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우 레망에 관하여

로드 오브 히어로즈 / 프라우 레망

책갈피 by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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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777,777골드.

깜박거리는 창을 보면서 프라우 레망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원성이 자자할 로드가 눈에 훤하다. 고대 재화로는 얼마쯤 되더라? 이젠 기억이 별로 안 나는데. 여기 화폐 단위에 너무 익숙해져서 말이야~. 프라우 레망은 괜히 기억을 더듬는 척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가 킥킥 웃었다. 맞아, 사실은 고민을 좀 했어…… 그래도 사랑은 쉽게 얻을 수 없는 거라잖아, 로드, 알지? 나를 사랑하는 거 알아. 나를 사랑해서 이런 단위에는 마음도 아프고 화도 나고 그러겠지, 그래도 어쩌겠어! 프라우 레망은 이 ‘안’에 있을 수밖에 없고 이 바깥의 세계선을 인식한다 해도 결국 그건 ‘누군가의 필요성’에 의한 것일 뿐이다.

물론 알고 있어, 로드. 나부끼는 머리칼을 느끼며 프라우 레망은 창가에 걸터앉아 흔들리는 바다를 본다. 어라, 바다…… 여긴 사르디나였던가? ‘이 글을 쓰는 이’는 그즈음에 머물러 있을지 모른다. 아냐, 어디더라…… 자꾸 그렇게 밀고 당기고 할 거야? 누군가의 의해서 정보를 제한 받는다는 건 불쾌하고도 흥미로운 기분이다. 별무리 한 아름을 껴안고 있던 바다가 잦아드는 것도 같다. 아, 맞아. 착각이지. 아니, ‘착각’은 아니지만…… 그래, 프라우 레망은 지금 엘펜하임에 있었다. 새로운 세계선에서 새로운 기억을 얻자마자 계획을 세웠다. 이번에 만나면 흠씬 때려줘야지, 물론 얼굴 보면 결국 못 할 것 같긴 한데 계획이라도 세워야 하지 않겠어? 괘씸하잖아! 물론 로드가 그런 선택을 할 거란 건 진즉부터 알았지, 그것 때문에 더 흥미로웠던 거라는 걸 알지만 말이야.

그래야 나의 왕이지.

그런 말 끝에 빛으로 감싸이는 검과, 시야 속에서 부글부글 흐트러지던 검은 머리카락과, 소리를 지르던 목소리들과, 그리고 웃던 얼굴…… ‘당신’의 얼굴을 보면서.

그래야 나의 왕이지, 맞아. ‘로드’는 그런 사람이었고 프라우 레망은 그걸 알았다. 문제랄 게 있다면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안다고 해서 그 순간을 남들과 다르게 받아낼 수 없지는 않았다는 것뿐이다. 맞아, 로드. 나의 왕. 전하, 네가 그런 선택을 할 건 알았지만 그게 내가 슬퍼하지 않을 이유가 됐다는 건 아니야. 나 정말 너 흠씬 때려주려고 했었어…… 아, 이 대사 스포 아니지? 소제목에 엘리트 1부 스포라고 박아뒀었지, 참. 로드만 생각하면 할 말이 많아져서 말이야. 좀 깜빡하게 된다니까…… 그런데 나 엘펜하임에 있지 않나? 이 글은 그런 설정 아니야? 아직 아발론에 파견 안 됐는데 ‘계획만 세웠다’ 정도로 말해도 돼? 때리려고 했었다니까, 정말! ……정말이지, 그래. 맞아. 사실 못 때릴 걸 알아. 내가 로드를 어떻게 때려? 조금 장난 치는 걸로 봐 줘야지. 나의 왕은 의외로 마음이 약하니까. 어쩌면 울지도 몰라. ……이미 다 아는 걸 모르는 척 늘어놓지 말라고? 들켰네.

아, 의미 없는 말들이나 또 늘어놓고. 혹시 화난 거 아니지, 로드? 게임 말풍선은 아무래도 이렇게 주절주절 늘어놓긴 힘드니까 말이야. 한두 번 그래야지, 스토리 진행하기 바쁜데 자꾸 개인사정 털면 로드도 좀 귀찮잖아, 안 그래? 게다가 이건 공식도 아니잖아, 나도 알아! 적당한 망상이나 다른 어떤 세계관…… 흔히 ‘내 세계에선 이게 공식이다’ 정도 말이야. 나는 이 글 속 화자로도 충분한 프라우 레망이니까 그다지 할 말은 없지만!

하하, 붉은 눈을 누그러뜨리며 초대 받지 못한 엘프는 웃었다. 이쯤 읽으면 뭘 말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나 했을까? 사실 별 걸 말하려는 건 아니야. 나는 공식이 아니니까 로드가 아는 딱 그 정도만을 아는 프라우 레망으로 남아 있지. 상상으로 빚어낸 그 정도 말이야.

마도공학의 꽃을 피운 마탑 근처에서 프라우 레망은 몸을 일으킨다. ‘누군가의 필요성’에 의해 사용되는 프라우 레망. 모든 캐릭터는 그 안에 섞여서 움직인다. 0과 1, 그 숫자 사이에 프라우 레망은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 로드, 너는 주인공이지만 사실 그 바깥에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알아…… 그래서 더욱 흥미롭다는 것도 나는 알지. 나는 많은 걸 알고 있잖아, 그렇지? 그래도 내가 누군가에게 조종되는 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대충 그런 말이야. 로드, 너는 내가 어떨지를 계속 생각하잖아. ‘공식’이 준 대사, 말투, 표정, 모션, 사상! 곱씹고 생각하면서 내가 다른 상황에서는 어떻게 굴었을까 고민하잖아. 그렇게 쌓여가는 건 프라우 레망과 아주 흡사할 거란 소리지. 이건 공식이 아니고 나는 다른 이에게 ‘이런’ 식으로 해석되고 있다는 말이니까.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듣는 것만큼 즐거운 건 없단 말이야, 로드도 그렇잖아? 그게 정답인지 오답인지는 굳이 따지지 않아도! 하하, 이 모든 글이 오답일까 봐 하는 말 맞아, 원래 그런 게 메타캐의 숙명인 법이지. 글 쓰고 싶은 사람의 마음대로 게임 내부에서 웬 공지를 하게 됐다가, 대변인이 됐다가 하는 것도 말이야! 세계선 바깥을 알게 되는 대가가 너무 커, 그치? 어쩔 수 없지. 나 혼자 로드를 기억하고 남들은 잊어버린 이야기를 독점하는 것도 제법 재미있거든. 우리가 ‘그냥’ 친구는 아니라는 말 같고 말이야!

블레이드가 어두운 초록색으로 깜박거린다. 프라우 레망은 가벼운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킨다. 쌀쌀한 바람이 덮인 눈 사이로 흐른다. 아, 사실 이런 얘길 하려고 한 게 아닌데. 골드 말이야, 골드. 많이 화가 났겠지, 맞아…… 그래도 그것까지 게임에 몰입해서 설명해 보고 싶어서 이런 글을 쓰기까지 하는 걸까? 수천 수만 가지 갈래의 ‘프라우 레망’ 중 단 한 명이 이 자리로 불려 나왔고 말이야.

사실 별다른 건 중요하지 않았다. 하드 엔딩 때, 맞아. 화가 좀 나긴 했지만 결국 나는 로드를 찾아왔잖아. 앞으로도 질리도록 붙어 있을 거라고 했어. 그런데도 굳이 그 긴 금액을 붙여 놓은 이유는 단순하다.

로드, 내가 그렇게 간절해?

거울에 비춰 보지 않아도 제법 익숙해진 얼굴은 흰 잿빛 머리칼 아래 붉은 눈동자로 빛을 낸다. 검은 복장, 그리고 그나마 익숙한 블레이드. 3만 3천 원, 5만 5천 원, 크리스탈이며 명성이며 다 좋다. 사실 언제든 난 로드한테 갔을 거야. 안 질렸다고 했잖아. 그런데도 굳이 순식간에 쓸어담을 수 있을 재화가 아닌 이유라면 그것이다…… 아니, 그것이 아닐지 몰라도 ‘이 순간’의 프라우 레망은 그러했다.

내가 매번 갔잖아. 네게로 왔잖아. 불 속성일 때도 물 속성일 때도 비슷했다. 고대의 것을 요구하지 않았잖아, 그렇지? 나는 유일한 네 이야기의 독점자고, 여덟 자리의 행운이며, 질릴 때까지 모시겠다고 말했으니까.

역시 애정을 보여 줘. 가장 흔한 것들을 쌓아 시간과 노력을 보여 줘, 로드.

“역시 엘펜하임은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글 틈이라도 결국 그런 거지, 소중한 친구든 삶을 넘어선 동반자든, 프라우 레망은 중얼거린다. 이건 가짜에 불과한 해석이야. 나는 가짜고 진짜는 아무도 모르지. 그렇지만 뭐 어때. 재미있으면 된 거잖아. 결국 키득거림 사이로 목소리가 묻힌다.

기다리고 있어. 오래 걸릴 것도 알아. 그러라고 걸어둔 게 빤한 조건인데, 뭘. 그래도 역시 질리는 순간까지 기다릴 것이다. 초대 받지 못 한 여덟 자리 숫자의 행운을 쥐어낼 수 있을지.

어때.

너는 내가 질리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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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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