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2018 미밀

made in heaven by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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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 같던 나날의 끝을 기억한다.

힘겹게 잠들었던 어느 밤 자신을 깨우던 잡음, 미처 깨나지 못한 정신으로 이불을 걷어낼 때쯤 짙게 풍겨왔던 피비린내. 축축한 류드밀라의 손을 꼭 쥐고선 현관문을 열었을 때 미하일은 헛구역질을 했다. 게워낼 것도 없어 혀 끝에 도는 시큼한 맛이 고작이었으나 아연하게도 그리 불쾌한 감각은 아니었던 것 같다. 급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허리를 두드리는 책가방과 턱 끝까지 차오른 숨도, 여태껏 삶에 대한 경멸과 애증까지도 모두 녹여낼 만큼 어둑한 밤하늘이 실로 막연하고도 울음 치미는 광경이라 그랬다.

구원은 인간에게서 인간으로 향한다. 진창에서 붙잡은 손은 틀림없는 혈육의 손이었다. 적어도 이바노비치에게 신의 자비 같은 건 없었고 앞으로도 영영 없을 테다. 바닥으로 떨어진 순간에 기적조차 상상할 수 없다는 건 가혹하겠지만, 어린 미하일은 아무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때로 류드밀라는 기적까지 선사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또 절망과 희망은 한 끗 차이임을 알고 있었으니까.

냉랭한 공기에 아른거리던 졸음도 달아나고 달갑잖은 향수만이 남았다. 어슴푸레 밝아오는 하늘을 한 번 흘긴 미하일은 장갑 낀 손을 주머니 속으로 쑤셔 넣었다. 따사로운 날에도 손끝까지는 열이 도는 법이 없었다.

이브리도를 잃은 이후로 제법 시간이 지났다.

*

끝없는 절망 속에서 무엇이라도 붙잡으려 절박했던 때가 무색하도록 미하일은 그럭저럭 살아가게 되었다. 사람은 의외로 금방 잊고 금방 적응하는 동물이라, 평생을 갈 것 같던 통증은 1년이 채 되지 않아 아물고 어느 새부터는 아파하는 것보다도 발붙이는 데에 더 신경을 쏟았다. 생경한 외지 바닥에서도 악착같이 살아왔던 캐슬 아니던가. 미하일은 어디 보이기 낯부끄럽지 않도록 다시 잘 살아볼 셈이었다. 자신의 값어치는 스스로가 증명해야 하는 법이었다.

자신의 입지를 다잡고 나서는 신고식에 대한 앙갚음도 할 수 있었다. 바닥이라는 건 비열한 벌레들의 소굴이었으므로 꽤 곤욕을 치렀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몸뚱이 위로 올라타 힘에 부치도록 주먹을 휘두르며 미하일은 정상에 서는 것이 참 고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한 때는 나름 한 조직의 우두머리였는데… 어떻게 그랬는지 좀처럼 기억이 나질 않았다. 어쩌면 그 시절의 자신은 그저 떠밀리듯 앞장선 어설픈 수뇌였을지도 모르겠다.

낭비한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기에 미하일은 이브리도를 재건하고 싶었다. 과거에 매달린다고 하여 바뀌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평생에 걸쳐 배웠다.

류드밀라는 종종 성당에 들러 기도를 올리곤 했다. 하나같이 오래된 기억들이지만 그녀가 작업 전후로 거치던 기도실, 막 떠오른 햇살에 부옇게 떠오르던 먼지들은 아직 뇌리에 선명했다. 기도실 문을 열면 양옆으로 의자가 늘어서 있었고, 찬란한 성모상과 촛불 그 가까이에는 늘 류드밀라가 앉아 양손을 맞잡은 채였다. 문턱에 선 자신은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데 그 뒷모습은 변함이 없어서 그도 언젠가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었던 모양이다.

발을 들인 것만도 아주 오랜만인 데다 칼런티니의 성당은 완전히 초행이었던 탓에 미하일은 잠시 헤맸다. 그리 곧은 신념은 아니었지만 스스로의 철학에 반하는 짓을 하자니 뭔가 부끄러워 인적 드문 곳을 찾은 것이다. 예배당 내부는 기대만큼 적적하고 서늘했다. 느릿하게나마 흐르는 사람들의 걸음 속 자신만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을 느끼곤 미하일은 그제야 걸음을 옮겼다. 스스로 성당을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다. 낯선 장정 하나가 일없이 오가고 있으면 누구라도 용건을 물을 테다. 예전부터 이런 곳은 질리도록 다녔다는 태연한 얼굴로 주위를 살피던 중, 문득 고해실이란 투박한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는 그 비좁아 보이는 방 한 칸이.

누구나 죄를 짓고 사는 시대니 굳이 종교인이 아니어도 고해성사란 행위는 안다. 비밀이 무거운 사람이라면 으레 혹하겠지. 다만 그는 찰나 망설였다.

고해, 풀 수 있는 죄를 지었던가….

*

고해실을 찾은 것은 처음임에도 미하일이 제일 먼저 느낀 것은 괴리감이었다. 인기척은 있으나 그뿐, 촘촘한 장식벽 너머 신부는 묵묵히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좁은 틈 사이로 신부의 손을 본다. 작고 상처 가득한, 그리운 손.

“원래 이렇게 말이 없습니까?”

미하일은 작은 의자에 대충 몸을 구겨 앉으며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답은 없어 잠깐 후회가 일기도 했다. 그러나 미하일은 꿋꿋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신은 고백만 하면 어떤 죄든 용서하신다지요?”

그제야 신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은 무언가로 가리고 있는 것 같아 그는 기웃거리는 것을 완전히 포기했다. 실은 초조한 마음에 시선을 돌리고 싶었으나 그마저도 쉽지 않은 곳이었다. 좁은 방에서는 목재 특유의 물기 밴 냄새가 났고 정장 소매에서 풍기는 향수마저 다시 맡을 수 있었다. 도망치기엔 자리가 협소했다. 가슴에 맞닿을 듯 굽힌 무릎 위로 고동이 느껴질 것만 같아 미하일은 잠시 마른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린다. 왼쪽 뺨에만 닿는 가죽의 촉감이 이질적이라 왠지 모를 아픔만 느끼고 만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능청스레 웃어넘기던 것은 옛날 일이다. 고백해야 할 회고들이 혀끝에서 신맛을 내며 맴돌고 있었다.

정정하자면 회고랄 것도 없었다. 미하일은 절차도 없는 밀실에서 입술을 떼어 혈육을 팔았음을 고백했다. 피와 눈물, 항간의 저주로 물든 삶에서 어렵사리 꼽은 첫 죄악은 다름 아닌 그것이다. 그녀의 이름, 그녀를 기리던 것, 떠올릴 수 있는 것을 목숨과 맞바꾸어 팔았다고. 그 이후는 기억조차 흐리나 긴 고해 후 작별을 고하듯 장식벽에 잠시 얹혔던 가벼운 감각만이 선연했다. 그리운 사람의 흔적을 닮은 기척에 미하일은 결국 성당을 나오던 첫 발걸음 위로 젖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멈춰선 자리가 허전한 나머지 다시 기적을 바랐다. 이뤄줄 사람은 없었으나 간절했다.

신을 마주한 심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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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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