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펌

미지의 너머

커미션 작업

정원 자체가 예술작품처럼 꾸며져 새하얀 대리석 길과 조화롭게 이어진 하얀 장미꽃밭은 루의 바다로 향하는 눈길을 돌리지 못했다. 그러나 높디 높이 쌓아올린 서양식 정자는 바다가 보이는 시야를 완벽하게 가로막았다. 이곳은 무척 평화로워 보이지만 루에겐 딱히 반가운 곳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황궁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루에겐 그저 이곳도 익숙해졌다. 루가 티타임의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때마다 나오는 시종의 인위적인 잔기침은 이제 새소리로 들렸다. 이젠 습관적으로 설탕을 때려넣어서 이 지루한 시간을 보내려고 했건만, 그러니까 왜 이런 상황이 된 거지.

“하핫, 우리 황녀님은 언제나 그렇듯이 말이 없으시구만!”

“…”

루는 방금 선장의 말에 경악함을 감추지 못했다. 히야는 티타임 때 지나친 소음을 좋아하지 않았다. 급하게 선장의 다리 쪽으로 발을 차지만 선장은 “너무 오랜만에 봤더니 앙탈을 부리는 건가? 하여튼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나 보군.” 이란 말을 던지면서 웃어넘겼다. 그 말과 루는 히야쪽을 바라봤다. 표정을 봐라, 엄청 언짢아 보이잖아. 선장, 쟤 심기 거슬리면 안 된다고. 잘못하면 손을 포크로 뚫릴 수도 있어. 말은 하지 않고 표정으로 최대한 선장을 만류해봤지만 오늘따라 선장은 눈치가 없어 보였다.

새하얀 고급비단천이 깔린 티테이블 위 고급 그릇에 놓인, 황실의 장인이 정성스럽게 만든 애프터눈 세트 중 디저트들은 누가 봐도 먹음직스럽게 생겼었다. 선장은 히야가 먼저 한 입을 하기 전에 손으로 다쿠아즈를 집었다. 옆에 있던 시종의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이후에 이어진 행동은 충분히 뒷목 잡고 쓰러질 만도 했다. 다쿠아즈의 크기가 너무 큰지 그는 그릇이 아닌 테이블 위에서 다쿠아즈를 부서뜨리고 한입을 먹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부스러기가 하얀 비단천을 새 놓았다. 옆의 시종은 이를 묵인하는 히야와 선장의 덩치 때문에 아무 말을 안하는 거지 루가 그랬으면 언질을 줬음이 분명했다. 그래도 시종이 성깔 하나는 있기 때문에 참다 참다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선장의 호탕한 웃음에 그마저도 막혀버렸다.

“하하-. 이거 양 정말 작네, 황실은 이런 걸로 배가 차나? 우리 루는 안 그런데 말야? 황녀님, 루가 저렇게 말라 보여도 용량은 꽤 되는지라 잘 먹여줬으면 좋겠는데. 황실에 와서 더 못 먹고 있는 거 아냐?”

“그 정도는 아니잖아. 갑자기 남의 용량으로 뭔 허풍이야.”

남아있는 다쿠아즈 한 조각을 입에 던져넣으면서 선장은 우물우물거렸다. 선장이 대체 여기에 와서 뭘 하려는 건지 모르겠는 루는 그 말에 반박해줬다. 루의 곁에 오래 있었다면 알겠지만 루는 적당량만 섭취하는 걸 선호했다. 많이 먹어봤자 몸을 움직이는데만 리미트가 걸릴 뿐이란 걸, 해적일을 하면서 몸소 체험해왔기 때문이다. 그런 거짓 허풍 따위야, 히야가 넘어가겠지 싶었다.

“… 해적선보다 이곳이 더 낫다.”

“아?”

허풍은 무시하고 홍차의 향이나 음미하고 있을 줄 알았던 히야의 답이 들리자, 그만 루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의문을 입 밖에 내고 말았다. 그 많고 많은 말 중에 받아친 말이 황실의 수준이니 그런 게 아니라 내 이야기라고? 순간 루는 선장 입에 잠깐 떠올랐던 스친 미소를 보았다. 그러나 티테이블을 약지로 두드리는 선장의 행동은 현재 무척 기분이 언짢다는 의미였다. 선장에게 어떠한 의문을 표하려 했지만 선장이 볼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보면 볼수록 살이 빠지는 구만. 다음번엔 좀 통통하게 봤으면 좋겠는데.”

“…”

루는 이번에는 대답이 없는 히야 쪽을 빤히 바라봤다. 어떠한 동요도 하지 않은 얼굴로 그녀는 조용히 홍차의 온기가 가시기 전을 즐기고 있었다. 어쩐지 선장의 눈도 히야를 향하고 있었다. 대체 당신 여기에 뭐하러 온 건데…! 자신에게 몰린 두 쌍의 눈을 보더니 히야의 눈의 표정이 약간 풀렸다. 루가 히야의 곁에 오래 머무르면서 그녀의 감정에 대해서는 약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감정을 표현하는 걸 눈치채는 것보다는 약간씩 흘러나오는 그녀의 감정을 눈치챈다는 것에 가까웠다. 보통 눈의 표정이 약간 풀리는 때에는 만족스러운 승리를 겨며 줬을 때였다. 루는 자신이 탈출하고서도 몇 번이고 붙잡혀 왔던 때를 떠올렸다. 음… 그러니까 방금 그 말에서 대체 어디가 만족스러움을 준거지.

루가 히야를 빤히 쳐다보자 손짓으로 시종을 부르던 히야가 이쪽을 빤히 쳐다봤다. 많은 시간을 곁에 있어봤지만 역시 속은 정말 모르겠는 얼굴이다. 이윽고 조용히 히야의 시선을 따라 선장도 루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을 한다면 지금이 적기다. 그제야 루는 자신이 궁금했던 바를 물어봤다.

“그래서 왜 선장은 황실에 온건데?”

“당연히 너 보러왔지, 루. 우리 부선장이 없으니 갑판도 남아돌지 않아. 맨날 지들끼리 티격태격 싸운다고.”

“내가 있을 때도 원래도 그랬잖아. 갑판도 익숙해지라고 선장.”

빌리가 맨날 갑판에서 본인 칼의 강도를 시험해보겠다고 온갖 나무바닥에 기스가 나있는건 당연한 거고, 심심하다면서 나이프 3개로 저글링을 하는 소피까지해서 별다른 건 없을 것이다. 당신이 제일 익숙할 상황인데 혹시 뭐 히야한테 제안할 거라도 있던 거 아니냐고.

조용히 테이블로 다가온 시종은 따뜻한 향을 품고 있는 차를 히야의 잔에 다시 따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디저트가 새로 나왔다, 물론 빈 그릇과 누군가 테이블 위에 흘린 부스러기도 치우면서 말이다. 선장은 다시 채워진 홍차를 향도 음미하지 않고 오크통 맥주를 원샷 때리듯이 입에 쏟아넣었다. 그러고선 다시 잔을 들어 올린 히야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어차피 황실에 계속 있을 것도 아닌데. 다시 올 거잖아, 루. 네가 여기 있는 건 잠깐의 비지니스니까.”

저번에도 선장이 이야기했지. 모종의 거래를 자신을 대가로 했다고, 그 거래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선장이 했다면 이에 불만은 없다. 초반은 탈출하려 했지만 거래가 진행되기 위해선 여기에 머무르는 게 맞다고 생각했기에 루는 최근 들어 순종적으로 황실 생활에 임하고 있다. 어차피 거래가 끝나면 언젠가 끝날 생활이라는 걸 루는 알았다. 그건 히야도 잘 알고 있을 것이고.

덜그럭거리는 찻잔 내려놓는 소리가 들린다. 히야는 어느 몸짓에도 소리를 잘 내지 않는다. 그러나 방금 찻잔을 들고 있던 유일한 사람은 그녀였다. 루는 약간 눈을 동그랗게 뜨고 히야 쪽을 바라봤다.

“… 내 소유는 당연히 남아있는다.”

“오호라-.”

“허락 없이 내 곁을 떠나지 못해.”

“그런데도 우리 루는 배로 잘 돌아왔지. 항상 그랬듯이 루가 돌아올 곳은 우리 해적선이니까.”

분명 저번의 이야기를 하는 듯 했다. 그건 뭐 히야에게 정해진 날짜까지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결과였잖아. 약속 날짜까지 못 돌아올 것 같으니까 본인이 직접 행차하신 거 못 봤어…? 오늘 황실에 갓 들어온 희귀한 건과일을 입에 집어넣고선 그는 잠시 뒤를 돌아봤다. 공원의 입구가 평소보다 분주하다. 예기치 않은 손님이 온 것을 알아차린 건 루뿐만 아니라 선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일어서서 루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쥐고서 격려하듯 잠깐 눈을 맞췄다. 그러고선 “나중에 다시 배에서 보지.” 라고 못을 박고 갔다. 이때 루는 선장이 아닌 잠시 히야 쪽을 바라봤고, 히야의 눈에선 당장에라도 해적선을 집어삼킬 해일이 이는 것 같았다.

“전하…!”

루는 어서 할 말을 찾아야 했다. 당장이라도 시종을 불러서 어떤 것을 명령할지 모른다. 이럴 땐 어떻게 내가 움직였더라, 지금 티테이블에서 뭐가 부족했지. 어, 그래. 맞아, 시종에게 디저트를 더 채워달라고 해야겠다. 허둥지둥 눈을 굴리는 루는 현재 정원 상황을 신경 쓰지 못하고 히야의 시선을 돌릴만한 이야기를 찾아내고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뒤에서 걸어오는 예기치 못한 손님도 보지 못했다. 히야는 그 손님을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듯 자신의 소유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아직 건과일을 못 먹어봤는데 저도 먹어보고 싶습니다.”

“그대가 내 동생의 새로운 말동무이로군, 소문은 자자하게 들었다네.”

옆의 인기척도 눈치채지 못한 루는 그제야 옆을 돌아봤고 시선을 끄는 게 한 둘이 아니었다. 금빛이 약간 도는 주황색 머리결의 젊은 남성이 자신의 곁에 있었고, 가슴팍에 달린 바다 위에 떠오르는 거대한 태양의 브로치는 눈에 강렬하게 박혔다. 이 브로치의 상징은 이 황실 그 자체를 의미하므로 낄 수 있는 사람은 몇 없다. 그 손님 옆에서 표정으로 그녀에게 성을 내고 있는 시종이 보였다. ‘감히 왕자님이 오셨는데 먼저 인사를 안 해?’ 여기서 제대로 처신 안 하면 선장의 곁에 시체로도 못 돌아간다를 인지한 루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예우를 갖췄다.

“안녕하세요.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대는 다른 이들과 달리 행동이 빠르군. 다행이야. 히야의 곁을 잘 보좌하겠군.”

“…”

부드럽게 웃으며 말한 그가 언급한 행동이 느린 눈치 없는 작자들이 어떻게 되었을지 루에겐 뻔히 보였다. 그렇지만 지금 보좌? 히야의 사람으로 임명되지 않은 이상, 단순히 소유물로서 곁에 있었을 텐데 루는 그가 보좌라는 말을 꺼내는 이유를 몰랐다. 보좌가 아닌 단순히 장난감으로 존재한다는 걸 손등을 가위로 뚫린 약혼자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바로 직후 루는 그가 왜 이런 표현을 쓰는지 단박에 이해해버렸다. 황태자가 히야에게 다가가선 손을 들어올리자, 히야도 시선을 그쪽으로 향했다. 루는 황태자가 지은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사랑스럽고 수줍은 내 동생. 히야, 오늘은 잘 놀고 있었니?”


루는 어쩐지 엄청 지쳐 보였다. 대자로 뻗어서 자신의 침대에 누워서, 누가 오든 말든 일어나지도 않고 손만 뻗어서 자신이 깨어있음을 보여줬다. 그녀에겐 항상 이 티타임이 지루했었기 때문에 자세 바꾸고 다리 꼬고 하는 식으로 움직였지만 이번은 그냥 탈진 상태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루는 아직도 잊지 못했다. 히야의 이야기를 할 때 황태자의 표정은 동생을 보다 행복하다 못해 흘러넘쳐서 온 세상에 기쁨이라는 감정을 흩뿌리고 다니는 듯했다. 본래라면 13시에 끝났어야 할 티타임은 태양이 기웃기웃 바다 아래로 떨어지기 직전까지 진행되었다. 자신이 어떤 곳을 갔었는지,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어떤 사람을 만났는지, 그 순간 히야도 함께 하고 싶었디든지, 그는 수많은 이야기를 털어놨다. 그런 오빠의 이야기를 잘 듣고 있었는지, 히야가 아주 작은 반응이라도 할 때마다 그는 눈꼬리가 휘어지라 기쁘게 웃었다.

방에 들어온 사람이 나가지를 않자 루는 고개만 들어서 누가 테이블에 앉아있는지 확인했다. 히야였다. 들어와서 저 테이블에 앉아서 줄곧 이쪽만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석상처럼 굳어있었다. 아니 저런 사람을 앞에 두고 “그렇지. 이 이야기 너도 좋아할 거로 생각했어.” 라고 말할 수 있는거지, 표정이 저렇게 삭막한데? 루는 절대 그 황태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히야는 시선을 이쪽에 고정하고 테이블 위에 놓여진 건과일을 입에 넣고 있었다. 루는 그 옆에 한가득 쌓인 건과일을 보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건과일 이야기한 건 놓치지도 않고 자신의 막내 동생과 자신이 가지고 있던 여분의 건과일을 보낼테니 양껏 먹으라 하였다. 그래서 온 여분의 과일은… 해적선에서 선원 전부가 질리도록 먹을만한 양이었다. 이거 설마 매 식사마다 사이드 디저트로 나오는 건 아니겠지? 아니 대체 그 황태자는 왜. 루는 앉아서 힐끔 히야 쪽을 보다가 중얼거렸다.

“어디가 사랑스러운 막내… 잠깐만 막내였어!?”

“넌 모르나 보군. 신입군.”

“루라고 몇 번 이야기하냐.”

끼익 철문을 열고 서큐버스 하나가 이쪽으로 걸어들어온다. 루도 질리도록 봤던 이 기사는 들고 들어온 서류 하나를 히야에게 전했다. 간혹 이렇게 외부에서 서류가 오면 기사가 들고 들어왔고, 히야가 서류를 전부 읽을 때까지 기사는 대기해야 했다. 신입이라고 하기엔 아주 오랫동안 머무르고 있던 루는 곁에 있던 쿠션 하나를 그쪽으로 집어 던졌다.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그 자는 한 손으로 날아오는 쿠션을 잡아냈다.

“전하가 왕자 두 분의 얼마나 사랑을 받는지 모르는군. 네가 뵌 황태자님은 전하가 세상을 달라고 하면 당연히 주실 분이다. 전하가 상냥하여 그러지 않고 있지만”

“상냥?”

“이렇게 사고만 치는 포로인데도 바로 안 죽이시고 얼마나 상냥하신지.”

“하기야 너도 잘도 안 죽고 여기 있네.”

평소에 딱히 기사도고 뭐고 옆에 있는 엘프 기사를 놀리기만 바빠 보이는지라 루는 넌지시 던졌다. 어떤 생각으로 히야가 그를 곁에 두는지는 루는 알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항상 웃는 표정인 그의 낯에 서늘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지만 아무도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가 조용히 침대에 걸터앉아있는 루에게 다가왔다. 서큐버스의 긴 꼬리가 그의 발목부터 종아리를 꽉 잡아챈다.

“어차피 정기 다 빨리면 한마디도 못하고 귀엽게 신음만 흘릴 신입군이 이렇게 따박따박 대답하는 거 귀엽네.”

다리가 잡아채어 침대에 눕게된 루의 위를 그가 올라탄다. 시선을 돌리지 못하게 턱을 손으로 잡고서 금방이라도 온몸을 열로 들끓게 해, 있는 정기란 정기는 다 집어삼킬 것이란 의지가 확고한 눈빛이었다. 그러나 강하게 테이블을 내려치는 소리가 났다. 둘의 시선이 테이블을 향한다. 히야가 이쪽을 매섭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미소를 띠며 살며시 루에게서 일어났다.

“물러나도록.”

“알겠습니다. 전하, 밖에서 대기하겠습니다.”

루는 잠시 의문이 생겼다. 요근래 히야 앞에 의자를 끌고 와서 앉았다. 의자는 약간 기우뚱거렸지만 앉아서 동일한 높이에서 그녀를 볼 수 있었다. 방금 나간 기사랑 뭘 하든 간에 신경을 안 쓰던 그녀였다. 단지 이어지는 행위를 보고 있을 뿐이었는데 무엇이 신경쓰여 그를 나가게 했다.

“넌 나랑 뭐가 하고 싶은 건데?”

“…”

히야는 신경 쓰지도 않고 건과일을 즐기고 있었다. 루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셈이었다. 그녀가 이 답을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가 루에겐 중요했다.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 황실로 끌려오고 나서 몇 번이고 탈출했던 직후에 자신을 죽이지 않는 히야를 보면서 했던 의문을 털어놨다.

“내가 좋아?”

그 말에 히야가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저 얼굴에서는 항상 표정을 읽기 어렵다. 저번도 그랬다. 약속시각에 늦으면 도망쳤다고 수배령을 내려서 내 목을 내리쳐도 괜찮았다. 그런데 굳이 번거롭게 직접 찾아와서 익숙지도 않은 해적선에 몸을 실었다. 루는 자신을 장난감 그 이상으로 취급하지 않고 있을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수를 냈건만 히야는 자신을 오랫동안 쳐다만 볼 뿐 대답을 안 하는 거 봐선 불안한 예감이 돌았다. 또 벌이란 걸 내릴지도 모르겠다 싶어 말을 꺼내려 했다. 그렇지만 먼저 말을 꺼낸 건 히야 쪽이었다.

“…이대로 있어.”

항상 입 밖에 꺼내는 말이 짧은 그녀가 하는 말은 더 강력하다. 루는 잠시 고개를 돌려 자신의 얼굴을 히야가 보지 못하게 가렸다. 뭐지? 의문을 갖기엔 너무 정답이 확고하다. 표정 관리가 안 되지 않는다. 실실 떨리는 어깨를 이걸 히야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내게도 답이 필요해, 히야.

“그러니까 왜 그걸 원하냐고.”

“…”

고개를 아직도 돌리지 않고 루는 그렇게 물어봤고, 히야는 아직도 대답을 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자신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듯 살아온 그녀에게 이런 답을 내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게 분명했다. 감정에 솔직한 루는 숨기지 않고 이제 히야 쪽으로 돌아봤다.

“난 너를 좋아하니까.”

“그러면 이용하던가.”

“아…? 좋아하는 거랑 이용하는 거랑 뭔 상관이 있는데?”

루의 대답에 어느 때보다 빠르게 히야가 대답했다. 아까처럼 뜸을 들일 거라 생각한 루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떠올랐다. 애초에 좋아한다는 말에 이용해라는 말의 어순이 정말로 들어맞지 않았다. 어안이 벙벙해진 루는 생각한 대로 내뱉었지만 이미 상대는 대안을 생각해내고 있었다.

“보석은 이미 넘치지 않나.”

“나 좋아한다니까?”

“새로운 배의 선장으로 만들어줄까?”

“내 말 지금 들리는 거 맞지??”

“전부다 황실의 포로로”

“잠시만, 잠시만, 잠시만.”

히야가 평소보다 약간 빠른 말로 여러 대안을 제시하더니 마지막 말에서 바깥의 기사를 부르려 했다. 이건 진짜 안된다. 루는 황급히 일어서서 히야의 앞에 안듯이 섰고 재빠르게 그녀의 손이 테이블의 종에 닿지 않게 막았다. 종이 테이블 아래로 떨어지기 전 루는 이를 붙잡았다.

잠깐 둘은 정지하고 정적만이 감돌았다. 한 번도 루가 먼저 이렇게 히야에게 닿은 적은 없었다. 잘못하면 건방지게 황녀의 행동을 막으려 황녀의 몸에 손을 대었다며 구치소로 끌려가도 안 이상할 판이었다. 루의 품에 히야가 조용히 안겨있었다. 왜? 왜? 왜? 와중에 닿은 몸으로 그녀가 석상이 아닌 숨을 쉬고 있는 게 느껴지자 루는 위화감을 넘어서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본인이 한 말을 다시 되새겼다. 숨을 다시 한번 내쉬면서 그녀는 이야기했다.

“난 여기 있을 테니까 그러지 마.”

자신의 품에서 가만히 있어주는 그녀와 더 밀착하여 끌어안은 루는 눈을 감았다. 히야는 그때까지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전부다 황실의 포로로 만드는 방법이 아니라 그녀가 돌아갈 곳을 사라지게 한다면 자신의 곁에 머무르겠지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여기에 있겠다고 스스로 이야기했다. 말은 쉽게 이야기해선 안 된다. 성장하며 사탕발림과 냉정한 칼질을 수없이 맛보고서 히야는 입을 다물게 되었다. 말은 한순간의 감정에 의해 나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더 설득력이 있는 것은 오로지 직접 해내는 행동뿐이다.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녀는 루가 한 말을 믿지 않는다. 루의 허리를 감싼 히야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누구도 널 여기서 떠나게 할 수 없어, 너조차도. 말을 멈췄을 뿐 히야는 다른 대안들을 생각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에 휩싸인 히야는 모를 것이다. 지금까지 포로 중 누구에게도 자신을 이런 식으로 터치하면 손을 베어내는 것부터 시작했는데 루에겐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지. 이 모든게 히야만 모르는 루를 향한 감정으로부터 비롯된 행동이었다.

END.

그 이후는 어떻게 이어질지 히야는 알턱이 없었고, 루조차 알턱이 없었다. 좋아한다는 의미로 단순히 치부하기엔 아주 복잡하게 얽혀있는 관계란 그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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