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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웅태섭]너의 결혼식

*태웅태섭 전력글

순백의 꽃들을 가운데 군데군데 꾸며진 핑크와 그린으로 이루어진 곳을 둘러보며, 음. 그의 취향은 아니군. 하고 생각하며 시선을 거두었다. 그의 의견은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곳. 저였다면 그가 이제는 사랑하지 마지 않는 여름을 테마로 꾸몄을 테였다. 그는 새파란 바다를 사랑했으니까. 저와 머리를 맞대고 이러저러한 것들을 생각해 보며. 자주 웃고, 그러다 입을 맞추고,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당신과 결혼하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말로 꾸미고. 그들도 그랬을까. 제가 상상했던 것처럼. 언젠가 저도 이런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제가 조금 욕심 내고, 그가 원하는 방식의. 하지만 그는 저와 그러기도 전에 떠났으며, 다른 이와 이곳에 설 예정이었다. 잔인하기도 하지.

"괜찮냐?"

미츠이 히사시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루카와 카에데는 그런 그의 얼굴을 보며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고 대답을 덧붙이며. 아마 모두가 미츠이와 같은 생각일 테였다. 루카와 카에데가 전 남자친구의 결혼식에 온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으니까. 거기다가 축사까지 맡았으니 말 다했지 않는가. 누구는 그를 호구라 칭할 것이었고, 누구는 그를 미련이라 칭할 테였다. 아무튼, 정말 괜찮지 않을 것은 없기에 루카와는 자연스레 모이기 시작하는 북산 멤버들과 자리를 함께했다.

미적지근한 연애. 그리고 몇 번의 위기. 그때마다 그를 붙잡은 건 루카와 카에데였고, 그 품에 기댄 건 그였다. 적당한 온도로 시작했던 연애는 단 한 번도 끓지 않고, 특정 온도를 넘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 연애가 끝이 났을 때는 조금 식어빠진 온도의 사랑만이 남았다. 그것도 루카와 카에데 안에서만. 이별은 이별이었다. 남들처럼 후유증에 시달리기에는 너무나도 바빴고, 하필 팀 이적과 더불어 국내 행이 결정된 터라 곱씹을 시간은 더더욱이 존재하지 않았다. 겨우 숨통이 틔였을 때는 정말 이 순간을 노리기라도 한 건지, 우편함에 청첩장 하나가 날아왔다. 또 누군가가 결혼을 하는구나, 하는 마음이 무참히 짓밟힌 건. 생각지도 못한 일이긴 했지만.

신랑 미야기 료타

신부의 이름은 보지도 않은 채로 한참동안 그것만 바라보았다. 미국에서도 나눴던 이야기는 이제 정말 저만 가지고 있는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그제야 이별의 후유증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루카와 카에데를 덮쳤다. 반지는 채 빼지 못해, 손가락에 허연 자국을 남겼고, 이사한 집에 즐비한 물건들을 보고나서야 그는 지독하게 앓아누웠다. 박스에 물건을 넣으며 그제야 울었고, 채 빼지 못한 반지가 빠지고 나서야 남은 자국을 보며 웃었다. 그곳에 갇힌 건 저 뿐이었다고.

"너도 참 대단하다."

"네?"

"축사 말이야. 왜 그걸 해주겠다고 해서."

미츠이의 말에 그 누구도 웃지 못했다. 루카와 카에데만 빼고. 옅게 웃는 얼굴에 모두가 할말을 잃었다. 그는 굳어진 분위기에 어깨를 으쓱하며 그러게요. 라는 말을 덧붙이며 축사가 적힌 서류철을 보았다. 무슨 정신으로 썼더라. 사실 축사는 고사하고, 이곳에 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늦은 밤, 이제는 지워 번호만 덩그러니 뜨는 전화만 아니었다면. 눈에 익은 번호는 여전했다. 그것마저 괴로워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몸에 익은 습관은 무서운 것이라. 전화를 받고 나서야 뒤늦게 후회했다.

'루카와.'

술에 취한 그의 목소리에 루카와는 한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세요. 생각보다 매정한 어투에 되려 놀란 건 저였으나, 상대방은 이해한다는 듯이 있잖아. 하면서 말을 이었다.

'잘 지냈어? 국내에 들어왔다는 소식은 들었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요.'

'어?'

'저희가 안부 물을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

아, 맞아. 그렇지. 씁쓸한 목소리에 왜, 당신이 그런 어투냐고 묻고 싶었으나, 그 물음은 이어지는 말에 굳게 다물린 채로 더는 나오지 않았다. 이런 부탁해서 미안한데, 네가 내 축사를 해줬으면 해서. 안나에게 부탁하려고 했는데, 안나는 안 해줄 것 같고. 그렇다고 형이나 지인들에게 부탁하자니 그냥, 입이 안 떨어지네. 거절해도 좋아. 괜찮으니까, 편하게.......

'할게요.'

'어?'

전 애인 축사도 괜찮다면 하겠다고요. 루카와 카에데는 미야기 료타 한정으로 약한 사람이었다. 연애 때도 그러했고, 헤어지고 나서도 그러했다. 차게 식은 마음은 그로 하여금 제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 미안해. 술에 취해 웅얼이는 목소리가 더는 듣고 싶지 않아, 추우니까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라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단 한 번도 먼저 끊어본 적이 없는 루카와의 첫 끝맺음이었다. 다음 날에 다시 연락이 왔으나, 그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흰 종이를 보며, 몇 번인지 모를 구겨짐의 끝에서야 완성한 축사가 있었을 뿐이었다.

식은 단촐했다. 단촐하다기 보다는 생략된 부분이 많았다. 신부는 아름다웠고, 그의 옆에 서 있는 그는 여전히 제가 기억하는 사람 그대로였다. 환히 웃는 얼굴, 맞잡는 손, 주례에 맞춰 대답하는 그들. 루카와 카에데는 그 자리에 서 있는 그와 자신을 떠올려 보았으나, 예전에는 쉽게도 그려지던 것들이 이제는 그 무엇도 그려내지 못했다. 그 무엇도.

미야기 료타는 마이크를 쥐고 선, 그를 바라보았다. 너무 사랑하여 놔버린 이는 여전히 제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너는 이마가 예뻐서 머리를 좀 올려도 돼. 그 언젠가 제가 했던 말. 멋드러지게 넘긴 머리는 늘 제가 목욕하며, 해줬던 스타일 그대로였다. 루카와는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너무 사랑스러워서 겁이 나던 자. 미야기 료타는 저를 보며 웃는 루카와 카에데를 두 눈에 담고 또 담았다.

"저 같이 말주변이 없는 사람에게 축사를 부탁하신 분은 주장 밖에 없을 겁니다. 첫 시작을 무엇으로 해야할 지 고민하다 겨우 적어내린 축사가 부족하지 않길 바랍니다. 주장. 주장은 늘 저에게 여름 날만 되면 두렵다고 하셨죠. 올 여름은 두렵지 않으셨는지 궁금해집니다. 북산 농구부 모두가 당신을 걱정했으니까요. 처음에는 놀라웠습니다. 누구보다도 결혼, 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으신 분이셨으니까요."

모두가 그 문장에 웃었으나, 미야기 료타는 단 한 순간도 웃지 못했다. 루카와 카에데 마저도 웃었는데. 그는 웃을 수가 없었다. 모든 문장에 여전히 그의 애정이 묻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나는, 나는.......

"나쁜 뜻이 아니라, 누구보다 자유분방한 사람이라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주장이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늘 행복하길 바랐으니까요. 이렇게 말하면 좀 수상해 보일까요? 타국에서 보낸 시간이 길어, 아무래도 좀 더 신경이 쓰이는 것 같습니다. 오해는 마세요. 정말 선배와 후배 사이일 뿐이니까."

루카와 카에데는 마지막 말을 내뱉으며 처음으로 신부를 바라보았다. 저와 확연히 다른 사람. 씩, 웃어보인 루카와는 천천히 다음 문장을 내뱉었다. 부러 미야기 쪽은 보지도 않았다. 그러면 정말 겨우 쌓아둔 것이 무너질 것 같아서. 그래서. 겨우 다잡은 마음을 무너뜨릴 수는 없으니까.

"주장. 저는 늘 주장과 함께하는 농구가 좋았습니다. 매번 저를 믿고 패스를 보내주신 것도, 매번 저에게 잘했다며 아낌없는 칭찬을 해주신 것도, 제 경기를 봐주시고 피드백을 해주신 것도. 이렇게 적어보니 늘 저는 받기만 한 것 같습니다. 그때는 그게 당연한 것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남들에게도 그러면, 괜한 질투심을 느꼈던 것도 같습니다. 농구는 한 사람만 하는 게 아닌데도요. 늘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많은 것을 배웠어요.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는 말씀 드립니다."

쏟아지는 박수 갈채는 잘 포장된 그들의 우정에 대한 찬사라는 것을 미야기도 루카와도 알고 있었다. 불쑥불쑥 튀는 마음을 정제하느라 노력한 문장들이 마이크를 타고 결혼식장을 가득 메웠다. 북산 멤버들은 박수를 쳐주면서도 엉망으로 꼬여버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멍청한 새끼. 기어코 미츠이의 입에서 험한 말이 나왔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걸 말리지 않았다.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으니까.

"주장. 저는 주장을 정말 좋아했습니다. 배울 점이 많아, 당신처럼 되고 싶었던 날이 더 컸습니다. 제가 잘한 건지 묻고 싶을 때마다 당신의 경기를 봤습니다. 그러면 답이 나올 것 같아서요. 차마 주장에게 전화를 못해, 다른 선배들을 괴롭혔던 것도 생각이 납니다. 선배들은 주장처럼 될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주장의 다정함은 배우고 싶었거든요. 이제는 뭐,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주장. 미야기 료타 씨."

루카와 카에데는 숨을 한 번 고르고는 고개를 들어 맞은편에 선 미야기 료타를 마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 좋아했어요. 단 한 번도 아니었던 적이 없습니다."

결혼 축하드려요. 루카와의 축사가 끝이 나자, 우뢰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루카와는 그가 답답하게 굴면 연락하세요. 혼내드리겠습니다. 하는 농담을 내뱉으며, 미야기 료타를 그의 신부를 각각 안아주고는 그곳을 내려왔다. 식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으나, 루카와 카에데는 그대로 그곳을 빠져나왔다. 더는 그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제 할일은 끝났고, 제 마음도 끝이 났으니까. 식장을 나서자 쏟아지는 빗줄기에 루카와는 정말 최악이라고 생각하며 그대로 밖으로 나섰다.

쏟아지는 장대비를 맞으며 그는 그제야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드디어 제 사랑이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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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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