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다리효과

게일타브

비밀 다락 by 멍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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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막 게일 플러팅 대사 인용

*타브(여)=오웬

쐐액!

촉이 날카롭게 벼려진 화살은 무겁게 가라앉은 언더다크의 공기마저 찢어내고 표적을 향했다. 아스타리온이 쏜 화살은 완벽한 궤적을 그리며 미노타우로스의 왼쪽 눈에 그대로 꽂혔다. 더 볼것도 없이 훌륭한 마지막 일격이었다. 미노타우로스가 듣기 괴로운 포효를 내질렀다. 반사적으로 귀를 막고 싶어질 정도였다. 이내 10피트를 족히 넘어가는 거대한 몸집의 반인반수는 마지막 신음소리와 함께 오웬의 코앞에서 느리게 곤두박질쳤다. 그렇게 벼랑 끝에서 일행을 급습한 미노타우로스 두 마리와의 급박한 전투는 마무리되었다.

“괜찮아?”

어느새 곁에 다가온 게일이 오웬의 어깨를 살며시 쥐었다. 바짝 힘이 들어간 오웬의 어깨가 작게 움찔거렸다. 그제서야 오웬은 자신이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거대한 가시밭을 생성하는 주문에 집중해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주문을 거두고 나서야 오웬이 깊은 숨을 들이내쉬었다. 미노타우로스는 물론 오웬의 발 아래까지 촘촘히 뻗어있던 가시들이 땅에 녹아들듯 서서히 사라졌다. 게일은 그 과정을 관찰하듯 지면을 집요히 바라보았다. 자연이 감응하는 드루이드의 주문이란. 몇번을 보아도 질리지 않는 기이하고도 흥미로운 장면이었다.

"고마워. 이제 괜찮아.“

긴장이 풀리자 잔뜩 찌푸렸던 눈썹도 제 자리를 찾았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크리쳐를 상대해야 했던 오웬은 미노타우로스의 것인지, 그녀의 것인지 모를 피를 온몸에 잔뜩 뒤집어 쓰고 있었다. 딥워터에서 내내 바라보았던 노을을 빼다 박은 주홍빛 머리카락은 한층 더 강렬한 붉은 빛을 띄고 있었다.

위저드의 전투방식이란, 요점만 말하자면 원거리에서 주문을 외고 안전거리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 말인 즉슨 크리쳐가 지척까지 다가오는 걸 허용하는 일은 거의 없다는 이야기고. 그러니까 누군가의 신랄한 표현을 빌리자면, 게일 데카리오스는 대부분의 전투에서 항상 그 누구보다도 고상하게 깔끔한 외형을 고수할 수 있었다. 반면 오웬은 곰이라거나, 흑표범이라거나, 거미라든가. 이런저런 동물로 변신하며 근접 전투도 곧잘 하는 편이다보니 괴수의 피나 내장을 뒤집어 쓰는 건 예삿일이었다. 그렇다곤 하지만 크리쳐의 피를 매일같이 뒤집어 쓰는 것은 역시나 그녀에게도 썩…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었다.

오웬은 땀으로 축축한 장갑을 벗고 앞머리에 늘어붙은 미노타우로스의 찐득한 피를 걷어내곤 바닥에 손을 털었다. 언더다크의 위험성은 할신에게 몇 번이고 귀가 아프도록 충분히 경고를 받았지만,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지상에서와 달리 시야가 충분히 닿지 않는 곳에서 크리쳐들이 기습해왔다. 언더다크 전체를 가로지르는 이 거대한 나무의 무수한 가지 하나하나까지 꼼꼼히 살펴야 한단 말인가? 오웬이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곁에서 그녀를 지켜보던 게일은 문득 미소를 지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지 눈에 훤히 보이는 것만 같았다. 작게 찌푸린 눈썹. 부조리하다는 듯이 저 뾰로통한 입술하며. 게일은 물에 충분히 적신 손수건을 오웬에게 건넸다.

“아, 고마워. 게일.”

“이 정도 쯤이야.”

오웬은 게일이 건넨 손수건을 흘끔 바라봤다. 어쩐지 크리쳐의 피를 닦기엔 좀 아까울만큼 고급스러운 손수건같은데…. 찜찜함을 뒤로 하고 오웬은 얼굴 위로 빠르게 굳어가는 피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게일이 운을 뗐다.

“예전에 읽은 적이 있어. 누군가와 함께 위험을 마주하게 되면 그 사람에게 더 쉽게 매력을 느낀다고 하더군. 오웬, 너도 그런걸 느껴본 적 있어?”

“…응?”

“그러니까 내 말은 넌 이런 위험천만한 장소에서도 매력적이란 거야.”

곧장 알아듣지 못한 오웬이 잠시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동안 나무 위에서 내려온 아스타리온과 섀도하트가 합류했다. 이해가 한 박자 느린 오웬의 뺨이 벌겋게 물들어갈 쯤에는 아스타리온을 선두로 일행이 허물어져가는 고성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오웬? 아직 확인할 게 남았어?”

“아니! 지금 갈게!”

멀리서 섀도하트의 채근하는 목소리에 오웬이 서둘러 세사람의 뒤를 쫓았다.


셀루네전초성에 무사히 진입한 뒤, 위험요소가 없음을 확인한 일행은 금방 야영 준비에 돌입했다. 거미굴에서 한 차례 격렬한 전투를 마치고 언더다크에 진입하자마자 예상치도 못하게 미노타우로스까지 마주한 상황이었다. 진이 빠지지 않고는 못배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웬은 잠시 전 게일이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던진 말로 인해 온전히 휴식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덕분에 텐트를 차리고 오웬이 제일 먼저 한 것은 아스타리온에게 손거울을 빌리는 일이었다.

“거울은 왜? 네가 외모를 신경 쓰는 줄은 전혀 몰랐는데.”

아스타리온은 탐탁찮은 표정으로 제가 가지고 있던 손거울을 그녀에게 건넸다. 오웬은 무어라 항변하고 싶었지만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아스타리온이 지적한대로 그녀가 외모에 신경쓰지 않는다는 건 사실이긴 했으니. 그것도 그럴 것이 자연 속을 부랑하며 야영을 밥먹듯 한 세월이 십수년이었다. 사정이 변변찮으면 열흘이고 한 달이고 씻지도 못하는 건 예사였으니 제 모습이 어떤지 신경쓸 겨를이야 있었겠는가. 오웬은 아스타리온에게 받은 손거울로 제 얼굴을 비추었다. 거울 속 제 모습은… 처참했다. 적어도 언더다크로 떠나기 전, 마지막 기회로 여겨 깨끗이 씻었던 것이 매우 오래된 과거의 일처럼 느껴질 정도로.

“윽.”

“왜?”

“생각한 것보다…별로네.”

‘별로?’ 쯧, 그 정도로 간단하게 표현될 수준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이지.”

아스타리온의 신랄한 평가가 즉시 잇따랐다. 역시 그렇지? 오웬이 눈을 데룩 굴리며 그 언젠가의 밤에 게일이 딱 오늘처럼 농담을 건네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열흘 넘게 물가에 가지 않지 않았느냐며. 게일은 최대한 내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씻으라는 말을 애써 돌려 한걸까? 그러니까… 그때도 그렇고, 설마 오늘도? 잠시 고민하던 오웬이 아스타리온에게 거울을 되돌려주며 물었다.

“아스타리온. 네가 봤을 때 지금 내 모습이 매력적이야?”

“허?”

아스타리온은 반사적으로 먹잇감을 물색하듯 위에서부터 아래로 오웬의 행색을 훑었다.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녀의 발끝에 잠시 머물렀던 시선은 이번에는 좀 더 빠르게 그녀의 얼굴을 향해 위로 훑어 올라갔다. 아스타리온이 운을 떼기 전 한번 혀를 찼을 때, 오웬은 그가 가감 없이 악담을 쏟아 부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 수 있었다.

“지금 네 모습이 어떤지 말해줄게. 거미가 쏘아댄 산성 체액에 온갖 피와 내장인지 뭔지 모를 게 머리카락 사이에 엉겨붙어 있어. 얼굴은 손수건으로 조금 문지른거론 소용도 없을만큼 피가 흥건히 묻어서 네 원래 피부색이 뭔지도 모를 정도야. 게다가 지금 너에게서 나는 냄새는….”

“충분히 이해했어. 더 이상 말해주지 않아도 돼.”

“그래. 매력이라곤 단 한 톨도 찾아볼 수가… 오, 이런. 설마 게일이야?”

쉬지 않고 오웬의 매력적이지 않은 요소들을 나열해대던 아스타리온이 마치 무언가 깨달은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잘못되기라도 한걸까. 오웬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두어번 끄덕였다. 아스타리온이 마치 못 들을 얘길 들은 사람처럼 아주 작게 ‘으’라고 신음했다.

“그럼 나한테 묻기 전에 네게 그 말을 한 사람이 그 망할 깔끔쟁이 위저드라는 걸 제일 먼저 알려주지 그랬어?”

“그러면 뭐가 달라져?”

“진심이야? 그 위저드는 네가 얼굴에 워그 똥을 퍼발라도 매력적이라고 할 걸.”

“그럴리가.”

오웬이 작게 항변했지만 아스타리온은 금세 지루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용건 다 봤으면 이제 돌아가지 않을래? 나는 게일과 너의 그 작고 소중한 러브 스토리에 관심이 없거든. 달링.”

“…미안. 푹 쉬어.”

오웬은 어쩐지 자신의 연애사정을 낯 부끄럽게 자랑하고 다닌 사춘기 소녀가 된 기분이 들어 더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제 텐트로 돌아가는 길에 오웬은 품에 고이 접어 두었던 게일의 손수건을 다시 꺼내들어 살폈다. 이제와 보니, 보드라운 천 귀퉁이에 게일의 이름이 자수로 세심하게 바느질되어 있었다. 최소한 누군가가 그에게 마음을 담아 선물한 손수건이리라. 연보라 빛 천은 피와 뭔지 모를 것들로 엉망이었다. 이런 귀중한 물건을 그냥 돌려줄 순 없었다. 오웬은 퍼뜩 혹시 몰라서 배낭에 욱여넣었던 잡동사니 중 비누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매번 어깨가 빠질 것 처럼 배낭을 꽉꽉 채워 담는 게 괴로워도 이렇게 한번쯤은 도움이 되기도 했다. 오웬이 작게 쾌재를 불렀다.


“게일. 손수건 잘 썼어. 고마워.”

게일은 오웬이 건넨 손수건을 보고선 눈을 크게 떴다. 섬세함과는 담을 쌓은 오웬이 손수건을 이리도 깔끔히 세탁해서 돌려주리라곤 게일도 예상치 못한 부분이었다. 채 지워지지 않은 얼룩덕분에 새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손수건에서는 제법 보송보송한 비누 냄새가 기분 좋게 풍겨왔다. 전날 밤 텐트에도 보이지 않고 분주해 보이더니 손수건을 직접 세탁하느라 바빴던 것일까. 맙소사. 가슴 한 부근이 빠듯해졌다. 게일은 지근거리에 있는 오웬을 무심코 제 품에 끌어당겨 안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언제든지 필요하면 말만 해.”

손수건을 건네주고 난 뒤에도 오웬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그의 앞에 서서 입술을 오물거렸다. 게일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마치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듯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어제.”

게일은 듣고 있다는 뜻으로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오웬의 뺨이 슬그머니 붉어졌다. 그 덕에 뺨 위로 마구 흩뿌려진 주근깨가 더 도드라져 보였다.

“내가 이런 곳에서까지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말했던 거, 진심이야?”

게일은 예상치도 못한 질문에 터져 나올뻔한 웃음을 겨우 참아냈다. 둔감한 것 쯤이야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둔감할줄이야. 대놓고 말해주어도 그녀는 대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게일은 오웬의 미련스러울 정도로 둔한 부분을 특히나 사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므로 그녀에 한정해 게일의 인내심은 밑도 끝도 없이 발휘되었다.

“물론이지. 넌 어디에 있든지 나에게 늘 매력적일거야. 오웬.”

“…….”

오웬은 마치 꿀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목에서부터 올라오는 열기가 얼굴 전체에 퍼지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맙소사, 아스타리온이 한 말이 정말이었어. 심장이 마치 귓전에서 요란히도 쿵쾅거리는 것 같았다.

“그 밖에 더 할 말은?”

“…없어. 그게 다야. 좋은 밤 보내, 게일.”

오웬은 그 즉시 얼굴을 바닥으로 푹 숙인 채 잰걸음으로 제 텐트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게일은 오웬의 등이 기둥 너머로 사라졌음에도 눈을 떼지 못하고 오래도록 미소지었다. 아직 연인도 아닌 이를 이렇게까지 사랑스럽다고 여겨본 적이 있었던가. 게일은 제 손에 들린 손수건의 향을 무심코 맡았다. 특이할 것 없는 우유향의 비누냄새 속에 오웬의 향이 어렴풋 묻어 있었다. 풀숲을 거닐 때 코끝을 맴도는 파릇한 녹음의 향기. 자신이 오웬을 사랑하게 된 것을 여지없이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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