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은 □□

'미련'이라는 단어가 입력되지 않은 사람 같았다.

※ PC화면으로 보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아-! 저는 딱히 결혼에 대해서는 생각한 적이 없어요. 만약 한다고 해도, 상대에게 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요. 결혼이라는 것은 평생을 함께 해야 하는데, 저는 감정적으로 서툴러서 상대에게 상처만 줄 거 같아요. 그래서 아직은 웬만하면 안 하고 싶네요.

 

한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츠무기의 발언이 집중되고 있다. 팬들에게 보여지는 츠무기는 나긋한 목소리로 다정한 면이 많이 보였다. 그래서 한동안 SNS에서 뜨겁게 달군 '결혼하고 싶어지는 남자 아이돌 순위 100' 피드에서 상위권을 유지하기도 했다. 그렇게 다정한 '남편감'으로 보여지는 그가 오히려 결혼을 안 하고 싶다니. 팬들의 아쉬움이 가득한 반응과 함께 예민하게 받아들인 이가 있다.

 

‘뭐? 결혼을 안 해?’

 

이동하는 카니발 안에서 츠무기의 인터뷰 장면을 보고 있던 나츠메는 신경질적으로 화면을 두드리며 영상을 껐다. 그제야 빌어먹을 은은한 웃음을 품은 이의 얼굴이 사라졌다. 나츠메는 한숨을 푹 쉬며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창문 밖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살짝 아래로 내려간 눈매의 끝은 날카로워도 부드러운 속눈썹의 굽힘에 녹금빛 눈동자에 은은함을 머금는 것이 그의 매력이었다. 안경을 쓰고 있는게 흠이긴 하였으나, 사람 일이란 모르는 것이니 시력이 떨어진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저 아쉬울 뿐. 창문 너머 도심의 풍경을 배경 삼아 살며시 보이는 나츠메의 얼굴이 햇빛과 함께 어지럽게 흩어졌다. 하아-.

 

 


 

 

 

뒤늦은 □□

자급자족


 

“어서와요. 나츠메 군. 오늘도 고생했어요.”

“항상 하던 일인데 뭐. 바빠?”

“으음~ 아뇨. 어제보다는 안 바빠요. 왜 그런가요?”

 

나츠메는 ES빌딩에 도착하고 자연스럽게 뉴디멘션 사무소 안쪽에 있는 소장실로 향했다. 멀끔한 셔츠 차림으로 열심히 서류를 넘기며 흥얼거리는 츠무기를 보니, 참으로 '천직'을 맡았구나-싶었다. 나츠메는 푹신한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고서는 힐끔 그를 쳐다봤다.

 

“인터뷰. 잘 봤어.”

“아~ 제 인터뷰를 본 건가요? 기쁘네요.”

“흥. 일부러 본 건 아니야. 그건 그렇고. 선배, 비혼주의였어?”

“비혼주의라기에는, 결혼이 필수적이진 않다-라는 거죠. 아직은 제가 책임질 것들이 많으니까요. 속죄할 것도 많고-. 애초에 제가 결혼을 할 수 있을까요?”

 

하하-. 누구 속도 모르고 환히 웃는 얼굴에 주먹이라도 꽂고 싶어진 나츠메는 애써 시선을 옮기며 흘리듯 말했다.

 

"비혼일 줄은 몰랐지. 적어도 사귈 때."

"...

 

나츠메의 말에 츠무기는 서류를 정리하던 손을 멈칫했다. 워낙 순식간이라 나츠메만 알아챘다. 책상을 두고 츠무기의 걸음으로 3걸음이면 마주할 수 있는 거리의 침묵은 컸다. 츠무기와 나츠메의 관계는 서류처럼 정리할 수가 없다. 얽히기를 지독하게 얽혀서 꼬인 매듭을 푸는 것조차 쉽지 않은 관계. 드라마에서는 이런 것을 '막장'이라고 하던가. 츠무기와 나츠메는 연인이었다가 헤어진 상태였다. 이별한 지는 1년째. 무덤덤해지기에도 충분하고, 사실 사귄 건지도 모르겠는 아리송한 상황이다. 둘은 서로에 대해 말하지 않아도 알 정도로 깊은 유대 관계가 있다. 겉보기에는 매번 싸우는 것 같아도 시선 끝에는 여전히 애정이 남아 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 얘기는 안 하기로 하지 않았나요?"

"응. 얘기는 안 해. 그냥 신기했을 뿐이야."

"나츠메 군은 참 짓궂네요."

 

짓궂은 사람이 누구인데. 그렇게도 애정하고 서로를 위하는 둘이지만, 사고의 차이는 좁힐 수 없었다. 여전히 경험이 부족했고, 어렸던 마음으로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츠무기와 나츠메는 딱, 그정도의 사랑을 했던 것이었다. 다시금 침묵이 흘렀다. 츠무기는 하던 일을 계속 했고, 나츠메는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화면을 키지 않은 채 바라보는 화면에는 그의 표정이 보였다.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물어뜯는 습관이 생긴 것은 언제였을까. 결국, 10분도 지나지 않아 그 자리를 벗어난 나츠메였다. 나츠메는 성큼성큼 사무소를 벗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속이 울렁거려 금방이라도 모든 것을 게워낼 것처럼 턱이 뻐근했다. 빌어먹을 선배. 헤어졌다고 해도 달라진게 없는 관계였다. 그러나 묘하게, 그는 주변의 다른 이들처럼 서서히 나츠메에게도 '알 수 없는' 거리를 두고 있다. 그것이 느껴지는 순간만 되면 나츠메는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을 다른 이들과 '동등'하게 두는 것에 어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츠무기의 우선순위가 당연히 '나츠메'가 되어야 한다는-. 나츠메가 오만하게 단정 지은 미래가 서서히 무너지는 순간이 매번 그의 머리를 세게 치고 지나갔다.

 

 나츠메 군을 사랑하는 것이 무서워요.

 

헤어질 때, 츠무기에게서 이런 대답을 들었다. 사랑하는 것을 무서워하는 인간. 그의 감정을 본인조차 알지 못해 두려워하던 인간. 하찮고 바보같지만, 이런 사람을 사랑하는 자신이 더 바보 같다는 것을 인정했다. 인정한 자신과는 다르게 츠무기는 매번 부정했다. 무섭고, 무섭단다. 자신과의 사랑이-. 그래놓고 나한테, 함께 행복해지는 미래를 생각해달라고-.

나츠메도 점점 츠무기를 사랑할수록 더욱 불편해졌다. 자신은 '사랑'을 받기 위해 노력만 해왔지 '사랑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배우지 못 했다. 나츠메가 노력하지 않아도 그를 사랑하는 츠무기의 관심과 애정이 어느덧 '부담'으로 다가왔을 때는, 츠무기가 귀찮아졌다. 애인이 되고서도 '특별하게' 달라진 점이 없는 츠무기가 싱거웠다. 자신의 마음이 밍밍하게 변하는 와중에도 츠무기는 자신을 '사랑'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끝이 있을 거라고는 알지 못 했다.

 

"오랜만에 휴무네요. 날도 좋은데 뭐 하고 지낼 건가요?"

"...그냥 쉴 거야."

"푹 쉬는 것도 좋은 거죠. 방해하지 않을게요."

 

며칠 바쁘게 움직인 뒤 오래간만에 맞이한 휴무일에 나츠메는 사무소에 잠시 들렸다. 누구를 만나러 왔다고 하기에는 그저 다음 주 스케줄을 조정하기 위함이었다. 여름만 되면 몸이 안 좋아져, 축축 처지는 것이 여름 감기는 아니고, 몸살도 아니고. 그냥 정신적인 피곤함이 자꾸만 몰려왔다. 그것을 알고 있는 츠무기는 흔쾌히 그를 위해 일정 대부분을 뒤로 미루게 해줬다. 꼴 보기도 싫은 가식적인 미소로 나츠메를 바라보면서 나긋하게 말하는 것에 현기증이 절로 났다. 어깨가 점점 무거워져 허리가 굽어지는 기분이었다. 여름날의 햇빛은 지독하게도 뜨거워서 나츠메를 갈증 나게 했다. 가만히 침대에 누워있던 나츠메의 귓가를 울리는 시계 초침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외로워졌나. 신경도 안 쓰던 것들이 전부 신경 쓰였다. 곧, 츠무기의 퇴근 시간이 다가왔다. 오늘도 그는 야근할까-. 츠무기는 야근과 야근, 야근. 무슨 일이 그렇게도 많은지 전부 도맡아 하는 바람에 사무소가 아니면 얼굴 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사귀던 때에도 흔한 일이었다. 그래서 종종 나츠메는 그의 야근을 강제로 막기도 했었다. 하루는 같이 일을 도와주기도, 하루는 그냥 끌고 나오기도 했다. 우는 소리를 내면서, 그의 책임감을 중얼중얼 귀로 들을 때면 짜증 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콜록-. 마른기침 소리가 이불 안에서 울려 퍼졌다.

아프다. 숨 쉴 때마다 가슴이 펑펑 터지는 것처럼 아팠다. 그러나 티는 내고 싶지 않아서 꾹꾹 입안에 담을 뿐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오지랖을 떠는 그를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아프다는 말도 안 했었다. 하지만, 나츠메는 지나치게 그를 과소평가했다. 어느새 그의 옆에 앉아서 나츠메의 이마에 제 손을 올려두고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얼굴을 했으니.

 

“...뭐 하는 거야?”

“아픈 거 같아서 찾아왔어요. 밥은 먹었어요?”

“됐어. 나가.”

 

나츠메가 냉랭한 목소리로 날카롭게 이야기하며 츠무기의 손을 아프게 쳐냈다. 확 뒤를 돌아 츠무기에게 등을 보인 나츠메에 허공에 멈춘 손은 가까스로 제자리를 찾아갔다. 츠무기는 멍하니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이 많이 올랐어요. 약, 테이블 위에다 둘 테니까 꼭 챙겨 먹어요.”

 

슬리퍼 끄는 소리와 방문이 살며시 닫히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을 때, 감겨있던 나츠메의 눈이 떠졌다. 츠무기는 아직 무언갈 하는지 거실을 열심히 돌아다녔다. 그러고 한참 지나서 현관문 도어락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고, 문이 닫혔다. 그제야 나츠메는 몸을 일으켰다. 콜록-콜록-. 폐를 관통하는 통증에 비릿한 피 맛을 혀로 삭히며 테이블에 놓인 알약을 마주했다. 미지근한 물과 함께 놓인 알약을 노려보던 나츠메는 다시 이불을 펄럭이며 누웠다. 그러다 부시럭 거리며 이불 바깥으로 손만 꺼내 더듬더듬 알약을 집었다. 알약이 매끄럽게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소리가 방안에 작게 울렸다.

 

 

 

 

무서운 여름 감기는 누군가의 배려 덕분에 무사히 지나갔다. 그러나 떨쳐내지 못한 감정은 무겁게 나츠메의 어깨에 자리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찾아간 사무소에는 항상 보던 얼굴들이 있었다. 항상 똑같은 자세로, 똑같은 표정으로 서류를 열심히 넘겨보는 츠무기도 보였다. 츠무기는 나츠메가 문 앞에서 지켜보는 것을 알고서 싱긋 웃으면서 반겼다. 몸은 괜찮아요? 상냥한 목소리에 나츠메의 표정이 싸늘해졌지만, 이내 표정을 풀고 츠무기의 앞으로 향하며 퉁명스럽게 본론을 말했다.

 

“나. 휴가 낼 거야.”

“네?”

“3일. 그 이상으로는 안 해.”

 

나츠메의 갑작스런 ‘휴가’ 선언에 츠무기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츠메는 지금까지 한 번도 휴가를 다녀온 적이 없었다. 물론 츠무기도 무리했을 나츠메를 위해 지금까지 여러 번 권유했긴 했지만, 나츠메는 지금은 활동에 집중해야 한다며 거절을 수없이 해왔다. 밀린 휴가를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츠무기는 음- 고민하는 듯 작게 소리를 내며 골똘히 무언가 생각했다. 아무래도 잡혀 있는 나츠메의 스케줄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골똘이 고민하던 츠무기는 마침내 결정했는지 나츠메를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다녀와요. 이왕 간 김에 하고 싶었던 것들 전부 하고 오면 되겠네요. 그리고, 복잡한 생각도 정리해봐도 좋고요.”

“...어지간히 오지랖 넓네. 신경 쓰지 마.”

“나츠메 군이라면 잘 할 수 있을 거니까 걱정은 안 해요.”

 

츠무기의 한없이 다정한 말에 말문이 막힌 나츠메는 미련 없이 뒤를 돌았다. 도망치듯 방을 나가는데 등 뒤로, 잘 지내고 와요. 또, 한 번 거절할 수 없는 따스함이 나츠메의 등을 감쌌다. 순간적으로 가려운 제 팔뚝을 손으로 꾹 잡으며 가까스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나츠메는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좋겠다. 아무렇지 않아서. 나츠메는 츠무기가 부러웠다. ‘미련’이라는 단어가 입력되지 않은 사람 같았다. 모든 이에게 상냥하고 잘 대해주던 이가 유일하게 더욱 마음을 준다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 행동인지 알지 못했던 나츠메는 자꾸만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모든 것이 새로워진 지금, 나츠메는 쉬고 싶었다.

 

1일차

왜, 이별할 때 극복하는 방법 중에 가장 좋은 기억이 담긴 장소에 가서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라 했다. 그때는 울던, 웃던 모든 감정을 쏟아내라 하던데. 문제는 츠무기와 갔던 장소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바쁜 와중에도 어딘가 많이 놀러 갔던 거 같은데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만큼 뇌리에 박힐만한 곳이 아니었나? 따사로운 햇살이 도로를 비추는 휴가 1일 차. 나츠메는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서 밖을 나왔다. 사무소 근처 공원 1바퀴 돈 나츠메는 근처 카페에서 아메리카노와 타르트를 사 들고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아메리카노 한 모금 깊게 빨아 마신 나츠메는 더위에 지친 몸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청포도가 올라간 타르트의 끄트머리를 포크로 잘게 쪼개 입안에 쏙 넣자 달콤하고 찐득한 맛이 혀를 감쌌다.

 

나, 나츠메 군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요? 누군데요?

알려주면 재미없지. 맞춰 봐.

어…. 정말 모르겠는 걸요. 나츠메 군 취향이….

 

습한 더위를 머금은 기억의 단편이 머릿속에 번뜩 떠올랐다. 선배를 짝사랑하던 자신이 놀리듯 그를 떠보던 첫날. 안절부절 당황하던 얼굴이 웃겨서 며칠을 골려줄 생각으로 있다가 진지한 마음을 담은 편지를 읽고, 용기 내 고백을 했었는데-. 이제와 나츠메 군을 사랑하는 것이 무서워요. -라며 그딴 말을 지껄였으니.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하던 못된 짓을 똑같이 해놓고서, 함께 행복해지는 미래를 한 번 생각해달라고 해놓고서. 무섭다-. 나츠메는 포크를 내려놓고 한숨을 땅이 꺼지라 내뱉었다. 너무 달아서 떫은맛이 혀끝을 아리게 만들었다. 푸른 하늘에 실타래를 풀어내듯 퍼져 나가는 구름이 천천히 바람을 타고 밀려난다. 33도의 더위를 이기지 못한 네모난 얼음은 유리잔에 구겨지고 부딪혀 아래로 꺼지듯 내려갔다. 송골송골 맺혀 있는 물방울을 엄지로 쓸어내린 나츠메는 조용히 읊조렸다. 나쁜 인간. 난, 타르트 좋아하지도 않는데, 그때 타르트가 먹고 싶잖아.

2일 차

츠무기가 왜 자신과의 사랑을 무서워했을까- 본질적으로 알고 싶어졌다. 나츠메는 자신이 츠무기가 유일하게 사랑이란 감정을 가지게 한 존재-라는 것에 믿어 의심치 않았다. 확신이 없었나? 내가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나? 그렇다고 하기엔 푹푹 찌는 여름날 옥상에서 그에게 당돌히 입술 박치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밤늦게 가로등만 훤히 빛을 뿜는 공원 벤치에 앉은 나츠메는 말차 음료수를 벌컥벌컥 마시며 하늘을 올려다 봤다. 츠무기가 한창 야근 일로 바빠 나츠메와 데이트를 거의 못 했던 적이 몇 달 정도 있었다. 나츠메야 그가 워낙 바쁘기도 했고, 지속되는 야근에 그의 건강이 걱정됐는데 오히려 츠무기는 나츠메에게 자신이 소홀히 한다고 생각했는지 그 바쁜 와중에도 잠을 잘 못 자는 나츠메를 위해 꼭 새벽 산책을 함께 해줬다. 오늘도 잠이 쉽사리 오지 않는 밤이지만, 혼자다. 풀벌레 소리가 마구잡이로 공원을 감싸자 습한 더위는 어느새 물러나 여름날에 무척 소중한 산뜻한 공기가 코 밑에 머물렀다.

나츠메 군이 잠을 푹 자면 좋겠는데요.

누구때문에 못 자는지 알았으면 좋겠는데.

...미안해요. 내일은 진짜 정시 퇴근이란 걸 해볼게요.

알면 됐어. 아프지나 마.

벤치에 앉아 소소하게 나누던 대화가 생각났다. 츠무기는 자신보다 이르게 어른이 되어 이런저런 고민이 많았다. 그게 눈에 보였는데도 츠무기는 한 번도 자신에게 털어놓지 않았다. 조금은 같이 나누면 좋았을 텐데, 자신이 아직 어려서 그런 걸까 싶어서 가끔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러면, 조금 더 가까이 미묘하게 거리감이 있는 이 사이를 한 번에 좁힐 수 있지 않을까-라고 단순하게 믿었다. 사귀었을 때의 츠무기는 땀이 절로 나는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손을 잡아줬다. 풀벌레 소리 사이로 선명하게 들리는 낮은 웃음소리가 불면증으로 예민하던 새벽을 녹여주었다-. 나츠메도 츠무기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말 못할 응어리를 조금이라도 녹여줄 수 있는 존재가- 그에게 단어로 정의될 만큼 특별한 존재로 남는 것은 바라지도 않았다. 다른 이들과 똑같이 평범하고도, 동등한 사랑,

갑자기 나츠메의 숨이 턱- 멈췄다. 고요하게 머무는 새벽이 나츠메의 주변을 머물렀다. 드디어 답에 대한 실마리를 찾은 것 같다. 나츠메는 지금까지 한 번도 츠무기를 이해하지 못 했다. 헤어진 이유도 알지 못 했다. 그리고, 그가 나를 사랑할 이유도 찾지 못 했다.

"선배는 도대체 왜 날, 사랑하는 거야? 그때도-."

나츠메의 시선 끝에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누군가의 구두가 보였다.

"그리고, 지금도."

나츠메가 다 먹고 구겨놓은 말차 음료수와 똑같은 음료수를 한 손에 들고 서 있는 츠무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츠메는 츠무기의 손에 들린 것을 보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제야 알게 되었다. 나는 저런 바보 같은 사랑을 할 자신이 없었다는 것을.

츠무기가 배웠다는 '사랑'의 범위가 어쩌면 나츠메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넓고 고귀할 지도 모른다.

딱 하나 확실한 것은 자신은 선배를 얕봤다. 정확히는 선배의 사랑을. 그리고 당신도 미련이 남았다는 것을.

3일차

새벽의 만남은 짧았고, 츠무기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다. 차마 나츠메의 표정을 더 들여다 볼 자신이 없었다.

선배는 도대체 왜 날, 사랑하는 거야?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심장이 쿵-하고 떨어졌다. 기어코 나츠메는 눈치를 챘다. 밀어낸 것은 본인이었지만, 받아들이는 문제는 나츠메에게 달려 있었다. 그래서 충분히 시간을 주려고 했던 것이었는데-. 나츠메가 눈치를 채버렸다. 아직, 나츠메를 사랑한다는 것을. 일찍이 츠무기는 나츠메와의 미래를 그렸다. 그의 본업을 존중해주며, 더 나아가 함께 할 행복한 미래를 위해 어떤 것을 해야 할까 열심히 계획하고 이어 나갔다.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츠메는 아직 어리고, 살아갈 날이 많은데 그 많은 날들을 나로만 함께 살아도 되는 걸까? 그에게 너무 가혹한 것은 아닐까? 한 번 피어난 불안은 끝없이 번져 나갔고, 결국 그를 사랑하는 것이 무서워졌다. 행복하게 만들어주려고 했는데 오히려 망치는 거 같았으니까. 새벽에 만난 나츠메는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 슬퍼서 마주하는 게 힘들었다. 내가 그 아이를 힘들게 하는 구나. 스탠드 불빛만 잔잔하게 흐르는 사무실 안에서 츠무기는 제 손을 만지작거렸다. 손 아래로 깔린 서류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노트북 화면에는 백색 배경에 뭐라도 적으라고 재촉하듯 커서만 반짝였다. 그 날이 떠올랐다. 부술 것처럼 옥상 문을 박차고 달려와 자신에게 안기던 그 아이가, 눈물자욱 가득하게 묻히고서 제 마음이 서툴게 담긴 질문에 소리치며 와다다 대답하던 사카사키 나츠메가.

생각해볼게. 그런 미래라면.

나는 노력한다고 했다. 지금은 노력하고 있는 건가? 츠무기의 몸이 굳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자신의 안일한 판단으로 감히 그에게 이별을 고했다. 아니, 회피했다.

비가 내린다. 톡톡-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바래진 추억을 불렀다. 그를 향한 사랑을 담은 편지지를 모조리 모아 버릴 만큼 나쁜 짓을 저지르고, 자신도 그중 한 명이 되어 꾹꾹 그의 이름을 수백 번 적었다. 나츠메가 짝사랑하던 사람이 자신인지 모르고 바보같이 질투하던 날들이 느리게 머릿속에서 흘러갔다. 나란 사람은 너를 순수하게 사랑하지 않았어요.

츠무기는 멍하니 노트북 화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제 서랍 한 칸을 벌컥 열었다. 종이가 스쳐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딸깍- 꽤 오래전 울렸던 맑고 경쾌한 소리가 진중하게 들렸다. 그는 다시금 결심을 한다. 비바람이 휘몰아치던 날, 자신을 데려왔던 나츠메의 용기를 뒤늦게 보답하는 마음으로.

나츠메 군에게-.

D-Day

3일을 쉬어서 그런가 아님, 비가 와서 그런가. 나츠메는 오랜만에 회사로 갈 생각에 몸이 맘대로 되지 않았다. 아니 그런 것보다 어제 마주한 츠무기를 다시 마주하려니 꺼려지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일은 해야 한다. 쭈뼛쭈뼛 들어간 사무소에서 직원들과 인사한 후 사무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손잡이를 돌리기가 망설여졌지만, 숨을 들이키고 문을 열었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츠무기는 보이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잔뜩 지친 얼굴로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을 텐데 어디로 간 거지? 떨떠름한 채 사무실을 나가려고 했다가 그의 책상에 보기 드문 것이 보였다. 누가 봐도 편지. 그것도 아주 정성스럽게 쓴 편지처럼 보이는 것. 요즘도 이런 편지를 쓰는 사람이 있나? 흥미를 느낀 나츠메는 도둑고양이처럼 슬금슬금 책상에 다가가 편지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눈길을 끄는 이름이 보였다.

나츠메 군에게.

순간적으로 펑-하고 터지는 불꽃축제 한 가운데에 있는 거 같았다. 나츠메는 허겁지겁 편지를 뜯어 읽기 시작했다. 다 읽지도 않은 거 같은데 나츠메는 편지를 꽉 잡은 채 사무소를 박차고 나갔다. 엘레베이터 하강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탁탁- 쳐댔다. 황급히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받지 않았다. 손이 마구 떨려 어딨냐고 오타까지 내가며 문자를 전송했다. 답은 오지 않는다. 건물 바깥으로 나온 나츠메는 무작정 달렸다. 빌어먹을 선배. 나츠메는 계속해서 츠무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 그때와는 알 수가 없었다. 우리가 사랑을 나누고 웃고 떠들었던 곳은 시간과 비례하여 많았다. 빌딩 바깥으로 나오자 우산으로 우루루 모여있는 도보 위로 빗방울이 거세게 떨어졌다. 그때, 뚜둑. 지루하게 들리던 연결음이 끊겼다. 고요하리만큼 정적이 흐르는 순간, 나츠메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선배, 어디야."

빗물에 추적하게 젖은 공원의 풀내음이 짙게 깔려 있었다. 나츠메는 어제 앉아 있었던 벤치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가도 하필 여기라니. 새벽의 일이 생각나 입술을 절로 깨물었다. 어느덧 물안개 사이로 어떤 바보가 우산을 펼치고 벤치에 앉아 있었다. 우산 모서로 끝으로 물방울이 툭툭 걸려 떨어지고 있다. 나츠메가 가까이 가서야 우산이 움직이고, 마침내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나츠메는 참지 않고 그에게 매섭게 말했다.

"선배. 악질이네."

"...하하."

"이런 거 좋아해? 즐겨? 변태 아저씨."

"나츠메 군은 이런 거 이제 싫나요."

"...싫었으면 왔겠어?"

나츠메의 말에 츠무기는 푸핫- 크게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리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우산을 쓰고 있는 나츠메 위로 굳이 우산을 씌어주었다. 나츠메 위로는 비가 떨어지지 않았다. 츠무기의 안경이 살짝 물기가 묻어 있었다. 그는 특유의 다정한 눈빛으로 나츠메를 내려다봤다.

"그래서 나츠메 군의 답은 뭘까요?"

타악-. 우산이 접히는 소리와 동시에 접지 않은 우산이 중심을 못 잡고 흔들렸다. 빗방울이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졌고, 흙탕물로 더러워진 신발의 발꿈치가 땅에서 들려 있었다. 기울어진 우산이 똑바로 세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어느덧 하늘은 맑게 개어 푸른 하늘과 함께 시원한 바람이 스쳤다. 둘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이는 대화가 이어졌다.

"앞으로 이런 말 하지 마."

"당연하죠. 인생의 딱 한 번, 너에게만 하는 건데요."

"...짜증나게 말은 잘 해. 나중에 제대로 해. 이런 건 프로포즈로 생각도 안 할 거야."

"하하하-. 알았어요. 제대로 해볼게요."

"그런 미래라면 나도 고민 해볼 테니까."

"네."

그런 의미로 우리 다시 반지 맞출까요. 오래 껴야 하니까.

내 일생을 너에게 줘도 괜찮을까요. 나츠메 군.

♬ Official髭男dism - Subtitle

https://youtu.be/MQhfIP4WlEc?si=Bcdi4g9OqhRrxnuF

愛してるよりも愛が届くまで もう少しだけ待ってて
사랑해보다도 사랑이 전해질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줘


이번에는 펜슬로 연성을 썼습니다.

고백편지실종사건의 뒷 이야기처럼 적었는데 두서 없는 스토리... 오랜만에 연성 적어서 어색하고 부족함 많네요...후후

중간중간 문장 중 무언가도 있으니 함 찾아보셔요...ㅎㅎ 별 거 아니긴 합니다.

다들 즐거운 하루 보내시고 츠무나츠도 계속 좋아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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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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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감성적인 토끼

    여름이 최고로 잘 어울리는 츰낯..덥고 비 오는 여름이라 또 읽으러 찾아왔습니다. 숨겨진 문장 찾고 더 그들이 좋아졌어요. 최고의 연성 감사합니다. 요즘 더운데 자족님 건강 잘 챙기시고 행복한 츰낯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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