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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쥬가 야코한테 차이는 이야기
“좋아해.”
어떤 감정은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달아오른다. 신중과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만든 말이었지만 정작 야코 본인에게 어떻게 들릴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신쥬는 한다. 평소 솔직하단 말을 장점으로도 단점으로도 꽤 듣고 살아왔음에도 모든 감정에 거리낌 없을 수만은 없다는 걸 신쥬는 뒤늦게 깨달았다. 얼굴은 에어컨 없는 연습실에서 몇 시간이고 연습했을 때보다 뜨겁고 꼭 말아쥔 손에는 흘러내릴 것처럼 땀이 괸다. 친구로서가 아니라는 정도는 분명 알아차렸을 것이다. 야코는 그런 아이니까. 자신에 대한 건 기민하게 알아차리곤 했다. 어떻게 알았냐고 되물으면 네가 알기 쉬운 타입이라 그렇단 말이 되돌아오곤 했다.
그런데 야코는 여전히 말이 없다. 꼭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몇 번인지도 모를 만큼 재차 깜빡일 때까지. 표정의 변화도 없다. 자신을 바라보는 야코의 눈에서 이렇다 할 감정이란 게 담겨 있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인생에서 일절 관계없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 같은 싸늘함마저 느껴졌다. 갑자기 신쥬는 온몸에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추위에 사로잡힌다. 분명 전하는 것만으로 잘못이 되진 않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착각한 것 같다. 뒤이어 일어날 상황이 두려워 울리는 가슴 고동 소리가 유달리 불쾌하게 느껴진다. 전신을 울리는 쿵쿵대는 소리에 금방이라도 몸이 터져버릴 것 같다.
그렇게 한참을 침묵하던 나의 소중한 친구이자 동료는 아무런 대답 없이 비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서늘하게 식은 곁눈질에서 약간의 경멸마저 읽고 말았다. 그 눈빛이 마치 형벌처럼 느껴진 신쥬는 그 자리에 죄지은 사람처럼 못 박혔다. 한 걸음 한 걸음 아무렇지 않게 멀어지는 야코의 등을 바라보며 마음을 입에 담은 것을 후회했다. 앞으론 말도 못 붙이게 되는 게 아닐까. 차라리 말하지 말걸, 혼자 앓을걸. 돌덩이 같은 몸을 지탱하는 발이 찌릿찌릿 저리고 손마디 하나 까딱할 수 없다. 시간의 무게마저 체감될 때쯤 야코가 천천히 자신을 향해 돌았다.
“신쥬.”
목소리는 그의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메말랐다.
“언제까지 네 감정만 앞세울 거야?”
그가 처음으로 돌려준 말에 가슴이 고장 난 것처럼 덜컥거렸다.
“고백해버리면, 실례잖아? 나한테도 손님들한테도.”
야코가 다음 말을 잇기 전 짧게 숨을 내쉬었다. 신쥬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난 이 일을 위해 전부 버렸어. 취직도 포기했어. 그런데 결국 넌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야. 아이돌도, 스타레스도!”
마지막엔 야코는 제 감정에 못 이겨 소리 질렀다. 하지만 신쥬는 눈 하나 멋대로 깜빡할 수 없었다.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덜덜 떨리는 몸을 그대로 두었다. 야코는 하하, 하고 웃었는데 어딘지 몹시 허탈해 보였다. 마치 바람 빠진 풍선 같았다. 그러곤 잠시 두 눈두덩이에 손바닥을 짚나 싶었다. 신쥬에게 보이는 건 경련하는 입가뿐이었다.
“신쥬는… 엉망이네….”
정확히 신쥬만을 눈에 담으며 야코는 처음으로 웃었다. 동시에 울었다. 야코의 눈가에서 떨어지는 눈물방울이 줄기가 되어 뺨을 타고 흘렀다. 그 눈물을 본 순간부터 신쥬의 눈에서도 가슴에서도 무언가 뜨거운 게 줄줄 터져 나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건 깨진 수조에서 흘러넘치는 물처럼 막을 수 없었다. 신쥬는 야코가 보인 그 감정이 뭔지 쉽사리 짐작할 수 없었다. 감히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처음 보는 형태였다. 너무나도 슬퍼 보이는 동시에 허탈하고,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비탄한 통쾌와 좌절감, 그리고 믿음이 산산이 조각나서, 마음이 부서져서 어찌할 줄 모르는…. 신쥬는 후들거렸다. 비바람에 곧 쓰러질 것 같은 어린나무처럼.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무엇보다 곧잘 아니야, 라고 대답할 수 없다. 그게 분했다. 그러는 동안 야코는 신쥬를 남겨두고, 걸음을 마저 했다.
“―――!”
신쥬는 야코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그런데 목에선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목소리라고는 정의할 수 없는, 기껏해야 바람 새는 소리, 쇠가 마찰하는 소리 정도의 무언가가 신쥬의 목에서 간신히 새어 나왔다. 신쥬의 마음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폐가 찢어질 듯 가슴에 힘을 주고 외쳐도 목구멍을 마개로 단단히 막은 것처럼 소리를 낼 수 없었다. 신쥬는 답답함에 손톱을 세워 목을 긁어댔다. 손톱 사이가 축축한 것 같은데 무엇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다못해 다리를 움직이고자 했지만, 그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걸음마를 잊은 것처럼, 뼈와 관절이 없는 것처럼 땅에서 한 발짝도 뗄 수 없었다. 하체에 힘을 아무리 주어도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에 빠진 것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야코는 점점 멀어져 점이 되어가고 있었다. 곧 보이지도 않게 될 것 같았다. 신쥬는 흡사 죽을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여기서 야코를 붙잡지 못한다면, 앞으로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될 것 같았다. 신쥬는 악을 써서 소리쳤다. 망가진 호루라기 같은 소리만 간신히 삐져나올 뿐이었다. 야코, 가지 마.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 말이 속에서 수없이 부딪혀 문드러진다. 내가 잘못했어, 가지 마. 이런 마음 같은 거 품지 않을게. 버려버릴게. 그러니까 가지 마. 제발. 예전부터 지금까지, 내가 원했던 건 그냥, 너랑 같이….
“헉!”
신쥬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떴다. 익숙한 벽지, 익숙한 침구,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모든 것이 낯설었다. 소리 없이 눈동자를 굴리며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길 반복해도 현실감이 없다. 면으로 된 잠옷은 기분 나쁘게 축축하고 몸은 납으로 짓누르는 것처럼 무겁다.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은 손가락을 겨우 움직여 본다. 이윽고 팔다리도. 모든 것이 문제없다. 신쥬는 윽, 하고 신음하며 눈가를 더듬는다. 조금 전까지 울었던 사람처럼 뜨겁고 젖어 있다. 야코가 팀 P를 떠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신쥬는 그제야 소리 내어 울음을 터트렸다.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못했던 답답함이 무색할 만큼 억눌린 소리가 자신에게서 튀어나온다. 마주하기 두려운 꿈에서 겨우 도망쳐 온 현실은 어떤가. 신쥬는 가슴팍 옷자락을 뜯어버릴 듯이 쥐었다.
“야코… 야코…!”
꿈에서 부르지 못했던 이름을 홀로 애타게 부르며 신쥬는 고개를 무릎 사이로 파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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