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저드의 일기

손때 묻은 위저드의 일기장은 주문이 걸려 있어 아무나 열어보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비밀 다락 by 멍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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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일 데카리오스의 정갈한 필체로 글이 유려하게 작성되어 있습니다. ]

*위저드의 일기, 57 페이지

오웬이 죽었다.

정확히 상술하자면, 오늘이 아니라 오늘로부터 사흘 전에 일어난 일이다. 여느 때처럼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오웬은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난롯가 앞 흔들의자에 편히 기댄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명상중일까 싶어 일순 웃음이 비어져 나왔지만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까닭은 어깨에 항상 두르고 있던 낙엽 빛깔의 숄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가가 확인해보니 오웬이 숨을 쉬지 않았고, 느리게 뛰던 심장 소리는 고요했다. 손끝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늘 옅게 붉던 뺨은 파리했다. 아무리 흔들어 깨우고 이름을 불러봐도 대답이 돌아오질 않았다. 그 순간에 느꼈던 공포를 감히 물질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내가 오웬과의 결혼을 앞두고 병적인 조바심탓에 작성했던 ‘일어나선 안될 끔찍한 일들 101가지 목록과 그에 따른 예방법 혹은 후속조치’에 들어가 있는 일 중 단연코 제일 일어나지 않길 바랐던 일이었다. 애석하게도 예방법은 커녕 구제책 또한 아직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실정이었고. 죽은 그녀를 보는 것은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두려움이었다. 얼음 송곳으로 심장 곳곳을 촘촘히 찌르고, 예리한 칼날로 피부를 한 꺼풀씩 도려내는 고문을 받아도 이것보단 나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다. 만에 하나 오웬이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면… (쓰다 만 글씨 위로 여러번 그은 흔적이 있습니다.)

부끄럽게도 사인은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 내가 아직 도달하지 못하는 단계의 주문의 일종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시신이 부패하거나 훼손되지 않도록 신속히 보존 마법을 걸어두었다. 혹시 몰라 오웬의 평소 행적과 그녀의 소지품을 철저히 확인해봤으나 특이점이나 짚이는 부분은 딱히 없었다. 오웬은 나와 달리 장생종이므로 유언 따위를 써놓는 일은 없었다. 아무래도 상관 없다. 오웬의 죽음은 적어도 내가 살아 숨쉬는 동안 예정되어 있지 않은 일이다. 그건 그녀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금 내가 해야할 일은 쓸데없는 타성에 젖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오웬을 살려내는 것이다.

분명히 해두지만 비 이성적 사고도, 고집이나 아집도 아니다. 나는 오웬을 살려낼 수 있는 여러가지 방법을 알고 있고,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지식과 마력을 가지고 있으며, 실제로 내 죽음을 막기 위해 시행착오를 겪으며 제대로 된 ‘부활’의 과정을 몸소 겪어본 사람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부활이 쉬운 일이라고 결코 말 할 수 없겠지만. 각오는 되어 있다. 다만, 오웬의 부활 준비 과정에서 제일 힘든 부분은 ‘오웬이 곁에 없다’는 사실 그 자체겠지. 그녀와 결혼한 이후로 이렇게 멀리 떨어져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내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벌써 이것만으로도 오웬에게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같이 쌓였다. 오웬이 무사히 돌아오면 이전보다 사랑한다는 말을 더 많이, 더 자주 해줘야겠단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한계다. 쌀쌀맞게 불러도 대답해주지 않는 오웬일지라도 한 번 꼭 껴안고 와야 할 성 싶다.

*위저드의 일기, 61 페이지

위더스를 만났다.

그가 직접 초대장을 보내와 동료들과 함께 했던 연회 이후로 처음이었다. 당연한 것이지만 위더스는 내가 찾아오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육신을 떠난 오웬의 영혼을 다름 아닌 그가 직접 인도했을테니까. 물론 소득은 없었다. 오웬을 살려줄 수 없겠느냐 물으니, 순리에 따라 죽은 이를 되살리는 것은 자신의 권역이 아니라며 여상히 대답할 따름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고리타분하고 뼈다귀처럼 딱딱한 양반같으니. 필멸자 하나 정도야 삼악신의 말썽을 제압하고 난 후니 이제 그 쓸모를 다 하였다는 뜻이겠지. 그가 내게 되돌려줄 말이 ‘No.’ 라는 것쯤이야 이미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고 하여 실망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신에게 기대는 것이 하등 의미가 없음을 지난 세월의 과오로 알고 있으나, 지금의 나는 단 한조각의 도움을 구할 수 있다면 그것이 미스트라라고 할지언정 당장 그 앞에 엎드려 은혜로운 발등에 감사히 키스할 것이다. -물론 아직 내 상황이 그렇게 벼랑 끝까지 내몰린 것은 아니지만.- 내가 내 목숨을 걸고 기적적으로 진정한 부활의 두루마리를 한번 더 구하는 일의 어려움과 복잡함을 고려하면, 그놈의 빌어먹을 순리인지, 운명인지를 잠시 제쳐두고 한 생명 살리는 것 쯤은 신들에게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보다 쉬울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보면 아직도 검의 해안 어딘가에 고이 잠들어있을 카서스의 왕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불경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오웬이 알게 되면 얼마나 화를 낼 지 가늠이 되질 않는다. 그러나 뚜렷한 자구책을 찾지 못한다면 그 방법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지난 밤 오웬이 읽고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서적에서 작은 메모를 발견했다. 애플파이 레시피였다. 제대로 된 요리는 커녕 재료의 계량도 어려워하면서 내게 애플파이를 만들어주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다. 사과 3알, 설탕 50g, 밀가루 250g, 버터 200g…. 특별할 것도 없는 레시피를 단지 오웬의 손글씨라는 이유로 몇 번을 읽어내렸는지 모르겠다.

오늘로 오웬의 키스 없이 밤을 보낸 지가 벌써 일주일이다. 아, 이젠 인정할 때가 된 것 같다. 오 륙 년 전, 페이룬 북방에서 겪었던 살을 에는 혹독한 추위보다도 고통스러운 외로움이 영혼에 사무치는 듯 하다.

오웬, 내 사랑. 당신의 잠든 얼굴이 지겨울 날은 결코 오지 않겠지만 부디 내일은 날 향해 웃는 얼굴이 보고싶어.

*위저드의 일기, 74 페이지

문득 언젠가 홀로 상상했던 것이 떠올랐다. 내가 죽고난 후에 오웬은 어떤 삶을 살아갈까. 내가 없이도 오웬은 그녀가 살아왔던 생의 배가 훌쩍 넘는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므로. 난 그녀가 평생에 걸쳐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충분히 누리고 삶을 즐기며 행복하길 원했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참지 말고 해소하길 바랐고, 아름다운 시와 음악을 탐미하길 바랐고, 새로운 사랑을 만난다면 기꺼이 사랑하길 바랐다. 그녀의 삶 전체를 돌아 봤을 때 게일 데카리오스라는 사람이 그녀의 삶 한켠에나마 잠시 머물렀던 과거의 반려일지라도 상관 없었다.

그래, 어리석게도 그녀가 죽고난 후 나의 삶에 대해선 단 한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단 걸 이제야 깨달았다. 난 내가 뭘 원하는지, 뭘 해야하는지, 내가 어디에 발을 붙이고 서있는지 조차 모른 채 그저 방황하고 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건 오로지 그녀를 되살릴 수 있는 작은 가능성에 매달리는 것 뿐이다.

- 위저드의 일기장은 계속해서 갱신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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