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여진빛 단편] (...이겠죠) 재회

트이타 썰에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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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차를 몰아 출근하기엔 지나치게 가까운 길, 처음 오던 날엔 그렇게 스산하게 앙상한 가지만 흔들고 있더니 지금은 잎파리 방울방울 어제의 밤 비를 똑똑 흘리고 있는 파랗고 쨍한 초록의 길을 빛은 느긋하게 걸었다. 주머니에 쑤셔 넣어둔 고양이 간식봉투를 톡톡 건들이며, 누가 보면 산책 나온듯 어슬렁 어슬렁. 아직은 아침나절엔 걸을만한 온도인게 다행이었다. 빛에게나 그리고 이 곧게 뻗은 길의 실질적인 대장인 고양이 가족에게나. 어젯밤 비가 한바닥 내리치는 바람에, 과연 같은 시간에 나왔으려는가 싶어 평소보다도 더 밍기작댄 걸음걸이는 저 앞에 옹기종기 2열 종대로 모여서, 마치 이쪽은 눈치도 못챘다는듯 모르는척 옆구리를 싹싹 핥고 있는 모양새에 얼른 힘이 실렸다. 이제는 2년 하고도 반이 더 지나갔는데도 저 미묘한 거리감은 빛을 꽤 안심시키기도, 서운하게도 했으나 이젠 그 새초롬한 얼굴들 하나하나가 사진첩 한가득이었다. 

- 어젯밤에 괜찮았어? 비는 잘 피했니? 왕대가리 너만 먹지말구. 응? 얼굴 좀 치워봐.. 작은애. 너도 이리와 딴짓하지 말고. 

쪼그리고 앉아 주변으로 모여들어, 머리부터 들이밀어 종아리고 무릎이고 손이고 간에 꾹꾹 눌러대면서 젖은 털에 묻은 빗방울을 온통 다 묻혀대는 바람에 이제 막 입고 나온 슬렉스에 노란 털이 묻어났다. 그러든가 말든가. 각을 잡아 다림질을 해 옷걸이에 꼼꼼하게 걸어두었던 정복차림의 과거 언젠가의 세월은 이젠 다 남의 얘기 같앴다. 나름 교수랍시고 슬랙스를 입는 성의 정도는 보였으나, 그것도 공직에 오랜세월 몸 담고 있느라 생긴 마지막 겉치레 같은 것으로 이젠 슬슬 몸에 붙는 정장엔 손이 가질 않았다. 

- 오늘도 밤에 비온댔으니까 헤가리고 다니지 말구. 안전한대로 가있어. 저어기- 가면, 알지? 연구강의동. 거기와서 저녁먹고. 

손에 남은 간식이 없는걸 확실히 하고선,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곤 기지개 펴던 자세 그대로 대충 널부러진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막둥이. 다섯마리에게 늘어놓는 일장연설 틈으로 슬슬 부지런한 학생애들이 헤실대며 지나가다 경례를 올렸다. 좋은 아침입니다 겨수님~ 

- 어 그래. 수고해라. 

이번엔 들어줄 이도, 대답해줄 이도, 명확하건만 좀 전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 텐션으로 대충 손을 저은 최교수도 몸을 일으켰다. 빡빡할거 하나 없는 선택 심화 담당 교수가 매번 남들보다 출근이 이르게 된 아침 일정, 무사히 완료. 

방학이 코앞이라고 들뜬 캠퍼스 안의 활기는, 방학과는 별반 상관도 없을 뿐더러 계절감에 따라 피로도만 올라간 빛을 지치게 했다. 뭐 그렇게들 좋아서 저러는지. 경찰대 방학이래봐야 어디가서 실습을 하든 봉사를 하든, 뭐 딱히 수업듣고 과제하는거에 비해 별반 더 나을 것도 없지 않나. 덥기만 덥지. 도무지가 시험을 이따구로 봐놓고도 방학이라고 놀 생각들은 드는 모양이다. 성실하고 싹싹한 조교가 채점해 책상 위에 올려놓고 퇴근한 시험지 결과를 슥슥 넘겨보다보니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어 한숨 끝에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이거 이 돌대가리들을 어떻게 경찰 만들어서 졸업을 시켜. 이 꼬라지로 답안을 써놓고 사랑한댄다. 니나 사랑 많이 하세요. 어휴 정말. 글씨는 또 왜 이모양이야. 이것들이 진짜.

[범죄수사에 실무적 분석법 뿐만 아니라, 수사에 임하는 태도와 관점에 대한 마음가짐에 대해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어이가 없어 한쪽만 올라가 있던 입매가 스르륵 풀어져내렸다. 태도. 마음가짐. 2년 전에 받았다면, 이게 먹이는가 싶었을 한 줄의 글이 뱃속을 움켜쥐어 숨을 막았다가, 꽉 막혀있던 것을 머리위로 올려보내었다. 그 애가 생각나 이 답안지 주인의 얼굴을 필사적으로 떠올려 보았으나, 별도움은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엔 그 애가 너무나 많았다.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을 것 같이 이상한 애가, 분신술을 쓴 것 마냥 캠퍼스에 한가득이었다. 떡볶이 좀 사주라고 팔에 매달려 웃는, 이상한 인형을 들고와서 교수님 닮았다며 가방에 대롱대롱 매달아주는, 종강 총회에 교수님이 안오면 무슨 재미로 술을 마시냐 엉뚱한 소릴 하곤 슥 눈을 피해버리는, 청양고추도 씹어드실 것 같은데 이게 매우시냐며 뭘 자꾸만 불쑥 불쑥 내미는, 이 변방까지 밀려나 연구실에 처박힌 교수를 굳이 찾아다 따르고 싶다 가르쳐달라 눈을 빛내는, 그 애들에게서 빛은 여진을 보았다.

맑은 눈망울 안에 또렷한 덜여문 정의감, 목젖을 다 보이며 웃다가도 수줍은 목소리로 너무 멋있으시다며 공치사를 하는 황당한 유연함. 어쩌다 한 번씩 대민지원을 함께 나가면 쏟아지는 빗줄기에 휘청이는 자그마한 몸으로 목이 터져라 다른이의 안전을 부르짖는 목소리 같은데서도 내내 빛은 여진을 찾아내곤 등줄기에 힘을 주었다. 이쪽이 진짜 ‘댓가’가 아닐까. 그걸 피할 도리 없이 매일 같이 마주치는걸, 굳이 상처를 후벼파는 일이란걸 앳저녁에 알고 있었다.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모멸감과 서운함, 그 모든 감정을 다 덮을만큼의 자책이 그 자리에 멈춰서 숨을 골라야 할 만큼의 무게감이던 시절이 지나, 그 복잡다단함 감정들이 그리움이 되고 말 것은 잘 몰랐지만.

이 맘쯤인가. 연구실 창가에 기대 똑같은 옷들을 받쳐 입고 삼삼오오 무리지어 움직이는 애들을 건너보며 막 내린 커피를 한모금 넘겼다. 돌려보내줄까냐는 질문에 눈이나 도르륵 굴리던 어리바리 하던 그 애는 기어코 자기 방식대로 총경을 달았다던데. 자기도 모르게 스멀스멀 나오는 웃음을 창밖에 누가 볼새라 도로 뜨듯한 컵을 들어올렸다. 그런거 아니었어도 원하는 자리까지 갔을거라던 그때의 마지막 대화를 되새김질 했다. 증명하려는걸까. 나는 할 수 있다고? 왜 그렇게 스스로를 후려치느냔 말에 뺨을 맞은것 같은 사람은 나였는데도, 그 말을 한 지가 울어버리더니. 웃기는 애야.

한참 멀리서 으아아- 고함을 지르는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나 퍼뜩 고개를 든 빛은, 세차게 쏟아지기 시작한 소낙비에 반쯤 마신 컵을 창가에 내려두고 창밖을 살폈다. 많이 오는데. 회색 천이 너울대듯 바람결에 따라 빗줄기가 요동을 치고 있었다. 너무 많이 오는데. 의자에 걸쳐둔 얇고 긴 가디건을 대충 걸치며 흘끗 내다본 로비쪽엔 갑작스런 비에 뛰쳐들어온 애들이 얼핏 꼬물댔다.

- 최교수님! 비 엄청와요!!

- 나도 눈이 있다

- 잉 우산 없는데

- 빌려줄테니까 저 앞에, 초록색 박스-

- 고양이 급식소요? 네엥

빛의 손에 들린 우산을 넘겨 받아, 출동하겠습니다 충성. 너스레를 떠는 애가, 나랑 같이 갈 사람! 혼자 들면 쏟아져. 또 다른 희생양을 물색하는 것을 냅두고 목을 빼 화단쪽을 살폈다. 아이. 여 와있으라니까 또 밍기작대다 어디서 비맞고 있는 모양인데 얘들 이거.

- 교수님 저도 우산 좀 빌릴 수 있을까요.

- 나 쓸 것도 없다

- 야박하시네.

이 돌대가리들이 이쁘다 이쁘다 하니까 이제 아주 교수랑 맞먹으려고 들지. 한껏 몸을 빼 살피느라 어깨에 잔뜩 튄 빗방울을 털어내며, 뒤로 돌아선 빛은 다 똑같은 남색의 제복사이에 홀로 튀는 남색의 스트라이프에 시선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비를 다 피하지 못했는지 얼룩진 셔츠자락, 풀어진 단추와, 기억 속에 익숙한 출입증 끈을 타고 올라가던 시선이 영겁의 시간이 지나, 밍기작대며 배회하다간, 마주쳤다.

- 머리 잘랐네?

- 단장님은..새치 염색 하셔야겠어요

- 이 정도 나면 이제 새치라고 할 수 있나. 뭘 그렇게 빼입고 왔니

- 반팔 입은거 처음 뵈요

- 덥잖아

열댓명의 한여진 분신들 사이에 선 본체는, 못 본 사이 분신들과 어쩐지 소원해진 듯 했다. 쟤도 정장이 있긴 했구나. 그런 터무니 없는 소회만 머릿속에 떠돌아다녀, 어색하게 입술을 가만 못두고 눈을 굴리는 여진에게 도통 할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 그냥. 비가 와서요.

- 그러네. 비가 와서.

그쳤는데. 교수님 비 그쳤어요! 와글와글 하는 애들이 하나 둘 자릴 뜨는 웅성임 속에 입술을 물고 밖을 바라다보는 찡그린 눈이, 짧아진 머리카락에 멀쑥한 정장 차림에 여진이, 서있었다. 이 맘쯤 오는 소낙비처럼. 갑작스레, 어쩔 도리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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