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선택한 웃음

설산 by X

… 제 덕에, 제게 털어놓고 나서 마음이 조금 편해지신 거라고… 생각해도 되는 거겠죠? 살짝 웃는다.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이건 조금 기쁠지도…. 또다른 좋은 인연이 생긴 것 같아 기쁘다. 너무 잘 아는 사이라니…. 입술을 다시금 꾸욱 깨문다. 또 너무 가까워지면, 서로 숨기다가 서로의 진심을 알 수 없어질지도 모르는데. 양가의 감정이 넘실거린다. 좋으면서도, 울적하고 슬픈. 그래도- 어리광 부리셔도 돼요. 저는, 정말 다 괜찮아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할지… 잘 모르겠지만. 우선 나는 어리광을 부린다 하면, 받아줄 입장이니까. — 뭔지 알 것 같아요. 믿음이 강해서, 너무 많이 믿어버린 바람에 그 친구에 대한 걱정을, 차마 신경을 잘 쓰지 못하는? 저도 그런 적 있는 것 같아요. 어떤 상황이었는지 잘은 기억은 안 나지만—. 잠시간의 정적. 괜찮아요. 사람은, 바뀌는 거니까. 생각도 바뀌고, 감정은 물론이고, 가치관도, 신념도…. 저도 그랬던 거예요, 그냥. 선배도 그렇고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거예요. — 아, 따뜻한 온기…. 하하…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정말 안아주시네요. 따뜻해. 역시 선배는 다정하지 않나. 모두에게 이리 대하더라도, 다정한 건 다정한 거니까…. 살짝 눈을 감고 미소 짓는다. 어쩐지 평화로운 것도 같다. 모든 날들이 이렇게만 같다면… 그렇다면 좋을텐데. 개구리도, 죽음도, 아무런 불행도 없이 모두 다 행복하면, 좋을텐데…. 걱정 마세요. 소원은, 진작에 정해뒀으니까. 그냥… 말할 때를 기다리는 것뿐이에요. 때로는 시기가 중요하기도 하니까요…. 그러곤 한참을 그렇게 가만히 있다가 쓴 웃음을 짓는다. — 이제 누군가에게 나를 위해 살아달라느니… 죽어달라느니. 뭐가 됐건, 목숨을 거는 애원은 하지 않으려고요. 그건 그저— 내 이기심뿐인 거니까. 이제 괜찮아요. 그런 경험은 한 번으로 족한 것 같아요. 그러니, 소원은 저를 위한 것으로. 헤헤. 맞아요. 그냥, 그냥 목을 졸려보고 싶다는 얘기예요. 죽여달라는 얘기는 아니에요. 그런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된다는 걸 알았으니까. 선배는, 가까운 누군가를 죽이지 못할 것 같다고 했으니까요. … 할 수 있을 것 같다, 고도 해주시긴 했지만… 제가 보기에 선배는 싫어할 것 같아서요, 그런 말. 하지만— 어쩌면 당신에게는 눈 딱 감고 나를 죽여달라, 부탁해볼지도. … 억지로 소원을 써서라도. 하하… 그럴까요. 졸려봐도 이해를 하지 못 하려나…. 그래도, 경험의 차이는 있으니까 호기심이 든달까. 아, 선배는… 어떻게 알아요? 졸려본 적이 있다든가.

… 확실히. 좋은 광경은 아니니까요. 버텨낸 걸 기특하다 해야 할까요. 고맙다고 해야 할까요.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추고 눈을 접어 웃어보인다. 네게 전하는 말이니, 잘 들으라는 듯이. 그렇게 이것저것, 발목을 잡는 게 있다는 게… 좋은 것 아닐까요. 비록, 악몽에 시달리고 환영을 보더라도, 삶이 이어지고 있으니까…. … 그 아이도 그걸 원할지 몰라요. 살아남았으면, 잘 살라고 바라고 있을지도. 당연히 아니라 생각하고 있겠지. 그렇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베시시, 미소를 짓는다. — 다행이에요. 그리고 감사해요. 작게 덧붙인다.

좋았어요. 정말로. 아, 연인… 그러니까 사귀고 싶다! 라는 걸로 좋아했다는 게 아니라요. 무슨 뜻인지 아시죠? 여자아이는, 그렇게 느꼈다나 봐요. 닮은 게 많은 사람이란, 그 한 가지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친밀감을 부쩍 느끼고는 하니까요…. 그랬었던 것 같아요, 그 오빠에게도. 하하, 역시 눈치가 빠르다니까…. 하긴, 모를리가 없겠지. 그렇게까지 자세하게 얘기하는데…. — 맞아요. 사실, 정말 잘못한 쪽은 아버지 쪽이겠죠. 여자아이는… 아마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좀 시간이 걸렸을지도 몰라요. 그때는 아무것도 몰라서 넘겼다지만… 그 이후로 마음 고생을 많이 했겠죠. 모르는 것과 앎의 차이는 크니까요…. 죄책감이라. 죄책감. 정말 그런 것을 가졌었을까. 얘기 들은 선배도 아는 것을, 정말 나만 몰라주었던 걸까. … 그랬을까요?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사람 속은, 말하기 전까지는 잘 모르니까요. 이제 들을 수 없게 되었지만…. 하하, 물 가까이서 조심히 놀기. 그렇네요. 선배도, 조심하고 또 조심하기.

졸라 달라 하면, 졸라 주실 건가요? 아무런 이유 없이, 그저 제가 원했다는 이유만으로? 실은, 원하고 있다. 그를 이해함과 더불어 숨이 끊기면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까. 비겁하게, 도망치는 것이지만. 네가 후회할 것도, 제대로 맺지 못할 것도, 이미 알고 있는 바이다. 나와 대화한 당신은 그런 사람이니까…. 행동에 후회할지언정, 나에게도 이렇게 손을 내밀어 주는 다정한 사람이니까. 해주세요. 목에, 손으로, 이렇게. 아시잖아요? 기댄 몸을 살짝 일으켜 웃어 보인다. 죄책감을 덜고, 또 지우고, 이해해보려 또 후회할 만한, 네게 또다른 트라우마를 심어줄 수 있을 것만 같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강행한다. 그럼에도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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