자가 얼굴을 타고 흐르는 액체를 손가락으로 찍어 들여다보았다. 누군가의 생명이 사그라지거나 말거나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무심하게 돌아가는 조명 아래 보석처럼 빛을 발하는 붉은빛. 뻣뻣하게 굳은 잿빛 머리의 동공이 수축과 확장을 급격하게 반복하고 그렇지 않아도 평생 빛 한 점 못 받은 것 같이 희던 피부는 핏물이 완전히 빠져나간 듯 창백해졌다.
넓은 클럽 안에서 시끄러운 음악과 함께 금요일 밤의 분위기를 즐기다가 갑작스러운 유혈사태를 목격하고 피를 뒤집어쓰게 된 사람들은 잠시간 눈을 깜박이다가 일반적인 상식선과 다른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얼굴을 사납게 일그러트리며 비명이 아니라 분노 섞인 고성을 지르는 이들. 귀청을 찢을 듯 이어지던 음악 소리는 금세 다른 소리에 묻혔다. 뱀이 쉭쉭 대는 것 같은 바람 소리, 날카로운 고함과 함께 인간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길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요란한 조명 아래에 드러났다. 남자의 미(美)에 대한 찬탄과 욕망이 어려있던 시선은 이제 적의와 공포 섞인 흥분으로 바뀌어 있었다.
“…마물 사냥꾼.”
군중 가운데에서 얼어붙은 음성이 새어 나와 남자를 부르자, 기다렸다는 것처럼 한껏 낮춘 속삭임이 클럽의 뱀파이어들 사이에서 오갔다. 나비의 날갯짓처럼 작은 목소리는 곧 거대하고 음산한 폭풍처럼 불어나 클럽의 홀을 가득 채웠다. 남자를 향한 시선이 흐트러졌다. 마물 사냥꾼, 환상 처단자, 관리국의 집행자 등 인세의 이면에서는 여러 이명으로 악명높은 그였지만 근래에는 관리국의 임무가 아닌 한 움직이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클럽 안을 혼란의 도가니로 만들어 낸 남자의 눈은 차분하고 고요하기만 했다. 그는 본래라면 목을 치는 것만으로는 죽일 수 없었을 뱀파이어를 일검에 목을 쳐내는 것으로 끝내고는 핏물조차 묻지 않은 칼을 수납한 뒤 시선을 올렸다. 홀의 천장 근처 장막처럼 드리워진 어둠 속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이 클럽의 주인이리라.
한갓 인간의 인지로서는 헤아릴 수 없을 만치 오래 산 마물의 시선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죽은 동족에 대한 분노나 애도도, 슬픔도, 원망도, 하다못해 동족 살해자에 대한 호기심과 흥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급격하게 들끓는 감정을 억누르고 전언의 대상에게만 눈을 고정한 그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전해야 할 메시지는 간단했다.
“<스타 스트림>의 이종족 관리법 2조 1항 위반은 즉결 처형이다.”
이어지던 웅성거림은 지지직거리는 라디오의 소리를 갑자기 꺼버리기라도 한 양 순식간에 수그러들었다. 검은 코트의 단죄자가 읊은 것은 세계의 이면을 모르는 인간들을 향한, 허가되지 않은 습격을 엄격하게 금지하는 조항이었다. 심지어 <스타 스트림>이라 이름 붙여진 세계의 이면에 격리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이 땅에 발붙이고 약속의 날이 올 때까지 살아가기를 택한 뱀파이어들은 위반의 대가에 동의하지 않았던가. 저 말이 사실이고 관리법 위반 사항의 처벌이라면 죽은 이에 대한 사적 감정이 어찌 되었건 말 얹을 구석이 없었다. 오히려 나서서 죽은 이를 비난하면 모를까. 그의 행동은 다른 동족들을 위험에 빠트릴 수 있는 이기적인 것이었으므로.
“자세한 위반 정황은 관리국에 문의하도록.”
처형을 마친 남자는 품속에서 명령서로 보이는 흰 종이를 꺼내 시신 위에 던졌다. 뱀파이어들이 다시 한번 술렁였다.
감정 배지 않은 저 목소리가 아무리 원망스럽다고 해도, 갖가지 이유로 수가 줄어들어 얼마 없는 동족이 한 명 더 죽었다고 해도, 아끼는 이를 잃었다고 해도 분노에 져서 이 밤의 세계 <스타 스트림>을 이끌고 유지하는 ‘이종족 및 신비 관리국’의 수족을 공격했다가 관리국에 반기를 들었던 다른 종족들처럼 멸종당할 수는 없다는 걸 다들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생각이 하나의 결론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어쩌면, 저 냉막한 표정의 집행자는 그것을 기다리며 이쪽이 먼저 움직이는 걸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지 않나.
그뿐만 아니라 왕의 명령조차 없었다.
홀에 모여있던 뱀파이어 무리는 왕의 명령이 떨어지거나 남자의 2차 공격이 이어지지는 않을지 몸을 긴장시키며 남자를 주시했다. 관리국의 제안을 거부하고 죽음을 선택한 이들과 달리 그들은 긴 시간을 살았음에도 아직 생에 대한 집착이 있었기에.
허나 뱀파이어의 왕은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고, 전언을 마친 검은 코트의 사내는 옷자락의 작은 흔들림에도 주춤주춤 물러서는 다른 뱀파이어들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절도 있는 움직임으로 돌아섰다.
묵직한 발소리가 쥐 죽은 듯 고요해진 홀 안을 울렸다. 일부러 내는 것이 분명한 소리였건만 그 소리에 반응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지하 통로를 걸어 나와 몇 겹의 마법으로 감추어진 클럽의 문을 빠져나오자 문 앞에는 빛을 완전히 빨아들일 것 같이 어둡게 선팅된 유리창의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미끈한 라인을 그리는 차체 위로 은은한 달빛이 미끄러졌다.
“야.”
나긋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의 걸음이 더욱더 빨라졌다. 검은색의 승용차 옆에는 흰 코트를 허술하게 걸친, 일견 클럽에서 봤던 뱀파이어의 일원인 양 창백하고 마른 남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남자가 입을 열었다.
“관리국 전 요원들은 2인 1조로 움직인다는 규정은 어디다 팔아먹고 너만 들어가냐? 나 없으면 쾌락 살해나 원한 살해라고 오해받을 수도 있어, 인마.”
그 말로 스스로가 관리국의 요원이자 그와 같은 조로 움직여야 하는 페어임을 주장하는 흰 코트 남자의 말에도 검은 코트의 남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걸음을 좀 더 빨리 옮겼을 뿐이다. 묵묵부답인 상대에 흰 코트의 남자는 기울인 고개를 더욱 삐딱하게 하며 몇 걸음 앞으로 나섰다. 검은 코트의 사내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 말에도 흔들림 없이 걸어 운전석에 타고는, 흰 코트의 남자가 차에 타는 걸 기다리지 않은 채 차의 시동을 걸고 출발해버렸다.
관리국의 요원들에게 지급되는 지급품이라 몇 가지 마법이 걸려 있긴 하나 속력을 얼마나 높였는지 순식간에 멀어지는 차를 보며 흰 코트의 남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럴 줄 알았지. 유중혁 개새끼, 성질하고는.”
흰 코트의 남자, 김독자는 유중혁의 차가 향한 방향으로 느긋하게 걷기 시작했다.
* * *
아이는 아파트 단지에 딸린 작은 놀이터의 대장이었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길쭉길쭉 시원스럽게 뻗은 팔다리와 채 여물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건만 단단한 뼈대가 보는 이로 하여금 그의 미래를 기대하게 했다. 누구를 대하더라도 올곧고 굳건한 성격의 아이는 몇 없는 아파트 단지 내 아이들의 일방적인 우상이었고, 빠른 발전의 반동처럼 점차 흉흉해지기 시작한 사회 분위기와 민심에도 불구하고 이웃 학부모들의 신뢰를 얻기도 했다.
가끔 놀이터로 놀러 나올 때면 작은 정글짐 최상단의 한 칸이며 낡아 삐걱대나 모두에게 사랑받는 뺑뺑이의 한 자리, 가장 높은 철봉과 그네가 그의 차지였으며 이유는 잘 몰라도 그의 작은 행동에도 그를 따라 왁자지껄 웃는 또래 아이들이 있었다.
허나 오늘은 놀이터로 나왔음에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단순히 저녁이기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누가 곧 부모님 손에 이끌려 학원에 다녀야 한다는 말이 있던데 그게 오늘이었던가. 누가 피아노 학원에 가는 날이 오늘이었던가.
그라고 해서 주변에서 흘리는 파편들로 익힌 또래의 일정을 전부 기억하는 게 아니었고, 설령 그게 전부 맞아떨어졌다고 해도 이렇게 소거 당한 것처럼 조용할 놀이터가 아니었다는 점은 금세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오늘은 중요한 손님이 온다고 하여 어른들을 방해하지 않도록 시간이 늦었지만 놀이터에서 놀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는데 혼자라는 사실에 아쉬움만이 차올랐다.
물론 그는 제 마음속을 채우는 감정이 ‘아쉬움’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으리라. 그러기에는 너무도 어린 나이였다.
* * *
검은 신부복을 입은 사제 둘이 경건하게 성호를 그으며 성경의 구절을 읊었다. 침대 위에는 비쩍 여윈 사지를 묶인 채 기름과 이가 들끓는 머리를 산발한 남자가 있었다. 쩍쩍 갈라져 핏방울이 맺힌 입술 사이에서 쇳소리 같기도 하고 지저를 가르고 들려오는 바람의 울림 같기도 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쌕쌕대는 비웃음, 라틴어와 중국어, 프랑스어로 구사하는 부정한 말을 들은 사제들이 미간에 주름을 그으며 손에 들려있던 크리스털 병을 휘둘렀다. 침대에 묶인 남자의 몸 위로 좁은 주둥이에서 흘러나온 액체 방울이 쏟아지자 성수가 닿은 살이 연기와 함께 타들어 가다가 수포가 오르기 시작했다.
좁은 공간에 진동하는 고기 썩은 내에도 불구하고 마스크를 쓰지 않은 김독자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채 몇 시간 째 쉬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구마 의식을 지켜보았다. 백발 성성한 사제는 벌써 체력의 한계를 느끼는 듯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길게 늘어트린 보라색 영대며 검은 수단의 등이 흠뻑 젖어 든 것이 보일 정도였다. 한쪽 벽에서 반대쪽 벽까지 축복받은 소금으로 길게 그은 선 뒤편에서 신실한 믿음을 담아 성경 구절을 읊거나 성가를 부르는 목소리를 듣는 건 그리 취향은 아니었으나 지금으로선 달리 별수 없었다. 그나마 하품하지 않는 게 지금의 그가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였다.
일단 비밀리에 거행되는 게 원칙인 타 종교의 전례 의식을 참관하고 있으며 태도도 평가에 들어가니 예의를 지키는 건 당연했다. 그에 더해 자신들이 아니었더라면-주치의도 있지만- 굳이 축성한 성염(聖鹽)으로 선을 그려 구역을 나누고 구마 의식을 진행하느라 보조 사제가 뒤로 빠질 필요도 없었고, 의식을 거행하느라 고생하고 있는 사제들이 주교나 그 윗선과는 달리 전통과 권위를 저 좋을 대로 휘두르며 가르치려 드는 꼰대인 것도 아니니 말이지. 이런 일에 파견된 것이 안쓰럽다는 기색 짙게 밴 눈으로 보며 배려해주던 면이 다르다고 하면 또 모를까.
오늘로 예정되어 있던 구마 의식 장소를 찾아 관리국의 명령서를 보여주자 뒤편에 서 있던, 억지로 끌려온 기색을 숨기지 않는 유중혁을 일견하고 제 어깨를 두드려주던 주름진 손. 그 뒤로 마법적인 방식의 비밀 유지 서약에 관한 설명만이 차분하게 이어져 내심 한숨을 삼켰더란다.
그야 ‘관리국’은 초종교적, 초법적, 초국적 기관이고 유중혁에 관한 이야기는 그쪽에도 알음알음 퍼졌을 테니 아무리 사제라 해도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정도면 점잖은 반응이었다.
바깥에서 까마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독자는 재차 한숨을 삼키며 의식의 진행을 바라보았다. 구마 의식 허가를 내리기 전 주교가 보낸 조사관이 부마자에 빙의한 마물이 하급 악마라는 점을 밝혀냈기에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건만 하급 악마임에도 저항이 의외로 강하고 끈질겨 구마가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느 정도 상위의 악마였다면 차라리 퇴마가 쉬웠을지도 모른다. 그런 악마들은 강하지만, 이미 정보가 어느 정도 있기도 하거니와 오랜 시간 쌓은 자만심으로 탑을 쌓아도 부족함 없기에 되려 도발에 쉽게 넘어가 이름을 실토하는 일이 드물게나마 있으니까. 인간에 비해 긴 시간을 살아온 악마라고 전부 다 빈틈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교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독자는 그런 생각이라고는 일절 드러내지 내지 않은 채 벽에 기대어선 채로 막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고 있는 부마자에게 시선을 힐끗 던졌다. 의식이 시작할 때에는 느긋하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사제의 치부 아닌 치부를 들추며 저주를 퍼붓던 부마자는 이제 방이 떠나가라 소리 지르며 발악하고 있었다.
갈라진 목소리에서 쇠 비린내가 났다. 축성한 크리스털 성수 병에 입을 맞춘 늙은 구마 사제는 다시 손을 휘두르고 성호를 그었다. 겉보기에는 황달에 걸린 것 같으나 실제로는 부마로 인해 노랗게 뜬 얼굴 위로 성수가 스치자 그 궤적대로 채찍으로 맞은 것 같은 상처가 생겨나며 수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핏줄을 따라 검은 기운이 일어 피부를 물들이고 피딱지 얹힌 입술 사이로 보라색으로 변색 된 긴 혀가 날름거렸다. 그 모습을 본 노사제가 성 미카엘 대천사 기도문을 재차 읊었다.
“성 미카엘 대천사여, 싸움에서 우리를 보호하소서. 악마의 악의와 간계에서 우리를 도와주소서.”
신실한 믿음 실려 장엄하게 울리는 기도문을 들은 부마자가 쇳소리와 피 내음 섞인 비명을 내질렀다.
《이거 풀어, 이 가톨릭 돼지들아! 겨우 네까짓 놈들이 이렇게 묶어둔다고 나를 어찌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김독자는 악마의 저항도, 진중하고 절실함 밴 기도문도 반쯤 흘려들으며 구마 의식은 안중에도 없이 흑천마도의 칼집을 어루만지는 유중혁을 발로 툭 쳤다. 그렇게 세게 친 것 같지도 않은데 금방이라도 저를 베어버리기라도 할 듯 날카로운 시선이 돌아왔다. 그 실력과 성격 덕분에 밤의 세계 <스타 스트림>과 ‘이종족 및 신비 관리국’의 관리관도 함부로 대하지 못해 어느 순간부터 ‘패왕(霸王)’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 유중혁 요원님께선 구마 의식을 참관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크아아악! 이놈은 내 것이고 이 안에 사는 건 네놈들이 말하는 신이 아니라 바로 나다! 괜히 힘 빼지 말고 이놈은 포기해! 바깥에는 네놈들이 도와야 한다고 말하는 인간들이 많지 않으냐……!》
하기야 저놈 성격에 숙주에서 강제로 뽑아내 베어버리는 대신 이렇게 보고만 있는 게 쉬울 리 없다. 이 이전에 받았던 임무가 한 놈뿐이긴 해도 뱀파이어의 목을 날려버리는 거였으나 그 정도로는 마른 목을 축이는 것조차 되지 못하겠지. 그는 유중혁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받아넘기며 입 모양으로만 말을 건넸다. 비록 상대가 악령이라는 말이 더 가까울 정도로 하찮은 하급 악마이고 성염으로 그은 선과 보조 사제의 보호 기도문으로 보호받고 있다고 하나 그들은 의식에 참여하는 게 아니기에 임시로 성역-결계를 만든 소금을 훼손하고 목소리를 내거나 이름을 들켜 악마에게 존재를 알려선 안 된다고 시작 전부터 단단히 주의를 들은 참이었다.
이거 잘 될 것 같냐?
여느 때와 같이 무시해버릴 거라고 생각하면서 건넨 말이건만 유중혁은 예상과는 달리 답을 주었다. 숨결과 생을 가진 인간이라기보단 미술관의 예술품이라 해도 이상할 것 없는 얼굴이 방향을 틀자 독자의 눈이 따라붙었다. 유중혁이 고개를 살짝 젓는, 평소보다 한참은 미약한 움직임마저 타인의 시선을 끄는 마력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걸 봄날의 미풍에 비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지독히도 싸늘하고 예리할 터이지만.
독자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침착하게 숨을 삼켰다. 농담 반 진담 반이긴 하나 적을 홀리는 무기로 삼아도 될 것 같단 말마저 나오는 유중혁의 외모는 둘째치고, 임무 성공률 90%를 상회하는 그 ‘패왕’이 임무에 부정적인 답변을 내다니 드문 일이었고, 그게 이런 일이라면 더욱더 그러했다. 하급 악마를 구마하는 건 시간은 걸릴지언정 지금까지 받은 임무 난도로 따지면 하급 중의 하급 임무 아닌가. 물론 그리 평하면서도 이런 임무를 받게 된 이유는 따로 있었지만. 시선을 돌리니 신부는 작은 은 십자가를 부마자에게 들이대고 있었다. 곧이어 귓가를 못으로 긁는 것 같은 비명이 이어졌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묻는다. 네 왜 이곳에 왔느냐. 악령아, 네 이름이 무엇이냐!”
《성령은 개뿔! 네놈들의 신은 너희를 버렸는데 아직도 그자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냐!》
“악령아, 네 이름을 말해라. 네 정체를 밝히고 이 신의 종에게서 떠나라!”
사제가 소리 높여 신의 이름을 부르짖고 구마 의식에 능숙해 보이던 보조 사제도 장시간 이어진 의식에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을 한 채 부들거리는 손으로 기도를 바치고 있었다. 바흐 칸타타 <눈 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도다>의 선율에 섞여 스스슥, 스스슥 곤충의 날개가 비벼지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어느 순간 방 안에 파리와 구더기가 들끓고 구석진 곳에서 바퀴벌레가 까맣게 무리를 이룬 채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거미가 여덟 개의 다리를 까딱대고 전갈이 꼬리를 휘저었다. 딱딱한 껍질끼리 스치는 소리에 뱀이 쉭쉭 대는 것 같은 쇳소리가 스며 있었다. 경건한 자세로 무릎 꿇고 앉은 채 신부의 집전에 맞추어 기도문을 읊으며 엑소시즘을 돕고 있는 젊은 사제는 흔들리지 않았으나 그 뒤편에 앉아 의료 기구를 점검하던 의사는 파랗게 질려 시선을 돌리고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방 안의 가구가 거칠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액자가 부들부들 떨리다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알 수 없는 금속성과 짐승이 그르렁대는 소리가 섞인 숨. 멸망의 전조와도 같이 전등이 빠른 속도로 점멸했다. 사물의 그림자가 별개의 생명력을 얻은 듯 사나운 짐승의 형태를 그리며 날뛰고 부마자가 몸부림칠 때마다 뼈 비틀리는 소리와 주인을 알 수 없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살이 썩어들어가는 것만 같은 악취는 가면 갈수록 심해지기만 했다.
벌레 다음에는 뱀 떼가 방안을 뒤덮었다. 아이의 손가락 굵기보다 훨씬 더 가는 실뱀부터 시작해서 성인 남성의 팔뚝만치 굵은 구렁이까지,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는 뱀들이 어느 순간 혀를 날름거리며 방안을 기어 다녔다. 주변이 떠나가라 울던 새들이 언제부턴가 울음 대신 창문과 벽에 머리를 박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김독자는 노사제의 옷자락 사이로 파고드는 뱀을 서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한 악마의 위협에도 사제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크아아아… 흐아아아악……!》
“전능하신 주의 권능으로 묻는다. 말하라, 악령아. 너는 누구냐! 네 이름이 무엇이냐!”
사제는 악령의 위협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성호를 긋고 성수를 뿌리며 악령을 몰아붙일 뿐이었다.
《닥쳐… 닥치라고……! 그만 날 내버려 둬! 이놈은 내 것이니, 이 냄새나고 역겨운 신부 놈들아, 너희야말로 당장 꺼지란 말이다!》
“주여, 하찮은 종의 기도를 들으소서. 당신의 하찮은 종에게 이 사악한 악마와 대적할 힘을 주소서!”
부마자의 새까만 눈이 조명과는 달리 창백한 푸른빛을 품고 기괴하게 번들거렸다. 흰자위는 실핏줄이 터져 붉게 물들어 있었고 땀 맺힌 피부에는 검게 물든 핏줄이 불룩 돋아 있었는데, 그 주위의 피부가 부패하는 것처럼 검푸른색으로 변색되고 있었다. 방 안의 온도가 점차 낮아지며 부마자가 가쁜 숨을 내쉴 때마다 벌린 입술에서 새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너, 악령아, 우리 주의 명령을 받들어 이 가련한 인간의 몸에서 썩 물러날지어다.”
《네놈들! 몰락한 신의 하수인들이 이 몸에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몸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아……!》
“하느님의 아들이며 인간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를 네게 명한다.”
질린 기색을 보이면서도 결연하게 얼굴을 굳힌 보조 사제가 향로에 몰약을 태우고 기도문을 읊었다. 마지막 발악을 하는 듯 날카로운 못으로 쇠를 긁는 것 같은 목소리로 의식을 집전하는 사제를 협박하던 부마자는 보조 사제가 칸타타의 소리를 높이며 허공에 성호를 긋자 몸을 비틀며 쉰 목소리로 제 이름을 토해냈다. 채 다물지 못한 입가로 흘러내리는 뿌연 거품 사이에 토사물이 섞이고 귓구멍에서 고름 섞인 핏물이 흘러내렸다. 방안에 감돌던 시취는 더욱 지독해졌으나 악마의 이름을 들은 신부와 젊은 사제의 표정은 반대로 밝아질 뿐이었다.
“이 몸에서 썩 사라지거라, 이 악마야!”
《지옥에나 가버려……!》
성수를 찍은 손가락이 부마자의 갈라진 피부 위에 십자가를 그렸다. 금실로 십자가가 수 놓인 붉은 영대를 들어 성호를 긋고 그 끝에 입을 맞춘 노사제는 영대를 성수 묻은 부마자의 이마에 가져다 대고, 악마의 이름을 부르며 퇴거 명령을 반복해서 내렸다. 뒤이어 사제가 고개 숙여 입김을 불어 넣자 부마자가 묶여있는 침대가 들썩였다. 엄정한 목소리가 크기를 키울 때마다 부마자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진녹색 점액- 액토플라즘을 왈칵 토해냈다.
성 삼위일체의 권위를 빌어 내리는 명에도 불구하고 숙주를 점령한 채로 저항하던 악마였지만, 영적인 존재의 근간인 이름을 들킨 다음에는 버틸 수 없었는지 결국은 길고 새된 비명과 함께 부마자의 입에서 검은 연기 같은 것이 뭉글뭉글 새어 나왔다.
“…아멘.”
음산하게 피어오른 연기를 보자마자 내내 평온하던 독자의 얼굴 위로 싸늘한 냉기가 어렸다. 벽에 기댄 채 방만하게 서 있던 그가 자세를 바로 했다. 발에 챌 정도로 널린 하급 악마라고만 생각했는데 진명을 토해낸 데다 놈이 숙주에서 분리되기 시작하니 불온한 기운이 직전보다 명확하게 읽혔다. 하급 악마인 건 맞지만 제 생각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영감이 전혀 없어 연기가 보이지 않는 보통 사람들조차 오싹한 한기를 느끼며 절로 걸음을 돌릴 터였다. 의식 내내 지켜봤지만, 힘을 숨기고 있는 기색은 달리 보이지 않았는데? 혹시 하급이되 다른 악마의 권속인가? 그렇다면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힉, 히힉! 늦었다, 멍청한 원숭이들아! 그분이 오셨다! 그분이 이 더러운 대지에 임하고 계시니, 그분께서 너희 하찮은 개미들을 전부 사망의 골짜기로 인도하고 지옥의 유황불로……!》
강제로 분리되며 마지막 발악을 하는 놈의 말도 심상치 않았다. 그가 벽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켜 숙주에서 분리된 악령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길고 긴 의식 내내 잠잠하던 유중혁이 몸을 튕기며 섬광 같은 발도술로 악령의 몸체를 반으로 갈랐다.
“혓바닥이 길군.”
긴 시간 이어진 사투에 거친 숨을 헐떡거리던 신부와 보조 사제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뜨였다. 아무리 숙주에서 분리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물질의 육을 입은 게 아닌 악마의 영을 단칼에 베어 소멸시키기는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이들조차 어려워하는 일 아니던가. 말로만 듣던 교황청의 성당기사단이 이럴까.
“유중혁 이 미친 새끼야!”
악령이 이름을 실토하고 숙주에서 분리된 데다 유중혁이 흑천마도로 베어버리기까지 했으니 그 순간 의식은 종료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제약이 사라지자 김독자는 거리낌 없이 유중혁의 이름을 불렀으나 그는 무덤덤하게 흑천마도를 제자리로 수납할 뿐이었다.
김독자는 안개나 먼지를 닮은 부정형의 형체조차 유지하지 못한 채 소멸해가고 있는 악령에는 일말의 신경도 쓰지 않고 유중혁에게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잡았다. 유중혁은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 김독자의 손목을 쥐고 가볍게 털어 그를 떼어낼 뿐이었다. 힘에 밀린 탓에 몇 걸음 물러나 덤덤한 표정의 사내를 노려보던 김독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그랬냐. 네가 안 나서도 거의 다 끝났었잖아.”
독자의 말에 중혁이 형형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험악한 기운이 감돌았다. 보이지 않는 스파크가 튀는 것 같은 두 사람 사이로 노사제의 눈짓을 받은 젊은 사제가 쭈뼛대며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기… 제 경험이 일천하여 숙주에서 분리된 악마를 봉인하는 게 아니라 완전히 소멸시키는 형제님은 처음 뵙습니다. 혹시 그 검은 성유물이나 성물입니까?”
주눅 든 기색 완연한 목소리에 조금 누그러질 만도 하건만 유중혁은 답하지 않았다. 누구의 말도 듣지 못한 양 김독자와 닿았던 손을 털어내고 방 밖으로 걸어 나갈 뿐이었다.
혼자 나가는 유중혁을 잡지도 못한 채 부마자였던 이의 상태를 확인하는 의사와 주변에 늘어두었던 제구(祭具)를 정리하는 사제들을 난처한 얼굴로 보던 김독자는 “의식이 끝났으니 저희는 그만 가보겠습니다. 교구와 관리국 보고는 알아서 해주십시오.”라는 말만을 남긴 채 방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유중혁은 그 얼마 되지 않는 짧은 새에도 상당히 멀어졌는지 복도로 나와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코트 끝자락도 보이지 않았다. 유중혁의 등을 볼 수 있었던 건 건물을 거의 빠져나갈 즈음이었다. 평소 저질 체력에 귀찮다고 뛰지 않던 것도 내버리고 유중혁의 뒤를 쫓아간 김독자가 크게 소리 질렀다.
“이 개새끼야, 뭘 잡아 죽이란 것도 아니고 신부님들이 다 알아서 할 테니 그냥 참관만 하라는 임무인데 아예 소멸시키면 어떡하냐? 그냥 기다리기만 했으면 다 됐는데 왜 그것도 못 해? 5분, 아니 1분만 기다렸어도 임무 성공이었다고. 좀 협조적으로 나오면 뭐 덧나냐?”
독자의 말에 성큼성큼 걸어가던 유중혁이 갑자기 멈춰서 그를 노려보았다. 인간이 아니라 거장이 공들여 그린 명화의 유일한 주인공인 양 수려한 얼굴은 여전히 냉막했다. 깊게 침잠한 눈빛은 잘 제련된 날붙이처럼 예리하고 날카로워 시선만으로도 사람을 찔러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김독자는 극지의 한기조차 감히 견줄 수 없이 차가운 시선에도 물러서지 않고 유중혁을 마주 노려보았다. 임무 실패 자체야 한두 번 있었던 일도 아니고 평소처럼 유들유들 웃어넘기지 못할 것 없었으나, 이번 일은 명백히 잘 되어가다가 유중혁의 돌발 행동으로 임무를 실패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 임무란 것이 구마를 돕거나 악마와 전투할 필요 없이 엑소시즘이 끝날 때까지 참관하기만 하면 되는 것뿐이었는데도.
유중혁이 다른 종족 범죄자들 모가지를 하도 따고 다니는 바람에 일단 무기부터 뽑는 성질 좀 죽여 보라고 비형이 일부러 거저먹는 임무를 만들어 던져줬는데 제 버릇 남 못 주고 오늘도 사고를 쳤다. 참관 임무라는 걸 알면서도 유중혁이 흑천마도를 집어 들었을 때 불길함을 느꼈어야 했는데. 임무에 나갈 때 무기를 챙기는 건 제게도 당연한 일이라 간과했더니 결과는 이런 대참사였다. 보고를 받고서는 이런 것도 실패하냐고 어이없다는 듯 머리를 싸맬 비형을 달래거나 한수영의 비웃음을 사는 건 전부 제 몫이었기에 김독자는 산을 뿌린 것처럼 아픈 위를 붙잡고 수년째 골칫덩이인 제 파트너 놈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계단을 뛰어 내려오느라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아무런 답도 하지 않는 유중혁을 노려보던 김독자는 이내 한숨을 내쉬곤 짧게 중얼거렸다.
“그래.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냐.”
할 수 있는 말은 예전에 다 했는데.
그는 여전히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유중혁의 곁을 지나쳐 건물 근처에 주차해놓은 차 조수석의 문을 열고 먼저 탔다. 팔짱을 단단히 낀 채 시트에 몸을 파묻고 있자 운전석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지고, 뒤이어 자동차의 시동음이 이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출발했다.
등골을 타고 오르는 진동을 느끼며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는데 갑자기 벨 소리가 들려왔다. 김독자는 코트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했다. 담당 관리관 비형이었다. 설마 벌써 보고가 들어갔나. 그는 짧게 숨을 들이켜 마음의 준비를 하고는 전화를 스피커 폰으로 돌려받았다.
[김독자.]
“유중혁도 듣고 있으니 그냥 말해. 스피커로 돌려놨어. 근데 그… 사제님들이 우리 임무 실패라고 벌써 보고했냐?”
이실직고는 비형이 그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이었다. 허나 비형의 반응은 김독자의 예상과 달랐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당장 광화문으로 가. 코드 레드다.]
코드 레드는 상부가 상당히 중요하고 위험하다고 판단한 상황에 내리는 경보였다. 한국 태생이거나 한국에 오래 상주한 요원들은 때때로 본부라고 부를 때도 있으나, 정확히 말하자면 <스타 스트림>을 아우르는 기구 ‘이종족 및 신비 관리국’ 소속 하위 조직인 한국 지부를 폭파해야 하거나 그에 준하는 상황일 때 내리는 코드 블랙보다야 상대적으로 잦긴 해도 발령되는 일이 드문 경보이기도 했다.
“무슨 일인데 코드 레드야?”
[광화문 광장에서 인신 공양과 부정한 의식의 흔적이 발견됐어. 현장에 그려져 있는 마법진도 관리국에서 뿌려놓은 가짜가 아니라 진짜인 데다가 목적이 악마 소환은 아닌 모양이라, 상황에 따라서 더 심각해질 수도 있어. 일단 현장 조사 때문에 한수영 보내놨다. 나 지금 보고 올리고 성당기사단 쪽이랑 얘기해봐야 하니까 자세한 건 가서 들어.]
비형의 말을 들은 유중혁이 차를 급하게 광화문 방향으로 틀었다. 평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칠고 성급한 드라이빙 탓에 창문에 머리를 박은 김독자가 신음을 삼켰으나 사안이 사안인지라 타박은 하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유중혁의 멱살을 잡던 때보다 훨씬 더 심각해져 있었다. 아까 그 하급 악마의 말이 이를 뜻한 걸지도 모르기에.
광화문까지 가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애초 구마 의식이 거행되고 있던 명동과 위치상 가깝기도 했고 이미 주변 통제가 들어가고 있는 듯 평소 교통 혼잡하기로 유명한 세종대로로 들어가는 차의 흐름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김독자는 유중혁이 운전하는 동안 각 포털 사이트에 관련 내용의 기사가 있는지 확인하고 경찰 무전에도 그런 내용이 있었는지 확인했지만, 경찰이 관리국 측에 한 연락을 제외하면 인신 공양에 관련된 내용은 어디에도 없었다. 광화문 인근 지역에 대한 교통 통제에 대한 말도 찾을 수 없었으니 엠바고를 내렸다기보다는 사안이 사안인지라 관리국에서 직접 통제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세종대로에 진입한 유중혁은 차선을 무시하고 광화문 광장 아래쪽에 차를 대었다. 관리국 요원들이 파견되어 있을 터이지만 일단 내리지 않고 차 안에서 주변 상황을 살피니 광장 주변의 차도와 인도에 있는 다수의 사람 중에 ‘평범한 시민’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부 눈에 익은, 비슷비슷한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뿐이었다.
광화문 광장 건너편에는 눈치 보지 않고 도로 한가운데에 주차된 차도 있는 걸 봐서는 일대에 허가되지 않은 이들의 진입을 막는 결계라도 쳐둔 것 같았다. 결계 치기야 늘상 있는 일이기는 해도 그 장소가 광화문 광장이라는 건 손에 꼽을 만큼 드문 경우지만. 아마 서울 지부가 세워진 후 처음이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 것이다.
상황 파악은 비슷한 타이밍에 끝난 것 같았다. 유중혁과 엇비슷하게 차에서 내린 김독자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의 기척을 느꼈는지 힐끗 돌아본 요원 한 명이 자리를 내어주자 저보다 먼저 도착한 이들이 조치해둔 건지 폴리스 라인처럼 금줄을 치고 부적을 붙여서 만든 결계가 있었다. 제게는 별다른 효과가 없어 결계 건너편 밑바닥으로 핏자국의 일부와 아직 닦이지 않은 지방이 눈에 들어왔지만.
결계를 몇 개 더 넘어가 의식이 실행된 장소에 가까워질수록 김독자의 안색이 점차 희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현장 요원으로서 적게 활동한 편이 아닌데도 이곳에서 느껴지는 음산한 기운에는 몸이 먼저 반응하며 토기가 치밀었다. 먼저 도착해 있던 요원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는지 피가 튀어 붉게 물든 이순신 장군 동상 뒤편으로 검은 봉투를 든 채 얼굴을 파묻다시피 한 요원이 보였다. 다른 요원 한 명이 그의 등을 두드려주고 있었다.
분명 탁 트인 광장인데 피를 얼마나 쏟아부었는지 아직도 진동하는 피 내음도 괴로웠지만, 현장 근방에서 느껴지는 마기의 농도는 그보다 더욱더 어둡고 질척했다. 영안이 트인 이들이라면 실제 부피와 질량을 가진 것처럼 찐득거리는 검은 기운이 이곳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멀리서도 볼 수 있으리라. 인신 공양이라고 해서 전부 악마 숭배나 부정한 의식과 관련된 건 아닌데도 비형이 처음부터 그리 단언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는 얼굴을 찾다가 결국 피로 그려진 거대한 마법진 앞에 쪼그리고 앉은 작은 인영을 발견해 낸 김독자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유중혁은 고새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으니 일단 자신이 한수영에게 얘기를 들어야 할 것 같았다. 독자는 천천히 수영에게 다가갔다. 일부러 발소리를 내고 있었고, 기운도 숨기지 않았으니 제 접근을 알아차렸을 만도 하건만 한수영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흐트러짐 없이 진을 살필 뿐이었다.
사감이야 어쨌건 지금은 일하는 중이니 방해가 되지 않도록 차분하게 그녀의 옆에 쪼그려 앉아 시선을 내리자 아직도 굳지 않은 핏방울의 표면이 바람결에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한수영의 시선 또한 그 피 위에 멈추어 있다가 복잡하고 기하학적인 형태의 문자들을 따라 서서히 미끄러졌다. 그 통에 깔끔하게 다듬은 검은 단발이 잘게 흔들렸다. 흠. 이번 아바타는 본체랑 똑같이 만든 모양이네.
“어때?”
“시발, 너는 내가 언제 도착했는지부터 물어야 하지 않냐? 나도 방금 도착해서 보기 시작했는데, 안 좋아.”
“…그거 전문가 의견 맞지?”
“새끼야, 그걸 말이라고 하냐?”
“안 좋다고만 하면 내가 알겠냐. 나도 명동 엑소시즘 갔다가 지금 왔는데.”
김독자의 말에 한수영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찼다.
“야, 난 지금 한국도 아니거든?”
“대신 여기 두고 간 아바타 굴리고 있잖아. 나보다 먼저 왔으니 알아낸 것 좀 말해봐.”
“쯧. 어쩔 수 없지. 이 위대하신 천재 미소녀 마법사님의 말을 잘 듣고 귀에 새겨두던가.”
“네, 네. 듣고 있으니 어디 말해보시죠.”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 상식적으로 인간의 피는 시간이 지나면 굳잖아. 별다른 처리를 하지 않았는데 의식이 끝난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에도 갓 짜낸 피처럼 굳지 않았다면 그 피에 밴 마력이나 원한이 얼마나 깊다는 말이겠어? 제물의 목을 베어 그 피를 써서 마법진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하는 의식도 있으니 굳이 구분해서 보자면, 광화문 현장 시신 주변의 피는 굳어있었지? 그런데 발견된 시신의 상태와 수, 굳지 않은 피의 양으로 봐선 인신 공양할 제물과 의식을 위해 마법진을 그릴 피를 따로 준비했어.”
어, 그건 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 피바다를 보고 알아차릴 수 없을 리가. 인간 몇 명에게서 쥐어 짜냈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많잖아. 영혼 없이 이어지는 독자의 말에 수영이 주먹을 꽉 쥐고 흔들어 보였다. 그는 어깨를 움츠리며 마법사에게 계속 말하라는 듯 손짓했다. 한수영이 중지를 들어 올리며 마저 말을 이었다.
“문제는 그걸 어떻게 옮겨서 제의를 치렀는지야. 광화문은 낮이고 밤이고 사람의 통행량이 많아. 은신이나 정신계 마법이 시전된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고, 마법진 귀퉁이에 은폐 마법이 새겨져 있긴 했지만 그에 포함된 마력으로는… 내가 계산해봤을 땐 의식 전부터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은폐하는 건 무리였어. 그렇다고 제물에서 뽑아낸 생명력이나 마기로 보충해서 유지 시간을 연장하는 구조도 아니었고. 주범이 은신이나 은폐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었을까? 뭐, 그건 지금 상황에선 판단하기 어려우니 일단 다음으로 넘어가고. 일반인들의 출근 시간 전에 이렇게 거대한 규모의 인신 공양을 마치고, 범인들의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을 정도로 세밀하게 통제된 현장 규모까지 보면 높은 확률로 단체. 그것도 단기간에 급조된 어중이떠중이 모임은 아니겠지.”
수영의 말에 김독자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막 도착해 마법진 전체를 살피진 않은 터라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먼저 도착해 살핀 한수영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게 맞으리라. 한수영은 제가 아는 한 가장 유능한 마법사였으니까.
“좋은 소식은 아니지.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야. 너도 알겠지만, 의식의 목적과 의식을 바치는 대상에 따라 제물이나 의식을 시작하는 시간대, 사용하는 향료의 종류 등 바꿀 수 있는 세부 디테일이 존재하긴 해도 의식이란 정해진 절차, 매뉴얼을 따르게 되어있어. 그리고 매뉴얼을 만들 때는 무엇이 어떤 걸 상징하고 무엇을 우선으로 여기는지 반영되게 되어있잖아. 나는 마법진을 보고 그걸 역으로 되짚어 나가면서 의식의 종류와 방향성, 이런 마법진을 사용하는 개인이나 집단이 과거에 있었는지, 있었다면 어떤 작자인지 알아내야 하는 거고. 그런데 이 마법진은 처음 보는 형식으로 변형되어 있어. 은둔하거나 고립되어 다른 방향으로 마법을 발전시켰거나 다른 종족의 손이 닿았다는 거겠지.”
또 마음에 걸리는 건, 제물은 어떻게 선별했는지 몰라도 마법진에 쓸 피는 상당히 오래 준비했다는 거야. 아까 말했지만 마르지 않을 정도로 고통과 원한이 듬뿍 밴 피라면 희생자를 고문하면서 피를 짜냈을 텐데 이건 단순히 며칠 걸리는 작업이 아니거든.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작업이라 뒷일을 생각지 않고 한 명당 짜낼 수 있는 피를 전부 쥐어짜 냈다면 그나마 머릿수가 적겠지만, 범인들이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제례도 진행할 생각이라면 필요한 수는 훨씬 더 늘어나. 분명 그만한 숫자를 수용할 수 있는 아지트가 있고, 그쪽으로 상당한 물자가 들어갈걸.
“약품의 흔적이나 상태 보존 마법은?”
“약품 사용 여부는 간이 테스트에선 나오지 않았어. 다른 놈들이 피를 회수해가서 더 검사해봐야겠지만 내 판단으론 결과가 그리 다르지 않을 것 같네. 상태 보존 마법은, 보면 알겠지만 그런 흔적은 없어. 어둠에서 기원하는 마력을 주로 다루는 마법사로서 말하건대 느껴지는 건 순전히 지독하리만치 강한 고통과 공포, 원한뿐이야. 그게 이렇게 굳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거고.”
이건 제물이나 대상의 성질상 마법사는 물론이고 그중에서도 악마들과 더욱 밀접했던 악마 소환술사들에게도 오래전에 금지된 의식이라 자료가 대부분 유실된 데다, 마법진도 겉으로는 표준 마법진과 비슷해 보여도 뭔가 더 중첩되고 변형된 거라 오래된 기록들 뒤지면서 조금 더 뜯어봐야 할 것 같아.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도 마법진이 개인에 맞게 변형되고 중첩될수록 해석하기 힘들다는 거 알잖아. 이런 짓을 한 개자식이 어떤 새끼인지는 몰라도 이번 일, 쉽지 않을 것 같아. 아… 담배 땡기네.
한수영은 담배를 찾는 듯 품 안을 뒤적거렸지만 나오는 건 레몬 사탕뿐이었다.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금연하겠다고 당당하게 선언한 지 며칠 안 지난 데다가 한국에 두고 간 아바타에 담배가 있을 리가. 김독자는 그걸 지적하는 대신 좋은 니코틴 공급원을 찾지 못한 한수영이 짜증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사탕의 포장을 뜯고 입에 무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마법진으로 시선을 내렸다. 어떻게 눈을 굴려도 결과는 같았다. 마법을 사용하는 데 사용되는 신성한 문자들은 전부 거꾸로 쓰여 부정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아직 굳지는 않았지만, 광장에 걸쳐 거대한 원형의 마법진을 이루고 있는 선홍색의 피에서는 생명력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생기를 전부 빨린 것같이. 멀쩡한 남의 후각을 고장 내는 게 목적인 양 짙은 피 내음과 의식의 흔적으로 남은 마기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이런 쪽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이가 보았다면 물감인 줄 알고 누가 광화문에 여러 사람 골치 아프게 될 장난을 했다며 픽 웃고 넘어갔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실제로도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 ‘아는’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지. 김독자는 일부러 감정을 죽인 목소리로 낮고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럼 의식의 목적은 읽어낼 수 있었냐? 성공 여부는?”
그의 말에 한수영이 마법진 안쪽에 손을 짚고는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타일에 닿은 손끝을 중심으로 검은 불꽃이 지면에 인접해 작은 원을 그리며 휘돌았다.
“어. 이건 힘의 이동과 증폭, 강화… 땅의 기억은 강력한 마력으로 겹겹이 보호받고 있어서 지금은 읽어내기 어려워. 깰 수 없는 건 아닌데 준비가 필요한 데다가, 이 정도 규모면 이걸 아마추어가 했든 프로가 했든 부정한 의식이라고 귀엽게 부를 게 아니라 바티칸에서 당장 들고일어나 조사대를 파견해도 이상한 것 없는 흑미사 수준이야. 너도 느끼고 있잖아. 안 그래?”
한수영의 말이 맞았다. 독자는 오늘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 도착한 지 고작 몇 분 지나지 않았는데 며칠 동안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못한 것처럼 입안이 바짝 말라 있었다.
“이거, 아스모데우스에게 바치는 의식이야.”
“그게 누군데?”
“마왕.”
“지구에 마왕이 더 있었나? 유일한 마왕이 구… 아.”
미심쩍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잇던 한수영이 이제야 기억났는지 입을 떡 벌렸다. 기억 속에 묻혀있다가 파내어진 마왕의 이름에 급기야 뻐끔거리기 시작하는 마법사를 외면한 독자가 마법진을 다시 한번 살폈다. 마법진의 일부긴 하지만 그럼에도 커다란 원에 빼곡하게 들어찬 문자와 형상을 읽고 또 읽어도 결론은 하나로 향했다. 마법진에 포함된 상징으로 확인한 의식을 바치는 대상도, 의식 중 일어난 마기가 남긴 흔적도 마계의 강대한 72마왕 중 하나인 ‘격노와 정욕의 마왕, 아스모데우스’의 것이었다.
하지만 왜? 아스모데우스가 살짝 미쳐있는 데다 변덕스럽고 잔혹한 성격으로 유명하긴 해도 인신 공양을 받는 마왕은 아닌데. 그냥 받지 않는다 뿐이랴, 아예 저급한 방법이라 일축해서 인신 공양으로 힘을 키우는 일부 마왕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지. 그리 말한 만도 한 것이 아스모데우스가 힘을 늘리는 방식은 대개 적대하는 다른 마왕이나 천사, 혹은 초월자들의 힘의 근원을 직접 파내고 먹어 치우는 것이었다. 봉인되기 직전은 마왕의 위에 오른 지도 상당한 시간이 지난 시점이었으나 변함없이 호전적이고 스릴을 즐기는 탓에 흥미 동하는 상대가 있다면 단신으로 나서 상대를 습격하는 일도 종종 있었고, 그 때문에 많은 초월자가 아스모데우스의 이름만 들어도 역정 내거나 두려워하기도 했었다.
“아무래도 난 지부로 돌아가 봐야겠다. 별다른 정보는 없을 것 같지만… 일단은 마왕과 연관되어 있으니 도서관이라도 좀 뒤져야 할 것 같아.”
김독자는 몸을 일으켰다. 오래 앉아있던 것도 아닌데 벌써 허리와 무릎이 아팠다. 슬슬 몸 관리를 하긴 해야 하나, 앓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두드리자 여전히 땅을 짚고 있는 한수영이 픽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인상을 찌푸려 보였지만 그녀가 물러서는 일은 없었다. 한수영의 성격이 그러했고, 지금까지 알아 온 긴 시간이 그리 만들었으며, 서로 아직 쓸모가 있음을 아는 터였다. 한때 마룡으로 악명 높았던 ‘심연의 흑염룡’과 계약한 마법사를 상대하는 건 지금의 자신에게는 벅찬 일이기도 하고.
성격은 나빠도 실력은 유능한 마법사 한수영이 있으니 마법진과 그 주변에 잔류 마력을 분석하는 건 맡겨놔도 괜찮았다. 그렇다면 저는 저대로 지부로 돌아가서 단서가 될 수 있는 것을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피해자들의 시신은 이미 과학수사과의 감식반이 연구실로 옮겨간 듯하고… 김독자의 시선이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주변 CCTV 영상은 확보되었으려나? 그리고 비형을 통해 연락이 갔겠지만 우선 동훈이에게 딥 웹을 감시하며 관련된 정보를 찾아보라고 하고, 장하영에게도 따로 조사를 부탁하는 게 좋겠지. 단서가 너무 없어 어디에서부터 시작해달라고 부탁해야 할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으나 ‘아스모데우스’라는 이름이 엮인 일이니 모든 정보를 닥닥 긁어모아야 했다. 어떤 이유와 방식에서든 마왕과 관련이 있으니 희원 씨와도 이야기를 해봐야겠고, 그리고 또…….
이어지는 상념을 끊은 건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다른 사람의 음성이었다. 불과 연기를 떠오르게 하는, 묵직하고 매캐한 향을 품은 낮은 목소리.
“어딜 가나.”
“아, 깜짝이야. 왔으면 왔다고 말이나 하라고!”
유중혁의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던 한수영이 놀라 펄쩍 뛰며 몸을 일으키는 것에 맞추어 독자는 고개를 돌렸다. 평소보다 더욱 예리한 날붙이 같은 낯을 한 사내가 등 뒤에 서 있었다.
“내리자마자 쌩하니 사라지더니 어디 갔다 왔냐?”
“책임자를 만나고 왔다.”
네놈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서라며 유중혁의 비난 어린 시선이 닿자 속이 뜨끔해, 김독자는 슬쩍 눈을 피했다. 그렇지만 한수영이 이곳에 있다면 다른 요원들을 만나 상황을 듣는 것보단 이쪽이 훨씬 더 사태 파악의 지름길이었으니까 이것도 틀린 선택은 아닌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어물어물 항변을 내어놓지는 않았다. 다른 때보다 더욱 기분 저조한 유중혁은 더 건드려서 좋을 게 없었으니까. 당분간 곱게 자고 싶으면 지부에 딸린 관사로 돌아간 다음 기분이라도 좀 풀어주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얼추 정리되자 독자는 다시 유중혁과 눈을 맞추고 무슨 말을 들었는지 눈짓으로 물었다. 허나 돌아온 건 말이 아니라 그 짧은 시간 동안 언제 정리해서 뽑았는지 모를 서류철이었다. 뭉쳐있던 이들 중 노트북 들고 다니던 사람도 있었던가?
두꺼운 연갈색 크래프트 지로 만들어진 표지를 넘기니 정형화된 보고서 형식의 문서가 아니라, 의식의 흐름을 따른 듯 대개 단어나 짧은 줄글로 이어진 목격자 신문 1차 정리본이 나왔다. 아무래도 노트북을 든 요원이 아니라 초능력자가 있어 목격자의 기억을 읽어내는 대로 염사같은 걸 한 모양이었다. 관리국에 온갖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모인 건 나쁘지 않은데 현장에서는 가끔 정신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개인적인 감상이야 어찌 되었든 파일을 들여다보며 속독하는 김독자의 옆으로 한수영이 고개를 쓱 들이밀었다. 그렇다고 편히 읽을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지는 않았다. 정강이를 걷어차려는 발을 피하자 마법사가 욕을 짓씹었다.
“협조성이라곤 없는 새끼.”
“네가 할 말이 아니지, 한수영.”
대화에 끼지 않고 있는 유중혁은 더 말할 것도 없지만. 독자는 묵묵히 서 있는 제 페어를 힐끔 보다가 다시 서류로 돌아와 빠르게 텍스트를 읽어 내렸다.
건널목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던 사람이 지나가는 차에 치여 굴러다니는 검붉은 뭉치를 보게 된 것이 시작이었다. 처음엔 그게 누가 떨어트린 장갑이라고 생각했지만 길을 건너다가 붉은 덩어리의 바로 옆을 지나게 된 그가 무심코 시선을 내려 확인해 보니 장갑이 아니었으며, 피와 희게 드러난 뼈, 잘린 근육의 단면을 보고 그게 절단된 누군가의 손이라는 점에 겁에 질려 비명을 올릴 즈음 광장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고, 주변에는 그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게 이상할 정도로 피 냄새가 진동하는 데다 눈앞에 잔혹하게 토막 난 사체가 잔뜩 널려 있었다고.
광화문 광장에는 경찰관이 교대로 상주하고 있었기에 상황을 인지하는 즉시 상부에 보고 및 지원을 요청하고, 그 상부는 관리국에 연락해서 즉각 정보 통제 및 조사가 이루어졌다-는 건가.
과정 자체는 원칙을 따라, 이보다 더 정확할 수 없을 정도로 처리된 전개이기는 했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그만큼 목격자도 많았을 터이고, 혹시라도 이게 퍼진다면 그 뒤의 파장도 크다는 게 문제였지.
관리국이 인지하고 있는 플랫폼과 딥 웹은 교대 근무를 통해 늘 실시간 감시하고 있으나 근방에 있던 목격자들을 전부 확보해 기억을 삭제할 수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드물긴 해도 통제하는 데 실패한 정보가 웹에 풀리는 일이 생기면, 관리국이 발견하는 즉시 조작이라고 여론을 몰아 시간을 번 뒤 게시자를 확보해 처리하곤 관련 정보를 완전히 삭제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뭐, 그렇다고 해도 거기까지 자신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그런 건 어디까지나 세계 각국 정부와 연계된 정보 통제 및 첩보와 은폐 공작 전담 부서, 일명 정보부가 맡은 일이니 굳이 말을 얹지 않아도 비형과 동훈이가 알아서 잘할 것이다. 제가 신경 써야 하는 건 다른 쪽이지. 짧은 보고를 전부 읽은 독자는 재차 시선을 들었다. 유중혁의 표정은 이 트인 공간에서도 여즉 씻겨나가지 않은 지독한 피 냄새에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너도 이거 읽어봤냐?”
“중요한 정보는 없더군.”
“내가 봐도 그렇네. 이 동네 관계자도 아니고 일반인들 머리 뒤져서 나오는 게 뭐가 있었겠느냐 마는.”
당시 광화문 광장에 있던 그 많은 이들이 하나같이 피 냄새와 시체를 인지하지 못했다면 주변에 은폐를 위한 비술적인 처리가 있었다는 말이었다. 설령 그들 사이에 마법사가 섞여 있었다고 해도 그가 결계를 먼저 알아차리고 해제한 게 아니라 결계가 저절로 풀린 거라면 마법진에 무언가 숨겨진 역할이 더 있거나 막연한 생각보다 강력한 능력자의 짓이라는 거니, 본격적으로 조사에 들어가기 전에는 사건을 인지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한수영, 넌 일단 한국으로 돌아오는 게 좋겠는데. 어떤 놈들 짓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이번 한 번으로는 안 끝날 것 같아.”
한수영은 한쪽 다리에만 체중을 실은 채 삐딱한 시선으로 저를 올려 보았다.
“나도 비슷한 생각이긴 한데, 이게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면?”
“뭐… 네 말대로 그럴 확률이 아예 없진 않지. 하지만 의식이 치러진 건 한국이고, 이곳은 아스모데우스의 마지막 행적이 보고된 곳이기도 하니까. 마음에 걸리면 그쪽에 아바타 하나 두고 오던가.”
“그건 그렇지. 아바타는 새로 만들기 귀찮으니 있는 거 보낼래.”
작게 중얼거린 한수영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진에 남아있는 마기를 가늠하는 듯 잠시 눈을 감았던 그녀는 “그럼 난 마법진이나 좀 더 본다. 아바타로도 긁어낼 수 있는 정보는 전부 긁어내야지.” 말과는 달리 귀찮다는 어조로 대화를 끝내고는 다시 마법진으로 돌아갔다. 아까 있던 곳과는 조금 떨어진 방향으로 가는 걸 봐선 마법진 전체를 본인 눈으로 뜯어볼 생각인 것 같았다. 드론이 사진을 찍어뒀을 테니 전체 형상은 그걸 봐도 됐을 텐데.
물론 사진으로는 마기를 담을 수 없고 고위 마왕이 관련된 일인 만큼 직접 봐야겠다는 마음을 짐작 못 하는 것도 아니라,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웬일로 잠잠한 유중혁을 힐끔거렸다. 악마의 흔적에 미친 듯이 날뛰어도 이상하지 않은 존재의 반응이 조용하니 도리어 긴장하게 된다. 겨우 하급 악마를 구마하는 걸 참관하는 데도 결국 제 성질 못 이긴 놈 아니던가.
하급 악마 몇은 족히 박살 낼 것 같은 흉흉한 기운을 전신에 두르고 있는 유중혁을 관찰하는 시간이 지날수록 전신의 근육이 긴장으로 굳어 들어갔다. 혹여 그놈이 마법진을 훼손하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시설물을 부수기라도 했다간 비형에게 잔소리 세례를 듣게 될 것이다.
김독자는 언제쯤 몸을 빼는 게 좋을지 속으로 계산하며 슬슬 걸음을 물리기 시작했다. 유중혁은 여전히 속을 읽어낼 수 없는 냉막한 표정으로 마법진을 볼 뿐이었다.
대치를 끝낸 건 언제 도착했는지 그들에게 다가온 비형이었다. 어딘가 묘하게 낡고 허름해 보이는 검은 수트를 차려입은 관리국의 관리직이자 현장 요원들의 서포터, 보안 코드명 ‘도깨비’ 비형을 본 김독자가 어깨를 들썩거렸다. 유중혁은 주로 임무를 전달하고 서포트하는 입장인 비형과도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는데, 이 상황에서 비형이 등장한 것이 그를 자극하는 요소가 될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둘 다 여기 있었네. 현장은 봤냐?”
“보긴 봤는데 여기는 한수영에게 맡기고 난 지부 돌아가 보려고.”
의식이 아스모데우스에게 바치는 인신 공양 의식이라 자료를 더 찾아봐야 할 것 같아. 품고 있는 무게와는 달리 평이한 어조로 이어지는 독자의 말에 비형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며 입가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관리국에 오래 발을 붙이고 있는 관리직 요원인 만큼 능력이 없는 건 아니라지만 개인의 인지도나 실제 전투력이 ‘심연의 흑염룡’의 계약자보다는 못해서 그런지 반응이 한수영보다 더욱 격렬하다. 김독자는 비형의 반응을 심드렁하게 넘기며 유중혁에게 눈짓하고는 들고 있던 파일을 건넸다.
“아스모데우스? ‘그’ 아스모데우스?”
“그래. 봉인됐던 아스모데우스. 그러고 보니 성당기사단과 얘기한다며. 그쪽과는 얘기 어떻게 됐어?”
“아, 그거. 조만간 바티칸의 성당기사단 엘리트 몇과 사제들, 그리고 너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인 대천사 우리엘의 지상 대행자 정희원이 합류할 거다. 성당기사단과 사제들은 은밀하게 입국하자마자 서울과 전국 각지로 흩어져서 비슷한 일이 있었는지 조사할 거라 네가 볼일은 없겠지만.”
“흠. 성당기사단이라니 희원 씨가 질색하겠네.”
“안 그래도 이미 욕먹었다. 그렇지만 악마와 관련된, 이 정도로 규모가 큰 일에 그쪽을 배제할 수는 없는 데다 총애하는 대행자에게 힘을 실어주겠다고 계시도 내리고 공식적으로는 자길 인정하지도 않는 바티칸- 성당기사단에 꽂아버린 게 우리엘이니 정희원도 별수 없지.”
“성당기사단이 움직일 정도로 큰 문제라면 영국 성공회나 장미십자회가 가만히 있을 리 없는데 그쪽은? 분명 그쪽에도 소식이 들어갔을 텐데.”
“둘 다 상황을 보겠다던데. 바티칸에서 나섰으니 경쟁하듯 달려들 줄 알았는데 의외긴 했어.”
성공회야 그렇다 치고. 장미십자회야 세가 많이 줄어서 바티칸이 슬금슬금 장미십자회를 흡수하려 드는 걸 저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네들이 기존에 받은 의뢰 처리하는 데만도 인력이 부족할 테니까. 아니면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고 몸 사리는 걸 수도 있고. 삐딱한 시선을 감추지 않는 독자의 말에 비형이 쓰게 웃었다.
“그쪽 줄다리기는 아직도 여전한가? 독립한 지도 꽤 오래됐으니 이제는 성공회처럼 좀 포기해도 괜찮을 텐데 말이야. 그리고 아무래도 ‘악마’로 규정된 존재, 그것도 마왕과 엮인 일이다 보니 그 두 곳을 제외한 다른 결사들은 정예 요원 파견 준비를 해놓되 바티칸에 우선권을 넘기고 상황을 좀 더 지켜보겠다고 하는군.”
“뭐야, 몸 사리는 게 맞잖아. 언제 그런 걸 구분했다고. 평소 엉덩이 무겁다가도 악마라면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날뛰던 놈들 아니던가.”
“나는 그냥 말 옮기는 것뿐이거든? 그쪽에서 댄 이유는 그렇다는 거야. 그리스 죽음의 신전과 술의 신전 쪽에선 좀 더 큰 반응을 보이기는 했지만, 그쪽도 네가 여기 있는 걸 아니까 요청이 있다면 그때 심판관과 사제들을 파견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아까 엑소시즘 건 관련해서 할 말이 있는데. 일단 지부로 돌아가지.”
윽. 작은 침음성과 함께 김독자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아니 뭐, 악마가 소멸하기 전 한 말을 전해야 하니 비형과 따로 면담하긴 해야 하는데. 혼자 죽기는 싫어 주변을 둘러보니 정작 사고를 친 유중혁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비형과 나란히 옮기던 걸음을 멈추고 몸을 슬쩍 돌려서 주차해두었던 자리를 확인하자 유중혁의 크고 시꺼먼 덩치는커녕 그간 하도 타고 다녀서 익숙한 차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비형과 대화하는 사이에 기척을 죽이고 빠진 모양이라 다시금 속이 쓰려왔다.
그는 왜 따라오지 않느냐는 비형의 시선에 죽상을 지어 보이며 임시로 설치해두었다는 포탈로 향했다. 연차가 쌓였으니 어딘가에 설치된 포탈을 타고 이동하는 일에는 슬슬 익숙해졌지만 그게 이순신 장군상 받침대 뒤편 벽이 되는 날이 올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으리라.
하여 15분 뒤, 김독자는 비형의 사무실에서 그와 마주 보고 앉아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사무실과 책상 위는 동서양을 망라한 언어로 쓰인 책이며 마법서, 온갖 서류와 성물, 마법이 걸린 아티팩트들로 난장판이었다. 나름대로 정리하려고는 한 것 같은데 영 효과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뭔데?”
“너넨 그 간단한 임무도 실패하냐? 그냥 보기만 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디?”
“그건 유중혁에게 말해. 의식 내내 잠잠하다가 숙주에서 분리되니까 그때 쳐 죽이더라고. 너무 갑작스러워서 말릴 수도 없었어.”
“그래. 보고는 그렇게 들어왔더라.”
“문제는… 그 악마 조금 이상하던데.”
첫 번째로 하급 악마 주제에 퇴마 경험 있는 베테랑 엑소시스트의 구마 의식을 끈질기게 버텼고, 두 번째로 중급 이상의 악마는 죽거나 각 마왕과 함께 봉인됐을 텐데도 자기보다 상급 악마가 현세에 있다는 듯 말했어. ‘그분’이 이미 지상에 강림했다고 했는데, 평소라면 늘 있는 하급 악마들의 블러핑이겠거니 하겠지만 오늘 발견된 광화문의 마법진이 아스모데우스에게 바치는 거라는 걸 생각하니까 쉽게 넘길 순 없더라. 다른 마왕들은 봉인된 지 오래이니… 그놈이 아스모데우스의 권속이나 권속의 권속이라면? 물론 그 정도로 강한 마력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말이야. 김독자의 말에 비형이 침묵했다. 그 또한 관리국에 적을 오래 두었지만, 갑작스레 들려오는 마왕의 이름이란 그만한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긴장으로 바싹 말라 갈라진 입술을 달싹이던 도깨비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스모데우스는 정확히 21년 전에-”
“일반적으로 지옥, 혹은 마계라 불리는 곳에 봉인됐지. 공식적으로는. 하지만 20년 전에 봉인이 풀렸고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잖아. 그리고 뭐가 됐든 이게 그 이후로 처음 나타난 단서야.”
“…이 나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지 모르겠군.”
“동감이야.”
“네가 페어니까 당분간 유중혁 목줄 꽉 붙잡고 있어라. 위쪽에서도 예의 주시하고 있어.”
“그게 가능했으면 지금 나 혼자 면담하고 있겠냐?”
비형이 픽 웃었다. 안면 근육이 어색하게 일그러진 것을 봐서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란 것쯤은 알 수 있었으나 독자는 내색하지 않았다. 악마가 나타났으니 조심하긴 해야지. 여상하게 말을 이었어도 그의 내부는 여전히 혼란으로 수런거리고 있었다. 국가와 지역과 종교의 구분 없이 신실한 신앙과 신성력을 가진 사제들뿐만 아니라 각 계통의 마법사, 무인, 초월자들이 전 세계를 샅샅이 뒤졌는데도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졌던 아스모데우스의 이름이 왜 지금 드러났는지 알 수가 없었으므로.
사태 수습 면에서는 ‘진짜 마법진’을 접하고 홀려버린 인간쓰레기의 짓인 편이 개중에서 가장 좋은 엔딩이고 그게 아니면 시간 남아도는 작자들의 질 나쁜 장난질인 쪽이 차라리 나았지만, 아스모데우스가 봉인에서 풀려나 있다는 것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런 일은 아스모데우스의 취향이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수백 년 전, 세계의 많은 종교와 국가, 초능력자들이 연합해 관리국의 전신을 만들고 인세에 너무도 큰 해악과 악영향을 끼치던 존재들을 하나씩 봉인하기 시작하여 마왕으로는 아스모데우스가 마지막이었던지라 지금은 달리 개입할만한 악마도 없는 것으로 아는데… 어쨌든 마왕과 관련된 일이니 사제들이 있는 쪽이 없는 것보다 훨씬 나으리라.
“그래서 희원 씨는 언제 도착한대?”
“이르면 내일 아침, 늦으면 저녁쯤? 검에 우리엘의 축복을 받느라 늦어지고 있어서 오늘은 힘들고 바티칸과 연결된 장거리 포탈을 따로 이용할 거야. 사제들은 이미 출발했대.”
“내일은 마력이 날뛰겠네. 애들에게도 희원 씨 도착하시기 전까지는 도서관엔 가지 말라고 해둬야겠다.”
“거긴 평소도 마력이 넘칠 텐데? 오가게 두는 것 자체가 애들에게는 아직 위험하지 않냐.”
“그렇다고 금지할 권한은 없으니까. 우리 다음 임무는?”
독자의 말에 비형의 표정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예전에 중급 관리관에게 깨진 비형의 얼굴이 저랬던가. 그의 반응이 흥미진진하다는 듯 바라보는 김독자를 길게 횡견한 검은 수트의 요원이 말을 이었다.
“다음 임무는 무슨 다음 임무. 그 쉬운 직전 임무를 장렬하게 실패했으니 일단 며칠 근신이지.”
“실패하긴 했어도 나름대로 정보를 얻어왔는데 근신이라니 처분이 너무하지 않냐?”
“어차피 오래 못 가. 최악의 경우로 아스모데우스가 정말로 한국에 나타난다면 잠깐 시간을 끄는 데만도 지부 인원 대부분을 동원해야 할 테고, 한국 지부에는 불행하게도 너랑 유중혁 페어는 실력으로는 최상위권이니까. 성당기사단과 한국 교구 지원자들, 정희원과 이현성, 탐색 능력자 몇몇이 조사에 들어갈 테니 말이 근신이지 본격적으로 일 맡기 전에 당분간 좀 쉬어둔다고 생각해. 아스모데우스의 이름이 언급된 상황에 유중혁을 그냥 내보내기엔 위쪽에서 여러모로 걸려 하는 것도 있고. 가만히 있기 뭐하면 지부 내부에서 조사해보던가. 네게 내려지는 근신이라는 것이 도서관에 가거나 지부 상주 타 요원들과 대화하는 것까지 금지하는 건 아니니까 말이야.”
“이런.”
말은 저래도 바로 다른 임무를 받지 않는 게 기껍다는 듯 김독자의 입꼬리가 비스듬하게 위로 올라갔다.
“어쨌든 내가 전할 말은 끝이다. 넌 더 할 일 있냐?”
“정보 수집차 도서관에 갔다가 동훈이에게 가볼까 싶은데. 아니, 동훈이에게 갔다가 도서관에 가는 게 낫나?”
한동훈이란 말이지. 김독자가 전한 소식에 순식간에 해쓱해진 낯을 한 비형이 턱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처음 부르는 것처럼 어색한 어조이지만 관리국 한국 지부를 지탱하고 있는 한 축을 비형이 모를 리 없었다. 일단 1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세계의 반대편까지 정보가 전해질 수 있는 디지털 시대이니만큼 정보 수집과 통제 관련으로 가장 먼저 찾는 게 동훈이인 데다, 신과 악마, 마법사와 여러 이종족, 초능력자들이 얽힌 일뿐만 아니라 몇몇 요원들 때문에라도 자주 볼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유중혁. 그놈은 어릴 적에도 타인의 시선을 끄는 외모였는데 완전히 성장한 지금은 사선을 넘나드는 전장에서 밴 야성미까지 더해졌다. 그 때문에 임무 완수 후 목격자의 기억을 지웠다고 생각해도 무의식중에 인상 깊게 남는 것인지, 시간이 지나서 보면 어디선가 유중혁을 찾는 글이나 사진, 영상 같은 게 툭툭 튀어나왔다. 해서 한국 지부에서도 귀찮음을 감수하고 정보부 인원의 일부를 떼어 실시간 감시를 돌리고 있는 참이었다.
무의식에 남은 정보를 떠올린 일반인이 웹에 글을 올려도 이종족이나 마법을 본 건 비현실적인 백일몽이라도 꾼 모양이라고 자체적으로 이유를 붙여 해결하는 모양인데, 유중혁을 필두로 장하영이라던지 빼어난 외모를 가진 요원들은 유독 언급이 잘 되더라. 그나마 장하영이나 지금은 자리를 비운 제 스승 키리오스 로드그라임 같은 경우에는 이국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어 외국인 관광객으로도 생각할 수 있지만, 동아시아인- 특히 한국인의 특징이 크게 두드러진 유중혁은 묘사 관련 필터링 알람이 자주 울리는 편이라고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참에 겸사겸사 그쪽 관리도 좀 부탁해야 할 것 같았다. 동훈이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만, 그래도 한마디쯤은 해야 다른 놈들이 더 신경 쓰겠지.
비형에게 전할 정보도 다 전했고 조사 방향이나 임무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니 정보부와 도서관에 다녀오면 당장은 더 할 일이 없었다. 범인의 흔적이라도 남아있거나 용의자 후보군이라도 추릴 수 있었더라면 탐문과 자료 수집으로 바쁘게 움직여야 했을 터이지만 지금은 정보가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다. 그렇다고 전문가들 사이에 끼어들 수도 없고.
김독자는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나 발을 돌렸다. 면담이라고 거창하게 칭하긴 했지만 오래 앉아있지도 않았는데 벌써 몸이 찌뿌듯했다. 굳은 근육을 풀기 위해 기지개를 켜며 그대로 밖으로 나가려는데, 김독자, 비형이 낮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21세기에 인신 공양이라. 만약 신이 아직도 존재한다면 이 꼴을 보고 뭐라고 할까.”
발을 돌리자 본인이 신을 구하고도 착잡하다는 표정의 비형이 서류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길고 마른 손가락 아래에서 종이가 접히고 구겨졌다.
신(神)이라. 김독자는 낯선 단어를 입속에서 굴려 보았다. 확실히, 아무리 신비와 밀접한 생을 살아간다고는 해도 관리국의 관리관이 하기엔 의외인 말이었다.
“글쎄, 지금은 없는 이들에게 답을 바라선 안 되겠지.”
김독자는 엷게 웃으며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관리관을 바라보았다.
그도 알고 있듯이 신들은 떠났고 남은 건 그들의 잔재이자 의지의 조각뿐. 그렇다 하더라도 희망과 믿음을 품은 이들은 그 의지마저 전부 스러질 때까지 제 신의 길을 경건하게 뒤따르리라.
신성을 좇는 사제뿐만 아니라 마력을 다루는 마법사들과 인간 아니되 세계의 섭리를 따르는 자들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생명을 지키고 돌보면서도 한편으로는 반상 위에 올린 채 유희로 여겼던 신들과 신화의 시대는 천천히 예비 된 종언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은막 뒤로 물러선 이들 대신 새로운 시대를 주도하는 건 인간의 역할. 관리국은 그것을 아주 오래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이렇게 이 땅의 지배자 세대를 교체해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세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신화의 종말 이후 인간이 마지막 신비마저 사라진 세계에 완전히 도달했을 때를 위해.
비록 그때까지는 지금으로선 아직 헤아리기 어려울 긴 시간이 남아있지만 말이다.
유중혁은 기상 직후의 몽롱하고도 불유쾌한 부유감에서 천천히 부상했다. 제 수면을 방해하던 기척은 불을 켜지 않은 채 자유롭게 공간 안을 누비고 있었다. 정체를 따로 확인할 것도 없이 익히 알고 있는 것이기에 그는 재차 눈을 감았다. 그것을 비웃듯이 거실의 불이 켜지고 발소리 없이 다가온 누군가가 제 몸 앞에 서는 것이 느껴졌다.
반응하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겠다는 듯 끈질기게 버티고 있는 기척에 눈을 뜨면, 오랜 시간 보아 온 하얀 얼굴이 몸을 숙인 채 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목덜미까지 단정하게 잠근 검은 셔츠 위로 가볍게 걸친, 계절의 흐름에 따라 점차 낮아지고 있는 기온에도 불구하고 여미지 않은 하얀 코트 자락은 작은 움직임에도 몸 위에 닿을 듯 살랑댔다.
“수련실에 있을 줄 알았더니. 날 버리고 너 혼자 일찍 들어왔으면 방에 가서 자지 왜 거실에 있냐? 옷도 안 갈아입고, 늘 끼고 살던 흑천마도도 대충 던져놓은 게 유중혁답지 않은데. 아까 악마가 한 말이 신경 쓰이기라도 하냐? 아니면 마법진 때문에 그래?”
“네가 할 말인가.”
“그야 난 파트너가 날 버린 덕분에 혼자 비형이랑 면담하다가 동훈이 만나고 도서관 들러서 자료 찾다가 왔다고.”
“다음 임무는.”
“불명…이 아니라 당분간 근신. 전부 네가 직전 임무를 실패한 덕분이지. 비형 말로는 오래가지 않을 테니 다른 임무 맡기 전 좀 쉬어두는 거라고 생각하래. 어차피 우리가 맡을 임무는 뻔한데 앞으로 나돌아다닐 거 생각하면 조사 정도는 남에게 맡겨도 괜찮지 않겠냐.”
쯧, 그는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날렵한 움직임에 김독자가 휘파람을 불었다. 평소에도 연체동물처럼 흐느적대거나 작은 바람에도 날아가 버릴 듯 가볍게 구는 놈이지만 지금은 유독…….
유중혁은 끝없이 이어지는 상념을 칼로 잘라내듯 멈추고 방향을 돌렸다. 여우처럼 샐샐대는 김독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기를 머금고 별처럼 반짝이는 눈 너머에 드리워진 감정을 차분하게 읽어낸 중혁이 흉흉한 눈빛으로 김독자를 쏘아 보았다.
그러나 김독자는 금방이라도 무기를 꺼내 베어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날카로워진 유중혁의 기세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겼다. 인제 와서 어떻게 반응하기에는 그와 자신이 함께 보낸 시간이 너무도 길었기에.
그와 자신은 아이들에게도 거칠고 가혹하며 자비 없기로 유명한 관리국 산하 훈련기관의 훈련을 어릴 적부터 같이 이수해오지 않았던가.
물론 유중혁은 관리관은 물론이고 교관들과 동기를 포함한 모두가 예상했던 것처럼 수석으로 졸업하고 저는 간신히 턱걸이하긴 했지만, 그런 사소한 일이야 어찌 되었든, 중요한 건 아무리 기세로 압박해봤자 김독자가 그에게 겁을 먹진 않는다는 것이었다.
유중혁은 김독자를 죽이지 못한다.
하여 김독자는 몸을 일으키는 유중혁의 어깨를 한 손으로 누르며 하나의 흉기처럼 잘 단련된 몸에 올라탔다. 입가에 걸린 미소를 유지한 채로 상체를 숙여 아래에 깔린 남자와 얼굴을 마주하자, 상황이 못마땅하다는 듯 그의 색 짙고 숱 많은 눈썹이 거칠게 꿈틀거렸다.
“그러고 보니 너 못 한 지 제법 됐지? 당분간 근신이니 잘됐네.”
“치우고 당장 꺼져라, 김독자.”
상처 입은 짐승이 으르렁대는 듯 사나운 목소리가 귀를 긁었다. 그러나 김독자는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남자에게 속살댈 뿐이었다.
“너무 그러지 마라. 내가 여기 있잖아. 너도 한창땐데 실컷 하고 기분 풀어.”
공기를 직접 진동시키기라도 하는 듯 기묘한 울림을 가진, 달착지근하고도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말라붙은 설탕물처럼 끈적하게 귓바퀴에 달라붙었다. 뒤이은 침묵. 남자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그리고 잠시간 조용했다는 건 전부 착각이었다는 양 작은 욕설과 함께 나무줄기처럼 억세고 두꺼운 팔이 아래에서 치솟아 거친 손속으로 그의 멱살을 잡고 끌어내렸다. 순식간에 위치가 바뀌어 유중혁의 아래에 눕게 된 독자는 시선을 들어 상대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별이라곤 모조리 떨어트려 빛없이 광막한 밤하늘을 보는 것 같은, 혹은 무저갱처럼 검고 깊은 눈에 비친 제 얼굴은-
김독자는 흐리게 웃으며 유중혁의 목을 안은 팔에 힘을 더했다.
아, 이 땅에는 진실로 신이 없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