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탐차탐] 눈을 떠보니 - 외전 1~3

미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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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단은 브라이언에서 시작됐다. 그놈의 일하기 싫어 타령이 바로의 OST로 깔리는걸로 모자랐는지, 전문 경영인을 두고 바지사장을 자처한 대표님이 바로에서 R&D 센터를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일하기가 너무 싫은 나머지, 타임머신을 개발하겠다는 가열찬 꿈에 바로의 임직원들은 그냥 콧방귀나 뀌고 말았다. 우리 대표님 이제 하고 싶은 것도 다 해보셨고, 돈도 벌만큼 버시더니 헛짓거리 하시는구나. 그냥 그 정도. 

그래도 송가경에게 13년간 보고 배운 꼰대끼가 남아있어, 거 쓸데없는 짓거리 하실거면 대표직 넘기고 퇴사하시죠. 하는 차현 식의 막말은 못했을지언정, 타미의 생각도 그에 못지 않은건 마찬가지였다. 우리 잘난 애인이 뚫린 입으로 진실을 말하는 재주가 좀 있기는 하지. 

그래서 브라이언이 테스트 레디라며 전사 직원에게 설명회를 열었을 때도, 아 예에. 뭐 사고 실험으로 가설 입증이라도 하셨는가보네 했지, 진짜 무슨 요상한 기계를 들고와서, 네네 들어가보세요. 오세요 오세요. 모두 와보세요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게 뭔지 알고 들어가냐 다들 손을 내젓는 바람에 브라이언 혼자 들어가서 첫 실험의 대상자가 된건 말해 입만 아프고. 

그리고 이게 닫힌 결말이 됐어야 했는데. 이상한 웅웅거리는 소리가 바로의 사무실 벽을 다 울릴 정도로 진동하며 모두를 불안에 떨게 했다가, 브라이언이냐 이 사무실의 모든 직원이냐를 두고 아 그냥 플러그 확 빼버릴까요. 하는 알렉스를 말린건 의외로 차현이었다. 아 의외가 아닌가. 여자친구가 정의의 사도면 여러가지로 좀 피곤한 점이 있다. 

- 아무리 브라이언이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라 해도. 사람의 목숨은 100개든 한 개든 똑같이 중요합니다. 제가 이걸 굳이 지적을 해야됩니까. 

딱 부러지게 맞는 말을 하고, 일단 진짜 위험할 수 있으니까 굳이 여기들 있지 말고 밖으로 대피하란 스칼렛의 정리에 대부분의 직원들이 썰물 빠지듯 우르르 몰려나간 뒤에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자긴 자리를 지켜야 되겠단 말에 타미도 어쩔 수 없이 거기 남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럼 어떡해. 여자친구 버려? 차현은 은근 속이 좁아서, 이럴 때 혼자두고 나가면 대왕 삐져가지고 적어도 한 달은, 넌 내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거지 뭐. 이딴 소리를 씨부리며 사람 속을 긁어놓는다. 불안한 맘으로 폭발하기 1초전의 통돌이 세탁기 같은 소릴 내는 괴상한 기계를 주시하던 타미는 '땡' 하는 소리와 함께 문 근처에서 연기가 스멀대며 열리는걸 지켜보며, 세탁기가 아니라 오븐이었구나! 하는 웃지 못할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걸어나온 브라이언...!! 놀랍게도 아-무런 차이가 없이 들어갈 때의 그 브라이언이 걸어 나오는건 극적인 효과에 비해 굉장히 아쉬운 연출이었다. 궁금해서, 혹은 걱정되서 웅성대며 모여있던 소수의 사람들이 조심히 브라이언에게 다가가 어지러운지 휘청이는 그 몸을 부축했다. 

- 브라이언! 괜찮아요? 이거 터지는줄 알았어요. 건물 흔들리고 막 

- 하중이나 가속도는 다 고려가 되어있습니다. 근데 실패군요..

- 어떻게 되면 성공인데요? 브라이언이 사라져야 되는거에요? 

- 아니요 30년 전으로 돌아가는게 목표였는데, 여러분 표정만 봐도.. 네 

- 어...뭐 30년 전의 브라이언을 본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그런거 같네요? 20대에 굉장한 노안이셨던게 아니고서야. 

으음. 침중한 브라이언이 노트북과 패드를 챙겨들고 생각에 잠겨 미간을 찌푸리고 턱을 쓰다듬는 동안, 실패한 인체실험을 통해 일단 치사율은 낮은 것 같은 그 신기한 기구에 남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좋게 말하면 작은 엘리베이터만한, 나쁘게 말하면 이동식 화장실만한 작은 기계에 타미도 현도 구깃구깃 몸을 밀어넣고 별거 없는 안쪽 상황도, 수많은 버튼이 나열된 작은 터치패드가 달린 외부도, 망했다곤 해도 타임머신이라니까, 신기하잖아. 

- UI/UX 가 영 별로네. 역시 개발자 혼자 MVP를 만들면 이런 문제가 생긴다니까 

- 유저가 한 명인데, UI가 다 뭔 소용이야. 그리고, 차현 너도 개발자 출신이잖아 

- 나는 타고난 센스가 개발자의 DNA를 이겨낸 특수 케이스고 

- 너 옷 입는거 보면 글쎄. 센스가 있는건지 없는건지, 있다 못해 넘친게 문젠지. 

과유가 불급이죠 스칼렛. 특히 망사 달린 모자, 그거는 좀 버려주라. 이 많은 버튼이 다 왜 필요한걸까, 타임머신이면 그냥 언제로 세팅하고 스타트만 누르면 되는거 아닌가. 보통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실험실 보면 엄청 큰 빨간 버튼 쾅! 내려치는 단순한 인터페이스던데. 일하기 싫은 대표님 밑에 일하기 싫은 직원이 모이는, 윗물 아랫물 현상에 따라 이젠 위험한건 모르겠고 신기하고 재밌는 장난감 정도가 된 타임머신이 이 날의 화두로 올랐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당시에 남아있던 약 7명의 직원과 브라이언. 짜릿한 첫경험의 순간이 다행히 스불재의 당사자에게 닥친건 차라리 다행인 일이었다. 30년 전으로 돌아가도 20대인건 브라이언 혼자니까. 브라이언이 20대에 어땠는진 모르겠지만, 그때의 그 발언을 곱씹을 이벤트는 바로 다음날 발생했다. 아직 새로운 장난감은 치워지지 않았고, 저 흉물스러운 네모박스는 리모델링해서 옷장으로 쓸까요 따위의 건설적인 대화를 나누며 라운지에서 티타임을 하던중에. 

- 저 여러분. 

- 엑....? 브라이언? 염색하셨..어요? 아니 그보다. 뭐지 

- 그 흉물스러운 네모박스가 온전한 실패가 아니었던거 같습니다. 그....타이밍의 문제랄까요? 

대학생 인턴 쯤이나 될까 싶은 앳된 얼굴로, 50대의 브라이언 말투를 구사하는 젊은이가 나타났을 때는 다들 환호성을 질러댔다. 와 우리 미친 대표님이, 노벨상을 타려는가보다. 그거 시상식 스웨덴에서 하잖아. 거기서 워크샵 하면 안되나. 축하는 해야죠, 우리 '바.로' 임직원들이.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려는 부분도 없잖아 있지만. 

얼떨떨해 보이지만 입이 귀에 걸린 브라이언이 다시 50대로 돌아가는건 차차 하고, 뭐 부작용은 없는지 예기치 않은 신체변화는 없는지를 알아본다며 라운지 한구석에 기타를 들고 드러누울 땐, 다 좋았지. 축제 분위기에 젊은 브라이언 술퍼먹일 생각이나 하고. 그 주 내내 돌아갈 맘은 1도 없어 보이는 브라이언이, 젊어진 성대로 수요일엔 술이나 먹고~ 할 때 건배를 외쳐대는 임직원 틈에서 타미도 현도 킬킬대며 샷잔을 들이켰다. 

그리고 돌아온 목요일, 거의 사내 연예인의 입지에 오른 브라이언 출근하면 오늘은 무슨 '부작용 테스트'를 해볼까에 열중한 바로 임직원들의 열정은 마침내 짜게 식어 말라 비틀어지고 말았다. 도로 희끗한 새치 머리를 하고, 어제 들이부은 숙취로 인해 안색이 흙빛인 50대의 브라이언이 정문으로 들어섰을 때. 도저히, 심지어는 경쟁사인 유니콘 송이사가 쳐들어와 구름다리 위에서 타미 뺨을 후려갈겨도, 도저히 조용할 틈이 없던 바로에 정적이 깔렸다. 

- 지속시간이 퍽 짧네요...? 

- ...공식적인 실패군요. 뼈아프지만 가능성은 봤으니까요. 다시 도전하겠습니다. 

뭐 그러시든가 마시든가. 그럼 그렇지 타임머신이라니 말도 안되지. 빠르게 끓어오른만큼 빠르게 식어버린 실망감으로 사내 분위기가 축축 처지는 가운데, 입에 발린 소리로나마 화이팅을 해주는건 조셉 정도. 그렇게 해프닝으로 끝나버렸는줄 알았던 타임머신 소동은 머잖아 뭣같이 부활하여 화려하게 재점화의 불씨를 당겼다. 


- 이제 세 명 남았어. 그때 있던 우리 7명 중에... 30년 전이라 차라리 엘리는 태어나기도 전이었으니 망정이지 어쩔뻔 했냐고 이걸. 

- 근데 왜 브라이언은 기억을 다 가지고 20대가 됐다가, 고스란히 다 기억을 가지고 지금의 브라이언으로 오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냥 어릴때 그대로인걸까? 

- 스칼렛. 스칼렛은 지금 그게 궁금합니까. 스칼렛 30년 전이면 7살이지. 너 일곱살 때 사진 있어? 

- 뭐야. 갑자기 사진은 왜 

- 혹시 알아? 회사에서 바뀌기라도 해봐. 니 얼굴이라도 알아야, 주워다가 보관해놓든가 할거 아니야. 

- 타미. 이 이쁜 얼굴이 어디 가겠습니까. 보면 딱 알테니까 걱정마. 

....어렸을 때도 이랬니? 곱슬한 갈색 머리를 갸웃하고 샐쭉 올라간 입매가 된 타미의 8살을 짐작해보느라 스멀대는 광대가 자꾸 올라간 현은, 말투에 묻어난 황당함을 놓쳤다. 머가. 어렸을 때도 이렇게 자신감이 과했냐고. 뭐래 진짜 눈은 똥그레가지고 귀여워 죽겠네. 오늘따라 뾰족 내민 입술이 그 귀염방탱한 하얀 얼굴에서 혼자만 붉게 도드라져 나풀대는 속눈썹과 한 쌍으로 사람 애간장을 녹였다. 

- 타미 너야말로 사진있음 보내놔. 어렸을 때도 쬐끄맸냐? 쥐방울만해서 지금처럼 따따따 하면 되게- 

- 귀엽겠지. 

- 어

어느새 마세라티 보조석 근처를 헤매이는 손바닥의 온기가 타미의 허벅지를 스쳤다. 집중하지? 배타미는 이럴때 괜히 한 번 튕기는게 진짜 되게되게 귀여운데, 모르겠지 아마. 평생 몰랐음 좋겠다. 운전에 집중하라길래 고분고분 시선을 돌려 앞유리와 네비게이션을 오가는 시선 속에 손만 바빴다. 눈감고도, 는 좀 오바고 노래방 18번을 열창하면서도 찾아가는 퇴근길이나, 실제로 눈을 가리고도 구석구석 쬐끄만 애 자지러지게 만드는거나, 멀티태스크에 능해야 팀장 제치고 본부장 다는거지. 

- 집에.....가서 해! 

- 응? 뭐를 

그동안 당사자 둘 빼곤 사무실 복합기도 안다는 사내연애 어쩌고를 하는동안, 둘의 포지션은 내내 엎치락뒤치락 해왔으나 스칼렛의 능글맞음 지수는 꾸준히 상승곡선이었다. 처음엔 사무실에서 등만 좀 쓰다듬어도, 사무실이 쩌렁하게 타미 여긴 회삽니다!를 외치고 지혼자 귀가 빨개지는 스칼렛 귀여워 죽으려던 쪽은 타미였으나, 이게 점점 능숙해지더니 불꺼진 사무실 책상 위에 올려놓질 않나, 아직도 대낮처럼 훤한 퇴근길 차 안에서 손장난을 하질 않나. 

그치만 이쪽도 내처 당하고만 있질 않는다는게 이 둘 관계의 본질적인 핵심이라. 끙끙대던 타미는 깊숙히 조수석에 당겨 앉으며 장난질을 치는 손을 타고 올라갔다. 아주 다 벗고 다니시지. 어깨를 내놓은 타입의 얇은 상의로 드러난 쇄골을 엄지손가락으로 슥 훑다가 안으로 손을 밀어 넣자, 흠칫한 차현이 웅크리며 차체가 흔들렸다. 

- 뭐하는거야!! 위험하게 

- 그러게 집중하라고 했지. 

- 타미 미쳤어요? 

- 누가 먼저 시작했는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면서 허벅지를 찰싹 치고 돌아가려는 손을 붙들어 가볍게 깍지를 꼈다. 현아. 그니까 언니가 집에가서 하자고 했지. 이기지도 못할게? 쿡쿡 코를 찡그리고 웃으면서 손등에 입을 맞추고 이쪽을 보며 눈웃음을 치는 타미 표정에 열이 올랐다. 쟨 진짜 미쳤나봐. 아님 내가 미쳤나봐. 귀여워서 토할거 같애. 


저돌적으로 붙어오는 타미가 선을 잡으려는걸 어거지로 깔아눕힌 현이 아까부터 시선을 사로잡던 도톰한 입술부터 잡아먹을듯 안달을 내는 통에, 포지션이 뒤바뀌는 일은 어쨌거나 이날 밤엔 없었다. 욕구에 비해 처참한 그 체력부터 좀 어떻게 하고 달려들든가. 어깨가 으쓱해져서 콧노래를 부르며 저녁 준비한다 드로즈 차림으로 먼저 침대에서 일어난 차현을 붙들 힘도 없으니, 뭐 영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오늘따라 힘이 쭉쭉 빠지는게 왜 이렇게 피곤하지. 

-

- 타미 밥 먹어요. 우리 애인, 워낙 힘을 못쓰는거 같길래 장어 구웠어! 

- .. 

- 어? 야 자냐? 밥 먹고 자- 

으아ㅏ마악!! 속옷 차림으로 후다닥 코너로 도망간 현은 부엌 한쪽편에 걸려있는, 여태까진 거의 장식품에 가까웠던 앞치마를 확 채서 목에 걸었다. 척 봐도 알테니까 걱정말란 쪽은 나보단 쟤에 가깝네. 지금 타미보단 짙은 색이지만 검은색이라기엔 옅은 밤갈색 톤의 머리카락이며, 동글동글하고 오밀조밀한 하얀 얼굴은 지하철 타고 지나가면서 봐도 배타미였다. 살짝 의아한 표정에 갸웃하는 얼굴이 이쪽을 바라보는 순간 당황해 소릴 지른것도 잊고, 실실 웃음이 났다. 반쯤 벗고 실실 쪼개는 장신의 30대 후반 여성이 8세 여아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지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안돼요! 싫어요! 이러지 마세요! 

앙칼진 꼬마 배타미 목소리에 정신이 확 들었다. 8살의 쪼꼬미도 배타미는 배타미네. 그 조막만한 주먹을 꼭 쥐고, 보드라워 보이는 반곱슬의 머리를 찰랑이면서 나름 부리부리하게 결단력 있어 보이는 표정을 지어보인 어린 타미가 놀랄까 싶어 웃음기를 지우고 앞치마를 동여맸다. 

- 뭐가 안되는데? 

- 가까이 오지 마세요! 

- 으음. 가면 어떡할건데? 

- ...신고! 신고할거에요 

- 전화기는 있고? 

동그란 눈을 도륵도륵 굴려서 주변을 살피는걸, 팔짱을 끼고 가만히 바라보는데 우리 배팀장 불리하면 눈알 굴러가는 소리 나는거 그거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나보네. 일단 이번엔 타미가 애가 됐으니, 당장 내일은 연차든 반차든 쓴다 회사에 연락도 해야될 것 같고. 진을 쏙 빼논채로 애기가 됐으니 잘 구슬려서 밥도 좀 먹여야겠는데. 방쪽에 서있는 타미 눈에 서린 경계심 해결이 일단은 가장 급선무라 애써 친절한 높은 톤의 목소리를 지어냈다. 

- 타미야. 

- 그거 내 이름인데.. 누군데 이름 알아요? 

- 나? 나는 차현이고 엄마 친군데, 타미 아까 잘 때 엄마가 급한 일이 생기셔서 잠깐 이모랑 있으라고 내려주고 갔어. 

- 거짓말 

- 거짓말 아닌데? 타미 노란색 피아노 공책에 끼워놓은 네잎클로버도 보고 왔는데. 

어른 타미와 미리 맞춰둔 거짓말이, 초롱초롱한 큰 눈 가득 짙게 깔렸던 경계의 농도를 순식간에 낮추었다. 이 사태가 시작되고 꼬맹이가 되었던 본인들의 좌충우돌 환장 체험을 미리 공유해준 7인팟 선구자들의 혜안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의심많았던 본인의 콩알 시절 보물을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는 귀여운 배타미도. 

-

하필이면 저녁 메뉴가 메뉴인지라, 아가씨보단 아저씨에 가까운 어른 타미 입맛과는 아무래도 다를 애기를 번쩍 안아 식탁에 앉힌 현은 잠시 눈치를 좀 보았다. 너 이거 먹을 수 있겠어? 걱정스러운 질문이 도전같이 느껴졌는지 다부지게 고개를 끄덕이고, 좀 많이 큰 수저를 꼬나쥔 타미 표정이 결연했다. 

- 엄마가 남의 집에서 반찬투정 하는거 아니랬어요. 

- 어 으응. 그래도 먹기 힘들면 얘기해. 이모가 소세지 구워줄게. 

실례라 생각해서 부탁을 안하는건지, 아님 대충 입에 맞았는지는 몰라도 대체로 장어보단 소스와 맨밥을 주로 퍼먹은 타미는 자기 밥공기를 깨끗하게 비우곤 잘먹었습니다. 착실한 인사에 더해 다 먹은 밥공기를 싱크대까지 가져다놓는, 완벽한 어린이었다. 심지어 쬐끄만 입으로 웅냠냠 잘도먹는거 구경하느라 아직 식사중인 현을 기다려줄 태세로 돌아와 의자에 앉는데엔, 어쩌면 어른 타미에 비해서도 이쪽이 매너는 훨 나은거 같기도 하고. 

대체로 해주는 밥을 반주와 함께 먹고 소파로 가 뻗는 루틴의 게으른 베짱이 같은 저의 애인과 달리,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는걸 돕는다고 반찬통을 냉장고로 옮기거나 컵을 모아 싱크대에 가져다주고, 현이 빨아둔 행주로 식탁을 닦는 꼬마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건지. 볼수록 신통방통했다. 이게 타미의 어린시절이라는걸 머리로는 알겠는데, 그럼 어른인 넌 왜 그 모양인거야? 돌아올 배타미에게 물어봐야할 질문의 리스트를 머리속에 잘 기록해두었다. 얼룩이 그대로인 식탁은 이따가 타미 잘 때 다시 닦기로 하고. 

타미가 도와줘서 빨리 끝냈다 치하하는 말을 두고 쑥스러운지 딴청을 피우는 8살 어린이와 지금부터 잘 때까진 뭘해야할까를 고민하던 현은, 날도 좋은데 산책하자며 타미의 손을 잡고 나섰다. 당연하게도 어린이가 신을만한 신발은 없으니, 배타미가 편의점 갈 때 신는 삼선 쓰레빠에 양말을 두겹을 신겨 나가보는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타바닥, 타바닥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정겨웠다. 

나온 김에 마트가서 운동화도 하나 사신기고, 아이스크림도 하나씩 입에 물고 어린애 걸음에 맞춰 느릿느릿 동네를 한량마냥 거니는데 내내 죄끄만 머리통이 꽤나 바쁘게 움직였다. 지나가는 강아지와 현이 인사를 나누면 뒤에 숨어 있다가도 손바닥을 살짝 내밀어 보드라운 털을 살며시 건들여보기도 하고, 작게 마련된 공원 한켠에 운동 기구의 설명서를 유심히 읽어보기도 하고. 

- 타미는 놀이기구 타는거 좋아해? 내일 놀이공원갈래? 

- 그냥...보통? 작년 어린이날에 갔었는데 키 땜에 거의 못타서.. 

응 알어. 어른 타미에게도 맨날 쪼끄맣다고 놀리는 현은 평균신장은 웃도는 타미가 작단거에 그렇게 발끈했던 이유를 들은적이 있었다. 어렸을 땐 워낙 작았어서 초등학교 때까지도 거의 맨 앞줄에 앉아 땅꼬마 소리 듣고 그랬다고 했었다. 잘먹고 잘자고 부모님도 평균신장인데 키가 안커서 속상했었다며, 부모님이랑 놀이공원에 가도 고작 대관람차나 타고 그랬다던 어린시절의 이야기. 그래서 신발도 지금 어린이 신발치곤 굽이 두툼한걸 사 신기고 아래 깔창도 껴놨으니까, 뭐 대충 8세 평균 신장은 되지 않으려나 싶어, 애기 배타미 소원풀이나 좀 해주고 싶은 맘이 들었다. 

- 지금 가면 그래도 좀 탈 수 있는거 생겼을걸? 가보자 이모랑. 

- 이모는 일 안해요? 내일 평일인데. 

좋아서 방긋 헤사해진 얼굴이면서, 밉상맞은 소릴 하는건 틀림없이 배타미라 현은 킬킬 웃었다. 어 이모 백수야. 가서 돈은 타미가 내줘야 돼. 아 뭐야아- 나 돈 없어요!! 금방 심각해진 얼굴로 붙든 손을 잡아끄는 타미를 모른척 집쪽을 향했다. 

- 나도 몰라. 그 운동화 팔어 그럼. 

- 아아아-!! 이모 뭐야!! 

뭐긴 뭐야 니 애인이지 바보야. 


기대감과 불신, 걱정과 의심이 뒤섞인 타미와 함께 돌아와 대충 씻고 어른 타미의 옷으로 갈아입힌 현은 재워주겠다는걸 정색하고 거절하며 혼자 자겠다는 꼬맹이에게 안방을 내어주었다. 게스트룸은 아무래도 현관이랑 가까워 별 일 없겠지만 괜히 걱정스럽기도 하고, 애기 타미가 밤중에 화장실이라도 가고 싶으면 어쩌나 싶어서. 

쪼끄만게 진짜 낯선 곳에서 혼자 자도 괜찮은가 싶어 침대근처를 서성거리다, 안녕히 주무시란 축객령과 함께 방밖으로 쫓겨난 뒤에도 혹시라도 저를 찾을까 싶어 거실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다행인데 쫌 섭섭하기도 하고. 쟨 왤케 어렸을 때부터 독립적이고 난리야. 괜히 옆구리가 좀 시렵고 머쓱해 맥주나 한 캔 따다가 조용한 거실에 앉아 테라스로 보이는 달빛을 안주삼는 밤이 아주 한참만에 정말 텅 빈듯 했다. 

없으니까 보고싶네 배타미. 

-

아닌척 해도 어린애는 어린애라. 아침 일찍 자는 타미를 확인하고 얼른 다녀오려고 조용히 아침러닝을 뛰고 온 현은 현관 앞에 서서 원망이 가득해 울망이는 눈으로 어디갔었냐 묻는 물기어린 질문에 화다닥 놀라 뛰쳐들어와 타미를 끌어안고 사과의 말을 늘어놔야 했다. 이렇게 일찍 일어날 줄은 몰랐지. 왜 8세 아동이 아침 7시도 전에 일어난거야. 어른 타미가 출근하지 않는 날엔 암만 깨워도 10시 전엔 좀비모드라 방심 했던터라, 어린애가 아침에 일어나서 아무도 없는 상황에 당황했을게 미안했다. 

- 진짜 미안해. 타미 자고 있길래, 요 앞에 잠깐 운동만 하고 왔어. 미안 말하고 갔어야 됐는데. 많이 놀랐어? 

- 놀란거 아니거든요 

- 뻥치지 말고 타미야. 너 지금 눈 벌개. 

- 하품해서 그런거거든요? 

- 웃기시네. 그럼 미안하지 마? 

- ....소세지 구워줘요 

- 응 

꼬마딱지가 자존심은 쎄가지고. 곧 죽어도 너 땜에 운거 아니라는 타미에게 요청받은 소세지를 굽고, 원하는 익힘 정도- 노른자는 안 익었는데 위에가 질척이진 않는-의 에그프라이를 만들어 주고서야 온통 땀으로 젖은 운동복을 벗고 씻으러 갈 수 있었다. 계란 두 개와 소세지 한 팬을 우물우물 먹고 있는 타미 곁에 앉아, 베이글도 하나 구워서 들려주고 젖은 머릴 대충 털어 말리며 남은 소세지와 밥을 먹은 현도 브라이언에게 한 번 더 전화를 걸어 연차를 통보했다. 

에에. 이번엔 타미에요. 네 이건 말하자면 산재니까, 둘 다 연차소모는 없는걸로 알게요. 아 뭐 꼬으면 브라이언이 와서 애보시든가. 네에. 급한거 있음 전화하시구요. 롯x월드 갈거니까, 안 받으면 그냥 브라이언이 알아서 하시구요. 네. 

우는 소릴 하는 브라이언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종료버튼을 눌러 꺼버린 현은, 급 딱딱해진 목소리에 저의 이름이 등장해 눈이 둥그레진 타미에게 씩 웃어보였다. 

- 얼른 먹어 놀이공원 가야지


- 진짜 안타도 되겠어? 

- 이 담에 커서 또 오면 되죠. 

솜사탕으로 끈적해진 입가를 닦아주며 묻는 말에 대한 대꾸가 그리 큰 실망감은 없어보였다. 신밧드와 혹성탈출까진 어떻게 대충 억지를 부려서 탔는데, 후룸라이드에서 좌절된 꼼수가 아쉬웠다. 솜사탕에 츄러스를 격파하고 구슬아이스크림을 뜯고있는 타미가 떼를 썼으면, 어떻게든 가서 한 번 더 우겨볼랬는데 당사자는 그냥저냥 만족했는지 아님 그럴줄 알았는지 별반 반응이 없었다. 

그럼 바이킹 한 번 더 탈까? 하는 제안에 끄덕이는 타미와 남은 간식들을 천천히 먹고 평일이라 한산한 놀이공원을 걷던 현의 눈에 장난기가 돌았다. 

- 배부르지 않아? 여기 들렀다 갈래? 

- 툼 오브 호러?? 이게 뭐에요? 

- 산책코스 

입구부터 음산한데 산책코스라는 말에 갸우뚱 고개를 꺾고 의심스러워 하는 타미에게 현은 좀 더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산책코슨데 이제 중간중간에 쪼금 무서운거 있고 그런? 으음.. 고민스러워 하며 들여다보이지도 않는 입구에 고개를 빼고 기웃대는게, 겁은 많은데 총명한 푸들같아 웃음을 흘렸다. 씌워준 강아지 귀 머리띠가 퍽 잘 어울리는게 오늘 찍은 사진은 인화해서 배타미 책상 앞에 붙여놀 심산이었다. 

- 타미 어린이 겁먹었냐? 쫄리면 말고. 

- 겁 안나거든요?! 

- 그래? 그럼 가자. 

아주 가벼운 도발에 금방 넘어오는 8세 유아가 번복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휘적휘적 걷는 현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사악했다. 


혹.시.라.도! 무서우면 무섭다고 얘기하라고, 언제든지 밖으로 나갈 수 있으니 이모한테 말만 하라는 이죽거림은 마법처럼 타미를 옭아맸다. 그냥 무서워요. 한마디 하면 기다렸다는듯이 나가자고 할테지만 웃으면서 관찰하듯 내려다보는 시선이 은근슬쩍 열받는달까. 한참을 고개를 꺾어올려야 뵈는 얼굴이 씨익 시원한 미소를 짓고 이쪽을 내려다보면서 괜찮아? 입모양으로 물을 때마다, 타미는 현에게 붙들려있는 손이 아닌 반댓손으로 허벅지 쯤의 바짓단을 꾸깃꾸깃 구겨잡으며 축축해진 손마디 가득 힘을 주었다. 괜찮거든요. 

-

어이구 저놈의 승질머리.... 

움찔. 한 쬐깐한 몸뚱아리가 사시나무처럼 바르르 떨렸다가, 멈췄던 숨을 조심스럽게 겨우 내쉬더니 도무지 진도가 안나가는 발을, 그것도 겨우 반의 반쯤 내딛는걸 어슬렁어슬렁 뒤에서 쫓았다. 배타미라는 인격체의 정수는 8세에 이미 완성이 됐었던거네. 그러니 이겨먹는거, 우열을 가리는거, 아득바득 무슨 수를 쓰든간에 하겠다고 하는 일은 해야 직성이 풀릴 배본부장한테 니 그 가치관과 신념이 싫단 소리가 저를 다 부정하는 것 같았겠지. 당장에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은 동그란 눈에 힘을 가득 주고 앞을 있는 힘껏 쏘아보면서 입술을 꾹 물고 있는, 근데 다부지기는 커녕 겨우 한발 움직이면 강아지 머리띠의 귀가 펄럭펄럭. 아주 귀여워 죽겠는 얼굴을 어두운 실내의 조명을 틈타 맘껏 구경했다. 어깨에 힘 좀 빼구 살면 안되겠니 타미야. 니 독기어린 표정, 그것도 나름 귀엽긴 한데. 

- 타미 어린이. 그만 나갈래? 

- 왜요. 이모 쫄았어요? 

- ....끝까지 가겠다 이거지? 

- 괜찮은데 나는 

괜찮댄다. 고사리 같은 손에 땀이 흥건하다 못해 손목까지 축축하다 이 꼬마딱지야.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래? 그럼 이모 쪼- 앞에 가있을테니까 타미 천천히 올래? 묻는 말에 삐그덕대며 이쪽을 돌아본 눈빛에 원망이 한가득이었다. 뭐. 말을해. 잡았던 손을 슬몃 놓아두고, 팔짱을 끼고 내려다 보는데 이성과 본능이 치열한 다툼을 벌이는 중인 콩알만한 머리통이 바쁘게 주변을 훑어다녔다. 스르릉- 모퉁이 너머쪽에 쇠사슬 부딪치는 소리와 질끈 감았다 바닥을 쏘아보는 타미 어린이. 뭐라 중얼거리는데, 저주의 말인지 뭔진 모르겠지만 좋은 말 같진 않아서 슬그머니 반발짝 정도를 뒤로 물러났다. 

- 이모가 앞에 뭐 있는지 보고 있을테니까 천천히 와? 

- ........ 

- 무서우면 나가구 

- 안 무서워! 

- 응 그럼 간다?

 


따사로운 햇빛이 비치는 평화로운 어트랙션 앞 벤치. 타미는 바닐라 현은 초코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주섬주섬 입으로 옮겨담았다. 맛있냐. 살짝 짓누른 눈가를 손등으로 마구 부비는 손을 붙들어 내려두고, 아이스크림으로 식혀둔 손으로 살살 매만지며 찬바람을 불어준 현의 질문에 타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안무섭다며 왜 울었어. 

- 이모는 그럼 왜 때렸어요

- 난 무서웠는데? 어디다 못생긴 얼굴을 들이밀고 지....난리야. 

애기 앞에서 험한 말이 기어나올뻔 했던 입을 단속하느라, 습관처럼 자기 입을 가볍게 톡톡 내리치는 현의 대꾸에 타미는 코를 찡그리며 웃었다. 못생긴게 무서워요? 되게 신박한 말을 들은것마냥 눈을 반짝이는게, 조금 전 마지막 코스에 좀비떼 습격에서 정신 못 차리고 자지러지게 울음을 터뜨리던 충격이 가신듯 탄성 좋은 앳된 얼굴이 한가득 웃음을 머금었다. 어 무서워. 개못생겼어. 벤치에 등을 기대며 타미의 어깨를 가까이로 끌어당겨 자기쪽으로 기대게 한 현은 긴 다리를 꼬아 편하게 자셀 잡고 쏟아지는 햇살을 만끽했다. 

- 이모느은- 

- 어 

- 진짜 세다 

- 응 내가 다 이겨. 좀비 까짓거 별거 아니야. 

- 팼으면서 

- 어 이겼잖아 

- 쫓겨났으면서

- 야 쫓겨난게 아니라- 뭐 너 다시 들어갈래? 

이모땜에 못 들어가거든요. 한마디도 안 지는 코딱지가, 저 초코 한입만요. 대답을 듣지도 않고 숟가락을 휘두르는 걸 무의식중에 흘리지 않게 가까이로 붙여준 현은 작게 웃었다. 제법인데. 차현이 먹을걸 다 양보하게 만들고. 어른 타미한테 얘기해주면 의기양양해 할까, 아님 너 연하한테 약한거냐며 길길이 날뛸까. 어느게 더 맛있냐? 대답을 기다리는 척, 타미 아이스크림을 크게 한 입 파먹었다가 앙증맞은 주먹에 머리통을 쾅쾅 두드려 맞은 현의 킬킬거림이 평일의 한적한 놀이동산을 울렸다. 

퍼레이드를 꼭 봐야겠다 고집을 있는대로 부리는 타미와 시간을 때우느라, 현은 놀이공원 n번차 방문하면서도 한 번도 타본적이 없는 대관람차를 안 내리고 3번을 돌았다. 천천히 올라갈 때만 해도, 이모 저거 우리탄거! 이모 저기 우리 사진찍은데! 하나씩 짚어가며 현을 재촉하던 타미는 고점에 도달할 쯤엔 슬슬 접속이 끊겨가는 로보트마냥 눈이 감겼다. 이모오...퍼레이드에..공주님 나올까요오. 점차로 느려지는 질문들에 대꾸하느라 열심히 바로의 검색창을 들락이던 현의 무릎을 베고 새근대며 잠이드는 바람에, 한 바퀴 더 타겠다 손짓발짓 직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느긋해진 현이 잠이 든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정리해주고 살짝 안아 편하게 눕힌 뒤엔, 저물어 가는 노을을 보느라 한바퀴를 더 돌았다. 부스스 일어나 앉은 타미 말마따라, 햇님 오늘의 업무 끝나서 저녁먹을 시간 될 때까지. 


- 이모 막 되게 쎄다면서요 

- 야 이모가 쎈건 맞아. 근데 목마를 타고 그러는건 반칙이지 

- 그렇게 쎈 것도 아니네 뭐.

잘 안 돌아가는 뻐근한 목을 손으로 주무르며 한 손으로 운전중이던 현은, 밉상맞은 소리를 하는 타미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저도 모르게 울컥했다가, 애기한테 그럼 안되겠지 싶어 꾹꾹 누르는데 요 콩알이 어디서 이런 이쁜 소리를 배웠는지. 기대하고 기다리던 퍼레이드에 한껏 흥분해 깡총거리는 타미를 목 위에 올려둔 것도 저의 아이디어고, 목뼈를 부술 작정인지 방방 뛰는 꼬마가 떨어질까 싶어 온힘을 다해 붙드느라 등줄기가 다 뻣뻣하게 힘을 쓴 것도 자기가 자초한 일인데. 그래놓고 애기를 탓하는건 어른의 도리가 아니지 싶다가도, 퍼레이드 간다고 신나서 산 요술봉으로 대쉬보드를 툭툭 건들이며 틱틱대는 저 싸가지는 어쩜 좋지. 

배타미. 분위기를 잡고 낮게 부르자 옆눈으로 슬쩍 표정을 확인하는 어린 타미의 눈치에, 부러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어른 타미가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거나, 지 짜증에 못이겨서 간혹 못된 승질머리 부릴 때도 간간히 써먹는 방법이 면역이 없는 꼬마에겐 아무래도 더 잘 통하겠지. 긴장한 티가 역력해서, 왜요 조그맣게 대답한 타미가 스스로 항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현은 살짝 웃으며 한 템포를 쉬어 정적을 만들었다. 

- 집에 가서 얘기 좀 할까? 

- ...네에 

- 그럼 갈 때까지 무슨 얘기할지 생각해보기다? 

끄덕끄덕 하는 뒷통수를 가볍게 쓰다듬자 한숨을 폭 쉬는게, 이럴때면 차혀어어언 화났어? 팔을 붙들고 앵앵대면서 애교를 부리는 꼬리 아홉개 달린 으른 타미까지의 갭이 실감나는 바람에 터지는 웃음을 눌렀다. 이럴때 계속 화난척하고 있음 배타미가 막 몸으로 막. 이케저케 해주는데. 언제 돌아오냐 진짜. 

집으로 돌아가 하루왠종일 밖에서 노느라고 지친 타미를 씻길겸 같이 샤워를 하고, 뽀송한 옷으로 갈아입히고, 갈아입은 현은 몇 번이나 말을 붙이려고 우물쭈물 하는 애기 타미를 못본체하며 속으로 킬킬댔다. 밖에서는 세상 어른스럽고 속깊은, 상처받는 일이 있어도 한 잔 술에 털어내고 웃을 줄 아는 참된 이시대의 사회인 배타미는, 그래놓고 자기 앞에선 지 승질대로 바락 썽을 내기도 하고 그래놓곤 눈치는 또 오지게 보는 귀염방탱이 애인이기도 해서. 마치 사회화 되기 전, 진성 또라이 위에 직장인의 갑옷을 두르기 전 배타미가 저 콩알이라 생각하니까 솔직히는 그저 귀엽기만 했다. 

너 짜샤 이제 20년만 지나봐라, 너보다 더한 사람 승질머리 받아내느라 눈물 깨나 쏟을텐데. 

- 이모 

- 왜

- 아까는 미안해요

- 뭐가? 

음. 골똘하게 생각에 잠긴 타미가 이번엔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자기 마음을 정리하고 있는듯해 현은 말없이 타미의 키에 맞춰 몸을 낮추고 대답을 기다렸다. 이모한테 못되게 말한거? 나름대로는 최선의 답안인듯 미간에 주름까지 진 타미의 이마를 슥슥 펴고 동그랗고 보드라운 눈에 시선을 맞췄다. 

- 이모 아프게한거 미안한데 미안하다고 하기 쑥스러워서 그랬지. 

- 네

- 이모도 사실 못생겨서 무섭다고 한거 쑥스러워서 그랬어. 그냥 그게 갑자기 너무 가까이 와서 무서웠어. 

- 으응 

- 이제 서로 솔직하게 말하기로 할까? 

베시시 웃으며 끄덕인 타미가 목을 껴안는 바람에 쪼그리고 앉았던 무릎을 바닥에 댔다. 현이 이모 미안해요. 순순히 사과도 할 줄 아는 8세라니. 살짝 감격스러워 마주안고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는데, 아까 좀비 패버리는거 솔직히 쪼금 멋졌어요. 뺨에 간지럽게 닿은 목소리가 웃음기가 가득했다. 머? 어깨를 살짝 밀어 얼굴을 맞대자, 반쯤 물러나 아까 자기가 하던걸 따라하는지 오른손을 어설프게 휘두르며 까르르 웃는 타미 얼굴의 장난기를 보고서야, 이게 어른을 놀려먹는구나 뒤늦은 깨달음이 웃음과 함께 폭발적으로 터져나왔다. 이게 진짜- 쪼끄만 몸통을 손으로 붙들어 옆구리에 껴놓고 거실을 질주하는 동안, 으아아아아아-- 비명인지 웃음인지 죽겠다는 애기 타미랑 격하게 노느라 둘 다 세수도 다시 하구. 

아까부터 이미 반쯤 내려와있던 눈꼬리가 다 잠긴걸 보고, 이제 가서 자자며 집 안의 불을 소등하고 타미 손을 붙들고 방까지 데려다준 현은 안방에 타미를 눕히고 이부자리를 한 번 살폈다. 꿈뻑꿈뻑 졸린 눈으로 하는 양을 보다가, 잘자 타미. 이마에 살짝 입술을 댄 현이 이불을 끌어 올려줄 때는 순둥하게 끄덕이며 곧이라도 잠이 들 태세였는데. 오늘은 저도 피곤한 나머지 게스트룸에 이불을 펴던 현은, 실낱같은 목소리에 부스럭대던걸 멈추고 청각을 곤두세웠다. ....모. 현이 이모.. 그렇게 크지도 않은 집에서 어찌나 속닥이는지 겨우 들리는 목소리를 캐치하자마자 부리나케 안방으로 향했고. 

- 응 타미 왜? 

- 이모 같이 잘래요? 

- 혼자 잘거라며 

- 아까 놀이공원... 무서워요. 안돼요? 

- 아니 되지 왜 안돼. 나도 무서워. 

맘 바뀔까 스르륵 이불 속으로 미끌어져 들어가 작은 몸을 조심히 토닥이자 꿈질꿈질 움직여서 허리를 껴안은 손이 등 반만치도 못 미치고 잠옷을 꼭 쥐었다. 으으 찌끄매... 안녕히 주무세요. 웅얼웅얼 또 인사는 야무진 어린 타미가 고른 숨을 내쉴 때까지 부동자세로 토닥이던 현은 살며시 몸을 바로 눕히며 옆에 기대어 앉아 그 쬐끄만 몸체를 들여다보았다. 원래도 작은데 더 작아. 허공에 손을 펴 한뼘. 두뼘. 세어보기도 하고. 숨소리마저 작은 애기 타미의 귀여움을 만천하에 알리고픈 맘과 저만 알고 싶은 맘을 두고 싸우면서, 휴대폰 불빛이 타미에게 닿지 않게 각도를 조절한 현의 밤쇼핑이 한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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