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E] 구제불능 데칼코마니 上
브범
※ 전쟁 발발 이후 초반엔 어색했다가 우여곡절을 겪고 ‘우리끼리 있을 때는 싸우지 말자’ 비밀 약속을 만든 게 아닐까 싶어서 쓴 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메가트론인 줄 알았는데."
못으로 고정된 것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다.
"너네 대장도 제법 무서운 구석이 있어."
범블비는 얼마 남지 않은 힘을 짜내어 버둥거렸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빠져나가지 못하게 짓눌린 팔이 아파, 저도 모르게 그만 신음을 흘렸다.
"아윽..."
외장갑이 크게 손상된 팔. 뜯겨나간 상처를 통해 타거나 찢어진 전선이 들여다보였다. 부상은 팔 뿐만이 아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드물었다.
팔을 짓누르던 손이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범블비가 반항한다면 언제든 제압할 수 있게, 하지만 상처를 자극하지 않는 간격 내에서 표면을 타고 미끄러지듯 올라간 손이 범블비의 손을 꾹 눌렀다.
폭발에 휘말리며 손바닥이 쓸려나갔는지 맞닿은 부분이 쓰라렸다. 범블비는 아픈 내색을 하는 대신 최대한 덤덤한 음성으로 청했다. 폭발의 여파는 음성 장치에도 영향을 미쳤는지 말할 때마다 끽끽 대는 소리가 났다.
"이거 놔, 브레이크다운."
브레이크다운은 그 말에 따르지 않았다. 그는 제 아래에 깔린 범블비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오랜만에 본 친우는 몹시 낯설었다.
"내가 묻는 말에 솔직히 대답해주면 생각해볼게."
"너와 장난할 시간 없어."
브레이크다운의 고개가 사선으로 기울었다. 이렇게 하면 상처 뒤에 숨은 익숙한 얼굴을 발견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러나 소득은 없었다.
"나도 장난치고 싶은 마음 없어. 적어도 지금 당장은."
제아무리 범블비가 힘이 세다 한들, 현재 그는 중상이었다. 그리고 상대방은 상처 하나 없이 말끔했다. 상대방과는 몇 번 힘겨루기를 한 경험이 있었다. 멀쩡한 상태로도 이기기 힘들었는데 지금 상태로는 재볼 것도 없다.
그래도 범블비는 빠져나갈 구석이 아직 있다고 믿는지 몇 번이고 몸부림 쳤다. 하지만 전부 실패로 돌아갔다.
"방금 전 네가 들고 있던 거. 정체가 뭐야?"
허를 찔린 메크처럼 범블비는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했다. 종국에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브레이크다운이 그를 추궁했다.
"범블비."
"네가 알 거 없어."
"아니, 난 알아야겠어."
자기장을 띈 폭풍 소리가 침묵을 대신하여 그들 주위를 맴돌았다. 먼저 인내심이 바닥난 쪽은 브레이크다운이었다.
"독약이야?"
그들과 멀지 않은 곳. 깨진 병 하나가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세게 팽개친 것처럼 깨져버린 병 밑으로 파란색 액체가 흘러나와 바닥을 적셨다.
전쟁의 판도를 결정 짓는 건 자원이다. 예상보다 빠르게 자원이 고갈되자 오토봇은 자원 확보에 주력했다. 부상병과 급습에 대비해 남겨둔 소수를 제외하고 모두가 에너존을 찾느라 옵틱에 불을 켰다.
각고의 노력 끝에 가까스로 에너존이 매장됐다 추정되는 지역을 발견했다. 하나 걸리는 문제가 있었다. 디셉티콘 진영과 가까워도 너무 가까웠다. 몇몇은 위험하다며 난색을 보였지만 옵티머스는 물러나지 않았다.
보다 정확한 위치 파악을 위해 옵티머스를 선두로 범블비를 포함하여 오토봇 몇 명이 파견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범블비는 그저 좋았다. 존경하는 옵티머스 프라임과 함께 임무를 수행하다니. 참으로 운수가 좋은 날이라며 속없이 기뻐했다.
그의 기쁨은 얼마 가지 못 했다. 디셉티콘이 설치한 부비트랩에 옵티머스가 걸려들며 범블비의 기쁨 또한 산산조각이 났다. 함정에 걸린 동료를 구하려다 벌어진 참사였다. 모두가 혼란에 빠졌다. 부비트랩이 발동했으니 곧 디셉티콘이 이를 알고 달려올 게 불 보듯 훤했다.
지시를 내려줄 프라임은 중상으로 혼수상태. 다들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던 그때 범블비가 작전을 냈다. 자신이 흔적을 지우고 디셉티콘을 따돌릴 동안 나머지 인원들은 구조가 올 때까지 옵티머스를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킨다. 달리 좋은 수도 없었기에 모두 범블비의 작전에 동의했다.
속도전이라면 자신 있었다. 부상이야 좀 입겠지만 오토봇이라면 하나쯤 달게 되는 훈장이다. 디셉티콘을 따돌리고 무사히 합류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운명의 신은 범블비 편이 아니었다.
격렬한 교전 도중 난데없이 찾아온 자기장 폭풍이 디셉티콘은 물론이거니와 범블비까지 한꺼번에 덮쳤다. 거기서 어떻게 벗어났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보면 웬 동굴 안이었다.
"망했다...."
동체 상태는 엉망진창이었고 챙겨둔 응급 키트도 없었다. 폭풍의 기세를 봤을 때 당장 가라앉을 것 같지 않았다. 여기 오기 전, 휠잭이 언급했던 게 떠올랐다.
'여긴 자기장 폭풍이 자주 몰아치는 곳이야. 타이밍이 어긋나면 사흘 동안 폭풍 안에 갇힐 수도 있어. 그러니까 조심해.'
사흘이라.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엉망진창이 된 동체로. 비상용 에너존 하나 없이. 시야가 어지러웠다. 범블비는 벽에 기대어 앉았다.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던 그는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범블비가 꺼낸 것은 아주 작고 반투명한 병이었다. 새파란 액체가 병 안에서 찰랑거렸다. 먹으면 메모리 회로가 오염되고 복용자와 약간만 접촉해도 감염될 수 있는 바이러스가 잠재된 독. 물론 복용자는 약효가 도는 즉시 사망이다.
언젠가 디셉티콘에 붙잡혀 탈출할 길이 요원할 때를 대비한 독이었다. 곱게 죽으면 메모리 회로는 기밀 정보가 노출될 위험이 크고, 시체는 동료들을 낚을 미끼가 된다. 그렇게 되느니 자신의 시체를 수습할 수 없게 되더라도 이 편이 낫다.
'아냐, 이건 정말 선택지가 없을 때...'
범블비는 약병을 다시 넣으려 했다. 그보다 누군가가 빠르게 그의 손을 쳐냈다. 범블비의 손에서 빠져나간 약병이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윽...!"
중상을 입은 동체는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기습에 대응하기도 전에 그의 동체는 힘에 밀려,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반격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이 상대방이 체중을 실어 자신을 짓누르는 게 느껴졌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메가트론인 줄 알았는데."
범블비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아, 하필이면 여기서.
"너네 대장도 제법 무서운 구석이 있어."
제일 마주치기 싫은 상대를 만나다니.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