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o̴̖̓f̸̢̤̰̺͒̎ ̵̠̒E̸͉̞̲̦͌ï̵̭̰̼̩̃͗ḇ̸̠͂͗̌o̴͎̗͈͂ņ̶͉̎̾̉́
건물에 남아있던 신도들과 간부들을 죄다 대피시킨 이후, 유진은 유준과 함께 장렬교 본부로 복귀했다. 1층은 대피한 사람들로 번잡스러웠다. 남들의 눈을 피해 엘리베이터 옆의 계단으로 향하는 건 간단했다. 이 계단을 오르면 곧장 장렬교 본부의 후문으로 진입할 수 있다.
후문을 열고 들어간 두 사람을 반기는 건 당연하게도 매캐한 연기였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빠짐없이 모두 1층으로 내려간 모양이다.
"간부 구역에 들어가는 거죠?"
유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간을 찡그린 유준은 자신의 안대로 코와 입을 가리고 있다. 신도들의 눈에는 아주 불경한 짓으로 비치리라.
주머니에 있는 돌이 자꾸만 허벅지를 찌른다. 행동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면서, 유진은 벽을 더듬으며 현재의 위치를 파악했다. 아마 예배실 근처의 벽인듯하다. 이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통로를 일직선으로 따라가면 간부 구역이 나온다.
유진이 앞장을 섰다. 유준은 조용히 그를 뒤따른다. 대피하기 이전보다는 주변 사물의 형태를 알아보기 쉽다. 연기가 다소 개인 느낌이다. 유진은 그 점이 이상했다. 화재로 인한 연기라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짙어져야 하지 않나.
예배실 문 근처에 둥그런 우산꽂이가 있었다. 주인이 미처 찾아가지 못한 우산들이 여러 개 꽂혀 있다. 자신과 유준의 안전을 걱정하던 은사의 얼굴이 떠올라, 유진은 둘둘 말린 장우산을 하나 꺼내든다. 손잡이가 손에 꼭 맞는다. 죽도보다는 못하지만 최소한의 공격과 방어는 할 수 있으리라.
예배실의 귀퉁이에서 몸을 돌려 통로를 나아간다. 체감 상 오 미터 정도를 직진한 지점에서, 돌연 버스럭대는 인기척이 들렸다. 유진은 조심스레 발을 멈춰세운다. 바로 뒤의 유준 역시 멈춘다.
통로 벽에 붙어 몇 걸음을 더 걸었다. 살금살금 걸어 발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벽의 모서리가 만져졌다. 통로가 끝났다. 유진은 아까와 같이 고개를 빼꼼 내밀어 전방의 상황을 살핀다.
연기 너머로 어렴풋하게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키는 유진보다 조금 작을까. 여자라면 크고 남자라면 작은 정도의 신장이다. 몸선을 보니 높은 확률로 남자이리라.
오른쪽 벽에 붙어 손을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 딱 문이 있을 법한 위치다. 유진은 그 방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 애당초 이곳은 간부 구역이니 당연하다.
십 초 간 상대의 행동을 주시했다. 그의 움직임에 맞춰 자물쇠가 절걱댄다. 오른쪽 방의 문을 따고 있는 건가? 저 문은 잠겨있었나.
대처를 고민하고 있으니 뒤에서 팔이 쑥 튀어나왔다. 손에 휴대전화를 들고 있다. 빛을 내는 액정에 쓰여진 간결한 문장. 문이 열리면 우리가 대신 들어갑시다.
대신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잠시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실루엣만 보이는 상대방이 하고 있는 일 역시 의미를 알 수 없긴 매한가지다. 유진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두 손으로 장우산의 손잡이를 꽉 쥔다.
찰칵, 하고 자물쇠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먼저 움직인 사람은 의외로 유준이었다. 넓은 걸음으로 성큼성큼 상대의 뒤로 다가가더니, 냅다 팔을 뻗는다. 목덜미를 향해 손을 쫙 펼친다.
주문이라도 걸 셈인가? 유준이 양 교수님한테서 뭔가 배우고 있는 건 확실한데.
조금 기대를 걸고 한참 어린 후배를 지켜보던 유진은, 다음 순간 단숨에 튀어나갔다.
유준의 기척을 느낀 상대가, 순식간에 몸을 돌려 허리를 굽히더니 제대로 된 로우킥을 날린 것이다. 정강이를 얻어맞은 유준은 비틀거리며 뒤로 몇 걸음을 물러난다. 그 사이 상대는 문과 유준의 사이로 쏜살같이 빠져나와선, 후방에서의 공격을 노리기에.
유진은 그의 뒤에서 있는 힘껏 장우산을 휘둘렀다. 진검보다도 죽도보다도 휘두르는 맛이 좋지 못한 무기지만, 그래도 이 정도의 타격이 들어간다면 분명 제압할 수 있으리라.
뻑, 하고 묵직한 타격음이 났다. 오른쪽 어깨를 얻어맞은 남자는 주저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고 몸체를 회전한다. 놀라울 정도로 신속한 움직임이다. 유진은 당황한 티를 내지 않고, 다시, 상대의 오른쪽 어깨를 노린다.
어깨보단 손목의 스냅으로. 침착하게 숨을 들이마시고. 검 끝에 기를 불어넣듯이 하여......
우산대가 공기를 갈랐다. 공격에 따른 연기의 움직임이 눈으로도 보인다.
상대는 발목을 틀듯이 하여 가볍게 유진의 공격을 피한다. 능숙한 회피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보통내기는 아니군.
연기는 여전히 시야에 방해가 된다.
유진은 팔에 강하게 힘을 실어 하강하던 우산을 멈춰세운다. 그 후 곧장 남자를 향해 팔을 뻗는다. 검이라기보단 레이피어를 다루는 듯한 동작이다.
지금은 회피가 한 템포 늦었다. 남자의 옆구리에 강하게 스치는 우산.
유진이 다음 동작을 준비하기도 전에, 남자는 순간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곧바로 이쪽을 향해 온다. 무시무시한 속도다. 뛰쳐올랐으니 당연하다.
피할 수 없다. 차라리 반격해야 한다.
우산에서 손을 떼려 했지만 허사였다.
턱에 어퍼컷이 제대로 들어왔다. 뇌가 흔들리는 듯한, 괴악한 어지럼증이 정신을 덮쳤다. 턱뼈가 나갈 것 같은 고통 역시 신경 전역으로 퍼져나간다.
눈앞이 아찔하다. 머리가 웅웅 울린다. 충격으로 반고리관까지 맛이 갔는지 어질어질하다. 입 안에선 비린 맛이 난다. 유진은 몇 번을 비틀거리다가, 겨우겨우 우산으로 바닥을 짚고 서 있었다.
이런, 내가 쓰러지면 유준이는......
혀에 고인 핏물을 삼키며 정신을 차리려 애쓰고 있었는데.
누군가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유진은 본능적으로 경계 태세를 취한다.
이미 늦었나......
살짝 체념하며 우산을 죽도 잡듯이 들어올린다. 아직 눈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상대의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우산 손잡이를 꽉 잡고 기다린다.
사정거리에 들어올 때까지......
"선배."
유진은 흠칫 놀라 몸을 떤다. 장우산의 캡이 바닥에 미끌려 기묘한 소리를 냈다.
"아, 씨. 아파...... 재웠어요. 들어가요 얼른."
유준은 한쪽 다리를 절며 유진의 앞에 나타났다. 한순간 깊은 안도감이 들어 주저앉을 뻔했지만, 우산에 힘을 실어 바닥을 짚는 것으로 대신했다.
"괜찮아?"
"금 간 거 같은데? 선배 탓이에요."
유준은 그런 말을 하더니 몸을 홱 돌려 아까의 문으로 향했다. 걸음걸이가 다소 멀쩡해졌다. 아무래도 큰 부상은 아닌 모양이다. 유진은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을 몇 번 비비다가 후배를 뒤따랐다.
주머니에서 부적을 꺼내 문에 붙인다. 통행을 막는 부적이다. 이걸로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이 문이 보이지 않으리라. 하지만 기본적인 마법을 응용한 아이템이라 타인의 인지 조작 및 개조는 불가능하다. 단순히 '문의 존재'만을 깨닫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곳에 방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에게는 문이 사라진 현실이 무척이나 이상하게 비칠 것이므로, 되도록 장렬교의 사람들이 오기 전에 부적을 회수하고 방을 나가야만 한다.
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조명은 켜져 있다. 바닥에 깔린 기하학적인 문양의 러그와, 맞은 편 벽에 걸린 묘한 그림의 족자를 제외하면 눈에 띄는 물품은 없다. 인테리어가 어두운 편이라 나름 엄숙한 분위기를 풍긴다.
방 안 쪽에 발이 내려온 통로가 하나 있었다. 그 안에서도 어스름한 불빛이 새어나온다.
통로 건너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앞서있던 유준은 자연스럽게 선배의 뒤로 자리를 옮긴다.
머리카락으로 가려진 왼눈 너머로 무언가 움직였다. 유진은 최대한 그것에 신경쓰지 않도록 애쓴다. 여기까지 와서 빙의라도 당한다면 상당히 골치아파진다. 혼자 온 것이 아니니 더욱 그러하다.
귓가에서 히이, 히이, 하는 기분 나쁜 숨소리가 들린다.
처음 들어보는 건 아니었다.
제 옆엔 아무도 없으니 분명 잡귀의 소행일 것이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는 건 광령狂靈이라는 것이고.
나는 과연 미치지 않고 죽을 수 있을까......
장우산 손잡이를 꽉 쥔다. 발소리를 죽여 통로 쪽으로 이동한다. 바로 뒤에서 유준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속이 메슥거렸다. 좋지 않은 징후다.
통로로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이상하게도 정신이 부유한다. 억지로 떠오른다. 내가 아닌 것이 몸을 비집고 들어온다. 그릇은 하나뿐인데. 하나뿐이니까 소중하게 다뤄야 할 것을. 소중하게 다루지 않아 놓고 남의 것을 빼앗으려 드는. 그런, 질 나쁜 망령들이.
걸음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이 정도면 유준도 이변을 눈치챘으리라.
길게 내려온 발이 코앞에 있다. 줄에 꿰인 다양한 모양의 다면체들. 천장의 조명빛을 받아 수많은 색채로 번쩍인다. 아름다운 광경이다. 사면체였던 것이 부드럽게 모양을 바꿔나간다. 중간 형태를 거쳐 비스듬하게 선 육면체가 되었다가. 이제는 면의 수를 늘려 십이면체가 되었다가. 별안간 면에서 뿔이 튀어나와 꼭 하늘의 별과 같은 모양을 만든다. 각각의 형태는 불과 삼 초도 유지되지 않는다 성질 급하게 자꾸만 모양을 바꿔댄다 육면체 안의 육면체와 그 옆의 육면체 그리고 맞닿은 육면체 이어진 육면체가 빙글빙글
"선배?"
베일을 찢는 자를 바라보는 것은 곧 광기를 아는 것이다
우리의 눈은 그 위엄을 보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나는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았다
구체 막대 원통형의 수정 금속 살 같은 고무가 경이롭도록 복잡했다 한 가지로는 도저히 묘사할 수가 없다 계속 움직이고 요동치며 공중에서 앞뒤로 신축하고 점점 커져서 공간과 내 머리를 채웠기 때문이다 회색 형체들이 한데 모여서 서로 섞이며 물리학의 법칙을 거부하고 내 감각을 비웃었다 기계를 닮았으면서도 살아 있는 그 존재가 나를 보고
"아, 씨발 진짜......"
신성한 빛은 그 밝음으로 알 수 있다
한 줄기의 액체 불빛이 위에서 내려와 그 안에서 이 우주와 다른 우주들의 다채로운 경이가 보일 것이다 그 복된 빛 안으로 들어가면 비밀을 알게 될 것이다 별과 은하 사이의 지독한 깊이 그 안팎에 도사린 공포 진정한 우주의 질서
나는 틀리지 않았어 내가 찾던 우주는 이곳에 있어
진실의 선물은 이곳에
유진의 주머니에서 돌을 잽싸게 빼낸 유준은 그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척 봐도 상태가 좋지 못해 보였기 때문이다. 발이 내려온 통로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는가 싶더니 무언가 알아듣기 힘든 말을 중언부언 지껄이는 게 아닌가. 그가 상위 등급의 주문을 익혔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 없었으므로, 유준은 묘한 모양의 하얀 돌을 두 손으로 꼭 쥐고 교수를 기다리기나 했다.
십 몇 초가 지났을 때, 유진은 갑작스레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근처 벽으로 다가가선 이마를 쿵쿵 찧는 게 아닌가. 딱따구리가 제 집을 만드는 것 마냥, 일정한 간격으로 쿵, 쿵, 쿵. 손에 쥐고 있던 장우산은 이미 포근한 러그 위에 떨어뜨린지 오래다. 유준은 이후의 행동을 고민하다가 결국 그의 곁으로 발을 옮겼다.
여기까지가 이십 몇 초 경과한 시점.
지근거리까지 다가간 유준은 그의 행동을 관찰했다. 생각보다 강하게 머리를 처박고 있다. 아무리 봐도 연기로는 보이지 않는다. 애초에 그가 이런 시점에 이런 연기를 할 이유는 전무하다.
귓구멍에서 피가 흐르고 있다. 유준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일단 자해를 멈춰야 한다. 그럴 생각으로 벽과 이마 사이에 손을 끼워넣으니, 어깨에 누군가의 묵직한 손이 얹혔다.
양석민은 유준을 부드럽게 뒤로 밀어냈다. 마른 축에 속하는 유준은 그와 체급 차이가 상당히 난다.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니, 석민은 유준을 대신해 제자를 저지했다.
석민은 끊임없이 머리를 처박던 유진의 뒷덜미를 낚아채어 가볍게 바닥에 쓰러뜨렸다. 근력이 평균 이하의 이하에 가까운 유준은 시도도 하지 못할 방법이다. 조명 아래에서 본 선배의 모습은 생각보다 처참하여, 유준은 슬쩍 시선을 돌린다.
실핏줄이 터진 눈. 검붉은 피가 흐르는 콧구멍. 있는대로 씹어 찢어진 입술. 보편적으로 건강하다고 받아들여질 모습은 아니다. 석민은 그의 이마를 눌러 머리를 바닥에 고정시킨다. 충돌 자해를 막을 요량인 듯하다.
"오호, 광란에 빠진 영혼이 들어왔군. 그릇에도 영향이 갔어. 제령은 어렵지 않다만 유진이가 버텨줄지는 모르겠구나. 유준아. 흑련은 가지고 있니?"
"아, 예. 아까 조금 쓰긴 했는데. 남았을 겁니다."
유준은 주머니를 뒤져 작은 지퍼백을 꺼냈다. 검은 꿀 같은 것이 덩어리진 채 담겨있다.
이것은, 특수한 세계에서 채집할 수 있는 흑련이라는 꽃의 꿀이다. 물론 유준에게는 그런 세계를 헤집고 다닐 만한 능력이 아직 없었으므로, 석민이 이전 채집한 것을 받아 시험 삼아 사용해 보고 있을 뿐이다. 가공할 수 있다면 가공해 보라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이제 갓 신화적인 세계에 발을 딛은 초보자가 그런 걸 할 수 있을 리 없지 않나.
흑련 꽃의 꿀은 수면과 환각 효과를 보인다. 피부에 일정량이 닿기만 해도 금세 곯아떨어지게 된다. 유준은 이것을 이용해 아까의 격투가를 잠재웠다. 유준 역시 손으로 꿀을 만진 건 같지만, 장갑을 끼고 있기 때문에 효과가 없다.
석민도 손에 얇은 실크 장갑을 끼고 있다. 유준은 지퍼백을 열어 교수에게 건넨다.
검지와 중지로 적은 양을 퍼낸다. 점성이 높은 액체가 중력을 따라 느릿하게 교수의 손가락을 타고 내린다.
교수는 망설임 없이 두 손가락로 제자의 입술을 벌린다. 잇새를 비집고 손가락을 끝까지 집어넣는다. 괴로운 듯한 신음. 힘이 잔뜩 들어간 새빨간 입은 당장이라도 교수의 손가락을 씹어 삼킬 것만 같다.
핏줄이 선 목이 흠칫대며 떨린다. 목울대가 서너 번 움찔거린다. 이마를 눌려 살짝 당겨진 턱이 같은 빈도로 파들대는가 싶더니, 유진은 곧 의식을 잃었다. 긴장했던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유준의 눈으로도 보였다.
"흐음."
석민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다가, 이내 유진을 수습하고 일어섰다.
"피해가 심해. 정신에 데미지를 상당히 입었군. 당분간은 내가 보살펴야겠구나. 운이 이렇게 안 좋을 수가 있나."
벽가에 정자세로 누운 제자를 가만히 내려본다. 얼굴 여기저기에 피가 말라붙어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교수는 단출한 디자인의 숄더백을 하나 매고 있지만, 그 안에서 티슈 같은 것을 꺼낼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애당초 소지하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통로 안쪽을 아직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유준은 한 손으로 통로를 가리켰다. 수많은 다면체들이 꿰어져 있는 발 너머로 어슴푸레한 빛이 흘러나온다.
석민은 별 말 없이 앞장섰다. 그의 거대한 그림자에 가려져 뒤를 따르는 유준이다.
짧은 통로가 끝났다.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석민의 몸체로 시야가 가려져 앞에 무엇이 있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아아...... 가엾군."
쇠사슬이 절걱대는 소리가 났다.
석민은 유준이 방 안으로 들어오도록 몸을 비켜주었다.
살풍경한 방이었다. 러그와 족자가 있던 방보다는 밝은 축의 내장. 가구는 전무하다.
왼쪽 벽에 무언가를 짓이긴 듯한 핏자국이 선명하다. 유준의 눈높이보다 살짝 아래에 찍혀있다. 아까의 사달이 떠올라 기분이 나빠진다.
방 안에 존재하는 것이라곤, 쇠사슬에 매인 사람과, 그 옆에 선 남자. 총 두 명의 인간(으로 추정되는 생물들).
쇠사슬은 벽에 튀어나온 철제 고리에 매여있다. 사슬의 길이는 상당히 짧다. 고리 바로 아래에 몸을 겨우 눕힐 수 있는 정도다. 수갑으로 양손이 매여있으니 거동이 꽤 불편하리라.
머리카락이 길다. 해진 옷 소매로 튀어나온 팔은 앙상하다. 나이도 성별도 짐작할 수 없다.
그 옆에 선 남자는 텅 빈 눈으로 침입자 둘을 살피고 있다. 30대 초반 정도 되었을까.
석민은 남자를 바라본다. 그의 표정은 유준이 선 각도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금테 안경이 흐린 빛을 받아 찬란하게 반짝이는 모습이 보일 뿐이다.
"자네도 선물을 받았나?"
석민이 남자에게 물었다. 남자는 느리게 고개를 주억댄다. 새카맣게 침전된 눈동자는 생기를 찾을 생각을 않는다.
"오오, 잘도 살아있군 그래."
"우린 다들 살아있다...... 그 남자가...... 그 남자가 운이 나빴을...... 뿐이야."
"아니, 내가 봤을 땐 당신들의 운이 특출나게 좋았던 것 같은데."
교수는 왼쪽 벽의 혈흔을 흘긴다. 그 시선은 곧 하강해 쇠사슬에 매인 사람에게로 향하더니, 금세 남자에게로 돌아간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경찰이 오는 것 같더군. 아무리 현세의 기관이라고는 해도 자네는 아직 형체가 있어. 일부나마 현실에 귀속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야. 형체를 버리기라도 할 건가? 자네 혼자만 드림랜드로 도망갈 수는 없어. 아직 이게 살아있으니."
"당신은 왜 여기에 왔지?"
"자네가 질서를 어지럽혔기 때문에."
"쵸쵸가 할 말은 아니군."
"능력이 아주 없진 않구만. 내가 너무 과소평가 했나?"
석민의 옆에서 숨죽이고 상황을 지켜보던 유준은 그의 말씨가 순간 싸늘해진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다올로스는 다루기에 자료가 너무 부족했던 거로군."
"내가 떠나면 당신의 귀중한 연구 자료가 되는 건가?"
"아아, 그럼. 문헌에서만 봤던 걸 실제로 보니 두근거리는군. 연구는 어디까지 진행됐나?"
"연구 같은 걸 할 필요는 없어. 선물을 받으면 전부 해결되지. 그저, 나는, 그래...... 그릇이 아니었어...... 이치를 재현할 수 없었다......"
"흐음, 멍청하군. 제트기 바퀴에 매달려서 대륙을 건너는 꼴이야. 결국 독자적으로 이룬 건 아무 것도 없어. 그러니 재현할 수 없지."
석민은 제 숄더백을 뒤적였다. 연구실의 서랍에서 나는 것과 똑같은 소리가 나기에 유준은 기이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석민의 반응은 당연하게도 없었다.
교수는 십 초도 지나지 않아 검은색 비닐봉지를 꺼냈다. 편의점 어디서나 구할 수 있을 법한 평범한 봉지다. 뭐가 들어있는 건가 궁금해하고 있으니, 대뜸 입구를 바닥으로 하여 내용물을 탈탈 쏟아낸다.
설탕 같은 백색 가루가 바닥에 흩날렸다. 남자는 여전히 멍한 눈으로 석민의 행동을 관찰하고 있을 뿐이다.
"현세의 철창에서 앞으로의 계획을 사유할 시간을 가졌으면 하네. 그 동안, 연구는 이쪽에서 이어 받도록 하지."
"안대 이야기를 듣고 어렴풋하게 짐작했단다. 안대는 눈을 가리는 도구. 예를 갖춰서까지 숭배하지만 봐서는 안 될 존재가 무엇이 있을까 생각했지. 물론 신화적인 존재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인간의 정신과 인지를 비틀어 놓는다만...... 내가 알기로 눈을 가리는 행위를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존재는 그것뿐이 생각나지 않더구나."
세 사람은 석민이 만든 관문을 넘어 연구실로 귀환했다. 대낮의 쨍쨍한 직사광선이 창문 유리를 뚫고 들어와 석민의 등에 내려앉는다. 역광이라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유준이다. 유진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긴 소파를 하나 다 차지하고 누운 채다. 석민의 말로는 밤이 되어야 눈을 뜰까말까 할 거란다. 당분간은 제 집에서 지내게 할 거라는 필요 이상의 정보까지 인풋되었다.
석민은 유준이 묻지 않았는데도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했다.
장렬교는 이계신 다올로스를 숭배하는 조직이다.
다올로스는 우리 우주의 바깥에 사는 기하학적 존재다. 기본적으로 이쪽의 우주에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따금 그의 존재를 인식한 마법사들이 그와 억지로 접촉하여 간단한 미래예지부터 우주의 이치에 대한 깨달음까지의 다양한 지혜를 얻고자 한다.
그 노력에서 생성된 것이 다올로스의 화신을 강림시키는 주문이다. 이 화신은 마법사들 사이에서 '신성한 빛'이라고 불린다. 주문을 성립시키면 이름 그대로 빛 한 줄기가 술자들 사이에 강림하는데, 이 빛에 닿은 술사는 '진실의 선물'을 받게 된다.
진실의 선물. 이것이, 장렬교가 그렇게 주장하던 눈앞의 베일을 찢어 우주의 이치에 도달하는 방법이다.
빛에 닿아 진실의 선물을 받게 되면 우주의 이치를 깨닫게 된다. 그것이 평범한 인간의 정신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는가. 자명하다. 미쳐버리는 것이다. 한순간 정신이 나가버린 가련한 술자는 시간이 갈수록 이성을 더욱 더 잃어가다가 결국 '다올로스의 조각'이 되어버린다.
다올로스의 조각이 된 인간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 근처에 사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아무 것도 모르는 불쌍한 인간이 주위에 다가오면, 조각은 당장 팔을 뻗어 그의 이마에 손을 올린다. 그리고 진실의 선물을 전달한다. 조각화의 연쇄라고도 볼 수 있다.
석민은 쇠사슬에 묶여있던 것이 다올로스의 조각이 된 인간이라고 이야기했다. 닥치는 대로 남들의 이마를 만지면 참으로 곤란하게 될 테니 쇠사슬과 수갑으로 억제해 두었던 게 아닐까.
"옥상에서 떨어진 남자는 다올로스의 조각에게서 진실의 선물을 받았던 거겠지. 그대로 미쳐버려서 자해를 하다가 스스로 떨어졌던지 남한테 밀려서 떨어졌던지 했을 텐데. 경찰들이 이렇게 조사하는 걸 보니 후자인 것 같긴 하구나."
"음, 근데 이상하네요. 분명 같이 있던 그 남자도 선물을 받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받았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 사람들은 미치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당신들의 운이 특출나게 좋다고 한 거란다. 운이 좋거나......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라면 미치지 않고 버틸 법도 하다만. 그건 또 아닌 것 같았으니. 좋은 운이 연달아 붙어 장렬교의 모두가 미치지 않았는데, 하필이면 그 남자가 평범한 운이라 미쳐버렸다. 그런 거 아니겠니. 참 별 일이 다 있구나."
유준은 입가를 비뚜름하게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납득하겠다는 표정이다. 제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유준은 조금 전 떠올랐던 의문을 입에 담는다.
"마지막에 뿌린 가루는 뭔가요?"
"별 거 아닌 약이란다. 현세의 경찰들도 유해 물질이라고 인식하는, 그런 종류의 약 말이다. 아까 그 방은 주술적으로 은폐되지 않았으니 경찰이 조사할 수 있겠지. 마약 소지, 유통, 그런 건 징역 감 아니니? 나는 잘 모른다만."
"......그 남자를 감옥에 보내고 싶으셨던 건가요?"
"그 정도의 마법사라면 현세의 철창은 무용하단다."
"그런데 왜..."
"그가 스스로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고 싶었어."
유준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런 제자의 얼굴을 살피고, 석민은 가느다란 미소를 입가에 건다.
"잠시라도 신화적인 세상에서 벗어나 사유한다면, 훗날의 그는 나름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겠지."
유준은 여전히 아리송한 얼굴이다. 이미 충분히 스스로 생각해서 신화적인 존재들과 조우한 게 아닌가. 시간을 더 준다고 그가 회개하진 않을 것 같은데.
이건, 내가 그에게 나를 투사했기 때문에 드는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유준은 눈을 내리뜨고 생각한다.
나도 언젠가는 그처럼 되는 건가? 물러서기엔 늦은 건가.
이어봤자 정신에 이득이 될 화제는 아닌 듯했다. 유준은 억지로 사고의 흐름을 끊어내어 별로 궁금하지 않았던 의문을 입에 담는다.
"사슬에 묶여있었던 그 사람은 어디로 보내신 겁니까?"
진실의 선물을 받고 이성을 잃어 다올로스의 조각이 되어버린 그 사람.
남에게 선물을 전파해야 한다는 목적 하나로 생명을 이어가던 그 사람 아닌 사람.
"아, 그건 내 다른 연구실에 보관해 뒀단다. 구경시켜 줄까?"
"그걸로 연구를 하시는 건가요?"
"그럼. 아마 아티펙트화는 하지 못하겠지만, 흐음...... 견학시켜 줄까?"
"아뇨. 전 아직 그릇이 덜 된 것 같아서. 좀 더 익숙해지면...... 뭐라도 좋으니 부디 견학하게 해 주세요."
"좋은 자세구나."
물러서기엔 많이 늦었다. 유준은 결국 멍하니 생각하고야 말았다.
나는 장래 어떤 존재가 되는 걸까.
적어도, 재미없는 삶을 살게 되진 않겠지.
석민의 등 뒤로 네모나게 잘린 여름의 조각이 보였다.
밝고 깨끗한 푸른 화상이 습한 바람을 따라 일렁인다.
창문 너머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매미 소리......
사이비 소동에 휘말려선 실컷 논 것 같은데, 아직도 여름이 끝나질 않았나......
시간의 흐름은 놀라울 정도로 가변적이다.
그래...... 시간은 아직 많다.
고민할 시간도 아직은 있다.
그렇게 착각하며 여태껏 살아왔다.
오래도록 착각 속에서 살다 보면, 현실은 착각에 동화되는 법이다.
아직 착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사촌들처럼......
유준은 머리를 쓸어올리며 미소지었다.
역시......
재밌게 살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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