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더스게이트3

[BG3] 확신 없는 마음

* 발더스게이트3 아스타리온xOC 글연성입니다. 

* OC(타브) 이름은 '엘(Elle)'입니다. 이 글에서는 엘이라고 지칭합니다.

* 아스엘 삽질 이야기 3부작 완결.

* 그냥 둘이 서로 이야기만 합니다. 그뭔씹 가내집밥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그날 밤 이후, 둘의 관계에 대해 드라마틱한 변화가 생긴 것은 아니었다. 갑자기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더할 나위 없이 끈적해지거나, 하루종일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거나, 서로가 서로의 영혼의 반쪽인 것마냥 운명적인 사랑을 나눈 것처럼 굴지도 않았다. 둘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대화와 태도를 유지했고, 그것은 딱히 절제력을 요하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무척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모습이었다. 

‘애초에 그 정도까지인지도 잘 모르겠고.’

아스타리온은 냉정하게 생각한다. 

지난 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 각오를 하고 꺼낸 말들은 생각보다 최악의 결과를 불러오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예상보다 훨씬 더 이상적인 결과였다 할 수 있겠다.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어수룩하게 꺼낸 형편없는 고백은 진흙탕에 처박혀 짓밟혀지지도 않았고, 하찮게 무시당하지도 않았다. 도리어 받아들여졌고, 그 이상을 기대할 수 있게 허락되었다. 아스타리온은 죽어버린 심장이 다시 뛰고 전신에 피가 도는 듯한 기분 좋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다만 이것을 정확히 무엇이라 이름 붙이기에는 아직 알 수 없는 점이 많았다. 세상 사람들은 관습적으로 사랑이라고 쉽게도 이름 붙이겠지만, 이백 년 동안 그러한 미명 아래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속이고 죽이고 더럽혀왔던 경험들은 사랑이라는 이름과 개념을 희미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가 지금 느끼고 있는 이것이 가장 특별하고 귀중한가 하면, 또 그렇다고 단언하기에는 망설임이 있었다. 아스타리온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었으며, 영원히 절대불변의 진리일 터였다. 엘은 자기 보호를 위해 옆에 묶어두는 것보다 더한 것을 기대하고픈 첫 번째 상대였지만, 저 자신보다 우선되는 존재일 수는 없었다.

‘그럼 너는 대체 뭘까.’

얼마 지속되지 않을 착각이나 오해, 잠깐의 여흥 거리, 순간 끓어올랐다 천천히 식어갈 종류의 흥분. 그런 정도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어떤 것도 장담할 수 없었다.

아스타리온은 엘이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고 말버릇처럼 이야기하던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에 공감하는 자신이 있었다. 통념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랑이라는 개념은, 이렇게 서로에 대한 불신에서 피어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스타리온은 한번 시작해보기를 택했다. 잘 모르는 것을, 낯설고 어색한 방식으로, 처음 걸어보는 길로.

“아스타리온.”

갑자기 걷다 말고 발을 멈춘다 싶더니 길 한복판에 쭈그려 앉은 엘이 아스타리온에게 손짓했다.

“또 땅 파보라고 하는 거면 확 깨물어버릴 거야. 나중에 나보다 체력 넘치는 애 데려와서 시켜.”

“그런 거 아니니까 이리 와봐.”

궁시렁대면서 가까이 가니, 엘이 땅을 가리키며 웃고 있었다.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 아주 작은 꽃송이 하나가 홀로 은은한 빛을 뿜으며 피어 있었다. 태양빛은커녕 달빛의 희미한 일렁임조차 허락되지 않은 그림자 진 땅에,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얇디얇은 양초의 불빛 같은 것이 꽃잎에 어린 듯한 모양새였다.

“이런 식물이 있다고 할신에게서 듣긴 했는데, 진짜 있었어. 설마 혼자 빛나는 식물 따위가 있겠느냐고 안 믿었는데. 신기하네.”

“……그러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습관처럼 내뱉으려다 일말의 이성이 제동을 걸었다. 그리고 문득 의문이 든다. 엘은 딱히 꽃이나 식물 같은 걸 좋아하는 감수성 깊은 사람이 아니다. 예외라고 한다면…….

“또 누가 이걸 좋아한대?”

야영지의 동료들은 제 식구랍시고 또 징그럽게 챙기는 엘은, 크게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라면 그들이 원하는 것들은 들어주려는 편이었다. 지나가는 말로 좋아한다 언급했던 꽃을 발견하면 따서 챙겨둔다거나.

“넌?”

엘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묻자, 아스타리온은 멍하니 눈을 끔뻑인다.

“나? 내가 왜?”

“꽃 좋아한다며.”

내가 언제? 라고 반문하려다 며칠 전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는 아스타리온이었다. 섀도하트가 생각나서 꽃을 땄다는 엘에게 어쩐지 배알이 뒤틀려서 거짓말을 했던 기억이 났다.

“그건…… 미안, 거짓말이야.”

그냥 맞다고 하면서 넙죽 받아도 될 텐데, 어쩐지 더 이상 거짓말을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솔직하게 답했다. 놀랍게도 엘은 그냥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래, 그럴 것 같더라.”

아스타리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예쁜 걸 좋아한다 했으니 혹시나 해서. 이거, 꺾는 순간 빛이 죽어버린대. 그러니 지금 이렇게 보고 지나가는 게 제일 예쁘지.”

“그래…….”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겨우 그 정도밖에 대답하지 못했다.

“……이거 또 누가 좋아한다고 한 사람 있어?”

아스타리온의 질문에 엘은 눈을 굴렸다.

“글쎄? 워낙 희귀한 식물이라 할신이 한번 보고 싶다고 했던 것 같기도?”

“안 돼.”

전에 없이 단호한 목소리로 아스타리온이 말했다.

“안 돼. 다른 사람한테는 보여주지 마. 이런 걸 봤다고 말하지도 말고.”

“상관은 없지만…….”

왜? 라고 얼굴에 물음표를 띄운 엘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이었다. 진짜 싫다. 아스타리온은 속으로 한탄했다.

“이건 내 거야.”

그림자 진 땅은 정신까지 먹힐 만큼 깊은 어둠으로 뒤덮인 저주받은 땅이지만, 지금만큼은 도움이 되었다 아니할 수 없었다. 태양 아래보다야 표정이 잘 가려질 테니까.

망했다.

—진짜, 완전, 뒤지게 망했다.

아스타리온은 야영지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되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생각한다. 

‘빌어먹을, 젠장할, 젠장맞을!’

온갖 욕설을 입밖으로 소리치지도 못하고 숨죽여 되뇌이는 한심한 꼴이 돼선, 요동치는 머릿속을 진정시키지도 못하고 있다. 아니, 요동치는 건 가슴 속인가?

꽃? 꽃이라고? 그따위 얄팍한 수작에 넘어가는 바보였나, 내가? 아스타리온은 믿을 수가 없었다. 엘이 그를 생각하며 발을 멈추고 가리킨 꽃은, 오로지 그를 위해 선물해준 것과 다름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기억도 나지 않는 매우 오래 전 소년 시절의 순진무구한 행복이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동시에 아주, 아주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엘은 별 생각없이 가볍게 건넨 것에 지나지 않았을 텐데, 겨우 그런 정도로 기분이 오락가락하고 가슴이 뛴다니. 정말이지 굴욕적인 일이다.

‘이 정도라고? 내가? 진짜로?!’

이렇게나 좋아한다고. 누군가에게 이렇게나 진심이 될 수 있다고. 거짓말. 

그래, 거짓말이다. 말도 안 된다. 그럴 리 없지. 이런 일시적인 흥분 따위, 시간만 지나면 금세 가라앉아 언제 그랬냐는 듯 식을 것이다. 엘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만들어내는 존재이고 무엇 하나 기대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사람이라서, 단순한 행동에도 놀라게 되는 것뿐이다.
그렇지, 지금 이렇게 바로 눈앞에 나타난 것처럼…….

“아스타리온?”

“으아악!!”

“악! 뭐야?!”

자기 천막 안에서 이불을 덮은 채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던 아스타리온의 눈앞에 줄곧 머릿속을 채운 사람의 얼굴이 느닷없이 들이밀어졌을 때, 그가 얼마나 놀랐을지는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좋겠다. 덩달아 놀란 침입자는 심장 부근을 부여잡고 뒤로 나자빠질 뻔한 몸뚱이를 겨우 똑바로 가눈다. 

한참의 시간을 상황 파악하는 데 쏟은 아스타리온은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 침입자를 쏘아본다.

“……‘뭐야’는 내가 할 말이거든?! 너 뭐야, 왜 여기 있어?”

“아니 그렇게 놀랄 일이야?”

“남의 천막 안에 멋대로 들어오면 놀라지 그럼?”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길래……. 몇 번을 불렀는데 못 들었어?”

못 들었다. 정확히는 정신이 없었다. 왜냐하면…….

‘네 생각 하느라고!’

—라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 못 하겠다.

“……왜 왔는데?”

대신에 아스타리온은 화제를 돌리기로 한다.

질문의 대상이 자연스럽게 자신으로 넘어오자, 엘의 표정이 가벼운 고뇌로 바뀌었다. 아스타리온은 엘이 대답할 말을 신중히 고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내 찬물을 맞은 것처럼 퍼뜩 생각이 스친다.

‘오, 이런.’

너무 당연한 것을. 서로 감정적인 기류가 있는 상대가 밤중에 개인 공간에 방문한다는 의미는, 그것 이외에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곧바로 떠올리지 못한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이런 수순은 자연스러운 일인데.
아스타리온은 웃으며 내가 눈치가 없었네, 라고 말하고 팔을 뻗으면 된다. 그리고 그가 제일 잘 하는 일을 하면 된다. 그뿐이다.

하지만 그는 망설인다. 처음으로 진심이 된 상대 앞에서, 자신이 제일 잘 하는 일을 시작하는 것을 주저한다. 아스타리온은 엘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목격하고, 덜컥 가슴이 내려앉음을 느꼈다. 때때로 비상하게 예리한 통찰을 발휘하곤 하는 엘이 자신의 망설임을 꿰뚫어볼까봐. 그리고 으레 하던 것처럼 미련없이 떠나버릴까봐. 아스타리온은 시선을 내린다. 최소한 더 이상 눈동자 속에서 감정을 읽어내지 못하도록. 몇 초만 더 있으면 완벽한 미소를 장착하고 손님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 있잖아. 이거 어떻게 생각해?”

그 몇 초의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완전히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으므로, 아스타리온은 스스로 생각해도 아주 멍청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엘이 쑥 내민 손바닥 위에는, 은백색 링 가운데 붉은 빛깔의 보석이 박혀 있는 펜던트톱 같은 조그만 장신구가 올려져 있었다.

“……장신구네.”

아스타리온은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것은 무척이나 단순하고 평범한 장신구였다. 뛰어난 감별사는 못 되지만 그렇게 값이 비싸게 보이지도 않았고, 어떠한 마법적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애초에 매직 아이템을 식별하기 위한 의견을 구하려고 했다면 저보다는 더 적절한 사람들이 있었을 터였다.

“봐줄 만해?”

엘의 목소리에는 드물게 긴장하는 기색이 어려 있었다. 아스타리온은 그의 표정과 손바닥 위의 장신구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몹시 기상천외한 결론을 내린다.

“설마…… 직접 만들었어?”

헉, 하고 숨을 들이키는 소리를 아스타리온은 똑똑히 들었다. 

“팔려고 모아둔 장신구들 중에 마침 적당한 게 있길래. 은목걸이 장식 부분이랑 빨간 보석을 합치면 딱일 것 같아서. 이런 건 안 해봐서, 역시 별론가?”

마치 뭔가에 대해 변명하듯이 중얼중얼 구차하게 말이 길어진다. 

“딱일 것 같다니, 뭐가?”

아스타리온이 담담히 묻는다. 엘은 가만히 그의 얼굴을 응시한다.

“널 닮았……으니까.”

은백색 머리칼과 붉은 눈.

아스타리온은 고개를 푹 떨어뜨린다. 그리고 제 손이 떨리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길 빌면서, 엘의 손바닥 위의 장신구를 조심스럽게 집어올린다. 

“아까는 꽃이더니, 이번엔 보석?”

아스타리온의 말에 엘이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게, 진부하네.”

“뭐? 아냐.” 

뭔가 오해했는지 엘이 약간 위축된 모습을 보이자 아스타리온은 당황해서 부인했다. 

“그게 아니라…… 아까도 나한테 꽃을…… 선물했다고 생각했는데, 또 뭔가를 줄 거라고는 생각 못해서…….”

아스타리온의 말에 엘은 뺨을 긁적인다.

“보여준 것뿐이지 결국 너한테 남은 게 없더라는 생각이 들어서. 뭔가 형태로 남는 것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어.”

아스타리온은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꽉 쥐었다. 며칠 전, 엘이 섀도하트에게 주려다 아스타리온의 변덕스러운 요청에 어쩔 수 없이 넘겨준, 밤난초를 닮은 이름 모를 풀떼기가 생각났다. 엘이 떠나고 나서 땅바닥에 흩어버린, 연약하기 짝이 없는 풀꽃. 아스타리온이 다시 손바닥을 펴자 붉은 색으로 빛나는 보석은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엘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더니 냅다 손을 뻗었다.

“역시 안 되겠어. 다시 줘봐. 다른 거 줄게.”

“뭐?! 왜?”

“아무리 봐도 너무 별로야. 모양도 조잡하고, 거기 봐, 보석에 상처도 났어. 너무 흉해.”

아스타리온은 반대로 엘을 피하려고 보석을 쥔 손을 뒤쪽으로 쭉 뻗는다.

“줬다 뺏는 게 어딨어? 안 돼.”

“다른 거 준다니까! 창피하단 말이야.”

“안 돼, 안 돼! 이건 내 거야. 안 줘, 못 줘!”

잠시간의 실랑이 끝에 균형이 무너져 두 사람의 몸이 엉키듯이 넘어졌다. 아스타리온의 위쪽에 포개듯이 엎어진 엘은, 고집불통 같으니, 하고 질린다는 듯 너털웃음을 뱉었다.

이윽고 시선이 마주친다. 두 사람의 눈동자는 서로를 훑듯이 움직인다. 아스타리온은 손을 엘의 뺨에 갖다대고 부드럽게 쓸어내리고는, 손가락을 천천히 입술로 옮겨 살며시 문지른다. 찌릿한 신호가 둘의 몸을 관통한다. 그리고…….

“……갈게.”

응?

뭔가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엘은 몸을 일으키더니 정말로 떠나려고 하고 있었다. 

“간다고? 이대로?”

“응, 뭐…….” 엘은 어색한 몸짓을 보였다. “그거 주려고 온 거지, 다른 걸 하려던 건 아니어서.”

“하지만…….” 

아스타리온은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도 잘 알 수 없었다.

“……나랑 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질문을 해버리고 만다.

“음, 글쎄…….” 

엘은 고민된다는 듯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들어 아스타리온을 쳐다보았다.

“넌 나랑 뭘 하고 싶어?”

그게 대체 무슨 질문이야? 그럼 뭘 하고 싶겠어? 정말 아무것도 몰라서 하는 순진해빠진 질문은 아니겠고, 뭔가 시험이라도 하는 건가? 발끈해서 쏘아붙이려던 아스타리온은 입을 떼려다 멈칫한다. 그리고 방금 전 엘의 방문을 다른 목적으로 오해했을 때 망설였던 자신을 떠올린다. 나는 뭘 하고 싶은 거지?

“나는…….”

아스타리온은 더 이상 떨리는 목소리를 숨길 수가 없었다.

“너랑…… 같이 있기만 하면 돼.”

떠나지 말라고 붙잡는 방법은 하나밖에 몰랐어서, 아스타리온은 자신의 말이 몹시 어색하고 어불성설로 느껴졌다. 물건을 사고서 돈을 지불하지 않겠다고 진상을 피우는 악덕 손님이 된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썩 정직하게 살아온 건 아니지만, 달리 표현할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

엘은 그렇게 답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확인한 아스타리온은 저도 모르게 후, 숨을 내쉴 만큼 안도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다.

“그러면…… 이제 어떡하지?”

엘이 어깨를 으쓱해보인다.

“어떡하냐니?”

“나도 이런 건 처음이라.”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는 모습이 퍽 어색하게 보였다. 

“아, 오해는 마. 너랑 있는 게 싫다는 건 아니야. 단지 나도 오늘은 그런 기분이 아니었던 것뿐인데……. 음, 안 하는 날에는 보통 뭘 하지?”

“몰라, 나도……. 섹스를 안 하고 시간 보낸 적이 없어서.”

교태와 유혹적인 태도 없이 있는 그대로 스스로를 내보이는 것은 생각보다 더 꼴불견 같았다.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무력하게 손 놓고 있는 초보 사냥꾼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엘은 대답하지 않고 음, 하고 단순한 소리를 내더니 그 자리에 풀썩 누워버렸다.

“……뭐해?”

아스타리온이 황당하게 물었다.

“누워 있는데.”

엘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왜…… 아니다, 됐다.”

아스타리온은 구태여 답을 듣기를 포기한다. 대신 자신도 자리에 누워버린다. 두 사람은 팔만 뻗으면 바로 닿겠지만, 그렇다고 닿아 있지는 않은 거리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누운 모양새가 된다.

“……네 얘기나 해봐.”

먼저 입을 연 것은 아스타리온이었다.

“내 얘기?”

“그래. 네가 발더스게이트 출신이라는 것 말고는 아는 게 없네. 난 너한테 뱀파이어고 카사도어고 미주알고주알 다 얘기했는데.”

엘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 아스타리온을 빤히 바라본다.

“뭐가 궁금한데?”

사실 딱히 없다. 어색한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적당히 꺼낸 화제였을 뿐이다. 아스타리온은 어, 음, 하고 맹한 소리를 내면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고향에 두고 온 애인 같은 거 있어?”

크흡, 웃음을 참지 못한 엘이 키득거린다.

“진짜 그게 제일 궁금해?”

아스타리온이 옆으로 돌아 눕는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하는 모양새가 된다.

“어, 궁금하네. 내가 어제 사랑의 세레나데를 바친 상대가, 사실은 숨겨둔 애인이 있었다는 치명적인 비밀을 품고 있었는지가 잠 안 올 정도로 궁금해.”

“사랑의 세레나데를 언제 했는데…….”

“그래서, 있어 없어?”

엘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으음, 하고 뜸을 들였다. 아스타리온이 발딱 몸을 일으켰다.

“뭐야, 진짜야?”

“없어, 없어! 있을 리가 없잖아, 그딴 거!”

엘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린다. 어쩐지 맥이 빠진 아스타리온은 다시 풀썩 자리에 눕는다.

“애인이니 뭐니, 애초에 그런 거 있어본 적도 없어.”

엘이 덤덤히 덧붙였다. 사실 그럴 것 같기는 했다고 아스타리온은 생각했다. 믿음직하고 노련한 우리의 리더는 머리 회전이 빠른 편이고 전시의 통찰력과 예리함이 비상한 사람이지만, 특정 분야에 대해서는 남들보다 배는 둔감했으며 때로는 회피적인 성향까지 드러나기도 했다. 사람과 관계를 쌓는 데 익숙한 이의 모습은 아니었다. 본연이 친절하고 다정하여 관계 맺음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확연히 티가 나는 법이다. 예를 들면 칼라크나 윌처럼?

“섹스는 전에도 몇 번 해본 거 아니었어?”

“그렇긴 한데, 애인이라고 부를 만한 상대는 아니었어. 그리고 너도 마찬가지 아냐? 섹스 상대를 애인으로 안 치는 건.”

“흠. 거기에 대해선 딱히 부정할 수 있는 말이 없네.”

그 말을 듣고 엘이 킬킬거린다.

“네 집은 어디야?”

아스타리온이 이어 묻는다.

“하부 도시. 집이라고 할까, 은신처 같은 곳이야.”

엘이 대답한다.

“은신처?”

“응. 아주 어릴 때 집을 뛰쳐나와선 길거리를 떠돌다가,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뭉쳐서 입에 풀칠하며 살았지. 구걸도 하고 남의 주머니도 털어보고 길거리 공연 비슷한 것도 하고 별별짓을 다 했어. 그렇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다 보니, 길바닥에 나앉은 거지보다 아주 조금 더 나은 생활이었지.”

“가족들은?”

“거지들 소굴 같은 곳이긴 하지만 거기 사람들이 내 가족이야. 더러운 꼴도 많이 봤지만 이래저래 떨어져 나갈 놈들은 떨어져 나가고 이젠 꽤 괜찮은 식구들이 남았지. 아주 꼬맹이들도 있어.”

“보고 싶겠네.”

“뭐……, 일단은 집이니까.”

엘은 무언가를 떠올리듯이 시선을 위로 하면서 미소지었다. 아스타리온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시선 끝을 좇다가 길을 잃고 다시 내려앉는다.

“어릴 때 집은?”

“어?”

“어릴 때 뛰쳐나왔다며? 어땠길래?”

그때 아스타리온은 엘의 눈빛이 흔들린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 얘긴 나중에 하자.”

따뜻한 미소를 떠올리던 입가에 옅은 냉기가 서렸다.

“아직 준비가 안 됐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엘은 아스타리온에게서 등을 돌리거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렇게 해.”

아스타리온이 말했다. 더 이상 덧붙일 말은 필요 없다는 걸 어쩐지 알 수 있었다.

엘은 아하하, 하고 풀어진 웃음 소리를 냈다가 순간적으로 흠칫 얼어붙듯 멈추었다. 이런 자기 모습이 낯설다는 듯이.

‘아, 또 저 표정.’

아스타리온은 어쩐지 낯익은 표정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기억을 떠올려냈다. 아스타리온이 처음으로 가면을 쓰고 싶지 않아졌을 때, 진심이라는 것을 내보이고 싶어졌을 때, 그를 마주한 엘이 보였던 반응을.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해 당혹스러워하며, 어쩌면 조금 겁을 먹은 듯한. 이런 표정을 짓는 엘은 자리를 피하려 들곤 했다. 아스타리온은 알고 있었다.

“엘.”

붙잡듯이 이름을 부르자, 다시 한 번 눈에 띌 정도로 엘의 몸이 움찔한다. 

안 돼, 아직은. 아스타리온은 속으로 간청한다. 아직은 가지 마.

손을 뻗으니 곧바로 상대의 얼굴에 가닿는다. 아무렇게나 바닥을 향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다, 할 일을 마치면 거두어야 할 손을 어찌할까 고민한다. 조금 더, 조금만 더.

“싫지 않으면, 안아줄래?”

닿아 있고 싶어.

확신 따윈 없었다. 거절할지도 몰랐고, 또 전처럼 도망치듯 떠나버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도, 적어도 지금의 엘은 피하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는 듯싶었다가 조금씩 거리를 좁혀왔고 이내 팔을 뻗어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기분 좋은 냄새가 났다. 아스타리온이 가장 좋아하는 혈향을 내뿜는 목덜미가 가까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의 살냄새. 긴장했는지 딱딱하게 굳은 등허리나, 끌어안음으로써 몇 배는 민감하게 전달되는 맥동까지도, 모든 게 생소하지만 기분 좋게 다가왔다. 쿵, 쿵, 일정한 리듬감으로 뛰는 엘의 심장 소리는 이미 오래 전에 움직임을 잊어버린 자신의 심장에게 뛰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만 같았다. 아스타리온은 그대로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아스타리온이 엘에게 품은 감정이 얼마나 강하고 깊은지와는 관계없이, 그는 이것이 계속 이어지리라는 믿음은 갖고 있지 않았다. 오늘은 강렬해도 내일은 식어버릴지 모르고, 자신이 아직이어도 상대가 먼저 질려버릴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고, 아무것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아스타리온은 감정의 크기가 커지는 것을 느낄수록 불안했고 불편했다. 끝날 때의 고통이 커질 뿐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아스타리온은 엘이 이제 그만 떨어지자고 할 때까지 기다렸지만, 엘은 먼저 입을 열지도 스스로 떨어지지도 않았다. 마치 그도 아스타리온과 마찬가지로 품을 원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믿을 수 없게도 두 사람은 그날 밤 내내, 결국 날이 밝아올 때까지 그렇게 함께 있었다.

아스타리온이 반짝 눈을 떴을 때, 그는 엘이 여전히 자신의 품에 안겨서 색색대기까지 하며 잠들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전에는 함께 밤을 보내도 아침까지 함께 있기는커녕 먼저 잠들지조차 않던 엘이었다. 평소에도 대단히 얕게 자는 편인 그가 지금은 상당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순간적으로 이마에 입맞추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지만 깨우고 싶지는 않아서 아스타리온은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다시 눈을 감았다. 엘이 깨어나면, 그래서 가장 먼저 자신의 얼굴을 눈에 담으면, 나는 미소지으며 아침 인사를 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웃음이 나서, 아스타리온은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입을 꾹 다물었다.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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