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전문 샘플] - 戀慕之情
구가의 서 2차 - HL, 사극, 판타지, 인외인간
커미션 안내:
2차 작업물 샘플:
인물: 6인(4인 추가)
작업 기간: 2주(2주당 1화 연재~ing)
글자 수: 54,303(ing)
신청 타입: B. 키워드+짧은 씬
戀慕之情
一
w. 목화
달빛정원.
기괴하고, 감히 사람의 접근을 허하지 않은 험한 산세. 태곳적부터 산을 지키는 영물들만이 때때로 출몰한다는 곳……. 아니, 그럼 뭐 하는가. 이리 산세가 험해서야 있는 영물, 동물 다 떠나가게 생겼구먼.
“허억, 허억……. 아이고, 죽겠다…….”
O이 숨을 몰아쉬었다. 발밑에 잔뜩 깔린 바위, 낙엽, 나뭇가지 등을 이리저리 잘 피해 가며 오른다 해도 빛이라고는 비쩍 마른 겨울 나뭇가지가 빼곡한 머리 위에서 비추는 달빛뿐인 암흑. 오밤중에 오르는 산길이 쉬울 리 없었다. 매서운 추위에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뱉을 때마다 입가에서 뿌연 숨이 터져 나왔다. 제 신 아래로 낙엽이 바스라지는 소리, 옷깃이 스치는 소리 외엔 아무런 기척조차 느낄 수 없는 첩첩산중 한가운데서 O은 손에 든 지팡이 하나만을 의지해 산을 올랐다.
“W! W 어딨는가!”
마침내 험한 산길의 끝이 보이고, 사방이 높디높은 바위와 아름다운 수풀로 가로막힌 공간이 O의 앞에 펼쳐졌다. 1000년 전부터 이 지리산을 수호하는 신수가 살고 있다는 달빛정원. 과연 그 신수의 보금자리 다운 풍경이었다. 오랜만에 왔다 한들, 이곳은 여전히 변함이 없는 듯하여 O이 옅게 미소 지었다.
“날세, O이 왔네! 이보게, W!”
……허나, 아무리 이 산중에 홀로 지내며 오만하기 짝이 없는 신수라 한들 사람이 저를 부르는데 이 정도로 답이 없다고? O이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뭔가 허전하다 싶었는데 이곳에만 오면 늘 보이던, W을 따라다니는 푸른 불빛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 시간에 당연히 이곳에 있어야 할 것이 없다는 건.
“아니, 이 친구 설마 또!”
O이 얼굴을 팍 구겼다.
-
윤가(家)의 여식으로 태어난 S에게 높은 담벼락과 커다란 지붕 아래 집은 언제나 당연한 것이었다. 넓은 집, 따뜻한 아랫목, 배곯는 일 없이 때마다 나오는 끼니 하며 몸에 부드럽게 감기는 어여쁜 비단옷. 나랏일에 힘쓰며 언제나 자비로운 아버지와 누님, 누님, 하며 제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듬직한 동생, 그리고 무엇을 하든 제 안위만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주는 여종 D까지. 단란한 집이었으나 평화롭고 행복한 나날이었다. 불면 날아갈까, 쥐면 깨질까. 주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한평생 곱고 아름답게 자랐다.
“아씨, 웬 포졸들이 우르르…….”.
“역적 K를 포박해라!”
여느 때와 다름없이 D와 장 구경을 다녀왔을 뿐인데. 집으로 향하는 길목을 가득 채우고 있던 구경꾼들과 저 멀리 보이는 집 대문을 박차고 들이닥치는 포졸들의 외침을 듣는 순간부터 S의 귀엔 더이상 아무런 소리도 닿지 않았다. 위험하다며 저를 붙잡는 D의 손을 뿌리치고, 대문으로 향하는 돌계단을 성큼성큼 올랐다. 양반가의 여식이 그렇게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달려서야 쓰겠냐며 아버지의 꾸중이 잇따를 것을 뻔히 알았음에도 두 다리를 멈출 순 없었다. 어여쁜 꽃신 아래로 밟히는 돌계단이 울퉁불퉁하여 몸이 휘청거렸고, 제가 들은 ‘역적 K’라는 말이 대체 무엇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어 사지가 벌벌 떨렸다.
대문으로 향하는 계단, 그게 겨우 몇 칸이라고. S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몸에 걸치고 있던 장옷은 이미 D의 손을 뿌리치고 뛰쳐나오며 어딘가에 떨어뜨린 지 오래였고, 칼날 같은 겨울 공기가 폐부 깊은 곳까지 차 숨을 들이켜고 내쉴 때마다 기도가 날카로운 것에 베인 듯 아렸다.
“아버지, 아버지!”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뛰어든 S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마른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제 아버지와 그 주변을 둘러싼 포졸들이라니. S는 제 인생에 부족함은 없을 줄 알았다. 이런 험한 광경을 보게 되는 일 따윈, 심지어 그 험한 꼴을 당하는 것이 다른 이도 아닌 제 아버지가 되는 경우라곤 꿈에서조차 떠올려 본 적이 없었는데.
“어명을 받거라!”
당파(钂鈀)를 든 포졸 둘이 마당으로 뛰어 들어온 S의 양옆에서 팔을 낚아채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강한 힘으로 저를 붙잡는 손길에 소름이 돋았다. 원래였다면 아녀자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댄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제가 언성을 높이기 전에 아버지가 앞서 호통을 치셨어야 하는 것인데. S가 할 말을 잃고 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K는 대문을 박차고 들어와 포졸들에게 포박당하는 딸을 돌아보지도 못했다. K의 시선 끝에 있는 것은 오롯이 자신을 이렇게 꿇어 앉히고 목을 꼿꼿이 들고 있는 자신의 오랜 친우, G이었다.
“역적 K 네 놈을 참형에 처하라는 어명이시다!”
“아버지!”
S가 비명을 내질렀다. 대체 제 아버지를 두고 말하는 역적이 무엇이고, 참형은 또 무엇인가. 밤낮없이 나랏일에 힘쓰던 분을, 그 어떤 유혹과 악의에도 굴하지 않고 올곧은 마음가짐을 지켜내시던 분을.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무언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었다. K 역시 놀란 마음은 S와 크게 다를 게 없는 모양이었다. 이보게 G이. K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찌 자네가 날 이리 모함할 수 있단 말인가? 자네는 나와 오랜 지기(知己)가 아니던가!”
S가 이를 악물고 팔을 비틀었다. 그러나 한평생 집 안에서 수를 놓고 화투나 하던 양반가의 아가씨가 무장한 포졸들의 힘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S가 저항하면 할수록 S의 팔을 옥죄는 손아귀의 힘은 점점 더 강해지기만 했다.
“하, 말로는 오랜 지기라 하나, 속으로는 동인(東人) 출신인 나를 언제나 무시하고 깔보지 않았던가.”
K의 애걸에도 G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그 목소리 깊은 곳엔 오랜 시간 쌓아온 원망과 시기, 질투, 분노가 덕지덕지 묻어있어 S는 제 등골을 타고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을 느꼈다. 이 상황을 말리지 않으면 아버지는 정말 이대로 참형을 면치 못한다. 나라를 위해 오랜 세월 힘써온 사또 K는 이곳에서 역적으로 몰려 죽고 말 것이라고.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하여 내 자네에게 똑똑히 일러주려고 온 걸세.”
G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올라갔다. 전에 보지 못했던 오만함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음성이었다. 더는 동등한 친우의 관계가 아니라고, 자신이 K를 내려다보는 것이 아주 당연하다는 듯 당당한 태도였다.
“날 그리 대하면 아니 되는 것이라 말이야.”
제 친우의 얼굴로부터 여전히 눈을 떼지 못하며, K가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입가에서 터지는 희뿌연 숨 너머로 제 아버지의 낯이 많은 것을 포기하고 체념한 듯하여, S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맥이 달음박질쳤다. 이토록 시린 겨울에 제 속만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
“이거 놓거라! 아버지!”
아버지! S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것은 더이상 울음인지, 비명인지 분간도 못 할 지경이었다. 분홍색 치맛자락이 발밑에 밟히고, 곱게 정돈되어 있던 저고리가 마구 구겨져도 몸부림을 멈출 수 없었다. 제 아비는 이런 곳에서 이렇게 허무하게, 억울하게 죽을 위인이 아니었다. 그럴 순 없었다.
“……S야.”
제가 포졸들에게 두 팔이 묶여 악을 쓰고 있으니 제 아버지가 그제야 저를 돌아보았다는 사실마저 미치도록 한스러워서. S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의 등은 언제나 드높고, 든든하고, 그 어떤 역경도 거뜬하게 해낼 것만 같았는데. 이 추운 날 왜 그런 곳에 자그마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계시는지. 왜 이보다 더 강하게 억울함을 토로하지 않으시는 건지. 어린 S는 알지 못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언제나 단호하고 분명하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겨우 제 이름을 부르는 정도로 하릴없이 떨리고 있다는 사실마저 믿기지 않았다.
S의 울음 섞인 숨소리만 떠도는 고요한 윤가(家)네 집 앞마당에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었다. 휘몰아치는 건조한 바람에 G이 흘끔 제 뒤의 S를 돌아보았다. 말간 얼굴에 곱게 차려입은 옷. 분노와 슬픔으로 잔뜩 일그러진 얼굴은 꽤 새로웠다.
“너무 상심 말게나.”
G이 저벅저벅, 제 앞의 K를 향해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몸을 숙였다. 그리고는, 속에 차곡차곡 모아만 두었던 욕망을 한 글자 한 글자 속삭이듯 K의 귀에 속삭여주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네 딸은 관비로 보낸 다음, 내 두고두고 품어줄 터이니. 내내 체념한 듯 힘없는 얼굴을 하고 있던 K의 눈빛에 희번뜩 노기가 돌았다. 감추지 못하고 점점 거칠어지는 K의 숨소리에 G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참으로 궁금하구먼. 남자의 품에 안긴 사대부 집 딸내미는 어떤 묘미가 날꼬.”
목을 울리며 낮게 웃는 웃음소리가 악귀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을, 금이야 옥이야 곱게만 키운 어여쁜 딸아이를 이런 식으로 희롱하다니. 제게 말도 안 되는 역모죄를 뒤집어씌워 참형에 처하는 것에 이런 꿍꿍이마저 있었구나, 하는 뒤늦은 깨달음이 뒤통수를 거하게 치는 듯했다.
“―G 네 이놈!”
“아버지!”
결국 화를 참지 못한 K가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때, S 역시 제 두 팔을 붙잡고 있던 포졸들을 뿌리치고 마당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쓴 아버지의 앞을 가로막고 G을 향해 어찌 이럴 수 있는 것이냐 호통을 치려 했다. 그러나 S가 제 아버지에게 닿기 전, G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빼 들어 K를 베는 것이 더 빨랐다.
서늘한 겨울바람을 타고, S의 뺨에 불에 덴 듯 뜨거운 무언가가 튀었다. 텅 빈 집안을 훑으며 가주(家主)가 죽은 것을 애도하기라도 하듯, 분노하기라도 하듯, 바람이 매섭게 울었다.
털썩.
오랜 친우의 칼을 맞고 그 자리에 힘없이 쓰러진 제 아버지를 코앞에서 목도한 S의 뺨을 타고 허망한 눈물방울이 툭, 떨어져 흘렀다. 제 얼굴에 튄 것이 아버지의 몸속에 흐르고 있던 뜨거운 선혈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S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건조한 집 안에 맴돌던 겨울바람은 S의 통탄스러움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함께 곡소리를 내며 흐린 하늘을 한참동안이나 맴돌았다.
-
“왜 그러는가?”
O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바위에 걸터앉아 늦은 저녁을 먹다 말고 대뜸 어딘가로 고개를 홱, 돌리는 제 오랜 친우의 모습에 의문을 가진 모양이었다. 아삭, 입 안으로 베어 문 사과의 맛이 밍밍했다. 에잉, 쯧. 날이 추워 그런지 단맛이 하나도 없구나. O이 인상을 팍 구겼다.
“O, 금방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았나?”
“뭔 소리?”
“아니, 누가 우는 듯한…….”
“……진짜 뭔 소리람.”
이번에는 W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귀를 쫑긋 세우고 재차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온 신경을 쏟아보았으나 들려오는 것은 없었다. 이상하다, 분명 좀 전에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아, 거참. 먹는 데만 집중하지 말고. 자네도 귀 좀 기울여 보게. 누가 울고 있는 것 같다니까?”
단맛이 없다느니, 식감이 별로라느니, 투덜투덜 불평불만을 내비치면서도 사과를 씹어먹는 것을 멈추지 않는 O을 W이 타박했다. 어째 법사라는 놈이 다른 이의 울음에 살생을 일삼는 나보다 더 무감각할 수가 있어. 굳이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못마땅하다는 듯한 시선이 노골적이라, O이 주둥이를 닷 발 내밀고 W의 말을 받아쳤다.
“지금 자네도 제대로 듣지 못해 긴가민가하는 것을 나보고 들으라는 겐가? 장난하나? 신수의 귀로도 듣지 못하는 것을 고작 인간인 내가 무슨 수로 들으란 말이야?”
“아니, 그래도 한 번 애 좀 써 보라는 거지.”
그렇게까지 화를 낼 거 있나. W이 궁시렁거리며 혼잣말을 내뱉다, O의 앞에 놓여있던 사과를 하나 냉큼 집어 들어 크게 베어 물었다. 반쯤 등을 돌린 채 나 화났소, 를 온몸으로 표현하는 모습이 웃기지도 않아서. 이게 무슨 신수야, 그냥 사소한 것에 쉽게 토라지는 시골 똥개나 다름이 없는데. O이 한숨을 푹 내쉬며 느지막이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어김없이 인간이 사는 마을 근처를 기웃거리던 것을 냅다 잡아 왔는데, 그새 또 인간들에게 신경이 쏠리는 모양이었다.
“……누가 그리 울든 다 그들의 팔자인 게지. 일일이 신경 쓰다간 자네만 힘들 걸세.”
“하지만 내가 다스리는 산까지 서럽게 우는 소리가 이리 잘 들리는데,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해야 그럴 수가 있겠는가.”
제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박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O은 뒷골이 아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이놈 이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 이래서야 제가 꽤 오래 자리를 비운 동안 대체 무슨 짓까지 서슴치 않고 다녔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자네는 경각심이란 것이 없어……. 아니, 학습 능력이 없다고 해야 할지.”
“뭐?”
자그맣게 덧붙인 흉을 또 냉큼 주워들은 건지, W이 O의 눈앞에 제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눈을 부라렸다. 인간과 다름없이 새카맣던 눈동자가 순식간에 금빛으로 변했다. 날카롭게 얇아진 동공이 눈앞의 O을 먹잇감 보듯이 뚫어져라 응시했다. 흉흉한 눈빛이 금방이라도 저를 잡아먹을 듯싶어 사과를 들고 있던 손이 바르르, 떨렸으나 O은 마른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꿋꿋이 말을 이었다.
“아니, 그렇잖은가! 자네, 벌써 잊은 것은 아니겠지?”
“무얼 말이야?”
“……자네는 가끔 자네가 인간이라는 커다란 착각을 하고 사는 듯해…….”
O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진심으로 안쓰럽다는 듯, 한심하다는 듯, 온갖 감정이 섞인 O의 시선을 알아챈 건지 살벌한 기세로 O을 몰아세우던 W도 이내 꼬리를 내리고 몸을 물렸다. 샛노랗게 빛나던 W의 눈동자가 다시 새카만, 인간의 것과 비슷한 색으로 돌아왔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지난봄을 생각해보게. 마을 사람들이 꽃놀이를 하는 것이 재미있어 보인다고 거기 함께 가서 어울리다가, 자네의 털이 북슬북슬한 손과 커다란 발톱이 있는 발을 들킬 뻔했지. 신이 나면 그런 것 하나 제대로 숨기지 못하는 탓이었어.”
“결국 안 들켰으니 된 거 아닌가.”
“작년 여름은 어떻고? 마을에 사당패가 왔다며 그들의 공연을 구경하러 마을에 내려갔다가, 줄타기를 하던 거사(居士)와 시비가 붙어 줄타기로 대결을 했던 것은 잊었나? 인간치고 기이할 정도로 재주가 좋다며 사람들이 수군대는 것을 피하느라 꼬박 반년을 숨어 살지 않았는가!”
“그건……, 그렇긴 한데.”
“또! 그 전해 가을, 산길을 잘못 든 청년의 길 안내를 도와주다 그 청년의 입에서 시작된 소문 탓에 산까지 쳐들어온 마을 수색대를 피해 전전긍긍하던 것은 죄 내 몫이었지. 산속에 기묘한 빛을 이끌고 다니며 요사스러운 행색을 한 기인이 있다니. 심지어 그게 구미호일 것이라니! 말도 안 되는 뜬소문만 믿은 사람들이 온 산을 쥐 잡듯 뒤지고 다니던 풍경을 보고도 아무 깨달음이 없었나?”
“……거 참 다사다난했군…….”
“그래, 그거! 그 태도! 꼭 남 일 말하듯 하지 말란 말일세!”
데굴데굴 눈을 굴리며 시선을 피하는 W에, O은 결국 소리를 빽 내지르고 말았다. O이 입 안에서 우물거리던 사과 조각이 후두둑, W의 얼굴로 튀었다. 아, 거참. 법사라는 자가 교양도 없이. W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O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꿋꿋이 말을 이었다. 인간인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W.
“인간들이 얼마나 잔혹한 동물인지, 피도 눈물도 없이 욕심만을 좇는 동물인지. 그 정도는……,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두 사람 사이로 얇은 겨울바람이 불었다. 차갑고, 건조하고, 매정한 바람. 깊은 산중에 있는 두 사람을 무슨 수로 찾은 것인지 빼곡하게 난 나무들을 제치고 낙엽에 죄다 덮인 산길을 굽이굽이 찾아들어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울음을 서럽게 흉내 내는 모습이 묘했다.
“……알아, 나도 안다고.”
W이 마지못해 답했다. 자신은 이 넓은 지리산을 지키는 신수였다. 1000년이라는, 고작 100년도 살지 못하고 일찌감치 죽어버리는 인간들은 짐작도 하지 못할 오랜 시간 동안 이 산을 지켜왔다. 마을과 인접한 산에 머물며 W은 많은 인간을 보았다. 인간들을 살리기도 하고, 가끔은 죽이기도 했다. 살린 것은 제가 이 산을 다스리는 신수로서 제 산에 들어온 이가 허투루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고, 죽인 것은 제가 이 산을 다스리는 신수로서 다른 인간들을 피해 제 산까지 도망쳐 쫓겨 들어온 이의 죄질이 악함을 알아 그들을 구원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을 뿐이었다.
인간은 무연고의 타인을 그저 인간 된 도리라며 돕기도 했고, 피가 이어진 혈육을 기분이 나쁘다며 잔인하게 살해하기도 했다. 그런 생물들이었다. 앞과 뒤가 다르고, 거짓을 말하는 데 스스럼이 없고, 개중에는 스스로도 제가 무슨 연유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중에도 선함을 택하는 어여쁜 이들이 있지 않은가.”
난 그들을 못 본 체할 수 없네. W이 나지막이 말했다. 손에 쥔 사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이내 와그작와그작 짐승이 고기를 씹어먹듯 게걸스레 사과를 베어먹는 W의 옆모습을 O은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선함을 택하는 인간들이 아무리 많아 보았자, 한 명의 악독한 인간의 눈에 들기라도 한다면 그 끝이 절대 아름답지는 못할 터인데.
‘산에만 틀어박혀 살던 탓에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건지, 신수의 고생길은 인간과 기준이 많이 다른 건지…….’
O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손에 쥐고 있던 사과를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O의 손에 들린 사과는 여기저기 베어 문 자국으로 처음의 둥글고 예쁜 모양새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썩 달지도 않은 맛이 입 안에 남은 듯하여, O은 괜한 찝찝함에 입맛만 쩝, 다셨다.
-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할 새도 없었다. 정확히는, G이 이끌고 온 포졸들이 아버지의 시신에 가까이 갈 틈도 주지 않았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겠다. S는 몇 번이고 물어뜯어 피딱지로 엉망이 된 입술을, 윗니를 내어 재차 깨물었다.
“아버지! 이럴 순 없습니다, 아버지!”
“G, 네 이놈!”
“아이고! 아이고!”
K가 G의 칼에 맞아 그 자리에서 그대로 숨을 거둔 직후, 뒤늦게 대문을 박차고 들어온 Y과 D는 마당에 피투성이가 된 K의 시신을 발견하고 S와 함께 그 자리에서 무너져내렸다. 곁에 있던 포졸의 손에서 당파를 빼앗아 든 Y이 G을 향해 덤벼들어도 보았지만, 훈련받은 포졸 여럿의 힘에 도련님 하나가 맥을 출 리 없었다. 피투성이가 된 S의 치맛자락만 붙들고 바닥에 주저앉아 숨이 넘어갈 듯 우는 D와 포졸 여럿의 손에 붙잡혀 흙바닥에 포박당하는 제 동생을 보면서도 S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뒤늦게 벼락같은 상황을 알아챈 두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는 말 따위가 남아있을 리도 만무했다.
“……그래, 말 그대로다. 이게 웬 날벼락이더냐…….”
S가 중얼거렸다. 피를 뚝뚝 흘리는 아버지의 시신이 포졸들의 손에 가축의 사체처럼 질질 끌려 나가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다였다. Y, D, 그리고 마지막이 저였다. 포졸들의 험악한 손에 이끌려 대문 밖으로 내쳐졌고, 대문 앞 돌계단 아래에는 이미 모든 것을 예상하고 기다렸다는 듯 죄인들을 옮길 때나 사용하던 함거(轞車)가 주둥이를 쩍 벌리고 서 있었다.
함거를 끌기 위해 함께 서 있던 소의 짐승 냄새와, 함거 내부 곳곳에 묻은 알 수 없는 것들로부터 풍기는 역한 냄새가 속을 뒤집었다. 수레 위 좁다란 널빤지는 어린애 셋이 옹기종기 앉아도 비좁았고, 바퀴가 덜컹거리며 흙길을 구를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몸은 주체할 길이 없었다. 비단 치마 아래로 느껴지는 딱딱한 널빤지의 감각에 엉덩이가 아팠고, 좁은 자리에 잔뜩 웅크린 몸은 곳곳이 쑤시고 아렸다.
그 와중에도 S가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고개를 들면 보이는, 자신을 사방으로 둘러싼 삐뚤빼뚤한 나무 창살이었다. 너는 죄인의 딸이다. 너는 죄인이다. 더이상 고개를 빳빳이 들고 살지 못할 것이다. 빼곡한 나무 창살이 제게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피인지 무엇인지 모를 것들로 얼룩덜룩 지저분한 함거 안에서 S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치맛자락 아래 두 무릎을 자신의 두 팔로 꽉 끌어안는 것뿐이었다. 도주를 모의하기엔 뻥 뚫린 창살 주변으로 포졸들이 가득 둘러싼 채였고, 제 곁의 동생들에게 걱정하지 말라며 근거 없는 위로를 건네기엔 이 상황을 벗어날 타개책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여전히 제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것은, 내내 체념한 듯 찬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던 제 아버지가 대체 G에게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들었기에 그리 분노하였는지.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었다면 아버지가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지는 않았을지.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한 채, 이리 한순간에 망자(亡者)가 되어버린 자신의 아버지가 가여워 숨이 턱턱 막혔다.
‘그래, 마지막……, 마지막이었는데.’
“S야, 예쁜 우리 딸.”
예의범절과 양반의 자존심을 무엇보다 중요히 여겨 엄한 언행을 서슴지 않는 분이셨지만, 윤가(家)의 독녀를 대할 때만큼은 언제나 너그럽고 자애로운 아버지셨다. S가 기억하는 K는 그랬다. 일찍이 어미를 잃은 딸아이가 혹시 외로울까, 당신께는 미처 말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을까 또래 여종을 친한 친구이자, 누이로 붙여주며 그 아이까지 함께 아껴주었다. 따스하고 다정한 분이셨다. 역모라는 중죄를 짓고 가슴을 펴고 다닐 만큼 뻔뻔하지도 않았고, 매정하거나 은혜를 모르는 인물도 아니셨다. 그런 분께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이리 죄인의 자제라고 손가락질당하며 함거가 움직이는 대로 이리저리 몸을 맡긴 신세라니.
“……누님…….”
“아씨, 울지 마시랑께요…….”
잘 정돈되지 않은 흙길을 구르며 함거가 휘청일 때마다, S의 눈에서도 이제 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금 뚝뚝 떨어졌다. 더이상 나올 것이 없겠다 싶을 때까지 한참을 울었음에도 여전히 눈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니, 눈물샘이 메마르려면 아직 먼 모양이었다. S는 거친 손으로 제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D의 손길을 느끼며, 이러다 눈물이 더는 나오지 않을 정도로 제가 무감정해진다면 차라리 덜 괴로울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나저나 여긴 어디래유? 한참을 온 것 같은디, 우리 마을서도 진즉에 벗어나 부럿고, 해가 지니께 시방 어디가 어딘지도 분간이 안 가는구만유…….”
D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몸을 바짝 당겨 S의 곁에 붙어 앉으니 D와 닿은 부분으로부터 전해지는 온기가 생생했다. 속을 갉아먹고 있던 온갖 불안과 분노가 조금 덜어지는 기분이라, S는 저 역시 자리를 고쳐 앉아 D의 곁에 슬그머니 몸을 붙이고 눈가를 훔쳤다.
“모르겠다, 마을 외곽으로 온 것 같긴 한데…….”
머리 위 구름은 가신 것 같은데 휘영청 떠 있어야 할 달은 도통 보이질 않았으니. 빛이라고는 포졸들과 소가 함거를 제대로 끌고 가기 위해 든 횃불 두 개가 전부였다. 드문드문 처마 아래에 작은 초롱을 붙여놓은 집들이 있긴 했지만, 그마저도 주변을 훤히 파악하기엔 작디작은 불씨 하나에 불과했다.
그제야 조금씩 이성이 돌아온 S가 D를 따라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멀지 않은 곳에 우뚝 선 산이 보이는 것을 보아하니 마을 한가운데는 아닐 것이고, 멀리 유배지에라도 보낼 심산인지. 일이 벌어진 직후, 함거를 타고 관아에 들러 옥에 갇혀 있던 것도 며칠이었다. 오늘 아침 다시 함거를 타고 관아를 빠져나온 후로 S가 탄 함거가 멈추었던 적이라곤 출발한 지 네 시진 가량이 지난 후, 포졸들이 간단히 요깃거리를 하기 위해 인적 드문 길가에 소와 함거를 멈춰 세웠을 때뿐이었다.
“……마음 단단히 먹거라.”
알겠지? D와 Y의 손을 끌어다 부여잡은 S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속삭였다. 흙과 피, 눈물로 얼룩진 세 쌍의 손이 서로를 간절히 붙들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간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저는 절대 억울하게 죽지 않으리. 눈 뜨고 코 베일 일 따윈 있어선 안 됐다. 제 아래로 딸린 동생만 둘이었다.
“걱정 마세요, 누님. 제가 꼭 지켜드리리다. D, 너도 마찬가지야.”
Y이 담과 S가 있는 곳으로 엉덩이를 붙여 바싹 당겨 앉았다. Y은 사내라는 이유로 당파를 든 포졸들에게 이리저리 치이고 몇 대 얻어맞기까지 했다. 아직까지는 비교적 몸이 성한 S나 담과 달리, Y은 여기저기 멍이 들고 머리도 산발이 된 것이 빈말로도 성한 몰골이라고는 할 수 없는 상태였다. 포졸이 들고 있던 횃불의 빛에 비추어 Y을 찬찬히 뜯어보던 S가 목구멍 뒤에서 재차 넘어오려는 울음을 애써 삼켰다.
그렇게 또 얼마나 달렸을까, 그로부터 일각(一刻) 즈음이 더 흘렀을 무렵, 함거가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갑작스레 멈춰선 함거와 주변 포졸들의 움직임에 S와 두 아이의 눈빛에도 불안감이 어렸다.
“다 왔다, 내려라.”
함거의 문을 열어주는 포졸은 딱딱하고 무뚝뚝한 음성으로 세 사람에게 명령했다. 경계하던 것도 잠시, 이대로 함거에 계속 버티고 들어앉아 있겠다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세 아이는 천천히 함거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Y이 가장 먼저 내려 담을 부축해주고, 비틀거리며 바닥을 딛고 선 담과 Y의 손을 잡고 S가 마지막으로 함거에서 내렸다.
가만히 있어도 몸이 쉬이 얼어붙는 이 날씨에, 오랫동안 좁은 함거 안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느라 몸 여기저기가 쑤셨다. 앉아만 있느라 다리에 쥐가 났다느니, 뭐니 하며 두 다리로 바닥을 딛고 서는 데 다시 익숙해지려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Y과 담을 두고, S는 여전히 주변을 살피기 바빴다.
제가 함거에서 내려선 곳은 커다란 기와집 앞이었다. 높은 담벼락 너머로부터 새어 나오는 온기와 불빛은 분명히 사람이 사는 곳이 맞는데 이상하리만큼 떠들썩하고, 소란스러운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이 무슨 잔치라도 열린 것인가, 싶어 S는 눈살을 찌푸렸다.
“야들이요?”
그곳에 서 있던 것은 세 아이와 포졸 이외에도 한 사람이 더 있었는데, 기와집 대문 앞에 서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한 아낙이었다. 썩 고급진 차림이었다고는 하지 못하겠으나 추운 계절을 대비해 솜이 들어간 두툼한 옷을 입고, 포졸들을 향해 굽신거리지 않는 모습이 궂은일을 하는 사람은 아닌 모양이었다. 무심한 얼굴을 했으면서도 머리카락 한 올 삐져나오지 않게 깔끔히 머리를 틀어 올려 쪽을 진 외양이 꽤나 억척스러운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감상을 주었다.
“그렇소. 멸문한 윤가(家)의 장남 Y, 장녀 S, 그리고 그 집에 있던 여종이오.”
“멸문했다니……!”
“……Y.”
품에 있던 정체 모를 증서를 꺼내어 읽던 포졸의 말에 Y이 발끈 반박하려고 나서던 것을 S가 가만히 말렸다.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려 죽었으니, 그 집의 유일한 자제이던 자신과 Y은 아마 관노로 팔려 온 것일 터였다. 윤가(家)의 대를 이을 수 있었던 것은 Y뿐이었는데, Y은 물론이고 여성인 저 역시 노비 신분이 되었다면 윤가(家)는 자신들의 세대에서 대가 끊기고 멸문하는 것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S는 며칠 전 마당에 꿇어앉아 있던 자신의 아버지가 왜 그렇게 체념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더는 화를 낼 힘도,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에 반박할 말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낙에게 들고 있던 증서를 넘긴 포졸이 열려 있던 함거의 문을 닫고, 수레를 끌던 소의 머리를 돌렸다. 자신들의 일은 여기까지라는 듯, 조금의 미련도 없이 등을 돌리고 떠나는 그들이 원망스러우면서도 지금 서 있는 곳이 진정 자신이 팔려 온 곳이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S는 두 주먹을 힘주어 쥐고 아낙을 향해 물었다.
“대체, 여기가 무엇하는 데요?”
몇 시진 만에 큰 목소리를 내려니 목이 아팠다. D나 Y과 이야기를 나누려 해도 감시하는 눈이 내내 진득하게 달라붙는 탓에 큰 소릴 내지 못했다. 옥에 갇혀 있을 때도 제대로 된 끼니를 챙기지 못했는데, 함거에 타고 관아를 나온 아침부터 내내 함거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으니 물 같은 것을 마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찬 공기가 기도를 거칠게 긁고 지나가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럼에도 S는 잔뜩 겁을 집어먹은 듯 제 팔을 꽉 붙잡고 몸을 숨긴 D에, 아낙의 앞에서 물러설 수 없었다.
“뭣 허는 데긴, 너거들은 춘화관도 모르냐.”
“뭐시요? 춘화관이라고라?”
D가 기함했다. 워메, 그라믄 기생집 아녀라! 춘화관. 그 이름은 집을 드나들던 어른들의 입에서 몇 번 오가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온갖 높으신 분들이 자주 찾는 주점. 여인들이 술을 팔고, 웃음을 팔고, 몸을 파는 기방.
“……누님.”
S를 돌아보는 Y의 낯빛이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끽해야 관노 신분일 줄 알았다. 해보았자 남의 수발을 들고, 장작을 패고, 밥을 짓고, 잡일을 하는 일꾼.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내인 자신은 기생집에 팔려 와 보았자 그런 일이나 하겠지. 그러나 여인인, 심지어 며칠 전까지만 해도 사대부 집 장녀였던 제 누이는 저와 사정이 다를 것이 눈에 훤히 보이는 것이었다.
“들어가지 않겠다!”
Y의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을 S 역시 예상한 모양이었다. 조금 전까지는 겁에 질려 애써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선 채 목소리를 높였던 것이라면, 이제는 불 보듯 뻔히 펼쳐질 제 미래에 분노하여 아낙을 향해 큰소리를 쳤다.
“S야, 너는 관직을 지내며 나랏일을 하는 이 K의 하나뿐인 딸이다. 그 누구보다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정절을 지키며, 헤픈 여인이 되지 않도록 하거라.”
아버지의 애정 섞인 당부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으며 자랐다. 아버지는 양반가의 혈통이란 것에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계신 분이었고, 그 이념은 그의 딸과 아들인 자신과 Y이 그대로 내려받았다. 고귀한 양반가 핏줄인 자신이 이런 곳에서 천한 여인들처럼 수많은 사내의 비위를 맞추어가며 술을 팔고, 웃음을 팔고, 몸을 팔 수는 없었다. S가 이를 갈았다. 대체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가. 나는 곧 죽어도 이런 꼴을 당하진 않겠다.
“안 들어오면. 관기로 팔려 온 주제에 어쩌자는 겨. 죽자는 겨?”
“차라리 죽여라. 죽으면 죽었지, 내 그 문은 절대 넘지 않을 것이다.”
“아그야, 시방 나가 현령님 행차 땜시 허벌나게 바쁘다 안 그냐. 긍께 좋은 말로 할 적에 곱게 들어가자고잉.”
아낙이 한숨을 푹 내쉬며 짜증을 내비쳤다. 기와집 안쪽이 이상하게 소란스럽다 했더니, 안쪽에 꽤 귀한 분이 와 계시는 모양이었다. 그래, 지금 내가 저 문을 넘는다면 그런 분들께도 웃음을 팔아야 한다는 게지? S가 주먹을 고쳐 쥐었다. 힘주어 치켜뜬 눈으로 아낙을 똑바로 응시했다. 누가 저를 관기로 팔았든 말았든, 이미 억울하게 역적으로 몰려 죽은 아버지의 마지막을 두 눈으로 목격한 마당에 그런 것 따위 제 알 바 아니었다. 양반의 지위를 바닥에 내팽개칠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백 배 나았다.
“아, 작작들 좀 하고 드가장께!”
S의 고집스러운 눈빛을 읽은 것인지, 더는 어린아이 달래듯 말로 설득할 생각마저 사라진 모양이었다. 아낙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성큼성큼 다가와 우악스럽게 S의 팔을 붙잡았다.
“놓거라! 놓지 못하겠느냐! 들어가지 않겠다는데도!”
“놓으란 소리 안 들리느냐? 소저 물렀거라! 누님 몸에 손대지 말거라!”
S를 억지로라도 끌고 들어가려는 아낙과, 그 아낙의 손을 S로부터 떼어 놓으려는 Y, D가 S의 곁에 엉겨 붙었다. 세 사람과 한 사람이었으나 역모를 꾀하던 죄인의 자녀로 몰려 온갖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한 아이들과 그저 맡겨진 일을 수행할 뿐인 아낙 하나의 힘은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옥신각신, 고성이 오가는 줄도 모르고 네 사람이 그렇게 한참을 씨름하고 있으니 기어이 굳게 닫혀있던 춘화관의 대문이 열렸다.
“시끄럽구나.”
“아이고, 행수 어르신!”
활짝 열린 춘화관 대문 안쪽에서 새하얀 옷을 입은 여성과 그 뒤로 덩치가 커다란 장정 대여섯 명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S를 억지로 끌고 들어가려던 아낙과 달리 좋은 옷을 입고, 얼굴에 화려하게 분칠까지 한 여성, 춘화관의 행수는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의 이들을 훑어보았다. 막무가내로 S를 잡아끌려던 아낙마저 허리를 바짝 접고 굽신거리는 모습을 보이니 담과 Y은 저 행수라는 이가 예사로운 사람이 아님을 깨닫고 재차 겁을 집어먹은 듯했다. 그 가운데서 고개를 꼿꼿이 들고 눈을 내리깔지 않은 것은 오직 S뿐이었다.
“뉘 집 아이들이냐?”
“얼마 전 역모죄로 참형을 당한 윤 참판 댁 아그들하고 그 몸종이랍뎌.”
“역모죄라. 허면 대역죄인의 자식들이 아니냐.”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조금 전 포졸이 윤가(家)가 멸문했음을 말할 때만 해도 이 이상의 분노는 속으로 삼켜야하는 것이구나, 싶었는데. 아버지를 직접적으로 대역죄인이라 칭하는 말에는 그것조차 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우리 아버지께선 모함을 당해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이오. 절대로 역모죄를 저지를 분이 아니란 말이오!”
“그거야 내 알 바 아니고.”
행수라는 이는 딱 잘라 선을 그었다. 돈을 주고 관노를 샀다. 제 앞에 있는 세 사람은 이제부터 춘화관의 사람이고, 그 사실은 제가 그들을 도로 관아에 돈을 받고 돌려주지 않는 이상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이 어린 계집을 알지 못하는 건지, 혹은 알면서도 헛된 고집을 부리는 것인지. 행수는 쓸데없는 말싸움으로 힘을 뺄 생각이 없었다.
“어쨌거나 너는 관기로 팔려 온 몸. 관기가 된 이상, 지금부터는 이곳 기방의 법도를 따라야 하거늘.”
“싫소.”
“싫고 말고 할 선택권이 이제 너에게는 없거늘!”
“절대로, 난 그 문턱을 넘지 않을 것이오. 절대로 난, 기생 따위 되지 않을 것이오!”
S가 바락 소리쳤다. 기생 따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 당연하지, 자신은 곱게 자란 사대부 집 여식이니까. 천한 여인들의 흉내를 낼 생각은커녕, 기방 근처에도 걸음 하지 않았는데. 저를 순수하지 않은 눈으로 보는 이들이 여태 많았어도 그들을 모두 상대하지 않고 불쾌함을 표할 수 있었던 것이 불과 며칠 전까지 제가 한평생 살아오며 당연히 여기던 일이었는데.
“기생 따위라……. 그렇구나.”
장쇠야! S의 말을 곱씹던 행수가 돌연 커다랗게 장정의 이름을 불렀다. 행수의 옆에 서 있던 커다란 몸집의 사내가 냉큼 고개를 숙이며 답하고 나섰다.
“예, 행수 어르신.”
“벗겨라.”
행수의 입에서 떨어진 말에 S의 눈이 등잔만 해졌다. 곁에 서 있던 Y과 D 역시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행수의 곁에 서 있던 장정들이 일제히 S의 곁을 둘러싸고, S를 감싸려던 Y과 담을 제압헤 힘으로 찍어 눌렀다.
“왜, 왜 이러시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장정의 손에 S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춘화관 대문 양옆에 걸려 있던 초롱의 불빛이 장정의 새카만 그림자에 가려졌다.
戀慕之情
二
w. 목화
살갗에 닿은 억센 밧줄이 쓰라렸다. 나무에 몸을 동여맨 매듭은 어찌나 단단히 묶은 것인지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속곳만 겨우 남긴 차림을 한 S의 두 팔에는 거친 밧줄에 쓸려 붉게 달아오른 자국만 남을 뿐이었다.
“저 두 아이는 광에 가두고, 그리고 저 아인 내가 된다고 할 때까지 거기에 묶어두거라. 내 허락이 있을 때까지, 먹을 것을 갖다줘서도, 물 한 모금을 줘서도 아니 된다. 알겠느냐?”
행수의 단호한 목소리 뒤로 Y과 D 엉엉 울부짖는 소리가 겹쳐졌다. 행수의 명을 받은 장정들이 악을 쓰는 Y과 담을 저항하는 가축을 대하듯 바닥에 질질 잡아끌었다. 그런 무례하고 잔혹한 광경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지만, S는 제 아버지의 시신이 짐승 사체 다루듯 다뤄지던 때와 같이 아무런 저지도, 저항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엉엉 울며 자신을 부르짖는 아이들의 옷자락 하나, 신발코 하나까지 장정들의 거구 사이로 파묻히는 모습을 놓치지 않고 바라볼 뿐이었다.
까슬한 나무껍질에 긁힌 등이 쓰라렸고 서늘한 밤공기 탓에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제가 지금 처한 상황이 꿈인지 생시인지조차 가물가물해 분간이 가지 않으니 눈앞이 아득했다.
차가운 눈으로 S를 마주 보던 행수가 몸을 돌려 춘화관 안으로 사라지고, 그 뒤를 장정들의 손에 이끌린 Y과 D 따랐다. S와 나무의 곁에 우르르 몰려 서 있던 장정들마저 하나둘 대문 안으로 모습을 감추고 들자, S는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광경을 몸소 겪느라 행수가 저를 보고 섰을 땐 할 말을 잃었으나 이대로 이곳에 묶여 밤을 지샐 순 없었다.
아낙은 장정들의 손에 의해 S의 몸에서 떨어진 후로 흙바닥에 아무렇게나 뒹굴던 비단 옷가지들을 주워 모았다. 툭툭 먼지를 털어내니 다시 새것처럼 깔끔하고 어여쁜 빛깔을 되찾는 것이, 퍽 값비싼 옷감을 사용한 귀한 옷이겠거니, 싶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일 뿐, 장정들이 모두 춘화관 대문 안으로 들어간 후 텅 빈 길목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아낙 역시 S를 뒤로하고 몸을 돌렸다. S의 옷가지를 모두 챙겼으니 이 늦은 시간에, 이 추운 날씨에 더 이상 바깥에 머물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보시오! S가 다급히 아낙을 불러세웠다. 아낙이 찌푸린 얼굴을 한 채 뒤를 돌아 S를 바라보았다. 아낙이 제 말을 듣지 않고 도로 가던 길을 가버릴까, S는 다급히 말을 이었다.
“이게 지금 뭐 하자는 짓이오? 대체 이게 무슨……!”
여전히 황당하고 억울하다는 듯 외치는 S의 어투에 아낙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전히 주제 파악도, 현실 자각도 하지 못한 모양이라. 그러나 S와 같은 상황을 거쳐 간 양반 출신 여식들은 수도 없이 많았고, 아낙이 상대한 그들의 마지막 발악 역시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아낙은 이제 놀랍지도 않다는 듯 터벅터벅, 나무에 묶인 S를 향해 다가왔다. 아야, 시방 니가 묶였는 그 나무가 뭔 나문지 아냐? 아낙의 심드렁한 음성에 S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바로 수치목이라는 것이여. 너 맹키로 모가지 힘 못 빼고 뻗대는 양반 년들 버르장머리 고쳐놓는 수치목.”
“……수치목…….”
이름 한 번 괴랄했다. 아낙의 말을 들어보니 저와 같이 이 ‘수치목’에 묶였던 양반가 여인들의 수가 적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결국 하나같이 아낙이 말하는 ‘버르장머리’를 고쳐먹고 춘화관의 규칙에 고개를 숙였을 거라는 사실도, S는 그리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긍께 알량한 니 양반 자존심일랑 그 나무에다 꽁꽁 다 동여매번지고, 날 밝는 디로 행수 어르신 앞에 납죽 엎드려 잘못했다 싹싹 빌드라고잉. 어련히 더 험한 꼴 당하기 전에. 알긋냐?”
으휴. 아낙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아낙의 팔에 들린 S의 분홍빛 비단 치마가 아낙의 걸음걸이를 따라 허공에서 나풀거렸다. 그 모습이 꼭, 여태 제가 살아왔던 양반의 삶이 멀어진다는 작별의 손짓과도 같이 보여 S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다급히 목청을 높여 멀어지는 아낙의 등에 대고 그를 불렀지만, 아낙은 끝끝내 S를 향해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춘화관의 대문 너머로 발을 들였다. 활짝 열려 있던 대문이 끼이익, 묵직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아무리 그래도 어찌 사람한테 이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이오!”
덜컹, 아낙이 대문의 빗장을 잠그는 소리가 텅 빈 밤길을 공허하게 울렸다. S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찬 겨울바람이 살을 에는 감각이 여전히 생경한데, 기어이 자신을 나무에 묶어두고 떠난 이들의 결정을 믿을 수 없었다.
“풀어주시오! 제발 좀 풀어주시오.”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아궁이를 때워 구들장이 뜨겁게 달아오른 방 안에서, 푹신한 솜이불에 둘러싸인 채 잠을 청했다. 곁에는 제가 원하는 바가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모두 들어주려던 자상한 아버지와, 제 말 한 마디면 껌뻑 죽는 동생과, 제 부름 하나에 부리나케 달려와 제 시중을 들어주던 여종이 있었다. 그랬는데.
“이보시오!”
S의 입가에서 뿌연 입김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목을 쥐어짜 굳게 닫힌 춘화관 대문 너머의 누군가를 부르짖어도 S의 외로운 외침은 숨 막히게 고요한 밤공기를 얼기설기 가를 뿐이었다. S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얼어붙은 두 뺨 위로 난 물길 자국이 화끈거렸다. 밧줄과 나무 기둥에 쓸린 피부가 아팠다. 목이 말랐고, 제대로 먹지 못해 두 다리가 후들거렸고, 추웠고, 화가 났고, 종내엔 그저 미칠 듯이 서러웠다.
‘내가 대체 어쩌다 하루아침에 기생집에 내던져졌는가.’
아득바득 이를 갈아보아도 나라의 역적을 알아내고 손수 처단했을 이를 향해 복수할 방법 따윈 떠오르지도 않았다. 제가 한겨울에 발가벗겨져 길 한복판에 묶여있는 사이, 그 작자는 두 발 뻗고 편안히 잠이나 자고 있을 테니.
S의 눈에서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불쌍한 내 아버지, 내 동생, D, 그리고 나. 제 곁에 남아있는 이가 단 한 사람도 없게 되자 우습게도 그제야 뒤늦은 울음이 터져 나왔다. 저보다 어린 Y과 담을 곁에 두었을 땐 이를 악물고 가슴 한쪽에 켜켜이 쌓아 묵혀두기만 했던 것들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울컥울컥 목구멍을 타고 역류했다.
“……도와주세요…….”
목소리가 잔뜩 떨렸다. 흐윽, 흑. 힘주어 문 잇새로 금방이라도 꺼질 듯 가녀린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아무도 듣지 못할, 들을 리도 없는 부탁임을 알고 있었으나 S는 그 애원을 멈출 수 없었다. 처음 보는 사내들에게 술을 팔고, 웃음을 팔고, 몸을 팔고 싶지 않았다. 제가 원하는 것은 그게 전부인데, 그 바람이 이리 큰 죄인가. 안개가 낀 듯 뿌연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편 수치목에 묶인 제 모습을 지켜보는 이가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한 S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 일련의 소동을 지켜보던 이가 있었다. 높다란 나무 위에 올라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로 남몰래 마을을 내려다보던 신수. W은 30보(步)도 채 되지 않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춘화관 앞의 S로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오늘따라 떠들썩하더라니…….’
산 아랫자락에 맞닿아 있는 기생집에서 종종 거한 잔치를 벌인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기름지고 맛난 음식 냄새가 산줄기를 타고 올라와 코끝을 간질이고, 땅을 둥둥 울리는 경쾌한 장단 소리가 걸음을 잡아끄는 날. W은 인간들의 세상과 삶에 대해 호기심이란 이름의 마르지 않는 샘을 갖고 있었으니 오늘도 어김없이 춘화관에서 들려오는 흥겨운 북소리에 잔칫상에 올라간 음식이라도 구경해 볼까, 하여 마을 가까이로 산을 내려왔을 뿐인데.
“도와주세요…….”
이미 잔치의 끝물인 듯한 춘화관 담벼락 안에서는 더 이상 신명 나는 가락과 사람들의 떠들썩한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청력이 인간에 비해 몇십 배는 더 예민한 W의 귀에 서늘한 겨울바람이 밤을 가르며 우는 소리와 금방이라도 사그라들 듯한 S의 흐느낌만이 선명하게 닿았다.
춘화관 대문 앞에 커다랗게 걸린 초롱의 옅은 불빛이 S를 비추었다. 매서운 바람에 일렁이는 불꽃과 함께 바닥에 길게 늘어진 작고 가느다란 S의 그림자마저 함께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모습이 퍽 위태로워 보여서. 그냥 가서 풀어줄까. 그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새, 홀로 저 멀리 도망이라도 가지 않을까. W이 붙잡고 있던 나무 기둥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묶인 아이를 풀어주는 일이야 그리 어렵지 않지만.
“누가 그리 울든 다 그들의 팔자인 게지. 일일이 신경 쓰다간 자네만 힘들 걸세.”
저도 모르게 마을로 내려가려던 발길을 냅다 낚아채어 붙잡은 것은 다름 아닌 O의 환청이었다. 귓전을 파고드는 지친 음성에 W은 나무 아래로 뛰어내리려던 움직임을 다급히 멈추었다.
“……아니지, 안 되지. 인간사에 끼어들지 않기로 O과 약속했잖아.”
안 돼. W이 저 스스로 암시를 걸듯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인간들이 얼마나 잔혹한 동물인지, 피도 눈물도 없이 욕심만을 좇는 동물인지. 그 정도는……,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래, 그런 모양이다. 한 번 떠오른 O의 환청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제게 그 말을 건네던 O의 얼굴이 씁쓸해 보이던 탓일지, 아니면 O이 말하던 인간의 추악함을 지금 제 두 눈으로 직접 목도한 탓일지. 섣불리 발을 뗄 수가 없었다. W은 제 손바닥에 닿은 거친 나무 기둥을 힘주어 쥐었다.
“……도와주세요.”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숨을 마지막으로, S는 자신을 덮치는 수마에 그대로 눈을 감았다. W은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나무에 묶인 채 밤을 지내는 S를 바라보았다.
-
S가 다시 눈을 뜬 것은 해가 머리 위로 비스듬히 솟은 이른 아침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오는 것조차 우스운데, 그렇게 잠들어 꾼 꿈조차 아버지의 마지막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 보여준 탓에 S는 짧은 숨을 들이켜며 소스라치게 잠에서 깨야 했다.
“―G 네 이놈!”
“아버지!”
거친 바람을 타고 허공에 흩날리던 붉은 선혈이, 제 뺨에 튀었던 아버지의 마지막 온기가 여전히 생생해서. S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꿈을 꾸어도, 꿈에서 깨어도 잔혹한 현실이 저를 높다랗게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하아, S의 입가로 희미한 입김이 퍼졌다.
“세상에, 저 꼴 좀 봐.”
그 순간 S의 멍한 정신을 툭, 건드린 수군거림이 골목길 안쪽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S가 퍼뜩 고개를 돌렸다. 소리가 들린 방향을 돌아보니 이른 아침부터 춘화관 앞 수치목에 묶인 양반 출신 계집을 보러 나온 이들이 삼삼오오 가득했다. 언제 또 이리 소문이 퍼진 것인지. S가 기가 찬다는 듯 허, 헛웃음을 터뜨렸다. 원래라면 제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할 이들이 하나같이 저를 손가락질하며 수군수군 입에서 입으로 말을 옮기고 있었다.
“양반 년인가 봐.”
“에휴, 수치목에 묶이다니…….”
“보나 마나 또, 흰 목 쭉 빼고 기생은 못 된다 염불을 외운 게지.”
소란을 듣고 집에서 나온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었다. 몸에는 속곳만 달랑 걸친 채 가축을 잡을 때나 쓸법한 밧줄로 수치목에 묶인 모습이 그리 놀랍지는 않으면서도, 그만큼 말을 얹는 데엔 흥미가 있는 모양이었다.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S의 모습을 훑으며 좋을 대로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 하나하나가 소름 끼칠 정도로 선명하게 전해졌다. 전날 밤 춘화관의 아낙이 제게 툭툭, 무심히 던지던 말이 떠올랐다.
“시방 니가 묶였는 그 나무가 뭔 나문지 아냐? 바로 수치목이라는 것이여.”
퍽. 묵직한 무언가가 S의 관자놀이 위쪽으로 날아들었다. 눈앞에 흰 불빛이 튀는 듯했다. 갑작스런 무게가 끼얹어진 충격에 몸을 휘청이며 눈을 깜빡이고 있으니 뒤늦게 아릿한 통증이 차올랐다. 뜨끈한 것이 이마를 타고 흐르는 것 같기도 했다. S가 당혹스러운 눈을 하고 제 발치에 떨어진 것을 내려다보았다. 주먹만 한 작은 돌멩이였다. S의 꼴을 보고 키득키득 웃음을 삼키던 아이 하나가 바닥에 있던 돌멩이를 주워 던진 것이었다.
“너 맹키로 모가지 힘 못 빼고 뻗대는 양반 년들 버르장머리 고쳐놓는 수치목.”
잇따른 몇 개의 돌멩이가 S를 향해 더 쏟아졌다. 이런 뜻이었구나. 뒤늦게 아낙의 말뜻을 깨달은 S가 눈에 힘을 주고 제게 돌멩이를 던진 아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나무에 동여매진 채 머리에서 피가 흐르는 제 꼴을 보면서도 누구 하나 저를 돕기 위해 다가오는 이가 없었다. 제 주변으로 제 모습을 구경하러 온 이들이 그토록 많았음에도, 하나같이 입가에 왜인지 모를 웃음기만을 띤 채 웅성웅성, 저들끼리 발 없는 말을 날랐다.
저들이 정녕 같은 인간이 맞는가. S가 두 주먹을 힘주어 쥐었다. 두 발로 걷고, 사람 말을 하는 것이 저와 같은 외양을 했음에도 행하는 일은 꼭 악마가 아닌가. S가 눈을 부릅떴다. 제 앞의 춘화관은 여전히 대궐 같았고, 높다란 대문은 굳게 잠긴 채였다. 이런 걸로 지지 않아, 지지 않을 거야. S가 중얼거렸다.
“난, 절대로 기생 따위 되지 않을 거야.”
눈시울이 달아오르고 시야가 흐려졌지만, S는 절대 제 뜻을 굽히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누명을 얻고 땅에 처박힌 윤가(家)의 명예를 생각하면 뭣도 모르는 이들이 제멋대로 떠드는 말 따위는 제 신경을 건드리지도 못했다. 시린 날에 몸이 베여 죽은 아버지를 생각하면 제가 작은 돌멩이에 맞아 느끼는 고통 따윈 아무것도 아니었다.
“절대로…….”
그럼에도 누군가 자신을 구하러 와 주었으면, 하고. S는 자신을 난자하는 사람들의 매서운 눈길과 손짓에 고개를 푹 숙이며 비쩍 마른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
요 며칠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던 잿빛 먹구름이 가시고, 간만에 환한 보름달이 제 모습을 훤히 드러낸 밤이었다. 하늘은 어여쁘고 바람도 잦아들어 모두가 깊은 잠에 빠져든, 고요하고 평화로운 어둠. 어김없이 춘화관이 죄 내려다보이는 나무 위에 올라, W은 밝은 달을 등진 채 마을을 들여보았다.
밤이 깊은 마을 풍경은 어느 때 보아도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각자 포근한 집에 들어가 잠을 청하는 시간이었으니 그 텅 빈 길목 한가운데 나무에 흰 속곳을 입고 밧줄로 꽁꽁 묶인 어린 여자아이 하나는 십 리(里) 밖에서 보아도 눈에 띌 수밖에 없었고.
“……O의 말 하나 틀린 것이 없군.”
W이 나지막이 중얼댔다. 인간들이 북적대는 마을이라면 언제나 호기심과 호의로 반짝이는 눈을 한 채 구경하기 바빴으나 이 마을 구석진 곳으로 난데없이 끌려온 S라는 아이를 본 순간부터 마을을 바라보는 W의 시선도 점점 메말라가기 시작했다.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생물보다 잔혹하고 악독할 수 있는 동물이었다. 그러니 저 어린 여자아이를 나무에 밧줄로 칭칭 동여매 두고 아이가 사람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해도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것이지. W이 얼굴을 찌푸렸다.
인간은 100년도 채 못 사는 동물이었다. 100일도 채 넘기지 못하는 이들도 허다했다. 그만큼 나약하고, 나약한 만큼 세상만사에 무지한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그 짧은 생 동안 오롯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헌신하는 마음만은 높게 샀기에 인간들을 사랑했던 것인데. W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토록 극단적인 양면성을 가진 존재라니.
‘선함과 악함을 내비치는 것이 손바닥을 뒤집는 일보다 쉽구나.’
W이 제가 딛고 서 있던 나뭇가지를 가볍게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펄쩍, 가벼운 몸짓과 함께 커다랗고 시커먼 인영이 순식간에 산을 뛰어내려 마을 길 한복판에 섰다. 수풀이 빼곡한 산속과 달리 사람들이 오가기 편하라고 훤히 뚫어놓은 마을의 길은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달빛을 오롯이 받는 땅이었다.
“……아버, 지…….”
W이 느리게 수치목을 향해 다가갔다. 나무에 고정한 밧줄에 몸을 의지한 채 무너져내린 S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어김없이 울다 지쳐 기절하듯 잠든 것인지 눈가는 부르텄고, 버석하게 마른 입술 새로 흘러나오는 잠꼬대에 역시 물기가 어려 있었다.
가까이서 본 S의 얼굴은 멀리서 보았을 때보다, 그리고 W의 생각보다 더 앳되고 수척하게 말라 있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단정하고 얇은 선으로 그려진 얼굴은 매끈한 옥돌처럼 고왔고, 티끌 하나 없이 하얗고 맑은 피부는 겨울철 온 마을을 뒤덮은 깨끗한 눈밭과도 같았다.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가닥가닥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에, W이 조심스레 손을 뻗어 얼굴 위로 넘어온 머리카락을 S의 귀 뒤로 넘겨주었다.
“멸문한 윤가(家)의 장남 Y, 장녀 S, 그리고 그 집에 있던 여종이오.”
S. W이 혀를 굴려 전날 엿들었던 S의 이름을 입에 D보았다. 낯선 발음에 혀의 움직임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으나 입안에서 맴도는 이름의 글자마저 고왔다. 시린 바람 몇 자락이 불어 W의 거친 옷자락과 덥수룩한 머리칼을 헤집었다. W은 S의 새하얀 낯을 타고 흐르다 굳은 핏자국을 자신의 소매 끝으로 조심스레 닦아냈다.
그렇게 수치목 앞에 가만히 서서, 말없이 S를 내려다보던 W은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재빨리 몸을 돌렸다. 흙바닥을 딛고 있던 두 발에 힘을 주고 크게 도약한 W은 커다란 달이 휘영청 뜬 밤하늘을 향해 뛰어올랐다. 기다란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신수의 그림자가 어둠이 내려앉은 산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W이 다시 S의 곁으로 돌아온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산으로 다시 들어갈 때와 같이 눈 깜짝할 새 밤하늘을 가로질러 훌쩍, S의 곁으로 돌아온 W은 조금 가쁜 숨을 몰아쉬며 흘끔흘끔 곁눈질로 주변을 살피기 바빴다. 여전히 근처에서 느껴지는 별다른 기척은 없는 듯싶었다. 그러니 제가 몰래 이 나무에 묶인 가여운 아이를 도와도 저지할 이는 없다는 소리지.
W은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예끼, 이 친구야! 제 뒷덜미를 움켜잡으며 고래고래 화를 내는 것만 같은 O의 환청을 애써 떨쳐버리곤 손에 들려 있던 작은 호리병의 입구를 열었다. 산중에 있던 작은 못에서 갓 떠온 깨끗한 물이었다. 핏기를 모두 잃고 바싹 말라 죄 부르튼 S의 입술이 자꾸만 눈에 밟혀 산에 돌아가 서둘러 챙겨온 것이었다. 인간들이 붙잡아놓은 인간 아이를 아주 풀어주는 것도 아니고, 힘겨워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조금 도와주려는 것뿐이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 싶었다.
W은 자신의 커다랗고 두터운 손을 오목하게 모아 그 안으로 호리병을 기울였다. 호리병 속에 있던 맑은 물이 졸졸 흘러 W의 손안으로 고였다. 호리병을 허리춤에 대충 끼워둔 W은 남은 빈손으로 바닥을 향해 힘없이 떨어져 있던 S의 머리를 조심스레 받쳐 올렸다. 부드러운 머리칼과 차갑게 얼어붙은 뺨이 W의 굳은살 박인 손바닥에 맞닿았다.
W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잔뜩 지쳐 눈을 감은 S는 W의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에도 잠에서 깰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W은 조심조심 S의 벌어진 입가에 대고 호리병 속의 물을 받아놓았던 제 손을 기울였다. 찰랑이던 물 몇 모금이 S의 입가로 흘러들었다. 수치목에 묶여 꼬박 이틀을 이 상태로 방치당한 S는 지금, 의식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는 환자나 다름없었으니 W이 조심조심 입가로 물을 넣어주어보았자 제대로 삼키는 것조차 어려워 보였다. S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물이 반, 그 밖으로 흘러 땅에 뚝뚝 떨어지는 물이 반이었다.
‘……입으로 하면 더 쉬이 삼킬 수 있긴 할 텐데.’
W이 제 허리춤에 있던 호리병과 자신의 투박한 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망설이던 시선이 눈을 감은 S의 야윈 낯에 닿았다. 난, 절대로 기생 따위 되지 않을 거야. 그렇게 말했던가. S가 몇 번이고 읊어대던 다짐이 떠올랐다. W은 얕은 한숨을 내쉬고, 호리병의 물을 재차 자신의 손에 덜었다. 기생이 되기 싫어 이렇게까지 버티고 선 아이인데 괜히 제멋대로 아이에게 손을 대고 싶진 않았다.
W은 널찍한 등으로 서늘한 밤바람을 막아선 채 작은 호리병의 물이 동날 때까지 몇 번이고 S의 입가에 물을 흘려 넣어주었다. 무슨 모진 꼴을 당하였는지 뻔히 다 보아놓고 해줄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다는 죄책감에 그 행위를 멈출 수 없었다. W이 제 손안에 놓인 S의 작은 머리통을 조심조심 쓰다듬었다.
-
“절대……, 지지 않을 거야…….”
그랬던 것이 불과 몇 시간 전인데. 이젠 다 쉬어 제대로 목소리가 나오지도 않았다. 혀가 둔해지고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버거워 보였다. 그러나 S는 제 결심을 굽히지 않았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몰아세웠다.
또다시 동이 트고, 날이 밝아 춘화관 앞과 수치목 근처를 오가는 마을 사람들이 많아졌다. 인간들의 눈치가 보여서라도 W은 S의 곁을 떠나 다시 산속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오늘만큼은 겨울 해가 따스하길 바랐다. 여전히 잠결에 비몽사몽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S를 두고 발길을 돌리는 것이 그저 마음 편한 일도 아니었으나, W은 애써 괜찮을 거라 자위하며 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높다란 나무 위에 올라섰다. 새하얀 속곳을 입은 S는 여전히 멀찍이 떨어진 산속의 나무 위에서도 한눈에 들어왔다.
S가 수치목에 묶인 지도 어언 사흘째, 옷가지 하나 제대로 몸에 걸치지 못하고 겨울의 찬바람을 그대로 맞고 선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시간 내내 목 뒤로 삼킨 것이라곤 W이 몰래 넘겨준 물 몇 모금이 다였고. 슬슬 몸이 한계에 다다른 것인지 S의 이마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혔다. 가엾은 아이가 추위에 떨지 않길 바라며 날이 따뜻하길 바라긴 했으나 여전히 겨울의 복판인 시기였다. 절대 저리 땀을 흘려댈 정도로 더운 날은 아닌데.
W이 초조한 듯 입 안쪽 살을 짓씹었다. 전날 밤, 창백하게 질려있던 얼굴이 조금이나마 편한 기색을 내비칠 때까지 곁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상태를 살폈으나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던 모양이었다.
“절대로 기생, 같은 거……, 되지 않을 거야…….”
그때, 혼미한 정신으로 몇 번이나 중얼거림을 반복하던 S의 고개가 힘없이 떨구어졌다. 해가 저물고 밤이 찾아와 고개를 떨구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낌새였다. 기어이 의식을 잃고 축 늘어진 모양새에 S를 지켜보던 W이 쯧, 혀를 차며 황급히 나무 위에서 뛰어내렸다.
옷자락을 펄럭이며 땅 위에 착지한 W이 얼굴을 찌푸린 채 S를 바라보았다. O의 말을 귀D들어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으려 했건만, 저대로 두었다간 죄 없는 어린 목숨이 날아가게 생겼다. 오랜 시간 지리산의 신수로 살아오며 그 누구보다 인간들에게 애정을 갖고 그들을 세심하게 살폈던 W으로서는 그저 눈 뜨고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광경이었다. W이 마을을 향해 발을 내디딘 그때였다. 묵직한 나무 지팡이가 W의 오른쪽 어깨 위에 툭, 얹어졌다.
“……인간들 일이야.”
하여튼 귀신같기는. 신수도 아닌 주제에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제가 하려는 일마다 번번이 훼방을 놓고 꾸지람을 쏟아내는 꽉 막힌 법사 같으니라고. W이 등을 돌렸다. 이젠 놀랍지도 않은 듯, 평온한 얼굴을 한 O이 서 있었다. O의 눈은 단호했다. 한결같이 인간들의 일에 개입하려는 W을 만류하려 들었고, W은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S의 모습을 보고도 그렇게 말하는 O에게 울컥 짜증이 치솟았다.
“허나 어린 아이오.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벌써 사흘째 저리 묶여있다니.”
“어린아이일지라도, 설령 가혹할지라도 저 아이의 운명일세. 자네가 함부로 관여해서는 안 되는 일이야.”
O의 말에 W이 재차 S를 돌아보았다. 쭉 뻗은 나무 기둥에 밧줄로 몸이 묶여 죽은 듯 축 늘어진 모습. 밧줄에 쓸린 팔에선 여전히 스멀스멀 피가 배어 나왔고 힘없이 꺾인 머리끝에선 분홍색 댕기가 바람을 따라 달랑거렸다. 역시 두고 볼 수만은 없다. W이 이를 악물고 땅을 힘껏 박찼다.
W이 허공을 향해 훌쩍 날아올랐다. 긴 머리칼과 품이 넓은 옷자락을 펄럭이며 겨울바람을 가르던 W의 손목에 알록달록한 염주가 감긴 것은 순식간이었다.
“엇……!”
W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발밑에서 저를 향해 염주를 던진 O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오늘만큼은 쉽게 놔줄 생각이 없나 보지. W이 지면을 향해 빠르게 추락하는 몸에 힘을 바짝 주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털썩, 마른 낙엽과 풀이 가득한 흙바닥에 힘없이 쓰러진 W이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제 팔에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이 염주 하나에 신수의 힘이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W이 냉큼 O을 돌아보았다.
“나와 한 약속, 벌써 잊었나?”
바닥에 뒹구는 W을 향해 저벅저벅 다가오며, O이 물었다. 인간사에 개입하지 말라. 지리산을 지키는 신수 W을 향해 O이 경고한 것은 그것, 딱 한 가지였다. 인간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신수의 말로는 뻔할 뻔 자였다. 그저 제 안위를 좀 걱정하여 몸을 사리라는 것인데, 저 영험한 신수에게는 자신의 우려 섞인 걱정마저 한낱 인간의 귀찮은 개입 정도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것인지.
몸을 일으키고 제 말을 무시한 채 다시 마을을 향해 걷는 W의 뒷모습에 O은 가슴께가 갑갑함을 느꼈다. 지팡이를 쥔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무리 염주로 W의 힘을 억눌렀다 해도 한낱 인간인 자신이 신수인 W을 무력으로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지팡이로 W의 가슴팍을 강하게 밀어젖히며 그의 앞을 막아서는 이유가 그가 인간을 구한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갉아먹는 일을 보기 싫어서인지, 혹은 그가 여태 알지 못했던 인간의 잔혹함까지 알아채고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크게 실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인지 O 역시 알지 못했다.
O이 커다란 기합과 함께 앞으로 뻗은 지팡이를, W은 그저 제 얼굴을 향해 달려드는 귀찮은 날파리를 쫓아내듯 손으로 가볍게 쳐냈다. 힘의 차이가 명백함에도 O은 굴하지 않고 몇 번이나 W을 향해 달려들었고, O의 손에 들린 지팡이가 묵직하게 허공을 가르길 몇 번, W은 기어이 O의 지팡이를 제 손으로 단단히 붙잡은 채 그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힘없고 불쌍한 아이를 도우려는 것뿐이네.”
“두 번 다시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약조했잖은가.”
“한 번이야! 한 번이 무에 그리 큰일이라고.”
“언제나 한 번의 경계가 제일 중한 법이지. 한 번의 경계가 허물어지면, 두 번, 세 번은 더 쉬워지는 법이니.”
한 치의 물러섬이 없는 대화에 W이 노성을 지르며 O의 지팡이를 내팽개쳤다. 묵직한 나무 지팡이가 눈 깜짝할 새 바닥을 뒹구는 모습에 O이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그러나 이내 그의 분노까지 감내하려는 것인지, O은 꿋꿋이 뒷말을 이었다. 흥건히 맺힌 땀이 O의 얼굴을 타고 흘렀다.
“……자꾸 인간의 운명에 개입하려 들지 말게. 자네하고 인간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가 있다는 걸 명심해.”
후우. W과의 몸싸움에 가빠진 숨을 고르며 O이 터벅터벅 W으로부터 멀어졌다. 나무 아래에 벗어둔 제 삿갓을 가지러 가는 것이었다. W과 이리 열을 내며 싸운 것도 오랜만이고, 이젠 제 몸도 어련히 나이를 먹은 모양이라. O이 잔뜩 무거워진 눈꺼풀을 끔뻑거리며 왔던 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던 때였다.
후욱, W의 발치에 그대로 내버려 두고 온 자신의 나무 지팡이가 강한 바람을 일으키며 눈앞을 스쳤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삿갓을 주우려던 참이라, O은 자칫하다 제 머리를 관통할 뻔한 나무 지팡이의 존재에 몸을 휘청이며 뒷걸음질 쳤다. O을 아슬아슬하게 스친 지팡이는 O의 바로 뒤에 있던 나무 기둥에 곧장 날아가 꽂혔다.
“……헉, 허억.”
O이 경악에 물든 얼굴로 W을 돌아보았다. O이 있는 방향으로 나무 지팡이를 있는 힘껏 집어던진 W의 눈동자는 해 질 녘 노을과 같은 빛깔을 하고 있었다. 분명 손에 염주가 채워져 있을 터인데. O이 아연실색을 했다. 원체 감정적이고 이성적인 성격과는 거리가 먼 W이었지만, 처음 보는 인간 계집애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화를 낸다고? O으로서는 도통 납득할 수가 없었다. 차츰 인간의 새카만 눈동자 색을 되찾은 W이 자신으로부터 조금 빗겨 간 곳을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O이 깨달은 것도 그때 즈음이었다.
‘아니, 이것은……!’
W의 시선을 따라 가만히 고개를 돌린 O의 시야에 거대한 짐승 한 마리가 들어왔다. 성인 남성의 팔뚝만 한 굵기를 자랑하는 뱀이었다. W이 자신이 있는 방향을 향해 있는 힘껏 던진 지팡이는 나무 기둥을 타고 오르던 뱀의 몸통을 관통해 있었다.
O이 눈을 빠르게 깜빡이다 냉큼 제 뒤의 W을 돌아보았다. 입가에 평소와 다름없는 가벼운 미소를 되찾은 W은 눈이 등잔만 해진 O을 터덜터덜 스쳐 지나와, 지팡이에 몸을 관통당한 채 혀를 빼물고 몸을 꿈틀거리던 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스르르, W의 손 아래에 놓인 뱀은 고통에 몸부림치던 것도 잠시, 이내 자잘한 가루가 되어 감쪽같이 모습을 감추었다. 건조한 겨울바람을 타고 느리게 허공으로 흩어지는 뱀의 잔해를, O이 잔뜩 흔들리는 눈으로 좇았다.
“이것 또한 내가 자네의 운명에 개입한 것인가? 내가 넘지 말아야 할 경계를 넘은 게야?”
W이 능글맞게 말을 이었다. O은 여전히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멍하니 제 앞의 친우를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W은 O이 보인 빈틈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저 힘없는 아이 한 번 도와주겠다는 것뿐일세. 응?”
침을 꼴깍 삼킨 O이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다. W에게 그리 단호한 투로 인간사에 개입하지 말라 해놓고 정작 인간인 자신의 명줄이 조금 전, W의 선택에 의해 이어지고 있었다. 더는 그를 말릴 대단한 명분 따위 남아있지 않았다.
O이 텅 빈 나무 기둥을 슬그머니 훔쳐보는 사이, W은 O의 어깨를 툭툭, 가볍게 치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운 좋게 O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으니 수치목에 묶인 저 가여운 아이를 안전하게 구하는 일만이 남았다. 마을로 향하는 W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어?’
그러나 W은, 마을로 향하는 길을 어렵사리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산을 끝까지 내려가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춘화관 앞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산자락이었으나 방금까지만 해도 수치목에 매달려 축 늘어져 있던 S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찾아볼 수 없는 탓이었다.
서둘러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S를 찾았지만, S의 모습은커녕 머리털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 W이 S의 흔적이라 볼 수 있는 것이라곤, 이미 텅 빈 수치목 아래에 흐물흐물하게 늘어져 있는 밧줄과, 그 밧줄에 드문드문 묻어있는 시커먼 핏자국이 전부였다. O과 거친 다툼을 벌이는 사이 누군가 수치목에 묶여있던 S를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간 모양이었다. 뭐, 다른 이라도 S를 구해주었다면야 다행이긴한데.
‘……뭐지, 이 기분은…….’
W이 미간을 좁혔다. 제가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고, 꼴딱꼴딱 숨이 넘어가던 어린아이가 같은 인간의 손에 구조되었다니 최선의 결말을 맞았음은 분명한데. 어딘가 아쉽고, 찝찝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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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들어 올린 눈꺼풀이 무거웠다. 그러나 더 이상 살갗을 에는 듯한 차가운 겨울바람도, 온몸에 돋았던 소름도, 땀과 피로 속곳이 흠뻑 젖은 축축한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잔뜩 저려오던 몸은 푹신한 이불 속에 힘을 쭉 빼고 파묻혀 있었고, 손끝에 닿는 빳빳하고 깨끗한 옷이 전신을 감싼 채였다. 호흡할 때마다 속을 에는 듯하던 찬 공기도, 입가에서 터져 나오던 희뿌연 숨도 없었다.
“워메, 아씨. 정신이 드셔라?”
쥐 죽은 듯 고요한 사방에서 제 귀에 때려 박히는 친숙한 사투리의 주인을, 걱정을 담뿍 묻힌 음성의 주인을 S는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느리게 시선을 돌리니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두 눈썹을 한껏 늘어뜨린 D의 얼굴이 보였다. 무사했구나. S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D……. D냐?”
“예, 아씨. 지구먼유. 아이고 시상에……. 살아나셨네, 우리 아씨!”
D가 울먹거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D야 성한 곳 없이 무사한 듯 보였으니 춘화관 안으로 질질 끌려가던 날 밤 이후 다행히 별다른 험한 꼴은 당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눈앞에 있던 D의 안부부터 확인한 S가 천천히 눈을 굴려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원래 제가 살던 집만큼 넓은 공간에 고급스러워 보이는 물건들로 휘황찬란하게 치장된 방. 그러나 검소하고 단조로워야 하는 양반의 집이라기엔 과할 정도로 화려하고 반짝이는 물건들로 가득한 곳이라. 자리에 누운 상태에서 보이는 방 안 풍경만 해도 범상치 않은 것이, S는 슬슬 불길한 느낌이 몰려와 눈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켰다.
어, 어. D가 어쩔 줄을 모르며 손을 허둥댔다. 분명 춘화관의 광에 갇혔을 D와 춘화관 행수의 명에 따라 수치목에 묶여있어야 했을 제가 이리 수상할 정도로 화려한 방 안에 함께 있다니. 이곳이 다름 아닌 춘화관 대문 안쪽의 방이구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비켰거라.”
“아씨.”
“내 죽어도 이곳 문턱을 넘지 않겠다 했거늘. 당장 비켰거라. 내 여기에서 단 일각도 머물지 않을 것이니!”
S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전히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고, 파랗게 질린 입술 색이 돌아오지 않았는데도 여전히 뜻을 굽히지 않는 제 주인의 모습에 D만 쩔쩔매며 불안한 눈빛을 한 채 S를 이리저리 살피기 바빴다.
“―머물지 않으면 어찌하겠단 것이냐!”
그리고 때마침 내려친 불호령이 조용하던 방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D와 S가 일제히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활짝 열린 문가에 S가 사흘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아낙과, 머리에 커다란 가체(加髢)를 올린 행수가 서 있었다.
워메, 워쩐댜. 문가의 두 사람을 발견한 D 제 두 눈을 질끈 감고 황급히 앉은 자리를 물렸다. 수치목에 매달려 의식을 잃은 S를 방 안으로 들여놓고 간호하길 명한 것은 행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춘화관을 강하게 거부하는 S를 행수가 어떻게 볼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라. D의 예상대로, 문가에 서 있던 행수가 조금은 난폭한 걸음걸이로 방 안을 가로질러 들어왔다. D가 벌벌 떨리는 양손을 꼭 움켜쥔 채 몸을 움츠린 데 반해, S는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제게 다가오는 행수를 꼿꼿이 올려다보았다.
“한 번 관기로 팔려 온 년은, 좋든 싫든 상관없이 기생의 팔자로 살아야 하는 법. 좋든 싫든 상관없이, 술을 팔고 웃음을 팔고 몸을 팔아야 하는 법!”
행수가 S를 향해 날 선 소리를 퍼부었다. 붉게 칠한 입술 사이로 매섭게 쏘아지는 말은 S의 자존심을 잔뜩 긁고, 그를 끝도 없는 절망 한가운데로 밀어 넣을 법한 것이었다. 그 뒤를 따라온 아낙과 S 곁의 D가 잔뜩 고양된 두 사람의 감정에 이리저리 눈치를 살필 정도였으나 묵묵히 행수의 말을 듣고 있던 S는 느리게 입을 뗐다.
“……차라리, 날 다시 수치목에 매다시오.”
행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S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를 예상치 못한 것은 곁에서 행수와 S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아낙이나 D도 매한가지였는지, 두 사람의 얼굴 역시 떠오르는 경악을 감출 길이 없었다.
“차라리 거기 매달려 죽는 편이 낫겠소.”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씹어뱉듯 말을 마친 S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러나 몸이 의지를 따라주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두 발로 이불 위를 딛고 서자마자 눈앞이 핑도는 느낌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잠시 방 안에서 눈을 붙이고 있던 것만으로는 한겨울에 속곳 차림으로 사흘 내내 길거리에 묶여있던 일을 회복하기에 역부족이었던 듯했다. 아씨! 끝내 작은 비명을 내지른 D가 황급히 비틀거리는 S를 부축했다.
몸이 좋지 않은 것이 남의 눈에 뻔히 보이는데도 또다시 수치목에 매달리겠다 선포하는 고집이라니. 배짱 한번 좋았다. 자신을 노려보는 S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로, 행수가 턱짓으로 창가를 가리켰다. 아낙이 목을 굽혀 행수의 뜻을 받들겠다는 답을 한 후, 잰걸음으로 한쪽 벽에 커다랗게 나 있던 창가로 다가갔다.
아낙이 커다란 창을 양옆으로 활짝 열어젖히자 그늘진 방 안으로 바깥의 빛이 양껏 쏟아져 들어왔다. 아낙이 창을 열든 말든 매서운 시선을 꽂은 행수로부터 눈을 돌리지 않던 S가 열린 창가로 눈을 돌린 것은, 제 시선을 뻔뻔하게 받아내고 있던 행수가 먼저 창 너머를 향해 고개를 돌린 덕이었다. S가 느리게 고개를 돌리고, D도 의아한 얼굴을 한 채 함께 S가 바라보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누님.”
“……Y.”
열린 창 너머로 시선을 던진 S와 D의 얼굴이 동시에 하얗게 질렸다. 창밖에는, 여태 소식을 알 수 없던 Y이 밧줄에 꽁꽁 묶여 꿇어 앉혀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Y의 주위를 둘러싼 장정 다섯의 손에는 큼지막한 몽둥이가 들려 있었고, Y은 이미 한차례 장정들의 손에 험하게 다루어진 건지 흙먼지로 엉망이 된 몰골이었다. D와 함께 광에 끌려갈 때까지만 해도 잘 갖춰 입고 있던 비단 두루마기는 고사하고, 몸에 겨우 걸친 얇은 옷가지는 얼룩덜룩 더러워진 채 잔뜩 주름이 져 있었다. S의 팔을 붙들고 있던 D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누님, 무사하시었소?”
“Y……!”
믿을 수 없다는 듯,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한 채 창가로 한발 다가선 S와 달리 Y은 연신 S의 안위만을 되물어왔다. 사내아이가 기생집에 팔려 왔으니 기껏해야 잡심부름 정도나 하고 있겠거니, 싶었는데. 그 어떤 수모를 겪어도 선명한 빛을 발하던 S의 눈동자가 하릴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한 번만 더 묻겠다. 아직도 관기가 되는 걸 거부하겠느냐?”
행수의 목소리는 전과 다름없이 단호했고, 평온했다. 행수를 바라보는 S의 눈이 보다 더욱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이젠 그저 활활 타오르는 분노만이 아니라, 인간 된 도리로 어찌 같은 인간에게 이리 잔혹하게 대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과 혐오가 덕지덕지 묻은 시선이었다.
“신중히 생각하고 대답하여라. 네 대답 여하에 따라, 네 동생의 생사 또한 결정될 것이니.”
“누님, 내 걱정 하덜 마오. 나는 어찌 되어도 상관이 없소. 그러니, 기녀 따위 절대로 된다 하지 마오!”
Y이 행수의 말에 바락바락 목청을 높였다. Y의 입가에서는 희뿌연 숨이 터져 나왔다. 구들장이 달구어져 훈기로 가득하던 방 안에, 활짝 열린 창을 타고 바깥의 시린 공기가 넘어 들어왔다. 여전히 서글플 정도로 춥고 잔인한 계절이라, S는 이를 꽉 깨물었다. D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다.
“자, 어찌할 테냐?”
“누님!”
“어찌하겠냐니까?”
자신을 다그치는 행수의 목소리와 제게 애걸하는 Y의 음성이 쉴 틈 없이 몰아쳤다. S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창가를 타고 들어오는 한기에 빨갛게 얼어 붙어있던 손의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멍석말이를 시작하거라!”
“예!”
S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자꾸만 흐려지는 시야를 바로잡으려 애쓰는 사이, 행수는 창 너머의 장정들에게 Y의 멍석말이를 지시했다. 장정들의 묵직한 대답이 마당을 쩌렁쩌렁 울리고, 그들은 S가 손쓸 새도 없이 분주히 움직여 기다렸다는 듯 행수의 명을 이행하기 시작했다.
장정들은 무릎을 꿇고 있던 Y을 그 자리에 떠밀어 눕힌 후 그 아래에 깔려있던 멍석을 들어 Y의 몸을 칭칭 감았다. 사지를 결박당해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게 된 Y은 그저 이를 악물었다. 잇따라 저를 향해 몰아칠 수많은 몽둥이질을 예견한 탓이었다.
퍽, 퍼억, 퍽. 곧 장정들의 손에 들린 두꺼운 몽둥이가 일제히 멍석에 말린 Y을 향해 쏟아졌다. 멍석과 몽둥이에 묻어있던 흙이 허공에 흩날리며 희뿌연 먼지를 일으켰고, 그 모진 매질을 홀로 받아내던 Y의 다물린 잇새에서도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몽둥이질이라니, 인간이 어찌 인간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느냐며 아버지는 집 안의 종 하나에게도 섣불리 손을 들지 않으셨다. 그런 집안에서 평생을 귀하게 애지중지 자랐다. S의 턱이 덜덜 떨려왔다. 심장이 방망이질 쳤고, 기상천외할 정도로 잔혹한 이곳의 방식에 머리끝까지 열이 몰리니 눈가가 뜨거웠다.
“워, 워메, 도련님……! 아씨……!”
퍽, 퍽. 단단한 몽둥이가 Y을 강타할 때마다 나는 소음에 등골을 타고 서늘한 소름이 돋았다. Y의 신음이 새어 나올 때마다 몸을 움찔거리며 울먹거리던 D S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졌다. 하루아침에 내몰린 낯선 처지가 그저 공포스럽기만 했다.
“윽, 윽, 억, 컥…….”
통증으로 일그러진 Y의 얼굴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고통을 참기 위해 힘주어 문 입술에서 피가 배어 나왔고, 혹여 제 누이가 자신을 구하려다 관기가 되겠다 할까 곧 죽어도 제 눈은 마주치려 들지 않는 모습이 S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그만, 그만하시오!”
S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듯 외쳤다. 이 이상 제 동생이 모질게 맞는 모습을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딱딱한 몽둥이가 Y의 몸을 내리치며 나는 소리, Y이 억누르는 신음, 고통으로 엉망이 된 얼굴, 허공을 뿌옇게 메운 흙먼지. S는 이 모든 것을 목도한 제 눈과 귀를 당장이라도 뜯어내 버리고 싶었다. 끔찍한 감각들이 전신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S의 고성에 행수가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행수의 그 작은 움직임 한 번에 창밖에서 Y을 마구 매질하던 장정들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아픔을 삭히고 있던 Y이 더듬더듬 눈을 들어 올렸다. 창가에 선 제 누이가 저를 보며 울고 있었다.
“내 동생을……, 풀어주시오.”
S의 새카만 눈동자가 젖어 들었다. Y이 맞붙이고 있던 입술을 떼자 거친 호흡이 터져 나왔다. 안 돼, 안 되오, 누님. 저들의 요구 따위 들어줄 필요 없소. 누님이 대체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한단 말이오.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다. 제 몸을 둘둘 만 멍석만 아니었어도, 방금까지 제 몸을 자비 없이 마구 내리친 몽둥이만 아니었어도, 이곳에 오지만 않았어도, 아버지가, 그리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가시지만 않았어도. Y이 멍하니 창 안쪽의 S를 바라보았다.
“내……, 시키는 대로 할 터이니.”
S가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손을 올려 제 가슴팍을 두드렸다. S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던 D가 홀로 울음을 삼켰다. 그러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감출 방도는 없었다.
기생만은 절대 되지 않겠다고, 사흘 밤낮을 수치목에 묶여있었는데. 저를 향해 그 누가 무어라 떠들어도, 실은 기생이 되지 않은 양반가의 여식이라 여태 당당하고 떳떳할 수 있었던 것인데.
“내 동생은……, 살려주시오.”
갈무리되지 못하고 잔뜩 흐트러진 숨이 S의 간절한 목소리에 뒤섞여 나왔다. S의 말을 들은 Y이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이 무력하고 무능한 처지로는 제 누이를 구할 방도가 없었다.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파르르 떨리는 S의 치맛자락 소리를 들으며, Y이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戀慕之情
三
w. 목화
“에구머니나, 뭣이여? G이라믄, 우리 나리 마님 역적으로 모함한 그 육시럴 놈 아니다요?”
D의 목소리가 뒤집혔다. 두 눈이 등잔만 해져서는, 당장이라도 춘화관 안쪽에 있는 제 아씨에게 달려가 사실을 고해바칠 기세였다. 찬 겨울 공기에 D가 말을 쏟아낼 때마다 뿌연 입김이 터져 나왔다. 충격으로 얼굴이 하얗게 질린 D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던 터라, Y은 애써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 그놈이다. 그놈이 우리 집안을 멸문한 것도 모자라 이젠 우리 누이까지 욕보이려 한단다,”
“워메, 시상에 그런 쳐죽일 놈이!”
이를 악문 채 분노에 떠는 D를 앞에 두고, Y이 두 주먹을 힘주어 쥐었다. 장정들에게 멍석말이를 당했던 탓에 여전히 몸 여기저기가 욱신거렸고, 제 누이는 저를 살리고자 그리 단호히 거부했던 기생이 되길 자처했다. 이 이상 춘화관에 머물러 보았자 제 누이는 온갖 남자들에게 욕보일 것이며 자신은 누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허덕여야 할 게 불 보듯 뻔했다.
“그나저나, 참말로 아깝게 되었다. 어째 하필 좌랑 어르신이당가?”
“무슨 말이오? 좌랑이라니?”
“G 그 작자 말이여. 니 누이가 오늘 그 양반이랑 초야를 치른단다.”
낯설어할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았으니 춘화관의 종노릇에 익숙해지는 것쯤이야 아무렇지 않았다. 이른 아침부터 아버지께 문안 인사를 드리는 대신 저와 같은 방을 쓰는 행랑아범과 춘화관 곳곳을 쓸고 닦았다. 그러다 우연히도 근처를 지나던 제 누이를 발견하면 운이 좋은 것이었다. 춘화관의 기생에 알맞는 차림새를 한 S를 본 행랑아범이 선녀네 뭐네, 하고 말을 얹으며 G이 그를 노린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차라리 이렇게라도 알게 된 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
Y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제 아버지가 G의 칼에 맞아 싸늘한 주검이 된 채 앞마당에 늘어져 있던 모습이 여전히 뇌리에 생생하게 박혀 있었다. 감히 윤가(家)를 멸문시키고 윤가의 자제였던 자신과 제 누이를 이리 욕보이다니, 도저히 용서가 가지 않았다. 제 누이마저 그의 음험한 손바닥 위에 올려보낼 순 없다. Y은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만 했다.
“그래서 말인데, D 네가 좀 도와줘야겠다.”
“지가요? 지가 어떻게라……?”
Y의 낌새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D의 얼굴 위로 불안감이 스몄다. Y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 계획을 제 입으로 D에게 말하는 것조차 제 동생처럼 아끼던 아이에게 못 할 짓을 하는 것 같아 속이 쓰렸으나 이외에 S를 구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Y이 조심스레 D의 몸을 당겨, 그 귓가에 대고 제 계획을 속삭였다. 대단한 설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장황한 준비가 필요한 일도 아니라 D의 귓가에 속삭인 말은 불과 몇 마디도 되지 않은 짧은 문장이었지만, D는 Y의 계획을 듣자마자 그 자리에서 펄쩍 뛰며 허억, 하고 숨을 들이켰다.
“엄마야, 그러다 들키면 경을 칠 틴디요.”
“안다, 이 모든 것에 뒷감당은 고스란히 네 몫이 될 테지. 그래서 너한테 안타깝고 미안할 뿐이구나.”
D의 새카만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Y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가능만 하다면 차라리 D는 먼저 먼 곳으로 보내놓고 제가 그 자리에 대신 들어가 누이를 구해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 소중한 이들을 더 이상 고통받게 하고 싶지 않은데, 결국 하나를 구하려니 다른 하나를 희생시켜야만 하는 꼴이 이토록 모순적일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해줄 이는 너밖에 없으니. 어쩌냐, 누이가 G한테 능욕당하는 것만큼은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야, 그라지요…….”
D가 고개를 느리게 주억거렸다. 누가 듣기라도 할 새라,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제게 간절히 부탁해 오는 Y의 모습은 D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언제나 당당하고 밝던 도련님이었다. 윤가(家)의 장남, Y은 한낱 몸종인 D에게 이리 간절히 부탁할 일도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되는 신분이었다. D가 손을 벌벌 떨었다. 자신이 귀한 아씨와 도련님을 우선해야 하는 일개 몸종이란 사실은 그 누구보다 제가 가장 잘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저 홀로 화를 입게 될 거라는 결말에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두려워지는 것도 어쩔 수가 없는 일이라.
부탁한다, D. Y이 성큼 다가와 D의 두 손을 꼭 붙들었다. 커다란 두 개의 손이 시린 겨울바람에 빨갛게 얼어있던 D의 손을 소중하게 감쌌다.
“우리 누이를 꼭 구해다오. 제발 부탁한다, D. 응?”
당신이 그렇게까지 부탁하는데 내가 거절할 길이 달리 무엇이 있을까. D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아씨와 도련님만은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나가야 했다. 피투성이가 된 제 육신을 즈려밟고서라도, 그들은 살아남아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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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감기는 비단은 이루 말할 것 없이 고왔다. 집에서 입던 것보다는 못 하더라도 좋은 옷감으로 만든 것이 티가 났다. 반질거리는 비단 위, 한땀 한땀 수놓인 금 자수에선 장인의 정성이 가득 묻어났다. 고작 기생이 입는 옷에도 이리 최선을 다하는구나. 아낙과 기생의 손에 다듬어지는 옷매무새를 내려다보며 S가 자조했다.
“아이고매, 참말로 곱디 곱구나잉.”
S에게 옷을 입혀주던 기생이 헤벌쭉 웃으며 감탄했다. 차림새가 화려하기로는 한창 단장 중인 S보다 이미 가채까지 완벽히 갖춘 제 쪽이 훨씬 더 했으나 그는 확실히, 얼굴이 고우니 옷의 맵시가 더욱 살아난다는 말의 뜻을 체감하는 중이었다. 춘화관에서 일을 하며 빼어난 미모의 기생들쯤이야 수두룩하게 보아왔으나 그 중에서도 S만큼 귀티가 나고 고운 얼굴은 듣도보도 못했다. 역시 양반집 애들이 다르긴 한가, 싶다가도 여태 춘화관에 들어온 많은 몰락 가문 출신 기생들을 떠올리곤 타고난 미모 앞에서 출신 따위 무용하구나, 싶었다.
“에휴, 곱디고우면 뭣헌다요. 그래봤자 천하디천한 기생년 팔자, 술을 따르라, 그럼 술을 따르고. 몸을 따르라, 그럼 몸을 따르고.”
곁에서 S의 앞으로 준비되어 있던 장신구를 만지작거리던 다른 기생이 투덜거렸다. 꽃이 무수히 수 놓인 치마도, 목이 뻐근할 정도로 묵직한 가체도 질리도록 익숙해져 버린 이였다. 겉보기에 아무리 찬란하다 한들 그 속까지 그럴 순 없는 노릇이라. 제 의지는 이미 일찌감치 길바닥에 내다 버리고 남들이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며 사는 삶에 퍽 진절머리가 나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입적도 안 한 아를 어찌 초야까지 치르게 한다요.”
안 그래도 기생이 되기 싫다 고집을 부리던 S를 앞에 두고 온갖 불만을 늘어놓는 게 마음에 걸렸던 건지, 제 동료의 자조 섞인 불평을 듣던 기생이 서둘러 화제를 바꾸었다. S의 저고리 고름을 매어주던 아낙을 향해 몸을 기울이며 묻는 얼굴에 적지 않은 원망이 묻어있었다. 천한 기생년 팔자라 한들, 이곳에도 순서와 절차가 있는 법인데. 춘화관에 막 들어온 아이를 입적도 시키지 않고 초야를 치르게 한다는 건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아따, 성님. 상대가 누구요. 그 승질 드럽다는 G이 아녀라.”
한숨 섞인 불평을 늘어놓던 기생이 재빨리 제 동료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것도 모르냐는 듯, 눈에 힘을 주고 호들갑을 떠는 목소리가 꽤나 격양되어 있었다.
‘……G?’
그리고 그 순간, 이미 제 신세에 체념해버려 제가 입적이 되었든 말든, 초야를 치르든 말든 내내 무념무상의 상태로 일관하던 S의 귀에 선명하게 걸리는 이름 세 글자가 있었다. 제 옆의 기생들을 돌아보는 시선에 경악이 어렸다.
“그 인사가 한 번 지랄을 떨면 또 누구 목이 날아갈지도 모르는디. 오죽허면 우리 행수 어르신께서두 그놈 성질맨큼 안 건드리려고 그리 애를 쓰것소. 안 그요?”
속도 모르고 입을 나불대는 기생들의 대화에 S의 옷을 만져주던 아낙이 얼굴을 찌푸렸다. 갖은 애를 써 비밀에 부치던 소식이었는데, 눈치도 없이. S가 기생들로부터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 어렵사리 단념시켜 놓은 S가 이제 와서 다시 쓸데없는 고집을 부렸다간 여간 난처해지는 게 아니라. 아낙이 기생들을 향해 버럭 호통을 쳤다.
“아따, 그놈의 주둥아리! 고만 처닫고 나가 봐야.”
난데없이 소리를 내지르는 아낙의 반응을 날벼락이라고 여긴 것인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일제히 저를 바라보는 기생들에 아낙은 속이 천불이 났다. 쳐다보긴 뭘 쳐다봐, 이미 그러고 있을 시간에 발바닥에 불이 나게 뛰쳐나가고도 남았을 것이다.
“아, 언능!”
아낙이 다시 한번 기생들을 재촉했다. 가라앉지 않은 아낙의 큰소리에 갑자기 왜 저러냐는 듯 입을 비죽이던 기생들이 주섬주섬 몸을 일으켜 방을 빠져나갔다.
‘G이라고.’
옆에서 고성이 오가든 말든, S는 이미 제 머릿속의 이름 석 자에 온 정신을 빼앗긴 후였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기생들이 말하던 ‘입적도 안 된 아이’, ‘G과 초야를 치르는 기생’이 저를 말하고 있음이 분명해서. 기생들의 대화를 하나하나 되짚어보던 S는 눈앞에서 살랑이던 분홍빛 치맛자락의 잔상이 채 가시기도 전에 황급히 아낙을 붙잡고 다그쳐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G이라니? 설마, 내가 그자와 초야를 치른단 말이오? 지금 그런 말이오?”
S의 언성이 높아졌다. 기생이 되어야 한다면 그렇겠노라 했다. 생채기 하나 없던 제 몸에 흉터를 새기든, 제 몸을 멋대로 치장하든, 다 너희 좋을 대로 하라 내버려 두었다. 기생들의 말대로, 술을 따르라 하면 술을 따르고 몸을 따르라 하면 몸을 따르라는 말에 순응하는 것이 전부일 거라고 생각했으니 그랬다. 그러나 제게 그리 명하는 이가 제 아버지를 무참히 살해한 G일 것이라는 상상은 해본 적도 없었다.
“……누굴 탓하것냐. 이게 다 네년이 박복한 팔자라 그런 거지.”
제 팔을 단단히 붙들고 다그쳐 묻는 S를 향해, 아낙이 기어이 우물거리던 말을 토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과도 같은 소리에 할 말을 잃은 S를 두고 아낙은 S의 시선마저 마주치길 피하더니, 이내 에휴, 하는 한숨 소리와 함께 황급히 자리를 피해 방을 빠져나갔다.
“……허, 말도 안 돼.”
S가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토했다. 동그란 두 눈에 그렁그렁한 눈물이 고였다. 애써 담담히 다잡고 있던 마음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G이라니. G이라니……!”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소식을 들은 황당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억누르고 있던 분노가 단전에서부터 끓어올랐다. 앞니로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자 비릿한 쇠 맛이 혀끝을 타고 전해졌다.
“―G 네 이놈!”
“아버지!”
서늘한 겨울바람을 타고, 제 뺨에 불에 덴 듯 뜨거운 무언가가 튀었던 감각이 여전히 생생했다. 그때 제 비강을 가득 채우고 들어오던 비릿한 혈향은 지금 제 입 안에 퍼지는 것과 비슷한 류의 것이었다. 힘없이 쓰러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놀라던 저를 향해 비열한 미소를 짓던 G의 낯짝이 떠오르자 눈앞이 아득했다.
허억, 헉. S의 호흡이 가빠졌다. 다른 이면 몰라도, 그놈의 손에 유린당하는 일은 절대 있어선 안 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눈가에 고여있던 눈물이 툭, 떨어졌다.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S의 눈에 방 한쪽, 함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장신구들이 들어왔다. 색색의 노리개와 반짝이는 비녀가 가지런히 놓여있는 것은 일각 전, 제 몸을 치장해주러 들어왔던 아낙과 기생들이 가지고 들어온 것이었다.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난 S가 함이 가득한 창가로 다가가 커다란 옥이 박혀 있는 은비녀 하나를 집어 들었다. 고운 손에 가득 찰 정도로 커다란 비녀는 묵직했고, 잘 갈린 끝이 뾰족했다. 비녀를 쥐고 스스로 목을 찌른다는 발상은 해본 적도 없었지만, 벼랑 끝에 몰린 S로서는 제 손에 들린 비녀가 최선의 선택이었다. S가 비녀를 힘주어 쥐었다. 굳은 결심을 한 채 제 목을 겨누어 비녀를 치켜든 그 순간이었다.
“―아씨, 아씨!”
방문 너머에서 들려온 자그만 목소리에 S가 퍼뜩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음성과 기척이 느껴졌다. 얇은 한지가 발린 문 너머로 흐릿한 그림자가 일렁였다. S가 대꾸도 없이 멍하니 문가를 주시하고 있자 벌컥, 문이 열리며 D가 열린 문틈 사이로 고개를 불쑥 들이밀었다.
“쇤네구먼유.”
D가 목소리를 낮춘 채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걸어 잠갔다. S는 치켜들었던 날카로운 은비녀를 치마폭에 감추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D를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기생의 길을 걸어야 할 제가 또다시 괜한 잡생각을 하고 들까, 하는 우려 덕이었는지 춘화관의 행수는 D와 Y을 S의 곁에 오지 못하도록 했다. 듣기로는 D도 졍윤과 비슷한 잡일을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제가 머무는 기생들의 숙소까지는 무슨 수로 들어온 것인지. 난데없는 D의 등장에 놀라기도 잠시, 이렇게까지 제게 얼굴을 비춘 D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닐까 슬금슬금 걱정이 밀려왔다.
“D, 네가 여긴 어찌 들어왔느냐.”
서둘러 눈물을 삼키고 침착함을 가장했지만, D는 S의 말에 답할 새도 없이 돌연 제 저고리의 고름을 풀기 시작했다. 아무리 친밀한 사이라 해도, 갑작스레 제 옷을 벗어젖히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S가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뭐 하는 것이냐?”
“시간이 없어라. 시방 뒷문 밖에서 도련님이 기다리고 계싱께, 어서 벗으쇼, 아씨. 예?”
거침없이 제 옷을 풀어 헤치던 D는 이내 빠르게 제 저고리를 벗어 S에게 들이밀었다. 여전히 S의 물음엔 제대로 된 답도 내놓지 않은 채 제 할 말만을 우르르 쏟아내는 D는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양, 성급해 보이기만 해서. S가 멍하니 D를 내려다보았다. 대체 이 아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를 하기가 힘든 듯싶었다.
“아, 지 옷으로 갈아입고 도망치시랑께요!”
결국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팍을 탁탁 두드리며 내뱉은 D의 작은 외침에 S가 놀란 듯 짧은 숨을 들이켰다. 어마어마한 말을 내뱉는 D의 낯이 이미 홀로 모든 결정을 내려버린 듯 결연하여 S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대체 이게 다 무슨 소리냐! 도망을 치라니. 허면 너는? 내가 도망치면 너는 어찌하고?”
“지야 매질 몇 대로 끝나지만서도, 아씨는 그게 아니자녀라. 시상 천지 웬수 놈한테 그런 능욕까지 당하면 안 되지라.”
“……D.”
알고 있었구나. D의 의중을 알아챈 S의 호흡이 파르르 떨렸다. 제가 조금 전 기생들의 대화에서 겨우 엿들은 일을, D와 Y은 한발 앞서 알고 있던 것이었다. 그래서 저들끼리 힘도, 용기도 없는 자신을 대신하여 저도 몰래 저를 빼돌릴 모의를 한 모양이었고.
하아, S를 앞에 둔 D의 숨도 떨렸다. 제가 방에 들어오며 S가 치맛자락에 황급히 감춘 비녀를 보았다. 죽으면 안 된다. 죽어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고, 당신은 겨우 이런 곳에서 죽을 인물이 아니다. S를 마주 본 이제야 D는 결심이 굳어졌다. 잔뜩 긴장한 듯, 빳빳이 굳은 어깨를 하고서도 S의 등을 떠미는 말은 끝도 없었다.
“살아남아야 한당께요. 살아남아야 돌아가신 나리 마님 억울한 죽음도 밝힐 것 아니것소. 살아남아야, G 저 웬수 놈한티 복수도 할 수 있는 것 아니것소?”
D의 앞에서 애써 삼켜냈던 눈물이 다시금 눈앞을 흐리게 했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D를 품에 가득 끌어안는 S의 두 뺨을 타고 맑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D…….”
저고리를 벗고 겨울 한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던 살갗에 S의 부드러운 비단옷이 닿았다. 이럴 시간이 없는데, 저를 힘주어 끌어안는 품이 너무나 따뜻해서. D가 목구멍 안쪽에서 차오르는 울음을 꾹 억눌렀다.
“D 네가 누님과 옷을 바꿔입고 누님 행세를 해주어라. 그 사이 네 옷을 입은 누님은 내가 춘화관 밖으로 데리고 도망치마.”
제 귓가에 그렇게 속삭이던 Y의 음성 역시 저와 다를 바 없이 떨리고 있음을 D는 알았다. 천성이 맑고 따뜻하여 가족과도 같았던 저를 이런 곳에 홀로 버려두고 가야 하는 어린 남매 역시 마음이 편할 리 없다는 사실을 D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 자신을 친동생처럼 아껴주던 두 사람이었다. 그러니 지금 느끼는 그들의 온정을 마지막으로, 여태 받았던 은혜를 제 한 몸 바쳐 갚을 때가 온 것뿐이다. D는 그렇게 생각했다. S가 아무리 저를 버려두고 가지 않겠다 버티더라도 자신은 제 아리따운 아씨를 이곳에서 떠나보내야만 한다. D가 저고리를 쥔 손에 힘을 단단히 주었다.
제 등을 보듬는 부드러운 손길에 애써 굳게 먹은 마음이 자꾸만 스르르 풀어지려 했다. 저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린 S의 흐느낌을 들으며 D가 애써 목소리를 높였다.
“그라고……, 또 살아남아야 쇤네도 다시 거두어주실 것 아니것소. 긍께 죽음 안 되어라. 죽으믄 암것도 아니랑께요.”
말 사이사이를 자꾸만 비집고 나오려는 울음을 삼키느라 가슴께가 아릿했다. 애써 괜찮은 척, 밝은 목소리를 내려는 D의 속을 다 알 수밖에 없는 S의 속도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자신과 Y이 춘화관을 떠나고 나면 이 작은 몸 하나로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막막한 일들을 모르지 않았으니 더욱 그랬다.
“알것소?”
“D…….”
“……아씨…….”
D의 의연한 물음에도 S가 참지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터뜨리자, 결국 D도 두 팔을 힘껏 뻗어 S의 가녀린 몸을 강하게 끌어안으며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가슴이 아팠다. 한순간에 무너져버린 일상도 모자라, 그 혼란 속에서도 겨우 살아남은 제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하는 현실이 너무나도 가혹했다. 두 사람은 그칠 줄 모르는 눈물로 서로의 어깨를 적셨다. 더없이 당연하게 당부한 재회의 약속에 기약이 없음을 아는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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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저무는 마을 위로 어스름한 땅거미가 드리웠다. 어느덧 동지가 코앞이었다. 해가 하늘에 떠 있는 시간도 점차 짧아지는 나날들에, 낮 동안 마을 곳곳을 오가며 북적이던 사람들이 일찌감치 어둠과 추위를 피해 집 안으로 모습을 감춘 후였다. 길을 오가는 것이라곤 드문드문 나무가 한가득 쌓인 지게를 지고 걸음을 서두르는 양민과 마을 순찰을 도는 관아의 포졸 두어 명, 술과 노름을 찾아 몰래 걸음 하는 양반들이 전부였다.
인적이 드문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 손에 쥔 뽀얀 복숭아를 허공으로 던졌다 받길 반복하며 W은 달빛이 닿지 않는 담벼락 아래에 기대어 있었다. 와삭와삭, 입 안으로 퍼지는 복숭아는 단맛이 모두 가셔 텁텁한 것이었다. 혹은 단물이 충분히 배어 나옴에도 그 맛을 느낄 여력이 남아있지 않은 쪽이거나.
‘역적으로 몰려 몰락한 대갓집 여식이라…….’
아주 잠깐, 한눈을 판 사이 수치목에 묶여있던 S를 놓친 W은 O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을 곳곳을 활보하고 다니며 마을 사람들로부터 ‘수치목에 묶인 양반가 출신 계집’의 이야기를 주워들었다. 좌랑 G이 그의 오랜 친우 K가 역모를 모의하고 있던 것을 알아내 나라에 그 사실을 고하고 윤가(家)를 멸문시켰다는 것이었다. K는 그 자리에서 G의 칼에 죽고, 그 집 자제들은 여종 하나와 함께 춘화관에 팔려 왔다고 했다. 그리고 그 중 K의 장녀였던 S가 그 과정에서 관기 신분으로 전락해, 그리 목을 빳빳이 치켜들고 기생이 되지 않겠노라 호언장담을 했다지.
‘왜 그리 고집을 부렸는지 대략 이해가 가는군…….’
이 추운 날에 옷을 벌거벗겨져 며칠씩이나 수치목에 묶여있던 여자애. W이 굳이 인간을 가장하고 이것저것 캐묻지 않더라도 마을 사람들이 알아서들 떠들고 다니는 이야깃거리였다. 장터에만 나가도 춘화관의 S를 입에 올리는 이들은 많았다. 수치목에 묶여있던 것을 보다 못한 춘화관의 행수가 거두어들이고, 그렇게 쇠고집을 부려대던 S는 결국 운명에 순응해 기생이 되기로 했다던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자면 대략 그러한 흐름이었다.
‘그 성정을 보면 운명에 순응했다기보다, 그러지 않고서는 못 배길 상황이 왔던 것이겠지만.’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도와달라 애걸하다가도, 춘화관의 대문은 넘지 않겠다며 눈에 불을 켜고 반항하던 모습은 잊으려 해야 쉬이 잊히지도 않았다. 그렇게 기세등등한 모습이 대체 어쩌다 나온 것인가 했는데, 출신이 그러하고 배경이 그러하다면 어렴풋이 이해가 가는 것 같기도 했다.
W이 손에 쥐고 갖고 놀던 복숭아를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수치목에 묶여있던 S의 모습이 사라졌길래 다른 인간들이 아이를 돕고자 거두어 간 것이 아닌가, 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내용을 보니 S의 입장에선 마냥 좋아하기만 할 상황도 아닌 모양이라 입 안이 썼다.
“그래도 길 한복판에서 꼼짝없이 얼어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W이 입 안에 가득 든 복숭아를 우물거리며 중얼거렸다. 인간의 명줄은 극히 짧아서, 제 체감상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아이가 눈 깜짝할 새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이 되어 죽고는 한다. 심지어 그렇게 죽는 것은 호상이지, 인간이란 또 얼마나 나약하여 온몸을 덮는 덥수룩한 털도, 강한 발톱이나 날카로운 이빨도 없어 외부의 공격에 취약하기 짝이 없는 몸이었다. 팔자가 좋구나, 하는 개체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영원불멸한 삶과 끝이 없는 젊음을 원했으니 사실 인간들은 그들이 느끼기에도 꽤 짧은 생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 모양이었다.
죽는 것보다야 사는 것이 훨배 낫다. 어차피 기구한 인생이라 자조해도 살아만 있다면 언젠가 갱생할 기회는 필히 찾아오기 마련이다. 꽃다운 나이에 재밌는 것이 이리 많은 넓은 세상을 두고 비참한 몰골로 길거리에서 얼어 죽다니. 그것이야말로 여태 살아온 생을 부정하는 최악의 결말이 아닌가.
‘그 애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가 죽은 것도 누명이라 하였고. 아버지만 죽었을 뿐 제 동생과 아끼는 몸종까지 셋은 사지 멀쩡히 살아남았으니 잘만 한다면 충분히 전과 같은 행복을 누릴 수도 있을 텐데.’
보기에 퍽 어여쁜 얼굴이었으니 그 미모에 반한 양반집 도련님이 S를 데리고 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여자로 태어났다면 시집만 잘 가도 팔자가 피는 시대였다. 저라면 고작 이런 일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여건이 가득했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이 제멋대로 떠드는 것과 다르게 W은, S가 춘화관 안에서도 제 뜻을 굽히지 않고 두 눈을 부릅뜬 채 호시탐탐 그 ‘기회’를 노리고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W이 손에 들고 있던 복숭아를 마저 씹어 삼키고 바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밧줄을 꺼내 들었다. S를 수치목에 묶어놓았던 그 밧줄이었다. 산속에서 온갖 나무와 바위를 타는 제 손에도 꽤 거칠게 느껴지는 밧줄에 묶인 채 피를 흘렸던 아이는 얼마나 아팠을까. 상황을 뻔히 다 알면서도 감히 개입해 도울 수 없는 제 신세를 한탄했다. O의 말대로 인간사에 섣불리 개입해서는 안 됨을 저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S의 신세가 아무리 처량하다 한들 목숨의 위협이 가신 현 상황에서 앞으로의 일들은 S 혼자만의 힘으로 해결해나가야 한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던 탓이었다.
“자꾸 인간의 운명에 개입하려 들지 말게. 자네하고 인간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가 있다는 걸 명심해.”
O의 충고가 뇌리를 맴돌았다. 낮에야 그 말을 귓전으로도 안 듣는 듯 굴었으나 사실 W 역시 O의 말에 아주 부정하고 드는 입장도 아니었다. 천년 묵은 여우인 자신과 고작 앞으로 몇십 년을 살다 명을 다할 인간은 가까워지려 해야 가까워질 수도 없는 관계였다.
“그러니 체념하는 것이 맞을까…….”
에휴. 제 손에 들린 애꿎은 밧줄만 하염없이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푹 내쉬던 그때였다. 끼익, 끼이익! 어둠이 내려앉아 고요하던 산속에,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나무 사이를 정신없이 오가는 새들의 모습에 W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무슨 일이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피는 W의 기다란 머리칼과 옷자락이 서늘한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렸다. 주변을 가득 채운 나뭇가지와 풀들이 이리저리 불안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불길한 기운이 먼 곳으로부터 빠르게 기어와 W의 발목을 휘감았다.
“……숲이 소란스럽구나.”
W의 미간이 좁아졌다. W의 예민한 청각 끝에 잔뜩 성난 장정의 발소리 여럿이 어렴풋이 닿았다. 산이, 나무와 새와 풀벌레들이 불안감에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W의 눈이 주황빛으로 타올랐다. 그의 주변으로 빠르게 모여든 푸른 빛무리가 빠르게 산 곳곳으로 흩어졌다. 머리 위 어지러이 뻗은 나뭇가지를 올려다본 W이, 이를 악물고 바닥을 강하게 디뎌 뛰어올랐다.
-
나무가 울창하게 잎을 뻗은 한밤중의 산은 달빛조차 쉬이 새어들어 올 수 없었다. 코앞의 나무조차 알아보기 힘든 암흑 속에서 거추장스러운 치마를 입고 달리는 일은 결단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D와 바꿔치기를 해야 했으니 D의 옷을 대신 입고 나오긴 했지만, 이럴 줄 알았다면 남장을 하고 나오는 게 나을 뻔했다.
아! S가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며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흙 위로 튀어나온 나무뿌리와 곳곳에 솟아난 바위들로 울퉁불퉁한 산길에 발목이 접질린 모양이었다.
“누님, 괜찮아요?”
발목을 타고 올라오는 아릿한 고통에 얼굴을 찌푸리고 있자, S의 손을 붙잡고 앞장서 가던 Y이 재빨리 S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 추운 계절에 수치목에 묶여 며칠이고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던 S나, 멍석말이를 당했던 Y이나 그 어느 쪽도 몸이 성치 않았다. 어렵사리 사람들의 눈을 피해 춘화관을 빠져나왔지만 그대로 도주하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자신들의 부재를 눈치챘는지 저 멀리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기척과 함께 선명한 횃불의 빛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D…….”
자신과 Y의 부재를 들켰다면, 저를 대신해 춘화관에 앉아있던 D는 과연 무사할까. 다른 수가 없어 떼어놓고 오긴 했지만 춘화관에서 멀어지는 와중에도 자꾸만 D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들려오는 것만 같아 S는 선뜻 발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런 S를 붙들고 등을 떠미는 것은 그의 곁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던 Y이었다.
“시간이 없소, 누님! 어서 일어나야 해요. 계속 가야 한다고요.”
자. Y이 S의 앞에 제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의 입가에서 쉴 새 없이 뿌연 입김이 터져 나왔다. 뼈가 시릴 정도로 추운 겨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첩첩산중. 이대로 이곳을 벗어나더라도 살길이 나올지 확신할 수 없었다.
“살아남아야 한당께요. 죽으믄 암것도 아니랑께요.”
그러나 이곳에서 도망치길 그만두면 죽는다. 머릿속에서 D의 울먹이는 음성이 메아리쳤다. 그래, 살아야지. 살아서, 너를 구하러 다시 돌아와야지. S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두 손에 쥐어 잡히던 차가운 겨울 산의 흙무더기를 내려놓고, 제 앞에 내밀어진 Y의 단단한 오른손을 붙들었다.
“가자.”
차갑게 얼어 붙어있던 두 사람의 손이 맞닿으며 옅은 온기가 생겨났다. 재빨리 몸을 일으킨 두 사람이 다시금 산속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비틀거리는 S를 Y이 부축한 채로, 두 사람은 서로를 의지해 걸음을 재촉했다.
“여기오!”
“이쪽이다!”
기다란 장대에 불을 붙이고 산 곳곳을 휘젓던 장정들이 분주히 거리를 좁혀왔다. 험하고 어두운 산길은 그들에게도 예외 없는 조건이었으나 그들과 어린 남매가 다른 점이 있다면 첫째, 장정들에겐 횃불이라는 빛이 주어져 있다는 점이었고 둘째, 부상이 없는 그들의 몸은 울퉁불퉁한 산길 따윈 훌쩍훌쩍 넘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튼튼했다는 것이었다.
춘화관은 관청에 속한 기생들이 많았다. S 역시 관기의 신분이었고.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수치목에 묶인 S를 목격한 이상 그 마을에서 S의 존재를 알고도 숨겨 줄 이는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터였다. Y은 S를 데리고 춘화관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지길 바랐다. 옆 마을은 산 하나만 넘으면 나오는 곳이었지만, 그곳에 안주할 생각은 없었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먼 곳으로, 자신과 S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인적 드문 마을로 가 자리를 잡은 후 D를 구할 방도를 알아보며 복수의 칼날을 갈 수 있길 원했다.
“앗!”
다듬어지지 않은 길을 걷는 일은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침마다 집안의 종들이 깨끗이 빗질해 놓은 앞마당, 그 이외의 길이라 해봐야 사람들이 꾹꾹 밟고 다져놓은 마을 길이 전부였다. 치맛자락과 손끝에 스치는 풀들의 거친 감촉조차 익숙하지 않았으니 안 그래도 힘이 풀린 두 다리가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누님!”
발을 헛디뎌서, 돌부리에 걸려서, 신발이 땅에 미끄러져서. 장정들의 추격을 피해 도망치는 와중에도 몇 번이고 넘어져 무릎과 발목, 손바닥이 쓰라렸다. 이 추운 날씨에 땀이 비 오듯 흐르며 자꾸만 눈앞이 흐려졌다. 체력적으로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더는 Y의 부축을 받아 일어설 수도 없었다. 발목으로부터 느껴지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S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누니임. 애가 타는 듯, Y의 말끝이 길게 늘어졌다. S가 제 앞에 몸을 숙여 자신을 부축하려 들던 Y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제가 넘어졌다는 이유로 Y까지 멈춰 선 것도 이로써 몇 번째인지 몰랐다. 이대로는 이도 저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가거라. S가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Y, 너부터 먼저 가거라.”
“무슨 말씀이오? 누님 두고 나 혼자 도망가서 뭘 어쩌라고!”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를 들은 Y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발아래, 차가운 땅으로 전해지는 진동이 점차 선명해져 갔다. 장정들이 자신들의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Y은 고개를 세차게 내저으며 S의 말을 완강히 거부했다.
“나는 그리 못하오. 혼자 살아남느니 차라리 같이 죽을 테요!”
“내가 언제 죽겠다 했느냐? 난 나대로 몸을 숨길 터이니, 넌 너대로 도망치라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둘 다 개죽음당하고 만다.”
Y의 말에 S가 목소리를 낮춰 Y을 꾸짖었다. 동생의 발목을 잡는 누이는 되기 싫었다. 죽음을 코앞에 둔 삶이라면, 제가 마지막까지 지켜야 하는 것은 제가 너무나 사랑해마지않은 자신의 어린 동생이었다.
“그러니…….”
Y을 어르던 목소리가 잠시 끊어졌다. D, 네가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내린 결단은 무척이나 외롭고, 두렵고, 가슴이 시렸다. 그럼에도 눈앞의 너만 살 수 있다면 어찌 되든 좋다는 이 마음을 무시할 길이 없어서. 그래서 그랬구나. 그래서 네가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로도 날 떠나보냈구나. 지금쯤 홀로 춘화관에서 고통받고 있을 D가 떠올라 S가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흐느낌을 삼켰다. 제가 유약한 모습을 보이면 Y은 절대 자신을 두고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S는 다정하고 여린 제 동생의 심성을 잘 알았다. 두 눈에 힘을 주어 Y을 응시했다.
“그러니, 각자 살길을 찾아보자는 게야.”
“싫소! 아무리 그래도 누님 두고 나 혼자 갈 수는 없소.”
이별이 다가옴을 직감한 Y이 공포에 질려 외쳤다.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는 모습에 S의 마음도 함께 조급해져 갔다. 이곳에서 얼마나 시간을 지체했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어서 빨리 Y이라도 멀리 보내야 하는데, 도통 자신을 두고는 움직이려 들지 않으니. S가 가쁜 호흡을 가다듬으며 두 손을 뻗었다. S의 고운 두 손이 Y의 울먹이는 얼굴을 따스하게 감싸 쥐었다.
“제발, 누이가 시키는 대로 해주렴. 우리 둘 다 여기서 붙잡혀 버리면 아버지의 죽음이 너무 억울하잖니. D한테도 너무 미안하잖니. 응?”
“누님……!”
Y의 얼굴을 타고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애써 웃으며 자신을 안심시키는 누이의 얼굴을 다신 보지 못할 것만 같아 사지가 바들바들 떨렸다.
“그러니 이제 가거라. 네가 가야 나도 살 수 있으니 제발! 가거라, 응? 응?”
애써 입꼬리를 당겨 웃던 S가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는 힘껏 Y의 두 어깨를 밀어냈다. S의 손길이 미는 대로 힘없이 밀쳐진 Y이 그대로 차가운 흙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눈물로 젖어 든 Y의 새카만 두 눈은 제 누이의 말간 낯만을 애타게 좇았다. 꼭 살아있소. Y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입을 뗐다.
“세상 어디에 있든 내, 꼭 누이를 찾아갈 터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있소!”
Y이 물기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그 말은 아마 제 누이에게 신신당부하는 것이자, 저 스스로 반드시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다그치는 말이기도 했다. Y이 몇 번이고 반복하는 당부에, 제 동생이 드디어 저를 두고 갈 마음이 생겼음을 알아챈 S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어여 가. 어여 가거라!”
서둘러 손짓하며 자신을 보내는 누이를 홀로 두고 Y은 훌쩍이며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제 허리께까지 오는 높다란 수풀을 헤치며 Y은 그렇게 새카만 산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Y이 사라지는 마지막 뒷모습을 한없이 바라보던 S가 옷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욱신거리는 발목으로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운 S가 자신과 Y이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았다. 전보다 훨씬 더 가까워진 횃불의 일렁임이 고요한 산속에서 선명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S가 무언가 결심한 듯, 냉큼 제 저고리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어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D……, 미안하다.”
S가 중얼거렸다. S의 손에 들린 것은 몇 시진 전, D와 옷을 바꿔 입기 직전 스스로 명을 끊으려 치켜들었던 은비녀였다. 은비녀가 한껏 머금은 차가운 냉기는 소름 끼칠 만큼 서늘했으나 고작 그 정도로 S의 결심은 무너지지 않는 듯했다.
“난 여기까지인가보다. 그래도 Y이라도 살았으니, 그걸로 날 용서해주렴.”
비록 나는 이곳에서 죽지만, Y이 살았으니 D를 춘화관에서 빼낼 수 있을 것이다. S가 비녀를 단단히 고쳐 쥐었다. 이로써 모든 것이 끝난다. 제가 치욕스러운 일을 당하는 것도, 제 가족이 처참히 죽어나는 것도, 그들이 저 하나를 위해 희생하는 것도. 모든 것을 제 손으로 끝내는 순간이었다. 날카로운 은비녀를 쥔 S의 팔이 허공을 향해 높이 치솟았다.
그리고 그 순간, 어둠 속을 갈랐던 은비녀가 반짝, 푸른 빛을 반사해 빛났다. 그와 동시에 곧장 비녀를 제 가슴팍에 내리꽂을 기세로 팔을 뻗었던 S의 움직임도 허공에서 정지했다. 여름철 반딧불이와도 같이 느리게 허공을 유영하며 반짝이는 푸른 빛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던 S를 말리듯 그 주변을 맴돌았다. S의 동그란 두 눈동자가 그 빛을 따라 느리게 움직였다.
저 앞에서 다가오는 시뻘건 횃불은 여전한데, 제 주변을 따스하게 감싸는 푸른 불꽃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S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사방을 채운 푸른 빛들의 움직임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아름답다.’
죽음의 문턱 앞에 서서 헛것인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광경을 목도한 감상은 그랬다. 온몸에서 힘이 빠지고,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의식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비녀를 붙잡고 있던 팔이 바닥을 향해 떨어진 S는 그대로 까무룩 잠에 들고 말았다.
마지막, 어느 순간에. 그대로 고꾸라지는 제 몸을 단단하고 따뜻한 품이 다정하게 받아준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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