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미가경]갑자기2
여름날
허벅지를 쓰다듬는 느릿하고 규칙적인 박자감이 나른하고 미적지근한 실내의 온도와 맞물려, 도로 막 졸음이 밀려들랑말랑 눈꺼풀이 무거웠다. 어우 진짜 졸려 죽겠는데. 딱히 뭘 같이 하는 것도 아니면서, 예민한 고양이 같은 송가경은 주말 오후에만 만끽할 수 있는 달디달고 달디단 낮잠 좀 한숨 때려보려고 하면 괜시리 심술을 놓았다. 그러고보니 헤어진 동안에 그거 하나 만큼은 꽤나 좋았던 것 같기도 했다. 이런말 하면 쫓겨나겠지. 하지만 여긴 내 집인데.
- 있잖아 선배
- 어
- 그거 알아?
- 몰라
왜저래 진짜. 포개져 누웠던 소파의 패브릭을 짚고 고갤 뒤로 돌려 한 번 째려보려니 한쪽으로만 오래 괴고 있던 목덜미에서 우드득- 뼛소리가 울려 머쓱했다. 부러진거 아니니. 허벅지를 맴돌던 손을 올려 뒷목을 살살 주무르는 서늘한 손끝까지 장난기가 가득했다. 짜증나. 짜증나는 송가경. 장난은 고사하고 농담 한마디 안 먹힐거 같은 얼굴을 해가지고 맨날천날 저러고 입꼬리를 올려대니까, 저 손가락 끝에 붉은물이 들어 열을 올리는게 아니냔 말이다. 귓바퀴 아래쯤에서 치렁한 머리카락이 닿을쯤까지를 오가는 송가경의 손길은 이젠 체온을 머금어 뜨듯해진 채 어깨 부근을 타고 내려왔다. 아니 어딜 이렇게 자연스럽게 내려와 이 사람이.
- 그래서 뭐를 아냐는건데
- ..깜빡이 좀 켜고 들어오지? 선배랑 나. 만약에 우리 동갑이고 같은 학교였잖아? 그럼 아마 출석번호 바로 붙어있었을거야
- 좀 만질게. 만약이 너무 많은거 아니야?
- 뭐 우리 학교도 가까웠던데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왜. 우리 이전에 전략기획실 같이 있을 땐 이름순으로 해도 생일 순으로 해도 선배가 내 다음이었잖아요.
- 별걸 다 기억해.
- 기억하지. 송가경을 내 뒤에 세우기가 어디 쉬운가?
뒤에? 그게 왜 뒤에야. 가경은 졸음에 겨워 발음도 어리버리 뭉개지던 타미의 눈에 반짝 돌아온 생기를 내려다보며 헛웃음을 켰다. 그렇게 이겨먹고 싶어가지고 용케도 10년을 넘게 후배 노릇을 했지 싶은 것도, 그 와중에 이름도 생일도 본인이 앞선다는 억지가 퍽 배타미스러워 귀여운 것도 반반을 섞어서.
- 그래서. 그렇게 많은 만약을 거쳐서라도 니 뒤에 좀 세워보고 싶다?
- 아니 그렇잖아. 배 다음에 올만한 성씨가 뭐가 있어요. 그 담은 송이지. 그리구 8월 8일이랑 10일 사이에 생일인 사람도. 뭐 얼마나 있겠어
- 변, 서, 선, 손,
- 그만해라
- 니가 물어봤잖아
살짝 긴장시켜 세웠던 몸을 도로 벌렁 드러눕혀 가슴팍에 뒷통수를 댄 타미의 샴푸향이 코 끝을 간질였다. 하여튼간에 눈치 코치 밥 말아먹어 놓고 로맨스라곤 약에 쓸래도 없는거. 진짜 어쩌다가 이런거에 내가 혹해가지고. 그 재수 드럽게 없는 눈에 좀 들어보겠다고 아주 아등바등. 내가 말을 안했지 서러워서 진짜. 종알종알 축경 하나 읊어놓듯 나오는 추임새를 보아하니 진짜 토라진건 아니고 시비는 좀 걸어보고 싶을 정도로 심심한 모양이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파는 강아지 인형마냥. 깽깽대고 짖든가, 앞으로 막 댐벼들던가, 그걸 한 번에 하는게 아니면, 전원이 꺼져버리는 이상하고 귀엽고 시끄러운 애.
- 지금 이게 왜 로맨스 영역인건데? 나랑 같이 고등학교 다녔으면, 뭐. 어떻게 해볼랬어?
- 관둬요
- 왜 더해봐. 궁금한데. 너 고등학생 땐 어땠는데. 지금보단 좀 적극적이고 그랬니? 같은반 애한테 뭐 고백같은거?도 해보고?
흥인지 픽인지 괴상한 콧소릴 낸 배타미가, 지금도 내가 꼬셔서 홀라당 넘어와놓고는 웃기시네. 대거리 하는 말을 가경은 굳이 반박하지 않았으나, 얜 진짜 몰라도 너무 모르지 싶어 턱주변이 당겼다. 지가 꼬셔? 동글동글한 눈을 한껏 접어 긴장감이 섞인 목소리로 잘부탁드린다던 그 꼬마 배타미 사원 시절부터 주구장창 그 뒷통수를 눈길로 쫓은건 이쪽이었는데도. 신입 답지 않게 당찬구석이 있으면서도, 어딘가 살살 눈치를 보는듯 살피는 주제에 허공에 눈빛만 마주쳐도 아닌척 고개를 훽 돌리고 딴청을 부리던 부사수.
한없이 당겨오는듯 틈을 보여주며 까르르 웃다가도, 슬그머니 다가서보려고 하면 맑은 눈 한가득 어쩐일이냐는 듯 모르쇠를 놓아 사람 속을 까맣게 태우던게 지가 꼬셨단다. 이제는 좀 넘어와봐라 밀고 당기고, 여지를 주다 못해 대놓고 애쓰는 그 눈물겨운 어필을 두고 ‘나도 선배처럼 될 수 있을까’ 뭐 그런 아련한 소리나 하던 햇병아리가. 내가 되긴. 내가 되면 어떡해. 나는 너랑 연애를 하겠다는데.
- 선배도 여고랬잖아. 인기 많았지? 근데 우리가 같은 학교 같은 반이었으면, 배타미- 그 담엔 송가경. 이렇게 출석번호 붙어있어서 나랑 짝이었을거 아니야. 그럼 선배 나한테 반했을걸
- …동갑한테 어필이 좀 되었던 모양이지
- 차현이 그러더라고. 그때의 송가경은 정의로웠고 멋있었다고. 세상을 바꿀것 같았다고. 그럼 나랑 분명히 죽이 잘 맞았을거란거지
- 글쎄
- 아이 왜. 봐. 들어봐요. 선배 무슨부였어
- 방송부
- 그때부터도 여론형성에 재능이 있었네
- 넌 뭐였는데
- 편집부. 펜은 칼보다 강한 법이에요 선배.
- 넌 그 사람 열받게 하는 글재주가 그때부터 재능이 있었고
킬킬대느라 온통 무게를 싣고 기댄 몸의 진동이 이쪽까지 넘어와 가슴팍이 웅웅 울렸다. 그건 맞다- 선뜻 인정하는 얄미운 뱃가죽을 끌어당겨 더 몸을 가깝게 붙였다. 그래서? 계속해봐. 좀 더 안정적으로 당겨안아 가만 어깨에 귀를 기대고 있자니, 타미의 목소리가 웅웅대고 그대로 몸을 타고 전달되는게 나른하니 기분이 좋아, 자기랑 같이 무슨 교내 두발자유 운동을 하네, 복장 규제니 학생 인권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네, 열띈 내용에는 대충 상관없이 어어 맞장구를 놓았다.
- 그랬을거라구
- 응
- 듣고 있는거 맞아요?
- 어. 계속해.
- 끝인데
- 아무말이나 더 해봐. 이러고 있으니까 소리가 울려서 재밌어.
아잇- 허벅지를 찰싹 치며 발끈하는 손을 잡아 앞으로 가두며 다리를 감아 가만히 미적지근한 체온을 휘감았다. 좋다. 뭐가. 너 그러고 난리치고 다니는거 옆에 있었을거.
- 너랑 생일파티도 같이하고, 니 옆자리에 앉아서 이렇게. 열내는 옆얼굴 보고 있었을거 말이야. 타미야
옆으로 함께 기대누운채 뺨을 쓰다듬는 가경의 허스키하게 잠긴 목소리 위로, 창가에 투두둑 빗방울 부딪치는 소리가 섞였다. 건조하고 낮은 가경의 목소리, 가느다랗고 섬세한 손길. 그리고 점차 거세지는 빗소리. 규칙적으로 창문을 때리는 물방울.
- 교복 입은 너.
- 변태
- 편집부실에서-
- 아 송가경 진짜!
숨소리가 섞인 웃음이 목덜미를 간질였다. 옆구리에 걸쳐졌던 손 끝이 옷자락을 파고들었다.
옆자리 타미야. 로맨스 영역이라고 한건 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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