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슬] 우리는 서로를 모른다 (上)

오피스물 (40대 배X30대 강)

마싯다 by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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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x됐다.

강슬기는 속보로 뜬 인터넷 기사를 보고 사고가 멈춰버렸다. 옆에서 애인이 왜 그래? 하고 물어도 바로 대답이 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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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광고 모델이 하루 아침에 범죄자가 됐다. 하필이면 음료 회사 광고 모델이 마약 범죄자라니, 마케팅 팀 과장 강슬기는 쏟아지는 단톡방 메세지를 보며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계약은 당연히 파기됐고, 위약금도 받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해당 연예인은 이 음료의 얼굴이나 다름 없었다. 인터넷에선 광고 장면을 이용한 조롱이 이어지고 있었다. 회사 이미지 타격이 심각했다. 주가도 반응해서 사무실 분위기는 살얼음판이었다.

회의가 시작됐지만 이렇다 할 답이 나오지 않았다. 광고를 새로 만들긴 해야겠는데 이걸 어떤 연예인이 할 것이며, 어떤 광고 기획사가 이 제작 부담을 떠안겠냐 말이다. 강슬기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강 과장."

부장의 부름에 슬기가 고개를 들었다. 어째 불안했다.

"네?"

"맡길 만한 데 없어? 강 과장 발 넓잖아."

"아..."

부장이 그봐, 하는 얼굴을 한다. 그래, 사실 아까부터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근데 절대로 부탁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아니,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 그 사람만큼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강 과장, 일단 그쪽 얘기 해보고. 나머지도 빨리 수소문 해봐. 이번에 제대로 못 넘기면 우리 다 나가리 난다."

자리에 앉아 강슬기는 핸드폰을 붙들고 화면만 쳐다봤다. 걱정이 되는지 애인이 계속 톡을 보내오고 있었다. 강슬기는 전화 키패드를 열었다. 그 번호는 몇 년이 지나도 손가락이 잊어버리질 않는다. 완성된 11자리 번호 위로 애인의 카톡 미리보기가 뜬다.

[언제든지 연락해.]

"하......"

강슬기는 휴게실로 향하며 전화를 걸었다. 제발 받지 마라. 제발 번호를 바꿨길. 아니면 내 번호를 까먹기라도 했길.

하지만 오늘도 강슬기의 애원은 저 위에 계신 분에게 닿지 않는다.

-강슬기?

강슬기는 긴 한숨을 소리 없이 내뱉었다. 그리고 최대한 건조한 목소리로 덤덤하게 말한다.

"오랜만이에요, 언니."


지지리 운 없기로 유명한 강슬기한테 유일하게 운이 좋았던 순간은 짝사랑에 성공했을 때였다. 고등학생 강슬기는 3살 많은 대학생 과외 선생님을 짝사랑했다. 공부엔 관심도 없던 강슬기는 오로지 과외 선생님과 같은 학교를 가겠다는 생각으로 공부에 매진했다. 끝내 강슬기는 과외쌤과 같은 학교에 합격했다. 강슬기가 새내기였을 때 과외쌤은 4학년이었으므로 마주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강슬기의 순수한 집념은 그 정도 어려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겨우 과외 선생님에서 선배님이 된 관계였다. 그래서 자기 전공도 아닌 4학년 수업을 청강 신청까지 해가며 어떻게든 마주칠 구실을 만들어 강슬기는 미친듯이 짝사랑을 했다.

강슬기의 과외 선생님은 눈치가 좋아서 강슬기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어쩐지 고등학생일 때부터 봐왔던 강슬기를 마음에 담는 것이 죄책감이 들어 일부러 그 마음을 외면해왔다. 결정적으로 슬기가 고백하지 않기도 했고. 그러나 제 마음도 커지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사실 슬기는 여러 차례 고백을 시도했다. 매번 결정적인 말만 혀끝에서 맴돌다 꾹 삼키게 돼서 문제였지만 말이다. 어린 애로 보이고 싶지 않은데, 선배는 따라잡을 수 없는 어른 같았다.

그러다 슬기가 MT를 간 날이었다. 갑자기 생긴 필참 규정에 선배와의 약속을 깨고 끌려가다시피 해서 간 MT였다. 막상 도착하니 정신 없기도 하고, 슬기는 선배에게 연락하는 걸 깜박해버렸다.

밤에 술을 한참 먹다 취한 강슬기는 그제야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나와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숙소 근처 낡은 의자에 앉아 빙글빙글 도는 밤하늘을 보면서 선배에게 도착해서 정신이 없었다고, 이제 연락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선배는 말이 없었다. 강슬기는 이상함을 느꼈다. 선배를 부르자 전화 너머로 대답이 들려왔다.

"나 계속 기다렸는데."

빙글빙글 돌던 하늘이 갑자기 제자리를 찾았다. 강슬기는 술의 힘을 빌려서, 충동적으로, 하지만 계속 준비해왔던 그 말을 뱉었다.

"저 언니 좋아해요."

연애는 순탄했다. 무려 10년을 만났다. 지겹지 않냐는 주변의 질문에 강슬기는 지겨운 게 뭐냐고 되물을 정도로 둘의 관계는 아주 원만했다.

언니의 졸업과 취업, 슬기의 졸업, 취준과 취업, 사회초년생 시절까지 모든 과정을 언니와 보냈다. 그냥 모든 게 너무 자연스럽고, 순조로웠다.

그래서일까. 모든 게 너무 운이 좋아서, 강슬기는 남들이 이미 겪은 불운을 한꺼번에 되돌려 받은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강슬기의 첫사랑은 언니의 결혼과 함께 끝났다.


"대표 배주현 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회의실에 마주앉은 강슬기 팀과 광고 기획사 사람들은 인사를 나눴다. 다른 팀원들이 컨택한 기획사는 모두 광고 기획을 거절했다. 배주현의 기획사만 미팅에 응했다. 강슬기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30대 후반이다. 강슬기는 이제 어딜 가도 예전처럼 어리숙하거나 버벅거리지 않았다. 표정 관리도 꽤 잘하게 됐다. 문제는 그걸 전부 맞은 편에 앉은 배주현 대표한테서 배웠다는 것 뿐이다.

주현은 사무실에서 슬기를 아는 체 하지 않았다. 두 분 인연이 어떻게 되냐는 부장의 질문에 주현은 대학 동문이라고만 대답했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슬기는 주현이 쓸데없는 얘기를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일은 일이니 슬기는 주현의 기획 얘기에 집중했다. 주현의 기획은 슬기의 회사가 제시한 방향과는 달랐다. 하지만 슬기의 눈에는 현실적이고, 신선한 접근이었다. 톱스타를 고집하는 이사회와 달리 주현은 몇 명의 신인 배우를 골라왔다. 에너저틱한 이미지를 강조해 강한 인상으로 사건을 덮고 싶어하는 회사와 달리 주현은 밝고 활기 넘치는 청춘의 이미지를 씌우고 싶어했다. 미팅은 수평선을 달렸다.

수정안을 요청하고 미팅 자리를 마무리 하는 동안 슬기는 주현에게 다가갔다.

"대표님."

"네, 슬기 씨."

"오늘 와주셔서 감사해요. 갑자기 연락드렸는데도..."

"일이니까요."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단호한 주현에 슬기는 생각했다. 그래, 이런 사람이었다. 선이 확실한 사람.

"수정안 잘 부탁드려요. 그럼."

슬기가 인사를 하자 부장이 다가와 주현과 악수를 나눴다. 무심결에 주현의 손에 눈길이 갔다.

주현의 손가락이 비어 있었다.

자리를 파하고 주현을 배웅하는 동안에도 비어있던 약지가 계속 머릿속 한 켠을 차지했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건 슬기에게 이별을 고하는 날 보여줬던 그 반지, 주현의 결혼 반지였다.

결혼 반지를 일부러 빼고 다니나? 그럴 사람은 아니다. 슬기와 했던 커플링도 도무지 빼는 일이 없어 그 자리만 하얗게 자국까지 생겼었던 주현이다. 그런 사람이 하물며 결혼 반지를 그냥 빼두고 다닐 리가 없는데.

카톡 알람이 뜬다. 애인이었다. 슬기는 괜히 뜨끔하는 마음을 삼켰다. 정신차려 강슬기. 너 지금 애인 있어. 애인에게 주현과 일을 한단 얘기는 하지 않았다. 애초에 애인은 주현이 전 애인인지도 모르는데,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었다.

애인에게 답장을 하는 사이 대학교 친구들 단톡방 알림이 떴다. 다음달에 결혼하는 친구의 청첩장 모임 얘기였다. 슬기는 순간 언니에 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다.


주현은 대학 시절 피곤한 일을 많이 겪었다. 툭하면 학교 대나무숲 페이지에 주현을 찾는 글이 올라오고, 도서관에 가면 슬쩍 말 붙이고 싶어하는 사람이 꼭 한 명은 있었다. 새내기 때는 추근대는 선배가 곤란했고, 고학년이 됐를 땐 주현의 성과를 질투하는 무리 때문에 고생했다.

주현이 과외를 시작한 건 굳이 남는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용돈 벌이도 하고, 부담스러운 부탁이나 약속을 거절하기도 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르치는 학생이 참... 귀여웠다.

슬기는 주현이 대학교 2학년 말 쯤 맡은 학생이었다. 공부를 못하는 건 아니지만 영 흥미가 없다며, 대학 갈 생각이 없는 거 같다는 게 슬기 부모님의 걱정거리였다. 주현은 대학생 과외로 어떻게 의욕을 끌어올리나 싶었지만, 과외 선생이란 역할을 맡은 바 어떻게든 고객의 니즈를 맞춰줘야 했다. 이런저런 걱정을 하며 슬기를 마주했을 때 주현은 발견하고 말았다.

18살 강슬기의 첫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을 말이다.

처음엔 귀여웠다. 과외쌤이랑 같은 학교를 가고 싶단 이유로 열심히 공부하는 게 기특하기도 하고, 그 작은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며 제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모습이 순수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진지하게 슬기를 연애 상대로 생각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엄연히 성인과 고등학생으로 만났고, 과외 시간 만큼은 주현은 슬기의 선생님이었다. 이 무렵에 하는 사랑이란 보통은 아주 깊거나 길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슬기의 마음을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여기진 않았다. 그래서 주현은 슬기가 주현과 같은 학교의 합격증을 내밀었을 때, 꽤 많이 놀랐다.

슬기의 마음은 주현이 생각한 것보다 깊은 것 같았다. 슬기는 입학 후에 어떻게든 주현과 접점을 만들어 냈다. 마음을 숨길 줄도 몰랐다. 주현의 친구는 부담스럽지 않냐고 물었다. 저렇게 티를 내면서 너만 졸졸 따라다니는데 부담스러우면 빨리 선 그으라 재촉하며 말이다.

그게 문제였다. 슬기에게 선을 긋는 건 쉽지 않았다. 슬기는 주현의 선을 항상 지우고 들어왔다. 그 마음이 싫지 않은 것도 문제였다. 양심이 계속 말을 거는데도 주현은 슬기에 대한 마음이 커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비겁하다면 비겁하게도, 주현은 슬기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렸다. 먼저 시작을 말하지 않는 게 주현의 마지막 양심이었다. 그래서 마침내 슬기가 고백한 순간, 주현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했다.

물론 그때는 제 손으로 그 행복을 부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왜 하필 그런 얘기를 들어가지고는.

강슬기는 오늘도 평행선을 달리는 미팅을 진행하고 있는 부장과 배주현을 보며 딴 생각 중이었다. 주말동안 강슬기는 잠자리가 영 불편했다. 걱정하는 애인에게는 회사 일 때문이라고 둘러댔지만, 사실은 배주현 때문이었다.

토요일에 있었던 청첩장 모임에서 강슬기는 기대한 대로 배주현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내용을 듣고 나니 차라리 알지 못했던 게 나을 뻔 했지만.

배주현은 결혼한 지 1년만에 이혼했다. 일방적으로 이혼을 당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처음엔 꼴 좋다고 생각했다. 자길 그렇게 차놓고 고작 1년밖에 못 살다가 이혼 당했다니, 쌤통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이유가 뭐래? 하고 물으니 친구들은 말하다말고 약간 망설였다. 친구들은 어디가서 말하진 마, 하며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언니가 전 애인 못 잊은 거 걸렸대. 사진이랑 물건이랑 다 갖고 있던 거 알았나봐. 이혼하자고 하니까 순순히 그러자고 했다더라. 유책이 언니니까 어떻게 하지도 못했겠지.

그때부터 도저히 모임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주현과 만났던 걸 모르는 친구들 앞에서 티를 낼 수도 없었다. 하지만 강슬기의 머릿속은 온통 물음표로 가득 차 있었다.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배주현이 강슬기 때문에 이혼당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됐다. 강슬기를 먼저 버린 쪽은 배주현 아니던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배주현에게 직접 전화할까 생각도 했다. 그러나 그 용기는 나지 않았다. 애인도 있는 사람이 전화해서 뭐라 할 건가. 왜 나 때문에 이혼했냐고? 날 버려놓고 왜 날 못 잊어서 이혼 당했냐고? 이혼 하고 나서는 왜 연락하지 않았냐고? 강슬기는 애꿎은 머리카락만 헤집었다.

부장과 좁혀지지 않는 의견 차이를 조곤조곤 얘기하는 배주현의 시선이 한숨을 내쉬는 강슬기에게 잠시 머물렀다가 거둬졌다. 강슬기는 답답했다. 갑자기 들은 배주현의 이혼사나 고집 부릴 상황이 아닌데도 고집을 부리고 있는 지금 배주현 대표 둘 다.

별다른 성과 없이 미팅을 끝내고 강슬기가 배주현을 배웅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강슬기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만 할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미팅이 끝나고 표정이 좋지 않은 부장을 봤던 강슬기가 먼저 입을 뗐다.

"대표님."

"네."

"저도 대표님 기획안이 좋긴 한데... 양보 해주시는 게 어떨까요. 지금 상황이..."

배주현은 대답이 없었다. 사실 진짜 묻고 싶은 건 이게 아니긴 하지만, 이 얘기도 해야할 얘기였다. 배주현 같은 현실주의자가 이런 고집을 부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강슬기네 회사도 선택지가 없어서 배주현과 이렇게 실랑이를 벌이고 있긴 하지만, 배주현은 언제든 이 계약을 파기 당할 수도 있었다. 배주현을 소개한 강슬기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과장님한테는 피해 없도록 조율할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 얘기가 아니라..."

슬기가 말을 마치기 전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배주현은 강슬기를 돌아보며 말했다.

"부장님한테는 수정안 최대한 빨리 마련하겠다고 전해주세요.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내려가는 건 혼자 가겠습니다. 다음에 뵐게요."

 배주현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한 뒤 엘리베이터를 탔다. 잡을 틈도 없었다. 강슬기는 슬며시 열이 올라오는 걸 느끼며 자리로 돌아갔다. 항상 이런 식이지, 항상.


"이런 식이면 우리도 계속 시간 끌 수는 없어."

점심시간이 지나고나서 부장은 강슬기를 불러다 조용히 말했다. 맞는 얘기였다. 거기다 어제 다른 기획사에서도 기획에 긍정적인 답변을 보내와서 부장에게는 선택지가 늘어났다. 배주현의 고집을 계속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슬기 씨가 소개해준 사람이라 믿기는 하지만 우리 여유 없는 거 알잖아."

"네. 그렇죠."

"그쪽도 왜 그렇게 고집 부리는지 모르겠네. 사실 이쪽이 하자는 대로 하는 게 맞잖아? 알아보니까 그쪽 기획사 사정도 힘든 거 같던데."

"그건... 몰랐어요."

"하여튼 슬기 씨가 잘 좀 얘기해봐. 나도 솔직히 이렇게 피곤하게 일 할 이유가 없어. 그냥 바꾸고 싶거든. 슬기 씨 봐서 한 번 더 기회 주는 거니까."

강슬기는 고개를 끄덕이고 흡연실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담배가 땡겼다. 배주현과 헤어진 뒤로 피우기 시작해서 얼마 전에 끊었는데 일이 힘들긴 힘들다. 강슬기는 담배 하나를 입에 물고 핸드폰을 봤다.

배주현은 처음 전화했을 때를 제외하고 슬기를 완전히 강슬기 과장님으로만 대했다. 사적으로 만날 일이 없어서기도 했지만, 그렇게까지 거리 두면서 딱딱하게 굴어야 하는 건 오히려 이쪽이 아니냐고. 배주현과 나눈 카톡 역시 오로지 미팅 일정을 잡는 얘기 뿐이었다.

방금 전 배주현 회사 얘기를 들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강슬기의 마음은 한층 심란했다. 회사와 배주현 사이에 낀 자신의 입장도 난처했지만, 배주현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게 사적인 마음이라는 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강슬기는 차마 차단은 못하고, 숨김 처리 해둔 채 오랫동안 보지 않았던 배주현의 카톡 기본 프사를 눌러봤다. 그동안 보지 않아서 몰랐는데 옆으로 넘겨보니 그동안 설정해둔 프로필 사진들이 나온다. 죄다 하늘 사진에 꽃 사진 뿐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하나도 안 변했는지. 20장이 넘는 사진을 넘기다 보니 뭔가 익숙한 사진이 하나 나온다. 공원에서 찍은 벚꽃 사진이었다. 꼭 구도가 헤어지기 직전에 받았던 그 사진이랑 비슷하다. 파스텔 톤의 핑크색 네일을 한 왼손이 벚꽃을 잡을 듯 쭉 뻗은 사진. 약지에는 반지가 있다. 결혼 반지인가. 강슬기는 연기를 내뱉으며 사진을 확대해본다.

"뭐야?"

강슬기랑 했던 커플링이다. 강슬기는 서둘러 다시 최근 방향으로 사진을 넘겨본다. 강슬기 기억에 배주현이 이 사진을 프로필로 했던 적은 없다. 최근 사진에 결혼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 사진 뒤로도 넘어가본다. 그 사진 뒤로 하늘 사진 몇 장만 나온다. 연애의 흔적이 보이는 건 이 사진 한 장이다.

"하..."

짧아진 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끈 강슬기는 다시 담배 하나를 물었다. 심란함은 더해지기만 한다.

강슬기는 배주현의 기획사 앞에 서 있었다. 일만 생각하자며 강슬기는 스스로를 다잡았다.

사무실로 올라가자 직원 하나가 강슬기를 맞이했다. 대표실로 향하며 강슬기는 무슨 말부터 꺼낼지 정리했다. 그러나 대표실에서 배주현과 마주하자 강슬기의 머리는 텅 비어 버렸다.

배주현의 책상은 온통 강슬기의 회사와 관련된 자료로 뒤덮여 있었다. 대표실 전체가 온통 이 광고에만 집중돼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금방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한 배주현이 앉아 있었다. 배주현은 들어온 강슬기를 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강 과장님. 여기까지 오시게 해서..."

인사를 하러 책상을 돌아 나오던 배주현이 휘청거렸다. 강슬기는 배주현을 붙들었다. 말보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배주현은 자길 붙들어 안은 강슬기를 잠시 올려다 보다 이내 조용히 감사 인사를 하고 똑바로 섰다. 꼿꼿한 자세였지만 강슬기 눈에는 여전히 위태로워 보였다. 제대로 잔 게 언젠지 가늠도 안됐다.

마주 앉은 배주현과 강슬기는 말이 없었다. 배주현은 딱 봐도 진해 보이는 블랙 커피를 인상 쓰며 홀짝거렸다. 그리곤 한두모금 먹다 말고 내려놨다. 강슬기가 아는 배주현은 블랙 커피를 극혐했다. 나이가 드니 취향이 바뀐 것일지도 모르지만, 배주현의 반응으로 보아 좋아해서 먹는 건 아닌 게 분명했다.

"대표님, 제가 오늘 온 건..."

"네."

"기획을 그냥 저희 쪽에 맞춰 주셨으면 하는 말씀 드리려고 온 겁니다."

"......수정안 제작 중입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대표님. 무슨 말인지 아시잖아요."

"저는 이 방향이 맞다고 생각하는..."

"그게 아니라요."

"강 과장님. 저도 저희 직원들도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미팅날에..."

"언니."

그냥 이러면 계약 물 건너갈 수 있다고 말하면 되는 일인데, 입이 안 떨어졌다. 배주현 꼴을 보니 더 그랬다. 배주현이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건 맞다. 그러나 배주현이 이 일에 간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배주현은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강슬기는 답답했다. 여전히 이 모양으로 일하는 배주현이, 어울리지도 않는 고집을 부리는 배주현이, 무슨 속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 배주현이, 그리고 이 모든 걸 신경쓰여 하는 강슬기 자신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말도 안되는 고집 부리고 있는 거 본인도 알잖아요. 기획사는 원청이 하자고 하면 하는 게 맞잖아요. 근데 왜 이래요? 회사도 힘들다면서요. 왜 이런 쓸데없는 알력 싸움을 하려고 하는 거에요. 무슨 생각이에요, 대체? 진짜 답답해서 그래요. 언니 무슨 생각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강 과장님. 지금 많이 흥분하신 거 같은데..."

"아뇨, 저 지금 되게 차분해요. 진짜 언니 왜 이러나 싶어서 답답해서 그래. 언니도 사회생활 할 만큼 했잖아요. 근데 융통성은 다 어디 갖다 줬어요? 지금 이쪽 회사 맘대로 할 상황이 아니라니까요? 왜 이렇게 맘대로에요. 옛날에도, 지금도?"

배주현은 입을 다물었다. 그게 더 마음에 안 들었다. 강슬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앉아 있으면 폭발할 거 같았다. 배주현은 일어나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 시선을 내리 깔고 있었다. 배주현은 평소보다 더 작아 보였다. 강슬기는 그냥 대표실을 나가려다 돌아와 섰다. 들고 왔던 종이백을 배주현 앞에 내려놓자 배주현이 움찔했다.

"먹고 일하세요. 미팅 날 뵙겠습니다. 배 대표님."

강슬기가 대표실을 나가고 나서 배주현은 책상에 돌아와 앉아 조심스럽게 쇼핑백을 열었다. 샌드위치와 밀크티, 비타민 영양제가 들어있었다. 배주현은 일거리를 밀어두고 천천히 아주 늦은 점심 식사를 했다.


야근 후 집에 돌아온 강슬기는 움찔 놀랐다. 애인이 예고도 없이 집에 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낮에 배주현을 보고 와서 그런지 애인을 보는 게 영 껄끄러웠다.

"왔어? 연락하지. 오래 기다렸겠네."

"슬기야."

"어?"

"설명 부탁할게."

겉옷을 벗기도 전 강슬기 앞에는 사진 몇 장과 편지 그리고 반지가 던져졌다. 배주현과 만나던 시절 찍었던 사진들. 취미로 하던 필름 카메라로 찍은 배주현. 키스하는 사진들. 그리고 그 사진 속에서 배주현과 강슬기가 나눠 끼고 있는 반지까지.

"일이 힘들어서 그런가 보다 했어. 회사 얘기하는 걸 꺼리길래."

"네가 사람 소개해서 일한다길래 네 평판 잘못될까 걱정했는데 딴 걸 걱정해야 했나봐?"

"이 사람이 그 사람이지. 오래 만났다던 전 애인. 끔찍하게 차였다는 거짓말은 하진 말지 그랬어."

머릿속이 하얘졌다. 답답해서 미칠 거 같던 머릿속이 그냥 텅 비어버렸다. 강슬기는 아무 말도 못하던 배주현을 떠올렸다. 이런 기분이었나? 이 와중에도 배주현을 떠올리는 자신이 미친 거 같았다.

애인이 집 밖으로 나가는 데도 강슬기는 멍하니 거실 한복판에 서 있었다. 현관 센서등이 툭 꺼지고 나서야 주섬주섬 바닥에 흩뿌려진 사진과 반지를 주워 소파에 앉았다.

차마 버릴 수 없었다. 10년의 연애는 강슬기에게 너무 특별했다. 아니, 배주현은 강슬기에게 너무 특별했다. 수많은 사진과 편지, 세 번 바꾼 반지. 배주현이 결혼이라는 충격을 안겨준 뒤에도 강슬기는 그 모든 걸 버리진 못했다. 도저히 쓰레기통으로 가져갈 수 없었던 사진 몇 장과 마지막 순간에도 끼고 있었던 그 반지는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발견했는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강슬기가 그걸 가지고 있다는 것, 애인이 그걸 발견했다는 것 그게 중요했다.

강슬기의 마음은 이상하게도 차분했다. 아까 배주현에게 쏘아붙일 땐 말만 그랬다면, 지금은 정말 차분했다. 놀라울 정도로 애인에 대한 생각은 크지 않았다. 그래서 강슬기는 확실하게 알았다.

나는 배주현이라는 사람이 아직 신경쓰인다.

그래서 이건 바람이 맞다.

"쓰레기네..."

강슬기는 잔뜩 옹송그리고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또 배주현 생각을 했다. 잔뜩 작아져 있던 그 등을 떠올렸다.

그리고 아마 내일도 배주현 생각을 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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