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질서사세계
異質敍事世界
"어렸을 땐 왜 죽은 사람을 기리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생일을 축하하는 것과 같죠. 사람은 누구나 탄생과 죽음을 겪습니다. 생명이 있는 인간이라면 반드시 거칠 보편적인 활동을 구태여 축하하고 기리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죠? 애당초 죽은 이를 위해 묘비라는 걸 만드는 의미도 알 수 없었습니다.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하는 사람이 토지를 점유하는 건 이상합니다. 생명이 멈춘 인간이란 단순한 동물 사체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고열로 태우고 녹여 한 줌의 잿더미로 만드는 게 가장 이상적인 처분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질린다는 얼굴로 커피잔을 들어올렸다. 희뿌연 수증기가 그의 얼굴을 흐리게 가렸다가 이내 사라졌다. 딱히 맛을 음미하는 표정은 아니다. 단순히 액체를 목구멍으로 넘기기만 하는 모션. 그 잔에 든 것이 쌍화탕이었더라도 얼굴 근육을 동일한 방향으로 움직였으리라.
한 모금의 커피를 빼앗긴 잔이 받침에 닿아 쨍 하고 울렸다.
"어른이 되어서야 남들의 사고를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그래서 오늘은 성묘를 오셨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동묘지의 특수성은 이전부터 선호했습니다. 도심에서 이 정도로 넓은 초목의 공간은 찾기 어려워요. 게다가 사람들은 사자의 기일이 아닌 이상 묘지를 잘 찾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할 거리가 있을 때마다 묘지에서 산책을 했습니다."
맞은편의 남자는 일자로 다물었던 입을 비스듬하게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새 말라버린 입술을 몇 번 달싹이는가 싶더니, 곧 눈동자를 번뜩이며 상대에게 묻는다.
"아까 낮에, 교도소에 다녀왔었죠?"
"예."
"생각할 거리라는 건 그걸 얘기하는 건가?"
"형사님이 떠올린 그걸 생각하고 있는 건 맞지만 방향은 전혀 다를 거라 생각합니다."
"방향이, 다르다고?"
"외부이냐, 내부이냐."
형사는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올린다. 이마를 타고 오른 손은 정수리를 지나 뒤통수까지를 훑다가 종내 하나로 묶인 뒷머리를 가볍게 정돈했다.
"......교수님 동생은 몇 달 전에 보석금을 내고 석방됐습니다."
"청구자는?"
"별 말 없는 거 보니 그쪽 변호사겠죠. 변호사를 고용한 사람을 묻는 거라면 전 모릅니다."
"일처리가 빠르네."
교수는 시선을 떨어뜨린다. 손이 닿지 않은 잔의 표면은 파문 하나 없이 고요하다. 그곳에 비친 제 무표정한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교수는 턱을 당겨 고개의 각도를 조절한다. 눈앞의 형사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상대를 빤히도 노려보고 있다.
"교도소 안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건 교수님이랑 관련이 없는데."
"천안에서 올라온 수감자. 꽤 기묘한 모습으로 죽었다고요."
"예에, 자기 눈을 찔러서 쇼크사했습니다. 들어올 때부터 정신 상태가 살짝 위험했다고는 하는데. 쯧, 같은 방 수감자들은 못 볼 꼴을 봤겠죠."
못 볼 꼴을 봤다, 라는 짤막한 표현에 그로테스크한 함의가 끼어있음을 깨닫는다. 교수는 눈꺼풀을 느리게 두 번 껌뻑였다.
"산백파와는 관련이 없네요."
"조폭 놈들이 허세를 끝내주게 부리긴 하는데, 보통 눈을 찔러서 죽기까지 하진 않죠."
"아니, 산백파가 아직 마약 거래에 손을 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형사는 낮은 신음을 흘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게 기댄다. 갈 곳을 잃은 두 손이 허공을 어영부영 움직이다가 이내 팔짱을 만들었다. 이야기가 이렇게 튈지 몰랐다는 제스처다.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 교수님이시네."
"백정우는 조직 폭력배였습니다. 이 정도의 도약을 따라잡지 못한 건 형사님의 잘못입니다."
그리고 그 조직은 얼마 있지 않아 다른 조직들과 뭉쳐 산백파를 형성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선후관계가 잘못되었다. 과거 한국과 일본을 주름잡았던 산백파는 내분으로 인해 수십 개의 조직으로 분화되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현재, 그 작은 조직들이 무언가의 사건을 계기로 산백파의 이름 아래 다시 뭉치고 있다는 게 올바른 표현이다.
형사는 미심쩍은 얼굴로 상대를 훑는다. 눈앞의 교수가, 백정우의 조직이 산백파로 역행했다는 사실을 어떤 루트로 입수한 건지 고민하는 모양이다.
"나는 형사과라 더 말해줄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인간 개인은 그가 살아온 만큼의 역사를 지닙니다. 개인적이고 편향적인 역사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의 인격을 구축하고 또 끊임없이 변화시킵니다. 타인의 역사에 수없이 관여하면서요. 인간이란 사회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동물이니까요. 곧 인간은 타인과 자신의 역사를 얽고 타인에게 영향을 받은 자신의 인격을 구축해 타인을 거주민으로 한 자신의 내면 세계를 건설하는 게 가능합니다."
"음."
형사는 간략한 추임새 하나로 대답을 대신했다. 상대의 말을 흘려듣는 기색이 역력하다. 커피가 반 쯤 남은 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다댄다. 커피나 마실 테니 강의 계속하십시오, 라는 의미를 그는 읽어낸다.
"한 사람의 죽음이란 한 세계의 종말입니다. 그래서 죽지 않은 이들은 죽은 이를 기립니다."
"그걸 그 나이 먹고 깨닫는 것도 일종의 능력이라고 생각하는데......"
"교류했던 세계에 다시는 닿을 수 없다는 향수를 해소하기 위해서."
"아하."
그는 잔을 내려놓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다.
승냥이를 떠올리게 하는 날카로운 얼굴이 다소 누그러졌다. 다만 두 눈은 여전히 형사의 살벌한 빛을 잃지 않고 있다. 어떻게 보아도 언밸런스한 표정이다.
"조각난 인격들을 그리워하고 있군요? 교수님."
몇 년 전의 일이다. 교수의 쌍둥이 동생이 별안간 교수를 찾아왔다. 피붙이라고는 하지만 삼십 년 가까이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지냈다. 아니, 애당초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교수는 동생이 죽었다고 생각했고, 동생은 자신에게 형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자랐으니까.
두 사람이 미취학 아동이었을 시절, 집에 큰 불이 한 번 났었다. 하필 부모가 집을 비워 두 사람의 힘으로 탈출해야만 했다. 형은 가까스로 탈출했지만 동생은 그대로 고온의 화마에 휩싸여 사망했다. 뼈도 녹아버렸는지 찾지 못했다. 사건 이후 가족은 당연히 다른 집으로 이사해야만 했다.
하지만 동생은 살아있었다. 창문으로 겨우 탈출해 이런저런 혹독한 과정을 거쳐 이십 몇 년을 생존해 왔다. 화재 사건의 충격으로 구조 이전의 기억을 모두 잃고 살아왔는데, 그것이 모종의 사건을 트리거로 되살아났다.
그리고 그는 형을 찾아왔다.
수학 분야에 비상한 재능을 보여 서른 초반에 대학 교수라는 타이틀을 단 형과 다르게, 그는 변변찮은 조직폭력단의 변변찮은 위치에 올라있었다.
그리고 교수는 동생을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동기는 한 줄로 설명할 수 없다. 다수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킨 복잡하고 다면적인 행동 원리가 어느새 그의 안에서 싹터버린 것이다.
교수는 자신의 주변 환경을 십분 활용하기로 했다.
수학과가 속해있던 건물이 무언가의 공사를 하여 잠시 타 건물로 연구실을 이동했던 참이었다. 바로 근처에 화학 관련 연구실이며 실험실이 있었고, 그는 즉시 호기심이 많은 화학 교수의 신경질적인 얼굴을 떠올렸다.
이후의 전개를 간략히 설명하자면, 호기심 많은 교수는 대학에 들락거리는 동생에게 관심을 보였다. 동생은 그가 거슬린다고 생각했다. 형은 아슬아슬한 선까지 두 사람을 접근시켰다. 동생은 결국 그 교수를 죽이려 들었다. 죽이려고 마음은 먹었지만 죽이진 못했다.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분명 목숨을 끊어놨으리라. 하여간에 살인이 아닌 살인 미수였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겉치레용으로 제가 담당하는 대학원생을 한 명 끌여들였다. 표면적으로는 범인으로 보여도, 경찰이 조금만 조사한다면 금방 범인이 아닌 것이 들통날 정도의 간략한 장식품, 이었다.
그랬어야만 했다.
석사생이었던 그녀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변수를 끌어들였다.
교수는 그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자신과 본질적으로 같아 보이기도, 달라 보이기도 한 그를......
어쨌거나 사건은 동생의 체포로 막을 내렸다.
교수의 정신병리적 증상도 그 날로 종결됐다.
교수는 이제, 담배와 라이터를 구입하지 않아도 되었다.
교수는 이제, 스물 네 시간을 오롯이 자신 홀로 사용해야만 했다.
교수는 이제...... 하나의 인격만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했다.
삼십 사 년 동안 육체를 공유했던 의식들은 교내 살인 미수 사건이 전개되던 도중 소멸됐다. 하나는 극적으로, 순식간에 종말을 맞았으며, 다른 하나는 건전지를 다 쓴 전구처럼 힘을 잃어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존재가 말소되고야 말았다.
그들에게는 이름이 있었다.
지금 홀로 남은 교수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육체라는 집합에는 물론 이름이 있다. 그것은 다른 인격의 이름을 대푯값으로 내세운 것으로, 지금의 교수에게는 이름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받아들여야만 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까.
"백정문은 모델이 없습니다. 하지만 백정우는 있습니다. 삼십 여년 전, 백정문이 동생 백정우를 잃은 충격으로 만들어낸 가상의 인격, 그게 백정우니까요."
토톨로지처럼 보이지만 그렇지는 않다.
백정우는 백정우를 만나 죽었다.
도플갱어는 서로 마주치면 둘 중 하나가 죽어버린다.
"......잠깐만."
형사는 턱을 몇 번 만지작대다가 말을 잇는다.
"지금, 인격의 부활을 도모하려고 모델을 찾아나선 겁니까?"
사람의 죽음이란 세계의 종말이다.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수의 육체는 멀쩡히 살아 있다.
아직 멀쩡하게 숨을 쉬고 에너지를 만든다.
숨이 끊어진 육체를 되살린다는 마술적인 행위는 하지 않아도 된다.
그는 일찍이 백정문과 백정우를 창조해냈다.
그렇다면 재창조해낼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인격을 되살리는 일은 육체를 되살리는 것보다 말도 못하게 쉬운 일이 아닌가?
여태 되살려야 할 일이 없었기에 시도하지 않았을 뿐.
"한 발 늦었습니다, 제가."
그 아이들이 잘게 조각나 제 안에 섞여들었을 때,
그는 비로소 타인이 정의한 죽음의 의미를 어렴풋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같이 대화를 나누었던 상대를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된다.
그건, 슬프다기보단 고독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아까도 그러셨죠? 일처리가 빠르다고. 그건 대체 누구한테 하는 소립니까?"
교수는 세입자 없이 텅 빈 뇌를 인지하며 기꺼이 대답했다.
굳이 눈앞의 형사에게 기대를 거는 이유는 무엇일지 생각해 보았지만 진부한 해답만이 도출될 게 뻔했으므로 의식적으로 도중에 사고를 멈추었다.
"그 변호사를 고용한 사람."
유정욱은 모니터 앞에서 고뇌에 빠져있었다.
바로 어제 가족들의 성묘를 다녀왔다. 얼마 전이 추석이었으니까. 정작 추석 연휴 당일엔 별 것도 아닌 강력 사건들이 연이어 터져 (명절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하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도무지 성묘를 갈 시간을 내지 못했다. 어제가 되어서야 겨우 시간이 났고, 수도권 어드매에 위치한 공동묘지에서 고독한 성묘를 하려던 참에, 그 남자를 만나고야 말았다.
백정문은 소리도 없이 그에게 다가왔다. 정욱의 생모가 누운 묘를 한번 훑는가 싶더니 텅 빈 눈으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도 부모님을 꽤 이른 나이에 잃었습니다."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몇 년 전의 기묘한 사건을 수사하다가, 용의선상에 오른 그를 조사했던 적이 있으니까.
정욱의 단출한 성묘는 이미 끝난 참이었다. 두 사람은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이어갔다. 늘 그렇듯이 교수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정욱은 그 안에 내포된 의미를 스스로 찾아내야만 했다.
그리고, 정욱은 겨우 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이끌어냈다.
그 교수는 자신의 동생을 찾고 싶어 한다.
평생 같이 살아온 인격의 재건설을 위해......
그렇다면 차라리 삼십 몇 년 만에 재회한 동생과 같이 사는 게 낫지 않나? 자신 안에 새로운 자아를 일궈내어 얻는 이득이 물리적인 실체에서 얻을 수 있는 만족감보다 크단 말인가.
평범한 세계에 발을 걸쳐두고 있는 정욱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름 범죄자들의 기이한 사고는 많이 접해봤다고 자부하지만, 교수의 뇌내 환경은 단순히 기이한 것을 넘어 괴이하다.
출근하자마자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해 백정우의 보석과 관련된 정보를 모았다. 그의 보석을 담당한 변호사는 조직폭력단의 뒷배를 봐주기로 소문난 변호사로, 그쪽을 찔러봤자 괜찮은 정보가 나올 것 같진 않았다. 조폭의 뒤를 봐준다는 건 그쪽에서 거금을 받는다는 거고, 동시에 클라이언트의 비밀 엄수가 그 자신의 목숨과 직결되어 있다는 뜻도 되니까.
도움이 되지 않는 인터넷 창을 끄고 그는 생각했다. 어째서 지금 이런 정보를 찾아보고 있는가. 설령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나온다고 해도, 그는 형사과다. 조직폭력대책과가 아니다. 일단은 경찰 조직에 속한 몸이니 독단적인 행동을 해서도 안 된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평일 아침의 식어빠진 공기가 폐를 가득 채웠다가 금세 빠져나간다.
일단은 오늘의 업무를 소화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교수의 일은 후순위다.
라고 결심한 지 네 시간이 채 되지 않아 정욱은 기대도 하지 않았던 정보를 듣고야 말았다.
"동두천에서 있었던 카지노 폭탄 테러 사건, 그거 광수대로 넘어갔다는데요."
"그럴만 하지. 그 카지노, 세워질 때부터 지역 조폭이랑 유착 관계였다면서. 테러한 범인도 삔또 상한 조폭들 아니었나? 조직범죄 냄새가 나면 일단 광수대 놈들이 눈에 불을 켜고......"
"예, 누가 모른대요? 팀장님 말마따나 그렇긴 한데. 경기북부가 아니라 서울 광수대가 낚아챘답니다."
정욱은 단무지를 우적대던 턱 관절을 멈췄다. 상사의 변화를 기민하게 알아챈 부하는 짬뽕 그릇에서 고개를 들어 상대를 바라본다. 찰나의 시선 교환. 이유까지 설명해내라는 무언의 압박.
규현은 허리를 조금 굽혀 정욱과의 거리를 좁힌다. 비밀스러운 이야기라는 사인이다.
"그 사건에 산백파가 얽혔다는 소문이 있어요."
또 산백파다. 정욱은 어쩐지 지겹다는 생각이 들어 등받이에 몸을 기댄다. 오래된 목재 의자가 끼익, 하고 괴로운 신음을 뱉어 곧장 등을 떼고야 말았지만. 규현 역시 굽혔던 몸을 원상복귀 시킨다.
"그놈들이라면 서울 쪽에서 쫓고 있으니 당연한 흐름이지."
잠시 멈췄던 식사를 재개한다. 정욱은 동시에 한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현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의 팀장이자, 몇 년 전까진 정욱의 상사이기도 했던 남자. 둥그렇고 부리부리한 두 눈이 마치 어둠 속의 올빼미와 같았던 남자.
강상호는 아직도 산백파를 쫓고 있는 건가.
정욱은 그의 의중을 전혀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가 이십 년도 전에 산백파와 무언가의 접점이 있었던 사실은 알고 있다. 그 인연으로 말미암아 상호는 일 년 전의 기묘한 상해사건을 해결했다. 산백파의 전 두목과 얽힌 바보 같은 사건이었다. 정욱은 우연히 현장에 있었고, 산백파의 전 두목과 상호의 대면에 입회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으며 상호의 정신세계에 드리운 두툼한 베일의 일부를 들춰본 듯한 기분은 들었으나 명확한 뒤틀림의 코어는 여전히 파악할 수 없었다.
하여간에, 광수대가 사건 하나에만 매달릴 수 있을 정도로 한적한 곳은 아닌데.
정욱은 말없이 군만두를 질겅였다. 뭔가 잘못 튀겨졌는지 만두피가 질기다. 부하의 짬뽕 그릇에 담긴 반쪽짜리 군만두는 한참을 국물에 담겨 있었는지 속과 피가 분해되기 직전이다. 맛이 없다는 공통의 인식을 확인하고, 정욱은 젓가락을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서울 좀 갔다와야겠다."
"예? 제가요?"
"아니, 내가."
"예? 왜요?"
"당장 급한 일 없잖아?"
"근무지 이탈이에요, 이거."
"남 형사도 경위 정도 달았으면 리더십을 보여야지."
정욱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선다. 규현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따라 일어났다.
"그리고 임마, 탐문조사 나간답시고 서울 나가서 시간 죽이던 게 누군데."
부하의 얼굴 근육이 순간 팽팽하게 당겨지는 걸 흘기고 나서, 정욱은 계산을 마치고 가게 밖으로 나섰다.
남규현은 백정문과 상당히 친했다. 대학 시절에 깊은 교류가 있었다는 듯한데, 그것이 어찌어찌 십 년 씩이나 지속된 모양이다.
남 경위는 근무 시간에 뻔질나게 경찰서와 대학교를 오갔다. 농땡이와 별반 다를 거 없는 행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욱은 그에게 야단 한 번 치지 않았는데, 그 이유랄 것이 황당하게도, 백 교수라는 인물이 강력 사건 해결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규현은 자신이 담당하는 사건을 친구인 백정문에게 스스럼 없이 이야기했다. 수학 교수인 정문은 당연하게도 강력 사건에는 흥미가 없었지만, 순전히 친구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덥석덥석 잡아올려 건네주었다. 실제로 정문의 지적은 여러 사건의 중심을 꿰뚫었고, 규현은 그 덕에 꽤나 편안한 형사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몇 년 전 파국을 맞았다. 당연하게도 정문과 그의 동생이 교내에서 벌인 살인미수극이 원인이었다.
규현은 정문을 좋아했다. 정문 역시 규현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 사건으로 인해 백정문이라는 인격은 백정문에게서 사라졌다. 생판 다른 인격만 남은 정문이 규현에게 협력할 이유는 사라졌고, 규현 역시 정문과 전혀 다른 그에게서 호감을 느끼지 못했다.
결국 남 경위는 농땡이를 피우지 않게 되었다.
정욱은 어제 백 교수와 만난 이야기를 해 줄까 하다가, 부하의 심기를 더욱 건드려서 좋을 건 또 없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섰으므로, 입을 다물고 앞으로 할 일을 차근차근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삼십 분도 채 걸리지 않아 서울 시내로 진입했다. 광역수사대가 입주한 신청사는 그가 기억했던 자리에 우직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근처 공영주차장에 적당히 차를 대고 거리로 나섰다. 상호에게는 이십 분 전에 연락을 했다. 앞으로 사십 분 정도는 시간을 낼 수 있단다. 그렇다면 이제 이십 분이 남았다는 이야기가 되겠지.
신청사 정문으로 향하니 마침 얇은 겉옷을 걸친 상호가 터벅터벅 걸어나오고 있었다. 정욱의 모습을 확인하곤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건다. 한 손을 올려 인사하는 버릇은 경기남부청 시절과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 유 경감이 무슨 얘기가 하고 싶어서 서울까지 납셨을까. 흐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 최근에는 죄다 시시한 사건만 맡았거든."
"커피는...... 시간이 애매하겠죠?"
"잘 알고 있네. 근처 한 바퀴 돌면서 얘기하지."
상호가 길다란 다리를 한발 빠르게 내딛으며 제안했다. 이 근방 지리는 그가 훨씬 잘 알 것이 분명했으므로, 정욱은 군말 없이 그의 뒤를 따른다.
"동두천의 그 건, 당신이 낚아챈 거죠?"
"벌써 그쪽까지 퍼졌나? 소문이 참 빠르구만."
길거리에는 제법 사람이 많다. 평일 낮임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의 포화도를 보이는 건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경기남부청이 있는 도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광경. 정욱은 잠시 듣는 귀들이 염려되어 상호의 곁으로 한 발자국 가까이 이동한다.
"헌데, 유 경감이 왜 그 사건에 관심을 갖지?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경기북부로 이동한 건가? 사건을 뺏겨서 앙심이라도 품었어?"
"그런 일 없습니다."
"그런데 왜?"
정욱은 자신의 패를 어디까지 내놓을지 생각한다.
아니, 실상 자신의 패가 어떤 그림인지조차 제대로 인지할 수 없다.
나는 뭘 위해 산백파를 조사하고 있는 거지?
그 교수를 위해?
그의 개인적인 소망을 위해......?
"......관련자가 저에게 접촉해왔습니다."
"관련자?"
"산백파는 마약에 손을 대지 않았다면서요?"
"오호. 재밌는 이야기를 하는군. 그 사람이 알려줬나?"
"예."
"그 정도의 내사를 파악하고 있는 인간이 어째서 유 경감에게 접촉했지? 그쪽 사건을 내가 낚아챘다는 소문이 기남까지 퍼졌다면, 사실 상의 산백파 담당은 나라는 정보를 일찌감치 깨달았을 텐데."
"모릅니다."
"정보를 흘렸으니 당연히 유 경감에게 요구한 게 있겠지?"
"그게, 모르겠습니다. 항상 변죽만 치는 인간이라서요. 제게 뭘 요구하려고 찾아온 건지 지금도 고민 중입니다. 그래도 그 요구랄 것이 산백파랑 연관된 건 틀림없어 보이고."
"아, 원래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군?"
"예."
"흐음."
상호는 돌연 좁다란 골목 안으로 발머리를 돌렸다. 정욱은 묵묵히 그를 따른다. 수없이 늘어선 콘크리트 돌담. 그 안쪽에 줄지어 선 붉은 벽돌의 빌라와 다세대 주택. 시퍼런 유리로 막힌 창 너머는 캄캄하다. 해가 중천이니 당연하다. 집주인이 안에 있어도 밖에 있어도 전등은 꺼져있으리라.
"동두천에서 로컬 조폭과 산백파의 이권 다툼이 있었다. 이건 알고 있나?"
"아뇨."
"새로 지은 호텔 최상층에 카지노가 입점하게 되었어. 그 경영권을 두고 로컬 조폭과 산백파가 팽팽하게 대립했네. 다툼은 산백파의 승리로 끝나는가 싶었는데, 문제는 카지노가 완공되고 나서 일어났지."
"로컬놈들이 앙심을 품고 폭탄 테러를 벌였다."
"뭐야, 알고 있잖아?"
"아뇨, 결과에 입각한 추론입니다."
상호는 올빼미 같은 두 눈을 좌우로 굴리는가 싶더니 이내 흠, 하고 콧김을 내뿜는다. 그것이 어떤 의미를 품고 있는지 정욱은 꿰뚫어 볼 수 없었다.
"그래. 로컬 조폭은 이미 산백파에게 밀려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어. 너 죽고 나 죽자 하는 심정으로 강행한 테러였지만 기적적으로 사망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확실히 기적이군요, 그건."
"하지만 카지노 근처 풀숲에서 사상자가 발견됐네."
"예?"
"로컬의 말단 녀석들 둘. 하나는 발견 당시에 심정지였고, 또 하나는 반죽은 상태로 숨만 꼴딱꼴딱 넘기고 있었어. 몸에는 고문의 흔적이 심각하게 명료했고."
"고문?"
"그래."
"테러를 강행한 파의 말단 조직원이 고문을 당했다?"
그의 발언을 곱씹는 정욱에게 희미한 눈웃음을 지어보인 후, 상호는 자신의 손목으로 시선을 떨어뜨린다. 시간을 확인하는 제스처다. 정욱도 덩달아 휴대전화 액정을 밝힌다. 팔 분이 지났다. 십이 분이 남았다.
"그게 시사하는 바가 뭐라고 생각하나? 유 경감."
"폭탄 테러는 어떻게 진행됐습니까?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으니 자살 폭탄을 이용하진 않았겠네요."
"카지노 군데군데에 미리 폭탄을 설치해 뒀던 모양이야. 폭발은 카지노 밖에서 원격으로 조종했고."
"그렇다는 건......"
모퉁이에서 직각 커브. 정욱은 이 길이 신청사 방향임을 떠올린다. 방금 전의 모퉁이가 터닝 포인트였던 모양이다.
"그들을 고문해서, 폭탄이 설치되어 있는 장소를 알아내야만 했다."
"빙고."
상호는 슬쩍 고개를 들어올린다. 정욱이 눈동자만 굴려 시선을 따르니, 그 끝에는 전봇대에 매달린 CCTV 뿐이 없다.
"기적적으로 의식을 되찾은 두 말단에게서 증언을 들었네. 자신들을 고문한 건 산백파 녀석들이라더군. 그렇다면 테러가 일어난 카지노 안에 산백파의 누군가가 있었다는 얘기가 돼."
"그 안에 있던 게 보통 조직원이라면, 구태여 이런 눈에 띄는 짓을 하면서까지 그를 살려낼 메리트는 딱히 없죠."
"아직까진 머리가 쌩쌩 도는군. 음, 좋아. 유 경감도 몇 년 안에 이쪽으로 올라오겠구만."
당신하고 같이 일하고 싶진 않다. 만약 같이 일하게 된다면, 분명 둘 중 하나는 죽어버릴 테니까. 정욱은 그런 저주의 말을 씹어 삼켰다.
"그 안에 있던 게 누군지 조사하고 계신 겁니까?"
"카지노 입장 명단 정도는 애저녁에 넘겨받았지. 그런데 딱히 의심스러운 인물은 없더군."
골목의 끝이 보여왔다. 저 너머에 깔린 넓다란 대로변은 어디로 가는지 모를 승용차들로 인산인해다. 인도도 형편이 다르진 않아서, 무작위적으로 커스터마이징된 수많은 행인들이 골목 사이로 보였다가 사라졌다가를 반복했다.
"뭐, 아주 없다는 건 거짓말이네. 하지만 이건 자네 관할의 사건이 아니니 더 이상 말해줄 순 없어. 유 경감이 이쪽으로 적을 옮긴다면 모르겠지만."
두 사람은 골목을 나와 인파 속으로 섞여들었다. 신청사는 육안으로 보이는 거리에 있었다. 어림잡아 걸어서 오 분이면 도달할 듯하다. 하나 뿐인 건널목은 붉은 빛으로 보행자들을 억제하고 있다.
"왜 알려주신 겁니까?"
"뭐를?"
"낚아채신 사건의 개략을요."
"그야, 자네에게 빚을 지우려는 계략이지."
"빚?"
"내 언젠가는 유 경감에게 도움 받을 일이 생기지 않겠어?"
"이 정도 빚으로 제가 도움을 드릴 것 같습니까?"
"이 나이 먹으면 감정이 오가는 총량을 어림하는 능력이 생긴다네."
파란 불이 켜지는 걸 보고 두 사람은 횡단보도를 건넌다. 맞은 편에서 다가오는 사람들. 맞은 편으로 향하는 사람들.
"유 경감은 언젠가 반드시 나에게 고마워 할 날이 올 거야."
"너무 비약해서 어림짐작이라고 할 수도 없는 수준입니다."
"그건 훗날 알아보도록 하지."
정확히 이십 분이 흘렀다.
세상은 이십 분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신청사 정문을 지키고 선 경비원이 상호에게 작게 경례한다.
상호는 옛 부하에게 웃어보이고는 작별 인사도 없이 건물을 향해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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