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한 자락에서

커미션 작업본

앞마당 by Mii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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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이 K의 얼굴을 스쳐갔다.]

[흔들리는 커튼 아래서 자고 있는 이에게 K의 시선이 집중됐다.]

여름의 한 자락에서

KxH

W.Miiin

"아 좀 이상한 내레이션 깔지 말라고. 그리고 뭔 봄바람이냐? 야 이제 가을이야."

 

K가 언뜻 성을 내며 내레이션을 깐 태윤의 옆구리를 찔렀다. 낄낄대던 태윤이 옆구리를 맞자 으윽, 하며 쓰러지는 시늉을 한다. 엄살은. 콧방귀를 낀 K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 같은 건 없다. 에어컨 냄새난다고 환기하느라 열어둔 창문에선 후덥지근한 여름 바람이 불었다. K의 얼굴을 스치지도 않고 습기가 짝 달라붙었다. 흔들리는 커튼 아래서 자는 이는 H이었다. 엄살을 끝낸 태윤이 허리를 펴자 언제 그랬냐는 듯 시선을 거뒀다. 모든 게 틀린 줄 알았던 두 문장 중 딱 하나 맞는 게 있었다. K의 시선이 집중됐다.

 

"너 진짜 H 좋아하냐? 뭐만 하면 쟤 보고 있더라. 걱정 마라, 엉아는 그런 거 차별 없어용."

"… 됐어."

 

진절머리난다는 것처럼 고개를 저은 K는 제 자리로 향했다. 씁 수상한데. 눈을 얇게 뜬 태윤이 그 뒤를 따랐다. 나란히 앞뒤로 앉은 둘은 잠든 H에게서 한참 떨어진 자리였다. H은 창문 바로 옆의 끝자리였고 K와 태윤은 문에서 가까운 끝자리였다. 태윤이 잠든 H을 힐끗댔다.

 

"설마 너…."

"뭐."

"H 귀고리에 관심 있냐? 여기서 보니까 좀 잘 보이는 것도 같고."

 

야무지게 체육복을 돌돌 말아 베개로 사용하고 있던 탓에 올라간 고개는 귀고리를 돋보이게끔 했다. 십자가 모양 귀고리가 가끔가다 바람에 흔들렸다. 태윤이 으음, 신음하며 다시 눈을 얇게 떴다. 십자가…, 십자가 뭔가 익숙한데…. K가 침을 삼켰다. 익숙하다고?

 

"그래 저거 어디선가 봤는데. 아 어디지…."

 

하는 양만 보면 꼭 당장에라도 달려가 자는 H을 깨워 귀고리와 출처를 물을 것만 같았다. 야 잠만. 의자에 앉은 지 삼십초도 안되어 다시 일어나는 태윤의 모습에 K가 급하게 그 팔목을 잡았다.

 

"왜, 뭐, 뭐하게."

"엥? 아니 나 걍 사물함에서 교과서 꺼내 오려고 한 건데."

"… 아."

 

머쓱하게 팔을 놓아주자 태윤이 수상하다는 표정으로 K를 훑었다. 왜 이래 예민 종자처럼. 중얼거리는 말은 가볍게 무시하며 책상 밑 서랍에서 교과서를 꺼내 위로 올렸다. 항상 느긋하게 행동하는 태윤 덕에 K도 그런 태윤을 살피는 척 몸을 돌렸다. 돌리는 순간에도 H이 시야에 걸린다. 야아 우리 5교시 뭐라고오. 말을 길게 늘이며 사물함에 머리를 박고 있는 태윤에도 K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뭘 봐. 마주친 눈과 벌어진 입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야 K 5교시 뭐냐고."

"언, … 언매."

"아. 거지 같은…."

 

태윤이 중얼거리며 사물함을 뒤적거렸다. K의 시선은 여전했다. K. 조그만 입이 움직여 K의 이름 세글자를 불렀다. K가 눈을 느리게 감는다. 다시 떠도 여전히 마주친 채다. H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찌뿌둥한 몸을 가볍게 스트레칭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뭐야. H쓰 인나쓰?"

"응 태윤아 너 목소리 때문에 잠도 안 온다."

"엉아 목소리 완전 스푼 재질인데 뭔 솔."

 

하하. 어색하게 웃은 K가 교과서를 들고 자리로 돌아온 태윤의 옆구리를 다시 한번 찔렀다. 악! 이번엔 제대로 들어가자 태윤이 억울한 눈을 떴다.

 

"너 왜 자꾸 사람 찌르냐? 어?"

"찔릴 만한 짓을 하질 말던가. … H이 잠 못 잤다잖아."

"야 내가 H 4교시부터 자는 거 다 봤는데 뭔 소리야."

"그래 K. 나 그냥 장난친 건데 뭘 또 진지하게…."

 

순식간에 K가 몰려갔다. 이게 아닌데. 태윤이야 그럴 수 있다고 쳐도 H까지 합세해 저를 몰아갈 줄 몰랐던 K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내 잘못이라고? 말을 절자 H의 입꼬리에 웃음이 걸렸다. 아 왜 저래. 아예 소리 내 웃기까지 했다.

 

"자고 일어나더니 좀 회복됐나보다. 잘 잤나 봐?"

"그래 우리 반의 스푼 씨 덕분에 잘 잤다. K는 졸린가본데? 나랑 매점이나 갈래?"

"갈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행동부터 보인 K에 H이 잠시 놀라 눈을 키웠다. 태윤이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 가자, 가자. 급하게 태윤을 스쳐 간 K가 H을 재촉했다. 끌지도 않았는데 휘적거리는 손길에 H이 자연스레 따라 걸었다.

수상한데. 태윤의 의견이 덩그러니 교실에 남았다. 외롭당. 아무렇게나 교과서를 피더니 그 위로 고개를 박았다. K 이 구라쟁이 새끼.

 

나란히 서서 복도를 걸었다. H이는 아예 안 먹지 않았나. 그 누구보다 빠르게 태윤과 급식실에 출석 체크를 한 K는 나오는 것도 제일 빨랐다. 교실에서 제일 먼저 나와서 제일 먼저 들어갔는데도 H은 제 자리에만 있었다. 달라진 거라곤 나갈 땐 안 자고 있었는데 들어올 땐 자고 있었다는 정도.

 

"점심 뭐 나왔어?"

"아, 그. 갈비찜이랑 볶음김치랑 근대 된장국이랑 진미채랑 흑현미잡곡밥이랑,"

"… 되게 줄줄 외우네."

"… 맛있었거든 오늘."

 

마음같아선 중식을 거른 H의 손을 잡고 다시 급식실에 입성하고 싶었다. 든든한 급식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큰 갈비 조각 받은 거 몰래 H의 식판에 찔러넣기도 하고 진미채도 슬쩍 더 얹어주고….

 

"근데 진짜 왜 쳐다본 거야?"

"점이 두 개길래."

 

아. H의 걸음이 느려졌다. 괜히 더 빨라진 K가 점차 제 옆에서 사라지는 H에 멈춰섰다. 이미 세 걸음이나 앞서있었다. H아? 조용히 이름을 부른다.

 

"그거 생각보다 알아보는 사람 잘 없던데."

 

보통 그만큼 얼굴을 안 봐서. 턱을 조금 당긴 H의 고개가 바닥을 보고 있었다. 언뜻 귀 끝이 붉었다. 더운가. K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세 걸음 뒤의 H에게 느리게 다가섰다. 야 5교시 체육이래. 빨리 쳐 갈아입고 운동장으로 나와. 옆을 스쳐 가며 소리치는 애들에게도 굴하지 않고 H에게 붙어섰다. H아. 다시 한번 이름을 부른다. 바로 앞에서 불리는 이름에 H이 어깨를 움찔였다. 고개가 들린다. 점이 두 개인데 이걸 왜 못 보지.

 

"그냥 나는, 내 눈에는 보여서."

 

H의 눈매가 접혔다. 함께 올라오는 애굣살 덕에 점이 조금 더 돋보였다. 이게 어떻게 안 보여. 열린 복도의 창문에서 바람이 한차례 불었다. 후덥지근하고 습기로 가득 찬 여름의 바람이었다. K가 순간 뒷걸음질을 쳤다. 한 걸음 멀어진다. 바람이 다시 타고 들어왔을 땐 H의 귀고리가 흔들렸다. 십자가 모양 귀고리 하나, … 그리고 점 두 개. 아. K의 속이 뜨겁게 달았다.

어디 유명한 소설이고 드라마고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풋풋하고 파란 것들만 여름이 아니다.

후덥지근하고 끈적하게 달라붙어 오는 것도 꼴에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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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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