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샘플

[커미션 전문 샘플] - OUR

BOYNEXTDOOR RPS(상혁재현)+NCP 나페스 - BL+남매관 피폐 청춘물

글창고 by 모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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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미션 안내 :

RPS/나페스 작업물 샘플:

인물: 3인(1인 추가)

작업 기간: 2주(기본)

글자 수: 11,242자(10,500자 신청)

신청 타입: B. 키워드+짧은 씬


OUR

w. 목화

 

 

하교를 알리는 종이 울린 직후, 학생들이 일제히 교실을 빠져나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재현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매서운 기세로 쏟아지고 있는 빗줄기가 단단하게 잠긴 교실 창문을 요란스레 두드리고 있었다. 아직 5시도 채 되지 않았음에도 짙은 먹구름이 잔뜩 끼어 어두워진 하늘은 햇빛 한줄기 찾아볼 수 없었다. 발 빠른 아이들이 하나둘 학교 건물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창문 너머로 엿보였다. 저마다 알록달록한 우산을 쓴 채였다.

책상 위에 올려둔 가방을 연신 뒤적거리던 재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요 며칠 비가 왔다 안 왔다, 변덕스러운 날씨가 계속되길래 작은 접이식 우산을 꼬박꼬박 가방에 넣어 다녔는데. 어제 하굣길에 내리던 가랑비에 우산이 젖는 바람에 말려둔답시고 현관 앞에 펼쳐둔 것을 미처 다시 챙겨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가방 깊숙한 곳을 다 뒤져보아도 손에 걸리는 익숙한 감촉은 없었다. 큰일이네. 재현이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가 가실 생각을 않았다. 집까지 뛰어간다고 해도 족히 15분은 걸리는 거리였다. 가방 안에 든 각종 문제집과 노트 탓에 될 대로 되라며 비를 고대로 맞고 걸어가기도 어려웠다. 빗줄기가 굵은 것을 보아하니 우산을 사기 위해 교문 앞 편의점까지 뛰어간다 해도 이미 쫄딱 다 젖을 게 눈에 훤히 보이는데. 어떡하지. 재현이 걱정스레 창밖과 제 가방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명재현!”

그때, 드르륵하고 교실 뒷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불쑥 재현을 부르는 목소리가 텅 빈 교실에 울려 퍼졌다. 익숙한 음성에 곧장 뒤를 돌아본 재현의 시야에 뒷문에 서서 자신을 향해 손짓하는 상혁이 들어왔다.

“집에 가자. 많이 기다렸어?”

“상혁아!”

언제 그랬냐는 듯, 재현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좀 전까지 머릿속을 가득 메우던 온갖 걱정이 상혁의 얼굴을 보자마자 씻은 듯 사라졌다. 교실 문가에 서서 재현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웃고 있는 상혁은, 재현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사랑해 마지않는 그의 남자친구였다. 불 꺼진 교실에 오도카니 홀로 서 있던 재현이 유달리 저를 반가워하는 듯 하자, 상혁이 짙은 눈썹을 들썩이며 무슨 일이냐 묻는 듯 눈짓했다.

느지막이 종례가 끝났는지, 열댓 명 정도의 아이들이 복도로 쏟아져 나오는 것이 상혁의 뒤로 보였다. 마구잡이로 헤집어놓았던 제 가방의 지퍼를 서둘러 잠그고, 재현이 잰걸음으로 교실을 가로질러 상혁에게 다가갔다.

“나 우산 집에 두고 왔나 봐…….”

“나 우산 갖고 왔어, 내 거 쓰면 되지.”

“너랑 나랑 둘이서 집까지 네 우산 하나 쓰고 가자고?”

날씨가 저런데? 재현이 미간을 좁히며 운동장 쪽으로 난 교실 창문을 가리켰다. 여전히 빗줄기가 억셌고, 이젠 비바람까지 부는지 창문이 금바이라도 부서질 듯 덜컹거리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정말, 교복 위에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머리 위에 쓰고 빗길을 질주해야 할 판이었다.

“아니면 뭐……, 너 여기 기다리고 있어. 내가 교문 앞에 편의점 가서 우산 사 올게. 오늘 집에 빨리 가야 해?”

“그건 아닌데…….”

재현이 머뭇거렸다. 입술은 닷 발로 튀어나와서, 안 그래도 양 끝으로 내려간 눈꼬리가 더욱 축 늘어져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라도 된 것처럼 보였다. 요컨대 혼자 학교에서 날 기다리기는 싫다는 거구만. 어렵지 않게 재현의 속내를 읽어낸 상혁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창문 아래로 고개를 내밀고 있던 마른 나뭇가지들이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나풀거리고 있었다. 겨울을 코앞에 두고 있어 날도 추운데 비까지 쏟아지다니. 이런 날 길에서 헤매거나 주저했다간 감기에 걸리기 딱 좋을 것 같았다.

“……그럼 우리 집으로 갈래?”

“어?”

“저녁에는 비 그칠 거라고 했으니까 비 그칠 때까지만 우리 집에 있다 가. 오늘 가족들 집에 늦게 들어올 거야. 어머니는 할머니 댁 가셨고, 아버지는 교회 사람들이랑 약속 있다고 하셨거든.”

“너네 동생은?”

“걔도 오늘 놀다 온다던 것 같은데.”

상혁이 숏패딩 주머니에 있던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제 쌍둥이 동생 S에게 오늘 늦게 들어오는 것이 맞냐 확인을 하기 위해서였다.

정작 상혁은 별생각이 없는 듯 보였지만, 재현은 S에게 문자를 남기는 상혁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상혁의 부모님이 엄하시다는 사실은 이미 익히 들어 알고 있었고, 한술 더 떠 그 덕에 상혁의 부모님을 뵙거나 상혁의 집 근처에는 가 본 적조차 없었다.

연애 기간이야 짧다면 퍽 짧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상혁과 알고 지낸 시간을 포함하면 꽤 오랜 시간을 교류한 사이인데. 덕분에 상혁이 평소 지내는 집은 재현에게 호기심과 흥미로 가득한 미지의 구역이라. 예상치 못하게 불쑥 찾아온 기회를 그저 떠나보내기엔 조금 아쉬웠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교회의 목사인 상혁의 아버지가 조금 무섭기야 해도, 그냥 친구 정도로 둘러댄다면 그렇게 큰일이 날까, 싶기도 했고.

“얘 오늘 밤에 들어온대. 친구들이랑 저녁에 만나기로 했다네.”

마침 S에게서 답장을 받았는지 휴대전화를 흔들어 보이는 상혁의 낯에 큰 걱정이 없어 보인 것도 재현의 등을 떠민 데에 한몫했다. 어느새 복도에 가득 차 있던 상혁네 반 아이들이 건물 밖으로 빠지고, 서늘한 복도에는 빗소리만 가득 메아리 치고 있었다.

“진짜 가도 돼?”

재차 확인받는 재현의 커다란 눈은 마구 뒤섞인 걱정과 기대감을 담고 있었지만, 곧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이며 괜찮다고 답하는 상혁의 대꾸에 재현은 결정을 내린 듯 어깨에 멘 가방끈을 두 손으로 꼭 쥐어잡았다.

“……그럼 갈래, 너네 집.”

무언가 대단한 일을 결심한 듯 비장한 얼굴을 한 재현에, 상혁이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그렇게 진지해. 들켜도 그냥 날씨가 궂어서 같이 숙제하고 있었다고 하면 될 텐데. 귀여워 죽겠다는 듯, 재현의 머리를 손으로 마구 쓰다듬는 상혁의 눈꼬리에 눈물이 맺혔다. 그렇게까지 웃을 일이야? 그제야 제가 조금 유난을 떨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재현의 두 뺨이 슬그머니 달아올랐다.

“가자, 걸어서 10분이면 금방 가니까.”

상혁이 재현의 손을 잡고 앞장서 걸었다. 제 손을 붙잡은 상혁의 커다란 손이 따뜻해서, 재현은 목에 두른 목도리에 얼굴을 푹 파묻어 조금 전보다 훨씬 더 화끈거리는 제 얼굴을 숨겼다. 서늘한 복도에 가득 울리는 빗소리를 뚫고, 두 사람은 조금 들뜬 걸음으로 학교를 나섰다.

다행히 두 사람이 1층에 내려왔을 때, 교실에서 보았던 거센 바람은 조금 잦아들어 있었다. 다만 빗줄기는 여전히 굵어서, 입가에서 새어 나온 희뿌연 숨은 평소보다도 더 빠르게 허공으로 흩어졌다.

1층 로비를 빠져나온 상혁이 들고 있던 우산을 펼쳤다. 다행히 상혁이 들고 온 우산은 평소 재현이 들고 다니는 작은 접이식 우산이 아니라 기다란 장우산이어서, 두 사람이 어찌저찌 잘 달라붙으면 비를 쫄딱 맞는 일만은 피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우산을 머리 위로 올린 상혁이 재현을 향해 팔을 뻗었다. 건물 밖으로 나오니 더욱 생경하게 느껴지던 추위에 몸을 달달 떨고 있던 재현이 냉큼 상혁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단단하고 따뜻한 커다란 품이 꽤 익숙해서, 재현은 꽤 만족스러운 듯 배시시 미소 지었다.

“으악, 비 다 튄다!”

“나한테만 기울이지 말고 너도 우산 좀 써!”

상혁이 재현의 어깨에 팔을 둘러 재현을 꽉 끌어안은 채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우산으로 곧장 내리꽂히는 빗소리가 요란했다. 조금의 틈도 없이 딱 달라붙어 서로의 귓가에 대고 냅다 소리를 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도 당장 옆에서 말하는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우산 손잡이를 겹쳐 잡은 두 손이 차가운 가을비에 젖어 빨갛게 얼고 기다란 바지 밑단과 운동화가 순식간에 젖어 들었지만, 저들 외의 누군가가 개입할 수 없는 이 상황은 생각보다 훨씬 더 우습고 즐겁기만 했다. 깔깔깔,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웃음소리가 빗속을 뚫고 흘러나왔다.

수능을 앞둔 11월, 매서운 추위가 성큼 다가와 있는 날씨였다. 길가의 가로수들은 이미 가지 끝에 매달고 있던 알록달록한 잎들을 낙엽으로 죄다 떨어뜨린 후였는데, 끊이지 않고 내리는 장대비에 나무마다 두어 개씩 달고 있던 마지막 잎들도 죄다 빗물을 타고 바닥에 처박히고 있었다. 길가 한구석에 잘 정돈되어 쌓여있던 낙엽들이 길을 따라 졸졸 흐르는 빗물에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었다.

비가 쏟아져 흙과 낙엽, 쓰레기가 뒤엉킨 길목은 엉망진창이었고 험한 날씨에 평소 흔하게 볼 수 있던 작은 새들의 울음소리 하나도 듣기 어려웠다. 이따금 인도 바로 옆에 있는 도로를 따라 쏜살같이 달려 나가는 배달 오토바이나 자동차 몇 대를 제외하면 두 사람이 걷는 거리엔 인적마저 드물었으니까.

어깨에 닿는 빗물이 축축했다. 덩치가 산만 한 남고생 두 명이 쓰기엔 조금 작다고 느껴질 법도 한 우산 하나를 나눠 쓰고, 물웅덩이가 철벅거리는 길을 따라 걷던 두 사람은 어렵사리 상혁의 집 앞에 도착했다. 상혁의 말대로 학교에서 걸어서 10분도 되지 않는 거리의 한 아파트 단지였다.

상혁이 재현의 등을 쭉 떠밀었다. 어째 갈수록 험해지는 날씨에 두 눈을 질끈 감고 상혁의 걸음에만 의지해 걷던 재현은 상혁의 이끎에 따라 지붕이 있는 아파트 공동현관 아래에 들어오고 나서야 주변 상황을 겨우 파악할 수 있었다.

쏴아아, 빼곡하게 내리는 빗발 사이로 저 멀리 아파트 단지의 어린이들을 위한 알록달록한 놀이터가 보였다. 지은 지 꽤 되어 높이가 낮은 아파트 단지의 풍경마저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 비를 뚫고 오다니, 이 정도면 상혁에게 다른 의미로 너네 집에 들르게 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야 할 판이었다. 아, 물론 원래도 그런 의미가 없진 않았지만…….

“재현아, 얼른 들어와!”

재현이 멍하니 주변을 살피는 사이 아파트 공동현관의 문을 연 상혁이 소리쳤다. 팔을 옆으로 쭉 뻗어 손에 쥔 장우산의 물기를 탈탈 털면서도 목청을 높여 재현을 불렀다. 여전히 사방에 가득한 빗소리로 소란스러운 와중, 재현이 겨우 상혁의 목소리를 듣고 후다닥 공동현관문 너머로 발을 들였다. 상혁 역시 그 뒤를 잽싸게 따랐다.

“와……, 비 장난 아니네.”

“야, 너 꼴이 그게 뭐야.”

공동현관문이 닫히며 귀전을 마구잡이로 때리던 빗소리가 사그라들었다. 겨우 한숨을 돌리고 흠뻑 젖은 옷의 감촉이 뒤늦게 느껴져 엉거주춤한 자세를 하기가 무섭게 두 사람이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푸핫,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음이 터졌다. 우리 여기까지 우산을 쓰고 온 의미가 있긴 해? 이럴 거면 우비 입는 게 더 나았겠다. 낙엽이 굴러가는 것을 보기만 해도 까르르 웃는 나이라 그러던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상혁이 집 앞에서 도어락을 눌러 열 때까지, 두 사람은 쫄딱 젖어 엉망이 된 서로의 앞머리와 흠뻑 물을 머금어 색이 변한 교복 바지 밑단을 보며 숨이 넘어가도록 웃어젖혔다.

“아무도 없어, 들어와.”

“실례합니다…….”

현관 한쪽에 물에 젖은 장우산을 기대어 세워놓고, 상혁이 재현을 현관문 안쪽으로 이끌었다. 상혁의 말대로 집 안은 아무도 없는 양 죄다 불이 꺼져 어두컴컴했고, 느껴지는 인기척 또한 없었으나 상혁네 집의 현관까지 발을 들이고 나니 잊고 있던 긴장감이 재차 고개를 들었다. 재현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누구를 향해 뱉는 것인지 모를 인사를 건넸다.

“수건 갖다줄게, 잠깐만.”

“응.”

질퍽질퍽 물소리가 나는 운동화를 현관에 대충 벗어두고 수건을 찾아 집 안으로 모습을 감추는 상혁의 뒤로, 물에 젖은 양말 자국이 길게 남았다. 우리 정말 꼴이 말이 아니긴 한가 보다. 또다시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삼키며 재현이 느리게 눈을 굴려 집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목사 집안 아니랄까 봐, 현관에서부터 기독교의 흔적이 훤히 보였다. 작은 성경과 예수 조각상 등이 신발장 위에 보기 좋게 놓여 있었고, 현관 바로 맞은편 벽에는 커다란 십자가와 외양간에서 태어나는 예수의 그림이 떡하니 걸린 광경이란. 여러모로 낯선 집이었다.

“이걸로 대충 닦아. 옷은 내 걸로 갈아입고 집에 갔다가 내일 돌려주고.”

“앗, 고마워.”

수건과 여벌 옷을 건네는 상혁을 따라, 재현이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조심스레 걸음을 내디뎠다. 상혁이 현관의 오른쪽에 있던 방문을 열었다. 그 뒤를 따라가며 재현이 흘끔 돌아본 집안은 어딘가 메마르고 차가워 보여서, 조금은 서늘하고 오싹한 느낌이 들기까지 했다. 재현은 서둘러 상혁을 따라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젖은 외투와 가방, 따위를 방 한쪽에 늘어놓은 두 사람은 재빨리 젖은 옷을 벗고 새 옷으로 환복했다. 재현은 연신 방 안을 두리번거리느라 바빴고, 상혁은 젖은 짐을 대충 정리하다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폰 물 먹었나 봐.”

“뭐? 괜찮아?”

“고장은 아닌 것 같은데……. 내버려 두면 마르겠지. 지금은 그거 신경 쓸 힘도 없어…….”

제가 연락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 지금 제 방에 같이 있는데, 마땅히 연락을 할 곳도, 연락을 기다릴 곳도 없었다. 재현을 우산 안쪽으로 힘껏 끌어안은 채 비를 뚫고 걸어오느라 이미 오늘치 기력은 다 쓴 것만 같았다. 휴대전화의 전원이 꺼지긴 했지만, 전에도 종종 이런 일이 있었으니까. 휴대전화를 가만히 두면 물이 말라 다시 전원이 켜지는 것을 알았다.

쏴아아, 방에 딸린 베란다로부터 들려오는 시끄러운 빗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상혁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곧, 사부작거리며 저를 따라 침대 위로 꾸물꾸물 올라오는 온기가 느껴졌다.

“왜.”

“안아줘.”

“……우리 방금까지 실컷 안고 있지 않았나?”

슬그머니 눈을 뜨면 또, 처량한 강아지 같은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재현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말없이 애정을 갈구하는 재현의 얼굴에 이기지 못해, 상혁은 결국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며 두 팔을 벌려 재현을 품에 안아주었다. 따뜻한 온기와 익숙하게 제 입가로 쪼아지는 작은 입술의 감촉이 생경했다.

방 안을 가득 채운 빗소리는 잦아들 줄을 모르고 더욱 거세지기만 했다.

 

 

-

“S야, 너 전화 온다.”

“어?”

친구가 제 앞에 들이민 것은 제가 조금 전 이곳에 들어서며 어딘가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제 휴대전화였다. 벨소리를 울리지 않게 해 둔 탓에 진동 소리만 미약하게 울리고 있는 휴대전화는 친구의 말대로 전화가 왔음을 알리는 화면이 떠 있었다. 아버지 전화면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화면에 뜬 이름을 보았는지 옆에서 누군가 말을 얹고 나섰다. 아, 한창 재밌을 때 초치기 싫은데. S가 얼굴을 찌푸렸다.

“너 오늘따라 가족들한테서 무슨 연락이 이렇게 많이 와?”

“S 오빠랑은 평소에도 연락 자주 하는 편 아닌가?”

저들끼리 쑥덕쑥덕 떠드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진동이 울리는 휴대전화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S는 친구들이 모여있던 방에서 나와 문을 닫았다. 오랜만에 친구 집에서 모여서 한참을 즐겁게 떠들고 웃으며 놀던 참이었다. 제 쌍둥이 동생인 상혁이 제 귀가 시간을 묻는 연락을 한 지 불과 1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이젠 아버지한테서까지 연락이 오다니. 평소 연락을 할 일이 생긴다면 저 대신 말 잘 듣는 모범생 아들에게 연락을 하던 사람이 갑자기 제게 전화씩이나 거는 일은 드문데. 오늘따라 가족들한테서 왜 이렇게 연락이 많이 오냐는 친구의 말이 괜히 마음이 걸렸다.

“……여보세요?”

[“너 어디냐? 네 동생 어딨는지 알아?”]

조심스레 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오는 목소리가 고압적이었다. 이 인간이 나한테 전화를 걸어서 이런 식으로 나왔을 때, 일이 좋게 끝난 적이 없었다. S가 반사적으로 말을 골랐다. 나 요즘 꽤 조용히 지내지 않았나? 입시를 앞둔 고3이라 학교 야자니, 뭐니 하며 집에서 부모님을 마주칠 기회도 적었으니 더욱 그랬다. 눈이 마주치면 그래서야 대학을 잘 가겠냐고 들들 볶아댔지만, 이미 조금은 절 포기한 것 같기도 했고. 아니, 그래서. 나 요즘 혼날만한 짓 한 거 없는데? S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 느지막이 입을 열었다.

“저 지금 친구 집이에요. 이상혁은 어딨는지 모르겠는데요.”

[“넌 고3이 또 친구들이랑 놀고 있어?”]

참자. 바로 등 뒤에 친구들이 있다. S가 이를 꽉 물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리 아버지에게 대드는 것이 일상이라지만, 친구들 앞에서 괜히 소리를 높였다 분위기를 가라앉힐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상혁이 이놈은 전화도 안 받고 어딜 간 건지, 쯧…….”]

“걔 성격 모르세요? 어린애도 아니고, 학교든 도서관이든 집이든 어디서 지 할 일 알아서 하고 있겠죠.”

[“또 말대꾸를 따박따박……. 상혁이는 내가 계속 연락해 볼 테니까, 너도 빨리 집에 와라. 오랜만에 가족끼리 식사나 하게.”]

“저 친구 집이―.”

[“오라면 와! 교회 약속이 취소돼서 집에서 밥 먹어야겠다. 너라도 네 동생이랑 연락되면 걔도 집에 끌고 와!”]

뚝. 할 말을 마친 전화는 칼같이 끊겼다. S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통화가 끊긴 휴대전화 화면을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아니, 갑자기 왜 저래? 지금 자기 바람맞았다고 나한테 인성질 하는 거야? 하여튼 나이 먹을수록 미친 짓만 더 늘었다니까. S가 휴대전화를 들지 않은 손으로 마른세수를 벅벅 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상혁 이놈은 또 왜 오늘따라 아버지 전화를 안 받아서.

-[오늘 몇 시에 들어와?]

-[친구 집 놀러 옴. 늦게. 왜?]

-[집에 친구 잠깐 들를 거 같아서. 비 많이 오니까…….]

-[맘대로 해.]

문득 1시간 전에 상혁과 나누었던 문자 내용이 떠올랐다. 아버지한테 말은 안 했지만, 집에 있기야 할 텐데. 근데 걔 말대로라면 걔 친구도 지금 집에 같이 있는 거 아냐? 원체 성격 좋고 공부 잘하기로 유명했으니 주변에 사람이야 끊이지 않았지만…….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문득 항상 상혁의 옆을 꿰차고 있던 전교 회장의 얼굴이 S의 머릿속에 커다랗게 떠올랐다.

“……아, 씨.”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불길한 생각에 S가 등지고 있던 방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아, 깜짝이야! 친구들이 내지르는 비명을 뒤로하고, S는 황급히 방 한구석에 밀어두었던 제 짐과 옷가지를 챙겨 현관으로 달려나갔다.

“야, 어디가?”

“S!”

“미안, 나 급한 일! 먼저 갈게, 다음에 봐!”

미친놈, 하필 오늘. S가 속으로 욕을 짓씹으며 현관을 박차고 나섰다. 등 뒤에서 저를 부르는 친구들의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메아리쳤지만 지금 친구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아, 진짜! S가 짜증 섞인 외침을 내지르며 비가 막 그친 길을 쏜살같이 내달렸다.

 

 

-

눈앞이 번쩍거리는 느낌은 또 처음이었다. 온 세상의 빛과 소리를 죄 빼앗긴 듯, 그 순간엔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없었다. 삐이이, 하고 기분 나쁜 이명이 토할 것 같은 메스꺼움과 함께 머릿속을 가득 채웠으니까.

“이상혁!! 내가 널 그렇게 키웠어!?”

발정 난 짐승 새끼도 아니고, 이게 지금 뭐 하는 짓거리야!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땅인지도 분간하지 못하는 상태로 몸을 웅크리고 있자니, 곧 온 집안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저를 일으키려는 재현을 부러 밀어내고, 재현마저 붙잡아 주먹을 휘두르려던 아버지의 손목을 붙잡고…….

‘……춥다.’

사실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았다. 빗소리와 혀가 섞이는 소리에 현관 도어락 소리와, 익숙한 인기척이 제 방문을 여는 것까지 눈치 채지 못한 제 탓이었다. 들입다 멱살이 붙잡혀 주먹으로 뺨을 맞은 기억부터 아득한 꿈 같았다. 괜찮으니 어서 피하라는 말과 함께 겨우겨우 재현을 집 밖으로 쫓아내다시피 보낸 상혁은 더이상 반항할 기력조차 남지 않아, 제게 쏟아지는 온갖 주먹과 발길질을 잠자코 받아들이기만 했다.

“제발 전화 좀 받아, 재현아…….”

가진 거라곤 입고 있던 옷, 방문 근처에 널브러뜨려 놓았던 젖은 패딩, 뒷덜미가 잡혀 현관으로 질질 끌려 나오기 직전 겨우 손에 쥔 휴대전화가 전부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몰랐다. 땡전 한 푼 없이 내쫓기고 보니 그렇게 거세게 퍼붓던 비는 감쪽같이 그쳤고, 해는 이미 저물기 시작해 뉘엿한 노을로 하늘이 가득 물들어 있었다. 겨우 전원이 켜진 휴대전화로 재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대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된다는 차가운 기계 음성뿐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몇 번이나 재현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야……, 너 그 예쁜 얼굴에 흉이라도 생기면 어떡하냐…….”

문득 몇 걸음 앞에서 들려오는 자그만 음성에 상혁이 고개를 들었다. 제가 걸터앉아있는 아파트 단지 놀이터의 그네 앞에, 작은 캐리어를 끌고 나온 제 쌍둥이 누나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까 저 앞이 좀 소란스럽더라니, 제가 재현에게 초조하게 전화를 거는 사이 저를 이어 집 안에서 아버지와 거하게 한판 맞붙고 나온 모양이었다.

“그러게. 나도 맞아본 적은 너 아버지한테 맞을 때, 그거 막다가 실수로 얻어맞은 게 전부였는데.”

“……진짜 어디 모자라? 그 집에 네 애인을 데리고 들어가긴 왜 들어가, 들어가긴.”

의미 없는 시비를 걸기 위해 탓하는 어투야 늘 그랬지만, 그 내용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것이 아니라서. S의 말을 멍하니 곱씹던 상혁이 놀란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제 옆에 세워둔 캐리어 손잡이를 한 손으로 힘주어 잡고 제 쪽을 빤히 노려보고 있는 게 조금 화가 난 것 같기도 해서, 상혁은 헛웃음을 흘렸다.

“네가 그런 눈치가 있었어?”

“모르겠냐? 나도…….”

무언가 말을 하려다 이내 입을 다물어버리는 S에게 그 뒷말을 캐물을 힘도 없었다. 축축하게 젖은 땅 위로 땅거미가 길게 지고 있었다. 이 궂은날 추위에 벌벌 떠는 건 저 하나면 족할 텐데. 상혁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네에서 일어섰다.

저벅저벅, 상혁이 느리게 놀이터를 가로질러 S의 앞으로 다가설 때까지 S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제 쌍둥이를 쳐다보았다.

“집 들어가, S야.”

상혁의 목소리는 그저 담담했다. 동성애를 혐오하는 집에서, 간 크게 남자를 사랑하다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고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채 집 밖으로 내쫓겼다. 네 말대로 어디 모자란 쌍둥이 따라서 집을 나오는 거, 그거야말로 멍청한 짓이라고. 이미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라 예상했다는 듯, 놀랄 것 없다는 듯. 피딱지가 앉은 상혁의 입술 새로 옅은 숨이 흘러나와 시뻘겋게 물든 하늘 위로 흩어졌다.

상혁의 얼굴 이곳저곳을 뜯어보던 S가 제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항상 저보다 희고, 깨끗하고, 괜찮은 듯 잘만 웃던 얼굴이 얼룩덜룩한 멍과 붓기로 엉망이었다. 목이 메었다. 캐리어 손잡이를 쥐고 있던 손에 재차 힘이 들어갔다.

“……야.”

볼품없이 떨리는 목소리가 S의 입가에서 터져 나왔다. 땅 아래로 넘어가기 직전의 노을이 마주 보고 선 두 사람을 빨갛게 비추었다. 상혁은 그제야 S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땀에 흠뻑 젖은 얼굴 곳곳에 짧은 단발머리가 엉망으로 엉겨 붙어 있었다. 저를 잔뜩 노려보는 눈동자도, 바르르 떨리는 아랫입술도,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한 숨소리도. 처음 보는 제 쌍둥이 누나의 모습은 항상 아버지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대거리하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저 집에서 내가 좋아한 거 너 하나밖에 없었어.”

……아. 너랑 내가 이래서 쌍둥이구나. 무감각해졌던 얼굴의 통증이 다시 슬금슬금 올라오는 듯해, 상혁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속이 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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