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포머

[TFE] 구제불능 데칼코마니 中

브범

낯설다. 오랜만에 본 친우의 외형은 기억 속 그대로였지만 분위기는 예전과 전혀 달랐다. 무엇보다 범블비는 제게 아무리 화가 나도 지금처럼 살기등등한 눈빛을 보낸 적이 없었다.

상처 가득한 팔이 빠져나가려 한차례 크게 들썩였다. 그러나 소용 없는 짓이었다. 범블비가 짓씹듯이 말했다.

"이거 놔."

브레이크다운의 손에 힘이 실렸다.

"놓으면. 뭘 어쩌게?"

"너와 상관 없는 일이야."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형제라 부를 만큼 가까웠다. 적어도 브레이크다운은 범블비를 그리 여겼다. 그렇기에 '너와 상관 없다'라는 말은 단순히 선을 긋는 수준을 넘어 배제하는 것과 진배없는 소리였다.

"워우, 뭐 그런 섭섭한 말을."

엄살 부리는 시늉도 잠시, 브레이크다운이 비아냥을 섞어 말했다.

"난 내 친구가 똑똑하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내가 잘못 생각했나 봐."

그는 좀 전에 본 기억을 반추했다. 새파란 시약을 두고 깊게 고민하던 범블비. 부상 때문일 수도 있지만 피로로 짙게 얼룩진 그의 옆모습을 본 순간 브레이크다운은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었다.

"저딴 멍청한 선택을 하다니."

반응을 떠보기 위해 일부러 자극적인 단어만 골라 던졌다. 효과는 아주 좋았다.

"말조심해. 네가 뭘 알아."

"잘 알지. 내가 아는 범블비는 아득바득 버틸 녀석이지, 어쭙잖게 포기할 놈이 아니야. 내가 틀렸다면 말해봐, 비."

말해보라고 했지만 정말로 대답을 바란 게 아닌지 브레이크다운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게 아니면 옵티머스야?"

범블비는 대꾸하지 않았다. 브레이크다운은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그가 코웃음을 쳤다.

"가엾기도 하지. 이거 완전히 날개가 떨어진 벌 신세군. 옵티머스도 매정한 구석이 있어. 충성스러운 부하를 하루아침에 이런 식으로 내다 버리고."

범블비는 브레이크다운을 있는 힘껏 걷어찼다. 팔과 달리 다리는 비교적 자유로운 상태라 가능한 반항이었다.

"옵티머스를 모욕하지 마. 그는 날 버리지 않았어!"

그 놈의 옵티머스 프라임. 사실 그는 사이비 교주에 천부적 재능을 지닌 게 아닐까.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멀쩡했던 내 친구를 저리 구워삶을 수 있지. 브레이크다운은 이 같은 생각을 하며 설득을 시도했다.

"범블비, 그냥 인정해. 옵티머스 프라임은 널 버렸어. 네가 죽든 말든 상관 안 해."

"이건 어디까지나 내 선택이야!"

브레이크다운은 제 오디오 센서를 의심했다.

"뭐?"

인정하기 싫어 억지 부리는 거라 믿고 싶었다. 하지만 범블비는 그의 실낱같은 기대를 와장창 박살 냈다.

"옵티머스와는 상관 없어. 나 스스로 고심해서 내린..."

급격한 흥분은 부상자에게 나쁜 영향을 미쳤다. 체내를 순환해야 할 에너존이 범블비 입을 통해 왈칵 쏟아졌다. 동시에 온갖 에러 알림창이 범블비 시야를 지배했다.

"어... 으..."

"비!"

정말로 한계였다. 시야가 빙빙 돌았다. 급격히 가까워지는 바닥을 뒤로 하고 범블비는 정신을 잃었다.

디셉티콘 처치실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 범블비는 '동체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라는 묘사를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범블비는 처치대 위에서 벌떡 일어나 자기 상태를 허겁지겁 확인했다. 팔다리 전부 멀쩡하고, 머리 성히 붙어있고, 이상한 것이 부착되어 있지도 않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범블비는 다시 한번 동체 상태를 확인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기절하기 전보다 동체가 훨씬 가벼웠다. 부상 입은 곳마다 얼기설기 처치를 한 흔적이 보였다. 디셉티콘 처치실에서 오토봇인 자신에게 이런 호의를 베풀만한 메크는 단 한 명 밖에 없었다.

처치실 문이 한차례 달그락거렸다. 틈새로 들어온 바람 때문인 것 같았다. 지금쯤이면 폭풍도 가라앉았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범블비는 밖으로 나섰다.

"...여전하네."

조그맣게 뚫어놓은 창문을 통해 외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자기장을 온몸에 두른 모래 폭풍은 침입자로부터 요새를 지키는 문지기처럼 주변 일대를 서성였다. 문제는 안에 있는 메크도 나갈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이거야 원, 그야말로 성에 갇힌 공주님이다.

"폭풍이 지나가려면 적어도 하루는 있어야 할 거야."

어디 있었는지 브레이크다운이 뒤에서 불쑥 나타났다. 범블비는 흠칫 놀랐지만 기절하기 전처럼 경계하지 않았다. 다짜고짜 스팅어부터 겨누지 않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호의였다.

"여기가 어디야?"

"대피소. 정확히는 작업장 쉼터."

"작업장이라면... 설마."

"네가 생각하는 그 설마가 맞아."

"...에너존."

부비트랩을 발견한 순간부터 어느 정도 예상한 전개였다. 디셉티콘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진영 근처에 자리한 에너존 매장지를 눈치 못 채는 게 이상하다. 하지만 거기까지 알게 되더라도 오토봇은 리스크를 감수할 각오로 급습했을 것이다. 그만큼 자원난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곳에 나 같은 오토봇을 데려와도 괜찮아? 치료까지 해주고."

그 말을 듣고 브레이크다운은 "하하하" 웃다가 폭탄 발언을 터뜨렸다.

"내가 그걸 걱정했으면 자기장 폭풍을 뚫고 널 구하지도 않았어."

참고로 범블비와 교전했던 디셉티콘들은 휩쓸려 어디론가 날아갔다며 태평스럽게 덧붙였다.

범블비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해석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확히 10초 뒤. 해석을 끝마친 그는 펄쩍 뛰었다.

"너 미쳤어? 죽으려고 작정했지, 아주!"

뭍에 갓 올라온 활어처럼 팔딱팔딱 뛰는 반응이 아주 재밌었다. 그제야 자기가 알던 범블비가 조금씩 드러나는 게 보여, 브레이크다운은 마음 놓고 낄낄 웃었다.

"비, 난 스턴티콘이야. 위험은 내게 장애물이 아니라 또 다른 동력이라고."

범블비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한동안 못 만나서 잠시 잊었었다. 스턴티콘을 대하는 자세를. 

누군가가 말했다. 스턴티콘을 대하는 방식엔 크게 3가지가 있다고. 같이 미치거나, 미치기 전에 떠나거나, 있는 그대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거나. 범블비는 세번째에 속하려 노력하는 쪽이었다.

"....어쨌든,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난 거기서 잘못 됐겠지."

"그래. 같이 잘못 될 거 각오하고 구해줬더니 구해준 당사자는 죽으려 하질 않나. 내가 얼마나 어이없었는지 알아?"

"그건..."

진짜 죽으려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진실을 말하면 브레이크다운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털어놓게 될 것만 같았다.

"미안한데 나 좀 더 쉬고 싶어. 어디 쉴만한 곳 없어?"

물에서 꺼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땡깡 부리는 메크가 된 거 같았지만, 범블비는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오히려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브레이크다운은 친절하게도 개인실까지 안내해주었다.

"여기서 쉬면 돼. 보안 시스템 같은 건 없으니까 염려하지 마."

"알았어."

"그렇다고 도청 장치 달지는 말고."

"안 해."

브레이크다운이 킥킥 웃었다. 그의 웃음에서 범블비는 잠시나마 옛날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럼 푹 쉬어, 범블비."

그랬던 때가 있었는데. 점차 멀어지는 그의 등만 바라보다 범블비는 개인실로 들어갔다. 오랫동안 쓰지 않았는지 실내는 어딘가 차갑고 휑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범블비는 문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머리가 복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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