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웅태섭]당신을 그리는 방법
*태웅태섭 전력: 바다
*사망소재주의
오랜만에 찾아온 바다는 여전했다. 짙은 파란색. 제가 가장 사랑했던. 모래사장 위에 짐을 올려두고, 가만 바다를 보고 있자면, 잔잔했던 바다는 크게 한 번씩 파도를 쳤다. 꼭 제 존재를 알아차린 것처럼. 왜 왔냐고 묻지 마세요.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문장이 입밖으로 튀었다. 이 모든 게 부질없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건, 이게 그를 그리는 제 방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의 형을 그리던 것처럼.
파도는 이제 신발 끄트머리까지 다가왔다. 그게 꼭 축객령 같아서 웃음이 났다. 하나도 안 무서워요. 바다를 보며 중얼인 그는 짐 위에 겉옷을 올려두었다. 파도는 이제 신발 끝을 적셨다. 엄한 생각하지 말라고요? 그는 그 문장을 내뱉으면서도 옅게 웃을 뿐, 또 다른 문장을 내뱉지는 않았다. 그는 여전히 모래사장에 앉은 채였으니까.
"태섭 형."
간결하게 떨어지는 단어. 형이라고 부를 때마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던 그는 꼭 몸을 섞을 때는 못 견뎌하듯이 형이라 불러달라 울었다. 그때마다 형이라고 불러주지 않았으면, 예전처럼 주장이나 선배라고 불러주었으면. 그랬으면 달라졌을까. 그는 매번 그 가설을 세웠으나, 결과값을 받아본 적은 없었다. 늘 결과값은 같았으니까. 현실은 매번 그를 꿈에서, 가설에서 끄집어 내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한들, 무엇이 바뀌겠는가. 세상은 생각보다 매정하고, 가혹한데.
"자꾸 내쫓지 말아요."
철썩. 파도가 신발을 적시자, 그는 덤덤하게 신발을 벗었다. 겨울 바람이 머리칼을 흐트려뜨렸다. 그것마저 그의 손길 같아, 그는 옅게 웃었다. 양말 사이로 모래사장의 냉기가 올라왔으나, 그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파도는 여전히 매서웠으나, 신발이 적셨던 게 무색할 정도로 더이상을 올라오지 않았다. 그냥 덮쳤으면 좋겠는데. 파도는 일정한 간격과 일정한 높이를 두고 모래사장을 건드렸다. 그는 그게 못내 서러웠지만 울지는 않았다. 눈물이 다 말랐기 때문이었다.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는 그의 목에도 걸려져 있었다. 덕분에 반지 두개 착용하고 다니는 사람 된 거 알아요? 자조적인 말에 파도는 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제야 몸을 일으켜, 양말을 벗었다. 잠잠해진 바다를 가르고 그가 만나러 와줬으면. 하는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며 남자는 그대로 모래사장을 밟고 새파란 바다를 향해 걸어들어갔다. 밀어내지 마. 시린 겨울 바다의 냉기가 발끝부터 차올랐다.
나는 매번 여름에 바다를 보러 와. 그게 그가 그의 형을 그리는 방법이라는 걸 안 뒤로는 매번 여름 바다만 보러 갔었다. 그곳에서 단 한 번도 겨울바다를 본 적이 없다는 말에 겨울 바다를 보러 오자고 약속했던 게 무색하게 그는 버티지 못하고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사유는 그리움. 형을 그리며, 바다에 왔던 그는 겁이 난다는 말이 무색하게 바다와 하나가 되어 물거품이 되었다. 찬란한 여름 바다. 그 이후로 그는, 서태웅은, 여름 바다를 보지 못했다.
"그곳에서 본 겨울 바다는 어땠나요?"
허리 부근까지 차오른 바닷물에도 그는 멈추는 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느리지만 꾸준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당신이 없으니까, 숨 쉬는 법을 잊어버렸어요. 서태웅은 정말 여름날이 될 때마다 폐사된 아가미로 숨을 쉬는 것처럼 할딱였다. 바닷물이 흉통을 압박했다. 그는 그 압박감에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올걸. 굳어버린 아가미를 벌리고, 산소를 들이켰다. 그제야 숨을 쉬었다.
형들이 저보고 살아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목까지 차오른 바닷물에도 파도는 여전히 잠잠했다. 밀어내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저에게 약했고, 저는 그에게 약했으니. 서태웅은 눈을 감고, 이제는 닿지 않는 땅을 잘못딛은 것마냥 그대로 바닷속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겨울 바다는 매섭다고들 하는데, 잔잔한 호수와도 같아 웃음이 났다. 눈을 감고 있으면, 바닷물은 저를 간질였고 시린 감각은 몸을 둔하게 만들었다. 바다는 넓고 아량이 깊으니, 저 같은 사람도 분명 받아주리라.
서태웅!
아, 진짜 지독하네. 서태웅은 눈을 감고 미소를 지은 채 어디에서 부르는지도 모르는 목소리를 가만 들었다. 서태웅. 그가 발음할 때마다 부드럽게 울리던 그 이름. 다른 이들이 부르면 모난 것도 같았는데. 그가 부를 때는 아주 부드러운 이름 같았다. 언듯 손길도 느껴지는 것 같아 눈을 뜨면, 제 앞에는 몇 번이고 그리던 남자가 그곳에 서 있었다. 선배. 이제는 다시는 당신을 형이라 부르지 않으리라. 지난 날의 과오를 되풀이 하지 않으리라. 다시는 당신을 놓치지 않으리라.
가야 해!
어디를 간단 말인가. 당신이 이곳에 있는데. 물살에 풀어진 머리칼이 부정의 의미를 담는다. 싫어요. 안 갈래요. 숨이 모자란 건지, 아닌 건지 구분조차 되지 않았지만 상관 없었다. 흉곽이 부풀고, 심장의 고동이 느려질 때마다 선명해지는 그의 모습에 서태웅은 추위에 굳은 팔을 뻗어 그를 매만졌다. 잘 지냈어요? 여상한 말, 여상한 행동.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것인데, 왜 당신은 또 우는지. 가야한다며 저를 밀어낼 때마다 힘없이 밀리는 것이 싫어 근육을 조여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싫어요. 하지 마세요.
송태섭은 처절했다. 바보 같은 제 애인을 살려야만 했다. 지난 날의 과오는 저로 충분하다. 제 죽음은 사고였고,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살고자 그렇게 마음을 먹었는데, 기어코 파도는 송 씨 가문을 모조리 앗아갈 모양인 듯 싶었다. 가서 우리 엄마와 우리 동생과 악착같이 살아줘. 제발, 태웅아. 송태섭은 그를 살려야 했다. 그래야 제 형을 볼 수가 있으니까. 태웅아, 태웅아.
서태웅은 우는 그를 보며 연신 입술을 움직였다.
하지마세요. 나를 보내지 마세요. 당신과 함께 있게 해주세요. 겨울 바다를 보자고 했잖아요.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이건 제가 당신을 그리는 방법이예요. 내 방식을 무너뜨리지 말아요. 제발. 제발. 자기야, 내 사랑아, 나의 형, 태섭 형, 선배, 주장. 제발 나를 뭍으로 보내지 마세요. 나만 살아있게 두지 마세요. 겨우 이제 숨을 쉬는데, 저 뭍으로 가면 나는 살 수 없어요. 폐사된 물고기마냥 죽어버린 눈으로 당신을 그리워 하게 하지 마세요. 부탁입니다. 나를 혼자 두지 말아요. 나와 함께 있어주세요. 당신 곁에 있게 해주세요. 이제는 더 이상 바다가 보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을게요. 제발. 제발. 나의 사랑, 나를. 나를…….
몸이 아래로 추락하는 와중에도 송태섭은 그를 밀어내었다. 지독한 고백에 엉엉, 울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파도는 커다랗게 그를 싣고 움직였다. 겨울 바다는 매섭고, 잔인했다. 허락하지 않은 자는 절대 제 속으로 삼켜주지 않았다. 철썩, 파도는 그를 데리고 연신 움직였다. 송태섭은 멀어지는 그를 보며 이거면 되었다고 웃었다. 그가 몇 번이고 바다에 뛰어들 때마다 그를 살리겠다고. 그의 처절한 고백은 제 속에 품고 있겠다고. 멀어지는 그를 보며 몇 번이고 다짐했다. 이곳은 송태섭의 바다였으니까.
허억. 아이고, 청년! 구급차 왔어요? 어지럽게 흐트러지는 언어들이 익숙했다. 파도는 언제 무섭게 쳤냐는 듯이 잠잠했다. 서태웅은 제 가슴팍에 얹어진 반지가,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여전하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어어,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고함소리가 물에 젖어 먹먹했다. 서태웅은 망연한 얼굴로 바다를 보았다. 여전히 새파란 바다. 저를 밀어내던 그의 손길에 여전한데. 그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그게 못내 서러워서. 서태웅은 몸을 웅크린 채 커다랗게 울음을 내질렀다. 꺽꺽이며 우는 그를 그 누구도 말리지 못했다. 태웅아! 엉엉 우는 그를 끌어안은 건. 대만도, 치수도, 준호도, 달재도, 우성도, 백호도 아닌.
그가 사랑하고 그를 사랑한 서태웅을 사랑해준.
그의 어머니였다.
서태웅은 그 체온을 느끼고, 제 등을 쓸어주는 손길을 느끼며, 엉엉 울고 또 울었다. 식어빠진 체온이 그녀의 체온으로 데워질 때까지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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