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ciadust_Heilsion

맞잡은 기원에게,

첫 매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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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썩, 하고 쓰러지며 닿은 모래의 감각이 그의 뺨을 스치던 시간이었다. 작열하는 사막의 열기를 빠르게 뱉어내는 어두운 하늘이 찾아올 즈음, 그는 이대로 생을 마감하게 될지도 모름을 직감했다. 도망치듯 떠나온 터전에서 자신이 마지막으로 들은 몇몇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 자질이 곡식의 낱알만큼도 없지, 아무리 좋은 토양에서 자라게 애를 써도, 역시 태생이...”

“제 어미와 함께 찾아왔을 때, 자리 하나를 내어주고 내쳤어야 했지, 작은 주인님도 참, 그리 마음이 약하셔야. 어르신처럼 냉철하지 않아 늘 그르친 판단을 하곤 했는데, 뿌리부터 어긋난 것이니...”

아주 어린 시절부터 저를 바라본 몇 개의 눈들이 저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는 느낌이 듦과 동시에, 휘 하고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의 소리가 그에게 살아있어야 함을 재촉했다. 상관없어, 어차피 창고 한구석에 박혀있어야만 하는 운명인 것을. 그렇게 제 처지를 비웃듯, 하- 하는 첫 숨을 뱉어내고 그는 자세를 바꾸어 밤하늘을 이불 삼아 누웠다. 아주 예전에, 어떤 늙은 점쟁이가 -오래된 로브를 둘러매고 자신을 늙은 점쟁이라 주장하던 앳된 목소리를 한 이였다. 그의 옆에는 거대한 까마귀와 매가 점쟁이를 무리의 대장 내지는 어미라 여기고 따르는 듯하였다. 괄괄하고 억센 목소리로 자신을 가리키며 이죽거리던 그 모습이 인상 깊었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저에게 장난삼아 말하던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어느 멀디먼 대륙, 그 대륙에 사는 이들은 모든 존재가 스스로의 상념들에 메여 고통받고 있다. 라는 것을 화두로, 끊임없이 그 상념에 대하여 고민하는 몇몇 학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어째서 모든 존재가 어째서 이 삶이라는 거대한 흐름 가운데 고통받는지를 끊임없이 생각했다. 그러다 이들 중 몇몇은 이내 현자로서의 길을 걸어갔고, 몇몇 이들은 왕에게 반기를 들다 죽었더랬지. 라며 킬킬대고 쉭쉭 거리는 포식자와도 같은 그 목소리가 그 시절의 그에게는 꽤 소름 끼쳤을 것이다.

 

“조심하는 게 좋아, 꼬마야. 탐욕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거대한 심연과도 같아서 네 목이 영원토록 마르게 할 것이고, 눈에 보이는 것들을 먹어 치우다가 마침내, 모든 것을 빼앗아서라도 가질 것이라는 속삭임을 내뱉는 괴물을 만들지. 그리고 네가 틈을 보인 그 순간! 괴물이 너를 잡아먹고 네 배를 터뜨릴 거야.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말이야. 쾅! 하고! 하하하!!!”

겁에 질려 움츠러든 이를 보고 점쟁이는 마침내 조용해지다가, 이내 무어라 중얼거리려는 듯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차분한, 마치 성역에 다다르는 이들을 환영하는 종의 소리와도 같은. 고요한 울림이었다.

“그러니 아이야, 끊임없이 생각하렴. 절대로 그 괴물이 크기를 키우게 해서도, 네 그림자가 되어서도 안 된다. 끊임없이 옳음에 대해 고민하고, 네 어둠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이...”

 

헉, 하는 소리와 함께 숨이 터져 나왔다. 순간의 꿈과도 같은 찰나였을까. 멍하면서도 몽롱한 잠을 쫓아내려 눈을 두어 번 끔벅였을 때, 저 너머에서 알 수 없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휘- 하는 휘파람 소리와 몇몇 웅성거림이 만들어내는 무언가의 가락과도 같았을까. 달각거리는 소리와 무언가가 낮게 퉁겨지다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부딪힘. 몇몇 금속이 부딪치는 쩔그렁소리가 서서히 가까워짐에, 사막의 밤을 견디려는 여행자들의 짐을 빼앗으려는 무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제 짐을 챙기며 일어서려 했을까.

 

“거기, 사막에 엎어져 있던 나으리! 우리는 도적도 아니고 예의도 모르는 불한당들이 아니니 서 주시는 게 서로서로 좋은 선택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하는데! 무작정 도망치다 죽어서 우리를 평생 원망하는 건 사양이라서~”

“……”

“사막은 사방이 트여있기도 해서, 나으리를 못 봤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말아! 그리고 이 시기의 사막은 북부의 바람이 넘어오는 시기라, 잘못하다간 얼어버릴걸? 음, 적어도 우리가 상인의 땅으로 다다르기는 하니. 선심 써서, 근처까지는 데려다줄까, 싶은데 어때? 나으리같은 사람은 평생에 한 번 받을까 말까 한 나의 선의라고. 하하.”

경계를 하며 제 허리춤의 검을 들려 했던 그는 이 사막에서 도망칠 방도가 없다는 것을 진즉에 깨달았을 것이다. 단신으로 이곳에 다다른 저보다는 사막의 날씨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자신에게 호의를 주는 것에 생색을 내는 것 같은 이의 말을 따르는 것이 생존에는 도움을 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어. 살기 위해서야.‘ 라는 중얼거리곤, 그는 낙타에게서 내려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이를 향한 경계를 풀어내었다.

“흠, 나름의 책략을 낸 것이겠지? 행색을 보아하니… 어느 있는 집안의 자제분 같으신데, 혹시 나도 모르는 유행인가. 이렇게 난 평범한 주민입니다. 라고 티 내려 하지만 귀티는 일부러 다 드러내는 거만하고 방만한...”

“도와주시려는 건 감사하지만, 처음 보는 상대에게 말하는 단어 치곤 상당히 무례…”

“무뢰배 같다고?”

“무례한 것 같습니다.”

가만 눈을 꿈벅이는 상대를 보고, 기가 찬다는 양 표정을 구기는 그에게, 즐겁다는 듯 깔깔거리며 웃는 사람이었다. 사막의 모래바람을 견디기 위한 로브 사이로 긴 머리가 보이다가, 눈에 띄는 붉음에 시선이 머물렀다. - 몇몇 이야기들 속에서 정착된, 그리고 관념이 되어버린 배신자의 상징이라 불리는 붉음이었다. 그는 이런 이야기들을 듣고 자라온 탓인지, 아니면 사람들 사이에서 떠도는 말들 때문인지, 저 붉은 머리를 한 이가 저를 배신하고 사막의 한 가운데로 던져버릴 것 같은 상상에 잡혀버렸다. 그러다 짝, 하는 소리가 그 상상 속의 무대를 깨어내는 듯한 소리가 그의 눈앞에서 벌어졌다.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드니, 자신보다 한 뼘쯤은 더 큰 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이내 그런 걱정은 말라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으리, 적어도 내가 사막 한 가운데로 던져버릴 거라는 생각은 여기에다 버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그런데... 내가 그런다면 저 사람들이 난리가 나서 너를 도와주라고 할 게 뻔하고…, 그리고 그걸 무시하고 나는 나쁜 대장이 되어 악평받는 와중에 나으리가 사막의 망령이 되어서 길가를 지나는 모든 붉은 머리를 잡아먹어 버리는 건 꽤나 끔찍한 결말이라고. 음, 아니면 배신자를 잡아먹는 존재라고 추대받으려나? 하하… 사막의 한가운데로 던져버리면 나으리께서 망령이 될지, 궁금하기는 하니. 일단 데려가기는 해 줄게. 무례한 무뢰배의 대장님께서, 선처를 주시겠다. 이겁니다.”

“선처를 주는 이유가… 참 이상하네요.”

그런가요? 라는 농조가 가득한 목소리를 내며 넉살 좋은 자세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따라오라는 양 고갯짓했다. 그가 말한 무리의 것으로 보이는 낙타들이 서서 낯선 존재를 확인하려는 양 푸륵거리는 소리를 내는 듯하기도 하였다.

 

“쟤들 성질 건드리지는 마, 물어뜯기거나 침을 맞으면 웃음거리가 되기도 한데… 너를 어디에다가 둬야 너도 안심하고 나도 망령이 된 네 저주를 받지 않으려나.”

푸륵거리는 낙타들이 저를 어느 정도 환영하는 느낌이 들어 안심하려는 찰나를 깨는 소리였다. 무슨 소리냐며 성을 내려는 찰나 즈음, 붉음이 흔들리다 이내 자신에게로 다가왔다.

 

“참, 잊어버릴 뻔해서 말이야, 난 헬리오라고 해. 삿대질 받으며 너, 라던가 아니면 용병 자식, 이렇게 불리는 것도 영 그럴 것 같아서 아니지…나으리께선 당신이라고 부르려나. 그래도 난 이름으로 불리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해서 말이지. 워낙에 멀쩡하게 이름으로 불린 기억이 적어서. ”

“용병이셨나요.”

“용병이긴 하지. 지금은 어느 정도의 구색은 갖춘 장사꾼들의 대장 노릇을 하고 있지만. 음… 생각해보니 나도 삿대질 받고 내 이름을 제대로 불리지 못하는 게 꽤 열받긴 했지. 나으리가 뭔 일로 이 사막에 오셨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계급이며 지위 다 뗍시다. 불릴 이름이나 하나 주는 게 어때? 여기선 지위가 드러나는 휘황찬란한 이름은 다 쓸모없고, 사막에서 조난당하면 다 죽는 마당이니. 불릴 이름이나 떠오르는 단어 같은 걸로 나으리를 불러드립죠. 뭐, 사막에서 벗어나면 벗어나는 대로 다시 원래 이름으로 돌아가는 거지. 뭐야, 그 표정. 엄청 얼떨떨한 낯으로 빤히 바라보는 거. 신경이라도 건드렸나? 아니면 용병이 이름을 달라고 해서 화가 나셨나.”

“……”

‘아이야, 잊지 말아야 하는 건 모든 존재에게는 끝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란다. 다다르는 것이 고통뿐일지라도, 끊임없이 고뇌하고 생각하며 자신을 알아가야 한단다. 삶이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아가는 긴 여정이고, 너는 그 가운데에 선 여행자라고 생각하렴. 우리는 인생의 순례자이고, 거대한 평원을 걸어가는 존재란다. 아직 어린 너는 이 뜻을 모르겠지. 언젠가 알 것이야, 평원의 지평선이 너를 이끌 때. 그 첫발을 내딛는 순간. 순례자가 되는 것이지.’

 

언젠가 마주했던 점쟁이의 말이 그의 귓가를 맴돌았다. 추억의 편린인지, 아니면 죽기 직전의 존재가 마주한다는 주마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쩌면 자신이 서 있는 이 거대한 사막이 평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을 알 수 없는 모래와 자갈만이 있는 터, 그러나 이 또한 땅이었으리라. 탐욕에 의해 물이 말라붙어버린 평원이었을지도, 아니면 원래부터 사막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는 그 점쟁이의 말에서 말한 그 이끌림이 이곳일지도 모른다고, 그리 생각했다. 시간은 찰나였고. 오랜 생각은 그리 긴 시간을 잡아먹지 않았다. 그저 헬리오라고 자신을 칭한 용병이 손가락을 튕기며 딱, 딱, 하고 자신을 몽상에서 깨울 뿐이었을 뿐.

 

“이봐, 사막에서 정신이라도 잃었어?”

“블레어라고 불러, 그리고... 네 말대로 여기서는 내가 존칭을 쓰기에 의미 없는 장소 같기도 하고…, 내가 아주... 아주 가끔 존댓말을 써도 놀라지만은 말아. 오랜 시간을 이런 말을 쓰도록 눈총받으니 어색해서 그래.”

잠깐 그는 머뭇거리다 제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자는 의미에 가까웠지만, 저 상대에게는 낯설지도 모르는 존중이 묻어나는 움직임이었다. 고개는 상대를 바라보고 있음에도 머뭇대는 시선에 헬리오는 우스운 양 하, 하는 웃음을 뱉곤 상대의 손을 맞잡아주었다. 그래, 잠시동안 잘 지내보자고. 라는 장난스러운 어조가 빠진 목소리였다. 그리 높지도 또 낮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음. 그러고 보니… 처음 봤을 땐 뭔 검디검은 들짐승인 줄 알았건만. 허우대가 꽤 멀쩡한 도련님이었네, 사막의 열기를 있는 대로 다 드셨을 것 같던데, 일단 임시로라도 내 낙타에 올라타 주는 걸 권유할게. 저기 너를 빤히 보는 저 낙타, 워낙 성질이 이상해서 조금 멀끔하다 싶은 사람이 보이면 물려고 하더라고. 이전 주인이 버렸다고 하는 걸 데려온 거지만… 멀끔하고 건장한 사내가 괴롭히기라도 했는지, 사내로 보이는 사람들에게만 성질을 내지를 않나 침을 뱉지 않나… 참, 전 주인이 나타난다면 너 대신 이 사막의 한 가운데로 내던져주고 싶네. 참… 아까 봤다시피 내 머리색이 붉은데다, 여행자들이 싫어하는 불길한 붉은 머리의 여인이니. 사람이 많은 곳에서 내가 머리색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건, 알아두길 바라.

마지막의 중요한 말을 위해 긴 서두를 말한 것 같은 어투였지만, 저 너머에서 몇 사람들이 한 낙타를 진정시키듯 쓰다듬는 모습을 보고서야 그 말이 농담이 아님을 실감한 블레어였다. 어서 낙타에 타라는 눈짓에, 블레어는 말을 타는 방식처럼 조심히 등자에 발을 딛고 올라탔고, 뒤이어 헬리오가 그의 뒤편에 앉아 늘어진 고삐를 잡아들었다. 그리고 제가 한 부분을 잡고 남은 부분을 그가 잡게 둔 뒤. 그는 긴 휘파람을 불며 대열을 정리했다.

“조난자를 구출했으니! 이제 다시 나아간다!”

블레어는 자신의 뒤에서 외치는 헬리오의 말에, 왠지모를 이끌림이 느껴졌다. 이 사막에서의 여정을 시작으로, 자신조차 모를 인생의 긴 순례를 떠나게 될 것임에 대한 기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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