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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4-1)

“운명은 무슨…. 그런 거 안 믿어.”

얘는 자꾸 사람을 막 건드리네. 레드몬드는 제 이마를 누르는 손길에 눈을 치켜떴다. 말로 지적하는 대신 보내는 무언의 경고였다. 그 경고가 상대에게 제대로 전달 되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사람에 따라 방식을 달리할 최소한의 의지도 없는 게 니므 레드몬드라는 인간이었다.

“마법사들은 다들 기본적으로 고양이를 좋아하는 것 같던데. …이건 몇 없는 마법사들의 머글 보다 나은 점일지도 모르겠다.”

검은 고양이가 얼마나 귀여운데, 다들 눈이 콧구멍에 달린 건지. 여러 번 반복해 본 볼멘소리가 그 뒤를 자연스레 따라붙었다. 너 은근슬쩍 데리고 자겠다는 말을 한다? 입 안 가득 고양이 털이 쑤셔 박힌 채로 아침을 맞아봐야 다시는 그런 말을 못 하지…. 그리고 걔 여자애야. …아마도? 한참을 구시렁거리고 나자, 제 이야기를 잇는 리히터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생각은 이미 충분히 많은 것 같은데. 이 말은 하지 않을 거지만. 난 궁금하다니 계속하라고? 이것도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레드몬드는 여전히 상대의 진심을 가늠하는 데 약했다. 빈말을 구분해 내는 건 아직도 쉽지 않았다. 리히터 맥닐이 섣불리 빈껍데기 같은 말을 할 인물이 아니라는 건 파악한 뒤였지만, 언제나 예외는 존재하는 법이다. 그리고 레드몬드는 혹여나 그 ‘예외’가 지금은 아닌지 확신하는 데 재능이 없었다.

“이런 얘기가 뭐가 재밌다고….”

그러니 이어지는 것은 변명 같은 중얼거림이다. 솔직함을 요구하는 대화를 제안하는 상대 앞에서, 레드몬드는 평소와 같이 고집을 부리거나 뻔뻔하고 기세등등한 태도를 유지할 수 없었다. 정제되지 않은 말을 두서없이 늘어놓는 것이 레드몬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 경황 없는 주절거림이 상대방에게 얼마나 전달 될 수 있을지는 레드몬드의 고려 밖이다. 타인을 살피는 사려를 발휘할 여유가 제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서툴게 구는 레드몬드에게는 없다.

…사실 나도 그 중요한 일이 뭔지 알고는 있어. 네가 하던 얘기랑 어느 정도 이어지는 건데…. 말끝을 흐리며 한숨을 삼켰다. 도저히 설명할 도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내 안에서도 명확하지 않은 걸 남에게 말로 전하는 것만큼 고역인 일도 없다. 기어코 이런 말들을 하게 만든 리히터를 향해 원망이 불쑥 솟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눌렀다. 저 애의 탓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아니까. 리히터에게 원망을 드러내는 건 내 개인적인 문제를 가지고 애먼 상대에게 심술을 부리는 짓이나 다름없으니까.

뭐든 결론 내리는 게 편하다는 건 나도 알아. 그래서 보통은 나도 웬만해서는 결론을 내리려 해. 그 결론이 아무리 터무니없고 단순해도, 있기만 하다면 깔끔하니까. 그렇게 뒤돌고 잊어버리면 되니까. 하지만 난 모른 척이 특기고…. 때로는 결론이 없는 채로 놔두고 그걸 좀 외면해도 되잖아. …가끔은 말이야. 그래서 그렇게 했지. 문제라면…. 내가 그렇게 외면했던 게 ‘남의 일’이 아닌 ‘내 일’이었다는 거지. 심지어 그냥 일도 아니고 '문제'였던 거야. 그리고 내 문제를 외면한 이상… 언젠가는 그 문제가 눈앞에 닥쳐오게 되어 있어. 대가를 치러야 하게 되는 거지. 혼잣말이나 다름없는 말소리가 이어지다, 멎었다. 정말로 그만하고 싶었지만, 여기서 그만두어 봤자 리히터 맥닐은 또다시 물어올 것이다. 저 애는 나와 달리 질문을 삼키지 않으니까. 어차피 내보여야 한다면 한 번에 하는 게 낫다. 그게 내게도, 네게도 편하다.

“…결국 나도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거지. 나한테 지금 중요한 건 내가 정확히 누구인지, 나는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 확신하는 일이라는 걸.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평생을 써도 그걸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난 여전히 종종 내가 마녀가 아닌 머글 같고, 아일랜드에 살게 되어서도 난 영국인이라는 생각을 해. 그런 다음이면 양쪽 모두에 속하는 게 아니라,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 같다는 이상한 감상까지 따라오고.”

자연스레 표정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남한테 할만한 이야기가 아니다. 할 생각도, 하게 될 일이 있을 것이라고 여기지도 않았던 이야기. 그러나 부정적인 상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손에서 느껴지는 타인의 낯선 온기에 놀라는 것이 우선이었다. 손을 붙들고 달리기 시작하는 리히터를 따라가는 것만으로 다리가 후들거리고 숨이 벅차 더 긴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순식간엔 비워진 머리가 내리는 명령은 당장 냅다 남의 손을 잡고 뛰는 저 대책 없고 단순한 멍청이한테 한바탕 성질을 부리라는 것 따위였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험한 단어가 섞인 본능적인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야, 리히터 맥닐! 이거, 헉, 안 놔? 지금은 별로 안 중요한 일이거든? 네가 애쉴린을 의심하든, 헉, 말든 내가 무슨 상관이야. 그러다 네 얼굴에 흉터가 늘면 웃기긴 하겠네. …벌써 열네 살인데 어린애 같은 이름으로 불려서 싫은 거라고! …사람 이름보다 애완동물, 헉 이름 같잖아. 야, 너 언제까지 뛸 거야?”

익숙한 복도와 계단이 주위에 빠르게 흘러갔다. 아니, 지금은 복잡한 이야기는 다 됐고. 좀 멈추라고, 리히터 맥닐 이 멍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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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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