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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4-2)
쓸데없는 참견이다. 하지만 리히터 맥닐은 그런 사람이었다. 쓸데없이 참견하고, 주변에 신경을 쓰고, 다른 이에게는 관심이 없다고 날을 세우는 인간에게도 굳이 말을 붙이러 오는 사람. 말꼬리를 잡고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따박따박 따지고 드는 상대와도 기꺼이 대화를 이어 가주는 사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유형의 인간.
"너무 편리하잖아. 운명 같은 게 정말로 존재하면."
그럼 우리가 노력하는 것도, 매일 아등바등 애를 쓰는 것도, 어떻게든 내일을 바꾸기 위해 고집을 부리는 것도, 전부 무의미해지잖아. 반복과 노력이 가장 쉬운 이유는 결과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미미하더라도, 무언가 달라진다. 그렇게 조금이나마 달라진 결말을 맞을 수 있다. 니므 레드몬드의 특기가 노력과 반복인 이유가 이것이다. 난 내가 직접 겪고 듣고 확인할 수 없다면, 알아채지 못해. 그게 무엇이든 간에.
“그건….”
그러나 사람 간의 관계라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로 가득하다는 리히터 맥닐의 대답을 부정할 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니므 레드몬드는 사람 간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아는 바가 평균에 비해 현저히 적었다. 쌓인 데이터 자체가 부족하고, 정보를 습득한들 그것을 처리할 만한 시스템 자체가 없는 사람인 탓이다. 그러니 진지하게 주장해 오는 상대에게 반박할 방법 따위 있을 리 없었다. 얘는 평소엔 바보면서, 왜 이럴 때만 말을 잘하는 거야? 말하지 않을 불만이 또 한 번 쌓였다.
사람은 예측할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이란 건 볼 수 없다. 진심을 숨기는 것은 쉽다. 설령 숨기지 못했어도, 자신의 진심을 부정하는 것은 더욱 쉽다. 그렇게 모든 것은 복잡해진다. 동시에 상반된 생각을 하기도 하는 모순적인 존재니까, 속마음을 파헤쳐 봐야 하등 의미가 없는 일이 너무 많다. 사실 난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마음을 전부 다 가지고 있었어, 같은 대답을 얻으면 그때는 정말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다.
나 자신도, 나와 다른 타인도 조절할 수 없다. 흘러가는 것은 막을 수도, 함부로 방향을 바꿀 수도 없다. 사람 간의 기대는 제멋대로다. 기대란 건 쉽게 무너지기 마련이라는 걸 외면한 채 멋대로 기대하고, 그것이 무너졌을 때 배신감을 느낀다. 자기 자신조차 제어하지 못하며 다른 이를 이해하려 하고, 가까워지려 하고, 서로의 영역을 공유하자는 억지를 부린다.
그럼에도.
니므 레드몬드는 이 모든 생각을 리히터 맥닐에게 그대로 말로 전할 수 없었다.
너는 저 모든 모순과 오만과 어리석은 실수를 낭만이라 일컫겠지.
나와 다른 너는, 나와 비슷하게 무책임하지만 나보다 요령 있는, 같은 양을 주고받고 싶을 뿐이라고 말하는, 적어도 수습은 할 줄 아는 너는, 내가 복잡하다는 이유로 눈 돌리고 의미가 없다고 애써 주장하는 모든 것에 이름을 부여할 것이다.
뿌리 내리진 못했을지언정, 제 튼튼한 두 다리를 믿는 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떠도는 나와 달리 방법을 찾기 위해 달려 나갈 테니까. 무모한 길을 향해 기꺼이 발을 내디딜 테니까. 발이 땅에 닿지도 않은 니므 레드몬드의 손을 쥐고도 달리기 시작한 리히터 맥닐은, 혼자라면 바다 끝까지라도 달려갔다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아는 게 적은 니므 레드몬드라도 그런 상대에게 저런 맥 빠지는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리고, 낭만은 꽤 마음에 들었다.
낭만이라는 표현 자체는, 저 복잡한 것들을 낭만이라 부르고 웃어버릴 수 있는 단순함은.
이윽고 멈춘 달리기에 가쁜 숨을 몰아쉬자, 리히터의 목소리가 귓전을 웅웅대며 울렸다. 긴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바보 주제에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하는 너를 향한 원망이 또 한 번 불쑥 솟았다. 전부 이런 식이었다. 리히터 맥닐은 내가 마주하기 싫어 애써 외면하고 있던 것들을 전부 내 눈앞에 가져왔다. 그런 짓을 저질렀다면 비겁하게 자신은 쏙 빠지기라도 할 것이지, 비난할 수도 없게 나와 그것을 함께 바라봤다. 그러고선 이런 식으로 묻는 것이다. 그래서, 네 진심은 어떤데?
이 곤란하고 성가신 남자애와 어쩌다 이런 관계가 되었는지 잠깐 떠올린다. 1학년, 입학식, 후플푸프, 의심과 가벼운 질타, 짧은 사과와 약속, 원망, 지저분한 접시와 넘치는 불만, 우정 열쇠고리의 차가운 감각, 달려 나갈 때면 들리는 짤랑이는 금속음, 그에 따라 느껴지는 존재감. 이 모든 것들은 아무런 논리적인 관계성도, 합당한 인과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후플푸프 애들에게 우정 열쇠고리를 왜 선물해 줬었지?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마침 배팅에 성공했었고, 토큰이 남았었고, 할 게 없었고….
그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 이게 운명이란 말이지? 네 주장에 따르면 말이야.
정체성과 본질, 소속감, 염증, 후플푸프, 마법, 머글. 내 대답은 늘 불분명했다. 아주 사소한 문제도, 그 망할 ‘정체성’에 연관되기만 하면 쉽사리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대답하는 대신 차라리 네게 묻고 싶었다. 너는 이런 생각은 안 해? 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해 화가 나는 일은 겪지 않아? 하지만 그래선 안 되겠지. 그리고 섣불리 질문했다간 리히터 맥닐과 이보다 더 많은 영역을 교환해야 할지 몰랐다. 게다가 니므 레드몬드는 지금, 한계치게 다다라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답하는 수밖에 없다. 눈을 질끈 감고, 나도 외면하던 내 진심을 타인인 네게 털어놓아야 한다.
“…난 평범한 머글로 살던 때로 돌아가고 싶어. 마법사니, 마녀니 하는 것들은 모르던 때로. 하지만 마법 사회에 어느 정도 속하게 된 이상 마법 사회와의 연결을 잃고 싶지도 않아. 런던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아일랜드의 역사를 안고 가고 싶어.”
그래도 넌 니므가 맞잖아. 후플푸프 기숙사의 니므 윈슬로 레드몬드.
리히터 맥닐의 그 별거 아닌, 너무나 단순해 부정할 구석도 없는 짧은 말이, 자신을 땅으로 끌어 내리는 것 같았다. 니므 윈슬로 레드몬드는 욕심쟁이였다. 어느 쪽도 버리지 못하고, 양쪽 모두를 안고 가고 싶어 하는 동시에 한 쪽을 정하지 못했을 때 감당해야 하는 허전함은 거부한다. 후플푸프 기숙사의 일원으로 소속감을 느끼게 된 것을 마음에 들어 하면서도, 그것을 드러내고자 하지 않고 이 소속감이 기간제 소속감이라는 점에 불안함을 느낀다. 모든 것을 누리며 그 무엇도 책임지지 않는 방식을 원한다. 불가능한 방식임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고 싶다며 홀로 떼를 쓴다.
두 사람분의 뜀박질 소리는 작은 속내 안에 담기기엔 너무나 거대했다. 흘러나온 것의 무게가 자꾸만 발을 묶었다. 제어할 수 없는 중력 대신, 확실한 인과를 가진 사람의 의지가 발휘하는 인력이 상상 이상으로 강했다. 이것이 좋은 것인지, 좋지 않은 것인지, 니므 레드몬드는 알 수 없었다.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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