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2 ss

요양자

醪釀者

K=Potassium by KPo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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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 배은망덕한 새끼야."

"아니, 형, 잠깐만, 아니, 아니아니아니, 그게요......"

"너 이 바닥 신용 장사인 거 몰라? 너 나 말고 또 친한 사람 누구 있어. 없잖아, 이 새끼야. 근데 나까지 팔아 먹어? 무슨 생각 하고 살아? 어?"

"그만 해라, 민석아."

"뭘 그만 해요. 영감님도 한 마디 하세요. 이 새끼가 온갖 걸 외부인한테 까발렸다니까요."

"귀머거리 되겠다."

민석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동현의 멱살은 놓지 않은 채다. 푸릇푸릇한 턱수염을 기른 동현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영감님을 바라본다. 새하얀 머리의 사무소장은 무표정하게 사원들의 다툼을 방관하고 있다.

소장, 백현상은 묵직한 목재 테이블 위에 양 팔꿈치를 내려놓았다.

"민석이 네가 그랬지. 만일 네 신상에 해가 생기면 그 친구에게 연락을 해 달라고. 그래서 난 연락했다. 네가 병원에 입원해 있으니 찾아갈 거면 찾아가라고 전해 두었다."

"예?! 현이가 민석이 형 친구예요?"

"닥쳐, 이 새끼야."

민석은 험상궂은 얼굴을 풀지도 않고 동현을 사무실 소파에 내던졌다. 꼴사나운 모습으로 처박힌 탐정은 고통스런 신음을 흘리기나 한다.

현상은 한숨도 한 번 쉬지 않고 말을 잇는다. 제 눈앞에서 벌어지는 소동에는 (크게 소란스럽지 않은 한)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그 번호가 어째서인지 외부에 유출되었지. 대포폰이라 유출되어도 별 상관은 없다만. 문제는 대포폰의 번호가 동현이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거다."

동현은 제 이름이 불리자 주섬주섬 몸을 일으켜 소파에 걸터앉았다. 민석은 그의 꼬라지가 도통 마음에 들지 않는지 뒤로 잘 넘긴 머리칼을 몇 번이고 매만지다가, 맞은 편 소파에 털썩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게, 음. 현이가 갑자기 전화가 왔어요. 번호 하나만 조사해달라고. 그래서 일단 알았다고 하고 번호를 전화번호부에 저장했는데."

"너 그 새끼랑 무슨 사이야?"

"아이, 얘기 좀 들어봐요 형. 저장했는데, 이전에 있었던 통화 기록들이 주르륵 뜨는 거야. 그러니까 이미 나랑 통화를 했었던 전화번호야. 기록들 좀 보면서 생각해봤더니, 이건 소장님 대포폰 번호......"

"그래서 걔한테 이실직고했냐?"

"아니, 처음부터 얘기할 생각은 없었어요......"

"근데?"

"말하다 보니 얘기하고 있었어. 걔가 진짜, 유도신문의 달인이거든요."

동현의 면상에 발행 기간이 한 달이나 지난 신문 뭉치가 처박힌 건 그 직후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갈무리하자면 다음의 간단한 이야기였다.

민석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는 걸 눈치챈 현상은 그의 비상연락망에 연락을 돌렸다. 물론 비상연락망, 그러니까 민석의 이웃에 해당하는 인물과는 일면식이 없는 현상이다. 단순히 '백도화가 어느 병원에 입원했다'라는 정보만을 건네고 전화를 끊었다. 대포폰으로 연락했으니 발신인 추적도 무리일 것이었다.

그런데 대포폰의 번호가 민석의 다른 이웃에게 유출되었다. 그는 정체 모를 발신인에 의문을 가지고 전화번호의 주인을 탐색하려 들었다. 아는 탐정에게 전화번호를 건네 조사를 의뢰했다. 탐정은 자신이 아는 번호라는 걸 깨닫고, 그대로 그에게 조사 결과를 읊어주었다.

"뭐라고 말했는데?"

"저한테 일감 주시는 분이라고요."

동현의 면상에 발행 기간이 한 달 반이나 지난 신문 뭉치가 처박혔다.

그는 조사 결과를 듣고 대략적인 윤곽을 파악했다. 탐정인 동현에게 일감을 주는 사람이라니 흥신소 내지 그와 비슷한 업종의 사람일 것이고, 그가 백도화의 생사 여부를 알고 있다는 건 당연하게도 백도화와 은밀한 커넥션이 있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어쩌면 도화와 동현은 같은 상사를 둔 게 아닐까, 하는 추측에까지 원활하게 도달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병실에서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민석은 소파에 파묻힌 채 머리를 쥐어뜯었다.

동현은 교대에서 일이 있다며 도망치듯 사무소를 떠나버렸다.

단둘만 남은 사무소에서 현상과 민석은 별 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각자 무언가 생각에 빠져있는가 싶더니, 우람한 책상 앞에 홀로 앉아있던 현상은 이윽고 오늘 자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12월 중순을 쾌속 같이 달려나가고 있는 요즘이다. 퇴원한 지 겨우 삼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연말이라니, 아무래도 시간을 도둑맞은 기분이 든다.

전화 벨이 울렸다. 도화의 것이었다. 민석은 멍하니 휴대전화를 꺼내들어 발신인을 확인한다. 모르는 번호 열한 자리가 찍혀있다.

"누구야?"

무심코 뱉은 말엔 누구의 대답도 돌아오질 않는다.

민석은 아주 잠시 고민하다가, 푸르게 빛나는 통화 버튼을 슬라이드했다.

민석이 현상심부름센타를 다시 찾은 건 그로부터 이 주가 지난 날의 일이었다.

이것은, 기이하다면 기이한 일이었다. 요즈음의 민석은 현상에게서만 조사일을 수주한다. 부업으로 바쁘다고는 해도,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일감이 없나 서울을 기웃거리던 인간이었다. 하지만 12월에서 다음 해로 넘어가는 이 주 동안 그의 발길은 뚝 끊겼다.

"이번에도 병원을 뒤져봐야 하나 생각했다."

간만에 얼굴을 비춘 민석을 보고 현상이 꺼낸 말이었다.

"저 튼튼해요, 영감님."

"연말이라 바빴었던 모양이구나."

"그런 것도 있고요."

묘하게 싱글대는 낯으로 민석이 대답한다.

현상은 부하의 얼굴을 한 번 스윽 훑어내리는가 싶더니,

"남자라도 생겼냐?"

하고 물었다.

현상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그의 발언은 농담에 가까운 스몰 토크였을 것이었다. 민석 역시 그 사실을 빤히 잘 알고 있다.

"뭐, 대충."

그래서 민석은 부러 사실을 이야기 해 주었다.

갑자기 걸려 온 전화. 전파 너머에서 시를 읊는 남자. 장난전화인 줄 알고 끊었다. 저녁, 방송을 켜기 전. 다시금 걸려 온 전화. 전파 너머에서 시를 읊는 남자. 장난전화 그만 하라니까. 저 기억 안 나세요? 기억 안 나. 끊었다. 방송을 켰다. 평소와 같은 속도로 올라가는 채팅창. 불특정한 문장들이 위로 치솟는다. 난장판 사이에서, 도화는 그 문장을 발견했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남의 채팅에는 관심이 없는 시청자들. 그저 그런 어그로성 채팅으로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활자의 물결에 휩쓸려 사라진 시구의 잔상을 노려보다가. 세 번째 전화. 이제는 익숙해진 열한 자리 숫자. 카메라와 마이크를 끈다. 전화를 받는다. 저 기억 안 나세요?

도화는 그제야 이 목소리를 처음으로 들었던 장소를 떠올렸다.

조금 추운 감이 있는 병실에 들이닥쳤던 기름한 청년의 얼굴을 동시에 생각해냈다.

나는 당신이 누군지 알고 있다. 그러니 전화번호를 주지 않으면 나가지 않겠다. 청년은 무작정 떼를 썼다. 당시의 도화는 어쨌든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지 하루가 채 되지 않았었다. 멀쩡하지 못한 머리로 청년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확실히 익숙한 사람 같긴 하다고. 어디서 만났던 사람 같긴 하다고. 그런데 내 전화번호가 왜 없지? 순간의 고민은 구면의 착각에 가려져서, 청년의 휴대전화를 건네받았다. 백도화의 전화번호를 찍었다. 열한 자리. 010으로 시작하는 휴대폰 번호.

청년은 만족스런 얼굴로 떠나갔다. 가느다란 눈가가 한껏 아래로 휘어졌던 모습을 기억한다.

어째서 잊고 있었던 거지?

그 뒤에 병실에 들어온 인간 때문인가.

하여간 도화는 남자와 만날 약속을 잡았다. 전화를 끊고 다시 방송을 켰다. 중요한 전화가 와서 잠깐 대기화면 켜고 있었다. 자, 오늘 예열 게임 시작할까?

나츠카와 야스나리, 라는 이름은 건너건너 들어본 적이 있다. 물 건너 일본에서 유명한 탐정이라고 했던가. 일본은 확실히 한국보다야 탐정업이 활성화된 나라니까, 지하철에 대문짝만한 탐정 광고를 걸어도 그다지 이상할 건 없어 보였다.

청년은 그의 아들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아들을 너무나 사랑해서, 아들 주변의 인간을 죄다 매수해 아들의 행적을 활자로 남기기에 혈안이라고도 했다.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이야기다. 도화는 초콜릿이 들어간 음료를 마시는 청년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한다. 하지만 여전히, 언제 어디서 어떻게 듣게 된 이야기인가에 대해서는, 영 감이 잡히질 않는 그였다.

"미행이 붙으면 따돌리면 되잖아."

가느다란 눈의 청년은 미소지었다.

그 미소가 또 눈에 익은 구석이 있어서, 도화는 혼란스러워진다.

"도화 씨가 먼저 연락 주신다고 했는데."

"내가?"

"도련님은 가성비가 좋다고 하셨지요?"

그 대답이 다시금 귀에 익은 구석이 있다. 도련님이라는 호칭도 그러하다.

"도화 씨는 기억을 잃으셨군요."

조금 침울해진 기색이 있는 목소리.

눈앞의 청년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런 욕구가 순간 들끓었다. 대체 무엇에 기반한 욕구인가에 대해서는, 도화는 여전히 떠오르지가 않았다.

청년은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술친구로 있으며 아버지에게 매수당하지 않기를 원하는 듯했다. 직업 특성 상 사적으로 친밀한 인간이 많지 않은 도화로서도 술친구 제안은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청년과 술을 마시는 날이 많아졌다. 길거리를 거니는 두 사람 뒤에 무난한 옷을 입은 미행자가 따라붙기도 했다. 도화는 코웃음을 치며 그들을 따돌렸다. 청년은 길다란 다리를 허우적허우적 움직이며 열세 살 많은 술친구를 따라 움직였다.

청년은 술이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학을 잘 알았다. 책은 라면 받침으로 쓰는 게 다인 도화는 들어보지도 않은 작가들의 이름을 듣는 게 그저 신기해서, 발간 얼굴로 신나게 시인과 작가들의 이야기를 하는 청년의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기나 했다.

청년의 집은 서울의 한 평범한 아파트였다. 물론 비싼 땅에 있으니 평범하다고 하기에는 값이 좀 나갈 것이었다. 그가 자신을 도련님이라고 지칭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과거의 자신이 그를 도련님이라고 불렀던 이유 역시 깨달았다.

청년을 바래다 주고 두 번째 미행을 따돌렸다. 서울 한복판에서 따돌렸으니 미행 대상자가 어떤 도시에 사는지조차 알 수 없으리라. 저 멍청이는 나츠카와 야스나리에게 무슨 보고서를 올릴까.

청년의 모습에서 김기철을 떠올린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청년은 젊은 시절의 그를 닮았다.

청년이 나이를 열 살만 더 먹으면 분명, 분위기 따위가, 무척이나 비슷해지지 않을까.

청년을 보고 기철을 떠올리는 자신을 괜스레 비웃으면서, 도화는 택시를 잡았다.

"열세 살 연하라고?"

현상은 보기 드물게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아니, 그러니까요. 딱히 정말로 사귀는 건 아니고요."

현상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민석을 노려보기 시작한다.

"사귀는 게 문제가 아니다. 도화 너는 사람을 지나치게 좋아하니까 말이다."

단둘만 있을 때는 상냥하게도 본명을 불러주는 상사였다.

"지금도 신나있는 게 보여. 어린 애랑 만나서 인생이 즐거운 건 알겠다만. 경거망동하지 말아라."

솔직한 심정을 들켰지만,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만들어내 본다.

"영감님도 참. 제가 그럴 사람이에요? 저 40대예요, 이제."

"지금도 실실 웃고 있는 게 불안하다."

의식적으로 입꼬리를 내렸다.

"나츠카와 야스나리가 주시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냐? 더더욱 주의하면서 행동해라. 그 인간, 도쿄에서는 한 가닥 하는 걸로 알고 있다. 한국에서도 어떻게 나올지 몰라. 그곳도, 이곳도 돈만 바르면 뭐든 되는 세상이 아니냐."

"여차하면 영감님한테 부탁해도 되죠?"

장난기 어린 말투를 듣고, 현상은 또 다시 미간에 깊은 골을 새겨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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