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료

해귀

원작 아닌 어드메의 타카긴

海鬼 

: 본디 바다에서 온 것은 바다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모양이 동그랗게 잘 빚어진 주먹밥을 야무지게 한입 베어 먹은 카츠라는 은근하게 가자미눈을 뜨며 콧김을 내쉬었다. 입안에 가득 찬 쌀밥을 꼭꼭 씹어 먹더니 어느새 꿀떡 삼켜버린 그가 다시 한번 말을 이었다. 타카스기, 사람이 말을 할 때는 되묻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있도록 경청하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나는 지금 너에게 해귀海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어. 눈동자를 총명하게 빛내며 혹여 타카스기가 듣지 못했다고 대답하는 일이 없도록 입을 크게 벌리며 또박또박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곧 있으면 윙O르디움 레비오우사가 나올 판이다. 

"어차피 그런 거 옛날 사람들이 다 지어낸 이야기잖아."

그런 미신이나 듣고 앉아서는. 너도 참 할 짓 없구나. 타카스기는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는다는 둥 어깨를 으쓱였다. 마치 말이라고는 쥐뿔도 듣지 않는 말썽꾸러기 아들을 둔 부모라도 된 마냥 한숨을 쉰 카츠라가 말했다.

"타카스기. 너는 그런 말을 듣고도 곧바로 주먹이 나가지 않는 나같이 넓은 마음을 지닌 친구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게 좋을 거야."

"시끄러워, 즈라."

"즈라가 아니라 카츠라다!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는 거냐, 넌!"

"그래 즈라. 너도 너한테 주먹이 아닌 대화를 먼저 시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감사하도록 해."

즈라는. 아니 즈라가 아니지. 카츠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렇게 키운 적이 없었는데 누굴 닮아서는, 하며 혀를 끌끌 차는 모습이 퍽 황당했는지 마냥 뚱한 표정을 짓던 타카스기가 헛웃음을 지었다. 주먹밥은 어느새 다 먹은 건지 한껏 구부린 자세로 계단에 앉아 있던 카츠라는 기지개를 켜는 것처럼 다리와 팔을 쭈욱 폈다. 그러고는 바로 옆에 앉아있던 타카스기의 앞에 떡 하니 서서 양 팔을 꼬아 팔짱을 낀 채 내려다보았다. 드물게 재미있는 것을 발견한 아이처럼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내 든 이유가 궁금하지 않나? 카츠라는 한껏 기대 어린 눈동자로 타카스기를 바라봤다. 궁금하다고 해. 궁금하다고 말해! 누가 보아도 그런 눈빛을 하고 있었는데, 그럴수록 더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심성인 듯싶다.

"아니."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은근슬쩍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가며 휙 고개를 돌린 타카스기의 단호한 모습에 청천벽력의 충격을 받은 카츠라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째서냐! 늘 심심하기 짝이 없다며 애먼 남의 도장이나 깨러 다니질 않나, 볼 장 다 봤으니 이제는 한량이라도 된 마냥 인적이 드문 동네 구석에서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너를 위해 내가 발 벗고 나섰거늘."

이런 괘씸한 녀석 같으니라고. 생각이라도 하는 성의를 보이란 말이다, 이 바보 타카스기! 카츠라는 타카스기의 양쪽 어깨를 붙잡고는 이리저리 흔들었다. 이럴 때만 한 번에 듣고 대답하지 말고! 어지러운 시야에 슬슬 현기증을 느낀 타카스기는 양 팔을 안쪽으로 들어 자신의 어깨 위에 놓인 카츠라의 팔을 바깥쪽으로 쳐내며 반박했다. 되묻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경청하라고 했던 건 너잖아. 그 말이 허를 찔린 듯 귀지 맛 젤리빈이라도 먹은 것처럼 구깃한 표정을 짓던 카츠라는 이내 머리를 부여잡으며 미래의 시어머니가 날린 귀싸대기에 맞은 며느리 마냥 가냘프게 풀썩 주저앉았다. 어이, 타카스기. 왜 즈라. 즈라가 아니다, 카츠라라니까!

"네 학습능력과 응용력이 뛰어난 것은 잘 알겠으니까." 푸욱 하고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래서, 들을 거냐?" 카츠라는 뾰로통하게 말했다.

타카스기는 고민하는 시늉을 낸다는 듯 음, 하며 다시 한번 턱을 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가. 좋아,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뭐. 들어는 줄게. 타카스기의 긍정에 화색한 카츠라는 잠시 아리송한 표정을 짓더니 벌떡 일어나며 뭘 네가 인심 쓴다는 듯 말하는 거냐! 호통을 쳤다. 익숙한 듯 양 손바닥으로 귓구멍을 막은 타카스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수그러든 잔소리에 슬쩍 웃어 보였다.

"그럼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그래, 처음에 내가 물어봤던 건 기억하나?"

"해귀, 말이지." 곰곰이 기억을 떠올리던 타카스기가 말했다. "빛줄기 하나 없는 검은 바다에서 기어 나온다는 오니잖아. 아이들을 납치한다면서 해가 지면 다들 바다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하는 거 말고는 글쎄, 모르겠는걸."

카츠라는 타카스기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음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다. 바닷가의 마을이라면 어디 하나 빠지지 않고 내려오는 옛날 이야기지. 그런데 미신인 줄로만 알았던 이야기를 마을에서 꽤나 어르신에 속하는 분이라면 해귀의 첫음만 나와도 기함을 지르는 것도 알고 있나?"

그런 적이 있었나. 이내 자신이 어르신들과의 접촉이 완전히 없다 싶었던 것을 떠올린 타카스기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보다도 즈라, 그 말투 좀 그만둬. 애늙은이 같아."

비웃음을 감출 생각은 추호도 없는 듯 놀릴 준비가 만만인 눈동자가 반짝였다. 카츠라는 또 시비냐는 듯 질색팔색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였다면 반대였을 위치였다. 문득 아아, 타카스기. 너는 나를 볼 때 이런 기분이었구나. 잠시나마 이해한 느낌이 드는가 싶더니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해서 노를 빼달라는 요청에 휑 날아가 버린 노 마냥 훌쩍 사라졌다. 그건 그거고. 이런 고얀 놈, 친우의 노력을 우습게 보는 거냐! 

"사무라이로서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벌써부터 익숙해지려는 내 큰 뜻을 이해하지 못하다니. 됐다. 내가 너한테 뭘 더 바라겠냐. 여하튼!"

마을 외각에 있는 당고 가게의 정면에 있는 산에 가본 적 있어? 이런 게 한두 번 있는 것도 아니고, 거 참. 마음을 진정시킨 카츠라가 물었다. 산? 의문을 표하는 타카스기의 말에 오른쪽 팔을 쭉 뻗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쪽이 당고 가게, 그리고 바로 쯔어어어기에 있는 산 말이야. 손가락 끝을 따라 고개를 돌리면 검은 숲이 나왔다. 산 전체에 검은 잎의 나무가 무성하여 검은 숲이라고 불리는 산이었다. 비밀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손바닥을 빳빳하게 펼쳐 입가를 가린 카츠라가 말했다.

"저 산에 미치광이가 살고 있다고 들었거든."

"...즈라, 어디서 이상한 것만 주워듣고 온 거냐? 곱상한 과부가 말을 걸어와도 사무라이답게 거절할 줄도 알아야지. 정말로 저기에 사람이 살았다면 진작에 소문이 돌았을 거야."

타카스기는 몹시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카츠라를 훑어보고는 혀를 끌끌 찼다. 면상도 멀쩡하게 생겨서는 왜 이렇게 자랐을까. 언제는 이런 취급을 하지 않았다 것처럼 뻔뻔하게 말하는 타카스기에, 카츠라 또한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어째서 미쳐버린 줄 알아? 해귀를 만나고도 살아서 돌아왔기 때문이라고 해. 엊그제 장날이 열렸을 때 만난 처자가 알려줬어. 자신이 그 사람의 조카딸이 되는 사람이라면서 말이지."

카츠라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느냐고 물으면, 그는 안타깝다는 듯이 산 중턱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죽었는지도 살았는지도 모른다고 해."

"뭐라고?"

"가족 모두가 옛적에 인연을 끊어서 생사불명이라는 거야. 부모와 처는 죽고 자식이란 놈들은 모두 도망가고 내가 만난 조카딸이라는 처자도 어쩌다 지나가던 길이었데. 그러다 문득 생각나서 근처에 있던 나에게 저 산에 사람이 아직 살고 있느냐는 식으로 말을 꺼낸 거였고."

"…그래서? 너는 왜 그 조카딸의 근처에 있던 건데?"

"나의 센서가 반응했다."

"하?"

"과부였어. 그것도 아주 젊고 아름다운 분이셨지. 이렇게 가슴이 뛰는 건 채소가게의 그분 이래로 처음이다."

뺨이 봉숭아 빛으로 발그랗게 물든 카츠라는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린다는 듯이 두 손을 가슴에 모았다. 아까 네가 했던 말 그대로다. 타카스기 너, 제법 신통한 소리도 할 줄 아는구나. 카츠라는 왠지 모르게 흐뭇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타카스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평소와 같이 왼쪽 다리에 무게중심을 잡고 빠르게 정강이를 후려쳤다. 우당탕탕 큰 소리를 내며 넘어지는 카츠라는 고함을 지르는가 싶더니 그대로 하늘을 쳐다보고는 푸른 치맛자락이 무척이나 어울렸지, 하며 꿈속을 헤매는 것처럼 헤벌쭉하게 웃었다. 저놈 저거 중증이네. 타카스기는 흙바닥에 벌러덩 누워 넋을 놓아버린 카츠라를 내버려 두고는 자리를 피했다. 이상한 놈이랑 엮이지 말아야지. 물론 카츠라가 들었다면 적어도 네가 할 말은 아니라고 했을 것이다.

해는 아직 중천에 떠 있다. 문득 검은 숲으로 시선이 향했다. 아까는 그다지 흥미가 없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검은 숲이라면 예전에도 몰래 들어가 보려고 했다가 마을 사람들에게 들켜 주의를 받은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렇다면 이게 무슨 뜻이냐.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것이 아이의 철없는 부분이다. 그리고 타카스기도 마찬가지로, 또래 아이들에 비해 성숙하다는 말을 여러 번 듣고 있다고는 하지만 역시 아직 어린아이였다. 고민은 짧았다. 최대한 수상하지 않게끔 주위를 둘러보면 거리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오늘까지 이어지는 장날을 위해 마을 중앙에 모여있을 것이 훤하게 보였다. 마침 타카스기가 있는 곳은 외각의 신사 쪽이었다. 기회라면 지금이 바로 기회였다. 타카스기는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검은 숲으로 향했다.

소년은 태생부터 몸이 약했다. 건강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유를 알 수 없는 잔병을 자주 앓았다. 집안이 꽤나 유복한 편에 속해 있었기에 몸에 좋다는 것을 전국에서 그러모아 송두리째 먹기도 했고, 정신에 스스로가 인식할 수 없는 결점이 존재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어느 수도승의 조언에 힘입어 몸을 단련하고 명상을 하는 것이 일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바른 정신은 건강한 몸에서 나온다고들 했으니까. 결과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좋다고도 할 수 없었다. 

어느 날에, 연중 가장 좋은 날이 될 예정이었던 날에. 그렇게나 주의를 기울여서 몸을 조심했는데도 불구하고 감기에 걸린 적이 있었다. 지독한 여름 감기였다. 겨우 하루였는데. 이런 날까지도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 몸에 소년은 결국 낙심했다. 언제나 밝고 활기차게 지내기를 고수하던 소년은 도무지 진전되지 않는 자신을 거울에 비춰볼 때마다 남몰래 힐난했다. 차마 남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았으며, 주변에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날이 갈수록 기운이 없어지는 소년을 못내 신경 쓰던 어머니는 늘 소년을 따뜻하게 끌어안는 것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몸에 좋다는 온갖 것들은 더 이상 집에 들이지 않았다. 다른 집안들처럼 평범한 가정식을 만들어 주었다. 몸의 단련은 이제 되었으니 그만, 휴식을 취하는 것도 하나의 단련이라며 소년을 다독였다. 다만, 명상만은 말리지 않았다. 그것만은 소년이 자발적으로 실천했기 때문이었다.

소년이 말했다. "의사 선생님은 제가 건강하다고 했는데 그건 아닌 거 같아요." 단지 순수한 의문이었다. "저는 왜 자주 아픈 걸까요?"

흐음. 짧게 고민하는 듯 싶던 어머니는 고개를 돌려 담장 너머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눈동자에 파아란 파도가 일었다.

"바닷가에 살고 있어서 그래. 바닷바람은 산바람, 들바람보다도 강하니까 아무리 몸이 튼튼해도 환경과 체질이 맞지 않아서 그런 거 같구나."

"그럼 다른 애들은 바다가 그, 체질이라는 거예요?"

어머니는 뾰로통한 얼굴의 소년이 귀엽기 그지없다는 듯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글쎼, 어쩌면 우리 집이 특히나 바다와 가까운 곳이라서 그런 거일 수도 있지. 담장 너머에는 바로 바다가 있으니까 말이야. 조곤조곤한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소년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래. 바다님께서 우리 아들을 참 좋아하시나 보네." 어머니는 처음 보는 얼굴로 웃으며 그렇게 말씀하셨다.

바스락.

문득 낯선 인기척에 눈이 떠졌다. 숨을 죽여 가만히 집중하고 있자니, 아주 작지만 움직이는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소리의 주체가 무척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다는 점일까. 소년은, 이제는 노쇠한 몸뚱이를 겨우 일으켜 낡은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언제나처럼 텅 비어있을 마당에는 고운 옷차림을 어린아이가 서 있었다. 그래, 마치… 그때의 자신처럼.

소년을 마주한 아이는 지레 겁을 먹던가 싶더니 이내 조금이지만 한 걸음씩 다가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타카스기 신스케라고 합니다. 무척이나 정중한 아이였다.

타카스기는 많은 것을 묻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뜻이 담긴 것을 물었다. 소년은 실타래를 전부 풀어헤친 미로의 중심에 있었다. 실을 다시금 되감으며 길을 더듬어 갔다. 그것을 반복하고 반복하고. 곧이어 네 번째의 질문과 네 번째의 대답이 끝났을 때, 석양이 온 산을 뒤덮고 있었다. 이제 아이는 집으로 갈 시간이었다.

"이걸 가지고 가." 소년은 낡은 서랍장에서 조그마한 병을 꺼내 건넸다.

병을 받을 때, 병의 안쪽에서 무언가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맑은 소리였다. 빈 병인 줄로만 알았던 것을 건네받은 타카스기는 병안에 금평당 몇 개가 굴러다니고 있는 것을 보았다. 가만히 소년을 바라보던 타카스기는 그저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숙이고는 산을 내려갔다.

멀어지는 타카스기의 뒷모습을 보며 소년은 어느덧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을 느꼈다. 눈앞에 푸름이 보인다. 하늘의 청명함과는 다른 빛의, 그리움과 추억이 가득한 푸름이었다. 그 가운데 무언가가 일렁이는 것이 보인다. 무척이나 흐릿한 형체였으나 소년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석양과 눈이 맞았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힘이 다 빠져 듣는 사람이 불쾌해질 정도의 쇳소리였다. 그럼에도 소년은 웃었다. 그 시절의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그렇게 깊은 심해로 가라앉아 태양빛이 완전히 사그라들 때까지 계속.

검은 숲을 빠져나온 타카스기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길을 따라 걸었다.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검은 숲은, 저 산은 더 이상 검은 숲이라고도, 산이라고도 불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잠시 멈춰 선 타카스기는 몇 개의 금평당이 든 병을 잠시 내려놓고는 소매 안쪽의 손수건을 꺼내어 조심스럽게 감싼 후 단단히 매듭을 묶어 하오리 안쪽에 새로 수선해 놓은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이걸로 잃어버릴 걱정은 없다.

그렇게 곧장 바닷가로 향했다. 도중에 이런 길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위화감이 드는 골목을 지나기도 했지만 타카스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문득 정면을 향해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짠 내음이 났다. 저절로 찌푸려지는 얼굴로 바람을 헤쳐 나아갔다. 제대로 보이지 않는 앞에 고개를 숙여 걷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흙바닥에 모래가 섞여있는 것이 보였다. 드디어 바닷가에 왔다. 석양은 저문 지 오래였다.

새까맣다. 아주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곱게 간 먹처럼 새까맣기 그지없었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무너진다. 마치 세상의 위아래가 사라진 것처럼 하나로 보였다. 모래밭에 서서 가만히 보이지 않는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귓가에는 파도치는 소리가 맴돌았다. 저절로 마음이 차분해진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언제부터인가 주위가 조금씩 밝아지더니 이내 해안선을 따라 바닷가가 빛나기 시작했다. 그것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처음 보는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파도와 모래가 만나 부서지는 찰나, 그 거품에서 생겨난 흐릿한 알갱이가 빛을 내기 시작한다. 한곳으로 모여들어 조금씩 덩어리를 만들어가고 있다. 달 토끼가 떡방아를 찧은 떡 뭉치가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척이나 하얗다. 반죽으로 모양을 빚는 것처럼 꾸물꾸물 움직이던 것이 어느새 작은 사람의 형태를 만들었다. 홀린 듯이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어 환각을 보고 있는 것이라고 깨달은 타카스기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고 양 뺨을 두드리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만둬. 볼거리에 걸린 것처럼 얼굴이 빨갛게 됐잖아."

부드러운 손길이 타카스기의 팔을 슬며시 건드렸다. 깜짝 놀란 타카스기는 순간 혀를 깨물 뻔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침을 삼키는 것으로 무마할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리면, 그곳에는 타카스기 또래 즈음으로 보이는 아이가 가만히 서 있었다. 속눈썹이 하얗다. 살며시 감겨 눈동자를 숨긴 눈꺼풀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눈높이가 맞으니 키는 얼추 비슷하다.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은 뭉실뭉실한 구름을 닮았다. 무심코 손을 머리 위로 올려 당장이라도 쓰다듬어버릴 것만 같았다. 하얀 머리카락은 자세히 보니 은색을 띠고 있었다. 드물다 못해 노인이 아니라면 거의 나타나지 않는 이질적인 색이지만, 은실같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그 아이에게 무척 어울리는 예쁜 머리색이었다. 기모노에 하오리 등 여러 벌을 겹쳐 입은 타카스기와는 달리 기모노 한 벌 만을 입고 있었는데, 무척이나 고운 푸른색이었다. 마치 낮의 바다를 떠올리게 하는 색이다. 새하얀 피부는 사람의 때가 묻지 않은 소복하게 눈이 쌓인 들판을 떠오르게 했다. 문득 저도 모르게 상대를 구석구석 훑어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 타카스기는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고의는 아니었으나, 처음 만나는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으니까. 아이의 정면을 향하며 먼저 말을 건네려고 했으나 이상하게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언어가 나오지 않는다.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고를 수가 없어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이는 머뭇거리는 타카스기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마주 보기를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어느덧 눈꺼풀 속에 가려져있던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다 뒤로 넘어가는 석양을 닮은 아주 어여쁜 붉은색이다. 떡 반죽이 아니라 달 토끼였구나. 곧이어 초승달처럼 휘어지는 눈매에 다시 숨어버리기는 했지만, 두 눈을 마주친 그 찰나의 영원을 잊지 못할 것이라고. 슬며시 가슴께의 옷자락을 부여잡은 타카스기는 생각했다.

"너, 사람 대하는 게 서툴구나."

어느 순간부터 들리지 않았던 파도 소리가 다시금 들려오기 시작한다. 모래알과 맞닿아 부서지는 파도는 반짝반짝 빛을 내며 다시 바다로 돌아갔다. 밤바람이 분다. 바닷가에 부는 바람치고는 드물게 머리카락을 간지럽히는 정도였다. 언제까지고 멈출 것만 같던 시간이 흘러간다.

"이름은?"

그 시간만큼은, 바다가 이 아이를 위해 존재한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타카스기, 신스케." 

츠쿠요미님께서 달도 별도 수놓지 않은 새까만 밤의 비단으로 천지를 뒤덮는 시간. 숨은 별이 바다를 향해 떨어지고, 그 별이 떠밀려 들어온 바닷가에는 아이를 잡아먹는 심해의 오니가 나타난다.

바닷가에 위치한 모든 마을의 아주 먼 과거에서부터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

"너는…."

아이에게서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위화감에 덜컥 온몸이 오싹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명 따위를 지를 정도로 타카스기는 한심하지 않았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재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고민했다. 무엇을 말하면 좋을까?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답은 이미 나와있으므로. 이 아이도 내게 묻지 않았나. 

"이름이 뭐야? 뭐라고 부르면 좋아?"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듯 놀란 고양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정말 별나구나." 잠시 숨을 삼키더니 이어 답했다. "긴토키라고 불러."

"긴토키, 긴토키." 몇 번이나 그 이름을 중얼거리던 타카스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긴토키의 눈을 바라보았다. "기억했다. 너는 긴토키라고 하는구나. 머리색과 잘 어울리는 좋은 이름이야."

긴토키는 푸스스 웃었다. 살포시 모래밭에 앉고선, 타카스기를 바라보며 옆자리로 손짓을 했다. 원래 제자리였다는 듯이 냉큼 옆으로 다가온 타카스기가 풀썩 주저앉았다. 곱게 자란 도련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외견과는 달리 행동은 동네 장난꾸러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긴토키는 다리를 쭉 편 상태로 양 팔을 뒤로 짚어 중심을 잡았다. 타카스기 또한 모래가 크게 날리지 않게끔 조심스럽게 한 쪽의 다리를 안쪽으로 접어 앉으며 반대편의 무릎은 세운 다음, 그 위에 양 팔을 얹어 한 손으로는 턱을 괴었다. 부모님에게는 경박하게 보일 수 있으니 밖에서는 자제하라며 몇 번이나 잔소리를 들은 자세였다.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았지만. 

귓가에 파도 소리만 맴도는 가운데, 먼저 질문을 던진 것은 타카스기였다. "혼자 여기서 뭐 하고 있어?" 다행스럽게도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평소와 같은 상태에 만족했다.

그 말에 긴토키를 고개를 저었다. "혼자가 아니야." 시선은 타카스기를 향해 있었다. "네가 옆에 있는걸."

".....아아. 그렇지." 물론 말하기 무섭게 허사가 되어버렸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들어온 공격으로 없던 치명타가 터져버리는 바람에 답지 않게 당황한 탓이었다. 마치 조개껍데기를 닮았다, 고. 모래 속에 파묻혀있던 붉은빛의 조개껍데기를 언제 주워들고 있던 건지 타카스기의 뺨 옆에 슬그머니 들어 올린 긴토키는 남몰래 생각했다. 그것과는 별개로 긴토키가 조개를 줍기 전부터 타카스기는 자신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을 거라고 확신했다. 후끈해진 얼굴을 진정시키기 위해 입술을 꾹 다물었다. 필사적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 그래, 예를 들어서 함께 축제에 가기로 했던 카츠라가 약속 장소로 오던 중 그 조카딸 같은 과부에게 눈이 팔려 삼십 분 동안 기다리게 만들었다든지. 이 자식이? 도움이 되기는커녕, 열이 뻗쳤다.

안되겠다,라는 느낌이 든 순간 타카스기는 혀를 깨물었다. 고통으로 잡념을 날려버린 것이다. 꽤나 극단적인 판단이었다. 다만, 마음을 급하게 먹고 있던 타카스기는 자신이 한 행동의 과격함을 온전히 인지하지 못한 듯싶었다. 혹은 크게 신경 쓸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거나. 비릿한 맛이 입안을 맴돌았다.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는 듯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의 얼굴로 돌아왔다. 시시각각 변하던 얼굴을 눈앞에서 보고 있던 긴토키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혹시 바보냐? 실제로 그런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타카스기는 그렇게 이해했다. 그제야 자신의 행동을 자각했는지 민망한 듯 아주 조금 고개를 숙이고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긴토키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건지,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를 향해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그러고는 마을 방향을 한 번. 다시 바다를. 이내 마음을 다잡은 듯 마지막으로 타카스기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따라오라며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어디를 가는데?"

"그거야 바다인 게 당연하잖아."

모래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난 긴토키가 타카스기의 소매를 붙잡고 이끌었다. 타카스기는 소매를 붙잡고 있는 긴토키의 손을 바로잡았다. 문득 바다를 쳐다보니 저기 멀리서부터 거대한 파도가 바닷가를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무섭다거나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애초부터 저항할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긴토키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 마음 한구석에 숨어있던 불안과 걱정마저 사르르 녹아버렸다. 타카스기는 긴토키와 맞잡은 손에 힘이 실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발걸음이 천천히 바다로 향했다.

"한 번도 본 적 없을 풍경을 보여줄게."

커다란 파도가 치고 바다 거품이 일어난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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