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화솜밭 파수꾼

목화솜밭 파수꾼 1

타카긴

흐리다. 

햇빛 한 줄기 새어 나올 틈도 없을 만큼의 구름이 하늘을 뒤덮었다. 간간이 천둥소리가 들려오지만 비는 내리지 않을 성싶다. 잔잔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겨울 칼바람마냥 뺨을 베고 지나갔다. 따뜻함을 품은 눈송이가 맺힌 줄기들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마치 설원의 한가운데에 홀로 서있는 기분이다. 영 산책을 길게 끌 날이 아니었다. 나름 바람도 쐬었으니 남은 하루는 자택으로 돌아가 휴식이나 취하련다.

뒷산에 간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슬슬 다시 한번 올라갈 때가 되었다. 추위는 아직 멀었건만.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다가는 순식간에 입동을 맞이하는 수가 있다. 양쪽 소매에 팔을 넣어 찬바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몸을 따뜻하게 했다. 물론 가슴팍의 옷깃도 여미고 나왔다. 아마 그 녀석들이 본다면 장족의 발전이라 눈물을 보이며 의미 모를 축하 파티를 열겠지. 찬바람이 강하게 부는 하반기가 되면 제발 따뜻하게 입고 다니라며 솜 이불이고 장갑이고 목도리고 선물하던 때가 바로 엊그제나 다름없다.

목화솜밭을 가로질렀다. 워낙에 많은 수가 자라난 터라 밑을 제대로 살피지 않는다면 난 길을 밟는지 죄 없는 목화를 밟는지 구분하기 힘들다. 다만, 이제는 몸에 익어 중간중간 시선을 내려 밑을 확인하는 정도로 충분했다. 

점심으로는 무엇을 먹을까. 엊그제 사놓은 꽁치를 구워 먹는 것이 좋겠다. 약간의 소금간을 하되 되도록 담백하게. 밥은 잡곡 없는 흰쌀밥으로. 밑반찬은 아직 먹던 것이 남아 있으니 달리 만들거나 사 올 필요는 없다. 

문득 솜 뭉텅이가 시야에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목화솜처럼 조막만 한 크기가 아니었다. 잘못 보았나 싶어 왔던 길을 아주 조금 되돌아가니, 목화밭 사이에 유달리 커다란 솜이 보였다. 드물게 농부들 사이에서는 거대한 농작물이 자라나는 경우가 있다고 들은 적이 있다. 그런 경우인가 싶어 조금은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다른 목화를 밟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며 다가갔다.

"...이게 뭐지."

그런데 이건 무슨 일일까.

눈앞에 나타난 것은 기대하고 있던 거대한 돌연변이 목회솜이 아닌, 목화솜처럼 하얗고 복슬복슬한 짐승의 귀와 꼬리를 달고 있는 아이의 형상을 띈 무언가였다.

주웠다.

무엇을?

들짐승의 대표적인 특징을 몸에 붙이고 있는 아이를.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무리 보아도 가만히 두면 얼어 죽어버릴 꼴이길래 무턱대고 일단 자택으로 데려왔다. 괜스레 마음에 걸릴뿐더러 열심히 일군 밭에서 송장을 치우는 경험은 하고 싶지 않으니까. 안쪽 방의 따뜻한 곳으로 옮겨 바닥 한 쪽에 눕혔다. 옷장을 열어 구석에 처박혀 있는 얇은 솜 이불을 꺼내어 덮어주니 그나마 봐줄만했다. 

아이는 가벼웠다. 못 먹어서 가벼운 것이 아니라 정말 솜을 든 것처럼 가벼웠다. 귀는 갯과 동물의 형태를 닮았다. 이를테면 여우라던가, 여우라던가. 아니. 굳이 개과라고 할 것도 없이 그냥 여우였다. 긴 털로 이루어진 꼬리는 여러 겹이 겹쳐진 것처럼 풍성했다. 실제로는 하나였지만. 혹시나 싶어서 슬쩍 만져봤는데 역시 하나로 된 꼬리였다. 마치 고운 비단에 닿은 것처럼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유독 눈에 들어오던 특이한 부위를 다 보고 나니 그제야 아이의 외관이 눈에 들어왔다. 새하얀 색의, 그러나 노인의 그것이 아닌 은실처럼 예쁘게 반짝이는 은빛의 머리색이다. 귀도 꼬리도 모두 같은 색이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눈동자는 어떤 색일까, 하고.

불현듯 옛적에 마당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붉은 동백꽃이 떠올랐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깜빡.

그리고 한 번 더 깜빡.

후끈후끈하다. 더운 것이 아니라 온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후끈함이다.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모르는 바닥이다. 낯선 천장이다. 처음 맡는 냄새와 신기한 물건들이 가득하다. 눈동자를 도르륵 굴려 한참 어둑어둑한 주위를 살피던 아이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툭. 무언가가 몸에서 떨어졌다. 얇은 솜 이불이었다. 몸을 따뜻하게 감싸준 것은 이거구나. 가만히 서 있으니 발바닥도 따끈따끈했다. 후끈후끈한 건 이 방이야. 아이는 더 높아진 눈높이에서 다시 한번 두리번거렸다. 

쿵.

갑작스럽게 소리가 들렸다. 큰 소리는 아니었으나 아이의 큰 귀에는 바로 옆인 것처럼 잘 들렸다. 순식간에 동공이 수축되고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바짝 들었다. 당장 어떤 처지에 놓여있는지 단박에 알아차린 아이가 급하게 출구를 찾았지만 사방이 벽으로 막혀있었다.

쿵쿵.

고막에서 울리는 이 소리는 갑자기 느껴지는 인기척의 소리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있는 소리일까? 위험을 감지하며 빠르게 호흡하던 아이는 최대한 자신을 지킬 수 있을만한 구석으로 몸을 옮겼다. 물론 몸을 덮고 있던 얇은 솜 이불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귀를 쫑긋 세웠다.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온 감각을 일제히 집중했다. 길게 손톱을 빼어 어느 틈이라도 공격할 수 있도록 준비하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이윽고 바로 코앞까지 인기척이 느껴진다. 벽을 사이에 두고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곧 벽의 한 쪽이 옆으로 밀려났다.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이는 손톱을 세운 채 바닥을 박차고 앞으로 뛰어나갔다.

아마 그렇게 하려고 했을 것이다.

"우와앗?!"

짧은 비명과 함께 쿵! 하고 큰 소리가 나면서 아이가 발라당하고 미끄러지듯 엎어졌다. 원인은 발밑에 있던 얇은 솜 이불이었다. 엎드린 자세로 앓는 소리를 내고는 바닥에 파묻은 얼굴을 슬쩍 들어 올렸다가 아닌 척 다시 코를 박았다.

"정신이 들었으면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편이 나았을 텐데."

꾸중 아닌 꾸중에 기가 죽었는지 귀와 꼬리가 축 늘어뜨린 아이가 킁, 하는 소리를 내었다. 그게 눈물 때문인지 콧물 때문인지 원. 그저 이 상황이 황당하기만 할 뿐이었다. 더 놀라서 자빠지는 일이 없도록 천천히 옆으로 다가가 한 쪽 무릎을 굽혔다. 쯧. 겁에 질린 듯 두어 번 움찔거리던 아이는 혀를 차는 소리에 몸을 굳혔다. 

"손톱을 집어넣고 가만히 앉아있어. 널 잡아먹으려고 했다면 자고 있을 때 진작 솥에 넣어 끓였을 거다."

"아~ 그런가. 근데 말야, 그전에 나 좀 …도와주라."

"도와줘?"

"넘어지면서 손톱이 바닥에 박혀버리는 바람에 도로 집어넣을 수가 없거랑."

시선을 아이의 팔 끝으로 돌리니 정말 손가락이 바닥에 처박혀있는 것처럼 보였다. 조심스럽게 다다미에 걸린 것을 하나씩 빼내는 와중 뭐가 그리도 아픈지 아이는 수도 없이 아파파파파! 좀 더 살살해! 섬세함을 보이라는 둥 불만을 토로했다. 그래, 너 잘났다 인마. 괜히 심통이 나는 바람에 그냥 쑥 뽑아버릴까 싶다가도 아직 제 허리만큼이나 겨우 될 듯한 아이였으니 자비로운 마음으로 넘겨주었다. 

열 손가락 전부 무사히 구출된 아이는 조금 눈치를 살피고는 곧장 손톱을 집어넣었다. 상대가 공격할 의지가 없으니 자신 또한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셈이다.

물론 갑자기 겨드랑이 사이로 팔이 쑥 들어와 위로 들어 올려지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 행동이 그저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주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알고는 다시 드러내려 했던 손톱을 아닌 척 은근슬쩍 숨기기도 했다. 가만히 서 있는 모습을 보아하니 멀쩡해 보였다. 그렇지만 넘어질 때에 큰 소리가 났으니 행여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은 해봐야 않겠느냐며 요리조리 살펴왔을 때는 아이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별다른 상처는 없는 듯 점검은 다 끝났다는 마냥 아이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타카스기 신스케. 너는?"

"타카스기?"

"내 이름이다. 네 이름은 뭐지?"

답을 바라는 눈으로 아이를 보고 있자니, 동그랗게 뜬 새빨간 눈동자에 온전히 비친 제 모습이 보였다. 오호, 붉은색이구나. 머리색만큼이나 이형의 색이었다. 다만 불쾌함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눈으로 새하얗게 덮은 백색의 세상 한가운데 피어난 동백을 닮았다. 예쁜 눈이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긴토키." 

이름이 외형을 쏙 빼닮았다. 긴토키라. 오롯이 이 아이를 위해 지어진 이름이라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긴토키는 조그맣게 타카스기 신스케. 타카스기. 으음, 신스케. 타카스기? 신스케? 흠. 신스케! 한참을 타카스기의 이름을 중얼거리던 긴토키가 이내 결론을 내렸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그럼 잘 부탁해. 신스케."

"하?"

"얼레. 아니면 주인님이 좋아? 영 내키지 않지만 그런 취향이라면 일단 맞춰줄 의향은 있는데."

이래뵈도 얹혀사는 입장이니까 말이지. 타카스기는 잠시 이마를 짚었다. 사실,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점점 날이 추워지고 있는 와중에 먹을 수도 없는 목화밭에 덩그러니 홀로 쓰러져 있는 긴토키를 데려왔을 때부터. 물론 긴토키가 먼저 말하지 않았다면 타카스기로부터 이곳에서 지내라고 했을 제안이긴 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당돌하게 키워라!라는 식으로 선언할 줄은 생각도 못 했지만. 터무니없는 말괄량이를 주워버렸다. 이거 절대로 돌이킬 수 없지, 그렇지. 머릿속에 골칫덩이 실타래가 엉켜붙었다. 그래도 뭐,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타카스기로 괜찮다."

"응, 신 쨩!"

네 지루한 일상은 이 긴토키님이 처리할 예정이니 안심하라고, 요녀석아! …라는 말이 헛으로 들릴 정도로 걸맞는 표정을 짓더니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콧방귀를 내쉬는 꼴은 아주 이미 제 집이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타카스기는 벽 한 쪽에 걸어놓은 달력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음에 오기로 한 날이 언제였지. 아직 한 달 즈음은 남았을 터다. 그 녀석들이 보면 까무러칠만한 꼴이겠는걸. 타카스기는 남몰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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