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파
타카긴
사카타 긴파치는 눈이 좋다.
츳코미 캐릭터의 상징이라고나 할 수 있는 안경이나 쓰는 주제에 무슨 눈이 좋으냐고 할 수 있겠느냐만, 단순히 시력이 좋다는 말이 아니다. 왜, 다들 눈이 좋다고 하면 한 번씩은 떠올려보지 않는가. 엠페러 아이라든지 사륜안이라든지 눈동자에 육도 문자가 새겨져 있다든지. 아무튼 헛소리처럼 보이겠지만 어느 정도는 비슷한 뉘앙스라고는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남들과는 조금 다른 것을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여하튼, 겨우 그런 이유로 안경을 쓰는 거라면 그건 단지 장식용이지 않은가 생각할 수 있지만 전혀 아니다. 첫째로 시력이 좋지 않은 것은 물론이며, 둘째는 앞서 말했듯이 조금 특이한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에 들어오는 정보를 최대한 검열하고 차단하기 위해서 쓴다고 볼 수 있다. 어차피 안경알은 투명한데 무슨 차이냐고 묻는다면, 그래도 없는 거보다는 있는 게 훨씬 낫지 않나. 애초부터 아예 효과가 없었으면 쓰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다들 월남쌈을 먹을 때 라이스페이퍼로 만들어서 먹잖아. 걔도 투명하고 별 맛도 안 나는데 왜 먹어! 얼레. 느낌이 좀 다르지 않냐고? 아니 그 대충 뭐 그런 거니까 알아서들 이해하도록 해라. 말고는 뭐, 아무래도 시야를 가리다 못해 눈동자도 함께 찔러버릴 것만 같은 앞머리라던가 서클렛이라던가 안대나 붕대 같은 것보다 눈에 띄지 않고 수수하게 잘 어울렸으니까다.
그렇다면 언제부터였을까. 태생부터 이런 특이한 눈을 타고났기 때문에 주위로부터 고통받는 비극적인 과거였다면 차라리 그러려니 싶다. 소년 만화처럼, 어릴 때부터 타인의 시선에 시달린 나머지 스스로 능력을 감추고 살아가던 주인공이 믿음직한 동료를 만나 극복하는 성장 스토리도 아니고. 어쩌다 보니 그냥, 성인이 되고 나니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정확한 시기를 굳이 꼬집어 보자면, 고등학교에 정식 교사로 발령이 나고 첫 출근을 했을 때라고 볼 수 있겠다.
"이쪽이 사카모토 타츠마. 수학 선생이야. 너랑 나이도 비슷하니 그럭저럭 지낼 만할 거다."
"아하하핫! 편하게 타츠마로 부르면 된다네. 그래서 자네는 이름이 뭐라고?"
"사카타 긴파치다."
"킨파치인가~!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 물어보게나!"
"킨이 아니라 긴이라니까!"
긴파치는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눌러 나온 자판기의 캔 커피처럼 반사적으로 외쳤다. 어라? 왜 익숙한 느낌이지. 기시감이 들었지만 자신의 이름을 일부러 틀리게 말한다면 누구나 정정하려 들지 않겠는가. 농담이었다는 식으로 얼빠지게 웃는 얼굴은 마냥 악의는 없어 보여 가볍게 한숨을 뱉는 걸로 끝냈다. 물론 이번만이다. 다음에 이런 일이 또 생겼다간 저 튼튼해 보이는 모발을 죄다 뜯어버릴 생각이었다. 어이! 나이를 먹어갈수록 동반되는 탈모 걱정을 덜어주려는 내 선량한 배려를 거부하지 말라고! 그런 긴파치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큰 소리로 웃고 있던 사카모토는 지나가던 인법, 시야 차단의 술!을 쓰는 듯해 보이는 선생의 부름을 듣고 나서야 가볍게 손을 흔들며 자리를 떠났다.
그 순간, 사카모토의 뒷모습에 오퍼시티 삼십 퍼센트 정도로 누군가가 겹쳐 보였다. 낭인이 쓸 법한 짚으로 엮은 큰 모자와 채도 낮은 붉은색의 단출한 기모노. 얼굴은 아이가 크레파스로 직 직 그어놓은 것처럼 흐릿했다. 144p 정도의 선명함이었다. 얼레? 성능 지원이 거기서 끝인 거야? 잘 보이지 않았지만 선글라스를 쓰지 않은 맨얼굴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는 높은 언덕 지대에 위치한 옛식의 집 대문 앞에 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말하듯 입을 벙긋거리고는 이내 뒤를 돌아 멀리 떠나갔다. 전체적으로 예스러운 분위기의 장면이 마치 영화 속에 들어온 것처럼 현실같이 느껴졌다. 아, 그러니까 태풍을 부르는 석양의 떡○마을 방○대처럼 뭐 그런 느낌이었는데.
다만 하나 알 수 없었던 건, 왜인지 모르게 그를 사카모토라고 생각했다는 점일까.
…술도 안 마셨는데 대낮부터 환각이라니.
긴파치는 혀를 끌끌하며 교무실 한 쪽의 냉장고에서 딸기우유를 꺼내 마셨다. 크으.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분이다. 역시 사람의 원동력은 당분인 것이 틀림없다. 왜, 사람은 역시 밥심이라지? 밥알도 씹다가 보면 단 맛이 나지 않는가. 그거 다 포도당이야.
은혼 고등학교에 부임하게 된 지 겨우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긴파치는 매번 출근을 할 때마다 한숨을 쉬게 되었다. 이유는 별거 아니다. ...아니? 엄청 별거인데 보통 이런 거 보면 별거 아니라고 하니까 해보고 싶어서 별거라고 한 것뿐이야. 음, 그렇고말고. 원○스의 조○도 그랬잖아? 모○쿠마랑 싸웠을 때 '아무 일 없었다'라고 했잖아? 어라. 다른 이름이었던 거 같은데 리○쿠마? 오솔레미오 쿠마? 젠장, 이런 거 하나 제대로 떠올리지 못하다니 점프 독자의 수치다! 당장 정독해야겠어, 어이 핫토리! 그거 이리 줘 봐. 맡겨둔 물건을 돌려받는 것처럼 뻔뻔하게 요구하는 긴파치에 핫토리는 이거 미친놈이라는 시선으로 무시했다. 뭐, 굳이 따져서 말하자면 긴파치는 '나 너무 많은 일이 잇엇어 힘들다 진짜' 쪽에 가까웠다. 겨우 일주일이냐니. 그거 거짓말이야! 진심은 무려 일주일이라는 뜻이라고, 요 녀석들아. 어찌 되었든 그 별거라는 이유는 바로 이 상황이었다. 정확하게는 지금의 상황 뒤에 몰려오는 후폭풍이지만. 얼레, 작문?
"어이. 뭔가 내 점프가 사라질 예정일 거 같은 묘한 기분이 드는데 역시 네가 범인이냐? 미래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냐고."
"아?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어. 잠이나 깨라, 긴파치. 고작 일주일에 이 모양이면 담임은 어쩌려고 그래?"
꿈나라 가는 건 중학교 때 그만둔 거 아니었나. 중학교 3학년이면 그쪽에서 통행금지 딱지를 멋대로 붙여 버린다고! 덕분에 난 로망의 세계에서 쫓겨나게 되었지... 점차 침울하게 기어들어 가던 목소리는 곧 기운을 차렸다. 핫토리는 돌돌 말아 쥔 자신의 역사 교과서로 가볍게 긴파치의 어깨를 툭툭 치며 외쳤다. 그리고 점프 발매는 이틀 뒤야! 이 근처에서는 취급하는 가게가 잘 없으니까 찾는데 고생 좀 해보라지, 으하핫! 뭐가 그리도 즐거운 건지 원. 그거 너도 포함되는 말이잖아. 시야에서 핫토리가 사라지는 순간, 긴파치는 곧바로 의자를 돌려 자세를 낮추었다. 누가 볼세라 고개도 푹 숙인 채로 또 한숨을 쉬었다. 자, 이제 오겠거니 싶었다. 차라리 카운트다운이나 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다. 자, 하나!
"끄으으으윽…."
어이!!! 내가 후줄근한 체육복을 입고 껄렁하게 여기저기 얼쩡거리는 저 선글라스 아저씨인 줄 알아!! 남자도 둘 셋이 필요하다고. 카운트다운이 사실은 천국으로의 카운트다운이었던 거냐, 엉? 그런 거야? 이쪽에는 하나뿐인 목숨을 책임져 줄 신○치 군이 없단 말이다!
이내 미간을 찌푸려 잡생각을 날린 긴파치는 입술을 꾹 다물고 주먹에 힘을 주어 천천히 코로 호흡했다. 이어서 눈앞에 희미하게 지지직거리는 형상과 함께 단색의 닌자 복을 입은 사내가 떠올랐다. 어랍쇼. 닌자라면 시꺼먼 복면을 쓰고 교수님에게 안부 인사나 보내는 올블랙 쫄쫄이 아니었어? 근데 저 머플러는 뭐야. 허리띠는 또 뭐고. 포인트 컬러인 거냐! 정신을 집중해서 주변을 둘러보면 편의점이 보였다.
"뭔…. 폐도령 시대에 편의점이 있어?"
황당하다는 듯이 긴파치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시 집중을 하니, 눈앞에 허공을 가로지르는 점프가 눈에 보였다. 그렇게 끝이 났다. 하?
"……. 이런 염병할."
그렇게 두통이 오더니 보여준 게 고작 정체를 알 수 없는 왠지 닌자 같은 놈과 하나 남은 점프를 두고 신경전을 벌인 것뿐이다. 쟤 역사지? 역사잖아. 또다시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은 그 닌자가 핫토리라고 생각한 점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완전 얼척없어서 당장 소리 지르고 싶거든? 그렇지만 후련함과 두통이 플러스마이너스로 찾아오기 때문에 그냥 딸기우유에 긴 빨대를 꽂아 마시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니 근데 진짜로. 완전 어이없거든? 내가! 겨우 점프 하나로 남정네 둘이 유치하게 싸우는 꼴을 보겠다고 이런 두통을 겪는 줄 알아! 물론 점프가 겨우라는 건 아니다. 아이 러브 유 점프. 워 아이 니! 아 참, 이게 중요한 게 아니었지. 어쨌든!
이후 교무실에 들어와 옆자리에 앉은 사카모토에게 보건실에서 쉬는 것을 추천받았지만 거절했다. 아직 보건 선생과 이야기해 본 적은 없었지만 오늘은 상태가 정말 메롱이라서 한 마디, 아니 한 글자라도 나눴다가는 뇌가 폭발해버릴 거 같을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다. 어떤 사람인지 듣기로는 날카로운 바늘이나 커터 칼을 다루는 솜씨가 마치 다트 선수 같다고들 하던데 옛 시대에 존재했었다면 아마도 암기 장인이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서 그래, 닌자 같은 거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면 무언가 핫토리와도 연결되는 느낌이 들어, 오히려 상태가 더 나빠질 것이 걱정되었기 때문에 그대로 엎드려 있는 것으로 갈무리했다. 마침 다음 두 교시 정도는 수업이 없이 빈 시간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자, 선생님은 지금 머리도 아프고 눈도 아프고 팔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걸랑. 피곤해서 당장이라도 침대라는 아늑한 관짝에 들어가서 낮잠이나 자고 싶으니 후딱 종례하고 집이나 가자."
"형씨, 벌써부터 늙다리가 되면 어떡합니까, 정년퇴직이 내일모레라니 이거 서운해서 어쩌죠."
"저기 오키타 군. 형씨가 아니라 선생님이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먹는 거냐, 앙? 귓구멍에 투명 에어팟이라도 꽂아 넣었으면 못 본 척해 줄 테니 얼렁 빼라. 교권 침해 및 명예 훼손으로 벌점 날려버리기 전에 똑바로 앉아."
"헤에, 이미 마이너스라서 더 받는다고 하더라도 딱히 달라지는 건 없을 거 같은데요."
"잠깐! 교사가 교권으로 학생을 협박한다니 너무하시지 않습니까! 소고는 그저 선생님의 건강을 생각해서 건넨 말일 텐데, 억울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곤도 씨. 저 녀석은 그런 기특한 생각 따위 하지 않으니까."
"아아 그만! 너희들의 수준 잘 알았다. 시시해서 죽고 싶어졌다."
그때 오른손에 들고 있던 야키소바 빵을 한입에 삼킨 카구라가 높이 손을 들었다. 보통 입안에 있는 거만 삼키지 않냐? 됐다. 우리 반에 어디 평범한 애가 있기라도 했니. 긴파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래. 말해봐라.
"육개장은 무제한이냐 해."
"좋아, 뒤로 가서 손들고 5분 서 있어."
"에에에잇, 긴 쨩! 말하라고 한 건 긴 쨩이면서 너무한 거 아니냐 해!"
"긴쨩이 아니라 선생님. 양동이라도 얹어주리? 물 가득 담아서 하나."
"의자에 앉아있기만 하면 몸이 굳는다 해. 5분 동안 팔 쭉쭉 펼 거니까 방해하지 마라 해."
물 흐르는 듯이 자연스럽게 뒤로 간 카구라는 팔을 쭉 펴고 사물함에 기대었다. 긴파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히죽거리는 모습이 아주 제 발 저린 도둑이 배 째라고 들이대는 꼴이었다.
"동작 그만. 밑장 빼기냐?"
"우후후. 뺄 밑장 같은 거 여기 없다 해. 초등학생도 아니고 이 나이 먹고 손들고 벌서기가 뭐냐! 이 정도는 어른의 두뇌로 넘어가 줄 수 있는 거 아니냐 해."
"어어 그래. 축하한다. 어른의 두뇌를 써서 피곤할 카구라를 위해 잠 깰 시간 2분 추가."
"긴 쨩 진짜 완전 치사 빤스다 해."
"어이 차이나. 너 때문에 하교가 7분이나 늦어졌잖아."
"어디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해."
어딘가 건성으로 대답하는 꼴을 보아하니 전혀 듣고 있지 않은 듯했다. 아니 안 듣고 있어. 이놈들 절대로 안 듣고 있어. 긴 선생님의 캐치볼은 안 받는 거냐? 그런 거야? 지나가는 누가 본다면 콩트라고 할 만한 대화들에 벌써 질린 긴파치는 출석부로 두어 번 교탁을 쳤다. 그럼에도 귀마개를 귓구멍에 이식한 듯한 학생들의 모습에 평소의 목소리 크기로 종례 끝. 집이나 가라. 하고 말했다. 시끄러운 와중에서 그 작은 소리만큼은 귀신같이 들었는지 인사도 없이 교실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순식간에 텅 비어버렸다.
파아악. 한숨을 쉰 긴파치는 빈 교실을 훑어보고는 교무실로 돌아왔다. 남은 일은 해야겠고, 그렇다고 하고 싶지는 않으니 딴짓이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대충 출석부를 펼쳤다. 카구라, 신파치, 곤도, 카츠라... 이놈의 출석부는 왜 이렇게 뒤죽박죽이야? 기억을 더듬어 보니 사카모토가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그냥 프린트했다고 그랬던가. 일이 늘었다. 번거롭지만 지금 다시 하지 않으면 부메랑처럼 다른 일이 되어서 긴파치에게 돌아올 것이 훤하게 보였으니까. 규격에 맞지 않는 사진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사진이 문제가 되었으면 진작에 주의를 주었겠지. 긴파치는 제일 위에 놓여 웃기지도 않은 뱅글 안경을 쓴 채로 환하게 웃고 있는 카구라의 사진을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 반 애들도 참 특이한 점이 많아.
가령, 카구라는 인사를 되돌려주지 않으면 받아줄 때까지 끝까지 따라온다는 점. 시무라 남매는 서로서로 조용해지는 꼴을 보지 못한다는 듯 쓸데없는 주제라고 해도 언제나 대화가 끊이지 않는다는 점. 곤도, 오키타, 히지카타 이 세 명은 원 플러스 투 상품처럼 함께 다니는 게 기본이라든지. 물론 무조건 그렇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곤도와 그의 동행인 A 같은 느낌으로 한 명은 꼭 붙어 있다는 점. 거기에 오키타는 컨디션이 나쁜 사람을 재빠르게 눈치챈다는 점. 아, 교무실 옆자리의 사카모토도 그런 게 하나 있었지. 날카로운 날붙이에 손대기를 꺼린다는 점이라던가. 카츠라는 큰 소리에 놀라는 일이 없지만 작은 소리에는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점. 타카스기는 저와 눈동자를 완전하게 마주치는 일 없이 절묘하게 피한다는 점. 하나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것이 당사자들의 자각 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처음에 긴파치는 자신의 관찰력이 뛰어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저 관찰력 따위로 치부하기에는,
선생님에 비하면 나는 꽤….
…무척이나 생생해서.
긴파치는 안경을 벗으며 찌푸려진 미간을 눌렀다. 아니, 그래. 이런 걸 볼 수도 있지. 세간에는 귀신도 보고 유령도 보고 악마도 본다는 사람이 많지 않은가. 전생 체험 같은 거도 적잖아 있고. 자기가 로마의 공주라느니 농부의 소였다느니 하는 애들 있잖냐. 국적도 따지지 않고 사람이다 동물이다 할 것 없이 스펙트럼도 넓다. 다른 건 모두 둘째치고, 이놈의 눈은 요새 왜 이렇게 클라이맥스만 보여주는 거냐, 어? 기승전결에서 결만 보여주면 어떡하냐고. 과정은 어디로 말아먹은 거야, 밥 아저씨의 참 쉽죠 그림이냐? 그런 거였냐? 남자는 하나만 알면 된다고 둘셋은 어디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만들어버리는 뭐시기 다라이 아재랑 친구인 거지? 어라, 그건 또 누구였더라. 아아 이젠 됐어! 뭐든 상관없으니까! 좀 친절함을 보이라고! 어디 가시아귀에서 은혼 77권으로 가버리는 소리하고 있냐고. 어랍쇼. 이건 또 무슨 소리 하는 거냐, 난! 의도치 않게 팽글팽글 돌아가는 두뇌에 싫증이 난 긴파치는 단말마처럼 짧은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퇴근이나 하자."
책상 위에 있던 출석부와 서류를 서랍에 대충 쑤셔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선생들은 모두 퇴근한 상태였고 긴파치만이 잔업 때문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학교 선생이 무슨 잔업이냐고? 잔업 없는 직업은 없다. 창문을 전부 가린 커튼 사이로 석양 빛이 스며들어 왔다. 시계를 보니 지금 막 6시를 지났다. 오늘 8시에는 게츠노 아나 특별 출연의 프로그램이 있기 때문에 긴파치는 짧게 혀를 차며 귀가를 서둘렀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학교는 온통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하나같이 문이 굳게 닫힌 복도를 지나가는 기분은 뱃속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그렇게 빠른 걸음으로 끝자락에 위치한 마지막 Z반을 지나갈 무렵, 긴파치는 아직 교실 안에 누군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얼핏 보인 실루엣에 발걸음을 멈추고 뒷문에 붙은 유리창으로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스트레이트의 짧은 머리카락과 뒷머리를 가로지르는 흰 끈이 눈에 띄었다. 정면을 보지 않아도 딱 안대를 쓴 모양새였다. 말고도 그 외 등등의 특징을 조합해 보았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한 명이었다. 어라라. 그렇지만 타카스기는 오늘 학교에 오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교실의 한가운데에 서서 교탁을 바라보는 타카스기의 모습은 어딘가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손에 검이라도 쥐여주면 당장이라도 교탁을 어잇샤!하고 반 토막을 내어버릴 것만 같달까, 얼레? 이거 아주아주 좋지 않아요. 이 긴 선생님이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너한테 뭔가 죄를 지었습니까아아!!
긴파치가 한창 머릿속으로 머리를 붙잡고 있을 때, 뒷문의 열린 틈새로 짤막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타카스기가 왼쪽 눈을 한쪽 손바닥으로 누르고 있었다. 안대로 가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짓무르는지, 틈새로 눈물이 흘러나오는 것이 보였다. 마치 양파 여덟 개는 씻은 물에 얼굴 반쪽만 세수를 한 것처럼 말이다. 그건 정말로 두 번은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통증으로 인해 입에서 소리 하나 새지 못하도록 꾹 다문 입술은 터지기 직전이었다. 어이구, 저거 저거. 저러다가 누구 한 대 치겠네. 그 표정이 몹시 사나웠기에 이대로 못 본 척하고 지나갈 셈이었다. 야쿠자인 거냐, 야쿠자? 무턱대고 끼어들었다가는 괜스레 긁어 부스럼 만들 것이 훤히 보였다. 이거 절대로 골치 아파지겠지.
…사실 진심으로 말을 걸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지만? 그래도 나름 선생님이라는 타이틀을, 그것도 앞에 담임이 붙은 녀석을 달았는데 돈 받아먹는 값어치의 일은 해야 하지 않겠나. 담임 선생님의 권한으로 성게처럼 신경이 날카로워진 삐죽스기군을 위한 학생 멘탈 케어 서비스를 이번 기회에만 특별히 무상으로 제공할 기회를 주도록 하겠다. 사카타는 못 본 척 지나가려던 일은 전전전생이었다는 마냥 자연스럽게 교실의 뒷문을 열었다.
쾅!!!
"……."
"……."
그렇지만 이렇게 세게 열릴 줄 알았다면 그냥 지나갔을 거야. 어이!!! 교실 문 청소 담당은 누구야!! 기억하기로는 복도 청소와 같은 담당이었을 것이다. 이제 보니 개장 직전의 아이스링크장 얼음판처럼 매끈매끈한 것이 잘 보였다. 이제 얼음이 아니라 거울이잖아! 그거야 당연하겠지! 무려 창문 사이로 햇빛이 복도에 반사되어서 아까부터 안경알을 타고 내 눈동자를 찌르고 있으니까! 이렇게까지 새것 마냥 반짝반짝하게 닦을 필요 없다고. 스무스하게 열리는 교실 문은 재미없다고. 좀 뻑뻑해야지 수업 들어오는 선생님의 시간을 1초라도 더 뺏을 수 있는 거라고. 학교 쉽게 다닐거냐, 그런 거냐? 긴파치는 빠르게 눈동자를 굴려 칠판 한 구석에 적힌 청소 담당 명단을 살펴보았다.
[고릴라]
너냐!!!! 황당한 기색이 한가득한 긴파치는 언제 그랬다는 둥 자연스럽게 얼버무렸다. 타카스기 또한 이 상황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바람이 세게 불어서 그래."
"잘도 그러겠군."
"선생님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냐, 그게?"
"허구한 날 자습이나 시키는 주제에 선생이라곤."
"결석보다 출석 일을 손가락으로 세는 게 더 빠른 불량학생께서 할 말은 아닌지 싶은데."
미묘한 신경전이 오고 갔다. 다만 서로에서 날을 세운 것이 아니라 날이 세워져 있는 두 사람이 만나 불가항력으로 부딪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당연했다. 긴파치에게는 퇴근과 게츠노 아나 특별 출연 프로그램 본방송이 걸려있었고 타카스기에게는…. 어, 뭔가 걸려 있긴 하겠지. 가만히 타카스기를 바라보던 긴파치의 시선이 이내 타카스기의 왼눈으로 향했다. 뭐라고 할까, 왼눈의 존재감이 어마어마한데요. 왼눈이 없는데 존재감은 있어. 얼레? 타카스기 군에게는 특수한 눈을 가진 긴 선생님에게도 보이지 않는 스탠드가 붙어있는 걸까나.
"오호, 신경 쓰이나?"
미묘하게 어긋난 시선을 눈치챘는지 긴파치에게 가까이 다가간 타카스기가 히죽 웃으며 아주 정말 약간 허리를 숙여 올려다보았다. 눈매가 어찌나 날카로운지 슬쩍 눈이 마주쳤을 때 노려지는 사냥감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나 뭐라나. 긴파치는 문득 이 눈매 나쁜 학생을 어떤 식으로 교정해야 좋을지 고민했다. 입술을 싹 다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던 긴파치는 침착하게 외쳤다.
"뭐, 뭐? 어머 싫다, 타카스기 군. 선생님은 매번 쓸데없이 흑염룡을 품은 녀석이나 쓸 법한 안대 뒤에 숨은 눈병이 옮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물어보는 거라고? 그 안에서 크툴루를 키우던 검은 짐승, 하얀 짐승을 키우던 뭐든 전혀 궁금하지 않거든. 거기 풍혈이 있던 사륜안이 있던 하나부터 열까지 관심 없거든."
아니!!
"…그렇게 궁금하다면 못 보여줄 것도 아니다만."
저기요, 침착하게 말했다면서요? 그렇지만 빨랐죠. 얼레. 나 지금 거꾸로 말해버린 거야? 말과 생각이 나 몰래 자기들끼리 체인지 앤드 저스트 두 잇! 해서 나와버렸어. 저 떨떠름한 표정을 봐, 아니 왜 점점 진화하는 거야. 선생님을 한심하게 보면 못써요! 긴파치는 마치 컴퓨터를 재부팅하는 것처럼 심호흡을 하며 잠깐 동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음 됐어. 자연스럽군. 아무 일도 없었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여어, 타카스기 군! 하교 시간은 진즉에 지나갔으니 어서 귀가하는 게 어때.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있으면 경비 아저씨한테 민폐라는 생각은 안 드는 거냐, 요 녀석아."
"신경 꺼. 어차피 지금 돌아갈 생각이었어."
타카스기는 교실 맨 뒤로 가 창가 끝자리의 책상 위에 놓인 가방을 어깨에 들쳐매었다. 그대로 교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타카스기를 향해 긴파치는 선심 쓴다는 마냥 불러 세웠다. 네 왼눈 말인데.
"함부로 보여주는 거 아냐. 네 눈에 박제된 녀석이 도망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냐."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성격 나빠 보이는 웃음을 짓던 타카스기의 표정이 뚝 끊어진 악기줄마냥 조용해졌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의아하다는 듯 긴파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또 뭐냐?"
"아니. 당신, 지금 뭐라고…."
"뭐긴 뭐…, 아아악!! 벌써 7시잖아!!! 우리 집은 여기서 버스 정거장 다섯 개는 지나야 도착한단 말이다! 서두르지 않으면 시간에 늦어버리겠어, 난 갈 길이 바빠서 먼저 간다. 금방 어두워지니 어디 딴 길로 새지 말고 너도 집에 후딱 들어가라!"
손목시계를 본 긴파치가 비명을 질렀다. 어슬렁거리던 정신이 다시 머릿속에 쏙 들어와 박혔는지 타카스기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치고는 급하게 버스정류장으로 달려나갔다. 교실에 홀로 남겨진 타카스기는 방금까지 긴파치가 머물렀던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필이면 당신이."
타카스기는 여전히 한쪽 손으로 왼눈을 가리고 있었다. 심장의 고동처럼 일정하게 욱신거린다. 평소 같으면 이 즈음 되었을 때 멎었을 고통이 계속되는 것도 모르고. 유리창에 비친 타카스기의 얼굴에는 눈물 자국은 없었다. 애초에 흐르지도 않았다는 듯이 깔끔했으니까. 그렇다면 긴파치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직도 해는 다 저물지 않았다. 석양이 저무는 시간에 멈춘 것처럼 타카스기는 단상에 서서 칠판에 수학 풀이를 적다가 부러져 산산조각이 나버린 하나뿐인 분필을 물끄러미 보는 마냥 한참을 교실 가운데에 서 있었다.
23.11.12 작성 24.11.03 퇴고없이 백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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