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웅태섭]유토피아 - 3
센티넬가이드
여기는 너의 새로운 가이드-
파장을 깨버리는 새끼가 어딨냐고!
이래서 연구소 소속은-!
서태웅의 인생은 새하얀 정사각형의 공간에서 시작된다. 어머니는 연구원이었고, 아버지는 센티넬이었던 그는 아주 어린 나이에 발현된 능력 탓에 연구소에서 나고 자랐다. 그곳이 서태웅의 세상인 것이다. 때가 되면 밥을 먹었고, 때가 되면 지긋지긋한 패드를 덕지덕지 붙이고, 능력을 측정하고, 저를 무서워 하는 가이드와 마주 앉아, 파장을 측정했다. S+급. 그 등급은 서태웅의 이름이었다. 자연계 센티넬. 그건 서태웅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서태웅은 잘 웃지 않았고, 가이드들이 무서워 하면 뻗었던 손을 숨겼다. 그리고 다시 정사각형의 공간으로 돌아갈 때마다 울었다. 물론, 그 울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 모든 것에 무감해 지기까지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제 그만 놔줘. 나는 더 못해.
그는 단 한 번도 무엇인가를 제대로 가져본 적이 없었다. 가져보고 싶으면 부서졌고, 도망쳤고, 놔달라며 빌었다. 그래서 서태웅은 가져본 적이 없었다. 욕심은 사치였고, 혼자가 편했다. 센티넬 하나 죽는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니. 그가 놔버리면, 다른 이들은 그를 살리기 위해 온갖 방법을 썼다. 약물 사용은 과다했고, 애정은 바닥이었다. 제 앞에서 우는 여자는 오래 전에 죽은 이었기에. 서태웅은 이게 꿈인 걸 알았다. 꿈속에서도 내어볼 법한 욕심인데도 그는 순순히 그녀를 놔주었다. 욕심이 생기기 전에 놓는 게 그의 습관이었기에.
그만 둬. 나 힘들다. 그만하자.
꿈은 꾸는 사람을 자각한다. 그래서였나. 그녀는 금방 제가 아는 사람으로 변했다. 처음 욕심 내어본 이. 도망가지도 않고, 매칭 가이드까지 차지한 사람. 서태웅의 세상. 무던한 얼굴로 그만하자는 얼굴에는 그 무엇도 담겨지지 않아서. 서태웅은 헛웃음이 났다. 그래서 서태웅은 송태섭의 손을 놨다. 힘들면 놓으라고 한 건 자신이었으니까. 부서져 내리는 송태섭. 그 무엇도 남지 않은 공간. 들어오는 빛.
달칵.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었다.
"태웅아. 괜찮아?"
"아."
뺨이 축축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운 모양이었다. 네. 서태웅은 덤덤하게 대답을 건네고, 몸을 일으켜 눈물이 묻은 뺨을 닦아내었다. 울음의 흔적은 금세 지워졌고, 걱정스러운 송태섭의 낯만이 그가 울었다는 걸 알려주었다. 태웅아. 부드러운 어조에 서태웅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익숙하게 벌린 팔, 따스한 눈빛. 처음으로 서태웅이 욕심낸 그것. 그만하자. 꿈의 잔상이 그를 덮었다. 그래서 서태웅은 품에 안기는 대신, 고개를 내젓고 수도 없이 내뱉던 말을 뱉었다.
"괜찮아요."
"이리 와."
송태섭은 쉽게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검은 눈동자에 담긴 불안감을 그는 알았다. 얼른. 조금 더 재촉하자, 서태웅은 머뭇거리다가 품에 안겼다. 딱 들어맞는 퍼즐. 따뜻하게 퍼지는 가이딩. 서태웅은 눈을 감고 그것을 음미했다.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그건 손가락 끄트머리에 자리잡은 거스러미 같아서. 금방 사라진 대신에 자국을 남겼다. 송태섭의 반팔티 위에 동그랗게.
송태섭은 헐떡이며 울던 그를 생각했다. 무슨 꿈을 꿨을까. 욕실에서 나눈 이야기 뒤로, 두 사람 관계에는 균열이 일었다. 아주 미세한 틈. 송태섭은 넓다란 등에 새겨진 흉터와, 팔에 남은 주삿바늘을 기억한다. 흡사 약쟁이 같던 그. 약물 파장을 깨고, 첫 가이딩 때 이뤄지던 발작. 송태섭의 고양감. 송태섭은 그에게 약했다. 저는 그에게 그 무엇도 숨길 수가 없었고, 늘 드러내지 못해 안달이었다. 서태웅은 송태섭의 욕심이었다. 그건 영영 변치 않을 명제였다.
"무슨 생각해요?"
"너 약쟁이 시절."
"그런 게 취향이에요?"
송태섭은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재미도 없는 농담을 내뱉는 제 센티넬의 정강이를 찼다. 미친 놈아. 서태웅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옷을 입었다. 약을 하듯, 팔에 즐비했던 주삿바늘은 사라진지 오래지만, 흉터는 그대로였다. 등판에 크게 남은 상처. 누군가에 의해 베였다던 그 상처를 처음 보았을 때. 송태섭은 울며 그랬었다. 가이딩이면 다 나았을 텐데. 그때 서태웅은 뭐라고 했더라. 아마 그게 아니어도 남았을 거라고 했을 테였다. 그가 아는 서태웅은 그런 놈이었으니까.
송태섭의 취향의 옷. 서태웅은 익숙하게 부엌에 서서, 그가 먹을 아침을 준비했다. 밥심이라며 아침마다 밥을 먹는 탓에 서태웅도 어느 순간부터는 밥을 입안에 밀어넣었다. 그게 반복되니 일상이 되었다. 아주 작고 당연한. 이제는 그가 없던 시절은 희미해져버릴 정도로.
"나 달걀프라이."
"반숙이죠?"
"오늘은 스크램블 먹을래."
"케챱 뿌려줘요?"
아니이. 서태웅은 예전에 만났던 그의 여동생을 떠올렸다. 신기할 정도로 닮은 두 사람. 서태웅은 계란을 우그러뜨리며 가볍게 손을 놀렸다. 포슬하게 올라온 계란을 접시에 담으면, 옮기는 손길은 재빠르다. 서태웅은 센티넬 치고는 움직임이 느린 편이었다. 감각이 예민해 온갖 짜증을 지랄맞게 부리는 것들과는 달랐다. 느릿한 움직임으로 아침 준비를 다한 두 사람은 동시에 의자에 앉았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서태웅은 잘 웃지 않았다. 웃어도 미미한 미소가 다였다. 그런 그를 바꾼 건 송태섭이었다. 송태섭은 포슬한 계란을 입에 넣고 씹으며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잘생긴 얼굴, 무던한 성정, 기피하던 가이딩, 습관적인 약물 의존. 괜찮습니다. 를 달고 살던 이상한 센티넬. 자신보다 가이드를 우선 시하던 센티넬. 제가 조금만 다쳐도 능력을 써대던 기이한 센티넬. 송태섭의 욕심.
"팀장."
"어?"
"무슨 생각해요."
아무 생각 안 해. 뻔히 보이는 거짓말에도 서태웅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 먹은 그릇 정리는 서태웅이, 설거지는 송태섭이 했다. 아까와는 달리, 재빠르게 끝난 것들에 서태웅은 익숙하게 치약을 짠 칫솔을 건네었다. 오늘부터 훈련인 거 알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무리하지 마."
"알아요."
서태웅은 조절할 줄 알았다. 자기가 어떻게 해야, 피해가 가지 않게 되는지도 알았다. 서태웅은 모든 리스크를 자신이 감내하였다. 그게 잘못된 방식인 걸 알면서도 오래된 습관 같은 것들은 그러했다. 배운 방식이 그러하니 이제와 고칠 수도 없었다. 서태웅 씨는 유의 하셔야 할 겁니다. 연구소장이 했던 말을 떠올린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제가 더 잘 알았다.
"태웅아."
"네."
"가이딩 필요해?"
그의 물음에 고개를 내저었다. 일그러지는 눈썹에 서태웅은 가만히 그를 품에 안고서는 답했다. 계속 파장 펼치고 있었던 거 알아요. 정말 괜찮아요. 다정한 말에 일그러진 눈썹이 곧게 펴졌다. 서태웅은 그의 미간을 꾹꾹 누르며 그곳에 짧게 입을 맞췄다. 주름 생긴다니까요.
그럼, 말 좀 잘 들어. 말도 예쁘게 하고. 분명 어젯밤의 이야기일 테다. 서태웅은 옷을 갈아입고, 아이디 카드를 목에 걸고, 비상 시에 누를 수 있는 호출기를 챙기고, 폭주 능력 제어기를 손목에 차며, 신을 꿰 신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사과를 듣고자 한 말은 아니었지만, 사과를 받아드린 송태섭은 그의 결좋은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그랬다. 나는 너 안 떠나. 죽어도 안 떠날 거야. 서태웅은 눈을 내리 감고, 그 손길을 느꼈다. 당신은 조금 더 행복해야 해요. 불안한 센티넬 옆이 아닌. 물론 그 말을 내뱉지는 않았다. 아마 영영 하지 않을 말이었으니까.
서태웅은 그와 처음 만난 날에도 그런 말을 했다는 걸 기억한다. 매칭 가이드는 힘들다고 했음에도, 울며 매칭 가이드를 등록하던 그 또한 기억한다. 왜 그랬냐는 말에 얼버무리던 그도. 서태웅은 그의 옆자리에 존재하는 저는 대채제 라는 것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곁에 있는 건, 그가 제 세상이라서. 부술 수 없는 성역이기에.
"다녀올게요."
"너무 무리하지 마."
당부, 그리고 또 당부. 서태웅은 지겹지도 않은 듯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답을 건네고는 서태웅은 숙소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강백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송태섭은 한참이나 그곳을 벗어나지 못한 채로 서 있다가 겨우 발걸음을 옮겼다. 서태웅은 괜찮을 것이다. 무엇이 되었든 간에.
[태웅태섭]유토피아
"멍청아."
서태웅은 불꽃을 가볍게 꺼뜨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드래곤 소환까지는 좋다. 광역용이니 세밀함이 좀 떨어져도 괜찮다. 하지만 작은 능력을 크게 증폭 시키는 것도 서툴렀고, 무작정 때려 부수는 것만 잘했다. 그러니 폭주가 올 수 밖에. 서태웅은 능력을 과하게 사용할 때마다 브레이크를 걸었으나, 누적되니 피로감이 쌓였다. 붉은 머리칼의 끝이 검게 물들이는 게 보이자, 서태웅은 트레이닝을 멈추었다. 왜, 멈추는 거야! 커다란 고함소리에 서태웅은 고개를 내저었다.
"네 머리칼을 봐라, 이 멍청아."
"익……!"
그러면 가이드가 힘들어. 낮고 스산한 목소리에 강백호는 입을 다물었다. 트레이닝 룸은 뜨거웠고, 더웠다. 서태웅은 열기가 지글지글한 강백호를 보며 좀 쉬었다가 하자는 말을 내뱉었다. 이제 막 발현했으니 어려운 게 당연했다. 서태웅은 조급한 성격이 아니었으나, 강백호는 아닌 듯했다. 다시 해, 여우. 서태웅은 대꾸조차 안했다.
하자니까! 땅을 쾅, 구르자 바닥이 달라지고 불기둥이 솟았다. 저 멍청이가! 서태웅은 가볍게 그걸 피하며 바닥을 얼렸다. 용암이 굳은 것처럼 검게 변한 바닥을 보며 무어라 하기도 전에 날카로운 창이 그를 스쳐지나갔다. 조금만 늦었으면 베이던지, 데이던지. 둘 중 하나로 제 뺨이 조져졌을 테였다. 강백호! 붉게 타오르는 눈. 나는 빨리 강해져야해. 그러니 그냥 하자고. 아니면 겁이 나냐? 빈정거리는 말과 시도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능력에 서태웅은 정말 저새끼와 안 맞는다는 생각을 하며 뜨거운 공간에 눈을 내렸다. 불과 눈이 만나 비가 내렸다. 때 아닌 폭우였다.
"머리 좀 식혀."
"……."
"가이드 기절시키고 싶지 않……!"
쏟아지는 빗물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육탄전. 서태웅은 바닥에 피를 뱉으며 혀를 짧게 차내었다. 폭주 1단계 능력 해지하시겠습니까? 서태웅은 호출기를 누르고는 능력 해지를 선택하는 대신, 이미 능력 하나를 열어버린 강백호를 맨 몸으로 막아세웠다. 혼나던지, 울리던지. 호출기가 울리자마자 아마 각 가이드는 이곳으로 올 테였다. 서태웅은 유려하게 그의 몸에 올라타, 뒤에서 팔로 그의 목을 조르며, 능력을 봉인하고는 그대로 기절시켰다. 육중한 몸이 트레이닝 룸에 엎어졌다. 동시에 가이드가 들이닥쳤다.
"태웅아!"
송태섭은 이제 막 회복하기 시작하는 피부와 난장판이 된 트레이닝 룸을 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괜찮아요. 서태웅은 깨문 입술을 손끝으로 누르며 옅게 웃어보였다. 무엇이 괜찮다는 말인가. 도대체 무엇이. 아무것도 괜찮은 게 없는데. 강백호는 제 가이드와 함께 의무실로 갈 예정이었다. 바닥 축축해요. 송태섭은 여전히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동자를 보며 숨을 고르게 내쉬려고 무던히 노력해야만 했다. 그 누구에게도 탓을 돌릴 수 없기 때문에. 팀장이라는 직책은 그런 것이었다.
"왜, 왜 이렇게까지 해?"
"팀장."
"무리하지 말라고 그랬잖아."
서태웅은 정말로 괜찮았다. 폭주 능력을 사용한 것도 아니고, 맨 몸으로 싸운 게 더 많았다. 울지 마세요. 빗물인지, 눈물인지. 송태섭의 뺨을 손바닥으로 닦아주며, 그는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송태섭은 우그러진 그의 뺨을 쥐고는 천천히 입술을 맞대고, 가이딩을 흘려 보냈다. 서태웅은 그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이것마저 거부하면 좋게 끝나지 않을 테였으니까. 정적이 내려앉은 곳에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너, 배고파? 서태웅의 귓가가 붉게 물들었다.
"아하하!"
"웃지 마세요."
"가자. 뭐 좀 먹으러."
니들은 좀 살살해라. 식당에 도착하자 정대만의 잔소리가 쏟아진다. 몸 좀 아껴 쓰라는 말. 권준호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음식을 그의 입안에 쑤셔넣었다. 서태웅은 식판 두 개를 한 손에 가볍게 들고는 고개를 숙였다. 멀쩡해 보이네. 가벼운 권준호의 말에 서태웅은 송태섭의 식판을 놔두며 그랬다. 괜찮으세요?
"나 말하는 거야?"
"네. 가이드 능력 끌어다 쓰셨잖아요."
"난 괜찮아."
서태웅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은편에 앉은 송태섭에게 물컵을 밀어주고는 음식을 크게 베어 물었다. 양 뺨이 불룩해지는 걸 보고 나서야 송태섭 또한 음식을 집어 넣었다. 백호는 어땠어? 권준호의 물음에도 한참이나 말이 없던 서태웅은 느릿하게 음식을 다 삼키고 나서야 천천히 말을 뱉었다. 엉망입니다. 이제 막 발현해서요. 차마 최악이니, 너무 과하다니 그런 말을 구태여 하지 않았다. 혼란스러움은 제가 더 잘 알고 있었고, 조급함 또한 제가 더 잘 알고 있었으니까.
권준호는 그 말을 뒤로 무엇도 묻지 않았고, 정대만도 그때만큼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한참만에 식당에 나타난 강백호와 양호열의 합석이 이루어지고 나서야 식탁에는 이런저런 말이 오갔다. 미안하다. 양호열의 사과에 서태웅은 햄버거의 포장지를 하나 더 뜯으며 그랬다. 사과는 네가 할게 아닌 것 같은데. 그제야 강백호가 작게 사과를 건네었다. 흥. 콧방귀를 끝으로 서태웅은 햄버거를 크게 베어 물었다. 그때까지도 송태섭은 그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았다.
"팀장."
"……."
"선배."
"……."
"형."
어? 그제야 송태섭은 고개를 들어, 서태웅을 바라보았다. 불렀어? 네. 미안. 왜? 서태웅은 그에게 당신은 너무 생각이 많다는 말을 하는 대신에 식사, 하세요. 할 뿐이었다. 송태섭은 제 앞에 앉아 저를 빤히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인지하고 나서야 잡생각을 지워내고 상황에 집중했다. 그는 가이드 송태섭이기 전에, 북산 소속 팀장이었다. 개인적인 감정은 집어치우고, 팀장으로써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정밀도는?"
"떨어집니다."
"정확성."
"떨어집니다."
"파괴력."
"등급보다 훨 웃돌고 있습니다."
정대만은 숨이 막힐 것 같아 그를 말리려던 찰나, 고개를 끄덕이며 상황을 일단락 시켰다. 다음 임무 전까지는 할 수 있겠어? 서태웅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하라고 하면, 해야만 했다. 그건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제 가이드이기 전에, 팀장이었다. 상관의 말을 지키지 못하는 자는 필요가 없다. 강백호는 제 손을 잡은, 양호열의 손을 한 번 세게 잡았다 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이상 그 누구도 잃고 싶지 않았다. 그 누구도.
정대만은 센티넬들을 바라본다. 가이드 하나에 목숨을 거는 그들을. 네가 이곳에 있으니까. 지키는 거야. 그 언젠가 권준호가 했던 말. 그들은 가이드가 아니어도, 이들을 지켰을까. 가이드가 아니어도. 이 엉망진창인 곳을. 내뱉지 못할 말을 삼키며 정대만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만아. 왜 그래? 권준호의 다정이 물처럼 밀려 들어왔다.
"아무것도……."
[본부 상황실에서 각 소속에게 보냅니다. 소속 센티넬과 가이드는 지금 바로 회의실로 와 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본부 상황실에서 각 소속에게 보냅니다…….]
때 아닌 방송에 서태웅은 곧바로 몸을 일으켰고, 나머지도 재빠르게 움직였다. 송태섭은 서태웅의 손을 잡았다. 그제야 바닥을 잔잔하게 적시던 불안감이 해소됨을 느꼈다. 서태웅은 그의 손을 마주 잡고는 고개를 살짝 숙여 괜찮다는 말을 속삭였다. 송태섭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걸음을 옮겨, 회의실의 문을 열었다.
***
"그게 말이 된다고!"
[저희도 인지하고 있는 부분입니다만, 현재 총력이 제일 높은 건 북산 소속이므로…….]
"저희는 센티넬 둘을 잃을 뻔 했습니다."
송태섭은 책상 아래에 손가락을 두고 연신 잡아 뜯었다. 따끔한 고통은 스스로를 정신차리게 일깨워주었다. 어딜 감히. 그는 가이드이기 전에 팀장이다. 한 팀의 팀장. 사지로 내몰 수는 없다. 각 소속은 자신의 팀을 가장 중요시 한다. 그건 본부도 아는 부분. 송태섭은 밀리지 않았다. 현재 산왕, 지학이 뜻을 모았습니다. 단호한 어투에도 송태섭은 밀리지 않았다. 안 돼. 절대. 하지만 그 마음이 무색하게 손톱을 잡아뜯는 행위를 멈춘 것도, 단호하게 밀어붙이던 말도, 무너뜨린 건 서태웅이었다.
"반정부 세력의 규모가 얼마나 됩니까."
"서태웅."
대답 대신, 손을 잡아오는 뜨거운 온기. 본부는 이제 서태웅으로 타켓을 돌리려는 모양이었다. 명확하지는 않습다만, 대규모 전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서태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센티넬의 인권은 바닥을 치고 있었고, 가이드들은 그런 센티넬을 살리고 싶어했다. 소모품. 신인류라 지정된 날부터 붙은 꼬리표. 서태웅은 그들을 이해했다. 문드러진 속, 그 안에서부터 시작되는 변화의 불꽃. 아마 이 일로 센티넬과 가이드의 인권은 다시 한 번 바뀔 테였다. 송태섭은 서태웅을 바라보았다. 서태웅은 송태섭을 바라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하겠습니다.
"서태웅!"
"어차피 참가해야 해요."
"네가 팀장이야? 그걸 당장 회의도 없이……!"
"팀장. 우리의 의견이 중요한가요?"
"뭐?"
저희는 하라면, 해야하잖아요. 송태섭은 저 눈이 싫었다. 하라면 하고, 말라면 마는 눈. 진작에 뒤져버린 듯한 눈. 그 속에 담아둔 다 괜찮을 거라는 다정함. 그것과 다르게 단호하고 직실적인 말. 그래. 하라면 해야했다. 달라지는 건 없다. 기간만 늘릴 뿐이지. 선택권을 빙자한 강요. 송태섭은 피가 나던 손가락을 쥔 탓에 그의 손바닥에 이리저리 묻은 피를 바라보았다. 그 손에는 얼마나 많은 피가 묻었을까. 송태섭은 한숨을 내쉬었다. 북산 소속의 이들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 그들은 선택권이 없다. 선택권은 산왕이나 지학 같은 곳이나 있는 것이다. 그들이 참전한다면, 저희는 해야했다. 그리고 가장 앞에 서서, 우두머리 행색을 하게 될 테였다.
"좆같네, 진짜."
서태웅은 화상 회의를 나가며 뒷짐을 지고, 송태섭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송태섭은 스스로 체벌을 기다리는 센티넬이 죽을만큼 싫었다. 연구 시설에서 나고 자란 영상을 보며, 얼마나 구역질을 해댔는가. 그래서 겨우 바꿔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지. 송태섭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서태웅을 지나쳐 회의실을 나섰다. 정대만은 서태웅을 어깨를 쥐고는 그랬다. 그걸 제일 싫어하는 걸 알면서 그러고 있으면 어쩌라는 거야. 서태웅은 여전히 뒷짐을 풀지 않았다. 정대만은 그런 그를 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강백호도 참전이야. 가서 죽어라 굴려. 책임지고."
"……선배."
나는 오늘 너 꼬라지 진짜 마음에 안 든다. 정대만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회의실을 나섰다. 불이 꺼진 회의실에는 서태웅만이 고요하게 서 있었다. 그는 배운 걸 써먹을 뿐이었다. 그가 반정부세력에 가담하지 않은 게 그들에게는 행운이라는 걸, 그들만 몰랐다. 서태웅은 제 발밑에서 시작되는 새하얀 결정을 바라보았다. 능력이 싫었다. 가이드 생을 빨아먹으며 기생하는 삶이 지겨웠다. 그래, 서태웅은 죽고 싶었다. 제 가이드에게는 최악이겠지만, 서태웅은 정말로 그러했다. 이제는 그만 하고 싶었다.
"태웅아."
"……."
참 잔인하기도 하지. 서태웅은 고개를 들어, 문 앞에 서 있는 제 가이드를 바라보았다. 여전한 낯. 뭐해, 거기서. 서태웅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발걸음을 옮기는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그곳. 송태섭은 짜증스러운 낯을 숨기지도 않고, 손만 까딱였다. 오라고. 그제야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긴 서태웅은 여전히 송태섭의 뒤에 서 있었다.
북산의 전투 참전 이후로 능남과 해남, 상양까지 뜻을 모았다. 고작 반정부 세력을 짓밟기 위해 이렇게까지 과한 처사를 행해야 하냐는 물음에 그 누구도 답을 내려주지 않았다. 그들도 센티넬이고, 가이드였다. 지켜야 할 것이 명백 했으므로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서태웅은 그날 이후로 바빴다. 강백호의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야 했고, 능력 쓰는 법을 알려줘야 했으니까. 다행인 것은 강백호는 습득력이 빨랐고, 서태웅은 좋은 센티넬이었다. 가이드들만 숨을 죽이고 언제든 가이딩을 위해 대기해야 했지만. 폭주 능력 4단계 해방, 가이드의 승인 완료. 강백호와 서태웅이 맞부딪쳤다. 트레이닝 룸에 굉음이 터졌다.
"허억, 헉."
"이, 미친 허억, 여우가."
서태웅은 흐르는 코피를 대충 닦아내고 곧게 섰다. 강백호 또한 곧바로 몸을 바로 세웠다. 개방된 폭주 능력은 이한나의 손길로 모두 봉인이 되었다. 그대로 두 사람의 몸이 쓰러졌다. 이거, 이거, 써야 하냐? 강백호는 입밖으로 피를 연신 토해내며 물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서태웅은 희게 질린 얼굴로 답했다. 이, 미친새끼들아! 송태섭의 고함이 우뢰처럼 터졌다.
"야. 호열아. 나 괜찮어."
"조용히 해, 강백호."
강백호는 킬킬 웃으며 잔뜩 일그러진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뭐, 좋다고 웃어. 듣는 사람이 다 괴로워질 정도로 엉망인 목소리에 강백호는 몸을 일으켜, 그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대며 속삭였다. 내가 지켜준다고 했잖냐. 이건 네 허락이 없으면, 평생 못 여는 장치야. 그러니까 호열아. 걱정하지 마. 다정한 목소리에 양호열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그의 입술에 입을 맞대었다. 쏟아지는 가이딩에 강백호는 하하, 웃으면서 커다란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고는 입을 벌렸다.
"태웅아. 서태웅."
한 구석에서 두 사람이 저러고 있으면, 송태섭은 밭은 숨만 내뱉는 서태웅을 급히 끌어안았다. 능력 탓인지, 차가운 몸이 무서웠다. 태웅아, 태웅아. 송태섭의 다급한 부름에 이한나와 채소연이 급히 내려왔다. 그의 팔에 패치를 부르려던 찰나, 서태웅의 눈이 번쩍 떠졌다. 팔을 뻗어 무언가를 쥐려던 찰나, 송태섭이 그것을 저지했다. 태웅아. 그제야 손을 무른 그는 얌전히 팔에 감싸지는 패치와 화면에 떠 있는 수치를 바라보았다. 폭주전조증상. 전보다 훨 나았다.
강백호와 서태웅은 얌전히 의무실 행이었다. 서태웅은 침대에 걸텨앉아, 센티넬 강백호에 대한 보고를 입에 올렸고, 송태섭은 팀장으로써의 말이 끝나고 나서야 그를 끌어안았다. 서태웅은 얌전히 그를 끌어안고는 등을 쓸어주었다. 손바닥에 닿는 가이딩이 부드러웠다.
"네가 안 깨어나는 줄 알았어."
서태웅은 꿈에서 당신이 나와, 가지 말라며 부르짖었다는 말을 구태여 하지는 않았다. 그럼 가장 괴로운 얼굴을 지을 테니까. 죄송해요. 송태섭은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그의 옷깃을 잡고 입을 맞췄다. 서태웅은 그를 가벼이 안아 올리고 침대에 내려두고는 연신 입을 맞췄다. 하자, 태웅아. 그의 말은 불가항력적이다. 그러니 하자면 해야 했다.
송태섭의 옷을 벗기며, 서태웅은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
본부에 모인 팀을 보며, 송태섭은 치미는 구역감을 애써 삼키며 바르게 서 있었다. 서태웅은 그런 그의 옆에 선 채로 손을 잡아주며 그의 안색을 살폈다. 나 괜찮아. 서태웅은 여전히 손을 잡은 채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커진 규모에 가이드들이 동요했다. 사상자는 물론이고, 이 전투로 많은 게 바뀔 거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을 테였다. 이건 반정부 세력을 무력화 시킨다는 목적으로 시행되는 정부와 본부의 무력화니까. 거기에 있는 모두가 다 같은 생각일 테였다.
산왕과 지학, 북산이 전방. 해남, 능남, 상양이 후방. 체계적으로 짜여진 구도에 송태섭은 이를 악물었다. 좆같은 새끼들. 서태웅은 그의 분노를 이해했다. 인력 부족으로 투입된 날에도 이랬으니까. 본부는 소속 팀을 체스 말처럼 부렸다. 마지막까지도 그들은 여전했다. 달라지는 게 없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불씨는 서태웅이 당길 테였으니까.
"서태웅."
"네."
지시가 먼저야. 지시가 없으면 기다려. 송태섭은 검은 그의 눈을 마주한 채로 단호히 일렀다. 이건 한 팀의 팀장의 명령일까, 아니면 가이드의 명령일까. 전자면 무조건 들어야 할 테였고, 후자면 잠시 미뤄두어도 되었다. 야, 서태웅. 단호히 부르는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키지 못할 약속인 걸 알면서도 서태웅은 내뱉었다.
오랜만이네, 뿅. 여전히 들어도 익숙하지 않은 말. 서태웅은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를 받아드렸다. H팀 사건은 들었어. 서태웅은 그저 그렇습니까. 할 뿐이었다. 서태웅의 폭주, 휘말린 센티넬. 안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힘을 써대던 팀장. 얼마 전에 책임지고 내려왔더라고. 서태웅은 그 말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다였다.
"서태웅."
"네."
죽지마라, 뿅. 서태웅은 그 말에 대한 대답은 돌려주지 않았다. 그만하고 싶다니까. 속에서 들끓는 말을 차마 내뱉을 수는 없었지만, 서태웅은 진심으로 그만하고 싶었다. 자기가 없으면 송태섭은 행복할 텐데. 저 같은 센티넬 말고, 더 좋은 센티넬은 차고 넘치니까. 그러니까.
"서태웅."
오늘따라 그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많았다. 너, 엄한 생각 하지마라. 정대만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어쭈. 대답 안 해? 짐짓 매서운 말에도 서태웅은 입을 다물었다. 야아. 진짜 대답 안 해? 이제는 애원. 그는 피로함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한 생각 안 해요. 세상을 부서버리기 전에 세상을 떠나기로 한 서태웅에게 그 거짓말 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렬!"
본부를 이루는 팀이 정렬되어 장관처럼 펼쳐진다. 분명 그들의 모습은 어디론가 송출될 게 뻔했다. 그런데도 그 누구도 티 하나 내지 않고, 본부의 말을 듣는다. 잘 벼려진 칼날, 쓰고 버리는 소모품, 판을 움직이는 체스말. 그 칼날은 쥔 자들을 앗아갈 테였지만. 모든 이들의 눈빛에서 경멸이 비춰진다. 서태웅 한 사람만 빼고.
함선을 타고 가는 내내, 그 누구의 입도 열리지 않았다. 숨이 막힐 듯한 내부에도. 서태웅은 제 팀원들을 돌아보았다. 아마 그들은 제 장벽 뒤에 서 있을 테였다. 시작과 끝. 서태웅은 제 손바닥에서 빙글빙글 도는 새하얀 결정을 바라보았다. 바다. 너른 바다에서 치는 파도. 그 위로 누군가의 손이 다가와 얼음을 녹여내고 손을 겹쳐 잡는다. 아. 젠장.
"살아서 와."
서태웅은 송태섭의 말 따위 거절하는 법을 모르는데. 아차 싶었다. 송태섭의 말은 불가항력적이다. 그가 살아 돌아오라면 돌아와야만 했다. 몸이 개박살이 나도. 그래서 서태웅은 그 손을 잡아주기만 할 뿐, 그 어떠한 답도 내어주지 않았다.
겨우 다잡은 마음이 무너질까 싶어서. 서태웅은 죽을 것이다. 이 역사를 새로 새기는 한 가운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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