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타미가경]갑자기

홍콩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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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색해. 

위자료 계산하고 남은 자투리로 치라길래 받은 집 안, 남의 집 방 한 칸에 눈치보며 숨어살던 시절에도 쓸데없이 호사스럽게 꾸몄던 잔잔바리들이 한가득 가경의 시선을 어지럽혔다. 그런 용도로 쓴거 아니니까 부담없이 받으래서 받기는 했다만, 이 어색하고 불편한 공간이 자꾸만 상기시키는 과거로 뒷목이 뻐근한 탓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제일 어색한 지점은, 이 시간. 노을이 길게 혀를 뼈물고 거실을 넘보는 이 시간에 달칵 달칵 조명을 하나씩 켜고 앉아있는 어긋나버린 패턴이 문제겠지. 

평일과 주말의 경계가 없던 세월을 그토록 오래 인내하고 받아낸 휴가 아닌 휴가를 어떻게 보내야할지 모르는 것은, 준비할 시간이 없던 탓이 컸다. 생의 순간순간 마다 다음에 쓸만한 수를 모두 계산해 손익의 합계를 내던 습관은 백지로 텅 빈 계산서 위에 놓인 시간을 붙들고 어쩔줄을 몰랐다. 하루가 이렇게 길었던가. 은퇴를 하고서도 자꾸만 꾸물대며 정치판 한구석, 볕이들지 않는 잊혀진 곳으로 모여드는 노인네들 비웃을게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 그 처지가 내 처지니까. 

이 집에서 그나마 익숙한 곳을 찾아들어가 습관처럼 채운 잔을 든 가경은 천천히 향을 느꼈다가, 머금은 액체가 화하고 뜨겁게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것을 음미했다. 딱히 보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 행위가 '음주'에 초점을 맞추는게 아니라 '향락'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주장하려는 듯이. 뜨듯하게 뱃속을 덥히는 첫잔을 이은 다음잔은, 무릎을 모아잡고 좀 더 느릿하게 혀끝으로 굴려보다 테이블 위의 초록 위로 단 숨을 뱉었다. 

흔들흔들- 

생긴것도 꼭 손바닥 같아서는. 사실은 아끼는 화분이라고. 솜털이 보송보송한 박감독 그 새파란 애는, 그게 맥이는 소린지도 모르고 지처럼 파릇하게 얠 살려와서 사람 맘을 심란하게 했다. 많이 피우고 빨리 죽으라더니. 처음으로 생긴 개인 사무실엔 노트북보다 먼저 홍콩야자를 갖다두는건 무슨 심보였을까. 

그 망할 놈의 심보 때문에 여태 남은 미련이, 전남편이 허세롭게 남겨준 이 집 한 켠에 어울리지 않는 화분까지 챙겨오게 만들었다. 뒤틀리고 지친 나는 곧 죽어도 마틸다는 못되볼 팔자고, 넌 레옹이라기엔 키가 쥐콩만한대도. 


- 뭐야, 어떻게-

- 알려면 그까짓거 모를까봐? 좀 들여보내줄래요?

- 출근 안해?

- 선배. 날짜 지나가는건 좀 세어가며 삽시다. 추석연휴에 직장인한테 회사가란 칙칙하고 열받는 소리 좀 하지 말고. 

그랬나. 그러고보니까 현에게서 무슨 연락을 받은 것도 같았다. 토끼랑 뭐랑. 이번에는 또 무슨 요상한 티셔츠를 맞춰입고 예의 그 대가족을 진두지휘해 효도관광을 가야 한다 내심 우는 소리를 했었더랬다. 연휴라 그랬구나. 다녀와서 보자는 약속에 그러마 대답을 하긴 했지만, 이쪽이 백수건달이라 그게 연휴라 기획된 일인지는 당최 몰랐다. 

- 어째 집 앞이 조용하다? 추석이라 또 그득그득 쌓였으면 들린 김에 김영란법 신고할 리스트 좀 뽑아볼까 했더니.

-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래도, 정승 죽은 집은 한적한거 모르니.

이야 곧 죽어도 본인이 정승이지. KU를 키우던 개새끼 취급하는건 선배 밖에 없을거야 아마. 

아주 참. 한결같이 독기가 서려 날카로운 일침이 가경의 입가를 풀었다. 넌 정말.. 그 뒤에 이어질 말이 뭐가 될지 같은건 이미 다 안다는듯 턱을 치켜드는 타미의 도전적인 얼굴에 눈을 흘겼다. 다만 그 쿵짝이 똑 맞아 떨어진 하나의 시퀀스가 물 흐르듯 지나고나니, 반대급부로 밀려드는 어색함을 어째야 할지는 몰랐다. 여전히 신발장 앞에 기대듯 서있던 가경은 더 무슨 말을 보태보려는 노력보단 실내로 통하는 길을 여는쪽을 택했다. 

집 좋네. 선배도. 좋아 보인다. 

10여년 짜리 미련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걸음도 행동도 더디고 느리기만한 저와는 달리, 가볍고 경쾌한 걸음을 디뎌 권하지도 않은 스툴에 걸터앉은 타미가 반쯤 등을 돌려 이쪽을 향해 살풋 웃어보였다. 어영부영 분위기와 기회를 노려 화해 비스끄무레한 것을 해봤던 마지막 만남과는 영 근원부터 다른 종류의 미소. 택도없는 장소에서 파도같이 밀려드는 기시감에 허우적대느라, 그래 보이냔 대꾸는 입 안에만 겨우 웅얼대다 사그라졌다.

앞뒤 어느쪽의 일도 없었던 것으로 하기엔 지나치게 길고 막막한 세월일텐데, 그 앞부분의 거의 모든 포션을 차지하고 있는 배타미가 그때와 같은 얼굴로 웃었단 이유로 가경은 뒷부분을 다 모른채하고 싶어졌다. 직접 건낼 용기가 있을리 없어 책상 위에 올려뒀던 청첩장이라거나, 괜찮은거냐 묻는듯 했던 눈빛을 애써 무시하던 일들, 끝내는 괴물같이 자라난 죄책감과 자괴감에 밀어내려 했던 모진 말과 행동들도. 모두 다 영영 없었던 것 처럼. 

- 뭐라고 말 좀 해봐요

- ....무슨 말

- 몰라 나도. 뭐라도 좀 해봐. 뭔들 창밖만 보고 서있던 사람이 밖에 비오냐 묻는 것보단 나을거 아냐.

되바라지고 싸가지 없는 후배의 답답하단 목소리도 끝이 갈라진 것 같다 느껴지는건 착각일까. 장소가 장소니만큼, 근 몇 년 안에 손꼽힐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는, 비슷하게 가까웠던 그 날의 타미를 상기시켰다.

- 그래서 그때는 왜 젖어 있었는데? 

- 이제와 그게 궁금해? 

- ....아니. 니가 무슨 말이든 해보라며.

- 머리하다가 실시간으로 검색어 삭제되는거 보고 날라갔었어. 됐냐? 

- 배타미.

- 어

- .....

- 뭐 불렀으면 말을 해. 

- 그날. 좀 기대했었던거 같아. 

되게 오랜만이었거든. 니가 내 편 들어줬던거. 냉소적인 미소가 쓰게 걸렸던 입가가 닫히는 동시에 내려앉은 침묵이 무거워 테이블 위를 쓸데없이 만지작댔다. 뭐 그냥. 그렇다고. 

- 그래서 해고로 복수했나봐? 

- ....야

- 아니. 지난 얘기 꺼내길래. 서운했던거 하나씩 털어놓는 시간인줄 알았지 나는. 

- 그래서 넌 현이 데려다 차 깨부쉈고?

- 오 한민규 얘길 먼저 꺼내시겠다. 

미쳤나봐 진짜. 그 이름 한마디에 반사적으로 발끈했다가, 큭큭대며 웃는 타미를 흘겨보며 어처구니 없는 콧바람을 흘렸다. 웃니? 웃음이 나와 넌 이게? 다 지난 일인양 웃어 넘길만큼의 과거로 일찌감치 소화를 끝내버린 그 견고함과 안정감이 부러운 만큼 억울했다. 억울할 처지도 아니면서. 세상에서 제일 잔인하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고해놓고, 내내 공사를 막론하고 밀어낸 것은 이쪽인데도. 

턱을 괴고 앉은 타미의 얇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동그랗게 물방울 모양으로 흐드러진 야자수 잎파리 사이를 오갔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관찰하듯 지켜보는 동안 선배. 고개도 돌리지 않고 나즈막히 부르는 목소리를 놓쳐, 대답 대신 아예 반대편 스툴에 엉덩일 걸치고 시선을 내렸다. 

- 이건 나보고 기대하라고 이렇게 잘 보이는데 꺼내놨나 봐. 

니가 올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아니란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구질구질하다 송가경. 

스스로도 가늠이 되지 않을만큼 진하고 또렷한 감각이 손끝으로 퍼져 귓가가 뜨끈했다. 쪽팔리게. 질문의 형식을 갖추지 않은채 떠보는 말이, 미적지근하면서도 쓸데없이 다정한 말투가 너무나 배타미스러워서 더 그랬다. 바닥까지 내려가 붙들고 싶은 충동이 목구멍을 간질였다. 기대하면? 기대하면 니가 다시. 

- 우리 아직 못 헤어졌잖아요 선배. 

- ....

- 그래서 완전히 헤어질 때까지만 다시 보면 어떨까 싶어서. 

- ....

- 싫어? 

내내 화분쪽으로 틀어졌던 몸이 정면을 향했다. 배타미가 손 끝으로 잡아당겼던 야자수 잎이 흔들흔들 간접 조명 아래로 테이블에 흔들흔들 그늘을 만들었다. 흔들흔들. 고개를 젓는 얼굴 위로 풀잎향이 맴도는 손 끝이 뺨을 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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