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슬] 우리는 서로를 모른다 (下)

오피스물 (40대 배주현X30대 강슬기)

마싯다 by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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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야."

잠에서 깨어난 주현의 눈에는 어둠이 까맣게 내려앉은 사무실 풍경이 들어온다. 잠결에 부른 슬기의 이름은 허공에 흐릿하게 흩어졌다. 주현은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넘기며 일어났다.

한숨이 절로 흘러 나왔다. 책상은 그 사람의 머릿속을 보여준다더니 맞는 말이었다. 엉망인 책상은 딱 주현의 머릿속 같았다. 온갖 자료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선명하게 가지고 있는 종이 봉투 하나. 슬기가 가져다 준 점심이었다. 비타민 영양제를 넣어둔 봉투를 괜히 한 번 쳐다본다.

주현은 몇 년만에 슬기에게 전화를 받은 그 날을 다시 떠올렸다. 그때 주현은 여행 중이었다. 횡령한 직원과 법정 다툼을 겨우 끝내고 한숨을 돌리러 간 여행이었다. 슬기와 만나던 시절, 주현과 슬기는 통영에 자주 갔다. 슬기가 좋아하던 고즈넉한 한 동네는 나중에 주현이 더 좋아하는 동네가 됐다. 그때 주현은 나중에 언젠가 슬기와 여기서 살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했었다.

슬기에게 전화가 온 건 통영에 내려온 지 3일째 되던 날이었다. 주현은 솔직하게 슬기가 잘못 건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머리보다 손이 먼저 움직여 전화를 받았다. 실수든 뭐든 이게 마지막 기회일 거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래서 슬기가 협업을 제안했을 때 주현은 계산 같은 걸 하지 않았다. 회사에도, 주현에게도 이건 마지막 기회였다. 백 퍼센트 사심은 아니라고, 주현은 그렇게 합리화 했다.

헤어진 후로 처음 보는 슬기였다. 주현은 전날 잠을 제대로 못 잤다. 마침내 슬기를 마주했을 때 주현은 걱정이 기우였음을 알았다. 그냥, 너무 반가웠다. 몇 년을 그리워 한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좋았다. 슬기도 그러길 바라진 않았다. 슬기 입장에서 주현은 껄끄러운 전 애인 이상도 이하도 아닐테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다시 슬퍼졌다. 그러나 주현은 티내지 않았다. 주현이 제일 잘하는 거였다.

슬기는 주현에게 선 같은 게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다시 만난 슬기는 주현에게 아주 굵은 선을 그어 놓았다. 주현은 그 선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냥 그 선 너머에 자신이 있음을 슬기가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주현은 만족했다. 그 정도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왜 쓸데없이 사람을 챙겨.'

주현은 슬기가 가져다 준 샌드위치를 한참동안 먹지 못했다. 연애할 때, 슬기는 프로젝트에 들어가면 늘 밥을 제대로 안 챙겨먹는 주현을 걱정했다. 본인도 정신 없으면서 종종 도시락이나 샌드위치를 사다주곤 했다. 슬기는 꼭 다 먹은 뒤 인증샷을 보내게 했다. 주현은 그런 슬기가 귀엽고 고마웠다.

습관이 무서운 걸까. 고작 빵집에서 사온 샌드위치 하나가 주현을 흔들었다.


주현은 긴장하고 있었다. 두 손 무겁게 준비한 자료의 무게만큼 주현의 부담감도 더해졌다. 오늘 최종 수정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계약은 물 건너간다. 슬기가 다녀간 다음날, 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미안하지만 일이 그렇게 될 거 같다며, 조율을 부탁한다고 말이다. 주현은 그제야 선을 긋던 슬기가 갑자기 화를 낸 이유를 알았다. 걱정해줬구나. 그날 찾아온 것도 아마 그 얘기를 하러 온 걸 거다. 주현은 슬기의 걱정을 받는 게 새삼스러웠다. 어젯밤 카톡도.

[내일 잘해요.]

업무와 일 얘기 외엔 아무 말도 안 하던 슬기였다. 슬기가 신경 쓰고 있다고 생각하니 주현은 더 긴장이 됐다. 잘하고 싶다. 주현은 고민하다가 짧은 답장을 보냈다.

[그럴게.]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주현을 마중나온 두 발이 눈에 들어온다. 슬기였다. 반가운 마음마저 들어 주현은 고개를 들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과장님..."

슬기는 빈말로도 안녕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회사에 다녀간 지 겨우 일주일이었다. 주현이 말 붙일 틈도 없이 슬기는 들어가시죠, 하고 앞장섰다. 주현은 그 뒤를 따라가며 초조함을 삼켰다.

프레젠테이션은 살얼음판이었다. 주현의 기획에 부장은 매번 태클을 걸었다. 전과 다른 점이라면 슬기가 적극적으로 의견을 얘기했다는 점이었다. 슬기는 주현의 기획안을 지지했다. 프레젠테이션은 진행될수록 주현과 부장이 아니라 부장과 슬기의 대립이었다. 주현은 고맙기도 했지만 걱정이 앞섰다. 슬기의 컨디션은 안 좋아 보이고, 회사에서 대립각을 세우는 건 분명 좋은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외부인인 주현도 있는 자리였다. 부장의 심기가 시시각각 불편해지는 게 눈에 띄게 보였다.

프레젠테이션이 끝나고 자리를 정리하면서 주현은 곁눈질로 슬기를 살폈다. 회의실 밖에서 부장과 슬기가 얘기하고 있었다. 부장의 표정은 좋지 않았고, 슬기는 묵묵히 들었다. 주현은 잠깐이라도 슬기와 얘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부장과 얘기를 마친 슬기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주현은 결국 다른 사원의 배웅을 받고 건물을 나섰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주현은 계약을 진행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주현과 슬기는 연애하는 동안 싸울 일이 거의 없었다. 슬기는 언니 껌딱지였고, 아닌 척 하지만 주현도 마찬가지였다. 서운한 일이 없으니 싸울 일이 없었다. 하지만 싸울 일이 없다는 건 사이가 늘 좋다는 얘기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싸우는 방법을 모른다는 소리도 됐다. 주현과 슬기는 싸우는 방법을 잘 몰랐다.

슬기와 만나기 시작했을 무렵에 주현은 이미 취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슬기와 연애 초기였기 때문에 주현은 연애와 취업 모두를 잡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이제 막 대학에 들어온 슬기는 모르는 노력이었다. 슬기는 그저 주현을 자주 봐서 좋았다.

주현은 원래 말이 별로 없었다. 누군가에게 힘들다 토로하는 소리를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취업 후 사회초년생이 되었을 때 주현은 처음으로 슬기에게 힘들다고 말했다. 슬기는 다정한 애인이었다. 주현의 힘듦을 알아주려고 애썼고, 피곤함을 덜어주려고 노력했다. 데이트 횟수도 줄였고, 밤에 전화를 하다 주현이 먼저 잠들어도 이해하려고 했다. 하지만 슬기도 고작 대학교 2학년이었다.

슬기가 요즘 소원한 거 같아서 섭섭하다고 말했다. 주현은 미안하다고 했다. 그 즈음 주현은 슬기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유난히 많이 했다. 주현은 직장에서 힘든 일이 생기거나, 피곤하거나 각종 슬기는 이해하기 어려운 힘듦에 대해 말을 아끼기 시작했다. 슬기와는 즐거운 얘기만 하고 싶었다. 그 뒤로 슬기와 사이도 좋아져서 주현은 참는 게 버릇이 됐다.

슬기가 취준을 하기 시작했을 때, 주현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을 때여서 슬기에게 힘이 되어 주리라 생각했다. 실제로 슬기의 취준 기간동안 주현은 좋은 애인이었다. 슬기의 현실적인 조언자이자 제일 큰 지지자가 되어 줬다. 슬기도 인정했다. 언니가 아니었다면 힘들었을 거라고. 주현은 그냥 슬기가 빨리 자리 잡길 바랐다. 그뿐이었다.


광고 촬영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장소 섭외부터 모델 선정까지 모든 일이 빠르게 흘러갔다. 회사에 숨통이 트인 주현은 한숨 돌린 채로 광고 촬영장으로 향했다.

계약자 선정 전화를 받은 날, 주현은 슬기에게 연락을 할 지 말 지 무척 고민했다. 고마움을 전하기도 해야 했지만 슬기 얼굴이 신경 쓰였다. 주현이 고민하는 찰나 슬기에게서 먼저 카톡이 왔다.

[축하해요.]

주현은 용기 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은 두 번 이어지다 끊겼다. 거절이었다. 너무 앞서갔다. 주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곤 다시 조심스럽게 답장을 보냈다.

[고마워.]

슬기가 주현을 껄끄러워 하는 건 당연하다. 먼저 슬기를 버린 건 주현이었다. 슬기의 냉대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변덕을 부려도 주현이 감내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마음이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촬영장에 도착하자 바삐 움직이는 슬기를 볼 수 있었다. 슬기는 저번보다는 나은 것 같았지만, 여전히 컨디션이 별로인 듯 했다. 주현은 슬기를 불렀다.

"과장님."

"아, 대표님. 오셨어요."

슬기는 주현이 앉을 곳을 찾아 두리번 거렸다. 난감한 얼굴로 주현을 데리고 가선 소지품을 치우고 간이의자 하나를 내줬다.

"정신이 없어서... 일단 여기 계세요. 감독님이랑 얘기하고 인사 나눌 수 있게 도와드릴게요."

슬기는 주현에게 꾸벅 인사하곤 다시 복잡한 현장으로 들어갔다. 주현은 콘티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테이블 위에 있던 핸드폰 화면이 번쩍 거리는 게 눈에 들어온 건 순전히 핸드폰이 바로 옆에 놓여 있어서 였다. 남의 핸드폰을 훔쳐보는 취미는 없지만, 연달아 뜨는 카톡에 자연스레 눈이 갔다.

[슬기야]

[니가 전 애인을 잊었든 못 잊었든 난 안되겠어]

[내가 다 받아들일게 그러니까 돌아와]

[옆에만 있어줘.. 제발]

보면 안될 걸 봤다. 주현은 자기도 모르게 슬기의 핸드폰을 엎어 놨다. 지난 며칠 동안 슬기의 얼굴이 좋지 않았던 이유를 알아 버렸다. 헤어졌구나. 결론이 거기까지 미치자 주현은 자연스레 자신과의 가능성을 계산했다. 그러다 너무 비겁한 것 같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왜 그러세요?"

슬기가 옆에 와 있었다. 주현이 괜히 찔려 움찔 하는 사이 슬기는 자신의 핸드폰을 집었다. 알림을 확인하는 슬기의 얼굴을 주현은 곁눈질로 살폈다. 분명 주현이 본 카톡을 슬기도 봤을 텐데, 슬기는 아무 동요도 없었다. 그리곤 핸드폰을 뒷주머니에 쑤셔넣었다. 그게 다였다.

"감독님 봬러 가요."

"아, 네."

슬기는 주현을 힐끔 보곤 앞장서서 감독과 인사를 나눌 수 있게 가운데서 능숙하게 소개를 했다. 촬영이 진행되는 내내 주현은 슬기 뒷주머니에 꽂힌 핸드폰이 신경쓰였다. 10시간이 넘는 촬영 끝에 현장이 정리됐다. 스탭들은 뒷풀이를 간다고 했고, 감독의 권유에 슬기와 주현도 자리했다.

주현은 회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업계 특성상 회식은 빠질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주현은 빠질 수 있는 자리면 최대한 피했다. 슬기와 연애할 때, 슬기 역시 주현의 회식을 싫어했다. 회식만 가면 주현이 늘 불편한 일을 겪거나, 연락이 잘 안됐기 때문이다. 주현은 슬기가 싫어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아 했다. 그런 이유로 회식을 피하기도 했다.

왁자지껄한 고기집 구석에서 주현은 조용히 소주를 홀짝거렸다. 맞은 편에 앉은 슬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슨 얘기를 해야 할까. 지금이 아니면 슬기를 이렇게 붙들어 놓을 시간이 없을 거 같았다. 주현은 빈 속에 소주를 계속 털어 넣었다.

"고기 드세요. 빈 속에 소주만 먹지 말고. 속 다 버려요."

"...과장님도 드세요."

"전 아까 간식을 많이 먹었더니 밥 생각이 없어요."

"그래도요. 밥을 먹어야죠."

"...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주현과 슬기의 테이블만 음식이 줄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계속 흘렀다. 그때 슬기가 대표님, 하고 조용히 주현을 불렀다.

"따로 한 잔 어때요."

"좋아요."

주현과 슬기는 조용히 고깃집을 나와 한 이자카야로 향했다. 주현과 슬기는 마주 앉아 말 없이 술만 홀짝 거렸다.

주현은 슬슬 취기가 오르는 게 느껴졌다. 슬기도 마찬가지인 거 같았다. 주현이 알기로 슬기의 주량은 원래 소주 4잔이다. 그런데 지금 1병을 넘게 먹었으니 분명 취했을 것이다. 술이 오르니 정신이 몽롱했다. 빈 꼬치를 멍하니 보고 있는데, 갑자기 질문이 날아든다.

"대표님, 애인 있어요?"

시선을 끌어올리자 눈이 풀린 슬기가 턱을 괴고 소주를 따르고 있다. 주현이 살짝 막자 슬기는 가볍게 그 손을 쳐낸다.

"왜 대답을 안 해요."

"없어요."

"오? 한 번에 대답해주네... 난 또 '과장님은요?' 이럴 줄 알았어요."

"과장님은요?"

"재미없어..."

"대답은요?"

주현은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슬기의 입으로 듣고 싶었다. 확실한 슬기의 답이 있었으면 했다.

"있다고 해야 하나... 없다고 해야 하나..."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없긴 한데요... 걘 내가 아직 좋은가 봐요. 내가 쓰레긴데."

"과장님이 왜 쓰레기예요."

"바람 피우면 쓰레기잖아요."

예상하지 못한 답이 나왔다. 주현을 아프게 찌르는 답. 그러나 슬기는 절대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주현이 아는 슬기는 그랬다.

"놀랬다. 그죠."

"어..."

"제가 전 애인이 있거든요? 저한테 아~주 나쁜 짓을 했어요. 근데 제가 얘한테 똑같은 짓을 했어. 나는 안 그럴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과장님. 취하신 거 같은데 그만 드세요."

슬기는 술병을 치우려는 주현의 손등을 때렸다. 주현이 당황해서 쳐다봤지만 슬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할 말을 이어갔다. 작정한 듯 했다.

"됐고, 들어봐요."

"......네."

"난 그 사람이 왜 그랬는지, 아직도 모르겠거든요? 난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말야. 그 사람이 자기 속내를 잘 말 안 해줬어. 맨날 그랬다고. 그러더니 어떡한 줄 알아요? 결혼해버렸어. 진짜 나쁘지. 나 그때 되게, 되~게 힘들 때였는데... 그 사람 때문에 진짜 몇 배는 힘들었어요. 근데 들어봐봐요. 진짜 어이없어. 1년 만에 이혼했대. 그것도 전 애인 못 잊어서. 나, 나를 못 잊어서 이혼했대. 이게 내가 납득이 돼요? 지가 나쁜 짓 해놓고 뭐야? 그럼 연락 해보기라도 하든가. 연락도 안 했어. 나한테 미안하다고 싹싹 빌러 와야지, 안 그래요? 나쁜 새끼."

"......"

"근데요. 내가 일이 생겨서 그 사람을 다시 만났거든요. 너무 미워했는데, 그 사람 보는 순간에 숨이 탁! 막히는 거야. 너무 보고 싶어했더라고. 절대, 저~얼대 인정 안하려고 했거든요. 근데 알아버렸어요. 아직도 그 사람이 신경 쓰여......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밉다가도 보고싶고, 보고싶다가도 밉고. 잘해주고 싶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하던 슬기가 얼굴을 들고 주현을 마주했다. 그리곤 취기 하나 없는 눈빛으로 주현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언니. 대답해봐요. 나한테 왜 그랬어요."

"내일 다 잊어버릴게요. 대답해봐요. 결혼은 왜 했고, 이혼은 왜 했어요."

주현은 그제야 알았다. 슬기는 취하지 않았다. 그냥 술의 힘을 조금 빌렸을 뿐. 이 대답에 따라 슬기는 내일 아는 척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주현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내가..."

주현은 아주 천천히 운을 뗐다.


연애가 삐걱거리기 시작한 건 슬기가 취업하고 나서였다.

슬기는 너무 바빴다. 슬기 주위에는 늘 사람이 많았지만, 취업 후에는 더 많아졌다. 주현 외에도 슬기의 시간을 쓰는 사람들이 많았다. 잦은 회식과 출장, 친목 모임까지 슬기의 주말 스케쥴은 몇 달치가 차 있었다. 주현이 낄 틈은 잘 나지 않았다. 주현은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갔다.

주현은 바쁜 슬기가 미안해 하는 게 안쓰러웠다. 자기도 바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닐텐데, 하면서 말이다. 슬기는 계속 미안해 했고, 주현은 괜찮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주현도 정말 괜찮은 것 같았다.

주현 역시 프로젝트가 끝나고, 여름 휴가철이 돌아왔을 무렵이었다. 주현은 슬기에게 말을 꺼냈다. 휴가는 언제 쓸 건지 말이다. 슬기는 휴가를 못 쓸 거 같다고 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주현은 그 해 휴가를 혼자 보냈다. 슬기가 출장을 갔기 때문이었다.

돌아온 뒤 슬기는 주현에게 친구들과 여행을 다녀와도 되는지 물었다. 어렵사리 시간이 맞은 듯했다. 몇 달만에 보는 친구들이고, 주현은 그때 감기에 걸려있어 여행을 갈 수 있을 지 미지수였다. 주현은 다녀오라고, 재밌게 놀라고 했다. 그리고 슬기가 여행 간 내내 주현은 집에 틀어 박혔다. 주현은 그때 처음으로 외롭다고 생각했다.

슬기는 주현을 어른으로 생각했다. 과외 선생님과 학생으로 만났기에 주현 역시 슬기에게 어른스러운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주현은 한없이 치졸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주현이 승진한 날이었다. 남들보다 빠른 승진이었다. 모두의 축하를 받으면서 주현은 슬기를 떠올렸다. 오늘만큼은 슬기를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슬기는 송년회 회식이 있었다. 주현은 이상하게 입 밖으로 승진했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슬기는 새벽이 돼서야 집에 들어갔고, 주현은 회사에서 선물로 받은 케익을 혼자 먹었다.

나중에 슬기는 왜 말하지 않았냐고 했다. 주현은 스스로 왜 그랬나 생각하면서도, 말했어도 슬기가 왔을까 하는 의심을 버릴 수 없었다. 슬기는 같이 축하하자고 말했고 주현은 거기에 또 기대했다. 하지만 같이 축하하는 일은 없었다.

선은 반쯤은 충동적으로, 나머지 반은 부모님의 강권으로 본 것이었다. 슬기한테도 말했다. 부모님의 아는 사람이라 안 나가볼 수는 없을 거 같다고. 주현은 슬기가 말려주길 바랐다. 화를 내기라도 하기를. 새 프로젝트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된 슬기는 주현에게 잘 거절하고 오라고 말해줬다. 주현은 그때 자신 안에 뭔가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상대는 친절했다. 애인이 있다는 주현의 말에 괜찮다며 그럴 수 있다고 말했다. 연애 상담이 된 선 자리에서 주현은 오랜만에 마음이 편한 걸 느꼈다. 상대는 속마음을 털어놓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주현은 상담을 빙자해 상대를 몇 번 더 만났다. 슬기한테는 말하지 않았다. 선 상대와 있어도 슬기에게 연락이 오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때 슬기는 일이 우선이었다.

주현은 더이상 슬기에게 자신이 필요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결국 슬기에게 결혼 반지를 보이며 이별 통보를 했을 때, 주현은 슬기가 무덤덤할 거라고 예상했다.

틀렸다. 슬기는 아주 상처 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망울에 눈물을 달고서, 주현을 원망하고 있었다. 주현은 그때 자기 실수를 깨달았다. 자신 역시 슬기를 혼자 두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그러나 슬기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현은 붙잡지 못했다. 더는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었다.


광고는 무사히 송출됐다.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주가도 회복됐고, 대중 사이에서 사건은 잊혀지고 있었다. 

슬기는 통영에 와 있었다. 광고 건이 일단락 돼서 숨통이 트인 참에 휴가를 몰아 썼다. 봄내음이 풍기는 통영은 슬기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주현은 그날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슬기는 이 일로 이제 주현과의 인연이 끝이라 여겼다. 정말로 정리할 때가 왔다고, 슬기는 생각했다.

늦은 저녁까지 산책을 하고 들어오니 핸드폰 알람이 수십개가 쌓여 있었다. 두고 나가길 잘했다. 슬기는 알람을 대충 확인해보다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다. 주현이었다.

다시 걸어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 주현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온다. 슬기는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이게 마지막이다, 생각하면서.

"네."

"아 받았다. 어디야?"

"대표님..?"

주현은 숨을 헉헉 몰아쉬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몰라 슬기는 당황스러웠다.

"강슬기, 어디냐고."

"통영이요..."

익숙한 저 이름 세 글자. 저 말만 들으면 그때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핸드폰을 쥔 손에 꾹 힘이 들어간다.

"통영? 지금 있는 데 주소 보내. 바로 출발할게."

"아니, 무슨 일인지 말을 해주고."

"할 말 있어. 얼굴 보고 해야 돼. 주소 보내, 빨리."

그리곤 전화가 끊어진다. 당황스럽다. 주현은 원래 충동적인 사람이 아니다. 이렇게 갑자기 먼 길을 달려올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슬기는 '배주현 대표님'이 남긴 카톡을 살폈다.

[슬기야. 나 할 말 있어. 퇴근하고 얼굴 볼 수 있어?]

[너네 부장님 만났어. 휴가라며. 집에 있어?]

[전화 좀 받아줘.]

[나 아직 너한테 할 말 남았어. 한 번만 만나줘.]

[슬기야.]

심장이 멋대로 뛰었다. 슬기는 다시 스무살로 돌아갔다.


슬기는 한숨도 못 자고 주현을 기다렸다. 새벽녘이 밝아올 때 쯤 주현은 도착했다.

"무슨 일인데 이 시간에 여기까지 와요..."

"슬기야."

"네."

"나 정리하지 마."

슬기가 움찔 하며 주현을 바라본다. 주현은 여태 보지 못한 간절한 얼굴이었다. 당장 울 거 같은.

"나는... 너무 외로웠어. 너한테 상처 준 거에 대한 변명인 거 같아서 그날 아무 말도 못했어. 내 잘못이야. 나도 널 혼자 뒀는데. 나만 혼자인 것처럼 생각했어."

"......"

"우리가 끝났다고 생각했어. 더 이상 이어갈 수 없겠다고. 근데 아니었어. 너한테 헤어지자고 한 그날 바로 실수한 거 알았는데, 잡을 수가 없었어. 되돌릴 수 없는 실수를 했어. 난 네 생각만큼 어른이 아니야. 찌질하고 치졸하고 널 독차지 하고 싶어. 근데 그게 안되니까, 너한테 멋있을 수 없어서 너무 내가 싫었어. 그래도 알아... 이게 변명은 안돼. 난... 그냥... 난..."

"언니."

주현이 슬기를 바라본다. 슬기는 주현 앞에 다가섰다.

"그 말 하려고 온 거예요?"

"......보고싶었어. 슬기야."

슬기는 주현에게 입을 맞췄다. 주현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 입술이 떨어지고 슬기는 주현을 안았다.

"또 그러지 마요. 진짜로."

"응... 너도..."

"이럴 땐 한 번 져주면 안 돼요?"

"내가 너 많이 사랑해."

"이럴 때만 그런 말 하고... 나도 사랑해요."


"슬기야."

주현이 눈을 떴을 때 사위가 밝았다. 창 밖에서 들어온 햇살이 방 안을 눈부시게 채우고 있었다.

"왜요..."

주현이 잠결에 부른 이름은 허공에 흩어지지 않았다. 슬기는 자다 깨서 짜증이 난 듯 눈을 감은 채 인상을 찌푸렸다. 주현은 씩 웃으면서 슬기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슬기 품 안을 파고 들었다. 익숙한 듯 슬기는 주현을 끌어안고 다시 잠들었다. 일상적인 오후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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