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혁독자] On the paper moon

Paper Moon by 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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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 글 백업

※ 종장 이후 날조

 

유중혁의 악몽은 언제나 종이로 이루어진 달 위에서 시작되었다. 세로가 긴 직사각형의 얇은 미색 종이는 무너지지 않은 채 발밑을 받쳐주었고 유중혁은 그 위에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시간이 흐르면 그가 온다.

이마를 덮은 흑갈색 머리칼과 흑갈색 눈, 어쩐지 경계심을 일으키지 않는 평범한 인상의 사내. 바람은 불지 않는데 백색의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느릿하게 다가오는 모습이 어딘가 낯익었다.

“오늘은 무슨 일이야?”

“무슨 말이지.”

“넌 무슨 일이 생기면 이곳에 오잖아.”

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뉘앙스의 말이었다. 하지만 묘하게 익숙하다는 느낌만 남아있을 뿐 정보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이전 또한. 알 수 없는 것을 맞닥뜨렸을 때면 으레 들곤 했던 냉기와 뒤섞인 기묘한 불쾌감이 전신을 기어 다니는 것만 같았다. 입매가 자신을 향해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는 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를 잘 안다는 듯 말하는데 난 네가 누군지 모른다. 넌 누구냐.”

“너, 그런 면은 여전하구나.”

그래도 고민 상담 정도는 그런 거 없어도 할 수 있지 않나? 그렇게 말하며 코트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올려다보는 눈은 무거운 비밀도 짐도 전부 벗어버리고 평온을 찾은 것 같아서.

…비밀? 짐? 평온? 떠오르는 순간 시야가 흐릿해지며 몸이 비틀거렸다.

알고 있어. 알고 있다. 이건 파내어선 안 되는 것이다. 악몽의 주인이 절실하게 원했던 것이므로.

“이런.”

거리를 좁혀 다가온 그가 팔을 쥐었다. 분명 잡혔는데, 그가 제 몸을 지탱하고 있는데도 저를 쥔 손은 온기도 무게도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꿈이니 그도 당연한 일이지만 새삼스러운 소름과 거부감이 등골을 내달렸다.

“말하기 싫다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번에도 그렇지만.”

“이번에도?”

“너는 또 잊을 거야. 잊어야만 하지. 중혁아, 너는 이곳에 있으면 안 된다는 걸 안 되잖아.”

순간 심장이 뛰었다. 그건 유쾌하다곤 할 수 없는 감각이었지만, 가슴에 자리한 근육 덩어리가 팽창하고 수축하며 신선한 피를 전신에 공급하는 걸 느끼는 건 정말로 오랜만이라 그 감각의 끄트머리를 잡고 싶었다.

“다시 한번.”

“중혁아.”

이걸 바라니? 꿀처럼 다정하게 녹아내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고 나무줄기를 닮은 단단한 눈은 둥글게 휘어져 있었다. 적의도 비웃음도 의뭉스럽거나 애매한 웃음도 아니고 순수한 호의만이 담겨있는 웃음이 왜 이렇게 신경 쓰일까.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처절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허나 주변에는 그와 자신 외엔 아무도 없었으며 올려다본 하늘은 그저 새까맣기만 했다. 별도 달도 구름도 아무것도 존재치 않았다. 우주라고도 할 수 없고, 마치 심연 속에 덩그러니 떠 있는 것만 같이.

중혁아, 다시 한번 달콤하고 다정스레 제 이름을 부른 남자가 제 옆에 섰다.

“그럼 산책이라도 할까. 혹시 알아? 너는 내게 말할 생각이 없고 그렇다고 당장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니, 걷기라도 하면 괜찮아질지.”

그는 언제나 그랬다. 사람들을 제 뜻대로 움직이면서 중요한 건 늘 말해주지 않았다. 모두가 그 부자연스러움을 알면서도 따랐고, 그 길의 끝에는.

아래를 내려다보자 제 신발과 신발 밑창에 밟혀있는 종이가 보였다. 종이는 책의 낱장을 뜯어놓은 것 같이 생겼다. 아무런 글씨도 쓰여 있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쓰여 있는데 자신이 읽지 못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이전 그러했듯이 지금도.

그리고 그러한 백지를 읽던 사람이 있었다. 스스로에게 침잠하여 밤의 적요를 닮은 시선으로 훑던 그.

그러한 사람이 있었다.

“…김독자?”

“아. 기억해냈구나.”

“김독자. 정말 너냐?”

“헤어질 시간이네.”

“…아니, 안 돼. 가지 마. 가지 마라.”

다급하다 못해 허우적대는 손이 그의 하얀 코트를 잡았지만 느껴지는 건 없었다. 곤란한 듯 눈꼬리를 끌어내리고 엷은 웃음을 머금은 채 제 손을 바라보던 그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깊고 서늘한, 마치 밤을 닮은 눈이었다. 밤하늘을 수놓은 잔혹한 별들을 닮은 눈이었다. 그 눈이 자신을 비추었다. 수없이 봐온 얼굴 치고는 참으로 꼴사납게 일그러져있었으나 지금은 냉정을 가장하고 평소의 제 모습을 덧씌우지도 못할 만큼 절박했다.

“중혁아, 그러면 안 되는 거 알잖아. 어차피 나는 이제 없는 걸. 너를 구하고자 했던 나도, 시나리오의 끝을 위해 몇 번이고 죽었던 나도, 너와 생사를 함께 하게 되리라 예감했던 나도. 네게 이렇게 다정하게 말하는 나도.”

-나는 이제 네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걸. 꿈은 꿈으로 남겨두어야지.

부드럽고 깃털처럼 가벼우면서도 잔혹한 목소리가 쏟아진다. 진짜 김독자는 때때로 다정하게 절 부르기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꿈의 주인인 자신이 바라기 때문에.

자신이 바라기 때문에.

바람으로서 만들어지는 개연성.

“날… 두고 가지 마…….”

제발.

제 짧고도 긴 생 내도록 애원은 익숙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지금 이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그것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형체 없는 무언가가 성대에 뭉쳐 꽉 틀어 막힌 것 같았다. 가슴이 답답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눈가가 뜨거워지며 시야가 흐려지고, 벌린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건 꺽꺽대는 소리뿐이었다. 울음보다도 비명에 가까운 소리들이 사슬처럼 제 몸을 죄어든 채 놓아주지 않았다.

“종장 이후의 세계는 행복해?”

아니.

너는 네 소망이 독선이고 오만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너는 내가 바라는 미래에 누가 자리하고 있을지 읽고 싶지 않아 했다.

너는 남은 이들이 슬픔을 딛고 일어날 거라 생각한 동시에 그마저도 남겨두고 싶지 않아 했다.

그리하여 숨이 멎는 그 순간까지 사랑하고 회상하고 추억할 것조차 남지 않았다. 잃은 이들은 상실을 모르고 살아갔으나 그저 그뿐이었다. 무언가가 들어찼던 자리는 그게 사라진 후에도 늘 비어있기 마련이었다. 모두가 정체 모를 것을 찾아 헤매었다.

한때 고독하다 믿었던 남자를 포함한 모두가.

“-안녕히.”

종이는 매끄럽게 닦은 유리 위를 미끄러지는 것처럼 부드럽게 무너졌다. 짧은 작별 인사를 남긴 하얀 코트를 입은 남자가 눈을 감고 그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위로 뻗은 팔은 그를 잡으려는 제 손끝을 스쳐 부유하듯 느리게 추락해가고, 펄럭이는 코트 자락과 흩날리는 머리칼 위를 덮는 미색의 종이. 종잇조각들. 수많은 조각들.

자신은 읽을 수 없었던 그의 진실.

유중혁의 악몽은 언제나 종이로 만들어진 달이 둘로 갈라지고 눈앞에 있던 남자가 웃으며 그 안으로 미끄러지는 것으로 끝난다.

그는 악몽에서 깨어나면 다시 잊으리라는 것을 기억해내며 울부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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