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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미션 전문 샘플] - 봄날의 연인

1차 자컾 - BL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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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작업물 샘플:

인물: 2인(기본)

작업 기간: 2주(기본)

글자 수: 15,582자(15,500자 신청)

신청 타입: C. 키워드


봄날의 연인

w. 목화

 

 

“남자들은 보통 뭘 좋아해요?”

뭐? K가 황당한 얼굴을 했다. 마른 천으로 닦고 있던 나이프를 그대로 떨어뜨릴 뻔했다. 아르바이트생의 당돌한 질문에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눈동자를 굴려 빗자루로 홀을 쓸고 있던 다른 직원을 쳐다보았지만, 그 역시 반쯤 포기했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릴 뿐, K가 원하는 답을 돌려주진 못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K는 결국 아르바이트생을 향해 영문 모를 질문의 의도를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곧 남자친구 생일이라서요. 그 애가 기뻐할 만한 선물을 해주고 싶은데.”

첫 남자친구라, 잘 모르겠단 말이죠. 그렇게 말하는 아르바이트생은 젖살이 채 빠지지도 않은 앳된 얼굴에 커다랗고 동그란 눈을 한 여자애였다. 근처 미대를 다니는 학생이라고 했던가. 가게 아르바이트생이야 제가 직접 면접을 보고 뽑진 않으니 가게에 주로 상주하는 직원의 말로 전해 들은 게 전부이긴 했다. 그 직원마저도 저와 다를 것 없이 전직 마피아의 신분이었으니, 평범한 사람을 대하는 데 조금 서투른 부분이 있다는 게 문제였지만. 그래도 어찌저찌 괜찮은 아이들을 뽑아 취직시키고, 여태 나름 평범하며 무난한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를 유지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범주의 질문에 그 관계가 이제 와 보기 좋게 깨지려 들었다.

“얘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저희한테도 이미 한 번씩 물었습니다.”

마지막이 보스인 거 같아요. 주방에서 닦아온 마른 식기를 바(Bar) 테이블에 올려놓던 직원과 빠르게 쑥덕여 보아도 K는 이 상황을 유연하게 넘길 방안을 찾지 못했다. 이 뭣도 모르는 순진한 어린 아르바이트생의 눈에는 이 가게의 직원과 사장이 그저 월급을 꼬박꼬박 주고, 뭣도 모르는 어린 막내 아르바이트생에게 진상 손님의 상대 따윈 시키지 않는 아주 좋은 직장 동료 정도로 보였으니까.

K가 평소 퉁명스러운 말투로 가게 일에 관해 지시를 내리거나 사적인 대화를 나서서 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아르바이트생에게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그야 아르바이트생으로부터 날아온 장난기 가득한 농담에 K는 평소 휴고에게 하는 것처럼 헛소리를 무시하고 넘기거나 험한 말로 대꾸하지도 못했으니까. 아르바이트생이 괜히 상처를 받고 악감정을 가져 일반인들의 눈에 잘못 띄게 될까 우려한 탓에 제 없는 유머 감각을 급조해 응답해주진 못할망정, 최대한 무난하고 자연스럽게 아르바이트생들의 수다를 받아내 주는 중이었다.

결국 ‘조금 무뚝뚝하지만 좋은 사람’의 이미지를 가지게 된 가게 사장 K는 아르바이트생의 이러한, 지극히 사적이며 K 개인에겐 트렌디하다고까지 느껴지는 질문을 받게 되었으니. 물론 가게에 일반인 아르바이트생을 받기로 결정 내린 이후, 이러한 좋은 사장님의 이미지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상황을 아주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진 못하겠으나 이렇게까지 허물없이 거리를 좁혀오는 대화를 나누게 되면 K도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치게 되는 것이었다.

“글……, 쎄.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

요즘 어린 여자애들은 뭘 좋아하지? 처음 아르바이트생이 던졌던 질문과는 정반대되는 의문으로 K의 머릿속이 가득 찼다. 어떤 식의 대답과 흐름으로 답변을 해야 이 마냥 해맑은 아르바이트생이 별생각 없이 이 대화를 끝맺고 제게서 흥미를 잃을지. 다른 직원에게 제 상황을 떠넘기고 자리를 피하려고 해도, 이미 다들 한 번씩 이 질문을 받았다고 하니 큰 의미는 없을 듯했다. K가 당혹스러움과 혼란을 넘어서 체념에 다다를 때 즈음, 짧은 생각에 잠겨있던 아르바이트생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 남자는 잘 모르겠어서요. 그냥 제가 해주는 건 다 좋다고 하긴 하는데, 그런 걸로는 부족하고.”

H로 시작하는 누군가가 떠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취향도, 선호도도 뚜렷하게 드러내지 않아 제가 주기만 하면 그게 뭐든 그저 좋다고 넙죽넙죽 받고 보는 놈이. 덕분에 K 역시 종종 휴고의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등의 기념일에 그를 위한 선물을 골라야 하는 상황이 오면 그때마다 깊은 고민을 피할 수 없었다. 아르바이트생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가는 것 같기도 했다.

“아직 학생이니까 뭐……, 그냥 작은 케이크 하나랑 꽃 정도로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언젠가 이 바 테이블에 올라왔던, 죄다 뭉개져 엉망이 되었던 케이크가 떠올랐다. 휴고가 만신창이 몰골을 하고서도 꾸역꾸역 들고 왔던 케이크. 그때 그 케이크가 기념일 선물로 부족하다고 느껴지진 않았으니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지 않으려나, 싶은 마음에 건넨 조언이었다.

“케이크랑 꽃은 이미 제가 그 애에게 받았어요. 전 그 애에게 특별한 걸 해주고 싶단 말이에요. 요리 같은 건 이미 평소에 자주 해줘서……,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아낄 걸 그랬어요. 이제 그런 걸로는 감흥도 없을 거 아녜요.”

직접 밥을 차려주는데 거기에 감흥이 없어지면 그건 쓰레기 아닌가. 아르바이트생이 우르르 쏟아내는 말을 대충 흘려들으며 K가 생각했다. 조리대 안쪽에 차례대로 세팅해놓던 위스키 계량컵이나 머들러 등의 물품마저 손에서 내려놓고 턱을 괸 어린 여자애는, 그야말로 사랑 고민에 푹 빠진 한창때의 청춘이었다. 그러나 그런 아르바이트생을 마주한 K는 한 발 늦게, 그의 사랑 고민을 되뇌다 그의 의도와 조금 어긋난 주제에 꽂히고 말았다.

“자주 해주면……, 감흥이 없어진다고?”

“뭐, 아무래도 좀 그렇지 않나요?”

감흥이 없어진다기보다 익숙해진다는 게 맞으려나. 아르바이트생이 덧붙였다. 그 순간, K의 머릿속에 불현듯 당장 몇 시간 전, 휴고와 함께 먹던 늦은 아침 식사가 떠올랐다. 그리고 어제저녁도, 그 전날 점심도, 저번 주말 아침도…….

‘……언제부터지?’

분명 동거를 막 시작했을 땐 제가 요리를 도맡아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보아도 당장 기억나는 최근 식사 자리에선 어째 죄다 휴고가 요리한 음식들만 테이블에 올라와 있었다. 맙소사, 연인의 애정 표현에 무던해지는 게 너무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연인의 선호도는 무슨, 당장 휴고의 요리에 익숙해지다 못해 감흥이 없어지는 쪽이 다름 아닌 카이든 러셀 본인이었다니!

“……사장님, 괜찮으세요? 안색이…….”

순식간에 파리하게 질려버린 K의 낯을 보고 걱정스레 물어오는 아르바이트생의 목소리는 이미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는 중이었다. 주변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직원들이 아르바이트생을 불러 뒤쪽 창고로 심부름을 보냈다. 아르바이트생을 겨우 떨어뜨려 놓은 직원들도 서로 흘끔흘끔 눈치를 보며 제 보스의 기색을 살폈지만, 어딘가 넋이 나간 듯한 바의 사장은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듯싶었다.

“K, 오늘 아침은 K가 좋아하는 버섯 스튜로 만들어봤어.”

어때, 맛있어? 천진하게 묻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메뉴 하나를 정한다 해도 제 입맛부터 최우선으로 고려하던 놈인데. K가 흘끔 창밖을 바라보았다. 겨울이 다 지나 슬슬 해가 길어지고 있었다. 오픈 준비 중인 가게의 블라인드가 활짝 걷혀 있는 덕에 창밖의 풍경이 훤히 내다보였다.

“……‘특별한 것’, 이라…….”

반쯤 기울어진 늦은 오후 햇살이 가게 안으로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작게 중얼대는 K의 목소리에 근심 걱정이 가득했다.

-

늦은 시간에 찾은 마트는 사람들이 거의 다 빠져, 넓은 매장의 크기에 비해 인적이 드물었다. 그나마 있는 사람들도 죄다 그날 들어온 상품의 재고를 모두 판매하기 위해 판매대 앞에 제품 할인 카드를 커다랗게 써 붙이고 다니는 직원들이 대부분이었으니 K는 반쯤 찬 카트를 끌고, 느긋하게 신선품 판매 코너를 터벅터벅 돌아다닐 수 있었다.

“K, 얼른 사고 집에 가자. 집에 이미 먹을 거 많은데…….”

그래, 제 등 뒤에 찰싹 달라붙은 이 거대한 찰거머리만 없었다면 느긋할 수 있었을 텐데. K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억눌렀다. 굳이 굳이 자신의 어깨에 얹은 휴고 웹스터의 머리통은 무겁기 짝이 없었고, 뺨에 닿아 간지러운 숱 많은 곱슬머리는 슬슬 거슬리기 시작한 참이었다. 허리에 감긴 굵은 팔엔 어서 집에 돌아가자는 협박인지 뭔지는 몰라도 점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거의 비어있는 판매대에서도 그나마 나은 물건을 고심해서 구매하고 싶었던 K의 쇼핑 시간은 예상치 못한 방해꾼의 등장에 처참히 무너지는 중이었다.

“그러게 왜 따라오냐고. 장만 보고 들어간다고 했잖아!”

“하지만 하루종일 K만 기다렸는데, 네가 늦는다고 하니까 데이트라도 할까 싶어서.”

“그럼 얌전히 짐꾼이나 하면 될 걸 카트도 내가 밀고, 날더러 너까지 업으라고?”

“나 업어줄 거야, K?”

“이 자식이……. 양심 다 뒤졌어?”

타박조차 통하지 않았다. 평소엔 보기도 드문 미소를 숨길 생각도 못 하고 기대하는 얼굴은 하는 건 부러 제 복장을 터뜨리기 위한 것이려나. 아마 그런 의도였다면 아주 제대로 통한 것이다. K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화를 다스렸다. 아니, 분명 낮까지만 해도 오랜만에 휴고를 위해 뭐라도 해주려고, 설레는 마음으로 이것저것 계획을 짜기 바빴는데.

“마트에 간다고? 지금?”

퇴근 후, 습관적으로 전화를 걸었을 뿐이었다. 다만, 이제 막 가게에서 나왔으니 곧 집에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하는 대신 마트에 들렀다 갈 예정이라 늦을 거라는 말을 전한 게 평소와 조금 다른 점이었다.

‘그냥 집에 있으면 될 텐데, 굳이 따라 나와서는…….’

본인보다 족히 15cm는 작은 제게 업어달라질 않나, 마트에 들렀다 귀가하는 그 잠깐을 기다리지 못해 여기까지 한달음에 달려 오질 않나. 이놈만큼 덩칫값 못하는 놈도 더 없을 거라고. K는 속으로 투덜투덜 불만을 토해냈다. 이게 다 저를 위한 일인 줄도 모르고 휴고는 K의 등 뒤에서 쉬지도 않고 칭얼댔다. 제 밥그릇 제가 찾아 먹을 줄도 모르긴.

“K, 난 밥 필요 없어, 너만 있으면 되거든.”

“손 안 치워?”

K가 제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이며 슬금슬금 이상한 곳을 더듬기 시작하는 휴고의 손을 탁 쳐냈다. 눈에 힘을 주고 옆을 흘기면 제 어깨에 한쪽 뺨을 파묻고 커다란 호박색 눈동자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뻔뻔한 얼굴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으나 같이 산 세월이 얼마인데, 화가 난 상태에서 그 얼굴을 보고 내색하지 않을 정도는 됐다. K가 곧장 고개를 돌려 휴고의 팔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감자 상태 정도는 보고 사야 할 거 아냐!

“뭐 하게, 감자 스튜? 그런 건 내가 해줄 수 있는데…….”

슬슬 K가 진심으로 제 치덕거림을 내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휴고는 의외로 순순히 K의 허리를 감고 있던 팔을 풀어주었다. 냉장 코너 맞은편에 놓인 감자 묶음을 하나 집어 들고 이리저리 살피는 K의 뒤에서 미련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휴고의 시선은 여전히 집요하게 K의 낮게 묶은 머리, 그 옆의 부드러운 목선과 어깨, 얇은 허리로 따라붙었다.

“아니, 스튜는 나가서 먹기 불편하니까……. 너 감자튀김 먹지?”

“뭐, 크게 가리는 건 없지.”

K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던지는 물음에 무심코 답한 휴고가 한박자 늦게 눈을 치켜떴다. 어? K가 음식 해주는 거야? 우리 언제 나가서 밥 먹어? 조금 일그러진 K의 기분이 더 상해버릴까 차마 집요하게 더 묻지는 못하고, 휴고가 허리를 숙여 K의 옆얼굴을 빤히 응시하기 시작했다.

“……내일 날씨 괜찮던데, 피크닉이나 가자고.”

켜켜이 쌓인 감자 더미 사이를 뒤적이며 골라낸 감자 한 봉지를 카트에 담으며, K가 말했다. 여전히 휴고를 향해선 눈길 하나 주지 않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서 아까와 같은 짜증이 느껴지지도 않았고, 되려 지금 같은 반응은 K가 쑥스러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란 사실을 휴고는 잘 알고 있어서. 그저 K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의외라 휴고는 카트를 끌고 성큼성큼 앞장서 나가버리는 K의 뒤를 잰걸음으로 따랐다. 휴고의 커다란 눈이 데룩데룩 굴러갔다.

“내일 언제? 가게는?”

“오전에. 애들한테 말해놨어.”

“어……, 내 스케줄은?”

“네가 집에서 빈둥대는 거밖에 하는 게 더 있냐? 내일 갑자기 연구소 나갈 거 아니잖아.”

음, 역시 날 잘 알아. 휴고가 빙긋 미소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카트 안을 내려다보면 방금 K가 내려놓은 감자를 비롯해 갖은 식재료가 다양하게 담겨 있었다. 그러고 보면 K가 해준 음식을 먹은 지도 꽤 오래되었네.

휴고의 발걸음이 어딘가 묘하게 들뜨기 시작했다. K 쪽에서 먼저 제안한 데이트, 그것도 피크닉이라니. 그렇지 않아 보이면서 묘하게 로맨틱한 구석이 있는 게 퍽 귀여웠다. 그가 손수 꼽은 D-day가 별다른 이벤트를 벌일 기념일이라거나, 특별한 날이 아니라는 점까지도.

휴고가 종종걸음으로 걸어가 K의 곁에서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내일 데이트는 K가 다 준비하는 거야? 우리 피크닉 어디로 가는데? 센트럴 파크? 브라이언 파크? 끊이지 않고 질문을 던지는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슬슬 두 귀 끝이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K를 놀리기엔 충분했다. 휴고가 속에서 맴도는 웃음기를 애써 목 뒤로 넘기며 K의 빨개진 귀를 제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나는 뭘 준비하면 되는데?”

“……입 다물기.”

예전에, 언젠가. 몇 번 느낀 적이 있는 살기였다. 휴고는 얌전히 K의 뒤에 몇 걸음 떨어져, 그가 깜빡하고 카트에 던져넣지 못한 버터와 무알코올 맥주를 품에 안았다.

 

 

-

날이 좋았다. 부드러운 색을 띤 하늘엔 옅은 구름이 드문드문 흐르고 있었고, 새싹이 막 움트기 시작한 땅은 적당히 녹아 여린 녹색들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아직 꽃이 만개하진 않았어도 겨울에 비하면 훨씬 풍성한 나뭇가지들이 쭉 뻗은 산책로 위로 이리저리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기껏 나온 피크닉 장소가 집 앞 10분 거리 공원이라니.”

휴고의 입에서 실망감 어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센트럴 파크니, 브라이언 파크니 기대를 잔뜩 했는데 결국 오랜만의 데이트에서도 이 작고 조용한 동네 밖을 벗어나지 못했다.

“피크닉 하나 하려고 여기서 센트럴 파크까지 가는 미친놈이 어딨어?”

휴고에게 무심히 쏘아붙이는 K는 그와 동시에,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돗자리를 펼 장소를 모색하기 바빴다. 자신들이 사는 곳은 시 외곽의 작은 마을이었고 뉴욕 맨해튼의 한복판에 있는 센트럴 파크까지 가려거든 차에서만 꼬박 10시간 가까이를 버티고 있게 될지도 몰랐다. 그렇게라도 해서 며칠 뉴욕 여행이나 하면 다행인데, 당장 내일도 가게에 출근해야 하는 게 사장 직책에 따르는 책임이었으니까. 이 좁은 마을에 술집이 몇 군데 되지 않으니 가게 하나에도 손님들이 꽤 많이 들락거리는 탓도 있었고, 전직에서나 현직에서나 직접 두 발로 일선에서 일을 처리해야 속이 편한 성미 탓도 있었다.

“우리 다음엔 여행 가자. 뉴욕도 좋고, 아님 아예 해외도 좋겠는데.”

“난 너처럼 1년 365일 놀고먹는 백수가 아니라.”

“나도 그 정도의 백수는 아니야, K…….”

1년 360일 정도 놀고먹긴 하지만. 휴고가 쩝,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뉴욕 복판의 커다란 공원에 비해 이 집 앞 10분 거리 공원의 장점이라 하면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만큼 크기가 작긴 했지만, 뭐. 산책로도, 잔디밭도, 풀숲도 있고. 공원 한가운데 작은 하천이 가로지르고 있기까지 했으니 나름의 구색은 다 갖춘 곳이었다. 심지어 저 멀리에서는 부모와 산책을 나온 어린아이들이 꺄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공원 이곳저곳을 누비고 있었는데, 공원에 당장 보이는 사람들이라곤 그들과, 제 눈앞에 있는 K뿐이었으니. 휴고는 생각보다 이곳도 썩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다.

“여기 어때?”

“좋아.”

공원 잔디밭 한가운데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간 K가 커다란 밤나무 앞에서 멈춰 섰다. 딱히 대단한 피크닉 로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장소 따위 아무렴 어떨까 싶었으니 휴고는 밤나무 아래를 가리키는 K의 손짓 한 번에 냉큼 들고 있던 돗자리를 펼쳤다. 흰색과 파란색이 얼기설기 섞인 체크무늬의 커다란 방수 돗자리가 녹색 잔디밭 위에 펼쳐졌다. 두 사람이 앉기에도 넉넉했고, 키가 큰 휴고가 드러누우면 돗자리 끝에 발꿈치가 아슬아슬하게 닿을 정도였으니 두 사람 앞에는 꽤 쾌적한 피크닉 자리가 마련된 셈이었다.

“……이런 돗자리가 있던가?”

돗자리라고 해봐야 집안 보일러실 한구석에 처박아두었던 작은 돗자리를 생각했는데, 누가 봐도 새것처럼 보이는 낯선 돗자리가 눈 앞에 펼쳐지니 K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멀뚱히 돗자리를 내려다보고 선 K보다도 먼저 그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돗자리 이곳저곳을 손으로 탁탁 밀어 펴던 휴고는 아무렇지 않게 K의 물음에 대꾸했다.

“여기 오려고 샀어.”

……오늘 이 피크닉에 생각보다 기대를 많이 한 모양인데. 조금은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고, K는 휴고를 향해 제가 들고 있던 도시락 바구니를 내밀었다. 그가 피크닉을 이렇게까지 기다렸을 줄은 몰랐다. 제 손에서 휴고의 손으로 도시락이 넘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이럴 줄 알았으면 음식에 좀 더 신경을 쓸 걸, 하는 뒤늦은 후회가 스멀스멀 자신을 물들이는 데에도 손쓸 도리가 없었다. 이곳으로 나오기 전, 집에서 이미 도시락에 자신의 최선을 쏟아부었음에도 그랬다.

“이제 열어봐도 돼?”

휴고가 기대감에 찬 눈으로 물었다. 차마 그런 얼굴에 대고 도로 도시락 바구니를 빼앗거나, 아무래도 그냥 식당에서 포장해온 음식을 먹는 게 낫지 않겠냐는 말을 할 순 없었다. K는 엉거주춤 돗자리 위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른 아침부터 홀로 부엌에 나와 준비한 음식이었다. 소중히 안고 자던 제 연인이 자리를 비운 허전함에 휴고까지 눈을 뜨게 된 건 K가 부엌에 나온 지 10분도 채 되지 않은 참이었지만, 휴고는 부엌으로 나오지 말라는 K의 협박 섞인 명령에 트윈 침대에 홀로 오도카니 누워 식어가는 제 옆자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의도치 않게 휴고를 방 안에 가두게 된 K는 그때부터 속도를 올려 전날 밤 마트에서 구매한 식재료들로 갖은 요리를 시작했고, 음식을 완성해 도시락통에 예쁘게 담기까지 꼬박 2시간가량의 시간이 소요됐다. 원래 요리를 못 하는 편은 아니지만, 원체 하려고 맘먹은 메뉴가 많기도 했고, 전날 제가 깨달은 것처럼 최근 제 손으로 요리를 한 적이 드물어서이기도 했다. 본인의 완벽주의를 충족할만한 감을 찾기까지도 꽤 시간이 들었다.

‘뛰어나진 못해도, 보통의 수준 정도는 된다고 생각하는데…….’

도시락 가방을 여는 휴고의 두 눈동자가 평소보다 더욱 금빛으로 반짝여 보이는 것은 착각인가. K가 흘끔 휴고의 낯빛을 살폈다. 기껏 그를 위해 준비했으니 휴고 역시 제 도시락을 좋아해 주길 바랐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특별한 걸 해주고 싶단 말이에요.”

더군다나, 그런 말을 들은 직후라면 더더욱. 얇은 유리알 너머로 휴고의 눈동자가 빠르게 도시락 가방 안을 훑었다. 늘 그렇듯 무뚝뚝한 얼굴이었지만, 그 사이사이로 설렘이 가득 배어있다는 것을 K는 알았다. 휴고의 커다란 손이 도시락 가방 안으로 쑥 들어갔다가, 층층이 쌓여있던 도시락들을 분리해 돗자리 위에 늘어놓았다.

“뭘 되게 많이 했네.”

“뭐……, 어쩌다 보니까.”

“고생했겠는데? 나한테 좀 도와달라고 하지…….”

원체 저 한정으로 다정하고, 배려심 넘치는 인간이란 것쯤은 알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락을 열기도 전부터 제 노고를 알아주는 말 따위를 하니까.

“이제 그런 걸로는 감흥도 없을 거 아녜요.”

휴고가 한창 제게 요리를 해줄 때, 자신은 어땠더라. 어째 제 앞의 휴고 웹스터란 인간과 마주 보고 있으면 있을수록 제 결점만 속속들이 떠오르는 듯했다. 그야 물론, 어제 그 어린애가 말한 것처럼 사람은 익숙함을 당연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고, 휴고는 한동안 받지 못했던 자신의 요리를 오랜만에 대접받게 되었으니 새삼스러워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차이가 있었지만.

‘난 이놈이 아침마다 꼬박꼬박 요리해줄 때, 고맙다는 말을 한 적이……, 손에 꼽는 것 같은데?’

얼굴이 화끈거리기보다도, 머리에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창피하다기보다 별 반응이 없던 저를 앞에 두고 이놈은 괜찮았던 게 맞나, 싶어서. 기분이 상한 적은 없었을까? 아니, 없었을까가 아니지. 저였다면 이미 기분이 상하고도 남았을 텐데 그런 적 한번 없었을 리 없지. 휴고를 향한 미안함이 물 밀듯 밀려왔다. K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젠장, 이런 적이 없었는데, 어제 괜한 소리를 들어서……!

“와, K! 맛있는데?”

문득 앞에서 들려오는 탄성에 K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K가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이미 도시락을 죄다 열어놓은 휴고의 잇새엔 기다란 감자튀김이 물려있는 상태였다. 두 눈썹이 잔뜩 올라가 있고 눈을 커다랗게 치켜뜬 채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이는 게, 빈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아 보였다.

돗자리 위에 예쁘게 정돈된 도시락 통에는 K가 아침부터 일찌감치 일어나 썰고, 자르고, 굽고, 튀기며 요리한 온갖 요리들이 깔끔하게 담겨 있었다. 노릇노릇하게 튀겨진 감자튀김과 양배추, 햄, 치즈를 잔뜩 넣고 만든 샌드위치, 토마토 소스와 치즈를 듬뿍 얹은 카넬로니 파스타, 윤기 나는 스크램블 에그와 바짝 구운 베이컨. 깨끗하게 세척되어 통 하나를 가득 채운 방울토마토와 오렌지 등의 과일은 덤이었다.

“……맛있어?”

“정말로. K도 먹어 봐.”

휴고가 냉큼 새 감자튀김을 하나 집어 들어 K의 입가에 들이밀었다. 바삭하고 짭조름한 냄새가 K의 코끝을 찔렀다. 사실, 음식을 도시락통에 담기 전 죄다 한 번씩 시식해봤으니 무슨 맛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K는 빼지 않고 휴고의 손에 들린 감자튀김을 잠자코 받아 물었다. 다행히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도 바삭한 튀김의 식감은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파스타도 맛있네.”

“그렇다면 다행이고…….”

“뭘 그렇게 긴장했던 거야?”

K의 손에 방울토마토를 찍은 작은 포크를 들려준 휴고가 웃음을 터뜨렸다. 온갖 비관적인 생각에 실시간으로 심란해져 가던 것이 티가 난 모양이었다. K가 황급히 표정을 갈무리했다.

“아니, 뭐 별 건 아니고…….”

“어제 무슨 일 있었지?”

하여튼 평소 내색은 안 하면서 눈치는 더럽게 빠르다. K가 속으로 습관적인 욕을 되뇌며 흘끔 휴고의 눈을 마주 보았다. 거짓말을 한다면 이놈 성격상 더는 캐묻지 않고 군말 없이 속아주겠지만, 그랬다간 K 본인의 속이 썩 좋지 않을 것 같아서. K가 손에 쥐고 있던 포크를 과일이 담긴 도시락통 위에 도로 올려놓았다. 포크 끝에 꽂혀있던 커다란 방울토마토가 기우뚱, 통 안으로 미끄러지며 들어갔다.

“요즘 너만 요리한 거 같아서, 나도 오랜만에 해줄까, 하는 생각에…….”

“응? 갑자기?”

“내가 너무 당연하게 받아먹고만 있던 건 아닌가, 싶기도 했고…….”

“이런, 대체 어디서 무슨 소릴 듣고 온 건지.”

휴고가 손에 들었던 샌드위치를 도로 내려놓고 K의 곁으로 바짝 다가와 앉았다. 샌드위치를 베어 물려던 참에 어두워진 K의 낯빛을 눈치챈 탓에 휴고가 손에 쥐었던 샌드위치는 한 입도 먹지 못하고 도로 도시락 통 안으로 돌아갔다.

“이 좋은 날 누구야?”

“어?”

“대체 왜 네가 날 앞에 두고 다른 놈 생각이나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제 어깨를 팔로 감싸며 중얼대는 휴고의 말에 K가 미간을 좁혔다. 지금 그게 문제야? 정말 듣고 싶은 것만 듣는구만. K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끝도 모르고 땅만 파고 들어가던 의식이 반강제로 뒷덜미를 붙잡혀 평소의 상태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원래 하려던 말이 뭐였냐면.

“미안, 받는 게 있으면 나도 제대로 고맙다고 말을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도 사과할 것이 있으면 눈 딱 감고 사과를 전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여태 주는 음식을 잘만 받아먹다가 도시락 하나 싸서 퉁칠 의도가 뻔히 보일 것만 같아 미안함이 앞서 말하기도 민망했으니. K는 한숨을 푹 내쉬며 눈을 내리깔았다. 거창하게 말하며 차려오긴 했으나 어려운 요리도 아니고. 휴고라면 제가 주는 것이나 저와 함께 있기만 한다면 뭐든 좋다고 받아줄 것이 뻔해서 집 앞 공원이나 데리고 나왔다.

어째 생각을 하면 할수록 제 쪽이 쓰레기가 되는 것만 같은데. 평소엔 이런 생각 따윈 하지 않았는데도. 하여튼 제 발 저린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하나를 잘못하니 평소에는 그저 그렇게 지나갔을 일들도 죄다 죄책감으로 다가와서는…….

K가 슬그머니 눈을 떴다. 제가 사과했을 때 내심 서운했던 것이라든가, 괜찮다든가, 반응이 있을 줄 알았는데 조금 이상할 정도로 긴 정적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상하기도 하고, 슬슬 불안해지기도 했다. 여태 아무런 반응도 없던 휴고를 찾아 K가 제 옆으로 느리게 시선을 돌린 참이었다.

푸핫. 낯선 웃음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K의 시야가 뒤집혔다. 흰색과 파란색이 교차한 돗자리의 패턴이나 초록색으로 뒤덮인 잔디밭, 하다못해 얕은 골을 따라 졸졸 흐르던 하천도 아닌 깃털 구름이 떠다니는 푸른 하늘이 마른 밤나무 가지 사이사이로 눈에 들어왔다.

K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저를 끌어안고 함께 돗자리 위에 드러누운 휴고를 쳐다보았다. K의 어깨에 얼굴을 푹 파묻은 휴고가 웃음을 참듯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대체 이건 무슨 반응이지? 상상했던 휴고의 반응 중에 저를 끌어안고 돗자리 위로 쓰러진다는 경우는 있지 않았기에, K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제 목덜미에 불규칙적인 숨을 뱉어내는 휴고를 바라보다 입을 뗐다.

“……뭐야?”

“아, 웃긴다.”

웃겨? 지금 내 사과가 웃기다고? 누구는 진지하게 네 감정을 당연한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내 태도에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있는데. 이게 웃겨? K가 돗자리 위를 팔로 딛고, 벌떡 몸을 일으키려 들었지만 휴고는 재빨리 K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팔에 힘을 줘 그를 제 품에 더 꽉 끌어안았다.

“야, 놔 봐. 너 뭐랬냐 방금?”

“K, 그런 걸 맘에 두고 있었어?”

휴고의 팔을 베고 누운 꼴이 되어버린 K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젖혔다. 올려다본 휴고의 얼굴엔 평소에는 잘 보여주지도 않던 웃음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K가 팔을 들어 휴고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아니, 웃지만 말고 이 자식아. 내 사과가 웃기냐니까?

“사과라고 할 게 있어, K? 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심각한가 했더니……, 세상에.”

휴고의 눈꼬리에 쥐방울만한 눈물이 맺혔다. 무슨 생각인진 몰라도 조금 전 상황이 휴고 웹스터의 유머 코드에 딱 들어맞긴 한 모양이었다. 날 무시하냐며 화를 내려다가도, 드물게 눈물까지 흘려가며 웃음을 터뜨린 휴고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그런 맘도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K가 제 손에 가득 쥐어잡고 있던 휴고의 멱을 놓았다.

“K가 날 당연하게 생각하는 게 좋은 거야. 난 네가 좋아하는 걸 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은 거고……, 굳이 인사 같은 걸 하지 않아도 난 충분하단 말이지.”

“뭐가 충분한데?”

“그냥……, 뭐. K가 나랑 같이 밥을 먹어주고, 내가 널 끌어안은 채 잘 수 있게 해주고, 네가 날 사랑해주고. 그런 것들이면. 충분하지.”

휴고가 K의 머리에 입 맞추며 나지막이 제 사랑을 고백했다. 제 귓전에 곧장 박히는 낯부끄러운 말에 뒤늦게 얼굴부터 목덜미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K의 반응을 즐기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굳이 감사가 필요하고, 사과가 필요하고……, 그런 사이로 밀어내지는 마. 그건 좀 슬프네. 우리 사이에 그런 거리감이 있었어?”

“솔직히 말하자면, 원래 그런 생각을 하고 살던 건 아니었고……. 어제 갑자기 생각이 나길래.”

휴고가 나긋한 목소리로 타이르자 K 역시 단호하게 사과를 뱉어내던 조금 전의 기세는 어디로 가고, 얌전히 휴고의 팔을 베고 누워 고분고분 답을 내놓았다.

“그래, 그래서 말인데, K. 아까부터 네가 날 앞에 두고 생각하던 대단한 놈은 대체 누구야?”

제가 사과를 하고, 휴고가 그 일을 별것 아니라 치부하며 이제 다 잘 풀린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번엔 휴고의 심기가 뒤틀린 모양이었다. 묘하게 달라진 기색에 K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은 제가 어디다 질투를 내비치는지 알고는 하는 소린지.

“응? 누구냐니까.”

“가게 아르바이트생이야. 나보다 한참 어리고, 애인도 있는 여자애.”

지 애인 선물로 뭘 주면 좋아하겠냐는 의논을 나한테 하더라. 어제의 일이 다시금 떠오른 건지 K가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던 차에 그저 의식의 흐름이 그렇게 흘러갔던 것이고, 요즘 유독 가게 일로 바빠 휴고를 챙기지 못했던 것이 머릿속에서 연쇄작용을 일으켜 지금 이 상황까지 다다른 것 같다는. 뭐 그런 이야기까지 K는 제 속을 순순히 실토했다.

“……정말 종잡을 수가 없네.”

“네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하니까 그게 더 웃긴다.”

K가 코웃음을 치며 몸을 일으켰다. K를 끌어안고 있던 휴고 역시 함께 몸을 일으켜 그 옆을 꿰차고 들러붙었다. 조금 식어버린 음식이 여전히 돗자리 위에 늘어놓여 있었다.

“파스타 식으면 맛없을 텐데.”

“괜찮아, 맛있어.”

선뜻 카넬로니 파스타를 포크로 찍어 올린 휴고가 입안 가득 그것을 넣고 우물댔다. 보온 도시락 덕에 아직 온기가 남아있었고, 좀 식는다고 맛이 없어질 음식도 아니었으니까.

“내가……, 너무 무뚝뚝한 것 같으면 말해.”

“뭐? 아니, 정말 괜찮다니까.”

“너도 그냥 들어놓기만 하라고.”

막무가내인 K를 꺾을 방법은 없었다. 휴고가 결국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몇 번 주억거렸다. 아마 그럴 날이 있을까, 싶긴 했지만. 어떤 모습이든 그를 좋아하지 않을 이유는 없겠으나 제가 처음 좋아했던 K는 무뚝뚝한 남자였고, 이제 와서 그의 그런 성정을 감히 제가 뜯어고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요즘 네가 날 사랑하는 것 같아.”

아무래도 언젠가 무심코 털어놓았던 그 말이 잘못되었던 것일까. 하지만 그때 보았던 K의 얼굴은 꽤 귀여웠는데. 그의 소극적인 애정 표현에 불안했다는 것도 이제 옛날 일이지, 제 앞에서만 이렇게 솔직하고, 사랑스럽고, 귀여운 연인이 저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란 의심은 이제 불필요했다.

생각하다 보니, 또 K가 몸서리칠 만큼 좋아서. 휴고가 제 입에 감자튀김을 물려주던 K를 두 팔로 꽉 끌어안았다. 얄팍한 몸이 휴고의 커다란 품에 꼭 맞게 들어왔다.

“……작아서 귀여워.”

“……왜 또 시비지?”

내가 무뚝뚝한 것 같으면 말하랬지, 내가 작게 느껴질 때 말하랬어? 섬뜩한 K의 음성에도 휴고는 그를 끌어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아직 좀 쌀쌀하니까~. 끝이 길게 늘어지는 목소리에서 애정이 뚝뚝 떨어졌다. 그 사실을 알고 있어 K 역시 제 몸에서 휴고의 팔을 떼어내려던 것을 빠르게 포기했다.

“옷 너무 얇게 입은 거 아냐?”

“봄인데 뭐.”

“아직 바람이 좀 차.”

“배 채우면 괜찮아질 거야.”

K가 아까 내려놓았던 방울토마토를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볼 한쪽이 불룩하게 튀어나온 K의 옆모습을 보다, 휴고도 제 연인을 따라 방울토마토 하나를 낼름 삼켰다.

“우리 이거 다 먹으면 들어가?”

“글쎄……, 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

“그냥 이러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긴 한데.”

배드민턴 채라도 갖고 나올 걸 그랬나. K가 멍하니 중얼거리는 말에 휴고가 말없이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자, 폐부 가득 익숙한 K의 체향이 들어찼다. 이렇게 딱 달라붙어 함께 있을 수 있기만 한다면, 뭐든 좋았다.

“나 추워.”

“추우면 빨리 먹고 들어가야지.”

“지금 이렇게 있는 것도 좋은 것 같아.”

뭘 어쩌자는 건지. 그저 제게 치근덕거리고 싶은 휴고의 속내가 빤히 읽혀, K는 조금 전 휴고가 쥐었다 내려놓은 샌드위치를 다시 휴고의 손에 들려주었다. 휴고의 말대로 조금은 선선한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 위를 스쳤다. 피크닉 하기엔 조금 이른 날씨였나? K가 하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물가 근처에 드문드문 선 갈대가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K, 나 안아줘.”

“개수작 좀 그만 부려, 휴고 웹스터.”

한 손으론 샌드위치를 우물거리고, 한 손으론 헝클어져 얼굴에 이리저리 달라붙은 K의 머리카락을 정돈해주던 휴고가 칼 같은 K의 거절에 두 눈썹을 양 끝으로 늘어뜨렸다.

꺄르르, 저 멀리서 들려오던 어린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두 사람이 앉은 잔디밭 뒤쪽 산책로를 따라 걷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 재차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타고 온 것인지, 문득 코끝에 향긋한 풀과 흙냄새가 닿았다. 제 어깨에 온몸을 기댄 휴고의 무게를 가만히 느끼던 K가 손을 뻗어 휴고의 북슬북슬한 머리를 느리게 쓰다듬었다.

‘……봄인가보다.’

K가 가만히 눈을 감고 휴고의 머리에 제 머리를 기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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