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현이에게
휴대 전화가 울렸다. 전화 올 곳이 보험권유나 설문조사 같은 것 밖에 없을텐데, 아니면 일 시키려고 하나...... 세나는 시큰둥하게 휴대폰을 뒤집어 보았다. 뜻밖에도 휴대폰에 뜬 이름은 반가운 것이었다. 드물고 소중한 친구의 연락. 세나는 싱긋 웃었다.
“지현!”
세나는 광장에서 손을 크게 흔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갔으나 그 사이에 붉은 머리의 지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지현이 듣고 돌아봤다.
“오랜만이야, 세나.”
세나가 다가가보았으나 지현이 성큼성큼 인파를 헤치고 오는게 빨랐다. 세나는 냉큼 포기하고 자리에서 기다렸다. 얼굴을 마주 볼 거리가 되자 서로 웃었다.
“진짜 오랜만이지. 저번 만남 이후로 다섯 달 만이더라.”
“다섯달이나 되었어? 돌아다니다 보면 날짜를 세기가 어려워서.”
“괜찮아, 괜찮아. 이번은 그래도 빠른 편이더라. 다른 이야기는 천천히 하고, 추운데 카페로 들어가서 할까?”
“춥던가?”
사실 그렇게 추운 날은 아니었다. 이른 봄이었는데 조금 서늘한 날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따뜻한 실내에 있던 세나는 추웠고, 얇은 코트를 조금 끌어당기며 팔을 쓸어내렸다. 지현은 기온을 가늠해보는 모양새였다. 세나는 생각했다. 지현은 날씨를 예측 할 수 없는 갖가지 차원들 돌아다니니, 자신보다는 기온에 영향을 덜 받겠지. 어쨌든 곧 씩 웃으며 답이 돌아왔다.
“추우면 들어가자. 어디로 들어갈까?”
“내가 괜찮은 곳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나도 안 돌아다녀서 말이야.”
사실 세나도 외출은 오랜만이었다. 돌아다니는 곳을 기껏해야 집 주변의 편의점이나 피시방이었다. 세나가 고민하는 사이 지현도 둘러보다가 말했다.
“거리가 많이 변했네.”
“그렇던가? 나는 잘 모르겠는데.”
“응, 올 때 마다 달라지는 것 같아.”
그래도 세나 눈에는 제법 익어있었다. 찬찬히 훑어보다가 새로 생긴 카페를 하나 짚어낼 수는 있을 정도로.
“야, 저기 들어가보자! 새로 생긴 브랜드야.”
“오, 그래? 어떤 카페인데?”
“글쎄다. 평은 괜찮던데 나도 한번도 안 와봤어. 음, 라떼가 유명하댔어.”
세나는 유리 문을 밀었다.
“너도 온김에 나도 겸사겸사 들려보지.”
둘은 카페에서 음료를 시키고 지현은 세나의 근황을 물었다. 세나는 그간 있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세나의 일과는 사실 대부분 비슷했지만 다섯달이나 쌓이자 그래도 전해줄 재미난 것이 재법 쌓여있었다. 지현은 때로는 맞장구를 쳤고, 때로는 농담을 걸었다.
“애들이 능력 다루다가 학교 기물이 막 망가지고 그러더라. 시몬한테 제 구매 신청을 얼마나 했는지.”
“아이고, 저런. 근데 혹시 세나 네가 한것도 섞여 있는 거 아니야?”
“야야, 나는 요즘 능력 잘 다룬다고. ......사실 내가 실험한 것도 조금은 섞여 있지만.”
“아니, 세나 선생님?”
“시몬에게는 비밀이다. 나 우리 우정 믿어도 되지?”
“그럼, 그럼. 당연하지.”
자신의 일과 섞여서 이쪽 세계의 일도 전해졌다. 그럴때면 지현이는 이쪽 세계에 대해서 회상하는 표정이 되었다.
세나는 자신의 이야기를 끝내고 지현의 이야기를 재촉했다. 지현은 제가 다닌 차원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지현의 이야기에는 위기도 목숨이 위험할 뻔한 순간도 태연하게 흘러갔다. 화자가 그리 느꼈고 그리 설명하는 탓이었다. 세나는 지현이 설명하는 수십번의 위기마다 기겁하였으나 지현은 괜찮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니 잠깐만. 지현아?”
“음, 그 다음은 잘 기억이 안 나네. 어쨌든 때려눕치고, 곧장 차원의 균열로 달려들었어. 그렇게 빠져나왔고.”
“아니, 그렇지만.”
“괜찮아, 지금 멀쩡하게 여기 있잖아?”
“애초에 그런 상황이 생겼다는게 문제지. 물론 너는 빠져나올 만한 실력이 있지만......”
지현은 흐리게 웃었다. 세나는 끙 소리를 내었다.
세나는 위험을 싫어했다. 그렇기에 세나는 상당한 안전과 많은 확실함이 보장된 이 세계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지현은 떠났다.
이유는 정확히는 모른다. 캐물어보기 민감한 주제라는 것 정도는 세나도 알았다. 그저 만연하게 추측하건데 그간 떠맡았던 일이 무거워서, 이곳에서 겪은 일들이 너무 힘들었어서, 버티다가 닳고 지치게 되어서, 그저 떠도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세나가 보는 지현은 옛날 그대로의 모습이다. 항상 유쾌하고 기운차 보인다. 그러나 지현의 모습은 그것이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세나는 추측했다. 약간의 위화감, 가끔 보이는 순간의 가라앉음, 갖가지 차원이 이야기에서 유추해 볼 수 있는 황폐한 시선.
지현아, 괜찮아?
“왜 그래?”
지현이가 의아하게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세나는 묻는 대신 웃어버렸다. 지현과 함께.
“어? 나 잠깐 전화가 왔네. 잠시만.”
세나의 언니었다. 세나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블루투스 이어폰을 꺼내 착용하였다. 용건은 간단하게 끝났고 세나는 연락을 끊었다. 지현은 그 모습을 보다가 물었다.
“귀에 그건 뭐야?”
“아, 이거도 최근에 생긴 거지? 요즘은 이어폰에 줄을 안 달고 출시되어서.”
“엑, 정말? 줄 없이 어떻게 들고 다녀?”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런데도 사람들이 많이 들고 다니더라. 나도 생각보다 편하고.”
“어떻게 하는 건데?”
세나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내주었다. 그리고 귀를 가리켰다. 지현은 받아들어서 귓가에 가져갔다.
“그냥 원래 이어폰 끼듯이 끼면 돼. 고무로 된 부분을 안쪽으로. 어, 그렇게.”
“오, 신기하네.”
“음악도 들어볼래?”
세나는 페어링이 되어있는 제 휴대폰으로 유투브를 들어서 음악을 재생했다. 이어폰에서 요즘 즐겨듣는 게임 bgm이 흘러나왔다.
“생각보다 잘 들리지? 난 선이 걸리지도 않아서 좋더라.”
“그러게 말이야. 그건 마음에 든다. 확실히 편하겠네.”
하나의 음악이 끝나고 바로 다음 곡이 재생되었다. 세나는 힐끔 앨범 커버를 보았다.
“이런 잘못 걸렸다. 이거 프랑스어네.”
“세나 너 요즘은 프랑스 노래도 들어?”
“아니 어쩌다가 유투브 알고리즘으로 걸렸는데..... 잠깐만, 다른 곡으로 넘길게.”
“어? 알아듣겠는데?”
“지현이 너, 프랑스 다녀왔어?...... 가 아니고 번역해주는 크리스탈 있다고 했지.”
“아, 그거구나. 그게 이렇게도 적용이 될 줄 몰랐는데.”
세나는 깨달음은 얻었으나 슬슬 불안하게 유투브 화면을 보았다. 세나가 기억하기로는 가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나가 보는 휴대폰 액정으로는 한글자막이, 지현이가 낀 이어폰으로는 번역된 가사가 흘러나왔다.
인생은 완벽하지 않아
그건 내가 선택한 게 아니야
어느 날 사람들이 내게 말했어 "날아 가, 어서!"
아스팔트 위로 넘어지겠지만
곧 익숙해질 거야
깃털 몇 개를 잃어버리겠지만
그게 인생이야
세나는 아주 오래부터 속이 꼬여 있었다. 실패나 고난따위가 성장을 위한 발판이 되리라는 말은 믿지 않았다. 그건 그저 손실이었다. 인생이라고 퉁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이 깎여나갔다. 세나보다도 지현이에게 그래보였다. 세나는 자신만을 챙겼지만 지현이에게는 다른 것도 있었으니까.
인생은 지키지 않을 약속들을 하고
때때로 감쪽같은 속임수를 부리기도 해
너는 인생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거야
그건 '아마도'로 가득차 있거든
그러나 인생은 결국 너를 안아주며 끝나
..... 게다가 인생이라고 믿었던 것도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사실 누군가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있었던 변덕들이 사실 누군가의 심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한동안 세나는 화가 났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언젠가는 괜찮게 끝난다고? 어떻게 확신해? 조물주가 마지막 아량이라도 내려준대?
어느 날은 아름답기도 하고
또 그렇지 않은 날도 있어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해야 해
그러나 네가 망설여진다면
사랑이 너를 피하기 전에 도망쳐
세나는 지현이를 힐끔 보았다. 표정을 알 수가 없었다. 넘길지 말지 고민되었다. 혼자 들을때는 그러려니 싶었는데 다른 사람이랑 듣게 되니 계속 신경 쓰였다. 그렇지만 ......
Va va vis va va
가, 어서 가, 그리고 살아
Mon ami
나의 친구
N'oublis pas de sourire en chemin
가는 길에 미소 짓는 것을 잊지 마
Va va vis va va
가, 가, 그리고 살아
Mon ami
나의 친구
이 말은 전해주고 싶었다. 가, 원하는 대로 가. 그리고 살아, 지현아. 꼭 미소지을 필요는 없어. 하지만 네가 여기서 옛날 같이 즐거웠다면, 그래서 웃음이 나온다면 웃자. 나도 같이 웃을게. 여기에서 언제나 그대로 있다가 종종 맞으러 나갈게.
“오늘 진짜 재미있었어.”
떠날 시간이었다. 벌써 어두워지기도 했지만 그것이 떠나는 이유의 전부가 아니었다. 지현이는 차원의 균열을 보며 중얼거렸다.
“원래는 좀 더 있을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되었네.”
“어쩔 수 없잖아. 저거 드물다면서.”
가로등 아래 차원의 균열이 세나의 눈에도 보였다. 세나는 건드리지 않고 지나가지만 지현은 저것을 통해 차원을 넘나든다고 들었다. 지현은 미안한 표정을 보였고 세나는 키득거렸다.
“그렇다면 다음번에는 좀 더 오래 머물다 갈게.”
“좋아, 다음에는 게임하다 가는 거 어때? 너 오기 전까지 콘솔 게임 하나가 발매될 것 같아.”
“세나야, 게임으로 붙으면 나 계속 지는거 알지?”
“걱정하지마. 그거 협동게임이야.”
“너 그렇게 말해놓고 나 공격하는 거 아니지?”
“아, 정말이라니까.”
“그렇다면 다음에는 부탁해.”
“그래, 다음에 꼭 보자.”
지현이는 균열로 걸어들어갔다. 세나는 천천히 손을 흔들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균열 사이로 사라지기 전에 문득 외쳤다.
“Va va vis va va Mon ami”
지현에게 어떻게 들렸을지 궁금했다. 과연 그 나라 말을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 주워들은 것만 뱉는게 제대로 해석이 될까? 물어볼 지현이는 이미 사라졌다. 세나는 미련이 좀 남았지만 곧 돌아섰다. 뜻은 전해졌으리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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