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iking Distance 4

명헌우성

탐정探偵이란 무엇인가. 영어의 Detective를 번역하며 만들어진 이 단어는 어떤 사실을 알기 위해 무언가를 알아낸다는 의미의 탐探과 몰래 무엇을 살피고 찾아내는 행동 또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란 뜻의 정偵을 붙여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탐정이란 건 그 자체로 ‘무언가를 드러나지 않게, 몰래 살펴 알아내는 사람’이란 뜻이 들어 있는 거다. 의뢰인 말고는 그 내용을 알 수 없게 몰래, 은밀히…. 어떤 의미에서는 수사기관의 활동보다도 비밀스럽게 이루어져야 하는 게 탐정의 일일 수도 있다. 

은밀하게 이루어져야 하며, 강제적인 수사를 가능하게 해 주는 영장의 힘을 빌릴 수 없는 사립 탐정 활동은 그래서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는 일도 적지는 않다. 흔히 대상자의 핸드폰에 불법 어플리케이션을 깔게 해서 그 핸드폰을 통째로 공기계에 복사해 실시간 통화내역 및 메시지 송수신내역을 감시하고 위치추적까지 하는 방법을 많이들 쓸 거라 생각하지만 그건 생각보다 엄청 품이 들고 위험한 방법이라 잘 쓰이지 않는다. 핸드폰 소프트웨어 보안을 뚫을 수 있는 전문가는 흔치 않으며 통신 감청 전문가도 흔치 않고, 핸드폰의 위치추적은 정확도가 높지 않다. 메시지 내역을 보고자 한다면 대상자의 측근을 이용해 내용을 얻어내는 것이 낫고, 위치추적을 하자면 위치추적 장치를 따로 설치해 관찰하는 게 낫다. 이것도 저것도 불법이지만 실행의 용이함과 정확성 면에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사실 그런 것보다 훨씬 보편적인 방법은 미행과 감시다. 대상자의 동선을 추적해서 하루 종일 뭐하는지 동태를 지켜보고, 누구를 만나는지 감시하고, 필요하면 사진을 찍는다. 구체적인 대화 내용을 알지 못해도 누구와 만나는지, 만난 사람의 정체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종종 사건의 조각은 끼워맞춰지는 편이다. 사이사이의 공백을 채우는 것은 추리 혹은 상상의 영역이다. 그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찾기 위해 쓰레기통을 뒤지든 주변 탐문을 하든 하는 것이고…. 사람들에게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듣는 것은 굉장히 귀찮고 정확성도 떨어지지만 법적인 문제의 소지가 생길 일이 없다. 쓰레기를 뒤지는 것도 값나가는 물건을 건드렸을 때에야 점유이탈물횡령으로 신고당할 확률이 아주 조금 생기는 것이고, 보통은 영수증과 고지서를 누가 주워가는지 신경쓰는 사람은 없다. 스토커들은 쓰레기를 뒤졌다는 티를 내고 존재감을 과시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업으로 탐정을 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쓰레기를 뒤지는 것도 비밀스럽게, 은밀하게 해야 할 일이다. 겉으로 보이는 행동으로만 따지자면 스토커와 다를 게 뭐가 있냐 싶긴 한데, 사람의 행동은 결과도 그렇지만 의도도 중요한 것이다. 당하는 입장에서야 궤변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겨울이라 좋은 점은 많이 걸어도 땀이 나지 않는다는 거다. 후카츠는 여름을 심하게 타고 겨울을 덜 타는 편이다. 땀을 많이 흘리는 체질이라 그렇다. 안 그래도 일본의 여름은 습해서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죽죽 땀이 난다. 조금 빠르게 걷기라도 하면 상의건 하의건 축축하게 젖기 일쑤였다. 그럴 땐 머리카락조차 거추장스러워 몇 년 전까진 한여름엔 머리를 빡빡 밀고 다니기도 했다. 후카츠는 삭발을 한 스스로가 꼭 운동부 고등학생 같다고 생각했으나 노베는 운동부가 아니라 야쿠자 같다며 사무소의 이미지를 걱정스러워 했다. 

- 후카츠 상은 두상이 예뻐서 머리 밀어도 나쁘지 않아요. 

후카츠에게 그런 말을 해준 건 사와키타뿐이었던 것 같기도. 

△△씨의 주소는 우에노 역에서 멀지 않은 주택가다. △△씨의 부인이 일하는 마트는 집에서 걸어서 8분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후카츠는 이미 △△씨의 의뢰로 △△씨의 부인을 살피러 온 적이 있다. 이름은 리에코, 전문대학을 나와 의류회사의 경리팀에서 일하다 결혼과 함께 퇴사. 하지만 남편의 벌이가 시원치 않아 곧 근처 마트에 재취업. 아이는 없음. 이 정도가 후카츠가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도쿄에서 나고 자랐지만 양친은 각각 도박과 술 문제가 있어 고등학교 때 의절. 남편과는 고등학교 동창이며 졸업 후 교류가 없다가 동창회에서 만나 가까워진 후 결혼에 골인. 살고 있는 집은 월세. 고등학교나 전문대 시절의 친구, 이전의 직장동료들과는 연락을 하지 않고 비슷한 처지의 이웃, 마트의 동료들과만 얕게 교류중. 좀 더 깊게 파고들어야 알 수 있는 이런 정보는 사와키타가 알려주었다. 

△△씨 살인사건 관련 수사 및 사정청취를 통해 알아낸 리에코의 정보를 줄줄 쏟아내는 사와키타에게 후카츠는 약간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었다. 

- 공무상비밀누설 뿅. 

- 후카츠 상이 남들한테 말하고 다니지만 않으면 걸릴 일 없어요. 

- 내가 말하고 다니면 어쩌려고, 뿅. 

- 설마 그새 남들한테 입 나불거리는 성격으로 바뀌었으려고요? 

- 무슨 뜻이냐, 삐뇽. 

- 이리저리 쓸데없는 정보 흩뿌리지 않고 꼭 해야 할 말만 하던 게 내가 기억하는 후카츠 상이라는 이야기예요. 

그건 칭찬인지 욕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사와키타는 빈정댈 줄 모르고 생각한 그대로를 말하는 편인데 오히려 그런 화법이 타인의 오해를 사고는 했다. 지금도 그건 여전해 보였다. 

후카츠는 먼저 리에코가 일하는 마트로 향했다. 역시 남편의 장례를 치른 지 얼마 안 되어서인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후카츠는 짐짓 모르는 체하며 마트의 다른 점원에게 리에코의 인상착의를 설명하며 행방을 물었다. 전에 왔었는데 친절하셨거든요. 그래서 다시 도움을 받고 싶어서요. 라고 말했더니 나이가 지긋한 여성 점원은 경계를 풀었다. 

- 아, 리에코 씨. 갑작스럽게 상을 당했어요. 남편이요. 젊은데, 안타깝게도. 

- 그런 사정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항상 붙이는 베시, 뿅, 삐뇽 등의 어미는 탐문을 다닐 때에는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 특이한 사람으로 비쳐서 좋을 일이 없는 탓이다. 

- 이 근처에 새로 이사 오셨수? 

- 아뇨, 그냥 근처에 종종 들를 일이 있어요. 

- 그럼 올 때마다 물건 사러 꼭 오세요. 

그 점원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후카츠는 이어 물었다. 

- 그 분 성함이 리에코 씨인가요? 

- 맞아요. 

- 혹시 리에코 씨 댁이 어디인지 알고 계실까요? 안 좋은 일을 당하셨다니 위로라도 드리고 싶어서요.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너무 감사했는데…. 

- 아유, 그럼요. 

주소는 이미 알고 있긴 했지만 이건 합법적인 방법으로 얻어냈다는 데에 의의가 있었다. 불러주는 주소를 수첩에 적고 있는 후카츠를 빤히 보던 여성 점원은, 주위의 눈치를 보다가 후카츠에게 가까이 붙어 속삭였다. 

- 그런데 리에코 씨 남편, 단순한 사고사가 아닌 것 같더라고요. 

- 네에? 

- 장례식장에도 그렇고, 리에코 씨 집에도 형사들이 들이닥쳤었대요. 해부? 인가 하느라 장례도 늦어졌다 그러고. 

부검을 말하는 것일 터였다. 시신 부검은 부검의의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진행되기 때문에 부검을 하게 되면 장례가 하루에서 이틀은 미뤄지게 되어 있다. 장례식장에 형사들이 간 건 사정청취를 하기 위해서일 테고, 집에 형사들이 간 건 동의를 얻어 한 것이든 영장을 받아 강제로 한 것이든 가택에 대한 수색이 이루어졌단 얘기다. 분명히 별 성과는 없었을 테다. 

- 정말 큰일을 당하셨네요. 

- 그렇죠? 

후카츠는 계속 자신을 붙잡고 말을 걸고 싶어하는 점원을 부드럽게 떼어내고는 리에코의 집에 방문하기 위한 선물을 샀다. 김과 와사비맛 센베 세트. 여자가 좋아할 만한 취향인가 하는 생각은 좀 뒤늦게 들었다. 하지만 어차피 상대방의 취향은 크게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후카츠는 리에코의 집에 곧바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영세한 아파트의 바로 맞은편에 저가형 프랜차이즈 카페가 있어, 거기에 자리를 잡고 커피를 한 잔 시켰다. 시럽을 잔뜩 넣은 아이스 카페 라떼를 마시며 아파트에 어떤 사람이 드나드는지 관찰하는 건 꽤 편한 감시였다. 좀이 쑤신다는 것만 제외하면…. 

아무래도 평일 낮이다보니 아파트 현관을 드나드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담배를 피우러 나온 할아버지 하나, 마실 나가는 할머니 하나, 장바구니를 든 전업주부 하나, 후카츠가 있는 카페로 커피를 사러 온 편한 차림의 젊은 여성 하나, 카탈로그를 든 영업사원으로 보이는 남성 하나. 카페 라떼를 그새 다 마시고 조금씩 녹아가는 얼음만 빨대로 빨던 후카츠는 갑자기 자세를 바로 해 똑바로 앉았다. 본 적 있는 얼굴이 나타난 탓이다. 홈웨어를 입은 리에코가 양손에 쓰레기 봉투를 들고 있었다. 재활용할 수 있는 것과 재활용할 수 없는 것으로 구역을 나눠 둔 쓰레기장에서, 리에코는 하나는 재활용용기함에, 하나는 재활용할 수 없는 쓰레기들을 모아둔 곳에 투척했다. 그러고선 다시 총총대며 현관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카츠는 잽싸게 쓰레기장으로 향했다. 쓸만한 건 재활용할 수 없는 쓰레기봉투에 있는 편이다. 

후카츠는 리에코가 버린 쓰레기봉투를 낚아채곤 그대로 택시를 잡아 타고 사무소로 향했다. 벌건 대낮에 야외에서 쓰레기를 뒤지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후카츠는 사무실에 도착해 쓰레기봉투를 던져놓고는 바로 다시 나갔다. 노베에게 건드리지 말라고 덧붙인 건 당연하다. 

- 후카츠, 이거 돈 되는 일 맞지? 

그 질문에 대답은 안 했다. 못했다고 하는 게 정확할 수도 있다.

후카츠는 이번엔 택시를 타는 대신 사무실 영업용 차량으로 마련해 둔 다이하츠 하이젯을 운전해 다시 우에노 방면으로 향했다. 하얀색의 경형 박스카는 누가 봐도 영업사원의 영업 차량 같다. 멋있음과 실용성의 무게추에서 실용성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차가 하이젯이다. 미디어에서는 탐정의 캐릭터성을 표현하기 위해 노란색의 비틀이나 빨간색의 머스탱을 타는 걸로 설정하기도 하지만 그건 전적으로 미디어적 과장이다. 시부야나 신주쿠의 중심가가 아닌 한 외제차, 특히 특이한 색의 차는 국산이어도 눈에 띈다. 언더커버의 기본은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범용성이 있는 차량이 좋다. 멋있음과는 한참 거리가 먼데 멋있으려고 하는 일은 아니니 상관없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아까 산 센베 과자를 들고 아파트 계단을 오르는 후카츠는 꽤나 외판원다운 모습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구형 복도식 아파트의 현관문 앞에는 잡상인 출입금지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보안문도 설치 안 된 아파트에서 그걸 의식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각 호수의 초인종은 아주 옛날 것이었다. 인터폰도 아닌 버저 형태다. 집안에 있는 사람은 문에 달린 외시경을 통해 방문자를 확인하고 문을 열어주는 것일 터였다. 후카츠는 초인종을 한 번 눌렀다. 안에선 반응이 없었다. 한 번 더 눌렀다. 아직도 반응이 없었다. 후카츠가 문을 쾅쾅 두드리려고 하는 찰나 문이 열렸다. 안전고리 덕분에 얼굴만 빼꼼히 내밀 수 있을 정도로만 열린 채였다. 

- 누구시죠? 

수수한 얼굴에는 의외로 경계심이 없었다. 

- 아, 안녕하세요. 혹시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는데, 이전에 일하시는 곳에서 신세진 적이 있어서 인사차 들렀습니다. 

리에코는 잠시 후 아아, 하는 소리를 내더니 입을 열었다. 

- 마트에 손님으로 찾아오셨던 분 맞죠? 낯이 익어요. 

- 네, 그때 신세를 져서.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마트 쪽에 문의드렸더니 주소를 알려주셨습니다. 

- 신세랄 것까지요….

리에코는 들어오라는 듯이 문을 열었다. 후카츠는 구두를 신고 안으로 들어섰다. 집은 작고 어수선했다. 원래는 깔끔했을 듯한데 여기저기 싸다 만 짐이 널려 있는 것을 보니 이사를 계획하는 모양인가 싶었다. 

- 곧 이사 예정이신가요? 

- 아, 네…. 좋지 않은 일이 있었어서요. 

좋지 않은 일이라고 하는 말과 달리 표정은 기묘하게 평온해 보였다. 

- 안 그래도 댁에 조사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 네에….

- 상심이 크시겠어요. 

- 아무래도 그렇죠. 그래서 이사가려고 해요. 짐을 싸느라 집이 더러워서 민망할 따름이에요…. 

리에코가 물을 끓여 차를 준비하는 동안 후카츠는 티나지 않게 집을 구석구석 둘러보고자 했지만 아무래도 쉽지 않았다. 군데군데 널려 있는 이삿짐들이 역시 방해가 됐다. 역시 사무실에 갖다놓은 쓰레기를 헤집어보는 게 수인 것 같았다. 이사 준비를 하며 나온 쓰레기니 묵은 생활쓰레기가 많을 수 있다. 

- 그러고 보니 아직 성함도 못 들었네요. 저는 리에코입니다. 

리에코는 찻잔을 내밀며 말했다. 티백에 담긴 홍차는 저렴한 브랜드의 것이었다. 후카츠는 짐짓 민망해 하는 척하며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어 내밀었다. 당연히 진짜 명함은 아니다. 명색이 탐정인데 탐문할 때 내세울 만한 가짜 직함 정도는 몇 개 만들어 두었음이 당연하다. 

- 후카츠 카즈나리라고 합니다. 보험 컨설턴트를 하고 있습니다. 

대형 손해보험사의 사명이 적힌 명함을 받아 든 리에코는 약간 김 빠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 보험 컨설턴트…시군요. 

- 그래서 여기저기 출장을 다닐 일이 많죠. 

- 어쩌죠, 저는 보험에 당분간은 가입할 일이 없을 것 같아요. 

리에코는 바람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 위로는 잘 받았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보험 영업을 하러 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내릴 법한 당연한 축객령이었다. 하지만 순순히 쫓겨날 마음은 없었다. 이럴 때 후카츠가 써먹는 몇 가지 비장의 무기가 있다. 특히나 여성 상대로는 모 아니면 도의 비법이 있었다. 

- 보험 이야기를 드리려고 찾아온 게 아닙니다. 

- 그러면요? 

후카츠는 심호흡을 했다. 

- 저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 후카츠 씨를요? 

- 저는 저희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뻔하고 식상하기 짝이 없는 멘트라 스스로 내뱉고도 영 들어주지 못할 말이라고 생각했다. 후카츠는 민망함 이전에 속이 뻐근해지며 꼭 체할 거 같은 감각을 느꼈다. 그런데 의외로 리에코의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리에코의 표정이 풀어지는 걸 보고 후카츠는 안도하면서도 식도와 위장에 눌어붙은 역겨움을 떨쳐내지는 못했다. 

후카츠는 사실 자신이 여자에게 꽤나 잘 먹히는 타입이라는 걸 언젠가부터 깨닫고 있었다. 그건 아무리 여자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그 나이쯤 되면 모를 수가 없는 거였다. 왜 그런지에 대한 분석은 애초에 포기했다. 여자에게 관심이 없으니 왜 여자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지 이유조차 추측할 수 없었던 탓이다. 여성의 호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남자들은 드물지 않다. 오히려 이용하지 않는 쪽을 바보 취급하는 게 남성 사회다. 소위 말하는 줘도 못 먹는 놈이야말로 병신 중의 병신일지도. 하지만 후카츠는 딱히 여성의 호의를 이용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후카츠 카즈나리의 도덕 기준이 남들보다 높아서 그런 것도 아니고, 여자에 관심이 없다보니 여자와 관련된 모든 게 불쾌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후카츠는 오히려 목적을 위해선 수단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러니까 후카츠는 그냥 이런 류의 수단을 선호하지 않는 것뿐이다. 상대방의 기분이랑 상관 없이, 후카츠의 기분이 좋지 않아서 그렇다. 특히나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불쾌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이유는 지금은 조금 알 것도 같았다. 

사와키타 에이지의 얼굴을 떠올리며 느끼는 이 감정은… 일종의 죄책감이라고 해야 할까? 뭐라 정의할 수는 없었지만 굳이 분류를 하자면 그런 류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와서 왜 그런 걸 느끼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새삼스럽게 심장이 내려앉는 무게감이 중첩되는 이 감각은, 죄책감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았다. 

후카츠는 조금의 대화를 마친 후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운전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며 나온 깊은 한숨은 후카츠의 속마음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 뒤로 더 이어진 대화는 무가치하다고 할 건 아니었는데 감정 소모 대비 효율은 별로 좋지 못했다. 그냥 쫓겨나는 게 나았을 수도 있었겠단 엷은 후회가 들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내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고 흘러간 시간은 다시 되돌릴 수 없다. 그러니까 그때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지 잘 판단하여 선택하는 수밖에 없다. 인생은 꼭 미로 같아서 한번 갈림길의 방향을 선택하고 나면 다시 되돌아 갈 수 없는 법이라 그렇다. 

인간은 사는 동안 하루에도 여러 번 선택을 하게 되고, 후카츠에게도 그건 예외 없는 일이었다. 그때마다 후카츠는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을까? 아침에 무엇을 먹을지, 사무실에 둘 꽃을 무엇을 살 것인지에 대한 작은 선택에서부터 사와키타의 부탁을 받아들인 것, 경찰을 그만둔 것, 경찰에 들어오게 된 것, 사와키타와 헤어지게 된 것 같은 어느 터닝포인트가 될 만한 선택에 이르기까지, 어떨 때에는 참 잘했다 싶다가도 어떨 때에는 끝을 알 수 없도록 후회가 되곤 했다. 후카츠는 대개 후회를 잘 하지 않고 후회하더라도 빠르게 잊고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눌어붙어 지워지지 않는 후회들이 있긴 했다. 

후카츠가 사무실에 왔을 땐 아까 던져놓고 간 쓰레기봉투가 사무실 중앙에 얌전히 자리하고 있는 상태였다. 노베가 옮겨놓았음이 분명했다. 

- 늦었네, 후카츠. 

노베는 화분 분갈이를 하다가 후카츠를 맞았다. 후카츠가 쓰레기봉투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걸 보고 노베가 이어 말했다. 

- 저거 안 건드리고 잘 모셔놨어. 

- 잘했다뿅. 

- 쓰레기 같이 뒤질까? 

- 됐어뿅. 

같이 헤집는 거보다 혼자 하나하나 헤집으며 쓰레기의 축적 경로를 추측하는 게 후카츠의 성격에 보다 맞는 일이다. 도와준다고 하는 게 고맙지 않거나 귀찮아서가 아니라 그냥 성격이 그렇다. 후카츠는 방진 마스크를 착용한 후 손에 면장갑, 그리고 그 위에 라텍스 장갑을 꼈다. 날카로운 게 섞여있을 수 있기 때문에 면장갑을 미리 끼는 건 필수다. 

쓰레기봉투의 내용물은 무엇을 닦은 휴지, 구겨진 영수증, 먹다 버린 생선뼈, 귤껍질, 갈기갈기 찢긴 고지서와 입출금내역서, 삼각김밥의 비닐, 나무젓가락, 새로 오픈한 야키니쿠집의 전단지 같은 거였다. 여기서 눈여겨 볼 가치가 있는 건 영수증과 고지서, 입출금내역서다. 구겨진 건 인쇄된 잉크가 날아가고 지워지지 않도록 살살 잘 폈고 산산조각 찢긴 건 조각을 하나하나 모아서 이어붙였다. 퍼즐을 맞추는 후카츠의 옆에 어느새 노베가 핀셋과 테이프를 들고 와 앉았다. 노베는 후카츠보다도 훨씬 키도, 덩치도 크지만 그게 섬세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노베의 도움으로 보다 수월하게 맞춰진 종잇조각들을, 후카츠는 유심히 살폈다. 영수증에 찍힌 금액, 상호, 가게의 주소, 사업자번호, 사업자명 같은 걸 유심히 보던 후카츠는 문득 노베에게 말을 걸었다. 

- 이거 봐, 뿅. 

- 어디, 

편의점의 영수증이었다. 

- 구매한 날짜뿅. 범행 추정 일시보다 하루 전, 뿅. 

- 그렇네. 

- 구매 목록 봐, 뿅. 

- 커피, 녹차, 감자칩, 민트, USB 케이블…. 

- 뭔가 촉이 오지 않냐, 뿅. 

- 이게? 

노베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 교살된 시체뿅. 범행 도구는 아마 전깃줄이나 케이블뿅. 그리고 딱 하루 전에 구매한 USB 케이블뿅. 

- 그게 뭐? 갑자기 핸드폰 충전 케이블이 맛갔나 보지. 

- 우연이 겹치면 필연, 뿅. 

- 이게 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 정황증거는 되지 않겠냐뿅. 

- 글쎄…. 

노베는 이거 가지고 뭐가 되겠냐는 뜻이 담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리고 사와키타는 노베의 반응과 비슷한 태도를 보였다. 

후카츠가 보여줄 게 있다며 근처의 카페로 불러낸 후 영수증을 보여주자, 사와키타는 코웃음을 쳤다. 

- 그래서 이게 뭐요. 

- 범행도구를 구매했다는 증거, 뿅. 

- 이게요? 

- 촉이 그렇다, 뿅. 

사와키타는 한숨을 내쉬었다. 

- 수사가 촉 가지고 되냐고요. 

- 수사는 촉으로 굴러가는 거라고 배웠다뿅. 

- 나 참. 

사와키타는 팔짱을 끼고 한참이나 불만스런 표정을 숨기지 못하다 우롱차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커피를 못 마셔서 차 종류를 마시는 건 여전했다. 단 것도 안 마시니 마시는 건 우롱차 아님 홍차 종류에서 벗어나질 않았다. 한 잔 더 마실래? 후카츠가 물으니 사와키타는 고개를 저었다. 

- 안 그래도 매일 시달리고 있다고요, 나는. 좀 더 진전이 생기면 불러요. 바빠요. 

- 냉정하네, 뿅. 

- 후카츠 상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새삼 삐딱해진 얼굴로 사와키타가 말을 이었다. 

- 냉정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그런 말하니까 웃기다고요. 

- 난 냉정하게 군 적 없어, 뿅. 

특히 너한테는, 이라는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 후카츠 상이 그렇다면 그렇다고 해 두죠. 

예전 같았으면 말꼬리를 잡고 반박했을 사와키타건만 이젠 싸움을 걸기는커녕 싸움을 피하는 걸 보니 사와키타도 나이가 먹긴 먹었구나 싶었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 걸수도 있고 이제는 후카츠와 그 정도로 대거리하고 싶은 게 아닐 수도…. 그렇게 생각하니 후카츠는 약간 서글퍼졌다. 

- 영수증은 찾느라 고생했어요. 

- 일단 의뢰니까, 뿅. 

- 열심이네요, 의외로. 

칭찬을 듣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 내일 또 그 집에 가보려고 한다, 뿅. 

- 무슨 그럴 듯한 구실이라도 있어요? 

- 친해졌다뿅. 

- 친해졌다고요? 

- 리에코 씨랑. 

사와키타는 알쏭달쏭한 얼굴을 하다가 이내 뜨악한 표정을 했다. 

- 지금 그 여자 꼬셨다고 말하는 거예요? 

- 말이 지나치다뿅. 

- 최악…. 

사와키타는 한숨을 푹 쉬더니 겉옷을 챙기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카츠는 엉겁결에 같이 일어섰다. 묘하게 차가워진 사와키타의 뒤를 후카츠는 허겁지겁 따라갔다. 아직 말이 덜 끝났는데 이런 식으로 구는 건 예전의 사와키타를 떠올리게 했지만, 이제는 그러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일종의 실망감도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예전에야 어렸고, 사와키타는 후카츠의 남자친구였지만 지금은 아닌데, 예전처럼 굴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 보통 그래요? 

- 뭐가뿅. 

한참이나 휘적휘적 긴 다리로 보폭을 크게 해서 앞서 가던 사와키타는 갑자기 멈춰서서는 말했다. 그 탓에 후카츠는 사와키타한테 부딪힐 뻔했다. 예전보다 넓어진 어깨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 여자랑 쉽게 친해지냐고요. 

- 필요하면, 뿅. 

- 필요하면? 

- 필요하면. 

- 진짜 최악…. 

사와키타는 길거리에 서서 택시를 잡았다. 크라운 한 대가 금세 사와키타의 앞에 섰다. 사와키타는 택시에 타며 후카츠에게 빠르게 말했다. 

- 좀 더 진전이 생기면 연락하라는 말은 취소예요. 그때그때 뭐 했는지, 무슨 말했는지 다 보고해요. 

- 명령이라도 하는 거냐, 뿅. 

- 알아서 생각해요. 

예전에는 변덕스럽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사와키타도 확실히 일을 하고 스트레스를 받으며 예민함과 짜증이 는 모양이었다. 후카츠는 사와키타가 탄 택시가 멀어져 가는 것을 보며 머리를 긁었다. 까다롭고 감정적인 의뢰인은 보통 질색이지만 이 정도는… 나쁘지 않다. 나쁘지 않다고 느끼는 건 상대가 사와키타라서 그런 걸수도 있다. 좀 더 확정적인 표현을 써도 될 것 같지만 비확정적인 표현으로 남겨두는 것이 낫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채 폐부에 눌어붙어 있던 감정의 편린들이 새삼스럽게 부유하는 것을 느끼며, 후카츠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건 결심과 결의보다는 각오 비슷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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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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