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혁독자] 지상에서 영원으로 (2)

※ 현대 판타지 AU

Paper Moon by 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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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있는 데에도 익숙한 그는 둔탁한 녹색 기둥 사이의 굵은 철봉에 매달렸다가 빨갛고 노랗고 파랗게 칠해진 정글짐을 기어오르고, 곧 내려와 군데군데 녹슨 철제 사슬이 삐걱거리는 그네를 타다가 그것조차 재미없어질 즈음 군데군데 헤집어지고 파인 모래밭으로 들어갔다.

모래밭에는 누군가 깜박 잊고 두고 간 듯한 작은 모종삽이며 노란 플라스틱 바구니, 엷은 파스텔 색감의 플라스틱 소꿉놀이 세트가 있었으나 그걸 건드리거나 딱히 자리를 잡고 앉아 무언가를 만들지는 않았다. 그저 채 자라지 않은, 놀이터의 녹슨 기구가 녹 자국 길게 남긴 손바닥 위로 쌓였다가 푸스스 흘러내리는 황갈빛 모래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낮 동안의 열기에 버석하게 메마른 모래는 힘없이 흘러내려 손 아래 그림자 드리워진 곳에 쌓였다. 모래로 성을 쌓거나, 집을 만들거나, 소꿉놀이하는 것보다는 몸을 움직이는 것을 더 좋아하는 아이였지만 오늘은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가을이나 겨울의 한때처럼 전신을 엄습하는 오싹한 한기와 무거운 호흡.

 

 

* * *

 

 

“너희가 요란하게도 했다는 걸 내가 알게 된 건 그렇다 치겠는데, 그렇다고 동네방네 자랑이라도 하고 다닐 셈이냐? 다들 네가 유중혁 그 새끼의 ‘이거’라는 걸 안다고 해도 그렇지.”

머리꼭지 위에서 들려온 서늘하고도 날카로운 목소리에 김독자는 고개를 들었다. 그를 내려다보던 한수영이 한 손으로는 목덜미를 가리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새끼손가락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많은 보안 구역 중에서도 최상급 보안 구역인 도서관 구석은 드나들 수 있는 사람 몇 없어 굳이 잠그지 않고 대충 풀어헤치고 있었더니 생각지도 못한 한수영이 올 줄이야. 그는 쓰게 웃으며 허술하게 풀어 헤쳐져 있던 셔츠 깃을 여몄다. 부드러운 재질의 천이 아직 잇자국과 울혈 빼곡하게 남은 피부 위를 스치고 구겨지며 부스럭거렸다.

느릿한 손놀림으로 좁은 단춧구멍에 단추를 채우는 가늘고 긴 손가락을 빤히 바라보던 한수영은 김독자의 맞은편 의자를 빼고 앉았다. 나무 의자가 반질거리는 대리석 바닥을 긁는 소리가 요란했으나 이 시각, 두 사람 외엔 들을 사람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소리만 크게 났을 뿐, 자재 하나하나까지 강대한 마력으로 보호되고 있는 바닥이 나무 의자를, 겨우 몇 센티미터 꺼내는 일로 긁힐 리 없다. 김독자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너, 내가 오는 거 몰랐지.”

“일시적인 거야. 네 말대로 어제 너무 요란하게 했더니 아무리 나라도 좀 피곤하네. 우리 중혁이 체력과 정력이 좀 좋냐. 양심은 그거랑 반비례하는지 한참 시달렸다니까.”

테이블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괸 수영이 밑도 끝도 없이 낸 물음에 독자는 매끄러운 어조로 답했다. 첫 질문을 실패한 수영은 상대의 반응에는 개의치 않고 다음 물음을 이었다.

“그래서 뭐 알아낸 건 있냐?”

“딱히. 봉인된 마왕이라 그런지 도서관에는 아스모데우스에 대해서는 남은 기록이 얼마 없더라. 마법진 쪽은 어때?”

“이쪽도 별로. 현장 주변에 남은 다른 마력은 없었어. 마기에 가려진 게 아니라 처음부터 사용되지 않았던 것 같아. 수거해 온 피는 과학수사과 연구실에서 분리해서 분석해보려고 한다는데, 워낙 많은 사람의 피가 섞여 있어서 별다른 성과는 없을 듯? 끽해봐야 광화문에 있었던 시신의 수만큼이나 찾을 수 있을까. 그것 말고도 혹시 모르니 시신 유전자 채취해서 경찰청과 국과수에 쌓인 샘플들과 대조해본다고는 했는데 발견된 손과 발에서는 지문이 전부 도려내 져 있었고, 머리도 이빨이 다 뽑힌 채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만치 뭉개져 있던 걸 봐선 DNA 검사를 한다고 해도 신원을 밝히기조차 쉽지 않을 것 같더라. 어쩌면 관리국은 놈들이 자만으로 실수하기만을 바라며 두 번째, 세 번째, 그 이상의 사건을 기다려야 할지도 몰라. 그 말은, 희생자가 또 생긴다는 거고.”

수영의 말에 독자는 침음성을 흘렸다. 호흡을 고르고 김독자의 반응을 보느라 잠시 멈추었던 한수영은 곧 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현장을 보니까 마력의 바닥까지 싹싹 긁어가서 마법진은 거의 형태만 남아있던 셈이고, 마기를 제외하면 느껴지는 게 없더라. 시간이 좀 더 지나니 현장에 뭉쳐있던 마기마저 사라지려고 하길래 급하게 의식 준비를 해서 주변 대지의 기억을 읽었지만 노이즈가 너무 심했어. 의식의 단편만 간신히 봤는데 무슨 음모론 영화의 한 장면처럼 검은 로브에 후드로 얼굴을 가려서 뭐 보이지도 않았고. 네가 현장을 더 안 보고 도서관으로 가겠다고 한 이유도 그거겠지.”

“정답.”

“알면 말 좀 해주지 그랬냐. 그럼 쓸데없는 기운 낭비는 안 했을 텐데.”

“너도 알겠지만, 네 성격이 좀 더럽냐? 그땐 말해도 안 들었을 거 아냐. 아스모데우스처럼 난폭한 마왕의 출현은 다른 마법사들에게도 안 좋은 영향을 끼치니 ‘심연의 흑염룡’과 계약해서 금지된 지식까지 얻게 된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겠지.”

“…망할 새끼. 말이나 못 하면.”

낡은 책의 황변된 책장이 팔랑 넘어갔다. 침묵이 기다란 뱀처럼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현장 주변 CCTV는 어때?”

“전날 새벽부터 마법진이 발견된 시각까지 분량을 다 수거해와서 보는 중인데 연락 없는 걸 보면 아직 특별한 건 없는 것 같아. 제물로 희생된 사람들의 신체 부위를 맞춰보니 인원이 꽤 되는 것 같은 데다 다른 마법의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어서 일단 조금 더 떨어진 곳까지 CCTV 영상 수거한 다음 주변 도로 CCTV에서 다인원이 탑승할만한 승합차 중 이상한 낌새를 보이는 게 없는지 찾아봐달라고 했어. 선전포고 장소를 그렇게 대담하게 고른 놈들이 위장책을 안 썼을 리 없고 이동 수단을 나눠 타거나 한참 멀리서부터 걸어왔을 수도 있지만 혹시 모르니까.”

명확한 단서가 없다고 아무것도 안 할 순 없잖아. 무력감보다는 짜증스러운 기색이 뚜렷하게 드러난 한수영의 말에 김독자는 굳이 말을 덧붙이지 않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그의 반응에 한수영이 눈을 흘겼다.

“마법사로서의 내 이름을 걸고 말하건대 그 마법진은 여러모로 많이 변형되긴 했지만 소환진은 정말로 아니었어. 대상에게 힘을 주는 마법진이지. 그렇다면 범인은 관리국과 관계된 자들이 아닐까? 호기심에 이쪽 세계를 건드려 본 일반인들이라면 인생의 빅 이벤트로 소환진을 더 바랄 테니.”

“글쎄… 하지만 조사 초기이니 가능성을 열어둬도 좋을 것 같다. 피해자 신체 부위 사진을 보니 자를 때 망설이지 않고 단번에 쳐냈던데. 마법진에 들어간 기호와 상징의 획도 흔들린 곳 한 군데 없이 매끄러웠고. 동물도 아니고 인간을 제물로 바쳤는데 이런 일은 평범한 인간에게는 쉽지 않지. 적어도 주범 혹은 조력자는 ‘이쪽’ 프로가 분명해.”

그리고 비형에게만 말했던 건데, 명동에서 거행되었던 구마 의식에서 부마자에게 씌어있던 악마가 좀 더 상위 존재를 언급했거든. 피아노 건반 위를 쓸어내리듯 매끄럽게 이어지는 말에 한수영이 인상을 확 찌푸렸다. 갖가지 언어로 된 다채로운 욕설이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짓이겨졌다.

“개새끼야, 그럼 어제 다른 가능성이니 뭐니 말하지 말았어야지. 이런 건 너만 알지 말고 좀 미리미리 말하라고. 난 괜히 귀국한 거나 마찬가지잖아.”

“괜히는 아니지. 관리국이 있는 서울에서 이렇게 대담한 범행을 벌인 놈들을 상대하는 건데. 그리고 정말로 아스모데우스의 권속이 나타났던 거고, 그놈들과 싸우게 된다면 네가 더 필요해질걸. 능력만큼이나 콧대 높던 그 용, ‘심연의 흑염룡’과 계약할 정도로 뛰어난 마법사 한수영이라면 한국 지부 전력 상위권에 속하는데 그냥 놀릴 리가 있나. 그리고 지금은 범인을 특정할 단서가 없잖아. 좀 터무니없더라도 조사하면서 가설을 하나씩 세우고 지워나가야지.”

아스모데우스의 봉인이 오래전에 풀렸다는 점에 대해서는 지금의 자신이 말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기에 김독자는 미심쩍은 표정을 짓는 한수영에게 담백하고 잔잔하게 웃어 보였다.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몸을 늘어트리고 손깍지를 느슨하게 끼기까지 하자 상황에 맞지 않는 제 여유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상대가 인상을 와그작 찌푸렸다.

그러나 한수영도 제 말과 아스모데우스의 봉인에 대해 본인과 다른 요원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진실이 있다는 점 정도는 슬슬 눈치챘을 것이다. 어둠에서 기원하는 마력을 다루는 마법사- 그중에서도 최상위에 꼽히는 한수영조차 제게 듣기 전까지 떠올리지 못했던 마왕의 이름도 그렇거니와, 이건 제례의 올바른 순서를 알고 있고 분노와 증오와 고통과 원한만으로 부패를 멈출 정도의 제물을 제공할 수 있는 조력자의 유무와 관계없이, 딥 웹을 떠도는 진짜 마법진에 홀린 인간들이 일으키는 사고들의 양상과는 확연하게 다르니까. 오히려 이렇다 할 단서가 없는 상황에서도 명확하게 보이는 것들을 ‘아직 조사 단계이니 많은 가능성이 열려있다.’라는 부정확한 말로 흔들고 혼란스럽게 하는 건 자신이었지.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한들 지금까지 쌓아온 신뢰를 이용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으니 한수영이라면 진상이 밝혀진 뒤 크게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늘 그러하듯 온갖 막말을 내뱉으며, 결국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라도 제 옆에 서준다면 좋을 텐데.

한수영을 오래도록 알아 왔지만 김독자는 그리 바랄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종잡을 수 없으며 이성과 논리만으로는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방향으로 튀지 않나. 관리국에서 만나본 천사와 악마도, 뱀파이어며 웨어 울프도, 인어와 페어리, 드래곤도 그리 말했고, 스스로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김독자에게 있어 타인이란 늘 불가해의 영역이었다.

그에 더해 몇몇 예외가 있긴 하지만 마왕이란 대개 순수한 어둠의 마력에서 태어난 생명체. 그를 능가하진 못해도 최소 일정 수준 이상의 힘과 정신력을 지니지 않은 한, 어둠과 관련된 마력을 가진 이들은 어떻게든 마왕의 영향을 받고는 했다. 상성 자체가 나쁜데 홀로 떨어져 있다가 습격이라도 당한다면, 지금의 한수영이라면 막아내기 힘들 것이다.

하여 한수영의 성정상 제게 조력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조종당하는 등 본인의 의지와는 별개로 아스모데우스의 편에 서게 될 가능성이 제로가 아니라는 점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니 친구는 가까이, 적이 될지도 모르는 이는 더 가까이.

마냥 긍정적이고 제게 편리한 방향으로만 생각하기엔 한수영이 오늘 도서관에 오는 것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힘을 지닌 자들이 늘 그러하듯 한수영도 이쪽과 엮이는 일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닌지라, 관리국에 적을 올려두기는 했어도 비형이나 다른 요원의 소환이 없는 오늘은 자기 방에 있을 줄 알았는데.

이런 생각을 들키면 당사자는 자길 뭘로 보는 거냐며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참, 성당기사단이랑 다른 사제들은?”

“근신이라더니 비형에게 못 들었냐? 마왕에게 바치는 제의라고 평소와는 달리 헐레벌떡 뛰어오기라도 한 건지 예상보다 빨리 온 덕분에 여기저기 퍼져서 조사하고 있지. 마법진이 그려져 있던 현장이 광화문이다 보니 서울에 제일 많은 수가 배정됐긴 하지만. 마왕, 그것도 아스모데우스와 연관된 흔적이라면 바티칸에서도 중요한 사안이니까. 서울과 서울 근방에서 마기가 인위적으로 흘러 들어가는 곳이나 고여있는 곳이 있는지 찾아보겠대. 그래서 희생자들을 어딘가에 가둬두고 오랫동안 고문한 것 같다고, 물자를 실은 차량이 드나들 만한 아지트가 있을 거란 말도 전해놨어.”

“어어, 난 못 들었는데? 뭐… 이미 도착했다면 그쪽이랑 상부랑 알아서 하겠지. 비형이 미리 언질 주기는 했지만 이쪽 마력의 흐름이 여전한 걸 보니 희원 씨는 아직 안 도착하신 것 같네.”

“맞아. 그래도 오늘 저녁이면 올걸? 오면서 관리관 몇을 마주쳤는데, 우리엘이 검에 축복 내리면서 뭔가 계시라도 내렸는지 알아보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더라.”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한수영의 말에 독자는 입가에 떠올린 미소를 짙게 할 뿐이었다. 관리관들은 정희원에게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정보는 이미 쥐고 있겠지. 조력자 명단에 올릴 이에게 가장 중요한 정보를 전달할 수 없는데 아스모데우스 자체도 행동을 종잡을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이 신경을 긁었다.

“참. 유중혁 그놈은 좀 멀쩡해 보이냐? 지금쯤 다 쳐 죽이고 다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더만.”

“음… 날 밝을 때까지 했으니 지금은 자고 있을 텐데 일어나면 어떻게 될지 또 모르겠네.”

“미친 새끼.”

어깨를 으쓱대고 마주한 이와 다를 것 없는 심드렁한 낯으로 책장 한 장을 더 넘기자 한수영의 표정이 기묘한 형태로 변해갔다.

“근데 그렇게 했다며 네 체력에 용케 앉아있다? 이설화에게 약이라도 받았나.”

응. 왕창 받았지. 먹고 힘내서 당분간 유중혁 좀 잡고 있으라고. 걱정하고 있다는 건 알지만 다들 너무한 거 아니냐. 뱀파이어 몇 쳐 죽이고, 웨어 비스트 일족도 골라 잡고, 페어리도 좀 죽이고, 고블린과 임프는 말할 것도 없고, 인어와 해룡 회 뜨기는 했지만 중혁이가 왜 그래야 했는지 모르잖아. 입술을 비죽이면서도 여상하게 이어지는 말에 한수영의 시선이 잠시 질린 기색을 띠었다가 곧 한심한 것을 본다는 듯 바뀌어 갔다.

“모르긴 뭘 몰라. 정말 모르는 사람이 봐도 목 따인 놈들 리스트 읽고 나면 어둠에 가까운 종족들이랑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건 알아차릴걸? 그리고 다들 말을 안 할 뿐이지 유중혁 일은… 솔직히 그 시기에 관리국에 있었던 사람은 알만치 다 아는 얘기긴 하고.”

그렇다는 건 네 얘기도 마찬가지라는 거지만. 금방이라도 가라앉을 듯 작게 중얼거리는 수영의 목소리에는 썩어들어가는 가을 낙엽처럼 씁쓸한 기색이 배어있었다. 반면에 김독자의 얼굴에는 도기처럼 매끄러운 웃음이 자리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악마종이 일으킨 사고 때문에 풍비박산 난 집안이 어디 한둘이냐. 하급 악마만 해도 보통 인간들은 상대가 안 되는데. 그런 면에선 단순 빙의가 차라리 나았을지도.”

“내 의견으로는 빙의도 글쎄다 싶지만, 뭐, 제삼자가 할 말은 아니지. 그래서 넌 어떤데?”

“…나야 뭐…….”

독자는 말끝을 흐렸다. 들어보니 아무래도 한수영이 오늘 온 이유로 정보 교환도 있지만 제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나보다. 그리고 유중혁의 상태도.

하기야 조사를 맡은 마법사로서는 신경 쓰일 수밖에 없겠지. 마물에 가까운 하급 악마종에게도 격렬하게 반응하던 유중혁. 갑자기 등장한 ‘진짜’ 마왕의 흔적에 나름대로 혈기 넘치는 시기인 유중혁과 자신이라면 여러모로 사고 치기 딱 좋은 조합 아니던가. 그리 생각할 다른 이들의 걱정을 모를 리 없기에 일부러 이런저런 방법까지 써가면서 유중혁의 기분도 풀어주고 붙잡고 있었는데 그것으로는 영 부족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 한수영이 몸소 찾아오기까지 할 정도였다면. 그렇다면 그건 제 실책인가.

“임무에 지장 안 갈 만치는? 그리고 입양 절차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전이어서 나는 딱히 잃은 게 없으니까. 결국 다른 부모님도 만났고. 유중혁은 당분간 내가 신경 쓸 테니 일단 아스모데우스의 상징에나 집중해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근신만 아니라면 나도 바깥 좀 돌아볼 것을… 아쉽게 됐어.”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말은 잘하네. 아서라. 보통 때 유중혁도 그런데 기분 저조한 그놈이 돌아다니면 다들 겁먹어서 될 일도 안 된다고.”

한수영은 주머니에서 막대로 된 레몬 사탕을 하나 꺼내더니 포장을 뜯고 입에 집어넣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혀로 사탕을 몇 번 굴리던 그녀는 잠시 행동을 멈추었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는 의자를 끄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보다 높은 곳에 있는 시선이 관조하듯 차분하게 떨어졌다. 김독자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복잡한 속내를 품고 있는 두 쌍의 새까만 유리알 같은 눈이 서로를 마주 담았다.

“뭐냐?”

“너도 아는 게 없다면 나도 나대로 움직여야지. 그럼 근신 동안 잘 쉬어보라고, 마왕님.”

어깨를 으쓱댄 한수영은 볼일은 다 끝났다는 듯 도서관을 떠났다. 홀로 남겨진 김독자는 눈을 깜박이며 마법사가 멀어진 통로를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쟤 진짜 왜 왔냐.

 

 

도서관에 틀어박혀 오전을 보낸 김독자는 장하영의 행방을 찾아 지부 본관 건물 내부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근신 중임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흐느적대는 그를 본 사람들이 손을 들어 인사했다. 물론 그 사람들 사이에는 장하영이 없었다.

어디 나간 게 아니라면 건물 내에 있을 텐데 도서관에도 없고, 개인실에도 없고, 정보부실에도 없고… 그럼 트레이닝 룸에나 가 봐야 하나.

장하영이 갈 만한 곳을 추려봤지만, 원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녀석이라 그런지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나마 인맥이 끝내주는 데다 화려한 외모 덕에 행방을 물어보면 높은 확률로 어디서 목격자가 나오기는 하는데… 그 결과 기지 내부를 한 바퀴 돌게 된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래도 어디 외출한 모양인데. 그냥 처음부터 메시지로 보내둘 걸 그랬나 보다.

김독자는 휴대폰을 꺼내 보안 회선인지와 전용 메신저인지를 차례로 한 번씩 더 확인한 뒤 장하영과의 채팅방을 찾아 짧은 메시지를 남겼다.

- 20년 전부터 지금까지 한국, 특히 서울 인근에서 아스모데우스나 아스모데우스의 흔적이 나타났다는 정보가 있는지 찾아봐 줘.

정보상 역할은 한수영이 제일 어울리기는 해도, 넉살 좋은 성격과 여기저기에 쌓아둔 친분을 기본으로 정보를 긁어모으는 장하영의 정보력도 만만치 않았다. 인간들의 웹사이트에 떠도는 정보 수집에 대해서는 동훈이에게 어제 말해두었고, 한수영도 여러 방면으로 조사하겠다고 했고, 장하영에게도 말을 해두었으니 그 수많은 정보의 파편 속에서 뭐 하나라도 건지는 게 있기는 할 것이다. 이번은 워낙 기간이 길고 범위가 막연한 요청이니 나중에 거하게 욕먹기는 하겠지만. 기간이나 범위를 좀 단축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길게 숨을 내쉬며 걸음을 틀었다. 예상치 못한 근신 덕분에 여유 시간이 갑작스럽게 많아졌는데, 굳이 범죄자 사살 임무가 아니더라도 누구 씨가 지닌 악명 아닌 악명 덕에 전력 과시용 사절로 가는 등 이런저런 자잘한 일에도 자주 불려 다녔던 터라 쉬이 적응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수련하는 건 그리 내키지 않고, 도서관에는 삐걱대는 몸을 이끌고 아침부터 다녀왔고, 식사도 달리 당기지 않으니 일단 관사의 제 방에나 돌아가 있을까 싶었다.

따로 나가 사는 요원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요원들의 숙소는 대부분 지부 건물 내의 관사 구역에 있었기에 이대로 방향만 돌리면 오래 걸리지 않아 도착할 수 있었다. 이 건물도 겉보기에는 도심에 있는 평범한 건물이지만 내부는 마법으로 확장해둔 덕에 판타지 소설이나 영화에 나올만한 물건이 되었지. 물론 이쪽 세계와는 관계없는 일반인의 기준으로 보면 이미 제 삶 전체가 판타지일 테지만.

독자는 길게 하품을 하며 관사 방향으로 향했다. 임무 중 잠시 머무르는 것도 아니고, 그곳에 살기 시작한 지도 십몇 년은 된 것 같은데 여전히 집이라는 느낌은 없었다. 그나마 돌아가 몸 뉠 곳이라는 인식 정도는 슬슬 생기기 시작해서 다행일지도 모른다. 이건 아마 관리국 요원들 대부분이 그러하겠지만. 서포트도 아니고 현장 요원에게는 집보다 사선을 오가는 전장이 더욱 친숙하리라. 제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마왕과 관련된 흔적이 나타났는데도 평온하게 보내고 있는 이 상황이 어쩐지 낯설기까지 했다.

두 자릿수의 해 동안 하도 걸어 다녀서 이제는 눈을 감고도 다닐 수 있을 만치 익숙한 복도를 느긋하게 걷는데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독자는 안 받는다면 터져버릴 기세로 떨리고 있는 휴대폰을 마지못해 꺼내 들었다. 제게 먼저 연락할 만한 이는 몇 없어 기껏해야 한수영이나 장하영일 줄 알았는데 발신인은 의외로 이설화였다. 그는 일단 전화를 받았다.

“김독자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설화 씨.”

[독자 씨? 지금 어디 계세요? 최대한 빨리 지하로 와주시겠어요? 예상했던 최악은 아니지만, 문제가 생겼거든요.]

한두 번도 아니고 무슨 상황인지 대강 예상이 되는데… 다급한 기색은 보이지 않으나 빠르게 쏟아지는 말에 독자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래도 그놈이 일어날 때까지 곁에 붙어있어야 했었는지도 모른다. 비워봤자 오전 시간만 잠깐 비웠을 뿐인데 그사이 사고를 치냐, 유중혁 이 망할 놈.

“바로 가겠습니다.”

[네. 빨리 와주세… 잠, 깐만! 중혁 씨, 잠깐만요! 리카온 씨! 독자 씨가 곧 오신다고 했으니 시간만 끌어주세요!]

높이 소리치던 목소리가 아스라이 멀어지더니 결국 통화가 끊겼다. 잠시 굳은 채 무미건조한 비프음을 듣던 독자는 재차 한숨을 삼키고는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마주치는 인원은 여전히 많았으나, 평소 뛰는 일 거의 없는 김독자가 이렇게 다급하게 뛸만한 일은 몇 없다는 걸 알기에 다들 그의 기척을 느끼자마자 통로를 알아서 비워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호수 표면에 일어난 파문과도 같이 점점 전방으로 번져나갔다.

앞쪽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인지하자 이어지는 고소(苦笑)와 함께 입안에 쓴맛이 번지기 시작했지만 달리 별수 없었다. 그들도, 자신도 자동반사적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근래 수년간의 결과물이었으니.

단순하게 움직이는 몸과 복잡한 상념의 연계에 정점을 찍은 건 건물 내에 시원스럽게 이어지는 방송이었다.

[아, 아. 지부 내에 있는 김독자 요원에게 알립니다. 중앙 엘리베이터 하나를 비워두었으니 그쪽을 이용해주세요. 목적지인 최하층 트레이닝 룸까지 빠르고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장난기 어린 문장과는 다르게 노이즈가 살짝 낀 안내 방송은 책을 읽듯 딱딱하고 건조한 기계 음성이었다. 저런 내용임에도 육성이 아니라는 점에서 누구의 짓인 줄 알 수 있을 것 같아 독자는 달리며 머리를 싸맸다. 동훈아, 너도 내게 너무하지 않냐.

현 상황이 웃을 일이 아니기에 마음이라도 가볍게 가지라고 일부러 그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한숨이 끊이지 않았다. 누구는 한숨을 자꾸 쉬면 복이 달아난다고 하던데 요즘 제가 박복한 삶을 사는 건 전부 이 탓인지도 모른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중앙 지역으로 달려가 세 대의 엘리베이터 중 아무도 타지 않았건만 열려있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닫히며 어디에도 서지 않고 쭉 하강하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는 지하 17층에서 멈추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뛰듯이 내려 수련실로 들어가자 본래라면 입장객에게 복잡한 보안 검사 절차를 요구했을 첨단 기계들은 전부 작동을 중지한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한동훈이 건물 곳곳에 있는 CCTV로 제 이동 루트를 모니터링하며 실시간으로 조작하고 있는 터이리라.

이제 어디로 향해야 할지는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디선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웅성대는 것 같기도 하고 감탄하는 것 같기도 한, 많은 이들의 목소리. 편을 갈라 누군가를 응원하는 목소리. 김독자는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마법으로 확장된 공간에, 빈말로도 작지는 않은 수련실 여러 개가 모여있는 만큼 이동 거리는 짧지 않았으나 그는 진득하게 인내하며 발을 떼었다. 나름대로 현장 요원인데다가 엘리베이터에서 숨을 좀 골랐다지만, 몸을 움직이는 일에는 젬병이라 그런지 벌써 호흡이 가빠지고 거친 숨이 새어 나왔다.

…스승님이 아시면 잔소리 좀 듣겠는데.

무슨 생각을 하든 직접 말해주지 않는 한 타인에게 알려질 일은 없었지만 이런 상황에 맞닥트리니 괜스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빛보다 어둠에 친숙한 종족이면서 규정을 어기고 딱 그만큼의 짓을 저지른 놈들 때문에 유중혁이 날뛸 때도 이러지 않았던 걸 보면 갑작스럽게 들려온 아스모데우스의 이름이 자신에게까지 영향을 끼치는 모양이긴 했다. 하여간 그 작자는 도움 되는 일이 없어.

김독자는 쯧, 혀를 차고는 숨을 길게 내쉬며 안쪽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보호 마법 겹겹이 걸린 방탄유리로 만들어진,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트레이닝 룸 하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보안 요원의 검은 제복을 입은 사내 둘이 마찬가지로 검은 제복을 입은 덩치 큰 남자 하나를 들어 옮겨서 벽에 기대어 앉히고는, 뺨을 툭툭 두드리며 의식이 있는지 파악하기 시작했다. 벽에 기대어 앉은 이는 이내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방 주변에는 그렇게 반쯤 기절해있다가 깨어나거나 그대로 정신을 잃은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독자 씨!”

막 기절한 보안 요원 한 명에게 다가가던 이설화가 그를 발견하고는 반색해 이름을 불렀다. 조명을 받아 투명한 은발로도 보이는 백발을 길게 늘어트린 흰 가운의 의사가 태양처럼 환하게 웃어 보이자 자신에게도 시선이 쏠렸다. 손은 착실하게 환자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도록 움직이고 있는 것만 아니었으면 주변에서 무언가 야유라도 보낼 것 같은 상황이었는데. 평소 차분하면서도 산뜻하게 받아주던 설화 씨가 저리 반응할 만큼 상황이 안 좋았던가.

독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이설화에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한 후 몰려있는 몇 겹의 인파를 헤치고 트레이닝 룸 근처로 다가갔다. 투명한 유리벽 안쪽에는 항상 그러하듯 검은 코트를 입은 유중혁이 누군가와 검을 맞대고 있었다. 대련임이 분명하건만 강력한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는 벽 너머에서 봐도 순간순간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매서운 공방이 오가고 있었다.

자신을 알아차리고 살짝 비켜준 이들 사이로 몸을 슬쩍 빼 확인해 보니 상대는 웨어 울프 이뮨타르 일족 출신의 보안 교관, 리카온 이스파랑인 것 같았다. 훈련생 시절 제 교관이었으며 후에 현장 요원으로 몇 번 얼굴을 마주쳤었는데 마지막으로 함께 움직였던 임무에서의 사고로 무릎을 다친 뒤 현장에서는 은퇴하고 지금은 한국 지부에서 지부 곳곳에 배치될 보안 요원들을 가르치는 교관으로 있었다.

이 한국 지부에 유중혁의 상대가 될 이는 몇 없고, 리카온은 그 적은 수에 속해있는 데다 이곳이 수련실 구역이라는 사실까지 더해지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제 교관일 때도, 현장 요원일 때도 그랬지만 리카온은 꾸준한 수련과 자기 관리를 상당히 신경 쓰는 편이니까 말이다. 현장에선 은퇴했다고 해도 그건 이종족이나 마법사 등을 주로 상대하여 보통 인간을 상대하는 것보다 변수가 훨씬 더 많은 상황에서 부상의 여파가 본인과 파트너 혹은 팀원들을 위험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완전히 배제하겠다는 이유 때문인지라, 지금처럼 통제된 환경에서 하는 단순 대련 상황에서는 기량 손실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트레이닝 룸 안의 상황을 확인한 뒤, 근처에서 대련용 검 하나를 집어 들고는 빙 둘러 문을 찾았다. 본래라면 비상시 긴급 조작 때를 제외하고는 락이 걸려 있을 문은 자신이 앞에 서자 작은 금속음을 내며 열렸다. 안전과 보안을 위해 실내 곳곳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고 안으로 들어서자 금속과 단단한 것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하나는 유중혁이 들고 있는 대련용 검일 테고, 하나는 늑대 인간 특유의 날카롭고 강인한 발톱이겠지.

“리카온 씨! 제가 상대할 테니 뒤로 빠져요!”

웨어 울프로서의 힘을 끌어다 쓰고 있는 통에 리카온의 모습은 평범한 인간보다는 늑대에 훨씬 더 가까웠다. 긴 주둥이와 짧고 거친 털투성이 얼굴. 머리 위로 솟은 두 개의 귀가 김독자의 목소리에 반응해 쫑긋거리고, 내내 유중혁의 공격을 피하거나 흘려보내기만 하던 리카온이 짓쳐들어오는 검격을 받아내며 발톱에 힘을 주어 그를 밀쳤다. 유중혁은 굳이 밀어붙이지 않고 뒤로 물러서고 리카온 또한 제 말에 따라 빠진 터라 거리가 벌어졌다. 끼어들 타이밍을 보던 김독자는 간격이 벌어진 틈을 타 리카온이 서 있던 자리로 파고들었다.

거리가 있음에도 마주한 유중혁의 눈이 똑똑히 보였다. 자신을 보고 잠깐 확장되었다가 다시 수축한 동공에는 여전히 살벌한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기세 또한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거칠어졌으면 거칠어졌다면 모를까. 늘 차분하고 냉정하게 움직이던 유중혁이었으나 지금은 상당히 감정적으로 보였다.

동시에, 이런 상황에서도 유중혁은 유중혁인지라 제 공격이 파고들 구석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날 선 진검이 아닌 수련용 검이라 몇 대 맞는 일이 생겨도 설화 씨가 어떻게든 해줄 것 같았다. 유중혁 정도면 무딘 대련용 검도 더없이 훌륭한 무기였지만 자신이 믿는 구석은 따로 있었으니까.

유중혁이 돌진해 파고들며 휘두른 검을 독자는 제 검으로 막아냈다. 파찰음이 울리며 묵직한 힘이 실린 검을 아슬아슬하게 받아낸 손이 저릿저릿하게 울렸다.

훈련실 바깥에 널브러진 요원들이 한둘이 아닌데 유중혁의 체력은 그다지 소모되지 않은 듯 힘도, 스피드도 그다지 떨어지지 않았다. 확실히, 바쁜 만큼 특별한 용건이 없다면 따로 연락을 잘 하지 않는 이설화가 자신을 급하게 부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몸에 가해지는 힘과 충격을 줄이며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게 다스린 김독자는 저를 향해 휘둘러지는 검을 때때로 받아내거나 흘려보내기도 하고, 아예 피해버리기도 했다.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던 평소와는 달리 재빠른 움직임 때문에 헛손질을 반복해도 유중혁의 표정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저 사냥감을 쫓는 사냥꾼과도 같이 집요하게 김독자를 추격할 뿐이었다.

캉! 카앙! 검과 검이 맞부딪히며 묵직하고도 커다란 소리가 났다. 유중혁의 주 무기는 평소 들고 다니는 [흑천마도]지만 그게 유중혁이 다룰 수 있는 무기가 제한되어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유중혁은 십팔반무예 전반에 능했으며 백타(白打)도 그에 뒤지지 않았다.

그에 더해 지금은 검을 들고 있으니 그의 스승인 파천검성에게 전수받은 검술 초식을 쓸 만도 하건만 그는 일부러 힘과 스피드로만 자신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아무리 자신이라도 전지하지는 않기에, 상대가 무슨 의도로 그러는지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다만 체중을 실어 검을 밀어붙이느라 거의 달라붙었다 해도 좋을 정도로 가까워진 얼굴을 보니 쓴웃음이 절로 비어져 나왔다.

감히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치 침잠한 새까만 눈동자 너머에서 일렁이는 증오가 날카로운 이빨 돋은 아가리를 벌리고 제 가슴의 어딘가를 베어 무는 것 같았다.

아무리 대련이라고 해도 치명타일 공격을 피하거나 흘려넘기며, 견제나 거리를 벌리기 위해 짧은 공방이 이어질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깎아지른 낭떠러지로 내몰리는 기분이었다.

김독자의 하얀 낯에 우울이 어렸다. 스스로 만들어낸 감정에 발을 담그기 시작한 그의 검끝이 살짝 흔들리며, 피했어야 할 유중혁의 공격을 제대로 피하지 못했다. 급하게 몸을 튼 터라 유중혁의 검은 유효한 타격을 입히지 못했으나 검풍이 남아있었다.

“이크.”

예민해진 감각은 목덜미가 따끔거리고 피부 위로 피가 한 줄기 흘러내리는 것을 고스란히 잡아냈다. 그리고 뒤이어 유중혁의 목덜미에서도 핏방울이 터졌다.

유중혁은 김독자를 죽일 수 없다.

그가 김독자에게 상해를 입힌다면 그건 전부 본인에게 돌아올 테니까.

설령 죽인다고 할지라도 결과적으로 동귀어진이 될 테니, 아직 죽을 수 없는 이유가 있는 유중혁으로서는 김독자를 죽일 수 없었다.

쌍방 고통과 부상에 익숙한 만큼 겨우 이 정도 상처로 공속이 느려질 일은 없는 게 당연하건만 김독자의 목덜미에서 흐른 피와 제 목에 생긴 상처에 잊고 있던 것이 생각 난 모양인지, 아니면 그동안 그를 상대했던 요원들이 만들어 준 기회인지 유중혁은 실제 전투 상황이라면 보이지 않았을 빈틈을 보였다.

그리고 김독자는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뒤로 돌아갔다간 뭘 해보지도 못하고 봉쇄당할 것이 분명했기에 김독자는 유중혁의 품 안 깊숙이 파고 들어가 포옹하듯 팔을 올렸다. 코끝이 닿을 듯 가까워진 거리. 자신을 인식하고 움찔 튀어 오르는 팔. 시선과 숨결이 얽히는 짧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유중혁의 강건한 몸을 제게 묶어둔 김독자는 그의 뒷목을 내리쳐 기절시켰다.

스르르 무너지는 남자의 몸을 받아 안다가 힘에 부쳐 같이 주저앉은 김독자가 손을 들어 그새 이마에 배어난 땀을 훔쳤다. 일부러 굳이 설득도 하지 않고 움직임에 맞추어 호흡을 조절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상대가 상대라 그런지 숨이 가빴다. 오래지 않은 시간이나마 혹사당했던 폐부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크게 부풀며 산소를 요구했다. 후끈한 공기가 기도를 타고 들어올 때마다 유리 조각으로 목 내부를 긋는 듯 쓰라렸다.

“…후우. 손이 다 얼얼하네.”

평소에도 골격이 크고 단단하다고 생각했는데 피부도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김독자는 유중혁의 뒷목을 후려갈겼던 제 손을 한번 훑어보고는 쓰러진 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유중혁, 이 지지리도 말 안 듣는 새끼. 그러게 쌓인 거 있으면 나 있을 때 적당히 하고 풀어버리라니까.”

이설화를 필두로 의료진과 보안 요원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몸 여기저기 와닿는 시선. 숨소리마저 잦아든 정적에 김독자는 여전히 유중혁의 몸을 끌어안은 채로 입을 열었다.

“며칠간 방문 앞에 2인분 식사와 영양제, 진통제 놔주는 거 잊지 말아요. 붕대와 포션도 있으면 좋고. 연질 캡슐이랑 액체 형태 둘 다.”

“최고급으로 준비하겠습니다.”

기합 바짝 든 목소리. 답한 게 누구든 중요치 않았다. 김독자는 정신을 잃은 유중혁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김독자는 부상과 저주로 뒤틀린 몸을 치유하기 위해 수년간 동면 상태를 유지 중인 유미아와 더불어 유중혁의 유이(有二)한 안전장치였다. 그 사실은 그의 전적에 약간의 농을 더해 김독자가 ‘마왕’이라 불리기 충분한 이유가 되어주었다.

 

 

* * *

 

 

유중혁은 제 아래에서 흔들리는 남자를 보았다. 엷고 희미한 존재감과 더불어 종종 이 세계의 것이 아닌 것 같다는 감상을 들게 하는 하얀 얼굴 위로 땀에 젖은 검은 머리칼이 달라붙어 있었다. 귓가에 달짝지근하게 휘감기는 작위적인 감창. 힘없이 내리감은 눈꺼풀 너머에는 심연과도 같이 서늘하고 깊이 가라앉아 있는 눈이 자리하고 있으리라. 몸에는 금방이라도 전신을 불태워버릴 것만 같은 열이 오르는데 본능을 좇아 쾌감이 커질수록 머릿속은 도리어 싸늘하게 식어갔다.

김독자의 손목을 모아 구속하고 있던 팔을 천천히 내렸다. 연인을 애무하듯 매끄러운 턱과 유려한 목선을 따라 느리게 손을 미끄러트리자 무슨 변덕이 일었는지 김독자가 내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투명한 눈물방울 맺힌 긴 속눈썹이 나풀거리다가 느리게 상승하는 것마저도 기묘하게 현실감이 없다.

무방비하게 드러난 목줄기에 손이 닿으니 일말의 흥분도 열기도 보이지 않는 눈이 또렷한 이지를 가지고 응시해왔다. 시야를 가리는 어둠 속에서도 거울처럼 고요하고 반질거리는 새까만 동공. 자신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예상할 터이면서도 김독자는 할 테면 해보라는 것처럼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한 손으로 쥐고 엄지로 꾹 누르면 그대로 부러트릴 수 있을 것처럼 가느다란 목…….

얼마나 물어댔는지 핏기마저 비치는 입술을 살짝 벌린 채 차분하게 호흡을 고르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눈이 가늘어졌다. 습하고도 흐린 숨결이 피부 위로 낮게 번졌다. 이런 행위는 그에게 어떠한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는 듯 얕은 호선을 그린 입가며 달처럼 둥글게 휘어진 상대의 눈매를 마주하자 속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말없이 몸을 밀어붙였다. 열띤 공기와 늪처럼 질척하게 몸을 휘감는 신음이 다시금 흐르기 시작했다.

 

 

* * *

 

 

수명 다한 전구가 점멸하듯 의식이 잠깐씩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보이지 않는 끈으로 전신을 묶어두기라도 한 듯 몸이 무거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력에 적응해 강해질 힘을 미처 생각지 못해 대참사가 일어났던 처음 이후로는 적당히 둔감하게 해둔 몸이었음에도 하체가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것처럼 욱신거리기도 하고 가끔은 아예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다만 마지막으로 의식을 잃기 전에는 손목에 검푸른 멍과 핏기 배어 나온 잇자국이 선연하게 자리했었는데 지금은 자국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멍이 희미해지고 주변이 은은하게 빛나는 걸 보니 정신을 잃은 사이에 포션이라도 발라둔 모양이었다. 미리 준비해놓으라고 하길 잘했지. 예전이었더라면 굳이 이럴 필요까진 없었겠지만… 새삼 아쉬웠다.

그는 한숨과 뒤섞인 신음을 삼키며 상체를 일으켜보려고 했다. 하지만 추정하기로 며칠간 제대로 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한 채 내내 흔들리기만 했던 몸은 시체처럼 축 늘어져 있을 뿐이다. 김독자는 어두운 천장을 올려 보다가 재차 눈을 감았다. 쓰라린 목을 달래기 위해 물이든 포션이든 뭔가 마시고 싶었으나 손을 뻗어 찾을 기력조차 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조사는 잘 되어가나 몰라.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비형이나 다른 관리관들이 유중혁을 뜯어말리지 않은 걸 보면 그간 별다른 일은 없는 것 같은데. 우리엘의 가호를 받은 정희원이 슬슬 합류했을 거라고는 해도, 바티칸에서 파견한 사제들은 무력이라는 면에서도 대천사의 지상 대행자보다는 평범한 인간에 가까운 데다 조를 나눠 소수로 움직이는지라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른 동료들의 실력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사건과 사고는 일어나지 않을수록 좋지. 부디 아무 일 없기를. 독자는 그리 생각하며 짧은 휴식 속으로 잠겨 들었다.

 

 

* * *

 

 

문을 거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희미하다가 점차 커지는 그 소리에 혼곤한 잠에서 부유하자 단단한 줄기 같은 것이 허리에 둘리고 무언가가 목덜미를 갉작거리는 감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무거운 눈꺼풀을 깜박이던 사이 등에 닿아 있던 온기가 멀어지며 느껴지는 한기에 김독자는 어깨를 움츠렸다.

이어지는 낯선 발소리, 분해되어 윙윙대는 울림처럼 들리는 목소리, 몸에 닿는 손. 축 늘어져 있던 몸이 붕 떠올랐다. 누군가 먼 곳에서 제 이름을 불렀던 것도 같았다.

 

 

그날 동트기 직전의 깊은 새벽, 지부 내의 병실에서 홀로 눈을 뜬 김독자는 그의 곁에서 내내 대기하며 상태를 살피던 이설화에게 광화문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형태의- 피로 그린 제례용 마법진과 인신 공양의 흔적이 홍대 공항철도 근방에서 새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근신령은 일시 해제되었으며 유중혁은 조사를 위해 한수영과 함께 홍대로 향했다는 말과 함께.

혹여 그 말이 제게 상처를 주지 않을까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제 안색과 몸 상태를 살피는 이설화를 보며 김독자는 엷게 웃어 보였다. 서운하거나 상처받을 리 없지 않은가.

 

 

* * *

 

 

지부 건물 내에는 회복 포션이나 성물처럼 판타지 소설 혹은 게임 속에서나 존재할 것만 같은 갖가지 도구들이 있었으나 그러한 도구들을 사용했음에도 김독자의 몸이 회복되는 데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다. 날이 밝고도 최소한 몇 시간은 더 정양해야 한다는 이설화의 소견도 더해져 그는 일찌감치 잠에서 깨어났음에도 홍대에 가서 새로 등장한 마법진을 확인하는 대신 서면 보고서만을 공유받아볼 수 있었다. 조사 자료를 한수영에게 넘겨받고 있다고는 하나 현장 확인과 검증은 중요한 거니 잠깐만 다녀오겠다고 말을 해봤지만 의료부 책임자는 엄하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보고서에 첨부된 드론 사진을 보니 마법진의 형태는 광화문에 그려진 것과 동일-당연하게도-했으나 측정 결과 크기는 조금 더 작다는 코멘트가 붙어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일상적으로 쓰이는 마법진에 비해서는 말하는 게 의미 없을 정도로 커다란 크기를 자랑했지만.

상철로 단정하게 정리된 서류를 팔랑팔랑 넘기며 훑어보던 김독자는 제 간병인 겸 감시자로 붙은 한동훈을 보았다. 태블릿으로 지부 내 CCTV의 실시간 화면을 띄워 놓고 얇은 노트북으로는 데이터 서치 프로그램을 돌리고 있다던 한동훈은 소리라고는 숨소리와 가습기 소리, 종이 넘어가는 소리밖에 없는 적요가 익숙한 듯 표정을 흐트러트리지 않고 할 일을 계속했다. 타인과 대화 없이 보내는 시간이 익숙한 건 김독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어색한 낯을 한 채 여전히 소년같이 앳된 얼굴을 한 청년의 눈치를 살피다가 몸을 슬쩍 옆으로 옮겼다.

자연스럽게 노트북으로 이동한 한동훈의 손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처럼 키보드 위를 빠르게 누비더니 뒤이어 무미건조한 합성 음성이 들려왔다.

[형.]

음성 합성 프로그램으로 만들어냈기에 문장에 깃든 당사자의 마음과는 별개로 짧고 냉정하게 들리는 부름. 김독자의 어깨가 크게 튀었다.

[설화 누나가 형이 깨어나더라도 당분간은 못 나가게 하고 안정시키라고 했어요. 앞으로 두 시간밖에 안 남았으니 조금만 참아요.]

“아니 그래도 현장에 가봐야지. 다들 나갔는데 나만 여기 있으라고?”

[네. 정오가 지나면 보내도 된다고 하셨으니까 그때 가면 되죠. 늦어도 독자 형이 도착할 때까지는 현장이 보존될 거예요. 광화문 현장의 마기도 한동안 남아있었다면서요.]

“그렇기야 하지만.”

[안 쉬면 설화 누나 불러올 건데.]

“내가 잘못했다.”

[빠른 태세 전환이 좋네요. 유중혁 씨도 그러면 좀 좋을 텐데.]

자신에게 건네는 말과는 달리 딱딱하게 들려오는 유중혁의 이름에 독자는 씁쓸하게 웃었다. 관리국의 에이전트로 같이 일한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한동훈과 유중혁의 사이는 데면데면했다. 그야 한동훈은 정보부의 핵심이기에 주로 사무실에 있었고, 유중혁은 현장 요원으로 외부를 돌다 보니 얼굴 마주할 일이 적기도 했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관리국이 상대하는 게 일반적인 상대가 아닌지라 사안에 따라 타국 지부와 협업하는 일이 적진 않았는데도 유중혁은 지부 불문하고 관리국 내에서 가까운 이가 없다시피 했다.

훈련생 시절에는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싸돌아다니다가 여기저기 다쳐오는 바람에 의무실의 이설화와 있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고 했는데, 염문은 당사자들의 냉정한 부정으로 자리조차 잡지 못하고 소멸했고 다음은, 뭐, 다른 사람들이 아는 대로 자신이 있어서 우정이든 연정이든 뭔가 끼어들 여지조차 없었고.

후회하는 건 아니나 다른 요원들과 유중혁 사이의 어색한 사이를 깨닫게 될 때마다 유중혁과 다른 요원들이 가까워지는 데 방해가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허나 그때엔, 그럴 수밖에 없어서.

그는 결국 푹신한 침대에 몸을 파묻었다. 침대 옆 수액 거치대에 걸어둔 수액 파우치에서 제 팔에 꽂힌 카테터와 줄을 따라 액체가 흘러내리는 소리가 한동훈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소음 축에도 끼지 못할 그 소리에 마음이 편안하게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수액 꼭 맞아야 하나? 필요 없을 텐데.”

[일단 맞고 있으라는 이설화 선생님 지시입니다, 환자분.]

“네, 네. 그럼 어쩔 수 없죠.”

병동 안에서는 관리직 요원들은 물론이요, 지부장도 제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는 이설화의 지시라니 더 붙일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흐트러졌던 호흡을 고르며 병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그래도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김독자는 정확히 정오가 지나자마자 팔뚝에서 솜씨 좋게-병동에서 다양한 종족, 수많은 환자를 돌보았던 전문가들에 비하면 형편없지만- 바늘을 뽑아낸 다음 몸을 일으켰다.

수액까지 맞으며 한참 쉬었다고는 해도 조정해둔 몸 상태로 긴 시간 누워있다가 일어나서 그런지 약한 어지럼증이 일며 시야가 핑그르르 돌았다. 물론 걱정스러운 기색을 단 한 점도 감추지 않은 채 자신을 보고 있는 한동훈이며 병실에 설치된 CCTV가 있으니 그런 점을 내색하지 않았다. 유중혁과 함께 다니는 동안 감정이나 상태를 숨기는 건 그의 특기가 되었으므로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늘 해오던 대로, 그뿐이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바늘처럼 등에 꽂히는 한동훈의 시선을 흘려넘기며 슬리퍼를 신은 채로 병실 한쪽에 마련된 장으로 걸어가 눈에 익은 검은색 면바지, 바지와 같은 색의 얇은 플란넬 셔츠를 꺼냈다. 이것과 같은 옷이 옷장에 있었던 것 같은데… 환자복 차림으로 관사로 돌아가는 사태를 피하게 해준 게 누군지는 몰라도 유중혁은 아닐 것이다. 두 명이 쓰는 집이었으니 제 물건을 가져오려면 그의 허락 정도는 있었겠지만.

입고 있던 환자복은 병원에서 으레 볼 수 있듯 상의와 하의로 구성된 게 아니라 엷은 하늘색의 기장이 긴 포대 자루나 로브처럼 생겼다. 덕분에 옷을 갈아입는답시고 한동훈을 병실 밖으로 쫓아내거나 옷 갈아입을 동안 다른 곳을 좀 봐달라고 할 필요는 없었다.

김독자는 개어져 있던 면바지를 적당히 털어내고는, 다리에 꿰어 넣고 버클을 채운 뒤 어깨너머로 손을 뻗어 환자복의 등 여밈을 풀었다. 그리고는 헐겁게 몸을 감싸고 있는 환자복을 훌렁 벗어버린 뒤 셔츠를 걸쳤다. 등 뒤에서 한동훈이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을 텐데도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싶어 돌아보자 병실 외에는 자신과 한동훈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한동훈이 불에 데기라도 한 듯 파드득 떨며 눈을 피했다. 피가 몰려 불그스름한 빛을 띤 귓바퀴와 목덜미…….

곰곰이 생각하며 이유를 찾던 김독자는 곧 어떠한 답에 도달했다. 그것을 곱씹으며 그는 어딘가 멍한 얼굴로 한숨을 삼켰다. 유중혁이 새벽까지 제 몸을 물고 빨아대긴 했는데… 근래 회복이 더디더니 포션에 수액까지 맞으며, 이설화가 굳이 정오까지 더 쉬게 했음에도 아직도 흔적이 남은 모양이다. 동훈이 녀석이 보기에는 좀 자극적이었나?

오랜 시간 세계의 이면에서 암약해온 종족이 섞여 있는 만큼 관리국 소속 요원들의 평균 연령대는 높은 편이었고-이것도 대개 리카온과 같은 웨어 울프나 뱀파이어, 페어리, 드래곤, 씨 서펜트 같은 종족의 요원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평균의 함정.- 아무리 어리다, 어리다 말하고는 있어도 일단 한국 기준으로 성년이 넘었을 텐데 평소 사람과 직접 마주하는 것을 피하고 개인실과 정보부실에만 틀어박혀 있는 일이 잦아서 그런가. 제가 말 얹을 건 없다곤 해도, 겨우 이 정도에 얼굴을 붉힐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지라 한동훈의 반응이 좀 당혹스럽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그리 중요치 않은 일이었다. 물품 보관함 아래, 연한 파란색의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겨 있던 구두까지 마저 신고 돌아서는 김독자의 낯에서는 그러한 기색은 지우개로 지워낸 듯 사라진 상태였다. 한동훈은 허둥지둥 부산하게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도와줄까?”

[아뇨. 괜찮아요.]

노트북이며 무선 마우스가 휩쓸려 한동훈이 가져온 가방 속으로 사라졌다. 독자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충전기를 꽂아둔 채로 병상 옆 협탁에 놓아둔 휴대폰을 집어 든 김독자는 자리를 수습하는 데 바쁜 한동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병실 바깥으로 향했다. 말했던 정오가 지나선지 한동훈은 달리 붙잡지 않았다.

김독자를 붙잡은 건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제 앞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명에 따라 은발로도 보이는 흰 머리칼을 길게 늘어트리고 냉혹한 표정을 한 장신의 여자가 앞을 가로막은 채 서 있었다. 옅은 회색의 정장 재킷으로 감싸인 팔은 얇은 서류철을 끌어안고 있었다.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머리칼의 색 때문인지 어딘가 이설화를 닮아 보이는 것을 제외하고도. 김독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일입니까, 앤티누스.”

“따라와. 이설화가 찾는다.”

날카로운 침으로 톡 쏘는 것 같은 목소리에 독자는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빨리 현장으로 가보고 싶기는 했지만… 제 상황을 알고 있을 이설화가 굳이 이런 때에 자신을 부른다면 쓸데없는 일은 아니리라.

마주한 이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김독자는 먼저 걸음을 옮기는 앤티누스의 뒤를 따랐다. 늘어트린 소매 밑으로 전갈의 꼬리가 슬쩍 내려와 휘휘 흔들리다가 순식간에 다시 사라졌다.

패러사이트 앤티누스, 고대 인류의 후예로 곤충- 그중에서도 독충을 주로 부리는 일족의 수장인 이는, 길었던 용병 생활을 접고 이설화를 따라 한국으로 들어와 패러사이트의 성을 세계의 어둠 속으로 묻어버리고 이설화의 것과 같은 성을 받으며 내키지 않아 했던 것과는 달리 비서 겸 경호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설화의 사무실 앞까지 이동한 앤티누스는 다른 일이 있는지 닫힌 문 앞에 자신만을 덜렁 내버려 두고 사라져 버렸다. 독자는 사라진 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대신 손을 들어 문을 똑똑 두드렸다. 그리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서류가 잔뜩 쌓인 책상 앞에 앉아있던 이설화가 자신을 인식하고는 눈매를 곱게 휘었다. 앤티누스를 구할 때 함께 복용했던 독의 영향으로 희게 세어 은빛으로 보이는 머리칼을 하나로 묶은 채 길게 늘어트린 이의 표정은 온화했으나 곧 짐짓 엄하게 변해갔다.

“바쁘시죠? 그래도 앉아요, 독자 씨. 그렇게 길진 않은 이야기니까.”

“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설화 씨가 부르셨는데 그냥 도망칠 수는 없죠.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혹시 관리국 할당 예산을 초과하는 약초나 약재가 필요하기라도 하십니까? 필요하시다면 구해드릴 수야 있지만.”

장난스레 말을 건네며 이설화의 맞은편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제 말에 작게 억누른 웃음을 흘리던 의사의 표정이 직전까지의 가벼움을 찾아볼 수 없을 만치 진중해졌다. 얼굴을 극지의 빙벽처럼 차갑고 단단하게 굳힌 이설화가 양손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는 손깍지를 꼈다. 이설화의 움직임에 김독자의 눈이 빠르게 아래로 떨어졌다. 장난은 끝이었다.

눈밭처럼 희고 섬세한 손 아래에는 제 사진이 들어간 서류가 깔려 있었고, 검은 잉크로 인쇄된 사각 프레임 안에는 의학 용어인 듯한 여러 약어와 메모가 복잡하게 휘갈겨져 있었다. 자신의 시선이 서류에 닿은 걸 알아차린 이설화가 잠시간 입술을 달싹대더니, 결심을 끝냈는지 입을 열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포션까지 썼는데도 회복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있어요. 마력 소진 때문이라 시간이 갈수록 더욱 악화될 거예요. 독자 씨, 지금이라도 현장에 나가는 건 그만두시는 게 나을지도 몰라요. 정말 이대로 괜찮으시겠어요? 단순 사무직으로 옮기셔도 마력 소모가 느려질 뿐 멈추지는 않는데 전투가 잦은 현장직은 말할 것도 없죠. 독자 씨라면 굳이 현장직을 고집할 필요 없으시기도 하고요.”

“평소 현장 경험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던 설화 씨께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요.”

“현장 경험은 당연히 중요하죠. 하지만 병동에 한번 발을 들인 이상 독자 씨도 제 환자니까요. 환자가 밖에 나돌아다니다가 안 그래도 좋지 않은 상태가 더 악화되는 걸 그냥 손 놓고 볼 수 있는 의사가 몇이나 되겠어요? 이대로 가면 회복 속도뿐만이 아니라 신체 기능이 점점 저하되고 간헐적인 고통이 있을 거예요.”

그 말에는 아무리 저라고 해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독자는 엷게 웃으며 저를 향한 걱정을 숨기지 않는 이설화의 말에 답했다.

“그거야 그렇죠. 하지만 이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독자 씨-”

“예전에 제 두 번째 의료 기록 파일과 함께 부탁드렸던 이야기를 다시 상기시켜드려야 할까요?”

“…아뇨, 배려는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긴 하네요.”

어깨를 으쓱이자 이설화의 눈가에 짙은 안타까움이 어렸다. 하지만 이건 김독자에게 몹시도 중요한 일이었기에 물러선다는 선택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번 일은 스승님과 부모님께는 비밀입니다.”

부모님도 부모님이지만 요즘엔 아무래도 스승님이 더 무서워서 말이죠. 얼마 전에 갑작스럽게 연락을 받았는데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요즘 수련은 하고 있느냐고 호통치시더라니까요. 김독자는 지금 당장에라도 제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고 싶다는 의사의 표정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눈을 접어 보였다. 일상을 읊듯 그저 태평하기만 한 목소리와 조명을 받아 부드러운 빛을 머금은 눈. 복잡한 상념이 어린 이설화의 얼굴에 일순 그늘이 드리워졌다가 사라졌다.

“정말입니다. 이번 일만 끝내면 괜찮아질걸요. 비형이 약속한 장기 휴가로 푹 쉴 수 있을 테니까요.”

“…….”

“참, 중혁이에게도요. 보기보다 마음 약한 녀석이라.”

꿀이라도 되는 양 달고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공기 중으로 스며들었다. 이설화는 착잡한 표정을 한 채 대답하지 않았다. 김독자는 일전 비형에게 그랬듯이, 봄날 바람결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희게 웃으며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짧은 인사를 남긴 채 가볍게 이설화의 사무실을 떠났다.

 

 

방에 들러서 짐 몇 가지를 챙긴 김독자는 곧바로 홍대로 향했다. 포탈은 아직 설치되지 않아 건물 지하에 자리하고 있는 초고속 열차를 타자 공항철도 홍대입구역까지는 금방이었다. 열차는 아주 오래전에 개봉했던 검은 수트를 입은 남자 둘이 지구에 온 외계인 범죄자를 수사하는 영화에서나 봤던 것과 비슷한 물건이었는데, 아무래도 한국 지부를 확장할 때 공사 책임자가 그 영화를 감명 깊게 본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 덕분에 굳이 차를 대여할 필요 없이 바로 한반도 남단에 자리한 주요 역으로 향할 수 있는 건 제법 기꺼운 일이었다.

열차에서 내려 역과 연결된 통로로 올라간 그는 겹겹이 둘러쳐진 마법과 비술로 위장된 역사의 벽에서 빠져나와 바로 출구로 향했다. 인파가 2호선 역보다 적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 평소라면 오가는 사람이 많아 피했을 터이지만 오늘은 저번 광화문 광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반인 대상의 인지 방해 결계가 쳐졌을 것을 알기에 김독자의 걸음은 망설임 없었다.

부적을 꼬아 만든 금줄을 넘어가자 어디에선가 희미한 방울 소리가 들렸다. 딸랑, 딸랑, 딸랑. 청아한…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게 되고 온 신경을 빼앗겨 결국 걸음의 방향을 돌리게 되는, 그런 소리. 김독자는 청각을 잠식하려는 듯 울리는 방울 소리를 음미하다가 시선을 돌렸다. 항상 지니는 관리국 요원의 증표와 마력의 파장을 인식한 듯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수트를 입은 현장 요원 한 명이 빠르게 다가오더니, 제 얼굴을 확인하고는 달리 묻지도 않았건만 마법진이 있는 방향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유중혁과 한수영이 먼저 와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어쩌다가 그들과 세트로 묶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모처럼의 호의를 거절하지는 않았다. 찾는 수고가 덜하면 그건 그것대로 좋지, 뭐.

역사 바깥으로 나가자 바깥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유동 인구가 많은 도심이라는 걸 제하고서도 결코 상쾌하다고는 할 수 없는 공기였다.

마법진이 역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데다 광화문 광장처럼 탁 트여있는 곳인데도 쇠 비린내와 한없이 닮아있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래도 이게 두 번째라 그런지 봉지를 붙들고 속을 게워내는 요원은 없었다. 아스팔트 도로 위로 낮게 일렁이는 희미한 마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김독자는 코트 주머니에서 라텍스 장갑을 꺼내 양손에 끼고는 마법진이 그려져 있다는 광장 방향으로 진입했다. 매연처럼 스멀스멀 퍼지고 있는 마기는 근원인 마법진으로 향할수록 더욱 짙어져, 첫 번째 마법진에서 본 것을 뛰어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스모데우스의 기운을 조금 띠고 있는 것 외에는 별다른 특이점이 없었다. 그야 아스모데우스에게 바치는 진에서 흘러나온 거니 아스모데스의 기운을 띠지 않는 쪽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마력의 영향을 받은 공기가 정신없이 날뛰었다. 역에서부터 동행했던 요원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처음과 변함없는 얼굴로 한 곳을 가리켜 보였다.

김독자는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거대한 마법진을 들여다보고 있는 두 인영을 향해 곧장 걸어갔다. 그의 그림자가 근처에 져도 유중혁과 한수영은 반응하지 않았다. 김독자는 둘 중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 마법진 내의 피로 쓰인 문자에 시선을 고정한 한수영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한수영이 옆으로 한 걸음 옮기며 어깨로 툭 미는 통에 몸이 흔들렸으나 아슬아슬하게 넘어지지는 않았다. 일부러 그런 거란 걸 눈치채지 못할 수 없어 샐쭉 가늘어진 눈으로 한수영을 노려보자 그제야 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불타는 밤을 보내다가 뻗었다던 놈이 여긴 왜 왔냐.”

틀리진 않았지만 다른 사람, 그것도 한수영이 그리 말하는 걸 들으니 괜스레 속이 뒤틀렸다. 김독자는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그야, 마왕의 이름이 관련된 일인데 현장 와 봐야지. 못 올 곳 온 거 아니다.”

“제대로 볼 수나 있냐? 사람 기척은 느낄 수 있고? 허리는? 걷지도 못하고 흐느적댈 거라면 필요 없으니 꺼져.”

“말하는 뽄새 봐라. 또 무슨 일로 심사가 뒤틀렸대. 내 눈은 멀쩡한 거 안 보이냐? 그리고 걷긴 뭘 못 걸어. 여기까지 멀쩡하게 걸어서 왔구만. 1차 정리 보고서 받아보기는 했는데 나 없는 사이 더 발견한 거 없냐?”

“없으니까 그러지! 뭐 새로 찾은 거 있으면 네가 이렇게 늦게 와서 평온하게 구경할 수 있었을 것 같냐? 뭔가 있었으면 넌 진작에 병상째로 들려왔어!”

급기야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버럭버럭 소리 지르기 시작하는 한수영을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응시하던 김독자는 자기로 공들여 빚은 인형처럼 태연한 얼굴을 유지한 채 귀를 막았다.

“그럼 그렇다고 좋은 말로 하면 되지 왜 나한테 그래? 내가 뭐 뻗고 싶어서 뻗은 줄 아냐? 욕하고 싶으면 나 말고 다른 놈에게 하라니까? 그리고 유중혁 너 인마, 양심이 있으면 그러는 거 아니다. 내가 뻗은 게 누구 때문인데 한수영 말을 그냥 듣고 있어?”

김독자의 말에 부싯돌이 부딪히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며 얼굴을 와그작 일그러트린 한수영의 왼팔 위로 검은 불꽃이 일기 시작했다. 위협적으로 튀어 오르는 불티를 본 김독자가 몸을 슬슬 물렸다.

“네가 굳이 지적 안 해도 저 새끼에게 할 말은 여기까지 나오는 길에 다 했다. 이번엔 네 차례지. 야, 상황 파악이 안 될 정도로 연애가 그렇게 좋디?”

“엉? 연애는 무슨 연애야. 나한테 연애할 여유가 어디 있다고. 그리고 너도 눈이 있으면 유중혁 얼굴 좀 봐라. 저렇게 기분 나빠하는 게 나랑 연애하는 놈 얼굴이겠냐?”

어깨를 으쓱대며 이죽대는 김독자의 모습에 한수영이 순간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뻐끔댔다. 지금까지 긴 시간 유중혁과 김독자를 지켜보던 많은 이들의 짐작을 모조리 뒤엎는 당황스러운 말을 들은 마법사가 바람 부는 들판의 갈대처럼 흔들리는 눈으로 유중혁을 바라보며 답을 재촉했으나 유중혁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김독자에게는 시선조차 두지 않은 채 그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무뚝뚝한 얼굴로 할 일을 할 뿐이었다.

영구동토의 그것처럼 얼어붙은 정적을 깨부순 건 상황에 맞지 않게 태평한 김독자의 목소리였다.

“하여튼 일이랑 관계없는 말은 그만하고.”

그래서 이번에도 성과 없어? 과학수사과에서도 별다른 얘기 없었다며. 김독자의 말에 한수영이 제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쓸데없는 일에 지나치게 과열된 반응을 보였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호흡을 차분하게 고르기 시작했다. 심호흡을 몇 번 반복하고서 마지막으로 길게 숨을 내쉰 마법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없어. 보고서에 다 써서 보냈는데. 진 크기를 조금 줄여 이곳에 옮겨놓고 제물만 바꿔 끼우면 첫 번째와 똑같아.”

“…그런가.”

“…한국 지부에 동물이나 곤충들과 감응할 수 있는 인원이 몇이나 됐지? 이런 짓을 벌이려면 범인과 제물들을 포함해 상당한 인원이 움직여야 할 테니 도시를 감시하자.”

떨어진 한수영의 말에 장갑을 낀 채 마법진 근처를 조심스럽게 쓸어보던 김독자의 손이 일순 시간이 정지하기라도 한 것처럼 멈추었다.

“일반적인 곤충이나 짐승들로는 마법을 간파할 수 없을 텐데? 감시 카메라도 마찬가지야.”

찬물을 끼얹고 싶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비술을 근원으로 하여 태어난 생명, 혹은 처음부터 마법을 인식하고 파훼하기 위한 목적으로 마력이 가득한 곳에서 키워진 짐승을 부렸던 케이스 등 몇몇 특수한 사례를 빼면 대개의 곤충이나 짐승은 마법을 간파하지 못했다.

기계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관리국 창설과 더불어 뱀파이어나 인어, 씨 서펜트 같은 장생종 이종족이 인간 세계에 자리를 잡은 이후로 과학과 비술이 밀접하게 엮여 발전하며 마력 관측이 가능한 센서가 개발되기는 했지만 제작 난이도나 예산 때문에 도시 전역에 설치할 정도로 보급되지는 않았다. 그 때문에 CCTV가 있어도 제대로 단서를 얻지 못하고 있지 않나. 공격 마법이 특기이긴 해도, 길고 긴 시간 마법을 익히고 연구해왔으며 마룡과 계약한 한수영이 그걸 모를 리 없을 텐데. 얘가 나이를 먹더니 그새 까먹었나?

마주한 마법사가 재차 입술을 씹었다. 각질이 까칠하게 일어났고, 하도 씹어댄 통에 잇자국은 물론이오, 핏기마저 비치는 얇은 피부. 그리고 저와 마주했을 때 보였던, 평소와는 유난히 다른 반응.

“나도 알아.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냐? 이대로 다음을 기다리며 손 놓고 있는 것보다는 낫겠지.”

“서울로 한정해도 범위가 너무 넓다. 인구 유동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고려하되 지금 당장은 보류하도록 하지.”

“하지만……!”

“이게 두 번째 마법진이지. 광화문과 이곳의 공통점은 없나? 감시 범위를 좁힐 다른 단서가 더 필요하다. 너라면 어떻게 하겠나, 한수영.”

유중혁의 말을 들은 한수영이 좀 더 정제된 시선으로 남자를 향했다. 붉어진, 실핏줄이 선 눈. 며칠째 잠을 이루지 못한 것만 같은…….

잠깐만. 한수영이?

상대가 한 말의 함의를 곱씹는 듯 한수영이 긴 시간 침묵을 지키는 동안 김독자는 참으로 새삼스러운 감상을 떠올리며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평소보다 창백하게 질린 피부와 그와 대조적으로 시꺼멓게 가라앉은 눈 밑, 본인은 인지하지 못한 것 같지만 간헐적으로 경련하는 왼쪽 눈가의 눈물점. 김독자는 안중에도 없이 새파란 안광을 빛내며 유중혁을 직시하고 있는 한수영의 핏기 없는 입가가 파르르 떨리다가 점차 굳어 들었다.

“…왜 나야? 조언을 구할 상대라면 김독자도 있잖아.”

“너는 마법사다. 그리고 나와 김독자는 아니지.”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너는 한국 지부에 소속된 마법사 중에서도 수위를 다툴 정도로 강력하고 마왕과 그 권속에 관한 지식도 제법 있다. ‘심연의 흑염룡’과 계약해 그의 지식과 권능을 구할 수 있으며, 지부 내 그 어떤 세력에도 속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지금 이곳에 있지 않나.”

침착하고 차분한 얼굴로 팔짱을 낀 유중혁이 심연의 그것처럼 가라앉은 눈으로 한수영을 바라보며 답을 기다리는 것을 김독자는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다. 광막한 어둠을 응축해놓은 것 같은 유중혁의 새까만 눈과 섬세한 속눈썹 위로 햇빛이 부서지는 모습은, 참으로.

…유중혁, 이 새끼. 이제야 인간 됐나 보네. 평소에도 이러면 좀 좋아?

김독자는 한수영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일부러 힘을 준 덕에 한수영은 다른 때처럼 무시해버리지 않고 그를 향했다. 얼굴 근육의 움직임과 전신을 휘도는 마력의 움직임을 꼼꼼히 살피고 있자니, 실핏줄 터져 붉어진 눈만 느릿하게 껌벅이고 있는 게 아무리 봐도 다른 때보다 훨씬 더 멍청한 얼굴이었다. 잠이 부족한 탓인 게 분명했다.

하여 김독자는 오랜만에 유쾌한 기분으로 긴 시간 친분을 이어가고 있는 마법사에게 말을 건넸다.

“한수영. 대답하기 전에 일단 돌아가서 좀 자라. 어차피 오늘도 달리 발견한 게 없고, 단발성이 아니라 연쇄 사건인 듯하니 회의실 하나 새로 잡아야 할 것 같은데. 그리고 지난번 현장 자료 받고, 이번 현장 증거물 옮긴 뒤 분석 결과 받아보고 정리할 때까지도 시간이 필요하잖아.”

“넌 또 무슨 말이냐?”

“유중혁 말 못 들었냐? 너 지금 많이 지쳐 보이니 좀 쉬란 소리야.”

김독자는 잘게 웃으며 손을 뻗어 한수영의 이마에 손가락을 튕겼다. 마법사의 눈매가 살의로 날카로워지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그는 입을 열었다.

“시간 오래는 못 주겠지만 안 자는 것보단 나을 테니 한숨 자고 일어나. 안 그래도 평소보다 딴소리 많고 반응이 느리던데 너 며칠째 못 자지 않았냐. 그러니 손 놓고 있을 수 없다고는 해도 능력이 작용할 수 있는 범위나 한계를 돌파할 방법 제안 없이 감응 능력자들만 동원하려고 했겠지.”

지금은 좀 쉬는 게 좋겠어. 현장 양상을 봐선 인내를 가져야 할 것 같은데, 너도 정보가 없는 상황에선 스스로를 필요 이상으로 몰아붙이기보다는 적절한 휴식이 필요하다는 건 알잖아. 피비린내 나는 현장을 앞두고도 느긋하게 이어지는 김독자의 말에 한수영이 날카로운 헛웃음을 흘렸다. 겨울 칼바람처럼 싸늘한 소리에도 그는 표정을 흐트러트리지 않았다. 그저 제 동료이자 오랜 악우가 역사 방향으로 향하도록 권했을 뿐이다. 유중혁은 한수영과 김독자의 실랑이를 지켜볼 뿐 말을 얹지 않았다.

그리고 짧은 실랑이 끝에 예고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한수영은 홍대 공항 철도역 방향으로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한수영의 이탈로 유중혁과 함께 마법진 앞에 남게 된 김독자는 냉기를 풀풀 날리며 자리를 떠나는 한수영을 웃으며 일별했다. 내키지는 않아 보였으나 김독자의 말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는지 역을 향하는 마법사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아무리 차갑게 선을 긋고 뾰족하게 굴어도 한수영은 늘 그랬다. 이득과 경중을 재고, 필요하다면 냉혹한 선택도 아무렇지 않게 하지만, 끝끝내 정 주고 만 것에는 어쩔 수 없이 약해지는 사람.

빠르게 박동하는 심장과 뜨거운 피를 가진 사람.

자신이라고 해서 모든 걸 꿰뚫어 볼 수 있는 건 아니니 이번에 한수영을 약하게 만든 것이 저일지, 유중혁일지, 한수영과 안면이 있는 다른 동료일지, 자신도 그녀도 모르는 관리국 소속 요원일지, 혹은 피와 육신을 갈취당한 피해자 중 하나일지, 아니면 그녀의 자존심과 책임감, 그도 아니라면 아직 짐작지 못한 다른 이유가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모든 걸 끝낼 것이다. 아스모데우스의 이름이 엮인 만큼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김독자는 그리 생각했다.

“…그래서 넌 나한테 할 말 없냐, 유중혁?”

김독자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옆에 선 채 마법진을 내려다보는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보다야 온도 높으나 극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지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짙고 억센 머리칼과 바닥에 늘어진 검은 코트 자락을 흐트러트렸다. 검은 장갑을 낀 채 피로 쓴 문자가 그려진 바닥을 향해 뻗은 손끝에는 마법진에서 묻어온 핏방울이 남아있었다. 마주 응시해오는, 빙해의 한 부분을 잘라 고스란히 옮겨둔 것만 같이 맑고 차디찬 눈은 이런 순간에도 변함없었다.

때문에 독자는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남자에게 더 말을 붙이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리 갱신된 정보가 없다면 이제 지부로 돌아가서 사무실 옮기는 일을 도우며 생각을 정리할 요량이었다.

서느렇게 가라앉은 김독자의 시선이 사방을 맴도는 피비린내는 전혀 알지 못한다는 양 평온한 도시를 향했다. 자신의 금제는 긴 시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효과를 발하고 있는데 상대는 이 도시 혹은 제 인지가 닿지 않는 어딘가에서 활개 치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는 일이었다.

 

 

이미 병실에서 보고서를 받아보았고 한수영이 달리 발견한 것 없다고 말했음에도 마법진 주변을 돌아보며 제 눈으로 두 번째 인신 공양 제례 현장을 살핀 김독자는 이 홍대 공항 철도역 부근 현장에 범인을 뒤쫓을만한 단서가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철저하게 통제된 공간. 이곳에 있는 것이라곤 피비린내 나는 마법진과 제물에 대한 일말의 존중도 없이 흩뿌려진 희생자들의 신체 조각, 올바른 방법으로 치러진 제의에 대응하여 끌려 나온 아스모데우스의 마기뿐이었다. 한숨처럼 토해낸 말에도 유중혁은 포기할 수 없는지 증거물 회수와 현장 정화를 위해 요원들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고 있는 조사 책임자를 향해 걸어갔지만, 김독자는 알고 있었다. 그는 유중혁이 원하는 것을 주지 못할 것이다.

멀어지는 남자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김독자는 비형에게 전화해 회의실 하나를 요청했다. 광화문 인신 공양 제례 현장 근처에서 수거한 CCTV 영상 카피를 비롯해 지금까지 수집된 자료들 또한.

갑작스러운 김독자의 연락에도 바로 회의실을 수배해주겠다던 비형은 ‘일부 요청’에는 난색을 보였다. 그의 요청이니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일단 보여주기식으로라도 상부의 허가가 필요하다고. 물론 오래 걸리지는 않을 터이므로 김독자는 허가를 기다리겠다고 답했다. 통화는 그렇게 종료되었다.

휴대폰을 코트 주머니에 넣으며 돌아서는데 언제 이렇게 가까이 다가왔는지 모를 어린 관리국 요원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독자 씨? 괜찮아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아, 괜찮습니다. 이상 없어요.”

부러 미소를 지어 보여도 답이 석연치 않은지 걱정 어린 시선이 돌아온다. 김독자는 입꼬리를 조금 더 끌어올리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시선은 잠깐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내 말 없는 묵례와 함께 떠나갔다.

해도 모처럼의 타인의 배려를 고려한 김독자가 현장 정리는 다른 요원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지부로 복귀하는 동안 그가 관리국에 요청해둔 새 회의실은 빠르게 준비되었다.

수사 드라마에서 으레 그려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넓은 벽 안쪽에는 A4지 한 장에 들어오도록 축소 인쇄한 마법진 사진, 현장 사진 여러 장 및 인근 지도가 붙었고, 벽 옆쪽으로 비스듬히 세운 바퀴 달린 커다란 화이트보드에는 범인들의 목적을 비롯하여 아직 해소되지 않은 의문점 몇 줄이 검은색 마커로 휘갈겨 쓰여 있었다.

준비된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회의실 한가운데에 길게 놓인 짙은 잿빛 책상 위에는 몇 없는 자료들이 박스에 담긴 채 놓여있었으며 개개인에게 가야 할 정보는 크래프트 지로 만들어진 엷은 갈색 파일 폴더에 상철로 단정하게 정리된 채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떠오르는 게 있다면 언제든지 꺼내 메모할 수 있도록 연노란색 종이에 붉은색으로 줄이 그어진 리갈 패드 여러 권과 색색의 볼펜들도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긴 채 책상 양옆과 가운데에 놓여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책상 위에 임시로 파티션을 놓을 수 있도록 조립식 파티션이 회의실 뒤쪽에 놓인 장에 가로로 눕혀진 채 수납되어 있었다. 전자기기는 각자의 것을 알아서 들고 올 테니 급하게 준비한 것 치곤 이래저래 구색 정도는 맞춰 둔 구성이었다.

김독자는 벽에서 한 걸음 물러선 채 붙여둔 마법진의 전체적인 형태를 뜯어보았다.

크기와 관계없이 마법진 하나당 한 개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게 통상적인 인식이었다. 그러나 술자가 강하고 노련하며 지식을 받쳐줄 마력 또한 충분하다면 마법진을 구성하는 도형과 문자는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의미를 담을 수 있었으며, 한 개의 마법진을 문자 하나로 요약할 수도 있었고, 자신에게 맞게 변형하여 큰 틀 아래 크고 작은 마법진들을 중첩해 배치해, 모르는 이가 보기엔 마법진 하나로 다중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자신이 보고 있는 이것.

한수영이 말했던 대로 이 마법진의 골조는 두 가지 마법이 중첩된 것인데, 귀퉁이에 한 문자로 요약된 은폐 마법을 제외하면 전부 제물에서 뽑아낸 마력을 증폭하여 대상에게 전송하는 것이었다. 효율은 빈말로도 좋다고는 못 하지만, 중요한 것은 마력을 받을 대상이 아스모데우스라는 것이었다.

그는 손을 늘어트린 채 눈을 감고 현장에서 느꼈던 아스모데우스의 기운을 따라가 보려고 했다. 자신이 쥔 가는 실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굴러가 풀려버린 실타래를 따라가듯이.

하지만 추적과 탐색은 쉽지 않았다. 마법진의 부산물이라 하나 아스모데우스의 기운이 이리도 확실하게 남아있건만 안개 속에서 헤매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그 끝을 찾을 수가 없었다. 추적을 차단했다고 하기에는, 20년 전에 봉인이 풀렸다고는 해도 봉인 당시 아스모데우스가 입었던 부상이 부상인 만큼 겨우 그 정도 시간으로는 전성기만큼의 힘을 회복하지 못했을 텐데. 인간을 희생양으로 잡아먹은 이 마법진이 제대로 작용했더라도 마찬가지였다. 현생 인류로 얻는 힘은 수천 명 단위가 아닌 한 아스모데우스가 필요로 하는 힘에는 턱없이 미치지 못했다.

김독자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다면 정말로 아스모데우스가 개입한 것이 아니라 제물을 받는 대상으로 지정되었기에 남은 마기인가? 아니면…….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는 상념에 잠겨 있는 대신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익숙한 얼굴을 한 장신의 여자가 팔짱을 낀 채 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이렇게 일찍 만나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어쩌면 예상했을지도 모르는 이를 본 김독자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검은색 캐주얼 수트에 얼룩 한 점 보이지 않는 흰 셔츠라는 간소한 옷차림을 한 채 검은 머리칼을 동그랗게 올려 묶은 손님은 21세기라는 현시대와는 무언가 괴리감이 느껴지는 장검을 허리에 차고 있었으며, 그 옆에는 커다란 방패를 등에 맨 거구의 남자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스포츠 스타일로 머리를 짧게 깎고, 단단한 근육이 가득 차 위압감마저 주는 덩치에 비해 시원시원하고 묘하게 호감이 가는 인상을 한 남자 역시 익숙한 얼굴이었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뒤이어 미리 정하기라도 한 것처럼 잘 제련된 칼날과도 같은 날카로운 시선이 서로를 빠르게 훑었다. 무언의 대치 상태에서 먼저 입을 연 건 상대 쪽이었다.

“오랜만이네요, 독자 씨.”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오랜만입니다, 희원 씨. 현성 씨도요. 저야 뭐 언제나 비슷하죠. 임무 있으면 나가고, 없으면 안 나가고.”

실제로는 몇 주 만이지만, 먼저 건넨 인사에 맞춘 제 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마주한 이가 시원스럽게 뻗은 눈매를 휘어 웃어 보였다. 김독자는 몸을 슬쩍 내밀어 정희원과 이현성의 근처에 다른 사람들은 없는지 살폈다. 아무리 뛰어난 실력이 있다곤 해도 우리엘의 대행자인 만큼 바티칸에서 같이 파견되었다던 성당기사단의 사제 몇 정도는 곁에 붙어있을 줄 알았는데 지금은 아무도 없는 모양이었다. 정희원이 시선만 들어 문 바깥을 슬쩍 보더니 김독자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사제들은 안 왔어요. 제가 쫓아냈거든요.”

“…뭐어, 있었으면 그것 나름대로 의외라고 생각했을 겁니다만. 희원 씨는 그쪽을 안 좋아하시니까요.”

“대천사가 직접 현현하여 내린 계시 때문에 오랜 ‘금녀(禁女) 집단 성당기사단’에 ‘여자’인 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네, 아무리 계시가 있더라도 못 하니 전투 수녀단과 함께 움직여야 하네 어쩌네 하며 쓸데없이 갑론을박하던 집단인걸요. 그쪽 요청으로 몇 번 같이 움직였는데도 여전히, 또요. 그나마 예전처럼 대놓고는 안 하던데 대놓고 그랬으면 우리엘이고 뭐고 정말로 엎었을 거예요.”

“…하하. 여전하시네요.”

“말도 말아요. 가끔 갈 때마다 시선 때문에 못 견디겠으니까. 가톨릭에서도 대외적으로는 우리엘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고, 제가 기존 교인이었던 것도 아니고, 주변 사람들도 가톨릭과는 관계가 없으니 꺼리는 것도 이해는 가지만.”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감정이 많이 섞인 듯 말이 거칠었다. 허나 정중하게 대접받으며 지냈던 몇 주라고는 해도 이국에서, 공적으로는 우리엘을 부정하는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 이현성과 단둘이서 버텨야 했을 희원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기에 김독자는 더 말을 얹지 않으며 얌전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곁에 서 있는 이현성을 슬쩍 곁눈질하자 이런 일도 익숙한 듯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바티칸으로 떠나기 전에는 종종 당황스러워하더니 그새 정말 익숙해진 모양이다.

“마음 같아선 붙여준다던 성당기사단원들과 사제들도 거절하고 싶었지만 이런 때 부릴 수 있는 인력은 다다익선인 데다 그게 마기 추적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죠. 어때요. 내 선물이 마음에 들어요? 이번 사건 한정이기는 해도 간만의 재회 선물로 꽤 괜찮은 것 같은데.”

잠시간 심호흡하며 격해진 감정을 다스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평정을 되찾은 정희원이 아무렇지도 않다 못해 그린 것처럼 옅은 미소마저 띤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당사자는 그다지 원하지 않았던 거지만, 그야말로 대천사의 대행자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건강하고 싱그러운 미소였다. 김독자는 어깨에서 힘을 빼고 정희원에게 마주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마음에 듭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뭐 발견한 건 있었어요? 수도권 인근으로 파견된 사제들은 자연적으로 고인 음기와 마기나 관리국에 신고된 종족들 외에는 별다른 점이 없다고들 하더라고요. 서울은 아직 파악 중이고요. 가장 많은 인원이 파견되긴 했지만, 이쪽은 드나드는 이들이 많아서 지역 크기에 비해 까다롭대요. 게다가 저는 탐색보다는 섬멸 전문이라서. 현성 씨도 그렇고요.”

정희원이 허리에 차고 있던 [심판자의 검]을 살짝 들어 보였다. 그나저나 한수영에게 했던 말을 하루도 안 지나서, 다른 사람에게 고스란히 돌려받게 될 줄은. 독자는 한숨 대신 정희원의 물음에 답했다. 이쪽도 별다른 성과는 없었던지라 자연스럽게 어조가 절로 늘어졌다.

“딱히 없습니다. 이번 인신 공양 의식에 사용된 마법진은 기본 형태에서 많이 변형된 두 개의 마법이 중첩되어 있었어요. 해서 첫 발견 이후로 마법진을 변형시킨 술사의 특징이 마법서나 다른 기록들에 남아있는지 한수영이 그간 알아보고 있었는데, 뛰어난 마법사인 한수영이 지금까지 찾지 못한 것을 봐서는 오랜 시간 알려지지 않은 마법사의 마법이거나 진의 구성에 다른 종족이 개입한 확률이 높다고 봐도 좋을 것 같아요. 모든 종족이 관리국 직원으로 일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수 요원이 현장직과 사무직으로 일하고 있는데 그 누구도 이런 마법진을 사용한 마법사나 학파를 떠올리지 못했다면 그 정도는 되어야겠죠. 최악의 경우라면 그 종족이 악마종일 터이고.”

그리고 마법진을 그리는 데 쓰인 피는 처음 것과 마찬가지로 약품 처리나 보존 마법이 걸려 있는 것도 아닌데 굳지 않은 걸 보니 적어도 놈들이 오래전부터 이걸 준비했다는 건 확실하다고 봐야겠죠. 단시간에 이 정도의 피를 준비하기는 쉽지 않았을 테니까.

“…음, 어렵네요.”

“졸지에 저는 오컬트 수사 드라마 하나 찍게 생겼다고요. 기억 지우는 대신 이쪽에 입사하기로 하면서 일상이 판타지가 됐다고는 해도, 저나 중혁이나 이쪽 전문도 아닌데.”

“뭐어, 유중혁 씨는 진압과 섬멸전을 주로 하기는 하죠. 그러고 보니 저번에 사고 한 번 쳤다면서요? 지부 분위기도 뒤숭숭하던데 힘내요.”

안쓰러워하는 기색 묻어나는 말에 김독자는 어깨를 추욱 늘어트렸다. 저렇게 말하기는 해도 희원 씨도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당분간 자신과 함께 이 사무실에 처박히게 되리란 건 잘 알고 있으리라.

“갑자기 수련실을 뒤집어놨다니까요. 그나저나-”

말꼬리를 길게 끌며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높이 모를 벽에 막힌 자신과는 다르게 검은 시계판 위를 거침없이 나아가는 은빛 시침과 분침과 초침은 저녁 시간대를 가리키고 있었다.

“두 분 다 피곤하진 않으십니까? 슬슬 저녁 먹을 시간이니 일단 식사부터 하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모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본부에 대기하며 우선 처리할 임무로 받기는 했지만 당장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한수영도 사건 터진 이후로 며칠 동안 잠 못 잔 것 같기에 회의실 새로 준비되는 동안 쉬라고 해뒀거든요. 지금쯤 실컷 곯아떨어져 있을 테니 그 녀석 깨우고, 중혁이도 데려와야 하고.”

“그거 반가운 말이네요. 그럼 저는 구내식당으로 갈까 하는데 독자 씨는요?”

“저는 딱히 배가 고프진 않네요. 아무래도 아까 피바다를 보고 왔더니, 속이 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그래도 식사는 잘 챙기세요. 독자 씨 나이도 나이인데 그렇게 식사 거르고 운동도 안 하면 나중에 훅 간다니까요?

단순한 농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진지한 어조를 띤 희원의 말에 독자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희원 씨도 우리엘의 부름으로 바티칸으로 떠나기 전까지 저를 잘 챙겨주시기는 했지. 그리고 희원 씨가 모르는 일이… 속으로 숫자를 세던 그는 제 침묵 속에서 무언가 눈치챈 듯 눈매를 뾰족하게 세우기 시작하는 정희원에게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죄인은 유구무언이다.

 

 

정희원과 이현성에게는 저녁을 먹은 뒤 7시까지 회의실로 와달라고 한 김독자는 유중혁을 비롯한 몇몇 이들에게 정희원, 이현성 페어에게 했던 말과 같은 메시지를 남겼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저녁 6시를 조금 넘겼을 무렵, 그가 향한 곳은 지금쯤 한참 곯아떨어져 있을 한수영의 방이었다.

오랜 시간 관리국 소속으로 함께 부대끼며 여러 임무를 같이 맡다 보니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게 될 만큼 잦은 일이기도 했고 그 때문에 보안 프리패스를 받기도 했으나, 오늘 한수영을 찾아가는 건 어쩐지 새삼스러운 기분에 한,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아마도 아까 홍대에서 본 한수영의 얼굴 때문이리라.

시야에 들어온 ‘한수영의 방으로 통하는 문’은 다른 요원들의 숙소와 마찬가지로 굳게 닫혀 있었다. 검은색에 가까울 정도로 짙은 갈색 나무문 위, ‘401’이라 음각된 황동색의 호수 태그에 손을 가져다 대자 문에 걸려 있던 마법이 발동되며 검은 불꽃을 두른 스파크가 일었다. 위협적으로 손끝을 타고 오르는 스파크. 하지만 김독자는 어렵지 않게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서는 것과 동시에 주변의 광경이 빠르게 바뀌었다. 눈에 익은 곳이기는 해도, ‘지부 내에 있던 한수영의 방’으로 알려진 공간은 아닌 걸 봐선 다른 곳에 문을 연결해놓은 것 같았다. 이거 잘못하면 징계감인데 허가는 받았나 몰라. 한가로운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가 거실 한쪽에 널브러져 있는 한수영을 발견하고는 이내 희부연 연기처럼 사라졌다.

거실에는 다른 방으로 이어지는 문이 몇 개 더 있었으나 한수영은 침실로 가는 대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거실의 커다란 소파에 시체처럼 드러누워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평소라면 마법이 발동되고 자신이 들어서자마자 뭔가 날아왔을 텐데 피곤했는지 아니면 그럴 기력도 없었던 건지 한수영은 미동 없이 누워있을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김독자는 기절하듯 잠든 마법사가 미약하지만 고른 호흡을 내쉬고 있다는 걸 확인한 뒤 눈을 돌렸다.

주변은 한수영의 상태보다 더했다. 잡다한 옷가지가 널브러진 걸 봐서 며칠은 정리하지 않은 듯 소파 앞에 자리한, 애초부터 한 명이 생활할 것을 염두에 두고 꾸민 듯 그리 크지 않은 테이블 위와 옆에는 현존하는 언어를 비롯해 룬어와 사멸한 혹은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은 고대어, 다른 종족의 언어로 쓰인 온갖 책과 서류들이 첨탑과도 같이 높이 쌓여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면서도 용케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 시야를 아찔하게 자극했다.

테이블을 살피니 위에 쌓인 책 중 몇 권에서는 뱀파이어와 드래곤, 페어리, 드루이드 계열의 마법과 이미 봉인된 악마종의 마력이 희미하게 느껴졌고, 종족적 특성 대신 다양한 마력이 느껴지는 몇 권은 표지 양식으로 봐선 오래전 멸망한 카이제닉스 제국의 마법서였다. 중구난방으로 섞인 채 쌓인 걸 고려하면 순서에 별 의미는 없고, 한수영이 이번 일을 조사하기 위한 자료를 되는대로 모아둔 것 같았다.

책등이 제 쪽을 향해 있어 읽을 수 있는 제목을 읽어 내리던 김독자의 입가가 느슨하게 허물어졌다. 다른 책들도 가치를 따질 수 없었지만, 카이제닉스 제국은 찬란한 마도 문명을 이루었으나 그 힘으로 마왕들을 소환해 세계를 어지럽히려 했던 죄를 물어 그러한 나라가 있었다는 사실마저 지워진 터라 마법서를 구하기도 힘들었을 텐데 용케 구했네. 출처로 짐작 가는 구석은 있었지만.

책 무더기 옆 바닥에는 광화문과 홍대에서 봤던 것과 똑같은 마법진이 인쇄된 종이와 보고서 사본인 듯한 종이가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천장 높은 줄 모르고 쌓인 책더미와 발 디딜 틈 없이 흩뿌려진 종이 사이에는 바닥에 커피로 추정되는 액체가 말라붙은 커피잔이 여럿. 테이블 앞에 앉아, 바닥에 앉아 책을 들여다보며 커피를 위장에 들이붓는 한수영의 모습이 그리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지금의 한수영에겐 이른 얘기를 필터링 없이 말할 정도였다면 아마 꽤 긴 시간을 이 일에만 몰두했겠지. 원인이나 상황 돌아가는 꼴이 몹시도 좋지 않고 자료를 찾느라 한수영이 침식도 뒷전으로 미뤄놨던 것만 빼면, 단순히 그녀가 어떠한 연구에 마음껏 매진하는 상황만 보면 자신이 꿈꾸었던 모습이었다.

김독자는 오래된 기억을 더듬었다. 그녀가 선심 쓰듯, 하지만 그 아래로 꾹꾹 눌러 담은 흥분과 기대, 기쁨과 자신감이 비치는 얼굴로 새로운 연구 소재나 이론을 가져와 보여주면 자신이 소파에 누워 두꺼운 그 종이들을 들여다보곤 했었지. 그러다가 흥미가 생기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런 저와 ‘한수영’을 보다 못한 남자가 일으켜 세워 식사나 산책이라도 하고 오라고 내보냈었지. 장난기와 어린애 같은 오기 한 자밤, 그리고 신이 공들여 깎아낸 조각과도 같이 아름다우나 늘 서늘하게 가라앉아있던 얼굴 위로 어떤 감정이 스미는 모습이 좋아 괜스레 나가지 않고 버티면 그가 어깨를 잡아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 등을 떠밀기도 했었다. 하지만 몸을 움켜쥔 손에 필요 이상의 힘은 들어가지 않았고, 오히려 저를 향한 섬세한 염려가 느껴져 괜스레 낄낄 웃으며 방을 나서기도 했지.

영원히 찬란하게 빛날 것만 같았던 감정들 위로 어느새 시간이 더께처럼 쌓였지만, 그가 사랑했던 나날들은 아직도 온기를 잃지 않았다. 그의 기억 속에서 여전히 그를 지켜주고 있었다.

꿈결을 노니는 것만 같이 아득하게 멀어졌던 시선이 얼어붙은 호수 위를 미끄러지듯 매끄럽게 움직였다. 김독자는 거실 한 가운데에 선 채 깊이 잠들어 있는 한수영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의미 모를 빛으로 침잠했다가 다시 부유했다. 풍랑에 휩쓸렸다고 하기보다는 풍랑 그 자체인 듯한 독자의 눈빛을 느꼈는지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던 한수영이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어딘가 죽음과도 닮은 잠에 빠져있다가 막 깨어났음에도 마법사의 눈에는 졸음 한 점 보이지 않았다. 계약으로 인해 은은한 보랏빛이 도는 새까만 눈은 저와는 달리 헤매지 않았다. 제가 이곳에 있다는 걸 일어나기 전부터 알아차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태연한 얼굴이 자신을 향했다. 김독자는 입꼬리를 올려 희미한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그것은 이내 형태를 바꾸어 여느 때와 비슷한 매끄럽고 장난기 어린 웃음이 되었다.

“뭐야… 무슨 일인데 네가 직접 와? 뭐 발견한 거 있대?”

“아니. 회의실 준비 됐으니 저녁 7시까지 오라고. 그리고 희원 씨와 현성 씨도 오늘부터 합류할 거야.”

“어쨌거나 ‘마왕’의 등장인데 빼놓을 리 없지.”

한수영이 작게 툴툴대며 굳은 몸을 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김독자는 늘 그러하듯 코트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은 채 차분한 얼굴로 한수영의 시선을 받아내었다.

“얘기 끝났는데 안 가고 뭐 하냐?”

“그냥, 여길 보니 새삼스럽다 싶어서.”

“새삼스러울 것도 많다. 유중혁 그놈이나 새삼스러워하지 그래? 참, 그놈에겐 말 전해놨냐?”

당연하지. 날 뭘로 보고 그러냐. 한수영의 반응에 절로 목소리가 뚱해졌다. 부스스한 머리를 막 정리하던 마법사가 소파에서 일어나며 말을 받았다.

“자기 관리도 제대로 못 하는 칠칠찮은 놈? 유중혁에게 물어봐라. 그놈도 아마 비슷한 말 할걸.”

“그건 또 뭐냐. 평이 너무하네.”

짧게 중얼거렸지만 싫지 않았다. 싫어할 수 없었다. ‘한수영’은 제 막연한 생각보다 이번 일에 진심인 것 같은데 어찌 그러하겠는가.

“뭐, 난 말 전했으니 됐다. 저녁 7시니까 잊지 마.”

“너나 잘해.”

“내가 잊겠냐.”

픽 웃으며 답한 김독자는 시간을 확인하고 책이며 서류를 뒤적대기 시작하는 마법사를 향해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고는 걸음을 돌려 바깥으로 향했다. 용무는 마쳤다.

그리고 김독자가 평소와 같이 속에 든 것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사라진 뒤, 한수영은 불청객의 기척이라곤 흔적조차 남지 않은 허공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임무를 함께 맡게 될 때마다 휴대폰이든 태블릿에서든 메시지 알람 울리는 게 귀찮아서 일 있으면 오라고 아예 개인실 출입 허가를 내어주기는 했지만, 김독자에게 내주었던 출입 허가의 효과는 관리국에 등록되어있는 지부 건물 내에 한했다. 이곳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새 머릿속에 심겨있다가 순식간에 싹을 틔우고 부피를 부풀리는 잡념에 한수영은 고개를 휘휘 휘저었다. 가슴 속 깊은 곳, 정확히 짚어낼 수 없는 어떤 곳에서부터 서서히 치밀어 오르는 기묘한 위화감과 초조감이 자신을 제가 알고 있는 ‘한수영’으로서 존재하지 못하게 하는 것만 같았다.

이를테면, 아무리 상대가 봉인되었다지만 어둠의 마력을 다루는 자신이 상성 상 가장 까다롭고 강대한 적인 ‘마왕’의 이름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마왕의 이름이 거론되었다고는 해도, 다른 때라면 알아서 해결하라고 던져버리거나 자문 한 두 마디 정도만 해주며 최소한만 개입했을 일에 저조차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지나치게 매달리고 있다던가.

일전 도시 전체를 감시하자고 했던 것도 그러했다. 아무리 할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고 하더라도 평소의 자신이라면 그 말을 이 시점에서, 그것도 충동적으로 꺼내진 않았으리라. 조금 더 검토해보고 실행했겠지. 평소에도 흐느적거리긴 했지만 광화문 일 이후로 평소보다 훨씬 더 얼빠져 보이는 김독자도 그렇고 이번 일은 무언가… 돌아가는 꼴이 몹시도 이상하단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보이지 않는 손에 끌려다니는 것처럼 상황이며 감정을 제 손으로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이 한수영의 속을 배배 꼬이게 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머릿속을 가득 메운 것 같았다.

 

 

저녁 7시. 일반적인 회의 시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관리국이 ‘일반적인’ 조직도 아니었고 지금 상황도 마찬가지였으므로, 김독자는 회의실 가운데의 긴 책상에 앉은 채 모인 이들의 면면을 살폈다.

회의용 테이블에는 언제나 그러하듯 속내를 읽어낼 수 없는 얼굴을 한 유중혁과 무언가 못마땅한 듯 미간을 좁히고 있는 한수영, 그 옆에 앉은 의욕 가득한 표정의 이현성과 무심한 얼굴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는 정희원, 한 자리씩 나란히 차지하고선 자신을 향해 눈을 반짝이고 있는 신유승과 이길영이 있었다.

잠시 잠깐 신유승과 이길영에게 시선을 둔 김독자의 입가에 씁쓰레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저 두 아이의 능력은 유중혁의 말대로 감시 범위를 좁힌 뒤에 관리국에서 배치한 요원들을 보조하며 사용하게 될 터이지만, 아직 범위가 확정되지도 않았는데, 아무리 상황 설명을 위해서라곤 해도 벌써 회의실에 데려오는 게 맞았는지 아직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정식으로 관리국에 소속되어있다고는 해도 한참 또래 친구들과 뛰어놀 때인 유승이와 길영이인데, 아직 어린아이들인데 이런 일에 힘을 빌려도 되는 걸까.

허나 작금 당면한 상황에서 김독자에게는 더 고민할 여유도, 이 이상으로 믿을 수 있는 이도 몇 없었다. 한수영이야 연구 교류차 본인이 자원해서 나갔던 거고 관리국 서울 지부에 소속된 마법사 중 실력으로는 최상위 마법사이며 마력의 속성이 속성인지라 마왕에게 바쳐진 인신 공양 제례 소식을 듣고 바로 귀국할 수 있었지만, 이지혜나 유상아는 몇 주 전 다른 임무를 맡아 해외로 파견되었는데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조사에 진전이 있을지는 김독자로서도 장담할 수 없었으므로.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차분한 시선을 찬찬히 돌려주었다.

그리고 이번 일을 무사히 해결한다면… 아마도 이들이라면, 분명히.

김독자는 짧게 심호흡을 하고는, 지금까지의 상황 파악과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 자신의 자리에 앉아 앞에 놓인 두툼한 서류철을 집어 올렸다. 긴장 때문인지 압박감 때문인지 속이 콕콕 쑤셨다.

“설명에 앞서 각자 앞에 놓인 파일의 두 번째 페이지를 펼쳐주세요. 보면 아시겠지만…….”

 

 

* * *

 

 

많은 이들이 자기 자리에서 노력하고 있었지만, 모인 이들이 수사 전문가들이 아니라는 걸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조사는 지지부진했다. 그 사실을 되새길 때마다 바닥으로 내리꽂히는 기분과는 별개로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앞선 두 개의 마법진은 이것이 오래 준비한 계획이라는 방증인 양 철저하게 감추어져 있다가 범인들이 원하는 때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이 인신 공양 제례를 진행한 이들의 흔적은 먼지 한 톨도 남지 않은 데다, 홍대 공항철도 역사 근처에서 두 번째 마법진이 발견된 이후 그들의 행적은 잠잠했기 때문이었다. 두 현장 다 복잡한 문자와 상징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진을 그리는 데 사용한 피는 말라붙지 않았으므로 부서 중 하나인 과학수사과에서 수거해갔으나 과학적인 분석은 물론이요 뱀파이어와 마법사, 초능력자까지 전부 동원했는데도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었다.

과학수사과 내부의 팀에서 각출해 보낸 인원들은 현장을 고전적인 격자 방식으로도, 마법으로도 샅샅이 훑었지만 로카르의 법칙은 개나 준 듯 근방에는 발자국도, 머리칼이나 섬유 가닥도, 무엇도 남지 않았다고 했다. 인근 인구 유동을 생각하면 자연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에 더해 수거한 뒤 마법으로 모든 오염을 분리한 피의 성분은 기존에 알고 있는 혈액과 동일하나, 워낙 많은 혈액이 섞여 있는 데다 전 국민의 DNA 샘플을 보유한 것도 아니라 살생 의식의 제물로 희생된 이들의 시신과 그에서 추출한 유전자 정보가 있음에도 정확한 신원은 파악되지 않았다.

동료들과 함께 피를 분석하다가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피를 맛보았던 뱀파이어 하나는 피에서 매혹적이지만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되 ‘맛’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했고, 같은 팀의 마법사는 마왕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것이기 때문인지 말 자체를 꺼렸다. 초능력자- 사이코메트리스트는 마법진을 그렸던 피와 의식 후 남은 ‘찌꺼기’인 피해자의 신체 일부로 사이코메트리와 염사를 시도했지만, 도대체 무엇을 보았는지 눈을 까뒤집으며 기절해 급히 병동으로 실려 가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수많은 신비와 밀접하게 부대끼며 도리어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게 된 다른 사이코메트리스트들이 나서서 도전해보아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국 지부에 소속된 초능력자는 그리 많지 않았고, 몇 없는 사이코메트리스트들이 손만 댔다 하면 줄에 엮인 비엔나 소시지라도 되는 양 줄줄이 실려 나가는 통에 결국 광화문과 홍대에서 수거해온 피에 사이코메트리를 사용하는 것은 관리국 지부장 권한으로 금지되었다.

한수영이 광화문에서 의식 당시의 기억을 짤막하게나마 읽어내었던 것을 근거로 대며 자신이 하겠다고, 자신은 다를지도 모른다며 항의했으나 그것은 마법진 자체의 기억을 읽은 게 아니라 땅의 기억을 읽은 것이며, 쓰러진 초능력자들의 선례와 어떤 위협이 있을지 모르는데 섣불리 시도했다가 그녀마저 잃을 수는 없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진이 발견된 두 현장에서 확보한 증거물로 알아낸 단서는 전무했다. 그 때문에 주변 탐문으로 정보를 얻기도 쉽지 않았으며 행적조사나 하다못해 희생자들의 공통점을 추려내는 것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인근의 CCTV 영상도 마찬가지였다. 수거해온 직후부터 영상 분석실에서 눈이 빠지도록 들여다봤지만 특별한 단서나 마법적 이상 현상은 없었다. 반쯤 절규하며 머리를 쥐어뜯은 영상 분석실 요원들은 이제 인원들을 나누어 영상 속에 찍힌 차량들의 번호를 전부 조회해 동선을 알아볼 생각이라고 했다.

회수해간 피의 분석을 위해 며칠간 연구실에서 숙식하며 매달렸던 뱀파이어 연구원 하나는 보고서를 보낸 뒤 확인 요청을 위해 따로 연락해서는, ‘차라리 희생자 중에 범죄자라도 있어 유전자 정보를 대조해 신원을 파악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말까지 나올 만큼 모두가 자괴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라고 절망적인 목소리로 말할 정도였으니 그들이 맞닥뜨린 첫 번째 벽이 얼마나 높았는지는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좋으리라.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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