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고도 이상한 서점
9월 26일부터 시작한 하루 300자 또는 10분이상 글쓰기의 결과물.
※ 시점은 비스트의 서막 이후, 범블비(2018)와 비스트의 서막(2023) 내의 이야기가 다수 언급됩니다.
※ 트랜스포머 시네마틱 시리즈 리부트 작 옵티머스 프라임과의 드림 연성 글입니다. 드림에 면역력이 없다면 열람을 권하지 않습니다.
※ 드림 주 테리스에 대한 사항은 옆의 링크를 참조해 주세요 → https://pnxl.me/stqis0
※ 글 내에 언급된 지명과 인물은 실제 인물과 지명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 거리에는 특이한 서점이 있다고 했다. 괴팍한 노인이 운영하던 으스스한, 하지만 그저 평범한 헌책방이었으나.
"여기 맞아?"
"맞다고. 밀지 마!"
"와 보자고 했잖아! 아니면, 그냥 갈까?"
이상한 차림새를 한 정체불명의 존재가 운영한다는 서점. 누군가는 그 서점에서 비명을 들었다고도 했고, 누군가는 끌려가는 모양새를 봤다고도 했다. 비디오테이프에 나온 영상은 화질이 좋지 않았지만, 문을 열어본 이의 절규와 몸부림이 담겨있었다. 서점 문을 마주하고도, 파이프를 들고 비디오카메라를 든 이들의 눈에서는 긴장과 한편의 희열이 담겨 있었다.
"거 젊은이들, 들어갈 생각 없으면 비키시오. 그 쇠붙이는 내려놓고."
잔뜩 긴장한, 젊은 청년들 눈이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지팡이를 짚고 있던 작은 체구의 노인이 청년들의 험악한 표정에 맞서 눈썹을 치켜올렸다.
"안 비켜? 변기 막은 휴지 조각처럼 막지 말고 비키라고!"
"이 노인네가!"
어느 말에 화났을지 모른다. 단어의 문제인지 아니면 작디작은 이에게 휴지라고 비교를 당해서일까. 어느새 서점은 까맣게 잊어버린 그들이 귓가에 경첩이 끼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어머, 스미스 부인, 어서 오세요. 처음 보는 손님들이시네요. 무슨 일이지요? 이런, 용무 없이 가시는군요?
용무를 묻는 이를 본 순간 비명을 지르며 멀어지는 청년들의 모습을 보며, 스미스 부인의 표정에는 불쾌함도 후련한 표정도 없었다.
"도전할 생각도 없는 멍청이들인데 용무가 있겠어?"
- 서점이 도전이 필요한 곳이라고 생각은 못 했는데요.
"그러니 휴지 조각보다 못한 놈들이지. 차 한잔 부탁해."
- 평소의 홍차로 내올게요.
성큼성큼 지팡이를 짚으며 들어오는 스미스 부인에게 길을 비켜준 이가 다시 한번 거리를 보았다. 아니, 베일의 움직임이 밖으로 향했을 뿐, 시선이 갔는지는 모른다. 낮게 깔린 구름은 햇볕조차 가렸고, 그렇기에 베일 안의 윤곽을 구분할 수 없게 하였다. 낡은 건물과 오래된 거리를 쓸고 불어오는 습기 찬 바람에 베일이 물결쳤다.
- 다음에는 어떻게 놀려드릴까요.
흐트러진 베일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흐린 하늘을 보는 눈도, 웃음을 흘리는 입도 없었다. 하지만 곧 웃음은 잦아들고 베일을 마저 정리한 이가 문을 닫았다.
- 요즘 가게는 어떠세요?
"오늘도 서점 열기 전에 보러 왔다면서 얼굴 들이밀었잖아. 뭘 물어?"
- 그래도 듣고 싶은데요?
자신이 읽던 책을 찾다가 파랗고 빨간 금속의 거인이 건네주는 책을 받아 안락의자에 앉는 부인에게 다가가, 테리스가 물었다. 직원이 채용되자 긴 휴가를 떠난 주인이 동네 사랑방 역할로서도 서점을 운영하였더란다. 책을 사지 않는 이상 서점이 유지될 수 있나 의문을 가질 법도 하건만, 테리스도 별다른 물음은 없이 이 역할을 물려받았다. 그리고 아직도 서점은 운영되고 있다.
"뭐 그렇지. 옷을 맡기러 온 사람, 수선하러 온 사람, 옷에 대해 1시간 내내 떠들 기세의 실오라기보다 가벼운-."
- 호.
"세탁소 주인을 앞에 두고 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면 대단해 보이는 줄 알아?"
- 주의를 부탁하고 싶었다기엔, 그렇다기엔 부인께서 이렇게 말하시진 않겠죠.
테리스의 웃음이 담긴 물음에 드세게 치켜 올라와 있던 눈썹이 늘어졌다. 따듯한 잔을 꼭 잡고, 무릎에 놓인 책을 보던 이에게서 한숨과 같은 말이 들렸다.
"차 한 잔 더 부탁해."
- 그럴게요.
머그잔에 따듯한 물을 담아 잔을 데우고, 부인이 좋아하는 향긋한 꽃향기와 스모키한 향이 어우러진 홍차를 우리는 테리스에게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요즘은 죽을 이를 위한 옷을 맡기는 일은 없어서 좋아."
- 좋은 일이네요.
"다행이지. 관에 누일 이에게 입힌다고 옷 들고 찾아오는 날이 안 그런 날보다 많았잖아."
- 그러셨다고 했지요.
"그래도 옷이라도 들고 찾아오면 다행이지. 사람은 없어졌는데 시신도 없으면, 그러면."
- 차 여기 있습니다.
부인이 앉은 자리 옆 탁자에 차를 내려놓으며 테리스가 움츠러든 덕에 더욱 작아 보이는 부인의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말을 끊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게 되었고, 실례였지만 테리스도 스미스 부인도 그에 대한 사과나 지적은 없었다. 낮아진 테리스의 시선은 부인을 바라봤고, 머그잔을 잡아 든 부인의 시선도 곧 테리스를 향했다.
[담요가 필요해 보였다]
그런 두 존재 사이에 낡은 담요가 시선을 가렸다. 담요를 집어 든 손가락은 망설임을 담고 부인의 무릎에 가까이 다가왔으나 이내 멈추었다.
- 제가 덮어드리죠.
[서점 밖의 온도가 낮아지고 있다. 부탁하네]
테리스가 덮어주는 담요 위에 손을 얹으며 눈가가 붉어진 부인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가 올까?"
- 습한 내음이 섞이고 피부에 달라붙는 느낌의 바람이었지요.
[그 말대로, 습도가 높아지고 있다]
- 돌아가실 때 서점에 있는 우산 가져가세요, 부인.
"가는 길에 그 아이 좀 보고 가야겠어."
물끄러미 서점 벽면에 걸려 있는 시계를 보던 부인이 차를 마셨다. 시계의 낡은 부품이 맞물리며 돌아가는 소리가 서점 안을 통통거리며 들렸다.
- 그러려면 우산이 꼭 필요하시겠어요. 튼튼한 우산으로 찾아 놓을게요.
[무슨 생각을 하는가?]
품에 책이 들은 종이봉투를 꼭 끌어안고 커다란 우산을 들고 서서히 멀어지는 부인의 뒷모습을 보는 테리스에게 옵티머스가 조용히 물었다.
- 조금은 제가 하는 일이 유의미한 결과를 내고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더랍니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빗줄기 사이로 부인의 모습이 사라진 지 한참이 지난 후에야 테리스는 서점의 문을 닫았다. 한참 동안 빗소리를 들어서인가, 시계의 초침이 똑딱거리며 흘러가는 소리가 바깥의 빗소리와도 닮았다고 옵티머스는 생각했다. 그 부인이 안전한 곳에 도착할 때까지 감각을 확장해 살폈기에 문을 닫지 않았을 터였다. 며칠 후 열릴 독서 모임의 안내문을 정리하는 테리스를 옵티머스는 가만히 내려보았다.
[회의감이 들던가?]
- 인간은 자신을 위한다고, 그러니 동족을 해치는 일을 스스럼없이 할 거라는 회의감 말이죠.
모서리가 접힌 종이를 단정히 펴내고는 테리스가 손가락으로 베일을 톡톡 쳤다. 인간으로 치면 입술이 있는 부분이었다. 인간으로서 테리스의 육신을 제공한 이의 버릇이라고 했다.
- 없었다고는 안 하겠어요. 소문이 돌아 이 거리의 그림자를 피로 물들이는 인간들이 몸을 사릴 법한데. 라고, 생각했답니다.
[하지만 그대는 그 일을 계속하고 있잖나]
- 어떤 절지동물은 애벌레에서 성체까지 자라는데 약 3년에서 7년이란 시간이 걸린답니다. 17년이 걸리는 아이들도 있다고 해요. 어떤 이름인지 아시나요?
예상치 못한 튀어나오는 질문에 반문할 법도 하건만 옵티머스는 곧바로 말을 받았다.
[모른다. 하지만, 그 시간은 우리가 지구에 온 시간보다도 긴 시간이군]
- 매미라고 불러요. 성체가 되면 여름, 그 더운 계절을 보내곤 생의 주기가 끝나죠. 그 아이들의 생보다 짧은 시간을 해놓고 손 털기에는 너무 짧지 않아? 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런가]
테리스는 자신보다 훨씬 큰, 금속으로 이뤄진 생명체가 우뚝 선 채 침묵하는 모습을 보았다. 말간 가을 하늘 같은 눈은 테리스가 정돈하던 독서 모임의 종이를 응시하고 있었지만, 그에게 보이는 것은 종이에 적힌 글자가 아니리라. 그를 생각의 숲에서 불러내지 않으면, 또다시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 끝없이 곱씹고 있을지도 몰랐다.
- 그래서 생각난 김에 한 바퀴 둘러보고 오려고 해요. 마침 배달도 있고 말이죠. 같이 하실래요?
[시작 시점까지 데려다주겠네]
우산꽂이 옆에서 작은 소포를 꺼내 흔들자, 언제 생각에 잠겼냐는 듯 옵티머스 프라임이 조심스레 손을 테리스에게 내밀었다.
- 같이 배달을 가도 괜찮을 텐데요.
[그 소포의 주인은 내가 그의 가게 앞에 주차하면 내켜 하지 않더군]
- 다시 말해두지만, 그는 당신을 싫어하지 않아요.
[안다. 내가 눈에 띄는 색이라 그렇겠지]
- 아니요. 그는 트럭이 잘 생겼다고 생각하질 않는다고 해요. 가도 되겠군요.
옵티머스 프라임의 손에 올라타자, 서점 문이 누구도 만지지 않았건만 열렸다. 바람과 빗방울이 서점 안으로 들이쳤으나 사방으로 몰아치던 바람과 물방울을 투명한 그릇이 받아내듯 물결쳐 부드럽게 뭉쳤다.
[이전에는 눈에 너무 띄는 색이라고 안 했었나?]
- 그랬었지요. 이 이유는 저번 배달 갔을 때 들은 이야기랍니다.
자신을 빤히 보며 말이 없는 옵티머스 프라임을 보며 테리스의 베일 안에서 낮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 토마스는 당신을 싫어하지 않아요.
[나는 괜찮다. 가자]
확실하게 하지 않아도 되는 타인이 자신에게 가지는 감정에 대해서 들었을 때 적절한 감상이 생각나지 않으면 그는 괜찮다고 말하곤 했다. 그가 양복점 주인인 토마스를 싫어하는지는 이 태도 덕에 알 수 없었지만, 자신에게 일이 있어 그에게 부탁하곤 하는 순찰에서 토마스의 양복점이 빠지지 않기에 테리스는 되었다고 생각했다.
'모든 일을 세세히 파고들 필요는 없겠지.'
- 몽이야, 오늘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같이 못 가. 배달 다녀올 테니 오는 손님들 잘 살펴줘?
자신이 만든 얇은 막에 모여드는 빗물을 밖으로 흩뿌리기 전에 낮잠에서 깼는지 다가와 꼬리를 흔들며 다가온 갈색의 작은 생명체를 어루만졌다. 함께 하지 못함을 알아들은 듯 낑낑거리는 몽이에게 선반에 올려두었던 공을 튕겨 앞에 닿게 해주었다.
- 다녀올게.
마지막으로 몽이의 촉촉한 코를 톡톡 두들겨 주곤, 옵티머스를 올려다보았다. 서점 밖으로 작은 물벼락이 흩뿌려지는 순간, 붉고 파란 트럭이 도로를 달렸다. 순찰의 시작이다.
"웬일이냐?"
"언제나 그랬듯 커피 한잔 얻어 마시려고 왔죠."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테리스의 검은 생머리는 전혀 젖어있지 않았다. 물기가 머리카락을 미끄러지듯 굴러가 얼굴을 타고 지구를 향해 전력 질주하듯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또 내가 뭘 잊고 왔어?"
"아니에요. 그저 커피 한잔 마시려고 왔죠."
방울방울 떨어지는 물방울을 유혹하듯 움직이는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물방울이 모여졌다. 손바닥 위에 얕게 물결치는 물결을 보던 테리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천의 실이 풀어지듯 물결이 낱낱이 흩어졌다. 흔적조차 사라진 물결을 보던 테리스가 미소지었다. 들어선 양복점의 주인은 자신에게 눈길을 주고 있지 않았다.
"산책하는데 커피 한잔도 마시면서 고즈넉함을 즐기기엔 여기만큼 좋은 곳도 없으니까요."
"내 양복점은 카페가 아니야."
툴툴거리면서도 그제야 만지던 원단에서 손을 떼고는 종이필터를 꺼내는 주름진 손을 보며 테리스가 빙글 웃었다.
"그렇지만 커피는 맛있으니까요."
"그래, 네 커피 내리는 실력으론 멀었지."
낮은 웃음소리를 내는 테리스를 보며 그라인더의 손잡이를 돌리던 토마스가 잠시 뜸을 들이곤 말했다.
"한 100년 있으면 그럭저럭 마실 정도는 되겠지."
토마스가 재단하던 원단을 보던 테리스의 눈매가 즐거운 듯 휘었다.
"많이 줄었네요. 노력한 보람이 있는데요."
"아직 멀었어."
"미국의 역사보다 짧아졌으면 많이 줄었지요?"
"남북전쟁보다는 멀었지. 아직 멀었지."
낡은 그라인더의 날이 갈지 못한 원두가 툭툭 걸리듯 끊어 말한 토마스가 갈린 원두를 털어 넣고 주전자를 들었다. 그 고집스러운 말에 테리스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원단을 재단하며 공중으로 떠오른 보풀이 가라앉은 양복점에 고소하고 씁쓸한 진한 초콜릿의 향이 피어올랐다. 호흡하지 않아도 되는 자신이지만, 막 떠오른 풍부한 향을 시간이 가라앉은 듯한 장소에서 맡는 경험은 언제나 기분 좋았다.
"뉴딜 정책 발표될 정도까지는 줄여볼게요."
"내 죽기 전까진 따라잡을 테냐?"
"못할 듯싶으세요?"
능청스러운 질문에 툴툴거리는 토마스의 소리가 들렸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공기 중에 퍼지는 초콜릿 향이 좀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모서리가 닳은 탁자 위에 두 개의 커피잔이 내려졌다.
"재단하는 천이 평소 좋아하시는 원단이 아닌데,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안 해주면 하루 종일 바짓가랑이 붙들고 늘어질 듯한 녀석이 있었다."
퉁명스럽게 말하며 커피잔에 입을 대는 토마스를 보며 테리스는 찬찬히 그가 다듬던 원단을 살폈다. 구부러지고 휘어진 선들의 원단은 조금 더 반질반질해 보였지만 올올히 엮인 모양새는 조금 정교하지 못하고 흐트러진 티가 났다.
"소중한 분의 옷을 다시 옷으로 만들어달라고 하셨군요."
"옷을 들고 들어오지 않았으면 내 가게에서 시답잖은 흥정은 그만두라고 엉덩이를 차서 보냈을 텐데."
요즘 것들은. 하며 커피를 마시는 토마스의 말에 테리스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받아들이셨네요."
"그 녀석 얼굴로 보니 원단에 대해 모를 듯하고, 입던 자가 옷에 대해 아는 사람이었던 모양이야."
"잠깐 만져봐도 될까요?"
"마음대로 해."
테리스가 일어나 원단이 펼쳐진 작업대에 섰다. 손끝에 닿은 원단의 감촉은 눈으로 봤을 때보다 더 보드라웠고, 매끄러웠다.
"자주 입었지만 잘 관리하신 모양이에요. 패턴이 바래지거나 오염도 없고 삭지도 않았네요."
"그렇지."
뜯어낸 모양을 보면 코트였을 듯하다. 뉴욕의 얄궂은 겨울을 나기 좋은 두께의 천이었다. 옷을 샀을 때의 가격은 얼마였는지 알 수 없었으나 오랜 기간 입었음에도 빛과 습기와 오염으로부터 소중히 다뤄진 옷은 그 존재만으로 가치가 있었다.
"보람되시겠어요."
"그 옷에 걸맞은 놈이 되어야 할 텐데 말이지."
투덜거리는 토마스의 얼굴을 보며 테리스는 작게 웃었다. 양복점에서 입던 옷을 다시 쓰임새에 맞게 고쳐 주는 일은 드문 경우였으나, 이 거리가 생길 때부터 있었다는 양복점 주인인 토마스는 자신의 양복점이 아닌 곳에서 산 옷도 새 옷으로 만들어 주었다. 가지각색의 사연을 가진 옷들이 그의 손을 거쳐 전혀 다른 옷으로 태어나곤 했다.
"얼마 받으실 생각이세요?"
"당연히 많이 받아야지. 실 꽁다리 하나 잘 못 다루는 녀석의 옷을 맡았으니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소중하게 보살핌받은 옷을 만져보는 것도 영광이네요."
퉁명스레 말해도 자신이 아는 그는 사람이 좋아 이런 일을 해주었다. 앞으로의 일이 예상되어 테리스 또한 기분 좋게 웃었다.
"제 친구도 양복을 고민하던데 여기를 추천해 줄까 봐요."
"네 서점에 오는 녀석들? 지금도 별난 놈 옷 때문에 골치 아픈데 그만둬라."
노아가 별난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그에게는 자신과 관련된 이들이 별난 이들로 정의된 모양이었다. 별난 이들 정도로만 취급받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커피 잘 마셨습니다. 배송 물품은 여기 있어요."
"원래부터 내 거였는데 생색내긴."
하지만 계속 이렇게 근사한 커피를 마실 수 있다면 생색낸다고 말을 들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잔을 기울여 마시곤, 가져온 단추 주머니를 그에게 돌려주었다. 주머니를 받아 든 토마스가 선반 위에 상자를 꺼내 주머니에 담긴 단추를 쏟아 넣었다. 경쾌하게 상자에 채워지는 단추를 테리스는 가만히 지켜봤다.
"단추가 또 채워졌네요. 단추를 달아줘야 하는 이들이 많이 늘었다고 생각하면 될까요?"
"그럴지도."
"다들 제 역할을 해주면 좋겠네요."
"그러려면 단춧구멍들이 더 힘내야 하지 않겠냐."
아직 비워지지 않은 커피잔을 보던 토마스의 시선이 원단으로 행했다.
"이제 젊은 애들이 옷 맞춰가는 시대가 지난 건지, 아니면 그럴 자리가 줄어들었는지."
"토마스도 노력하시잖아요. 필요한 책이나 잡지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그러마."
대답은 토마스의 직설적인 성격 답지 않게 시간이 걸렸다.
"커피도 다 마셨으니 가봐야겠어요."
"그러든가."
퉁명스러운 대답이 오히려 안심되었다. 일어나 작업대로 다가가는 토마스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곤 테리스는 문으로 걸어갔다.
"장난감 같은 녀석에게 알았다고 전해줘라. 그러면 알아들을 거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캐묻지 않았다. 때가 되지 않은 말을 구태여 들을 필요는 없으니까.
"그는 당신을 싫어하지 않아요, 토마스."
"좋아해달라고 한 적도 없어. 나가 봐."
"다음에 또 커피 마시러 올게요."
웃으며 하는 말에 투덜거리며 토마스가 손을 내젓는 모습을 보곤 테리스가 문을 나섰다.
"흠, 이제 치워졌으려나."
비는 어느새 그쳐, 차양에 고여있던 물방울만 바람에 흔들거리다 떨어져 내릴 뿐이었다. 도로에 고인 물에 비치는 하늘의 모습이 선명함을 보곤 테리스가 웃었다. 양복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쓰레기는 치워졌네. 그럼, 다음 구역을 가볼까?"
[양복점 구역 외에는 청소가 필요하지 않았다는 말이지]
- 네, 퇴근길의 순찰은 또 다를지 모르겠지만요.
[오토봇의 다른 이들에게도 상황을 공유해 두겠다]
- 들켜서 곤란하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책장을 정리하는 옵티머스의 푸른 손이 잠시 머뭇거렸다. 지켜보고 있자니 다른 분류의 책을 꺼내 들곤 꽂힌 책들을 들어 살살 펴줬다. 너무 많이 꽂혀 있어 답답해 보였던 책들이 가지런해졌다.
[내 생각에는, 들키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들은 이 도시에 대한 속성을 잘 파악하고 있지]
- 그런가요?
[그렇다네]
옵티머스가 들고 있는 책은 라틴 아메리카 역사서였다. 주의 깊게 표지를 보는 그에게 테리스가 다가갔다.
- 이 책, 요즘 찾는 이가 많아져서 추가로 들여놨지요. 아직 읽어보지 않았나요?
[아직. 찾는 이가 늘었다고?]
- 네, 아마 일주일 전에 뉴스에 쿠스코의 신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뒤로요. 아하.
옵티머스가 무엇을 신경 쓰는지 그제야 알 듯하다. 분명 발굴된 신전에 참여한 이가 엘레나였고, 엘레나가 신전을 발견한 계기가 그랬었다.
- 엘레나의 발견이 화제가 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을까요.
[그럴까]
옵티머스의 어조는 평소와 다를 바 없지만 말에 숨어있는 의문을 읽을 수 있었다. 테리스가 서점 중앙 매대 옆 진열대로 다가갔다. 테리스의 움직임에 옵티머스의 시선 또한 움직였다.
- 신문이나 뉴스에서 나오는 정보는 가공되고 정제된 정보이니 뉴스나 신문에서 오토봇이 언급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여러분이 공개되면 여파가 워낙 클 테니까 말이지요.
[그렇겠지]
- 하지만 범블비가 겪었던 7년 전의 일처럼 이면을 볼 수 있는 이들은 다른 발견을 했을 가능성이 있지요.
진열된 신문을 팔락거리며 관련 정보를 찾아보던 테리스의 손이 신문지를 펼쳐 옵티머스에게 보여 주었다. 펼쳐놓은 신문과 보여준 신문 또한 쿠스코에서 발견된 신전에 대한 이야기였다.
- 오토봇에 이야기는 나와 있지는 않지만, 귀찮을 수 있는 단어가 공통으로 언급되고 있긴 하군요. 발견된 신전의 건설 시기 말이에요.
[문제가 되는가?]
- 잉카 제국이나 그들의 문명이 시작된 시기는 현재 알려져 있기론 기원전 1000년경이에요. 5000년 전 문명의 흔적이 있긴 하지만 쿠스코는 아니었지요. 그런데 쿠스코에서 문명을 형성했을 수 있는 신전이 발굴되었다는 거지요.
더 말할 필요는 없었다. 낮게 신음하는 옵티머스를 테리스가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찾아봐 줘서 고맙네. 이야기를 해봐야겠어]
- 조심을 당부한다면 지금이 기회긴 하겠군요.
[그들은 우리보다 더 오래 이곳에 은거하고 있었지]
느릿하게 나온 옵티머스의 말에 테리스의 베일이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예상치 못했다네. 우리가 지구에 대한 정보가 적어서 알 수 있지만 그들의 은거가 성공적이었다는 이야기도 되겠지]
-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통신으로 그들에게 이야기는 해두었네. 오토봇들에게도 해두었지]
- 주의가 쏠려서 좋은 일은 아니겠지요. 당신들을 노리는 이들이 다수이고 집요하다면 더욱더요. 그리고.
[그리고?]
손을 입이 있을 자리에 대며 울리는 테리스의 웃음소리에 옵티머스의 머리가 기울어졌다.
- 저 같은 호기심 가득한 이들의 흥미를 끌어버려 언제 다른 이들에게 발설될지 모른다는 걱정이 생길지도 모르잖아요?
[테리스]
- 아직은 아니지만요.
손을 들어 올리며 드물게 당혹감이 묻어있는 옵티머스의 어조에 테리스의 웃음이 커졌다. 결국 옵티머스 또한 고개를 저으며 미소 지었다.
[그래, 비밀 누설을 걱정하고 있었지]
- 과거형이군요?
[그대가 그럴 이가 아니라고 이제는 아니 말이지]
- 믿어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긴장을 풀지는 말아주세요.
[두고 보면 알겠지]
- 당신이 그런 말을 한다니 묘한 기분이에요.
옵티머스 프라임은 테리스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본인 또한 오토봇이 아닌 존재를, 고향이 아닌 이 먼 행성에서 만나 이 정도까지 신뢰를 다질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힘을 모을 수 있는 존재는 소중하니까]
노아와 엘레나, 맥시멀과의 만남에서 자신의 초조함에 왜 고향을 지켜야 하는지, 고향에 되돌아가야 하는지를 다시금 깨달아서일지도 모른다. 뜻을 함께하는 이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고 싶다.
- 신뢰란 큰 자산이긴 하지요.
돌아갈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고향을 넘어 우주를 어둠에 잠기게 할 수 있는 존재까지 알게 되었다. 자신만으론 역부족의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뜻을 함께하는 이들이 중요했다. 어쩌면, 그것뿐만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옵티머스 프라임은 하늘거리는 테리스의 베일을 내려다보았다. 별조차 반짝이지 않는 뉴욕의 밤하늘이었지만 그날의 기억 속에서 뉴욕 하늘은 별이 가득한 하늘이었다.
페루에서 돌아온 후 옵티머스 프라임은 자신을 누군가 따라다닌다고 느꼈다. 하지만 트럭으로 변신해 있을 때는 자신의 주변을 무심히 지나치는 인간들뿐 다른 이들은 없었다. 디셉티콘일지 싶었지만, 습격도 없었다. 그렇다 해도 다른 오토봇까지 위험에 빠트릴지 싶어 집결지에도 가지 않았다. 디셉티콘이라면 화근을 잘라버리려 일부러 유인하기도 해봤으나 추적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애초부터 추적자는 없었는지, 유니크론이라는 강대한 적을 물리치고 난 후 채 쉬지 못한 탓인가 싶었다. 하지만 분명, 무언가 지켜보고 있다.
"멍!" 자신의 발치에서 들리는 소리에 생각에서 빠져나온 옵티머스가 백미러를 아래로 내렸다. 연한 갈색의 복슬복슬한 작은 동물이 자신을 바라보며 짖고 있었다. 한참을 자신 주변을 배회하며 이리저리 오가던 개가 급기야 자신의 바퀴를 앞발로 밟기 시작했다.
인간보다 한참 작은, 기껏해야 엘레나의 팔보다 작은 동물의 공격이 자신에게 통하지는 않겠지만 옵티머스는 당혹감을 느꼈다. 인간들은 차로 변한 자신에게 무관심했고 도시를 배회하는 동물들은 자신의 커다란 덩치 때문인지 피하거나 그늘로 쓰는 정도였다. 이렇게 관심을 보이거나 접촉을 하는 생물은 드물었다. 그래서 가만히 있었으나 옵티머스를 향한 관심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아니 더 집요하게 자신의 주변을 돌고 바퀴를 앞발로 긁어냈다.
설마 바퀴 아래에 뭔가 있는지 생각이 미친 그가 주변을 살피곤 조심히 바퀴를 움직였다. 자신이 움직이자, 뒤로 물러나 등을 낮췄던 개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장난감, 인가.'
바퀴에 저 개의 놀잇감이 깔려 있었던 모양이었다. 보드라운 천으로 감싸인 장난감을 물자, 안에서 딸그랑 뭔가가 울리는 소리가 났다. 센서로 감지를 못할 정도로 작은 물건인지라 밟았다는 사실을 몰랐지만, 저 작은 생명체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 조심히 움직였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어 옵티머스 프라임은 조금 죄책감이 들었다.
"몽아."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집중해서 보고 있자니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렸다. 열심히 놀던 개가 장난감을 물고 종종걸음으로 가는 모습을 보아 아마 저 생명체의 이름인 듯했다.
"장난감 찾았어? 찾아서 다행이네. 이제 들어가자."
꼬리를 흔드는 개를 한참을 쓰다듬던 검은 머리칼의 여성이 강아지를 안고 사라지자 그제야 옵티머스 프라임은 긴장을 풀었다. 작은 생명체였지만 제법 자신을 긴장시킨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디서 보지 않았던가? 개를 안고 가는 여성이 낯이 익다고 생각하면서도 옵티머스 프라임은 생각을 털어냈다. 엘레나와 노아 외엔 교류하는 인간은 없으므로 그저 작은 동물의 예상치 못한 습격 때문에 생긴 혼선이라 생각했다.
몽이를 안고 뒤돌아 걸어가는 테리스의 뒷모습을 떠올리고 있자니 아주 작은, 집중하지 않으면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작은 존재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래를 내려보자, 눈이 마주쳐 기쁜지 휘어진 꼬리를 흔들며 몽이가 귀를 쫑긋 세웠다.
[내가 너를 쓰다듬어 주지는 못할 텐데]
말은 하지만, 몽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앞발을 자신에게 내밀었다. 쓰다듬어 주고 놀아달라는 표현이었다 자신을 소개받을 때부터, 아니 그 첫 만남부터 몽이는 자기표현이 확실했다. 상대가 누구든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모습이 용감하기도 했지만, 걱정도 되었다.
- 옵티머스가 곤란해하는데, 내가 쓰다듬어 줘도 될까?
결국 몸을 숙여 몽이 가까이 손을 뻗었으나 인간보다 한참 작은 몽이를 만진다는 행동은 그에겐 상당한 마음의 부담이었다. 고민을 읽었는지 테리스가 몽이에게 몸을 숙여 손을 내밀자, 냄새를 맡던 몽이가 테리스의 손이 닿도록 앉았다.
- 당신이 정말 좋은가 봐요.
[인간까지는 해치지 않게 힘 조절이 가능하지만, 이 작은 생명체는 어렵게 느껴진다네]
- 마음의 준비가 되면 시도해 보세요. 몽이도 서점에 찾아오는 아이도 당신이 신기하고 당신과 대화를 즐기고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면 노아도 인간 기준으론 성체였고, 테리스의 다른 모습도 인간 성체였다. 어린 개체인 인간 아이들을 생각하자 옵티머스가 눈을 깜박였다. 테리스의 말을 들으니 떠오르는 아이들이 있어서였다.
- 걱정되나요?
[안될 수가 있겠나]
- 생각보다 단단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그게 아니라- 아니, 아닐세]
- 괜찮다니까요.
테리스의 목소리에 담긴 즐거움과 웃음을 읽어버린 옵티머스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는 존재는 아이들뿐만이 아니었다. 믿음을 보이지만 테리스는 그 첫 만남 이후로도 속을 읽기 어려웠다.
노아가 가져온 부품으로 재구성에 성공한 뒤로도 돌출행동으로 인간의 시선을 끄는 미라지의 태도에 주의를 주고는 은신처 주변을 살피기 위해 옵티머스가 밖에 나왔을 때였다. 대도시임에도 필요가 없어져 버려진 건물이 모인 구역이 있었고 몇몇 건물은 자신도 본래의 모습으로도 들어갈 정도였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비워진 건물 주변은 인간들이 잘 접근하지 않았고 오더라도 건물과 건물 사이를 헤매다 금세 나가곤 했다. 근처에 느껴지는 인간의 기운에 그런 인간 중 하나인가 싶어 소란을 방지하기 위해 조심스레 건물에 붙어 밤의 그림자에 동화된 채 인간이 멀어지길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인간은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인간들이 어디에선가 계속 합류하였다. 들리는 말소리에는 자신들이 언급되진 않았지만, 옵티머스의 가슴속에 한줄기 불안함이 피어올랐다. 안에 있는 미라지와 노아에게 알리고 벗어나라 해야 하나. 그들이 흔적을 지울 수 있도록 자신이 이목을 끌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불어오는 바람에 살랑이는 별을 보았다.
별이, 살랑인다? 잘못 보았나 싶어 시선을 위로 올려보니 별이 아로새겨진 베일을 쓴 이가 건물 난간에 앉아 옵티머스가 보던 인간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자신의 시선을 못 느꼈는지 그 인간의 형체는 인간들을 계속 바라보았다. 다시 자신이 무엇을 경계하고 있었는지 떠올린 옵티머스 또한 인간들에게로 시선을 돌렸으나 새로운 존재에 혼란은 더해졌다.
저 인간은 무엇이란 말인가? 자신의 센서에 감지가 되지 않았다. 범블비에게 인간들의 과학과 기술을 전달받아 수준을 가늠하고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별다른 무장을 갖춰 보이지 않은 존재가 감지되지 않음은 이상했다. 하지만 그 존재는 옵티머스를 신경 쓰지 않는 듯했고 자신도 소란을 피우거나 누구에게도 발각되고 싶진 않았다. 그렇기에 의심의 눈초리를 이따금 보내며 옵티머스는 모여들고 있는 인간들의 모습을 관찰했다.
삼삼오오 있는 이들은 목소리가 크지 않았고 이목구비가 노출되려 하지 않은 듯 고글이나 짙은 안경을 썼다. 옷도 어두운 곳에서 구별이 되지 않은 어두운 색깔의 의복을 입고 있었는데 몇몇이 가끔가다 신경질적인 숨이나 발소리를 내는 것으로 보였다. 오가는 단어 속에서 자신이나 오토봇, 노아나 엘레나를 유추할 수 있는 말들은 없었지만, 인적이 끊긴 곳에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행동은 아무래도 무언가를 숨기려고 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자신들이 목적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 무언가 있었다. 그래서 긴장을 놓지 못하는 옵티머스의 센서에 모여있는 인간들에게 빠르게 접근하는 차량이 보였다. 굉음을 내며 다가오는 차량에 인간들의 무리도 당황했나 싶더니 오히려 품에서 총기를 꺼내 들고 차량을 향해 쏘았다. 총알이 발사되는 소리는 아주 작았고, 총기를 천으로 감싼 것으로 보아 이들이 철저히 이목을 끌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려 했던 듯했다. 하지만 돌진하는 차량도 빗발치는 총기를 아랑곳하지 않으며 모인 무리를 향해 돌진했다.
여기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집단 간 마찰로 보였고 자신들과는 무관해 보였지만 은신처가 근처에 있는 상황에서는 옵티머스로서는 고민되었다. 이곳에 당분간 오지 말라고 오토봇에 통신을 보내려 하던 옵티머스가 난간에 앉아 있던 존재를 기억해 내곤 그에게 시선을 향했다.
앉아있는 존재는 여전히 난간에 앉아 소리 없는 총성을 주고받는 인간들을 보고 있었다. 그가 두른 베일은 그리 강하지 않은 바람에 흔들렸다. 기묘한 느낌을 느낀 것은 그때였다. 천천히 바람을 따라 흐르는 듯했던 베일에 아로새겨진 별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니, 베일에 새겨진 별은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존재를 감지하지 못했다는 당혹스러움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지만, 인간의 직조물에 새겨진 패턴이 움직이는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더욱더 이상한 점은, 밤의 하늘을 흐르는 듯했던 움직임이 멈춘 것처럼 너무나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그 시간이 멈춘 것처럼 말이다.
멈춘 시간처럼 서로 총격을 벌이고 있는 인간들 무리의 주변 공기가 입자 하나하나가 느껴질 정도로 선명하더니 진동하기 시작했다. 위험하다. 본능적인, 또는 프라임이 되고 난 후 자신을 구했던 무언가가 위험의 전조를 경고했고, 옵티머스는 그 경고를 무시하지 않았다. 진동의 중심지에서 몸을 보호하듯 웅크리자 들리지 않는 충격파가 대기 중에 퍼졌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충격파라니 그 또한 기묘했으니 이 파동의 전조를 느낀 이는 거의 없었으리라. 충격파의 중심지에선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진 인간들과, 그 존재가 보였다. 어느새 다가갔지? 인간들이 있던 곳과 자신, 그리고 그 존재가 있던 건물은 거리가 있었고 아무리 충격파의 전조를 느껴 시선을 돌렸다 한들 시간은 매우 짧았다. 짧은 시간에 그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존재가 과연 인간일 수 있는가? 의문에 가득 차 보고 있자니 쓰러진 인간들을 둘러보던 그 존재가 옵티머스를 보았다. 바람에 베일이 크게 흔들렸다.
- 당신이 걱정하는 그런 문제는 아니나, 당분간 이곳에서 벗어나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제야, 옵티머스는 베일 안, 인간의 머리가 있어야 할 곳이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곤 경악했다.
- 그리고 당신들이 이들과 무관함을 알게 되어 그 사실에 기쁨을 느낍니다. 더 따라다녀야 하나 고민했으니까요. 그럼, 다음에 또 뵙지요.
그리고 그 먼 거리에서 자신의 옆에 있는 듯 가까이 목소리를 전달한 그 존재가 손을 흔들고 사라지는 모습을 옵티머스는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네. 집중하지 못했네]
- 당신이 저를 부르거나 제가 당신을 부르지 않았는걸요. 사과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퍼뜩 회상에서 깨어나 사과하자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는 테리스가 보였다. 테리스가 페루의 전투 전부터 옵티머스를 비롯한 오토봇을 주시했고, 그 사실을 알고는 자신만 보면 반기는 개를 데리고 다니는 인간을 의심해 미안했으나 실상은 알고 보니 그 인간과 테리스가 동일한 존재임을 알게 되었을 때 무슨 심정이었는지 지금도 옵티머스는 정의하기 어려웠다.
삐익-자신의 발밑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한참 쓰다듬을 받아 마음에 찼는지 몽이가 애용하는 장난감을 물며 노는 모습이 보였다. 몽이도, 자신을 대장이라 칭하며 찾아오는 아이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되었지만, 테리스 또한 대하기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인간이나, 오토봇이 아니라는 이유는 아니었다. 시간을 들이고 보니 그 점은 확실히 고민의 이유는 아니었다.
물론 자신들 외에 모습을 바꿀 수 있는 고도의 지성체에 대한 당혹감이나 두려움이 없진 않았다. 우주에 대한 지식은 있었다 한들, 다른 행성의 생명체들과의 교류는 전쟁 전 아주 오래전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생물학적인 두려움은 확실히 아니었다. 옵티머스는 움직이지 않고 시선만 내려 테리스를 응시했다. 그런 두려움이었다면,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테리스의 공간에 자신이 발을 들이지는 않았을 터였다.
[쿠스코에 대한 뉴스나 신문 기사가 추가로 나오면 언질을 주었으면 하는데 괜찮겠나?]
- 그렇게 할게요. 아무래도 관심이 바로 사그라들진 않을 터이니 말이죠.
한 공간에서 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관계를 동료 오토봇이 아닌 이들과 가져본 적이 언제였던가. 대화하다가 집중을 위해 조용해지고 다시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되면 어색하거나 놀라지 않고 이어 나가는 관계를 고향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같은 사이버트론의 존재가 아닌 이와 가진다는 상상은 아직도 현실감이 잘 느껴지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존재는 다를지라도 서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하나 된 목표를 위해 함께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다시 일깨우는 경험을 이 지구에서 했으니 이젠 낯선 이와의 교류를 두려워할 일은 없었다.
[나는, 나는 맛이 없단다]
- 어머, 놀아달라는 부탁이 아닐까요?
두려움은 없었지만 당황스러움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발을 핥고는 들리는 자기 말에 꼬리를 흔드는 몽이를 보며 옵티머스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처음에 옵티머스가 서점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노아는 자신이 페루에서 죽을 뻔한 후유증이 지금 오지 않았나 생각했다.
[노아, 아무래도 네가 나 운전하면서 고장 낸 느낌이야. 이상한 소리가 들려]
하지만 같이 듣고 있던 미라지의 얼빠진 목소리에 노아는 자신이 들은 이야기가 환청이 아님을 깨달았다.
"인간에게 정체를 들키면 안 된다고 안 했어?"
[옵티머스, 안 그래도 잇몸 보기 힘든데 책이라니 재미없잖아!]
미라지의 질색에 옵티머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 시작된 미라지가 옵티머스에게, 옵티머스가 미라지에게 걱정인지 잔소리인지 모를 티격태격을 보고 있자니 노아는 왠지 자신만 진지하게 고민하는 느낌에 머리를 짚었다.
"하지만 여전히 적응이 안 된단 말이야."
[뭐가?]
"아니야."
엘레나라면 이 건물들이 언제쯤 지어졌을지 바로 알아맞혔겠지만, 자신이 보기엔 이 골목에 지어진 건물들은 오래되었다 정도만 알 수 있었다. 매끈한 철제도, 반짝이는 유리도 아니었고, 가족들이 사는 아파트보다 회칠이 바래어져 있었으니 말이다.
"근데 미라지, 책이라면 질색하지 않았어? 왜 따라왔어?"
하지만 길은 쓰레기 없이 깨끗했고 유리창은 깨끗하지 않았으나 닦여져 있었고 건물들도 금이 가거나 마모된 부분이 적었다. 자주 방문하지는 않았지만 낯선 곳이라는 긴장감뿐 오히려 미지의 지역을 개척한다는 호기심이 드는 거리였다. 혹시라도 모를 낯선 이의 위협을 당할 수 있다는 느낌은 주지 않은 거리에 대한 느낌이 생소하여 노아는 되물었다.
[책은 재미없는 이야기만 늘어놓은 종이 뭉치라며?]
"어, 그런가?"
[그렇다던데? 근데 전에 테리스가 직접 보면 다른 생각이 들 거라고 했단 말이지]
"그래?"
[응, 그리고 옵티머스와 같이 일하는 외계인은 누구인가 싶기도 하고 말이야]
물론 노아는 예의를 차리고 싶었고, 친구가 말할 때 토를 달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미라지의 이 말에는 토를 안달 수가 없었다.
"미라지, 너도 외계인이야."
[나는 미라지고! 이티보다 잘생긴 미라지잖아? 하지만 머리가 없는 외계인이라니 정말 외계인이잖아? 옵티머스마저 추적을 눈치채지 못하는 외계인이라니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근데 옵티머스는 되려 같이 일하고 있잖아? 옵티머스가 위험한 일에 휘말렸는지 봐야지!]
서로 티격태격하면서도 상대를 걱정하는 옵티머스와 미라지의 모습을 보며 노아는 동료애를 떠올렸다. 아니 동료애보다 더 깊은, 느낌. 피로 이어지지 않았더라도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되었구나."
[뭐든 혼자 해결하려고 애쓰던 옵티머스니까 말이야. 게다가 좀 이상해]
"이상해? 뭐가?"
- 무엇이 이상할까요?
[머리 없는 외계인이 우리를 쫓았는데 이젠 같이 일하고 농담하는 상황이 위험한데 전혀 위기감이 안 느끼는 상황이 이상하지 않아아?]
해가 저문 밤이라 인적이 없다지만 미라지의 행동은 주의를 끌 수 있어 말려야 하지만 노아는 그러지 못했다. 자신도 너무 놀랐기에 되려 비명을 지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테리스? 언제부터 있었어?"
- 방금요. 밖에서 두 분의 이야기가 들려 들어오시라 말하려 했는데, 대화에 집중하고 계셔서 지켜보고 있었답니다. 놀랐다면 미안합니다. 다음에는 더 기척을 내보지요.
"아니, 아니야."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서점 문을 열고 있는 채로 자신과 미라지를 보고 있는 테리스는 속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문에 달린 종과 평안을 가지고 온다는 말린 생선 모양의 나무 장식이 바람에 소리를 내었다. 아무리 이야기에 집중했다지만 정면에서 문이 열리는 모습도 소리도 듣지 못해 의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 꼴이 되었다. 하지만 테리스는 그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아, 더 머쓱해졌다.
- 노아와 미라지가 왔답니다. 들어오세요. 옵티머스도 재고 조사가 끝나 쉬고 있었답니다. 물을 끓여야겠네요.
"응."
서점 안에서 들린 목소리는 자신도 익히 아는 옵티머스의 목소리였다. 노아는 자신의 대답에 몸을 돌려 서점 안으로 들어서는 테리스를 보았다. 확실히 테리스는 자신에게 적당한 예의와 관심을 보여 위험한지 모호했으나 서점은, 그렇지 않았다.
"가자, 미라지."
[응]
비장하게 서로 결의를 다지고 들어서자 이전 방문과 마찬가지로 서점을 보고 있자니 눈부시지도 너무 어둡지도 않은 조명 아래 놓인 탁자와 책장들이 보였다. 이 거리에서 느낀 낯설지만 위험하지 않다고 느끼는 장소 대한 호기심과 모험심에 노아는 서점 안으로 들어섰다. 정체 모를 인물이 운영하는 가게에 대한 모험심을 느낀다니, 죽을 고비를 넘겨서 그런가보다고 노아는 생각했다.
- 집중하고 계시네요.
"그러게. 재미없는 종이 뭉치라고 따분해할 줄 알았어."
확실히 서점에 들어와서 몇 분간은 미라지는 따분해했다. 눈에 들어오는 서점은 영화나 드라마가 나오는 TV도 없고, 음악도 편안하게 책을 고르고 읽기 위한 잔잔한 음악이 흘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미라지가 흥밋거리를 찾기 쉬웠을지도 모른다. 찾아온 노아가 티브이나 뉴스, 릭을 구슬려 그의 정보통을 통해 페루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정보와 그 일을 인간들이 오토봇과 연관 짓는지 등을 말해주는 동안 미라지는 서점을 마치 냄새 탐지견처럼 훑기 시작했다. 책장 틈까지 보려는 부산스러운 미라지의 움직임을 테리스는 주의를 주거나 타박하지 않았고 오히려 미라지가 보는 책장에 어떤 책들이 있는지 특유의 거리감 있는 예의와 적절한 관심으로 짧게 이야기해 줬다.
[이거 투팍이 읽은 책 아냐?]
그렇게 맹렬하게 서점을 훑던 미라지의 시선이 한 책이 고정되었다. 테리스가 미라지가 집은 책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 호밀밭의 파수꾼이군요. 기존 사회에 저항하고 어른으로 대표되는 위선자가 되려는 아이들을 지켜주려는 이의 투쟁이 그려진 내용이에요.
[그런 내용이구나]
- 당신의 걸음으로 3걸음 오른쪽으로 가면 앉아서 읽기 좋아요. 옵티머스는 조금 좁다고 했지만요.
[응, 괜찮아. 괜찮아]
평소라면 옵티머스가 언급된 것만으로도 미라지는 옵티머스의 체격에 대해 5분도 넘게 이야기했겠지만, 기묘할 정도로 홀린 듯 미라지는 테리스의 말대로 오른걸음으로 3걸음 걸어 앉아 책을 보기 시작했다. 옵티머스도 드물게 그런 미라지를 탓하거나 부르지 않아 의아함에 노아가 옵티머스를 바라봤다.
"미라지에게 순찰 상황 물어야 하지 않아?"
[그도 집중해야 할 때를 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네]
가만히 있으라고 기다리고 있을 미라지가 아니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어느 시간에 인간의 음악과 영화에 대해 이리 많이 알고 즐기는지 궁금했더란다. 지금 옵티머스의 태도를 보면 그 시간을 방해받지 않았던 이유가 설명되었다.
"사이 좋구나."
[잘 못 들었네. 뭐라고 했나?]
"혼잣말이야."
- 그렇다면 대다수의 미국 시민은 페루에 대해 오래된 신전이 발굴되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다고 봐도 되겠네요.
[모인 정보에 따르면 그렇지]
노아의 말에 의아해하면서도 테리스의 말에 착실히 반응하는 옵티머스와 서로 대화 중에도 이쪽에 눈길 한번 주지 않은 미라지를 번갈아보며 노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자신이 옵티머스에 대해 험담할 때 같이 동조하는 듯하다가도 정말 싫어하는 모습을 보이면 나서서 나쁜 감정 가지지 말라고 말하던 미라지였다. 옵티머스도 미라지의 행동에 주의를 거듭하면서도 미라지에 대해서 험담하지 않았다. 같은 동족이 아닌 외부인이라서, 일수도 이겠지만 이들과 산전수전 헤쳐 나가다 보니 알 것도 같다. 옵티머스는 예의를 차리거나 자신의 권위를 위해 타인에게 말을 감추는 성격은 아니었다.
'뒤에서 큰 소리로 명령만 내리는 장군은 아니긴 하지.'
그렇다고 엘레나가 말한 대로 가족을 지키려는 큰형 같다는 평가도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았다. 엘레나도 이런 생각을 동의할까? 문득 자신의 꿈을 이루어 너무 유명해진 자신의 동네 친구가 그리워졌다.
"엘레나도 왔으면 좋아했을 텐데."
- 전에도 그 말씀을 하셨지요? 지금도 그 평가가 유효한지요?
"어, 응. 엘레나도 오면 정말 좋아할 거야. 정말로."
- 좋은 평가를 받아서 기쁘네요. 마음에 드셔서 다행입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테리스를 보며 노아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크리스도 좋아하리라는 말. 분명 크리스라면 이 서점의 분위기를 마음에 들어 하고, 좋아하고 탐험하고 싶어 하리라.
"여기 서점이지? 미라지 끝까지 읽을 기세인데 괜찮겠어?"
낯설지만 위험하지 않아 보이는 골목과 서점, 그리고 확실히 이질적인 인물이 있는 공간. 옵티머스가 어떤 이유로 이 정체불명의 외계인과 협력하는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아직 자신은 테리스란 이 인물이 믿을만한 존재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크리스라면 자신을 위해 위험도 불사하기에 더 확신이 들지 않는 이에게 가족을 보이고 싶지 않은 생각이 커, 마음 한편에서 그럼에도 데려오고 싶다는 목소리를 무시한 채 화제를 돌렸다.
- 미라지는 서점을 따분한 공간으로 생각했지요. 그런 공간이 아님을 미라지에게 환기해, 앞으로도 서점을 찾게 된다면 제 사비로 계산하고 드려도 되지요.
"그래?"
- 그럼요. 물론, 다른 서점을 이용할 때 오해가 없도록 이야기는 해둬야겠지만요.
"나도 말해줄게."
- 감사해요. 잘 부탁드려요.
"저기, 옵티머스?"
[말하게]
"페루의 일을 인간들이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 신경 쓰는 이유는, 아직 오토봇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가 맞지?"
노아의 물음에 옵티머스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앞으로도 대부분이 몰랐으면 하네]
"그렇구나."
이런 단단하고 강한 금속의 생명체들이 인간을 두려워할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미라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범블비가 처음 지구에 발을 딛었을 때 꽤 험악한 일을 겪었던 모양이었다. 목소리까지 잃을 정도였으면 얼마나 고약했을까 짐작이 가기도 했다.
그리고, 전쟁.
범블비가 목소리를 잃고 인간에게 공격당한 원인을 알고 나선 표정을 관리하기 어려웠다. 지구에 있는 이유가 재정비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미라지에게 듣고, 옵티머스에게 고향이 어둠과 싸우고 있다고만 들어 유니크론 같은 맞서지 못할 적과 싸우는 줄 알았다. 동족과의 내전에서 전멸당할 위기에서 재정비를 위해 지구에 숨어들었다는 이야기는 다시 말해 오토봇들은 전쟁 중이라는 이야기였다. 전쟁에 쫓겨 숨어든 이들을 숨겨주고 있다는 사실이 오토봇의 적들에게 알려지면 지구는 공격당할 수 있다.
"나 가볼게. 그리고 종종 여기에서 흥미 있는 책 찾으러 와도 될까?"
어쩌면 범블비를 사냥했던 것처럼 다시 추격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옵티머스의 염려가 이해되어, 노아는 면접관이 했던 질문을 가슴 속에 눌러 담았다. 아직은, 이 협력 제안을 오토봇에게 말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테리스가 옵티머스를 만나 설득해 서로 정보를 공유하게 되었는지 궁금했지만, 미라지가 책에 빠져 있으니, 혼자만 해서는 알아낼 방도가 마땅히 떠오르질 않았다.
"테리스, 커피 좀 줘. 언제나 그 맛으로."
- 오늘은 조금 늦으셨네요, 토마스 부인?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로봇과 베일 쓴 머리 없는 이의 형상을 한 이가 서점을 운영하고 있음에도 일반 사람들이 태연하게 찾아와 커피와 차를 마시며 책을 구경하는지는 더 궁금했으나, 진열대에서 책을 둘러보는 노부인도 커피포트에 물을 담는 테리스도, 걸음이 불편한 노부인을 살피며 책을 정리하는 옵티머스나 다른 방문객들도 익숙한 듯 행동했다. 자신만 이상한 세계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 되어 괜스레 책을 읽는 미라지에게 다가가 손을 흔들며 시선을 끌었다.
"미라지, 미라지! 가자. 크리스 기다린다."
[뭐 벌써? 아직 시간이 아니지 않아?]
"진료 일찍 끝나기도 해."
[아, 그래? 그럼 가야지. 다음에 봐]
아쉬워하면서도 일어난 미라지가 책을 들고는 문밖으로 나섰다. 빠른 반응에 책을 두고 가라는 이야기를 하지 못한 노아가 어물거리자, 테리스가 손을 흔들었다.
- 엘레나가 이 서점에 오면 좋아하겠지요?
"어? 응."
- 좋아요. 다음에 또 뵈어요, 노아.
"그래, 다음에 봐. 옵티머스."
[알겠네]
계산하지도 않았는데, 제지도 없다. 들어와 테리스에게 라디오에서 언급되었다는 로맨스 소설을 찾는 손님도 옵티머스나 테리스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여기 있다간 자신마저 이상해질 듯한 느낌에 노아는 황급히 머리를 젓고는 서점을 나섰다.
"노아, 잘 있었어?"
이래서 엘레나가 서점에 오면 좋아하겠냐고 물었구나. 서점을 둘러보다 자신을 발견하고는 인사하는 엘레나에게 노아는 이전에 테리스가 한 질문을 떠올렸다. 하지만 오랜만에 보는 친구는 반가워 엘레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바쁘지 않아?"
"바쁘지."
당연한 일을 묻는다는 표정의 엘레나를 향해 노아가 피식 미소 지었다.
"그런데 이 서점에 올 시간은 있고?"
"꿈을 이룬 일에 대한 인터뷰 요청에 응답 안 할 수 없잖아? 안 그래?"
노아의 표정에 따라 웃던 엘레나가 노아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무언가 비밀 이야기를 하려나 싶어 노아도 고개를 기울였다.
"옵티머스랑 오토봇에 대해 테리스가 어디까지 알아?"
하지만 비밀 이야기라기엔 목소리가 작지 않은 음량이라 노아는 절로 고개를 들어 주변을 보아 자신과 엘레나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는지를 확인 후 입을 열었다.
"오토봇들이 외계인이고, 범블비가 지구에 왔을 때의 일을 알고 있고 페루의 일을 알아."
"그래서 외계인의 기준이 이티로 잡혀있는 고정 관념은 신분을 감추는 데 도움도 되지만 자신은 대머리는 아니라고 말한 거구나."
"미라지도 이티를 못생겼다고 했지. 근데, 벌써 통성명까지 한 거야?"
이야기를 이어감에도 엘레나는 잡담하듯 목소리를 줄이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긴장감이 사라져 크게 말한 노아가 화들짝 놀라 주변을 보았다. 다행히 음악 소리에 묻혔는지 아무도 노아와 엘레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럼, 토크쇼 진행자와 통성명을 안 할 수 없잖아? 커피를 내려줬는데, 커피가 녹는 느낌이더라. 그러니 대화를 안 할 수가 있겠어?"
"커피는 액체잖아. 커피가 녹아? 그런 마법도 테리스가 부려?"
"아니, 커피는 그저 우리가 아는 커피가 맞아. 근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는데, 입 안에서 커피가 녹는 느낌이 들었어. 솜사탕도 그렇게 부드럽게 녹지는 않았을 거야."
"그래?"
솜사탕보다 잘 녹아드는 커피라 상상하기 어렵다는 표정의 노아를 보며 엘레나가 고개를 기울였다.
" 너도 커피 마셔봤으면 알잖아. 핸드 드립으로 내렸다지만 보통 카페에서 내려주는 핸드 드립 커피도 이런 느낌은 아냐. 부드럽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했어."
"난, 몰라. 안 마셔봤어."
"뭐? 커피를 몰라?"
엘레나 특유의 진심이냐는 표정이 그대로 담긴 물음에 노아는 상황을 설명해야 함을 느끼곤 어깨를 늘어트렸다.
"아니, 커피는 알지. 내 말은 테리스의 커피를 마셔본 적이 없어."
"왜? 아, 믿을 수 없어서?"
"그래. 인간을 믿지 않는 옵티머스가 협력하는 존재가 있다고 알려왔는데 지구인도 아냐, 오토봇도 아냐, 머리 없이 베일만 쓰고 있는 외계인이라고 말한 존재가 서점을 운영하는데 이용자들은 다들 놀라지도 않고 서점을 이용하는데 이상하지 않아?"
이젠 목소리를 낮출 생각도 들지 않았다. 서점을 손짓하며 가리키는 노아를 보고는 엘레나가 노아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두었다.
"이 서점이 괴이 현상 장소로 알고 놀러 와서 비명 지르며 도망가는 사람들은 많으니 놀라지도 않는다는 표현은 이상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이내 장난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껏 생사를 같이한 엘레나라면 이런 상황에 대해 공감해 주리라 생각했는데, 서운함에 노아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마. 옵티머스와도 잘 지내게 되었잖아? 그런 옵티머스가 보증하는 테리스와도 잘 지낼 수 있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응. 그렇게 생각해."
"내가 말을 말지."
괜히 테리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싶어 한숨을 쉬는 노아를 보며 엘레나가 크게 웃었다.
"미라지를 보면서 그 표정 자주 지었지. 말 나온 김에 미라지는 어때? 깨우는 데 성공했다고 했지?"
저렇게 자기 생각을 밀어붙이는 엘레나에게 화제를 돌리기는 쉽지 않다. 다음에 자신이 생각하는 테리스의 미심쩍은 면을 마저 이야기해 주지 싶어 노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응. 같이 다녔는데 오늘은 범블비를 봐주고 있어. 범블비의 배기관에서 연기가 많이 배출되어서 경찰이 자꾸 따라다니나 봐. 자기도 아직 멀쩡하지 않은데 남 봐주겠다니 미라지도 여전하지?"
섭섭하다는 표정도 잠시 자신의 단짝 친구 이야기가 나오자 사라지고 금세 말이 많아지는 노아를 보며 엘레나가 미소 지었다. 노아는 낯선 이를 의심하지만 신뢰가 생기면 누구보다 믿고 의지했다. 자신이 테리스를 제대로 봤다면, 테리스도 노아도 서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믿을 수 없다.'
그리고, 노아와 엘레나의 대화를 옵티머스는 묵묵히 듣고 있었다. 일부러 들으려 하지 않아도 둘의 소리가 청각 센서를 조정하지 않아도 들릴 정도로 컸다. 페루로 갈 때 키를 파괴하자고 둘이 이야기를 나누던 때도 그랬었다. 이들은 오토봇이 인간들보다 더 감각 기간이 발달하여 있다는 사실을 언제쯤 인지할까? 하지만 옵티머스의 생각은 둘이 오토봇을 과소평가하는 것에 닿지 않았다. 자신이 보증하는 테리스에 대한 믿음의 문제는 아직도 옵티머스를 고민에 빠트렸다.
'나도 낯선 자의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하게 될 줄 몰랐다고 하면 안 되겠지.'
자신의 정체를 아는 수수께끼의 생물이었던 테리스와 옵티머스는 이후로도 꾸준히 마주쳤다. 옵티머스는 의도적으로 테리스와 접촉을 의도하진 않았으나 그들은 자주 마주했다. 언젠가 테리스에게 이 우연에 대해 의도적으로 자신과 계속 만나려 했는지 물었지만, 아니라고 했다.
- 인간을 믿지 말라고 하면서, 그 누구보다 사람을 믿었던 인간이 있었답니다.
그 대답도 테리스를 믿어야 납득 가능한 대답이었지만 의심할 수는 없었다.
- 일면식도 없는 자가 보내는 선의로 우리도 살 수 있어요. 그렇지요?
건물의 그림자와 새어 나오는 빛을 보며 말하던 그때의 테리스는 적어도 진심을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테리스의 말을 기억하며 생각에서 빠져나와 옵티머스 프라임은 테리스에게 다가갔다.
[대략적인 방문객은 어느 정도로 예상하는가?]
"엘레나를 통해 방문을 밝혀온 인원과 서점에 참여를 문의한 인원으로는 스무 명 이내겠네요."
[알겠다. 자리 정돈을 돕고 잠시 나가 있겠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모임이 있을 때 사용하는 공간을 가늠하는 옵티머스를 테리스는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왜 그러는가?]
"아니에요. 천천히 쉬다 오세요."
인터뷰까지 본 모습을 진행하기엔 그날의 주인공인 인터뷰 대상자에게 주의가 쏠리지 않는다며 테리스는 인간의 형상을 취하곤 했다. 이목구비가 있는 인간의 형상이기에 감정의 변화가 잘 보이리라 생각하지만, 오히려 감정의 변화를 보이는 테리스의 모습이 어색하다고 하면 이상할까?
[알겠네. 필요한 일 있으면 부르게나]
하지만 이 말까지 할 수 있을까? 옵티머스는 테리스와 함께할수록 드는 이 내면의 의문에 항상 침묵하곤 했다. 몽이를 부르는 첫 조우에서부터, 서로의 의심을 풀던 첫인사의 순간을 떠올랐다. 그리고 테리스가 왜 이 지구에 왔는지, 이 도시에 오게 되었는지, 계속 지구에 남아있는지 알아갈수록 드는 의문에 명확한 답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테리스의 얼굴을 더 마주하지 않고 의자 배치를 위해 자리를 떴다. 이 의문에 답을 할 날이 과연 올지 드는 의문까지 침묵하면서 말이다.
"어떻게 왔어?"
"나도 여기가 궁금했어."
크리스에게만큼은 든든한 형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약한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았더란다. 페루에서 크리스의 말에 용기를 얻고 세계를 구한 후에는 더더군다나 더 약한 소리를 할 수 없었다. 그런데, 크리스가 집과는 멀리 떨어진 서점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보니 그 다짐이 무색하게 표정이 무너졌다.
"엄마가 데려다줬어. 저기 계시잖아."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다 안다는 표정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웃는 표정의 엄마가 보였다. 크리스 치료에 여유가 생기자, 엄마의 표정도 한층 여유가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노아도 손을 흔들었다.
"그래도 이야기라도 하고 오지."
"형도 어디 가는데 나에게 말 안 하잖아?"
한 대 맞은 표정의 노아를 보며 크리스가 손가락을 내밀었다.
"홈팀?"
지금, 이 상황에 이 말은 너무한 물음 아니냐고 묻고 싶었지만,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다. 오히려 병을 이겨내고 있으면서도 강하게 자라 이렇게 투정을 부리고 장난을 치는 크리스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홈팀."
노아는 피식 웃으며 손가락 하이 파이브를 하고는 크리스를 꼭 안아주었다. 자신의 품 안에서 크리스의 웃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스의 나라에 가는 동굴 입구 같아."
"그래?"
한참이나 깔깔웃고는 자신의 품 안에서 고개를 내밀고 서점 문을 보는 크리스의 행동에 노아가 고개를 으쓱였다.
"엘리스가 간 곳보다는 재미없을 거야."
"더 재미있어 보여. 가봐도 돼?"
"이상한 나라로 떨어지진 않을 텐데?"
"그 세계는 엘리스만 갈 수 있지만 여긴 나도 볼 수 있으니까."
크리스의 말에 노아가 새삼 놀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하기야 엘리스가 간 곳은 독자들이 갈 수 없긴 하다.
"맞네. 이번에는 짐 챙기지 않아도 괜찮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크리스가 활짝 웃었다. 분명 페루에 가기 전 짐을 챙기겠다는 자신이 한 말을 형이 기억해서일 거다.
"전리품으로는 치킨이 있을까?"
"오, 서점이잖아. 치킨은 쿠파가 주지 않았어?"
"아냐, 오히려 토끼를 따라갔다가 차를 마셨는데 서점에 치킨이 없겠어?"
치킨까지 말을 하며 신나 하며 따라왔지만, 크리스는 예상과는 다른 서점의 잔잔한 분위기에 흥분이 식은 모양이었다. 한참 손님들에게 질문을 받는 엘레나의 모습에 눈을 반짝였지만, 그뿐, 책과 어른들이 가득한 공간에서 흥밋거리를 찾기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꼬마가 심심한가 봐?"
그렇기에 갑작스럽게 질문을 받자, 크리스는 당황하면서도 오히려 들떠 대답하였다.
"엘리스가 간 이상한 나라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이 서점이?"
실망이 담겨있는 크리스의 대답을 듣던 장년의 남자가 노아를 한번 보고는 크리스에게 다시 시선을 고정했다.
"네 보호자가 여기가 재미있다고 하고 널 데려온 거니?"
"아뇨, 저에겐 말도 안 하고 친구와 여기를 자주 오길래 재미있는 곳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아하, 그렇다기엔- 아니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고는 크리스를 계속 보며 남자가 입을 열었다. 선글라스를 벗자, 토크쇼를 위해 조명을 더 어둡게 한 서점 안 구석에 앉아있는 남자의 이마 아래로,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림자 속 깊은 황색의 눈이 마치 몸을 숨기고 있던 맹수 같아 노아마저 멈칫할 때 여전히 쾌활한 목소리로, 남자가 물었다.
"나는 맥스란다. 네 이름은 뭐니?"
"크리스- 크리스예요."
크리스도 놀랬는지 노아의 옷을 꼭 붙잡고 있었다. 그런 노아를 보며 남자가 손을 흔들었다.
"아, 놀랬니? 미안하다. 그래도 이야기하는데 눈을 마주 안 하니 답답해서 말이다. 크리스, 여기에 처음 왔지?"
"네? 네."
"확실히 처음 왔는데 아무도 안내를 해주지 않으면 재미없지. 거대 마리오도 오늘따라 자리에 없어서 더 하겠어."
주변을 둘러보는 맥스의 말에 노아가 생각해 봤지만 당장 떠오르는 이가 없었다. 사실, 노아마저 이 서점을 그리 자주 오는 편이 아니어서 이 정체불명의 손님이 누군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손님의 말에 되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거대 마리오라고요?"
"어. 빨간 셔츠에 파란 바지. 아니, 다리는 하얀색 바지를 입고 무릎까지만 파란색이니 장화려나? 하지만 마리오랑 색이 같잖아."
노아는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설명을 들으니 바로 떠오르는 이가 있었으나 그 존재를 마리오에 비유하는 이 남자가 너무 무모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얼마나 큰데요?"
하지만 그 비유가 맞지 않다고 지적하려는 노아를 앞서 크리스가 물었다. 아무래도 게임을 즐겨 하니 그 비유에 호기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크긴 하지. 저 방 보이지?"
"네, 보여요."
맥스의 손짓을 따라가 보자, 서점과 연결된 작은 공간이 보였다. 작다는 표현은 어디까지나 이 서점에서 보이는 시각이었고 낡아 보이는 원목 탁자와 탁자를 둘러싼 의자 몇 개 주변에 스툴과 의자가 보이는 모양새가 작아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꽤 넓은 공간인 모양이었다.
"거대 마리오가 일하다 저기서 이야기하는 이들 살핀다고 가면 벽에 부딪힐까 고개를 숙이거든. 저 벽에 닿기는 거대 마리오가 처음이야."
아무래도 이 서점과는 다른 가게나 거주공간이었던 듯, 맥스가 가리키는 곳은 서점보다 천장이 낮았다. 그럼에도 보통의 인간은 저 천장에 손을 뻗어도 닿기는 어려우리라.
"크다. 미라지보다 크네."
"그렇지? 주인장이 바쁘면 마리오가 서점을 살피면서 서점에 온 이들을 보곤 했어. 붙임성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있으면 든든하긴 했지."
"지금은 왜 없어요?"
옵티머스가 평소 어떻게 다니는지 표현하듯 움직이는 손을 따라가다 보니, 크리스도 정말 궁금해 버린 모양이었다. 고개를 갸웃대며 묻는 말에 맥스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다? 주인장이랑 이야기하는 저 배우가 무서워서는 아닐 거야. 거대 마리오가 누굴 겁내는 모습을 본 적은 없어. 근데 저 배우가 유명하긴 한가 보지? 여기 서점의 단골들이 저 배우를 다 알아보더라고?"
"엘레나는 배우가 아냐. 고고학자라고."
그림자 드리워진 맥스의 눈을 보고 있자니 더 경계심이 들어 가만히 있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엘레나를 보며 배우란 단어를 강조하는 맥스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노아는 변명하거나 말을 덧붙일 생각은 없었다. 그런 노아의 눈을 보더니 맥스가 껄껄 웃었다.
"무대 위에서 자신의 감정과 속마음을 포장하며 이야기하는 인간을 배우라고 말하지 않으면 뭐라 표현해야 할까?"
"이봐."
"모든 인간의 상호 교류는 연극과도 같지. 적절하지 않은 감정과 정보는 숨기고, 어떤 말과 행동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고 말이야. 진실과 거짓, 진심과 가식에 관해 인간들은 중요하게 이야기하지만, 그 경계는 매우 흐릿하잖아?"
크리스를 뒤로 끌어당기고 있는 노아를 보며 맥스가 손가락 끝을 자기 가슴에 대었다.
"그런 면에서 모든 인간은 배우라고 할 수 있지. 나도 마찬가지고 말이야. 아니, 거대 마리오나 테리스를 생각해 보면 모든 생물은 배우라고 해야 할까?"
"마리오가 인간이 아니에요?"
놀란 눈으로 묻는 크리스에게 맥스가 빙긋 웃었다.
"크다는 말에는 인간인지 묻지 않더니 너도 귀엽구나. 직접 만나봐야 알 텐데, 이 거대 마리오는 어디 있길래 지금까지 안보일까나?"
"그는 잠시 밖에 나갔답니다, 맥스. 제 지인분들을 너무 놀리지 말아주세요."
아까도 엘레나와의 대화에 자연스럽게 끼어 놀라게 하더니 지금도 언제 다가왔는지조차 모르게 마치 그 자리에 처음부터 있었다는 듯 말하는 테리스의 모습에 노아는 속으로 숨을 삼켰다. 약간의 미소를 띤 채 맥스를 향해 고개를 저은 테리스가 크리스를 향해 눈인사를 건네는 모습을 보며 맥스가 과장된 동작으로 어깨를 들썩였다.
"놀린다니, 당신이 나를 놀린다면 모를까! 아까부터 묻고 싶었어. 그 분장은 뭐야?"
"진실과 거짓, 진심과 가식의 경계가 흐릿하니 이 모습도 분장일지 아닐지 알 수는 없겠죠? 당신도 그렇지 않나요?"
맥스의 항의에 답하는 테리스의 어조는 당혹스러움이 없었다. 테리스의 답에 맥스가 호탕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크리스를 보며 테리스가 물었다.
"노아의 가족분인가요? 연락을 주셨다면 좋았을 텐데. 반가워요."
"나도 몰랐어."
이런 분위기인 줄 예상했다면 더더욱 크리스를 오게 하지 않았을 거라고 하고 싶었지만 노아는 뉴욕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고 그런 일을 보았을 때는 본적도 없고 자신은 그 곳에 없다고, 하지만 자신의 뒤에는 크리스가 있었다. 크리스에게는 그런 삶의 방식을 알게 하고는 싶지 않았다. 하지만 노아의 걱정은 기우였는지 테리스가 빙긋 웃었다.
"엘레나도 이분을 반가워하시더군요. 저는 테리스랍니다. 소개를 해주시겠어요?"
"크리스. 크리스 디아즈예요."
"안녕하세요, 크리스. 다시 소개할게요. 이 서점 직원 중 하나인 테리스랍니다."
"주인이 아니었어?"
"마리오는 어디 있어요?"
노아와 크리스에게서 동시에 터져 나온 질문에 여유 있던 테리스가 질문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듯 약간 뜸을 들이곤 입을 열었다.
"이 서점 주인께선 제가 서점에 취직해 일하는 모습을 보고 그간 즐기지 못한 휴가를 가셨어요. 가끔 서점에 오셔서 제가 잘 일하는지 보시곤 한답니다."
평소보다 천천히, 하는 말이 맞는지 생각하는 듯 느릿하게 말하는 테리스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리고 마리오라는 캐릭터가 나오는 그림책이 있는 책장으로 안내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크리스가 묻고자 하는 의도는 책이 아니라고 생각되네요. 마리오가 정확히 누구인지 크리스는 알고 있나요?"
하지만 테리스의 주저는 길지 않았다. 무릎을 굽혀 크리스에게 테리스가 시선을 맞추었다. 정체불명의 생물도 아이들에겐 친절하다는 뜻일까, 노아는 잠시 궁금했으나 이 분위기를 깨고 싶진 않아 시선을 천장으로 향했다. 크리스는 테리스의 행동이 꽤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아뇨. 하지만 저 천장까지 오는 키 큰 마리오가 있다고 했어요, 맥스가요."
테리스는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맥스가 앉아있는 자리를 향해 시선을 주고는 다시 한번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렇군요. 하지만 그는 돌아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랍니다. 그러니 마리오에 대한 설명은, 코코아를 한잔하며 노아 당신이 더 해줄 수 있을까요? 마리오는 엘레나도 알고 있으니, 엘레나도 크리스에게 설명을 해주셨으면 해요. 코코아 세잔, 괜찮을까요?"
"네!"
"그래."
"나는 커피로 부탁해. 아까와는 다른 맛으로 해줘."
자신에게 쏟아진 시선에 엘레나가 당황하면서도 미소 지으며 손가락으로 계산대 옆 드리퍼와 주전자를 가리켰다. 서점으로 들어와 테리스와 통성명을 할 때부터 커피 용구들을 비치해 놓은 서점의 커피 맛이 궁금했다. 아까 권해준 커피를 마실 때 커피가 혀에서 녹는다는 느낌이 들었으니, 다른 커피도 이런 맛일까 궁금했었더란다.
"어떤 맛을 선호하시나요. 산미가 있으면 좋을까요, 아니면 고소함을 더 중요시하시나요? 코코아에는 마시멜로를 올려드릴까요?"
"크리스 것은 올려줘. 나는 괜찮아."
"어- 고소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너무 진하게는 내려주지 않았으면 해."
"그럴게요. 그럼, 세분 이야기 나누고 계세요."
엘레나의 요청을 주의 깊게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테리스가 계산대로 걸어갔다. 사람들은 책장을 보며 책을 고르거나, 삼삼오오 모여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눴다. 토크쇼가 방금 끝났을 텐데도 어수선하지 않은 서점의 분위기에 이건 또 무슨 마법인가 싶어 노아가 주저하는 사이 엘레나가 다가왔다.
"아까 그 남자는 누구야?"
"직접 묻는 게 낫지 않아?"
엘레나의 물음에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추며 맥스가 앉은 자리에 시선을 돌린 노아가 속으로 숨을 삼켰다.
"크리스? 그 남자 어디 갔어?"
"나도 몰라. 테리스랑 이야기하고 봤더니 사라졌어."
"내가 너희에게 왔을 때는 이미 자리에 없었어. 크리스에게 친근하게 말하길래 아는 사이인 줄 알았지."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한 서점에, 수상한 직원에, 수상한 손님까지. 여기에 정말 와도 괜찮을까 다시 한번 고민이 앞섰지만, 뒷문으로 들어오는 옵티머스에게 질문하는 손님도, 헐레벌떡 서점에 들어와 커피를 내리는 테리스에게 토크쇼에 참석 못해 아쉽다고 말하는 손님이나 말 상대를 친근하게 여기는 모습이었다.
"안녕, 크리스? 알고 있겠지만 엘레나라고 해. 마리오가 궁금하다고 했지? 앉아서 이야기할까?"
엘레나 또한 크리스에게 탁자로 오라는 듯 손짓하는 모습이 오히려 이 서점을 수상쩍어하는 자신이 비정상적인가 싶은 정도였다.
"될 대로 되겠지."
하기야, 말하는 외계인 로봇에게 협력해 박물관을 털러 갔을 때부터 비현실적인 일은 계속해서 일어났다. 이전 방문 시 서점에 호기심을 보였기에 다시 오겠냐고 권유했을 때 딱딱한 분위기는 싫다며 거절한 미라지가 생각나 피식 웃었다.
"노아, 뭐가 그리 웃음이 나?"
"아냐, 어디까지 이야기해 줬어?"
앞으로 이들과 함께한다면 비현실적인 일이 계속될 테지. 받아들이자 싶어 노아는 크리스의 호기심 가득한 시선에 웃어주곤 탁자로 다가갔다. 코코아의 달콤한 향이 느껴졌다. 아무리 비현실적인 서점인들 냄새는 자신이 아는 코코아의 냄새였다. 그렇다면 마실 수 있는 것을 주겠지 싶다.
옵티머스는 서점의 문을 닫아 잠갔다. 엘레나도 노아도, 노아의 혈육이라는 크리스도 돌아갔다. 오늘도 자신에게 다가와 원하는 책을 물어본 마리아도 갔다. 이 가게가 문을 닫고 하루의 매듭을 짓는 시간이었다. 토크쇼 이후 어수선할 테니 정리하자, 생각했던 걱정은 기우였다. 엘레나를 초대하자고 테리스를 설득하던 단골 제이와 제이의 열변에 좋다고 맞장구치며 자신이 엘레나가 공부한 대학의 같은 건물을 써서 건너 건너 아는 사이라고 제안서를 쓰는 것도 모자라 전화를 한 존스가 같이 토크쇼를 들은 동료들과 함께 서점을 정리하고 호기심이 두려움을 이긴 첫 방문객들에게 책 영업까지 하고 바람처럼 떠난 까닭이었다.
그들이 정리를 해줬으나 놓쳤는지 소모임을 가지기 적합한 작은 방의 의자가 삐뚤어져 있어 상체를 숙이고 들어가 정리하며 옵티머스가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봤다. 처음 이곳에서 일을 시작할 때는 익숙지 않은 인간들과의 만남 뒤의 고요함을 반겼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지. 고개를 돌려보니 라디오를 집중해 듣는 테리스가 보였다. 노트를 팔락거리며 라디오를 듣는 모양새가 엘레나와의 토크쇼의 내용을 정리하는 듯했다. 이렇게 정리된 내용은 며칠 후 서점의 계산대 앞 가판대에 소식지로 실릴 터였다.
지금은 휴가를 떠난 서점 주인이 서점을 열 때부터 벽에 걸어 두었던 시계가 째깍거리며 움직이는 소리와 테리스의 손끝에서 노트의 페이지가 넘겨지며 내는 고요한 소리에 활기차게 답을 하는 엘레나와 단정한 테리스의 물음과 호응하는 관중들의 목소리가 음색을 더했다.
어쩌다 이 서점에서의 시간이 만족감을 줄 수 있는지, 옵티머스 그 자신도 조금은 어이가 없었다. 하기야, 이렇게 될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싶다.
옵티머스는 자신에게 적당한 크기의 천장을 올려다봤다. 인간이 만든 건물 중엔 자신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도 있다는 점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이 건물이 그런 건물이 아니란 점은 문을 보자마자 알았다. 그럼에도 천장은 자신이 고개를 숙이지 않을 정도의 위치에 있었다. 좌측으로 통해있는 공간은 자신이 고개를 숙여야겠지만, 이 점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들어올 때 기묘한 느낌을 받긴 했지만, 이럴 정도인가?'
오토봇 외에 지구에 있는 타 행성의 생명체. 아니, 생명체라고 부를 수 있는지조차 모를 존재의 초대를 받아 서점에 도착해 알려준 뒷문을 보며 어떻게 들어오란 말인가 고민했더란다. 하지만 자신의 방문을 어떻게 알았는지 열린 뒷문으로 나온 네발의 생명체, 몽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작은 생명체가 보여주는 붙임성 있는 활발함에 빠져들었더란다. 이 붙임성 있는 존재가 다시 서점으로 들어가려다 바람에 닫힌 문을 열려 발로 문을 긁는 행동을 보고는 도와주려 뒷문의 문고리를 조심히 잡았을 때 옵티머스는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자기 손의 힘과 크기에 맞춘 듯한 문고리의 단단함이 느껴져, 설마 싶어 약하게 돌려보자니 열리지 않은 문에 저도 모르게 호기심이 들어 문고리를 조금씩 힘을 더해 돌려봤더란다. 그리고 자신이 힘을 조절하지 않자, 거짓말처럼 문은 열렸다.
인간이 말하는 마법이 이런 기묘한 일을 뜻한다면 꽤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며 옵티머스는 고개를 내렸다. 크기와 높이가 다른 나무로 만든 가구에 책들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건물이 이 도시에서도 오래된 편이라 건물 안도 낡았을까 생각이 들었으나 피곤하지 않은 차분한 색의 벽과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유리는 깔끔하게 잘 관리되어 있었다.
들어올 때 안내하듯 앞서가던 몽이도 어디론가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초대한 테리스도 보이지 않아, 옵티머스는 잠시 테리스의 초대가 진심이었는지 고민했다. 무언가 속셈이 있는지 뒤늦게 생각이 들었으나 돌아가느니 이 수상한 공간에 대해 조사를 진행해 보기로 했다. 책장에 정리된 책들을 세심히 훑었다. 지구의 인간들은 다양한 언어를 쓰는데, 자신이 있는 곳에서 주로 쓰는 문자가 적힌 서적이 대부분이었다. 서적도 가구들도 이제껏 보아온 인간들이 사용하는 재질과 어느 정도 일치하고 잔잔하게 들려오는 음악도 마찬가지였다. 단언하자면 너무나 인간이 쓰는 물건이 있는 공간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떻게 들어와 있을까? 무언가 속임수가 숨겨져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자신의 센서로 감지되는 이상은 없었다. 무엇이 이 지극히 인간들에게 있어 평범한 공간에 자신을 들여보냈을까.
"저기, 책 좀 찾아줘."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을 맞아 사고가 멎는 경험은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그다지 반기는 경험은 아니었기에 옵티머스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바라보았다. 온 줄도 모르고 있었건만 인간 하나가 자신의 팔을 잡고 있었다.
"분홍색 표지의 책이 안 보여. 분명 테리스가 새 책을 들여놓겠다고 했었어. 안 보여."
주름진 손이 옵티머스의 팔을 잡고 있었다. 바래가는 갈색의 머리칼을 틀어 올린 인간 여인이었다. 하지만 옵티머스는 쉽사리 답하지 못했다. 분명 자신은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놀란 기색도 없어, 옵티머스는 잠시 잠깐 자신이 인간으로 보이는 속임수가 이 공간에 있는지 고민했다.
"분홍색 표지. 제목이 기억이 안 나. 테리스가 들여놓겠다고 했어. 로봇 양반, 당신은 알지?"
정확히 자신을 로봇이라고 했다. 그렇다는 뜻은 자신을 인간이 아닌 본연의 모습으로 인식한다는 말이었다. 너무나 혼란스러워, 옵티머스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제목이 무엇인지 아는가?]
"몰라. 마법사가 나오는 바다의 이야기였어. 내용이 너무 좋았는데 너무 오래되었는지 안 보이는 페이지가 있었어."
생각을 해내려는 듯 인상을 찌푸린 여인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테리스가 오기 전에 들어온 책이었나 봐. 테리스는 관리를 꼼꼼히 하니까, 이제는 새 책으로 들어와서 그렇게 닮아버리는 책은 없거든. 테리스에게 말했더니 새 책을 구해 주겠다고, 오늘 오면 볼 수 있겠다고 편지를 보내왔었어. 그런데 없네, 알아?"
인간이 말해주는 이 공간의 주인에 대한 정보는 옵티머스에겐 꽤 중요했으나 옵티머스는 그 정보에 대해 더 깊이 캐물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제 팔을 꼭 잡은 노쇠한 인간의 시선이 인간이 아닌 자신에게도 간절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일단, 앉아보겠나? 나도 여기 처음 와 그대가 말한 책은 모르지만]
탄식과 함께 인간의 눈에 빠르게 차오르는 그늘이 달래듯 옵티머스가 조심스레 손짓했다.
[앉아서 기억나는 대로 책에 관해 이야기를 해주겠나. 내가 찾아보겠다]
과거라면 동족도 아닌 인간에게 이리 친절을 베풀지 않아도 괜찮을 일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그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자신의 권유대로 앉아 책에 대한 인상을 말하는 인간의 표정은 놀랍도록 자신의 동족들이 짓는 안도와 기대, 즐거움과 닮아있었다.
[혹시 제목 아래에 동물의 그림이 그려져 있지 않나?]
"그렇지는 않았어. 풍경이었던 것 같아. 바다. 맞아, 바다였어. 어렸을 때 본 그림 같았어."
이 책을 찾나 싶어 꺼내온 비슷한 색의 책을 다시 꽂아 넣었다. 두 번 볼 일 없는 인간에게 이런 친절을 베풀 이유가 있나. 다시 고개를 드는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드는 생각에 답하지도 않고 인간에게 바로 질문이 나왔다.
[분홍색의, 바다가 어떻게 그려져 있었는지 기억이 날까?]
"뭔가 파도가 쳤던 것 같아. 책 내용이 마법사가 배를 타고 바다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도와주는 내용이었어."
그렇다면 파도가 치는 바다가 그려진 마법사와 관련된 제목을 가진 분홍색 책일까. 옵티머스는 시선에 들어오는 인간들이 정의하는 분홍색의 스펙트럼에 해당하는 책들을 골라내며 그 책들의 제목을 읽었다.
"로봇 양반은 그 책을 읽어본 적 없어?"
[없다. 인간의 책을 접하긴 쉽지 않은 환경이었지]
"아이고." 자기 말에 무엇을 상상했는지 인간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모습까지 보여 옵티머스는 적잖이 당황했다.
[왜 그러나?]
"나도 그랬어. 책은 학교에 가거나 배운 사람들만 읽는 줄 알았어. 존이랑 테리스가 없었으면 나도 읽어보지 못했어."
[인간들도 책을 읽지 못한다는 말인가]
"읽을 줄 몰랐어. 내 이름은 알지. 자주 다니는 거리를 어떻게 발음하는지 알아. 근데 집으로 오는 세금을 내라는 편지나 가끔 근처의 급식소에서 크리스마스에 끼워주는 종이에 무엇이 적혀있는지 항상 물어봐야 했어."
무어라 쉽사리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을 가만히 내려다보자 나이 든 여인은 말을 더 쏟아내기 시작했다.
"옆집에 사는 제시카도, 안부를 물어오는 메리나 폴도 나랑 같았어. 그나마 순찰오는 윌리엄이 내가 받는 편지나 모르는 곳에 가야 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지도를 보고 알려줬어. 사는 집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면 월세를 내야 하니까 일하면 밤이었거든."
[이제 글자를 배울 시간이 났나?]
조심스럽게 물어본 옵티머스는 여인의 얼굴에 드리워진 우울한 표정에 아차 싶었다. 어쩌면, 그녀의 의지로 생긴 여유시간이 아니라.
"눈이 잘 보이지 않으니, 물건을 자주 놓치니까 일하던 곳에서 그만 나오라 했어. 돈을 아끼려 난방을 안 하니 너무 추워서 급식소 갈 기운이 없어 서점 계단에 앉아있었는데 몸 녹이라고 테리스가 들여보내 준 거야."
작게 한숨을 쉬며 약하게 떨리는 오른손을 애써 맞잡으며 노쇠한 인간이 미소 지었다.
"이 안경도 여기서 알게 된 친구가 씌워줬지. 존은 예전부터 알았지만 무서운 인상이라 말을 못 붙였어. 근데 내가 책을 읽고 싶다고 말하니까 어떻게 읽으면 되는지 알려줬어."
[그런가]
"여기 오는 손님 중 하나가 책 읽는 목소리가 좋다고 혹시 아이들을 위해 책을 읽어주는 일을 해보지 않겠냐고 해서, 월세도 낼 수 있게 되었어. 테리스가 어떤 책이 내가 좋아할지 잘 아니까, 읽으면 재미있어. 그래서 이번에도 기대하고 있어."
정말로 한껏 기대하고 있는지 어느새 우울함은 걷혀 미소 짓고 있는 이의 표정은 너무 평온해 보여 옵티머스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맞췄다.
[당신이 볼 수 있게 두었을 텐데, 바로 찾아주지 못해 미안하다]
"사과하지 마. 내가 기억을 잘 못해서, 제목이 길어지면 기억이 잘 안 나. 당신은 최선을 다하고 있어."
옵티머스는 상황이 참으로 몇 마디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막 몇몇과 신뢰를 쌓고 있어 도와주지 않아도 될 처음 만난 인간에게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지만 그에 대해 그만둘 생각은 들지는 않고, 위로를 해줘야 할 상황에 받는 위로를 단어 몇 개로 이뤄진 문장으로 표현하기는 정말 어려웠다.
"로봇 양반, 들고 있는 책은 뭐야?"
옵티머스를 평온하게 웃으며 위로하던 여인이 무언가를 말하려다 옵티머스가 들고 있는 책을 보고는 호기심을 보였다.
[모모, 라고 적혀 있다. 옆에 꽂힌 책이 당신이 찾는 책인가 보려 꺼냈었다. 옆의 책도, 전혀 다른 내용 같다]
"그 책, 보여주겠어? 성이 매우 근사해 보여."
설레는 표정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손을 뻗는 이에게 조심스럽게, 책을 건넸다. 표지를 손으로 쓸어 감촉을 즐기던 이가 펼쳐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는 목소리는 평온하였지만 단정하고 발음은 분명하여 듣기가 편했다.
"이 책, 마음에 들어. 오늘은 이 책으로 하겠어."
[괜찮겠나? 찾는 책이 아닌데?]
"괜찮아. 테리스가 말했어. 책은 읽어줄 때까지 기다린다고, 읽혀줄 때까지 기다려 준다고 했어. 그러니 조급해하지 말라고 했어. 테리스! 오늘은 이 책으로 해도 될까?"
자신의 뒤를 보며 활짝 웃는 여인의 모습에 옵티머스는 마치 마법에서 깨어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급작스럽게 끌어올려진 현실감에 적응하기도 전에 여인이 자신을 지나쳐 어느샌가 서 있는 긴 베일을 쓴 형상에게 다가갔다.
- 마리아, 책을 고르셨네요. 괜찮답니다. 다 읽고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줄 준비가 되면 알려주세요.
"그렇게 할게. 마법사 이야기는 다음에 보여줘."
고개를 끄덕이는 하얀 형상을 보며 환하게 웃던 여인이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책을 품에 꼭 안고 환하게 웃었다.
"로봇 양반, 책 찾아줘서 고마워. 다음에 또 봐."
[마음에 들길 바란다]
옵티머스의 인사에 책을 품에 안고 안경을 고쳐 쓴 여인이 서점 문을 열고 나갔다. 저곳이 정문이었나. 문이 열렸을 때 들린 소음과 풍경은 자신도 뉴욕을 돌아다니며 몇 번 지나친 거리였다. 초대받은 문은 저 길에서 떨어진 건물이었지 않았던가, 드는 의문을 미루고 옵티머스가 고개를 내렸다.
- 마리아에게 추천해 주신 책을 읽어보셨나요?
[아니. 읽어보지 않았다. 원하던 책이 없어 찾다가 우연히 집어 든 책이다. 어떤 내용이지?]
- 찾는 책이 아니지만 그런 우연으로 새로운 즐거움도 얻는 법이죠. 자신을 소중히 여겨주는 마을 주민들의 시간을 지켜주려는 인간 아이의 이야기랍니다.
[그렇군]
마리아가 나간 후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았는지 문이 조금씩 흔들리며 바깥의 공기와 새어 들어오는 소리를 전해주었다. 하지만 거슬리진 않았다. 묘하게도, 문을 이어주는 금속부품의 마찰 소리마저 리듬감이 느껴진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마음에 들어 하면 좋겠군]
- 마리아는 자주 서점에 들리니 마음에 들었는지 다음에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옵티머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고개를 드는지 베일이 흔들렸다. 분명 얼굴이 없는 존재일 텐데도 베일을 쓰고 있는 존재의 시선이 느껴졌다.
- 책을 찾으러 온 손님들은 제목을 정확하게 알고 오지 않는 경우도 많답니다. 그런데도 책을 안겨 보내드렸으니, 말이에요. 어떠신가요?
[여기에 다시 오리라 생각하나?]
- 글쎄요. 손님들의 취향은 도통 알기 어렵지만, 다시 오시는 걸음을 어찌 막겠어요?
옵티머스는 그 말에 아무 말 없이 들어왔던 곳으로 걸어갔다. 가는 길에 자신을 발견하곤 납작 엎드린 채 꼬리를 흔드는 작은 강아지에게 손을 흔들었다.
[마리아가 찾던 책은 뭐였지?]
- 어스시의 마법사랍니다. 이 책이지요. 어스시라는 세계의 게드라는 마법사가 바다로 나아가 섬에서 많은 이들을 만나는 이야기랍니다.
옵티머스는 테리스가 들어 올린 책의 표지를 보곤 실소를 지었다. 분명 파도가 치고 있긴 하지만, 자신의 상상과는 많이 다른 탓이었다.
[다음에 만나지]
- 좋아요. 다음에 또 뵈어요.
다시 이곳에 오게 될까? 분명한 사실은 이곳에 들어올 때의 목적인 테리스의 조사는 이뤘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문을 나서면서, 옵티머스는 묘하게도, 아주 오래전 잊고 있던 충족감을 다시 느꼈다고 생각했다.
그래, 분명 내가 다시 오겠냐고 생각하는지 물었었다. 그렇게 물었더니 오시는 걸음을 막지는 못한다고 했지. 이유 모를 충족감을 느끼고 돌아가 무엇을 충족 받았는가 고민했었더란다. 그리고 지금.
[작성은 끝났나?]
"엘레나가 많은 이야기를 해주어서, 지면에 그 많은 이야기를 다 싣기는 어렵네요."
- 어디로 배치해야 할지 고민을 해봐야겠어요.
라디오를 끄고 고개를 들어 생각하는 테리스를 보고는 옵티머스가 다가갔다. 자신에게 답을 해주면서 고개를 드는 테리스의 얼굴 위로 베일이 드리워졌다.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다시 노트를 내려다보는 테리스의 모습에 옵티머스도 노트를 내려다봤다. 단정한 글의 위아래로 작성된 작은 글자들이 들어왔다. 평소에도 설명이 필요한 단어나 복기 시 빠진 내용을 채워 넣곤 했으나 이번에는 페이지가 글자로 빼곡하게 채워진 모양새였다.
[특별 호 형식으로 지면을 늘리면 어떻겠나. 엘레나의 토크쇼에 관심을 가지고 온 방문객이 많았으니, 소식지의 지면이 늘어나도 괜찮지 않겠나]
- 좋은 생각이에요. 내일 제이가 오면 지면을 어떻게 배분해야 할지 물어봐야겠어요.
테리스의 말에 옵티머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에도 당연히 얼굴을 볼 수 있고 인사를 나눌 수 있다는 안도감은 얼마나 안정감을 주는가. 옵티머스는 이 안정감을 가장 바란 이 중 하나였다. 아마 고향에서 이런 안정감을 받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말이다.
- 옵티머스. 생각해 보셨나요? 저는 당신이 이 서점을 좋아하고 있다 생각하지만, 혹시라도 압박감을 받고 있다던가, 자신을 잃어버릴 정도로 힘들면 말씀하세요.
아마 테리스가 이 질문을 하지 않았다면 생각에 매몰되었을지도 모른다. 때 좋게 생각에서 끌어내 주는 테리스의 질문에 옵티머스가 실소를 지었다. 또, 이 이야기다.
[모습이 이래도 상관없고?]
- 손님들이 책에 대해 질문하면 한 권은 품에 들려 보낼 수 있는 직원은 흔하지 않답니다? 어떤가요, 옵티머스?
테리스가 이야기한 실력에 대해 여기 단골들은 다들 하지 않든가 생각하면서도 옵티머스는 실소를 지었다. 이 제의를 처음 받았을 때는 다음에 만나자는 이야기만 하였더란다. 이제는 대답을 해야할지도 모른다.
[내일도 서점에서 보세나]
- 계약서를 준비해야겠네요. 내일 뵈어요, 옵티머스.
테리스의 말에 옵티머스는 실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이고는 몸을 돌렸다. 이야기가 끝난 모습에 기지개를 켜며 배웅하는 몽이에게 인사를 해주며 옵티머스는 서점을 나섰다. 자신을 주시하는 이가 없는지 다시 살피고 트럭으로 변해 달리는 옵티머스 프라임의 백 미러에, 서점이 가로등의 빛을 받고 있었다.
[수신 요청. 오토봇 응답해라]
오토봇 회선에 연락하며 옵티머스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내일도 서점에 가면 테리스가 인사해 주겠지. 가게 문을 열면 단골들이 하나둘 여상스럽게 들어와 수다스럽게 책을 찾거나 읽으며 세상 이야기를 해주리라. 이상한 존재가 운영하는 이 기묘한 서점이 계속 자리에 존재하는 이유이고, 자신이 이 서점에 오는 이유였다.
후기: 짧은 글로는 보고 싶은 이야기를 다 쓸 수 없고 긴 글을 한 번에 쓰자니 벌써 막막해지던 차 하루 300자와 10분 글쓰기에 대한 내용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이 챌린지를 보았을 때도 보고 싶은 장면만 일일 챌린지 방식으로 쓰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오래전부터 쓰지 못한 장편을 다시금 써보자. 너무 길면 지치니까, 12월 31일까지 써보자고 9월 26일 시작했습니다.
시작했을 때도 100일을 채우긴 이미 늦었지만 그럼에도 끝을 정해두면 조금이라도 의욕이 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월마다 아플 때가 있어 그때는 글을 쓰지 못해 실제로 글을 쓴 날은 58일이지만, 그럼에도 포기란 글을 다시 안 쓰는 것이라고 자위하며 다시 타이핑을 계속하여 이렇게 하나의 글을 마무리 짓고 결과물을 낼 수 있다니 기쁩니다. 다음엔 어떤 글을 쓸지 고민 중입니다. 읽어주시는 분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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