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빌려서라도
게일타브
*2막 게일 고백 전 시점
*타브(여)=오웬
문라이즈 타워를 중심으로 그림자 저주에 물든 이 대지는 단순한 추위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기묘한 한기와 뒤틀린 이질감이 지배하고 있다. 최후의 빛 여관은 이 근방에서 그나마 사람답게 지낼만한 휴식 공간을 제공했으나 일각을 다투는 이 강행군에 번번이 안락한 휴식을 누리고자 여관으로 돌아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보니 일행이 각자 몸 뉘일 만한 공간이라도 있다면 그저 감사히 여기며 야영지를 꾸려야하니, 그 ‘워터딥의 게일’이 끔찍한 악몽에 시달려 잠을 설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첨탑 위에서 바라보는 높게 솟아오른 건물들 사이사이를 누비는 활기찬 사람들, 역동적으로 살아숨쉬는 찬란한 도시, 그가 무엇보다 사랑해 마지 않는 워터딥의 해안. 눈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하고 있으면, 곧 단전에서부터 끔찍한 열감이 올라온다. 온몸의 피가 오브가 있는 가슴 한가운데로 쏠리는 듯 숨 막히는 고통. 여기서는 안돼. 난… 빌어먹을, 통제할 수 있어. 정신차려. 제발 이 곳에서만큼은….
“…허억!”
날카롭게 숨을 들이마시며 게일이 눈을 떴다. 터질 듯 쿵쾅거리는 심장과 오장육부가 배배 꼬인 듯 한 울렁거림은 방금 그가 겪은 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게일은 오른팔을 들어 눈을 가린 채 천천히 숨을 골랐다. 장소나 사소한 디테일만 다를 뿐, 몇 번째인지 모를 똑같은 악몽이다. 이내 게일은 몸을 일으켜 세워 미지근한 물을 찾아 병 째로 들이켰다. 이 악몽의 제일 최악인 점은 그럭저럭 남은 희망을 그러모으는 이 순간에도 순식간에 기분을 밑바닥까지 끌어내리기 충분하다는 것이다. 비단 올챙이가 아니더라도 가슴 한 가운데에 이 위험천만한 오브를 박은 순간부터 단 한번도 감히 평온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게일은 무거운 숨을 내쉬고 침낭을 비집고 나왔다. 차가운 공기라도 맡고 진정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불길하게 펄떡거리는 심장도, 빌어먹을 오브도.
야영지 한 가운데에 피워놓은 모닥불이 희미하게 꺼져가고 있을 정도로 야심한 새벽이었다. 동이 트기 전 가장 어두운 시간. 게일은 무딘 시야가 곧 어둠에 익숙해지길 기다렸다. 그리곤 이내 무너져 가는 건물의 벽을 더듬어가며 바람이 통하는 쪽을 향해 걸었다. 곧 완전히 무너져내린 건물의 한쪽 벽 그 너머에 어두컴컴한 밤하늘이 보였다. 그러나 그의 눈을 제일 먼저 사로잡는 것은 광활한 밤하늘 그 아래 앉아 있는 이의 뒷모습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오웬은 홀로 새벽을 보내고 있었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오웬은 수면이 필요 없는 엘프였고, 게일은 오늘처럼 잠을 설칠 때마다 으레 어딘가에 있을 오웬을 찾아 나섰다. 마치 서로 암묵적으로 약속이나 한 듯이.
“오웬.”
게일은 오웬이 놀라지 않도록 부산스레 인기척을 냈고, 조심스럽게 작은 목소리로 오웬의 이름을 불렀다. 이름을 부르며 게일의 입꼬리가 자연스레 호선을 그렸다. 부드러운 부름에 한 박자 느리게 뒤 돌아본 오웬의 시선이 곧 게일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오웬의 얼굴에도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게일, 너구나.”
오웬은 무릎을 모은 채 그 위에 늘 지니고 다니는 수첩을 올려두곤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옆에 앉아도 되냐는 물음에 오웬이 대답 대신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게일은 한 사람이 빠듯히 앉을 수 있을 정도의 거리를 두고 오웬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오웬은 다시금 수첩 위로 선을 긋기 시작했다. 오웬은 수첩에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도 걱정된다는 어투로 중얼거렸다.
“잠이 안 와?”
“바로 옆 텐트에서 이를 무지막지하게 갈아대는 친구가 있어서 말이야. 이가 갓 난 새끼 놀이 떼거지로 우리 야영지를 습격이라도 한 줄 알고 부리나케 일어났지.”
“뭐?”
오웬이 그 말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킥킥거렸다. 오웬은 게일이 툭툭 던지는 말들에 곧잘 재밌다는 듯 이를 훤히 드러내며 소리내어 웃곤 했다. 오웬의 청명한 웃음 소리, 웃을 때마다 위 아래로 작게 들썩이는 어깨, 부드러운 어깨를 따라 물결처럼 굽이치는 노을빛 머리카락, 살짝 찡그린 콧잔등에 잡히는 작은 주름. 그 미소 한 조각을 얻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어릿광대라도 자처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느덧 단전을 들끓게 만들던 걱정거리는 사르르 녹아 없어졌고 대신 나비 한 마리가 날아다니는 듯 한 간질거림이 자리했다. 정말이지 이런 건 오랜만이었다. 누군가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따라서 웃음 짓게 되는 건. 그것만으로도 오웬이 좋은 이유론 충분했다. 오웬이 웃는 걸 넌지시 바라보던 게일이 이내 팔을 뒤로 뻗어 몸을 지탱하던 왼손을 오웬 쪽으로 슬쩍 내밀었다. 게일은 최대한 긴장을 숨기고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이 그러했듯 손가락 끝을 장난스레 까닥이며.
“손 좀 빌려주지 않을래?”
오웬이 그 말에 가까이 다가온 게일의 손바닥을 한 번, 그리고 게일의 얼굴을 한 번 번갈아 보았다. 필시 일전에 위브로 영혼이 엮였던 순간, 오웬이 저도 모르게 게일과의 로맨틱한 산책을 떠올린 탓이 명백했다. 그 날 이후로 자신이 침낭 안에서 몇 번이나 발을 동동 구르며 부끄러워하고 후회했는지 게일은 평생 모를 것이다. 부끄러움에 순식간에 뺨까지 열이 홧홧히 올라왔지만 오웬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픽 웃으며 오웬이 제 손을 내밀어 게일의 손바닥 위에 살포시 올렸다. 그러자 오웬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게일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새벽녘의 차디 찬 공기에 식어있던 손끝이 순식간에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겨우 손을 잡은 것 뿐인데. 손끝으로부터 전해지는 온기가 심장까지 전해지는 듯 했다. 위브로 엮여있던 그 마법같은 순간보다 게일이 더 가까이에서 느껴졌다. 둘 사이에 흐르던 부드러운 정적을 즐기며 잠시 밤하늘을 올려다 보던 게일이 어느덧 고개를 돌려 오웬을 바라보았다.
“발더스게이트에 가면 하고 싶은 일은 있어?”
“발더스게이트 영묘에 부모님이 계셔. 한 번 찾아 봬려고. 노틸로이드에 납치됐었다는 핑계를 대기 부끄럽게도 마지막으로 찾아간 게 언제였나 기억이 안 날 정도야.”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게일이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미안해. 정말 유감이야, 오웬.”
“괜찮아. 이미 두분이 잠든 지도 반 세기가 더 지났는걸.”
빈말이 아니라, 오웬은 정말로 괜찮았다. 그 ‘괜찮다’는 사실이 모순적으로 아프게 느껴질 정도로. 가족이 전부였던 그 시절엔 마치 전부를 잃어버린 것 처럼 슬프고, 괴롭고, 무서웠다. 이제 정말로 홀로 남았다는 사실에 공포가 전신을 갉아먹는 듯 했다. 그러나 엘프에게 시간은 영원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많았고, 그의 괴로움과 상관없이 흐르는 물을 막을 수 없듯 시간은 지나가버렸고, 겹겹이 쌓이는 세월 속에 그렇게나 짙었던 슬픔조차 우습게도 퇴색되었다. 그것이 오웬이 인간을, 게일을 사랑하기 무서워하는 까닭이었다.
“난 인간 부모님 손에 자랐거든. 태어나자마자. 너도 느꼈겠지만, 그래서 난 인간의 문화와 가치관이 더 익숙하게 느껴져.”
“…그러면 네가 보통의 엘프들하고 다른 것이 쉽게 설명되네.”
“그건 칭찬이야, 욕이야?”
“더 없는 찬사라고 해둘까.”
“하하. 나도 그래서 보통의 엘프들하고 그닥 친하지 않아. 뭐, 그들도 나를 유별나다고 생각하는 건 마찬가지겠지만.”
오웬이 건물 밖으로 내민 발끝을 앞뒤로 흔들었다. 엘민스터가 그에게 미스트라의 끔찍한 임무를 전달하고 간 이후로 게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오웬은 구태여 묻지 않았지만, 실은 그에 대한 물음이 목끝까지 차올랐던 게 사실이었다. 오웬은 그 물음을 삼키며 게일과 눈을 마주쳤다.
“그러는 넌 발더스게이트에서 계획이 있어?”
“글쎄, 워터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매일같이 하고 있지만. 발더스게이트라….”
게일이 말끝을 흐렸다. 방금까지 미소짓던 입술이 거짓말처럼 일자로 딱딱히 굳어 버렸다. 오웬의 질문에 새삼스레 깨달은 바가 있었다. 엘민스터로부터 임무를 전달 받고나서부터 그에게 계획이라곤 ‘절대자를 찾아내 이 저주받은 오브로 없애 버리고 미스트라의 용서를 구하는 것‘ 외에 그에게 뚜렷한 계획이 없다는 것을. 이렇게 오웬의 곁에서 뻔뻔스레 손을 잡으며 살아있음을 느끼는 주제에 속 편히 죽음으로써 모든걸 끝장낼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는 걸.
“게일.”
게일의 공백이 길어지자 오웬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웬이 깍지를 낀 손에 부드럽게 힘을 더 실었다.
“난 네가 한때 미스트라의 선택을 받은 뛰어난 재능의 위저드고, 가슴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험한 마법 오브를 품고 있고, 네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미스트라의 용서를 구하고 싶어할 만큼, 마법이 네게 얼마나 큰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알아.”
“…….”
“너도 알잖아. 내가 얼마나 단순한지. 그래서 네가 말해준… 그런 커다랗고 어려운 일에 대해선 함부로 말하고 싶지 않아. 그치만 난 네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너의 고양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또 어떤 경험이 지금의 널 만들었고 어떤 게 널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는지… 그런 것들이 더 궁금해. 그리고 이런 사소한 것들을 알아갈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남았길 바랄뿐이야.”
오웬의 말은 아주 긴 호흡을 들여 느리고 천천히 흘러나왔다. 게일은 조곤조곤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듣는 내내 목울대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울컥 치미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건 그가 이제껏 알았던 그 어떤 시보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고백이었다. 적어도 게일 데카리오스에게는. 겨우 말을 끝낸 오웬은 멋쩍은 듯이 콧잔등을 찡그리며 긴장한 채 물었다.
“그러니까… 너의 시간을 조금만 더 빌려주지 않을래?”
게일이 울대를 치는 울음을 삼켜내고 평소처럼 웃음 지었다.
“시간이라면 얼마든지 빌려줄게, 오웬. 나도 마침 네 손을 조금 더 오래 잡고 싶었거든.”
게일이 손깍지를 낀 오웬의 손을 조금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리고 오웬의 손등 위로 정중하게 키스했다. 그제야 오웬이 평소처럼 말갛게 미소지었다. 그 미소를 보고있자니 마음이 금세 두둥실 떠올랐다. 오브, 마인드 플레이어, 미스트라의 용서, 절대자, 그 모든 것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고 오히려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어쩌면…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겠어. 오웬을 따라 미소지으며 게일은 생각했다. 이 미소를 보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바보같은 계획보다 기꺼이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